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55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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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님, 도착했어요.”
소연이 흔들어 깨우자 그거 가는 시간도 못 참고 잠을 자던 동천이 가늘게 눈을 떴다.
“쩝, 빨리도 도착했네.”
아쉬움에 입맛을 다신 동천은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행동을 주춤하더니, 무슨 이유에서인지 돌연 눈앞의 소연을 빤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소연은 영문을 몰랐기에 속으로만 생각했다.
‘어머, 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실까? 혹시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아니면… 아이, 부끄러워.’
동천은 그렇게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있는 소연에게 말했다.
“비켜. 니가 나가는 공간을 막고 있잖아.”
“예? 아앗, 그렇구나.”
화들짝 놀란 소연은 비키다 못해 재빨리 먼저 나간 뒤 창피함에 얼굴을 붉혔다. 동천은 쟤가 왜 저러나 했지만 그가 생각하고있는 소연은 원래 이상한 구석이 있는 시녀였기에 이해심이 많은 자신이 너그럽게 넘어가 주기로 했다. 밖에서 소전주의 도착을 기다리던 몇몇 하인들은 얼굴을 붉히며 먼저 나온 소연의 행동을 보고 ‘분명 소전주가 이상한 짓(?)을 했을 거야…….’ 라고 서로들 눈짓을 주고받았지만 감히 그것을 입밖에 내는 자들은 없었다.
“오셨습니까, 소전주님.”
어느새 다가온 20대 초 중반의 시녀가 다소곳이 인사를 올렸다. 동천은 그런 시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입을 열었다.
“너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다?”
시녀는 자신도 기억 못하는 소전주를 한 대 쥐어 패고 싶었지만 언제나 그렇듯 웃는 얼굴로 대해주었다.
“아마도 눈에 익으실 겁니다. 매향(梅香)이라고 합니다.”
동천이 기억을 더듬어 보려는 듯 약간 눈살을 찌푸렸다.
“매향이라고?”
“네, 소전주님.”
매향이가 깍듯하게 다시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으나 동천은 아랫것들을 기억해줄 만큼 정신적인 여유가 없는 인간이었다. 그는 매향이를 한번 쳐다보고 땅을 쳐다보고, 또 매향이를 한번 쳐다보고 하늘을 쳐다보고……. 무려 다섯 번 이상을 그러더니 마침내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쳤다.
“아하? 그때 예전에 이 몸께서 약주를 드셨을 때 바래다주었던 그 매향이?”
그 당시, 동천이 그녀에게 한 짓에 비하면(얼굴에 토한 일) 오래 걸리긴 했어도 생각해냈다는 것 자체가 중요했기에 매향이는 왠지 모를 보상심리가 작용하여 눈물이 글썽이는 것을 참았다.
“미천한 소녀를 기억하고 계시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음, 그래.”
일단 감사의 인사를 받고 난 동천이 말했다.
“근데 너 아직까지도 안 갈렸냐?”
‘윽? 이, 이 녀석이 말을 해도 꼭!’
안면을 구길 뻔한 매향이는 가까스로 마음을 가다 잡고 애써 웃는 낯으로 이야기했다.
“예, 예에. 다 전주님의 넓으신 은총으로 아직까지 소임을 다하고 있사옵니다.”
동천은 왼손을 들어 턱을 쓰다듬으며 매향이를 바라보았다.
“흐응… 그랬군. 그렇다면 이 몸이 가서 사부님께 한 말씀 드려봐야겠구나.”
동천의 태도가 어정쩡한지라 좋게 말해준다는 것인지, 아니면 그 반대로 말해준다는 것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소전주라는 인간을 알고 있기에 파랗게 질린 얼굴로 다가가 재빨리 동천을 붙잡았다.
“소전주님. 제가 미처 준비를 못했으나 약소하나마 성의입니다.”
동천은 매향이가 건네주는 작은 전낭을 관심 없는 척 받아들며 품속에 갈무리했다.
“어허, 안 그래도 되는데…….”
매향이는 그런 소전주의 태도에 이가 갈렸으나 그건 나중에 혼자 있을 때 생각해도 되는 문제였다. 그녀는 최대한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다.
“아닙니다. 소전주님께 그 동안 은혜를 입었으니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요. 오히려 부족하지는 않을까 소녀는 그것이 걱정될 따름입니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동천은 얼마나 부족하게 줬기에 저따위 소리를 하나 생각했다. 그러나 체면상 품속에 집어넣은 것을 다시 꺼내서 세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모자라다 생각하면 나중에 또 걷어들이자고 간단하게 마무리지었다.
“하하, 걱정하지 말거라. 이제 사부님께로 가보자.”
볼 일 끝났으니 안내나 하라는 소리였다. 눈치가 빨랐던 매향은 고개를 끄덕인 뒤 서둘러 동천을 안내했다. 조용히 뒤따라가던 소연은 자신의 신분상 계속 따라갈 수가 없기에 동천에게 물었다.
“저어, 주인님. 저는 어디에 있을까요?”
동천은 걷는 것을 멈추지 않고 소연을 힐끗 돌아보았다.
“너?”
소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에.”
그녀의 답변을 듣고 난 동천은 매향이에게 말했다.
“매향아, 이 몸을 바래다주고 난 뒤에 너는 저 아이와 잠시 대화를 나누며 있어주거라.”
매향이는 근엄한 척 명령하는 소전주의 행동이 가증스럽기가 그지없었으나 감히 거역하지 못하고 바로 대답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소전주님. 소녀의 거처에서 잠시 머물게 하겠으니 염려 놓으십시오.”
“음, 그래. 너라면 믿고 맡길 수 있겠구나.”
기왕 폼 잡은 김에 뒷짐까지 지고 걸어간 동천은 사부님의 거처에 다다르자 약간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매향이는 가볍게 문을 두들인 뒤 입을 열었다.
“전주님, 소전주님께서 오셨습니다.”
기다리고 있었는지 역천이 손수 문을 열어주었다.
“오오! 왔구나, 사랑스러운 제자야!”
동천은 대답했다.
“예, 사부님. 여기까지 오는데 너무도 시간이 긴 듯하여 애간장이 다 녹아날 지경이었습니다.”
뒤에서 듣고있던 소연은 침까지 흘리고 잤던 주인님을 보았기에 기가 찼지만 저런 소리 한두 번 듣는 것도 아니어서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그런 소연을 뒤로 한 채 안으로 들어간 동천은 역천이 먼저 식탁에 앉는 것을 기다린 뒤 예의를 갖추고 맞은 편에 앉았다.
“배고프지 않느냐, 제자야?”
사부의 물음에 동천이 답했다.
“저녁이라 시장하긴 하지만 참을만합니다.”
제법 의젓한 대답에 역천이 크게 감탄했다.
“크윽! 네가 세상에 나가 정말로 의젓하게 컸구나. 이 사부는 한없이 기쁘고 감개무량하도다. 흑흑, 그 동안 네가 그따위로 나가서… 가만. 그러고 보니까, 왜 이 사부에게 아무 언질도 없이 도망치듯 나갔던 것이지?”
잘 나가던 이야기가 갑자기 이상한 방향으로 쏠렸다.
‘윽? 이런 낭패를 봤나. 본교에 돌아왔다는 기쁨에 들떠서 미처 그것에 대비를 하지 못했네?’
내심 당황하면서도 재빨리 머리를 굴린 동천은 대강 변명거리를 생각해낸 뒤에 돌연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윤곽을 잡았기에 시간을 끌며 완성하려는 것이다.
“후우! 실은 제가 사부님의 곁을 말 없이 떠났던 것에는 크나큰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존경하옵고 또 존경하는 사부님과 떨어져있게 되는 상황을 저라고 좋아할 리가 있겠습니까? 아아, 혹시라도 그렇게 생각하셨다면 이 제자는 그저 슬퍼할 따름입니다.”
동천의 화술에 넘어간 역천은 약간(?)이나마 의심했던 눈길을 거둔 뒤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응? 험험! 누가 뭐라고 했더냐? 사랑스런 제자야, 이 사부는 너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으니 걱정말고 안심하거라. 내 어찌 사랑스런 제자인 너를 의심하겠느냐. 가만… 누가 진짜 그런 소릴 했던 겨? 누구야? 언놈이 그 따위 말을 지껄여? 엉?”
동천은 흥분한 역천을 재빨리 진정시키며 말했다.
“역시 사부님이십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계셨다니 제자는 기쁘옵니다.”
우쭐해진 역천이 흐뭇해진 얼굴로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훗! 그걸 이제야 알았다니……. 네가 아직도 멀었다는 증거니라. 뭐 어쨌든, 그 크나큰 이유가 무엇이었더냐.”
이미 모든 변명거리를 완성시킨 동천은 사부의 물음에 거리낌 없이 대처할 수가 있었다. 그전에 그는 일의 중요성을 인식시키려는 듯 괜히 주위를 둘러 본 후 품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내들었다.
“사부님, 우선 이것을 보아주십시오.”
역천은 의아해하는 얼굴로 제자가 건네주는 접어진 양피지를 받아들었다. 그는 검지와 중지 사이에 양피지를 껴 놓고 살짝 흔들어 보였다.
“제자야. 이게 뭐냐?”
동천은 사뭇 진지해진 표정으로 목소리를 낮추었다.
“펴보시면 놀라실 것입니다. 혹시라도 심장마비에 걸리실 수도 있으니 미리 대비를 해두십시오.”
피식 웃은 역천은 종이를 펴보았다.
“푸헤헤! 네가 나갔다 오더니 농담도 수준급으로 늘었구나. 이 위대하신 네 사부가 고작 양피지 따위에 놀랄 것…….”
양피지를 읽다가 뒷말을 흐린 역천은 잠깐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뒤이어 눈까지 비볐다.
“어라? 이 내용이… 에이! 설마.”
믿기 힘든 내용이라 존재 자체를 부정해버린 역천은 다시 한번 읽은 뒤에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어라? 이 내용이… 에이! 설마.”
동천이 한몫 거들었다.
“설마가 아닌데요.”
“…….”
잠시 침묵한 역천은 두어 번 재차 확인해 읽은 다음에야 확실한 반응을 보였다.
“커헉―? 이, 이것은?”
콰당!
너무도 놀란 역천은 의자에 앉은 채로 나자빠졌다.
“사부님, 괜찮으십니까?”
동천이 자리에서 일어나 부축해주려 했으나 그보다 일찍 일어난 역천은 양피지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한 채 동천에게 물었다.
“제, 제자야. 이거… 이거 어디에서 난 것이냐?”
동천은 이제부터 어설픈 거짓말이 통하지 않기에 고개를 약간 틀어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덕분에 사부인 역천과 자연스레 눈을 마주치지 않게 된 동천은 어느 정도 안심하고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실은 이 제자가 본교를 떠나기 바로 전날 두 번의 꿈을 꾸었습니다.”
역천의 시선이 그제야 양피지에서 떠났다.
“꿈? 꿈을 꾸었다고?”
동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사부님. 바로 예지몽이었습니다.”
“헉? 예지몽이라면 본문의 전대 사조님들 중에서도 극히 드물게 몇몇 분들에게만 발휘되었다던 그 예지력의 연장선상이 아니더냐!”
놀란 역천은 양피지를 떨어트릴 뻔했고 슬그머니 그것을 눈여겨본 동천은 남몰래 씨익 웃었다.
‘아아, 역시 이 몸의 연기력은 탁월하도다! 사부님을 속이는 것이 좀 찜찜하긴 하지만 이것이 다 선의의 거짓말이니 사부님께서도 이해해줄 것이 분명하도다.’
어느새 자기합리화를 시킨 동천이 얼른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사부님. 그 날 초저녁… 왠지 모르게 피곤하여 잠이 들고 말았는데 고고한 학자풍의 선인(仙人)께서 다가와 이르시길, 모든 고생은 오직 그 하나만을 위해 안배된 것이니 너는 아무도 모르게 세상에 나가 그 하나를 얻어 돌아오너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옵니까? 제자는 영문을 몰라 무슨 소리냐고 물었죠. 그러자 선인께서는 네가 알아도 천기에 어긋나는 것이니 너는 세상에 나가면 그뿐이니라. 라고 말씀하시더군요? 깨어보니 꿈이었는데 당연히 이 제자가 그거 한번 꾸었다고 옳다구나! 본교를 나설 멍청이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 그렇지! 어느 분의 제자인데 그따위 꿈 한번에 가출하다시피 세상 밖으로 나가겠느냐. 그래서?”
동천은 맞장구를 쳐준 뒤 바로 재촉하는 사부의 궁금증을 외면하지 않았다.
“예, 그래서 제 스스로 콧방귀를 뀐 다음 다시 잠이 들었는데 또다시 꿈에서 나타난 선인께서 이 제자의 마음을 알고 꾸짖으시더니 놀랍게도 다음 날의 미래를 보여주시더군요. 그 날에 누구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게 되며 또 어떠한 사건이 벌어지는지 말입니다. 그 하루동안의 모든 미래를 보여준 선인께서는 이 제자의 행로가 결정된 만큼 거역하게 된다면 천벌을 받을 것이니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고 정해진 운명의 날이 올 때까지 조용히 세상에 나가 떠돌라고 말씀하셨죠. 다시 깨어난 본 제자는 반신반의할 수밖에 없었지만 아침이 되면서부터 겪게되는 모든 일들이 전날 밤 꿈속의 내용들과 일치할 때마다 경악과 전율을 금치 못했습니다. 아아! 시간이 점점 흘러갈수록 제자는 깊은 고뇌와 갈등에 빠지게 되었고, 결국 존경하는 사부님께서도 알고 계시다시피 불충인줄은 아오나 눈물을 머금고 아무 말 없이 본교를 떠났던 것입니다.”
역천은 정말 괴사가 아닐 수 없었으나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분명 자신의 유파에는 감지력과 더불어 예지력까지 꾸었던 몇몇 조사님들이 계셨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머리로는 이해했어도 그동안의 서운함이 남달랐기에 역천은 굳이 그 심정을 감추지 않고 말했다.
“어허! 어허! 아무리 그렇다해도 어찌 이 사부 몰래 그렇게 떠났었단 말이더냐!”
그런 사부의 반응에 자신의 연기력이 좀 모자랐다고 생각한 동천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한 표정을 만든 뒤 훌쩍거리며 말을 이었다.
“크윽, 이 제자가 꿈의 경고를 무시하다가 천벌을 받는 것은 두렵지 않으나 혹여 그 여파가 사부님께 누가 되지는 않을까 싶어… 그러한 못난 행동을 벌였던 것이니, 부디 너그러우신 사부님께서는 이 불충한 제자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흑흑!”
마침내 그가 눈물까지 쏟아내자 코끝이 시큰해진 역천은 살며시 동천을 보듬어 안아 주었다.
“오오, 갸륵한지고! 이 몸을 생각하는 네 마음이 하늘에 닿았음이니라!”
“사부님!”
“오냐오냐. 이제 모든 것이 원점으로 되돌아왔으니 너는 그만 울음을 그치도록 하거라.”
역천은 자신의 품에 파고들며 울어대는 제자의 등을 토닥여주며 그간에 쌓아왔던 서운한 마음들을 깨끗이 날려버리리라 다짐했다. 그것을 감지한 동천은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왜냐하면 간만에 우는 것이라서 그런지 눈물이 안 나왔기 때문이다.
‘흐아, 큰일날 뻔했네. 이것도 해버릇하지 않으니까 눈물을 짜내기도 힘들잖아? 안되겠다. 오늘부터 다시 특훈에 돌입해야지.’
그렇게 한심한 다짐을 하고 사부의 품에서 떨어진 동천은 눈물을 닦는 척하며 겸손하게 말했다.
“훌쩍, 이 제자는 자상하신 사부님의 말씀에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역천은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몸은 원래 자상함으로 대변되는 존재였으니 이제와 몸둘 바를 몰라할 필요는 없느니라. 자자, 그건 그렇다 치고 어떠한 경유를 통해 이 천마지가(天魔之歌)를 습득하게 되었는지 자세히 이야기해보거라.”
“예, 사부님.”
한 고비를 넘겨 다행이라고 생각한 동천은 천마지가를 습득하게 된 경위에 관해서는 솔직하게 이야기해주었다. 그도 그럴 것이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이 문제만큼은 거짓말로 넘어갈 만큼 허술하게 받아들여질 리가 만무했기 때문이다. 물론 사부인 역천의 경우는 어찌어찌 넘어간다 쳐도 물건의 특성상 최상층까지 보고되는 관계로 거짓말은 통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니 아무리 간큰 동천이라지만 거짓말에도 때와 장소를 구분해야 했던 것이다.
“뭐이? 어떠한 여인네에게 이것을 건네 받은 기억은 있는데 그 여인네의 인상착의와 그 밖의 다른 모든 것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고?”
동천은 역시나 황당한 표정을 짓는 사부에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네, 사부님. 오죽 했으면 현실주의자인 본 제자가 귀신을 만났다 하여 며칠 간을 횡설수설하고 지냈겠습니까. 지금이야 안정이 되었다지만 제 증상을 곁에서 지켜보았던 소연이나 도연의 말을 들어보신다면 그때의 심각성을 충분히 해하려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으음! 기억이 안 난다? 그것도 부가적인 것을 뺀 알맹이만? 으으음―!”
한껏 얼굴을 찌푸린 역천은 아랫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동천은 수긍하는 대답을 해주려다 사부님이 심각하게 생각하시는 듯하여 방해가 되지 않게끔 침묵해주었다.
‘저렇게 심각한 표정의 사부님은 또 처음 보네? 뭐, 그것은 곧 이 몸께서 건네준 천마지가가 그 정도의 값어치는 한다는 소리겠지? 후후, 역시 난 평범한 천재야.’
별로 수긍하고싶지 않은 생각을 마친 동천은 계속 고민하는 중인 사부를 쳐다보았다. 좀더 자세히 말하자면 역천이 계속 만지작거리고 있는 천마지가를 바라보는 것이다.
‘쩝, 아깝다. 나중에 한몫 단단히 잡을 수 있는 물건이었는데…….’
천마지가를 내놓게 되어 아쉽기는 했으나 외울 건 이미 다 외웠고, 그것으로 인해 그가 가출했던 사건을 깨끗하게 무마시킬 수가 있었으니 동천으로서는 그다지 밑지는 장사가 아니었다. 그때의 가출 동기를 생각하니까 전혀 상관도 없는 도자기를 깨놓고 도망쳤던 일이 떠올라서 화가 나기는 했지만 따지고 보면 그 일로 인하여 얻게 된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므로 그 부분에 관해서는 금방 진정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보다 훨씬 문제시되는 부분이 있었으니 바로 배고픔이었다. 자신은 슬슬 배가 고파 오는데 사부인 역천이 식사를 할 기미조차 안 보이자 남몰래 안달이 났던 것이다.
“저어, 사부님. 식사는…….”
“허어! 중요한 기억이 생각나질 않는다?”
동천은 말이 잘렸지만 사부의 물음이었기에 바로 대답해주었다.
“예, 사부님. 어찌된 영문인지 도통 기억이 나질 않사옵니다. 그것보다 저녁식사는…….”
“그것 참 괴이한 일이로구나. 제자야. 이리와 보거라. 진찰을 좀 해봐야겠구나.”
동천은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날 정도로 배가 고팠으나 사부가 진찰을 해봐야겠다는 데 그가 어쩌겠는가. 사부의 말에 따라야지. 역천은 다가온 제자의 머리를 양손으로 가볍게 쥐고 당부했다.
“통증이 심하거나 은근히 아픈 곳이 느껴지면 바로 그 순간 반응을 보이거라. 알겠느냐?”
동천은 대답했다.
“예, 사부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제자의 대답을 듣고 난 역천은 정수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어린아이의 손을 만져주듯 부드럽고 조심스레 넓게 퍼져가며 톡톡 건드리기 시작했다. 일견 장난하듯 보였지만 날카로운 내력을 침투시켜 사람의 기억을 제어하는 혈들을 자극하는 중이었다. 비 숙련자가 이런 행위를 했을 시에는 멀쩡한 사람 하나 병신 만들 수가 있을 정도의 위험한 시술방법이었기에 아무리 숙련자라 할지라도 신중에 신중함을 기해야하는 진찰법이었다.
“제자야, 별 느낌이 없더냐?”
동천은 느끼는 그대로 말해주었다.
“예, 별 느낌은 없고 간혹 시원하다는 느낌만 듭니다. 아, 거기?”
흠칫한 역천이 급히 물었다.
“으음? 여기?”
동천은 사부가 손 움직임을 멈추고 눌러 보이자 고개를 끄덕였다.
“네, 거기가 특히 시원합니다.”
“…….”
잠시 후 진찰은 끝났고 딱히 이상한 점을 발견 못한 역천은 하고싶은 말들이 많았으나 천마지가는 급한 사안이었기에 함께 하는 식사는 후일로 미루자고 말했다. 동천은 정말로 배가 고팠지만 사태의 중요성을 알고있기에 그저 조용히 사부의 말씀을 받아들였다. 역천은 서둘러 나갔고 홀로 남게 된 동천은 주린 배를 부여잡고 다시 암한문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주인님, 도착했어요. 내리세요.”
“그, 그래? 꿀꺽! 그럼 어서 가야지?”
먹을 거 생각에 벌써부터 입안에 침이 한가득 고인 동천은 재빨리 마차에서 내렸다. 헌데, 소연의 안내를 받아 걸어가던 그가 갑자기 고개를 획 돌리더니 다시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소연은 영문을 몰라 뒤쫓아갔지만 워낙에 빠른 몸놀림이어서 멀찌감치 뒤떨어지고야 말았다. 곧 주인님의 뒤를 따라 붙은 소연은 마차 뒤에서 열나게 얻어맞고 있는 마부를 발견할 수 있었다.
“크엑―! 사, 살려줍쇼!”
“이 씨필아! 좀더 빨리 왔어야지! 니 땜시 뱃가죽이 등에 붙었잖아! 니 죽을래? 아 짱나!”
소연은 주인님의 화풀이용으로 죄 없는 마부 아저씨만 죽어나자 급히 주인님의 허리를 붙잡고 구타를 말렸다.
“주, 주인님! 그만 하세요. 물론 배가 고프신데 늦게 도착하여 화가 나시긴 하겠지만 이렇게 때릴 시간에 저녁을 드시는 쪽이 훨씬 값진 일이라고 사료되오니 어서 들어가셔서 맛난 저녁을 드세요. 예?”
듣기에 귀가 솔깃한 이야기이자 동천이 때리는 것을 멈추었다.
“아? 그렇구나! 음음! 네 말이 옳다. 어서 가자.”
그제야 안도한 소연이 떨어져서 대답했다.
“예, 주인님.”
동천은 소연의 안내를 받아 안쪽으로 들어갔고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진 후 몇몇 하인들이 몰려들어 다친 마부를 들쳐업고 약전에 데려다주었는데, 그 마부의 치료를 담당했던 어느 의원은 처참하게 당한 상처부위들을 살펴 보더니 상당히 악질적인 전문가의 짓이라고 떠벌렸다가 그 악질적인 전문가가 누구인지를 듣고 나서는 바로 말을 바꾸어 칭찬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의원은 그 날 후로 왕따를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