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56화
소연은 그도 그렇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의 주인인 동천을 깎아내리는 수련의 말에 왠지 모를 거부감을 느꼈다.
“수련아. 그래도 성격이 더럽다는 것은 좀.. 그렇지 않니?”
소연의 말에 수련은 놀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고치고는 두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익살맞게 웃었다.
“호호호….”
수련이 야릇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자 소연은 좀 무안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눈빛의 의미를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왜… 그래?”
“지금 동천 편드는 거죠? 그쵸? 호호! 언니 혹시.. 동천한테 마음이 있는 거 아니에요?”
말도 안 되는 말에 소연은 화들짝 놀랐다.
“어머나? 너, 그게 무슨 말이니? 말도 안 돼!!”
수련은 당황해하는 소연의 모습에 고소(苦笑)를 지었다.
“호호호! 그냥, 해본 말이에요. 왜 그렇게 놀라요? 언니.. 정말로 동천한테 마음이 있던 거예요?”
“아냐, 아냐! 나는 그저.. 음.. 그러니까, 소전주님이 내 주인님이니까 시녀의 입장에서 듣기에 거북해서 한 말이었어! 정말이라고!”
행동 하나하나에 과장된 표현으로 극구 부인하는 소연을 바라보며, 수련은 속으로 재밌는 것을 알았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계속 말장난을 하면 자신은 재미있겠지만, 언니가 무안할 거라고 생각한 수련은 그만하기로 했다.
“네.. 네.. 제가 그냥, 해본 말이에요. 아가씨께서는 부르시지 않으셨다고 하니까, 어떻게 된 건지 알아보러나 가요.”
일단 화제(話題)가 바뀌자 소연은 옳다구나하고, 수련의 말에 긍정을 표했다.
“그래! 얼른, 가보자.”
천장에 매달린 긴 나무 대롱들을 쳐다보며 계속 밖으로 걸어나가던 둘은 동굴 밖에서 옆 벽면을 타고, 박혀있던 대롱들 중 하나가 파손되어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어? 언니, 이것 좀 보세요. 흐응.. 부서졌네?”
“어머나? 정말..? 이건 썩어서 그런 게 아닐 것 같은데?”
한참을 이리저리 쳐다보던 둘은 어떠한 동물이 갉아 먹었다는 것으로 추정했다. 떨어진 나무 조각을 들고 심각하게 쳐다보던 소연은 하나의 결론을 내렸다.
“수련아. 이거… 아무래도 쥐가 갉아 먹은 것 같아. 내가 전에 쥐가 갉아먹은 걸 본 적이 있거든? 근데, 그 자국이 이거하고 똑같았어. 맞아, 분명해!”
수련은 쥐라는 말을 듣고, 혐오스럽다는 표정으로 양쪽 팔을 마구 비벼댔다.
“으으으…. 쥐라구요..? 왕소름이야…”
아마도 수련은 쥐를 굉장히 싫어하는 것 같았다. 뭐, 여자치고 쥐를 무서워하지 않는 여자는 없을 테지만.. 하지만, 종종 예외도 있는 법이었다.
“너, 쥐를 무서워 하는구나?”
수련은 무슨 소리냐는 듯이 소연을 쳐다봤다.
“예? 그러면 언니는 안 무서워요?”
소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는 예전에 쥐를 잡아본 적도 있었는데, 좀 징그럽기는 했지만 무섭지는 않았어.”
소연의 말을 들은 수련은 초롱초롱한 눈에서 존경(尊敬)의 빛을 발하며 소연을 쳐다봤다. 그런 시선에 소연은 왠지 우쭐해지는 것을 느꼈다.
“언니.. 대단해요.”
“호호. 뭐, 그런 걸 가지고…”
수련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니에요. 정말이라구요. 그, 으으으… 징그러운 쥐를 아무렇지도 않게 잡았다니… 그건 정말로 대단한 거라구요.”
“얘. 너무 분위기 띄우지 마. 별것도 아니것 갖고..”
동천이 들었으면, 정말로 별거 아닌 얘기였을 것이다..
“놀고, 먹고. 먹고, 놀고. 놀고, 먹고. 먹고, 놀고. 야… 이렇게 좋은 곳에서 사는 나는 정말로 행운아야..”
동천은 지금, 침대에 옆으로 길게 누워서 한 손으로는 왼쪽 턱을 받치고 있고 다른 한 손으로는 용독경을 읽다가, 입이 심심해지면 쌓아놓은 과일들을 하나씩 집어먹고 있었다.
“흥~흥..! 이 늙은이, 아는 것도 많네? 대가리에 뭐가 들었길래 이렇게 두꺼운 책에 빽빽이 써놓은 거야? 그나마 내가 인내심이 강하고, 머리가 좋아서 읽고 있는 거지만… 아마, 다른 새끼들이 봤으면 대가리가 뽀개지고 말았을 거야. 히히히!”
동천이 인내심이 강하다는 것은 알다시피 뻥이지만, 머리가 좋다는 것은 완전한 뻥이 아니었다. 외우는 것은 깊이 몰두하지 않고도 서너 번만 훑어보면, 쉽게 외울 수 있을 정도였다. 대개 그런 사람이라면 천재(天才)나 기재(奇才) 정도로 불릴 수 있겠지만, 동천이 그렇게 불릴 수 없던 이유는 응용력(應用力)의 부족이었다. 동천은 외우는 것 이상의 것은 생각해내지 못하는 특이한 체질의 아이였던 것이다.
“쳇! 그러고 보니, 그 늙은이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궁금하네? 음.. 아마, 내가 도와준 것을 감사히 여기며 돌아갔을 거야. 아암.. 그렇고 말고. 고마워하지 않으면 그게 인간이야?”
만약에 이런 소리를 항광이 들었다면, 당장에 쫓아와서 모가지를 비틀어 버렸을 게 뻔했다. 그렇게 자아도취(自我陶醉)에 빠져있던 동천은 건너방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리자, 소연이 들어왔다는 것을 알았다.
“응? 지금 왔나 보네? 그나저나, 저 계집애가 도대체 어디를 쏘다니는 거야? 야! 소연아!”
쥐를 무서워하지 않는다고 부러워하던 수련의 말을 듣고, 기분 좋게 돌아온 소연은 동천이 부르는 소리가 들리자 방 안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와서 동천에게로 갔다.
“부르셨… 어. 요..”
처음에는 웃으며 들어오던 소연은 잠깐 안색을 미묘하게 바꾸더니, 종래에는 어색한 듯이 동천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그런 소연의 행동에 동천이 궁금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야! 왜 그래?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냐?”
소연이 동천을 쳐다보지 못하는 이유는 아까 수련의 말 때문이었다. 방금 들어올 때는 몰랐는데, 막상 동천의 얼굴을 보자, 수련이 자기보고 동천을 좋아하냐는 말이 생각났던 것이었다. 그런 생각 때문에 머릿속이 혼란해진 소연은 동천이 자신의 생각을 모른다는 것이 확실함에도 불구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이상야릇한 느낌 때문에 동천을 마주하기가 그랬던 것이었다.
‘아.. 왜 갑자기 이런 생각이 나는 거지?’
아무리 동천이 궁금해해도 절대로 말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생각에 어쩔 줄 몰라 하던 소연은 대충 얼버무리려 했다.
“아니예.. 요… 그게 아니고..”
그러나 누가 봐도 이상한 소연의 행동에 호기심 많은 동천이 그냥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야! 너, 내가 누구냐?”
“예? 그게.. 약왕전의 소전주님 이시죠…”
동천은 고개를 저었다.
“쯧쯧쯧… 그게 아니고, 내가 너의 뭐냐는 말이야.”
“아..? 당연히.. 저의 주인님 이시죠….”
소연이 자신의 말을 알아듣자, 동천은 자리에서 일어난 후 자세를 바로 잡았다.
“좋아. 그러면, 내 하녀인 네가 나한테 숨기는 게 있어서야 되겠냐?”
“당연히.. 안 되죠..”
‘아차?’
말을 하고 난 소연은 큰일 났다는 것을 알았다. 이 상황에 걸맞은 변명을 다급히 생각해내야 하는데, 잔머리에 약했던 소연에게는 그런 생각이 전혀 나질 않았던 것이었다.
‘아.. 어떡하지? 계집애.. 내가 주인님을 좋아한다고? 말도 안 돼.. 어휴.. 하필이면 그런 말을 해가지고.. 말도 안 돼… 말도….’
다급히 머리를 굴리던 소연은 속으로 수련을 원망하다가 무심결에 생각을 말로 옮겼다.
“아.. 말도 안 돼…”
“응? 뭐가 말이 안 된다는 거야?”
자신이 무슨 말을 중얼거렸는지도 몰랐던 소연은 동천의 말에 지레 겁을 먹었다.
“예? 제가… 뭐라고 했나요?”
“그래. 네가 방금 말도 안 된다고 했잖아.”
“꿀..꺽…!”
소연은 의식적(意識的)으로 침을 삼켰다. 굳게 쥔 손은 긴장으로 인하여 땀투성이었다.
“그.. 그게요. 왜 말이 안 된다고 했냐면요. 응.. 그게.. 말이 되니까 그랬던.. 그게.. 아니고.. 아? 그게요. 당나귀는요.. 그래요! 당나귀는 말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말도 안 된다고 했던 말이에요. 예! 바로 그거예요.”
억지로 말을 껴 맞춘 소연은 지금 자신이 하는 말이 말도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포자기(自暴自棄)식으로 말했다. 도저히 돌이킬 수 없는 상황(狀況)…. 소연에게는 절망적이었다.
“뭐? 네가 생각하기에 당나귀는 말이 아니라서 말도 안 된다고 했던 거라고?”
“예에…”
소연은 불호령이 떨어질 동천의 다음 말을 상상하며, 기죽은 얼굴로 대답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말이 안 됐기 때문이었다.
동천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나 참.. 그걸, 이제 알았냐?”
“.. 예?..??”
당연한 걸 가지고 헛소리를 한다며 소연을 쫓아낸 동천은 다음 날 일어나서 소연의 말을 듣고, 초향이 찾아왔다는 것을 알았다. 이른 아침부터 찾아온 초향은 당연히 잠이 덜 깬 동천에겐 짜증 나는 존재였다. 더군다나 날씨도 안 좋았는지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하늘이 흐릿해 있었다. 잠을 자다 방금 일어난 동천의 눈두덩이는 약간 부어올라 있었다.
“에이씨…. 어떤 년이 찾아왔다고?”
소연은 동천이 일어나자 들고 있던 세숫물을 동천의 앞에 다급히 내려놓았다.
“초향이란 언니께서 주인님을 찾아왔다고요.”
동천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그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