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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57화


소연은 자신이 떠온 세숫물로 동천이 세수(洗手)를 다 하자, 대답을 하면서 들고 있던 수건을 얼른 건네주었다.

“예. 수건 여기..”

얼굴을 다 닦고 난 동천은 수건을 소연의 얼굴 쪽으로 던졌다.

“근데… 그 계집애가 뭐 하러 왔대? 사부님께서 부르신대?”

동천이 던진 것을 얼른 받지 못한 소연은 자신의 얼굴에 덮여버린 수건을 밑으로 내리며 말했다.

“글쎄요.. 저도 잘 몰라요. 제가 무슨 일로 오셨냐고 물으니까, 소전주님이 깨어나시면 직접 말씀드린다고 안 가르쳐 주더라고요.”

소연의 말을 들은 동천은 눈깔을 획! 치켜들었다.

“뭐? 그 계집애가 너한테 그래?”

소연은 갑작스러운 동천의 행동에 깜짝 놀랐다.

“예? 예에.. 그런… 데요?”

“내가 이년을…”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동천은 콧김을 씩씩! 거리며 방문을 걷어찼다. 동천이 문을 걷어차며 나오자, 밖에서 공손히 대기하고 있던 초향은 깜짝 놀라며 뒤로 주춤! 물러섰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뿐, 초향은 동천을 향해 얼른 인사했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화를 내며 나섰던 동천은 초향의 인사에 얼떨결에 인사를 받았다. 어떤 상황이건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 인사를 받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엉? 그래.. 안녕하셨다.”

잠깐 인사를 받느라 안색을 풀었던 동천은 지금 상황이 자신이 생각한 것과는 다르게 돌아가자, 얼른 정신을 차렸다.

“씨발! 그게 아니고, 너 아까 소연이 너한테 무슨 일로 왔냐고 물어보니까, 알 필요가 없다고 그랬다며? 맞아?”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것을 느낀 초향은 조심스레 대답했다.

“예에.. 그랬습니다마.. 아! 아야..!”

소연의 말이 사실로 드러나자, 동천은 껑충! 뛰어올라, 검지와 중지 사이에 초향의 코를 끼어 잡았다. 꽉, 끼어 잡히자 동천보다 키가 큰 초향은 고통을 덜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네가 나를 무시하냐?”

“예? 아.. 제가 언제 그랬다.. 아야~! 소전주님.. 아파요..”

동천의 의도(意圖)를 전혀 모르는 초향은 아예, 잡아 비트는 동천의 행동에 코가 아파서 죽을 지경이었다. 그게 얼마나 아픈지 눈에서 눈물이 다 맺힐 지경이었다.

“야, 너 같으면 아프라고 잡지, 안 아프라고 잡냐? 그래도 다행인 줄 알아. 네가 남자였으면 한대 후려갈겼을 거야. 내가 왜 이러는지 머리 나쁜 너는 모르겠지? 음.. 내가 착해서 가르쳐 줄 테니까 잘 들어. 네가 내 하녀의 물음을 무시했다는 것은 나를 무시했다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행동이었어. 네가 나를 소전주라고 생각했으면 감히 내 하녀한테 그따위 소리를 했겠어? 당연히 안 했겠지.. 이제, 내가 왜 그러는지 알겠어? 응?”

그런 생각도 없지 않았던 초향은 아까, 별 생각 없이 소연에게 말했던 것 때문에 지금 이런 사태(事態)로 자신에게 다가올 줄은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어쨌든 초향의 입장에서는 그건 나중에 생각할 일이었고, 지금은 빌어서 어떻게든 이 상황을 벗어나는 게 급선무(急先務)였다.

“예.. 흑.. 죄송해요. 제가 모자라서 그랬습니다.. 윽!”

동천은 초향이 잘못했다고 빌자, 그냥 놔주는 것도 아니고 뻑!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비틀어서 놔주었다. 초향은 코가 떨어져 나갈 정도로 고통이 심했지만, 나직한 단발마를 낸 것으로 족하고 얼른 자세를 잡았다. 흑도의 시녀가 감히 혼나는 시점에서 엄살을 부렸다간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콧등이 시뻘건 게 멍이 가시려면 한 일주일 이상은 걸릴 것 같았다.

“좋아. 다음부터는 소연한테 잘해라. 알겠냐?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면 대답 잘해주고..”

“예. 예..”

동천의 방 안에서 방금 전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소연은 주인님이 자신을 생각하는 마음에 고마워서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역시.. 주인님은 착하신 분이었어..’

어제 수련에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성격이 더럽다는 것에는 어느 정도 수긍을 하고 있었던 소연은 또 다른 동천의 성격에 기뻐서 어찌할 줄 모르고 있었다. 사실, 동천의 지금 행동은 옛날 자신이 미미의 하인이었을 때, 무시당했던 일이 생각나서 욱! 하는 마음에 초향을 혼내준 것뿐이었다.

“알았으면 됐고.. 그나저나 뭣 때문에 왔냐?”

코가 시큰거려 눈물이 눈앞을 가렸지만 초향은 꾹! 참고 지금 자신이 온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예.. 내일 연회가 열리기 전에 축하객분들 중 몇몇 분들이 미리 선물을 보내오셨습니다.”

“선무울~?”

동천은 선물이라는 말에 눈을 번쩍 떴다.

자고로 뭐 받는 거 좋아하지 않는 인간 없다고, 동천도 그런 부류(浮流)에 속하는 아이였다. 더군다나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살았던 동천으로써는 그런 증상(症狀)이 더했다.

“정말? 정말이야? 거짓말 아니지?”

좋아서 안달이 난 동천의 모습에 초향은 짜증이 물밀 듯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느꼈다.

‘못된 녀석.. 저런 녀석이 소전주라니… 휴우..! 매향이가 당했(?)을 때, 얼른 눈치를 챘어야 하는데.. 다음부터 저 녀석에게 일이 있으면 보영(菩永)이더러 가라고 해야겠다. 아유.. 코 아퍼..’

보영이란 여자는 매향이 대신 새로 보충된 하녀였다.

“예.. 지금. 물건을 가져온 사람들이 접견실(接見室)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서 가시지요.”

동천은 너무 기분이 좋아서 방방 뛰었다.

“그래? 야! 소연아! 같이 가보자. 빨랑…!”

“예? 예.. 그러죠..”

거길 가는데 왜 자신보고 같이 가자는지 몰랐지만, 주인이 같이 가자는데 거부할 수가 없었기에 말만 하고 달려가는 동천의 모습에 소연도 얼른 따라갔다. 초향은 소연이 아까 일로 자신에게 앙갚음을 한 걸로 착각해서 앞서가는 소연의 모습을 싸늘한 눈초리로 쳐다봤다.

‘흥..! 어린 계집애가…’

접견실까지 부리나케 달려간 동천은 그래도 체면은 아는지 문 앞에 도달하자 숨을 길게 들이킨 후, 무게가 실린 표정으로 초향을 기다렸다. 하녀는 문을 열어주기 위해 있는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뒤따라 소연이 와서 문을 열어 주려고 했지만 동천의 제지로 할 수 없이 동천의 뒤에서 공손히 시립했다. 이윽고, 초향이 뒤따라왔다.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나중에 뒤따라온 초향은 소전주가 자신의 말에 대답은 안 해주고 빨리 문을 열라는 신호를 보내자 얼른 문을 열어주었다. 참고로 동천의 문 열라는 신호란 눈깔을 부라리며, 손잡이를 향해 턱짓을 보내는 거였다.

“험험…”

초향이 문을 열어주자 동천은 고개를 꼿꼿이 쳐들며 안으로 들어갔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어정쩡하게 서 있다가 자신을 보고 황급히 인사를 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소전주님..”

“음.. 그래.. 안녕하네…”

동천은 음미하듯이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이며 어린애답지 않은 말투로 최대한 근엄하게 말해주었다. 그러나 몰래 실눈을 뜬 동천은 음흉한 눈초리로 사람들이 가지고 온 물건들을 잠시 훑어보고 있었다. 동천이 선물을 받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는 것을 눈치챈 초향은 얼른 앞으로 나가 입을 열었다.

“소전주님. 이분께서는 혈각(血閣)의 각주(閣主)이신 혈수(血手) 초무강(肖武强)님께서 보내오신 선물입니다.”

물건을 들고 온 사내는 초향이 자신을 소개시켜주자 가만히 서 있다가 초향의 얼굴을 보고는 웃음을 참는 듯한 인상을 지었다. 그러나 그런 것도 잠깐, 소개가 끝나자 얼른 정색을 하고는 들고 온 물건을 동천에게 두 손으로 공손히 바쳤다.

“여기 있습니다. 저희 주인어른께서는 비록, 작은 선물이지만 마음에 드셨으면.. 하셨습니다.”

“하하. 걱정 말게. 나는 정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네…”

자신의 말투가 어색하다는 걸 모르는 동천은 계속 그 어감으로 말했다. 그걸 소연이 귀띔해주려고 했지만 지금 말했다간 오히려 알게 모르게 창피를 당할 여지가 있어서 잠자코 있기로 했다. 의자에 앉아서 선물을 받아 든 동천은 겉모습과는 달리, 속으로 좋아서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다.

‘히히히.. 아이구 좋아라..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있네? 그나저나.. 뭐? 작은 선물이지만 마음에 들면 좋겠다고? 지랄하고 있네… 저 같으면 조그마한 선물 받고 좋아하겠어? 쯧쯧쯧.. 하여튼 대가리가 큰 것들은 겉치레 인사말을 되게 좋아한다니까?’

겉치레 인사말에 자신도 똑같이 대답해줬으면서 그런 것에는 당연히 신경을 안 썼다.

“다음 분께서는 아수전(阿修傳)의 아수마황(阿修魔皇) 유혼(幽魂)님의 선물을 가져오셨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 힘좋게 생겨 보이는 사내가 옆에 놓인 커다란 상자를 동천의 앞까지 밀어놓았다. 그 사내는 생긴 것답게 간단하게 말했다.

“마음에 드셨으면 합니다.”

‘이 새끼야. 그건 내가 열어봐야 아는 거야.’

“흐음.. 걱정 말게. 정성이 중요한 거야.. 정성이.. 하하하…”

동천의 입은 찢어지고 있었다.

“그다음 분은…”

초향이 그 뒤로 모두 소개시켜주자 동천은 속으로 즐거운 비명을 지르며 선물을 받았다. 자신들의 맡은 임무를 다 마친 사람들이 모두 돌아가자, 동천은 사람들과 같이 따라나가는 초향을 불러 세웠다.

“야! 애들 시켜서 이거 들고 내 방으로 가져와.”

“예, 그러지 않아도 지금 일을 시키러 나가는 중이었습니다.”

그 말에 동천은 만족의 웃음을 띠었다.

“그래? 히히! 좋아.. 좋아. 야, 소연아!”

“예?”

“가~자!! 길을 비켜라!! 정의의 협객(俠客)이 나가신다… 히히히!”

초향은 얼떨결에 협객의 길을 막은 사람으로 치부되어 얼른 비켜섰다. 소연은 초향을 비켜갈 때, 간단하게 인사를 하고 동천을 따라갔다. 같이 고개를 끄덕여준 초향은 소연이 비켜나가자, 싸늘한 냉소를 지었다.

“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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