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543화
문정은 태양도에서의 2년 동안 많은 변화를 겪었다. 그 중에서 제일 뚜렷한 변화는 신체의 변화였다. 기본적으로 외양은 갈색으로 그을린 피부를 들 수 있었고, 내부적으로는 내공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이 내부적인 변화가 중요했는데 그 연유를 설명하자면 이렇다. 그곳에서 한달 가량을 지내던 중 촌장과 무언가 속닥거린 장노삼이 뜻밖에도 무공을 가르쳐주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나마 그거 하나로 위안거리를 삼았는데 가르쳐주지 않는다고 하자 문정은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허나, 쥐를 궁지에 몰아도 살길 하나는 마련해줘야 물지 않듯, 대신에 촌장인 고성(高姓)에게 무공을 배우라고 말해주었다. 이에 울며 겨자 먹기로 고성을 찾아간 문정은 장노삼에게 받았던 절망보다 더한 절망감을 맛보게 된다. 이유인즉, 태양도의 무공은 타인에게 가르쳐줄 수 없으니 배우려거든 자신의 손녀와 약혼을 하라고 으름장을 놓았기 때문이다.
어처구니가 없고 황당하기가 그지없는 제안에 문정은 무려 열흘동안 고심의 나날을 보내야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약혼은 하되 결혼은 그의 나이 18세가 되어서 하는 것이었다. 나중에 중원으로 건너가면서 다시 오겠다고 말한 뒤 도망치려고 계획한 것이다.
고성은 너무 늦다며 15세로 낮추었지만 혹시나 해서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한 문정은 끝까지 제시했던 나이로 버티다가 결국엔 17세로 마무리를 지었다. 기분이 좋아진 고성은 손자사위가 될 미래의 재목감에게 아낌없는 투자를 했으며 환골탈태까지 시켜주어 무공의 빠른 진보를 도와주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건네준 화리혈현단(火鯉血炫丹) 6개를 그에게 전부 섭취시켰다. 천년 가량 묵은 태양화리로 만들어진 화리혈현단은 한알에 10년의 내공을 증진시켜주기에 문정은 대번에 일갑자의 내공을 얻게 되었고 더불어 장노삼을 따라 분화구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을 갖추게 되었다.
이렇듯 내부적으로 뛰어난 변화를 겪게된 문정은 태양도의 심법인 화연배종법(火連陪從法)의 운기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11살에 불과한 문정의 두 눈은 형형한 안광을 발하고 있었다.
“후우, 꽤 상쾌한데? 이제 이곳도 전혀 덥지가 않고.”
문정은 마을에서 제법 높은 축에 속한 언덕 위에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쯤 되면 나타나는 그림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왜소한 체구의 어린 소녀가 재빠르게 뛰어올라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고은비였다.
“가가! 문 가가!”
그녀는 처음에만 그랬지 잘 알고 지내면서부터(약혼한 다음날부터) 문정을 깍듯하게 오라버니의 취급(?)을 해주었다. 익숙해지는 것이 사람이라고, 시간이 흐르며 처음의 싸가지 없는 행동은 기억에서 사라졌고 그 대신 예의바르고 착한 은비로 인식이 되었다.
“그래, 여기야.”
그가 손을 흔들어주자 달려오는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이어지는 순서로 그에게 냉큼 안긴 은비는 할딱거리는 숨결을 진정시키며 들고 온 음식을 소쿠리에서 꺼내주었다.
“하아, 하아. 이거 먹어봐. 오늘 할아버지가 따온 과일들이야.”
이것도 익숙해진 것이지만 처음에 그녀가 시도 때도 없이 안겼을 땐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아무리 약혼을 했다지만 지가 언제 자신을 봐왔다고 덥석 안긴단 말인가. 그나마 아무에게나 안기는 것이 아니라서 안도가 되었으나 그것에 익숙해지는데 자그마치 반년이나 걸린 문정이었다.
“그래 알았어. 먹을 테니까 숨 좀 돌려. 너도 참, 천천히 와도 되는걸 왜 매일 이렇게 숨가쁘게 오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말투에 그녀가 샐쭉거렸다.
“다 알면서. 무엇 때문이겠어? 가가를 빨리 보려고 숨차게 달려온 거지.”
그녀가 토라지면 그 옛날의 성격이 간혹 나오기에 문정은 바로 수긍해주었다.
“물론 알지. 은비가 이 오빠를 사모하는 마음에 허겁지겁 달려온 것을 말야.”
은비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체, 사모는 무슨.”
말은 그래도 싫지만은 않은가 보다. 문정은 그녀가 가져온 과일을 한 입 베어 물며 물었다.
“아버님은?”
“아빠? 아빠는 사람들하고 물고기 잡으러 나가셨어. 오늘은 꽤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서 큰놈을 잡아오신다고 장담하던걸?”
“하여간 대단하셔. 전에 그 깊은 곳까지 따라 들어가려고 하다가 나는 숨 막혀 죽는 줄 알았는데.”
은비는 자랑스럽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당연하지. 누구 아빠인데. 마을에서 할아버지 다음으로 쌔서 아주 깊이깊이 들어가셔도 끄떡없는 분인걸? 아참? 이것도 먹어봐. 보기 드문 종자과일이야.”
알록달록한 것이 먹으면 몸에 지장이 있을 것 같아 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할아버지가 따온 것인데 설마하니 못 먹을걸 주셨을까. 살짝 씹어보자 달콤한 과즙이 흘러나왔다.
“우와, 대단히 단걸?”
“그지? 그지? 헤헤, 이것도 먹고 이것도 먹고 나하고 놀다가 집에 들어가자.”
문정은 자꾸자꾸 건네주는 과일들을 받아가며 곤란한 표정을 내비쳤다.
“과일 먹을 때까지는 괜찮은데 그 이후로는 안 돼. 어르신께 가봐야 하거든.”
은비는 뒤늦게 생각났는지 약간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맞다. 오늘이 그 날이구나. 그렇다면야…….”
그는 은비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어주었다.
“내가 갔다와서 많이 놀아줄게. 알았지?”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았어.”
두어 개의 과일을 더 먹고 자리에서 일어난 문정은 분화구 쪽으로 내달렸다. 2년 동안 계속 지나쳤던 길이기에 올라가는 동안은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문제는 내려가는 부분이었는데 계속 내공을 운용해야했기에 시간이 지체되면 될수록 힘에 부쳤다. 그나마 석동(石洞)으로 들어가야 온도가 조금 떨어졌기에 내공을 줄이고 익숙해질 때까지 버틸 수 있었다. 폐를 보호하고 장시간 있다보면 익숙해져서 종래에는 심법을 풀어도 되는 것이다.
‘읏차! 읏차!’
정해진 단단한 부분만을 밟아야 발 디딘 부분이 부서져 버리는 불운을 겪지 않게 된다. 처음에는 어른들의 보호를 받으며 왔다갔다했지만 이제는 혼자서도 무리가 없었기에 믿고 맡기는 상태였다. 문정은 입과 코를 막았던 손을 내리고 가뿐하게 숨을 쉬었다.
“헤헤, 다 왔다.”
중간 부분에 석동이 보이자 냉큼 그 안으로 들어갔다. 멀리 안쪽에서 희미한 불빛과 물 흘러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석동 안쪽의 미세한 부분들이 밖과 연결되어 있는지 숨을 쉬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콰과과과!”
세찬 물줄기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좀더 자세히 말하자면 물줄기가 벼랑 아래로 흘러 떨어져 내리는 소리였다. 이곳 용수천을 굳이 두 군데로 나누자면 물이 들어오는 곳과 빠져나가는 곳으로 나눌 수 있었는데 의문의 노인들인 화문과 암문이라는 자들은 들어오는 곳에 진을 치고 낚싯대를 들이미는 것을 일상생활로 삼았다. 한번은 말을 걸어보려고 가봤지만 집중하는 자세가 마치 사생결단을 내는 듯 보였기에 괜히 건들이기가 뭐해서(무서워서) 다시 돌아온 적이 있었다.
여하튼 문정은 그 반대쪽인 물줄기의 끝 쪽으로 걸어갔다. 꽤 걸어가야 하는 곳이라 조금 걸어가다가 속도를 냈다. 잠시 후 장노삼과 고성이 함께 있는 것이 보였다. 재빨리 다가간 그가 말을 건넸다.
“설마 벌써 끝난 것은 아니죠?”
고성이 먼저 반응했다.
“오오, 손녀사위 왔느냐? 거의 제 모습을 찾아간다. 이제 반 시진 후에 꺼내면 드디어 고대해왔던 도가 만들어질 것이니라.”
문정은 장노삼을 슬쩍 쳐다보았다. 장노삼은 집게로 거의 도(刀)라고 볼 수 있는 모양의 만년오행한철을 집고 용수천의 물살에 휩쓸려가지 않게 잡고있었다. 자신보고 저렇게 하라면 기겁을 할 만도 했건만 노인이라서 무뎌서 그런지, 아니면 그 정도로 대단한 공력을 자랑하는 것 때문인지, 장노삼은 여태껏 단 한번도 힘들어하는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일견 별것 아닌 듯 보이지만 용암과 스치고 흘러가는 물줄기여서 그 온도가 장난이 아니었던 것이다.
“허허, 조급한 기운이 스며들면 평범한 물건만도 못하는 것이니 너는 차분히 명상에나 잠겨 있거라.”
문정은 공손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어르신.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때였다.
“촤아악!”
“헛?”
“어엇?”
붉게 번들거리는 대형 물고기가 벼랑의 물줄기를 타고 올라와 장노삼의 만년오행한철을 물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이는 순식간에 이루어진 일이어서 누구 하나 놀라지 않은 이가 없었다. 그 중에서 가장 놀란 것은 고성이었다.
“끄억―? 앞이마의 역린(逆鱗)이 세, 세 개? 그렇다면 삼 천년 묵은 태양화리?”
“갈!”
장노삼은 단단한 기합소리와 함께 일장을 내질렀다.
“티잉!”
놀랍게도 튕겨 나갔다. 고성은 근처에 놔두었던 망치를 사용해 후려치며 재빨리 소리쳤다.
“소용없소! 이놈의 비늘은 하나 하나가 만년현철과 맞먹으니 앞이마의 역린을 두들겨 기절시켜야 하오!”
영리한 놈이었던지 재빨리 방향을 바꾸어 고성의 망치를 옆 이마로 맞게 했다. 장노삼은 집게로 잡고 있는 것이어서 태양화리의 엄청난 힘에 놓칠 것만 같자 하는 수 없이 손으로 도의 끝 부분을 잡았다.
“치이이이이!”
살이 익는 소리가 소름끼치게 들려왔다. 장노삼은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 형! 이 틈에 어서!”
장노삼의 행동에 감탄한 고성은 들고있던 망치를 바닥에 내던지더니 진기를 끌어 모아 전신에 골고루 퍼트렸다. 순간 화아악! 거리는 소리와 함께 석동의 내부가 불타오르듯 붉어졌고, 고성의 전신은 붉은 물결에 휩싸였다. 그는 일장을 내질렀다.
“흐아아압! 죽어라!”
“휘류류류! 퍼엉!”
“끄륵! 끄륵!”
정확히 정수리를 맞았건만 태양화리는 고통에 겨운 괴상한 신음소리만을 내뿜었다. 그러나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고 있어서 얼마 버티지 못할듯이 보였다.
‘우와! 대, 대단하다! 나도 대성하면 저렇게 되는 건가?’
문정이 놀라하고 전율을 금치 못하고있는데 느닷없이 검은 그림자 둘이 가세를 했다. 그들은 가공할 장력을 내뿜었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은 고성도 합세하여 공격해 들어갔다.
“쾅! 꽈꽝! 퍼엉!”
석동의 내부는 일대 장관을 연출했다. 눈부신 빛과 타오르는 불길이 난무하는 가운데 숨이 끊어진 태양화리가 물줄기에 휩쓸려 함몰되어가자 장노삼이 재빨리 다른 손으로 아가리를 잡고 복수를 하듯 거세게 바닥으로 던져 내쳤다.
“쿠웅―!”
묵직한 소리가 들렸다. 고성은 재빨리 장노삼의 오른손을 살폈다.
“장 형, 괜찮소이까?”
장노삼의 오른손은 징그러울 정도로 수포(水疱)들이 가득 차 올라있었지만 두어 번 쥐었다 펼 수 있는 것으로 보아 다행이 망가진 것은 아닌 듯 보였다.
“괜찮소. 그보다 이것에 태양화리의 이빨자국이 남았으니…….”
장노삼이 사람들의 이목을 생각하여 만년오행한철을 이것이라고 표현했다. 고성은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그렇구려. 이렇게 된 이상 기일이 훨씬 늘어날 듯 싶소.”
장노삼의 걱정은 그게 아니었던 듯 금새 밝아졌다.
“오오, 그렇다면 만드는 것에는 지장이 없다는 말씀이오?”
정기를 잃어버리지 않았을까 걱정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답변해준 고성은 태양화리의 근처에 서서 자신들을 바라보는 두 노인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이렇게 도와주셔서 한시름 놓았소이다. 내 힘으로는 적어도 한번은 더 때렸어야 가능했는데 그렇게 되었다면 일행의 손이 불구가 될 뻔했소.”
이런 곳에 살면서도 말끔한 차림을 유지하고있는 노인이 진한 안광을 뿌리며 간단하게 목례를 했다. 그는 화문(火門)이었다.
“아니외다. 의당 해야할 일을 했을 뿐이오. 그보다 이놈의 처리는 어떻게 하실 작정이오?”
고성은 뒤늦게 생각나는 바가 있었다.
“아? 그렇구려. 당신들은 이놈 때문에 왔다고 했었지?”
그러자 화문의 옆에서 이마가 훤칠히 까진 노인이 말했다. 그는 암문(暗門)이었다.
“그렇소. 우리는 입구에서만 기다리고 진을 치면 흘러들어 오는 놈을 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인데, 그 예상이 빗나가 반대쪽에서 나오는 바람에 급히 달려왔던 것이외다.”
아무리 열을 좋아하는 태양화리라 한들 용암에 닿게되면 타죽게 되어있다. 그랬기에 먹을 것은 다른 심해에서 해결하고 용암과 섞이고도 굳어버리지 않은 틈새의 물줄기를 따라 즐겨 이동한다. 그런 곳에 가장 적합한 곳이 이곳인 것은 맞았는데, 이 태양화리는 벌써 몇 백년 전부터 벼랑 아래에서 살고 있었다. 그러니 고작 십 년을 기다린들 나올 턱이 있나. 그렇다면 어째서 지금에야 나타나 만년오행한철을 물었던 것일까? 이유인즉 이렇다.
만년오행한철이 천하제일의 도로 탈바꿈하려고 하는 것은, 천지의 기운이 흘러나와 무가지보(無價之寶)의 탄생을 알리는 것과 마찬가지여서 그 기운이 최고조에 달하자 그것을 감지한 태양화리가 참지 못하고 튀어나와 물어버렸던 것이다. 영물은 영물을 알아본다고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허어, 그것 참! 사정은 잘 알겠지만 이놈의 가치가 가치인지라 양보할 수 없으니 이해해주시구려. 더군다나 직접 잡아들인 것은 여기 장 형이니 이야기를 잘 해보시던가.”
고성이 권한을 장노삼에게 물려주자 그들의 시선이 자연 장노삼에게로 몰려졌다. 장노삼은 동천을 생각하여 말했다.
“미안하지만 태양화리를 건네주는 것은 어렵겠소이다. 내 필요한 아이가 있어 그 녀석에 섭취시켜야겠소.”
순간 화문의 안광이 무섭게 터졌다. 그러나 목소리만은 차분했다.
“그냥 달라는 것이 아니오. 일단 우리가 예전에 잡은 1500년 정도의 태양화리를 건네 드리겠소. 그리고 천하절학(天下絶學)을 원한다면 줄 것이오, 재화를 원한다면 원 없이 드리리다.”
고성이 물었다.
“아니, 예전에 잡아놓은 태양화리를 어떻게 살려서 간수했단 말이오?”
화문은 어렵지 않게 대답해주었다.
“혹시, 더 고령의 놈과 짝짓기라도 할까 싶어 등뼈를 뚫어 열과 물에 강한 진운천잠사(盡澐天蠶絲)로 묶어둔 뒤 살려두었소이다.”
황당한 방법이자 고성이 혀를 내둘렀다.
“허어! 일단 태양화리로 변종을 일으킨 놈은 생식기능이 없어지는 법인데 고생을 하셨구려.”
화문은 비록 몰랐던 이야기이나, 고성이 이야기의 초점을 흐리는지라 상관 않고 장노삼에게 다시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