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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532화


일장춘몽(一場春夢).

도연은 제갈세가에 거의 다다를 즈음 한 사내의 제지를 받았다. 사내라고 치기엔 다소 여려 보이는 인상이었으나 그 두 눈에 감추어진 매서움은 절대 무시할 수 없음을 내포하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긴장을 곧추세운 도연은 자신보다 두어 살 많아 보이는 사내에게 물었다.

“제 앞을 막아선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내는 말없이 미소했다. 그 모습에 인상을 찌푸린 도연이 다시 물어보려는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

“따라오너라.”

도연은 기가 막혔다. 밑도 끝도 없이 따라오라니. 더군다나 자신을 언제 봤다고 저리도 자신 있게 따라오라는 것일까? 당연히 도연은 움직이지 않았다.

“저는 당신을 모릅니다. 따라가야 할 이유라도 있습니까?”

사내는 멈추지 않고 말했다.

“그렇고 말고. 그 까불이가 네 주인이니 당연히 따라와야 하지 않겠느냐.”

흠칫한 도연의 발걸음은 어느새 사내를 뒤따르고 있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 주군의 성함을 물어볼 수 있는지요.”

사내가 수월하게 대답했다.

“그야 어렵지 않지. 동천이 아니더냐.”

안색을 굳힌 도연은 신비한 사내의 등뒤를 바라보며 물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그제야 사내가 멈추고 도연을 돌아보았다.

츠팟! 순간이었지만 도연은 무언가 꿰뚫는 듯한 안광이 찰나간 빛났다고 생각했다. 고요해진 사내가 입을 열었다.

“나는 능력이 되지 않는 녀석에게는 신분을 밝히지 않는다.”

한발 물러선 도연이 사내에게 다시 물었다.

“주군은… 어디에 계십니까.”

돌연 사내가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하!”

도연은 비웃음을 듣는 듯하여 기분이 언짢았으나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상대라는 것을 깨달았기에 침묵으로 일관했다. 웃음이 잦아든 사내는 말했다.

“이거 실례를 했군. 미리 주지시키지 못해 벌어진 이 상황에 그저 웃음이 흘러나와 웃었을 뿐이니 네 잘못은 없다. 허나, 잘 들어라. 나는 친하지도 않은 인간에게 질문을 듣는 것을 상당히 꺼려한다. 그러니 너는 이것만을 잘 새겨두면 된다. 그 까불이가 있는 곳을 내가 알고있고, 너와 두 계집은 나를 따라오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알겠느냐?”

“그… 으음!”

도연은 이 사내가 말한 두 계집이 소연과 화정이임을 알았지만 그녀들에 관해 질문을 할 수 없음을 깨닫고 하는 수 없이 입을 다물었다. 사내는 자신의 주의를 잘 이행한 도연이 기특했던지 그것에 관하여 대답해주었다.

“그녀들은 이 길로 곧장 다가오고 있으니 가면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대답을 마친 사내는 턱짓으로 자신을 따라 오라 명한 뒤 가벼운 몸놀림으로 앞서나갔다. 곧 있으면 보일 제갈세가의 앞에서 잠시 망설이던 도연은 무게가 사내 쪽으로 기울자 미련 없이 방향을 정했다. 과연, 얼마 걸어가지 않아 사람들의 틈새를 뚫고 신속하고 달려오는 그녀들이 보였다. 그들 중에서 제갈일위를 발견한 도연은 재빨리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첫째 도련님.”

“웃? 아아, 자네로군!”

기습인 줄 알고 자세를 잡을 뻔했던 제갈일위는 하마터면 쪽 먹을 뻔했다는 생각에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기쁨에 겨운 소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연아! 만나서 다행이야! 주인님은? 주인님은 찾았니?”

도연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하지만 계신 곳을 알았으니 같이 가자.”

“정말? 아아, 다행이야. 화정아, 너도 좋지? 어? 너 왜 갑자기 말이 없니?”

화정이는 도연과 동행한 사내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 쟤 싫어.”

덩달아 소연의 시선도 그곳으로 향했다.

“쟤… 라니?”

상대를 확인한 소연은 아무래도 도연과 같이 있는 듯 보이자 은근슬쩍 도연에게 물었다.

“도연아, 누구 시니?”

도연은 간단하게 설명했다.

“이분께서 주군이 계신 곳을 알고 계셔. 같이 가면 될 거야.”

그제야 소연의 안색이 풀어졌다.

“그렇구나. 안녕하세요, 소연이라 합니다. 그리고 얘는 화정이라고 하고요.”

사내는 차갑게 말했다.

“알고있다. 군말은 필요 없으니 가도록 하자.”

“네에.”

잘못한 것도 없는데 차가운 냉대를 받자 소연이 약간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제갈일위는 그것도 그것이지만 자신이 이 자리에서 없는 듯한 취급을 받게되자 참을 수 없어 사내의 앞길을 막았다.

“잠깐만. 당신은 처음 보는 얼굴이오만?”

신분을 밝히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사내의 반응은 여전히 차가울 따름이었다.

“나도 너와는 초면이다. 그것으로 족한 것이 아니겠느냐.”

“감히!”

아랫것의 취급을 받았다고 생각한 제갈일위가 분노의 일갈을 내지르자 사내가 돌연 한 손을 들어 제갈일위의 면전에 일직선상으로 올려놓았다. 그 빠르기는 제갈일위조차 반응하지 못할 정도여서 만일 그것이 살수였다면 목이 달아나도 두어 번은 달아났을 정도였다. 사내는 굳어버린 제갈일위를 지나치며 남겨진 일행들에게 말했다.

“무엇을 하느냐. 따라오지 않고.”

정신을 차린 소연이 먼저 반응했다.

“네? 네에. 가, 가자 화정아.”

화정이는 가기 싫은 내색을 비추었지만 그녀가 무슨 힘이 있겠는가. 주인이 가자고 하면 가는 거지. 소연은 화정이의 손을 잡아끌다 무엇이 생각났는지 제갈일위의 앞으로 다가가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저희들은 가겠사오니 안녕히 계십시오. 어쩌면 차후에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베풀어주신 성의에 감사를 드리겠습니다. 그럼.”

“…….”

심한 충격을 받은 듯 제갈일위가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것을 본 소연은 심히 염려스러웠지만 급한 것이 따로 있었기에 일행에게로 돌아갔다.

“크윽!”

그들이 사라지고 한참이 지난 후에야 이를 악문 제갈일위가 제대로 된 반응을 보였다. 그는 어느 정도 대성했다 생각한 자신의 무위가 이리도 허무하게 꺾여버리자 죽고만 싶어졌다. 하지만 그는 소인배가 아니었다. 충격은 받았으되 달게 받는 인재였던 것이다. 그는 붉게 충혈 된 눈으로 이미 사라져버린 사내의 뒤를 쫓았다.

“오냐, 좋다! 내 몇 백 배! 몇 천 배를 노력하여 네놈의 콧대를 꺾어주리라!”

마음으로는 인정하지만 내뱉는 말까지는 아직 아닌가보다. 제갈일위는 뜨겁게 타오르는 가슴을 부여잡고 본가로 돌아갔다. 후일 그의 회고록을 살펴보면

‘나는 끝끝내 그를 찾아내지 못했으나 그 날의 사건을 계기로 오늘날의 내가 만들어 졌기에 이렇게나마 글로서 감사를 드리고자 한다. 아마도 그 일이 없었다면 나의 이 회고록도 만들어지지 않았으리라.’

라고 기록된 것을 볼 수 있다. 이래서 세상은 한치 앞도 모르는 일이라고 하나보다.


“으음.”

동천은 꿈을 꾸었다. 아주 간만의 꿈이었다. 망상이야 자주 하지만 꿈속의 이야기가 이렇게 생생한 것은 정말로 오랜만이라 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의 그는 어린 아이였다. 그는 추연과 춘천과 하천을 모아놓고 세상을 살아가려면 눈치가 있어야 한다고 한참을 강의했다. 그러다 그는 눈치 없이 술 마신 박가 아저씨에게 까불다가 뒤지게 얻어 터졌다.

그로서는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평소 황룡미미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살았다고는 하나 어린 계집이 때리는 것과 어른이 때리는 정도가 천지차이일 것이 분명하니 그도 그럴 수밖에. 그래서 그는 그때 결심했다. 적어도 얻어맞지 않을 정도의 눈치를 기르겠다고. 그래서 그때의 결심이 오늘날의 그를 만들어놓았다. 거기에 강진구의 생각 없는 욕지거리가 한 몫 단단히 했고 말이다.

“하아아…….”

갑자기 한숨이 새어나오고 뜻 모를 아련함이 밀려왔다. 의아해진 그가 그 아련함의 근원지를 찾아가자 좀더 자라난 그가 흥겹게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알다시피 그의 노래는 의미 없는 즉흥적인 자작 노래이다. 그때의 그는 오솔길을 걷고 있었다. 그는 거기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깨어났다.

“아, 안 돼! 안…으엑? 아이고, 동천 죽는다!”

엄살 아닌 엄살을 떨어대자 바로 곁에서 고운 음성이 들려왔다.

“깨어나셨군요?”

동천은 그제야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재빨리 엄살을 갈무리했다. 그는 숨결을 고르며 물었다.

“여기는…….”

고운 음성이 곧바로 가르쳐주었다.

“소녀의 집이에요. 그 무뢰배들을 물리쳐 주셔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제가 모셔온 것입니다. 워낙 상처가 중하셨거든요.”

초점이 잡히고 드디어 상대를 바로 볼 수 있게 되었다. 동천은 자신이 생각했던 그 소녀이자 안도가 되는 한편 드러난 상처만 빼면 그다지 무리 없게 진기를 유통시킬 수가 있자 다시 한번 안도했다. 그는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실내를 둘러보았다. 제법 꾸며놓은 것이 가난에 허덕이는 계층은 아니었다. 동천은 온몸이 쑤심에도 안 그런 척 물었다.

“제가 얼마동안 이러고 있었던 겁니까?”

소녀가 살짝 웃었다.

“사흘 간 이러고 계셨어요.”

“에에? 사흘씩이나? 그럼 내 일행들은 어떻게 됐지?”

놀란 그가 자기 자신에게 반문하자 기회를 엿보고있었던 듯 소녀가 재빨리 말했다.

“어머, 지금 저에게 말을 놓으신 건가요?”

“예? 아니 그게 아니고…….”

동천은 말끝을 흐리며 소녀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생글거리며 웃는 것이 의외로 전혀 개의치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기왕에 말을 나눈다면 평대를 하는 것이 익숙했던 동천은 은근슬쩍 말을 바꾸었다.

“에, 그러니까 무릇 사람은 존칭으로 대하는 것보다 말을 놓는 것이 좀더 친해질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다고 생각해서 그랬는데……, 낭자의 의견은 어떠하시오?”

그녀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호호, 저야 상관없지요. 오히려 바랬다고도 할 수 있어요. 서로 같은 나이이니까.”

“같은 나이? 그걸 어떻게 압니…냐?”

동천의 바로 이어진 반말에 소녀가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흐음, 어떻게 알았을까? 라고 묻는다면 그거야말로 실례라고 할 수 있어. 사람들은 누구나 다 한가지쯤은 간직하고 싶은 비밀이 있는 법이거든.”

동천은 그녀가 자연스럽게 말을 놓는 걸보고 성격의 정도를 가늠할 수 있었다. 보통의 여인들이라면 절대 이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나름대로 그녀의 신분을 유추해 보려고도 해봤지만 골치가 아플 것 같아 미리 그만두었다.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리! 편하게 이야기하면 그만이지.’

동천도 거리낌없이 말했다.

“그래? 그럼 지금 네 나이가 몇인데?”

소녀는 당연한걸 묻는다는 얼굴로 살짝 눈을 흘겼다.

“얘는? 내 나이가 몇이긴 몇이야. 올해로 열 다섯이지.”

‘얼레? 진짜 나랑 같은 나이네?’

다소 신기하게 생각한 동천은 그녀의 위아래를 당당하게 훑어보더니 한마디 꺼냈다.

“나랑 나이가 같긴 한데, 어째 네가 더 연상으로 보인다?”

그녀는 동천을 따라 자신의 몸 이모저모를 살펴보았다.

“그런가? 난 나름대로 신경을 썼던 것인데…….”

무슨 소린가 싶어 동천이 물어보려는 찰나 그녀가 씩씩하게 말했다.

“뭐 괜찮아. 넌 연상을 좋아하잖아.”

동천은 펄쩍 뛰었다.

“그 무슨 소리야! 네가 지금 앞길이 창창한 나에게 노계(老鷄)들만 들러붙으라고 고사를 지내는 거야?”

흥분한 동천이 소리지르자 그녀는 귀가 따가운 듯 양 손가락으로 귀를 막았다. 행동과는 반대로 장난스럽게 얼굴을 찌푸린 소녀는 잠잠해지는 시기에 맞춰 막았던 손가락을 빼냈다.

“에이, 아닐걸? 생각해봐. 사정화도 연상이고, 소연도 연상이고, 화정이도 연상이고, 수련도 연상이고, 황룡미미도 연상이고……. 또 누가 있더라? 아? 제갈연도 연상이었고. 봐봐, 너와 관계된 모든 여인들은 다 연상이었다고.”

“윽? 그, 그건!”

순간 말문이 막힌 동천은 곧 안정을 되찾고 반격을 시도했다.

“하지만 그 연상들은 다 스치고 지나갈 여인들이야. 나는 누가 뭐라고 해도 나보다 나이 적은 애를 신부로 맞아들일 거라구!”

소녀는 동천에게 들릴 정도로 ‘에게∼.’ 라고 말한 뒤 자신만만하게 입을 열었다.

“다 알고 있는데 그렇게 숨길 것까지는 없어. 아마 네가 마음을 주고 있는 여인이 내가 열거한 여인들 중에 있을걸? 그렇지 않아?”

뜨끔한 동천이었지만 먼 산 바라보듯 엉뚱한 곳을 바라보며 딴소릴 했다.

“이야, 실내장식 괜찮게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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