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574화
#63
“하아, 어쩐다지? 내쫓기지나 않으면 다행일텐데…….”
돌아갈 생각을 하니 두려운 마음부터 앞섰지만 늦장을 부린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용기를 내어 암한문으로 돌아온 그녀는 주인님과 함께 있는 화정이를 발견할 수 있었는데 그나마 혼자 대면하게 되는 것보다는 양반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저…… 왔어요.”
심한 꾸중을 예상한 소연은 한껏 주눅이든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예상을 뒤엎고 동천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누가 뭐래? 그리고 말많은 여자가 어딜 그렇게 쏘다녀?”
다소 얼떨떨해진 소연은 말했다.
“어딜 쏘다니다니요. 연화를 조련시킬 조련사를 찾아다녔죠.”
잠시 두 눈을 끔벅끔벅 하던 동천은 뒤늦게 생각이 미쳤는지 나지막한 탄성을 내질렀다.
“아! 그거? 하하, 그거라면 벌써 해결됐어.”
“예? 해결되다니요?”
어리둥절해진 소연이 묻자 동천은 거만한 폼으로 화정이를 불렀다.
“화정아, 네가 한번 시범을 보여주려무나.”
화정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뭘?”
딱!
응징은 바로 이어졌다.
“이런 씨! 앉아! 일어서! 이런 거 말야, 이 둔팅아!”
“아야야! 히잉, 알았어. 할게. 때리지마.”
머리를 비빈 화정이는 바닥에서 발바닥을 핥고있는 연화를 들어올려 식탁 위에 올려놓은 뒤 지시를 내렸다.
“야, 앉아.”
하지만 연화는 이미 앉아있는 상태였다.
“…….”
분노한 동천은 잠시 침묵을 지켰고 그것을 감지한 화정이는 급히 다음 지시를 내렸다.
“일어나. 일어나 봐.”
“야옹.”
가볍게 울음소리를 낸 호연화는 말을 알아들은 양 자리에서 일어나 꼬리를 가볍게 한번 흔들었다. 신기해진 눈으로 상황을 지켜본 소연은 물었다.
“주인님,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그녀의 놀람은 곧 동천의 즐거움이었다. 그는 득의만면한 미소를 띄우며 소연의 한쪽 어깨에 팔걸이를 했다.
“훗, 이게 다 이 몸의 인덕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아쉽게도 그게 아니라, 너 나가고 나서 착지할 때 물구나무서기를 훈련시키고 있는데 화정이가 들어오지 뭐냐? 얘가 연화하고 놀면 같이 놀자고 했는데 솔직히 이 몸이 화정이와 같은 수준으로 놀 수는 없지 않겠어? 그래서 니들 끼리나 놀라고 자리를 비켜줬더니, 아 글쎄 화정이가 연화에게 앉아 일어서를 시키네? 놀라서 물어보니까 하는 말이 평소에 놀 때 이러고 놀았다지 뭐냐? 하하, 또 그래서 앞으로 연화의 훈련은 화정이에게 시키려고 생각 중이야. 물론 화정이로는 한계가 있으니까 옆에서 니가 보조해주고 말야. 이제 어떻게 된 일인지 잘 알겠어?”
아직도 적응이 잘 안된 소연은 그 표정을 확실히 반영한 채 대꾸했다.
“예에…….”
일이 이렇게 쉽게 풀릴 줄은 예상도 못했던 그녀는 고민하고 두려움에 떨며 돌아온 자신이 어쩐지 억울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어쨌든 한고비는 넘긴 셈이었기에 그녀는 곧 정신을 추스른 뒤에 물었다.
“그럼 훈련은 어떤 걸로 시켜야 하나요?”
동천은 약간 머리를 굴리는 듯 하다가 말했다.
“음, 일단 야성의 본능을 발휘시키기 위해서 먹이 사냥을 시켜봐. 때론 사냥한 먹이를 주인에게 들고 오는 훈련도 시켜보고.”
소연은 과연 자신이 잘 해낼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으나 그것은 차후의 일이었기에 일단은 고개부터 끄덕이고 보았다.
“네, 그렇게 할게요. 그것만 훈련시키면 되는 거죠?”
고개를 끄덕인 동천은 뒤늦게 생각난 것을 말해주었다.
“아? 그리고 가능하면 어흥 하는 것도 좀 훈련시켜봐. 도무지 사나운 감이 없어서 못 봐주겠다니까?”
소연은 주인님의 헛소리에 난감해하며 말했다.
“에에, 주인님? 호랑이가요, 어흥 하시는 줄 아시는데요. 어디에서 들으셨는지 몰라도 그거 다 거짓말이에요. 고양이나 설산묘화나 시라소니 호랑이 등등. 이런 맹수들은 다 비슷한 종류라서 기본적으로 우는 소리는 똑같거든요? 그러니까 연화도 다 성장하면 맹수의 제왕 저리 가라할 정도로 늠름해질 테니까 그 부분은 당장에 아쉽더라도 참아주세요. 네?”
순간 동천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뭐? 그게 정말이야?”
약간 켕기는 구석이 있어서 움찔한 소연은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와 뒤엎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네, 확실한 이야기니까 믿어주세요. 제가 언제 주인님께 실없는 소리를 한 적이 있나요?”
물론 없었다. 그랬다간 차후에 매타작이 기다릴 테니까. 그러나 쉬이 믿을 수 없었던 동천은 갈등하는 눈치였다.
“으음! 하지만 진구 아저씨가 호랑이는 어흥 하고 운다고 했는데…….”
그녀가 진구 아저씨가 누구인지 알게 뭔가.
“그분이 어흥 한다고 말해준 때가 주인님께서 어렸을 적이었죠?”
동천은 깜짝 놀랐다.
“어? 니가 그걸 어떻게 아냐?”
어떻게 알긴 어떻게 알았겠는가. 그녀와 동천이 처음 만난 후 이제까지 쭉 강진구라는 인물이 없었으니 그 이전에 만났던 사람임을 간파한 것이지. 내심 실소를 한 그녀는 주저 없이 끝마무리에 들어갔다.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고요. 아마 그분께서는 주인님이 어리시니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신답시고 약간 부풀려서 말씀해주셨을 거예요. 주인님도 그때의 일을 지금 생각해보시면 다소 유치하게 기억되실 걸요?”
사람의 심리라는 것이 우스워서 한번 한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하면 계속 그쪽으로 끌리는 경향이 있었다. 바로 지금 동천의 심리상태가 그러했는데 소연의 그럴듯한 언변에 넘어간 그는 듣고 보니 그렇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하긴 그래. 참나, 호랑이가 소를 물고 담을 뛰어넘었다는 게 어디 말이나 돼? 소가 얼마나 무거운 놈인데 왜 엄한 담은 걸고넘어지는 거야? 그 소가 무슨 푸줏간에서 잘라 파는 한 근 두 근도 아니고 말야. 안 그래?”
“네, 바로 그거예요. 그분께서는 필시 어렸을 적의 주인님을 즐겁게 해드리려고 선의의 거짓말을 하셨던 거니까 어흥 문제는 아쉽더라도 포기하세요. 예?”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는데 그래도 미련이 남는지 동천은 잠시 아랫입술을 깨물며 고민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소연의 뜻대로 호랑이 울음소리에 관해서는 포기해버렸다.
“에이! 나 나갔다 올게!”
그제야 한숨을 돌린 소연은 방긋 웃으며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예, 주인님. 살펴 다녀오세요.”
동천은 대꾸도 없이 쾅 소리나게 문을 닫고 나갔고, 방안에 애물단지 둘과 함께 남겨진 소연은 일단 이마를 타고 흐르는 진땀을 닦아냈다. 바람도 그녀를 도와주려는지 창가를 통해 서늘한 공기가 타고 들어왔다. 살랑이는 바람결을 따라 창가로 걸어간 그녀는 해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안도의 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보람찬 하루였어.”
그렇게 동천과 소연의 하루는 지나갔다.
“산 호법님께서 오셨습니다.”
문밖의 시비가 산관이 왔음을 공손히 알리자 냉현은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들어오라고 해.”
소리 없이 들어온 산관은 미리 정해져있는 순서인 듯 보고부터 올렸다.
“독전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만독문의 소문주가 써준 재료와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독전의 비전술로 음양천석순단과 버금가는 단환을 만들어 줄 수가 있다고 합니다.”
싸늘하게 입술을 비튼 냉현은 두어 발자국을 움직인 후 입술을 뗐다.
“그렇다는 것은 약왕전에서도 그만한 단환을 만들 능력이 된다는 소리겠지?”
산관은 바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소교주님의 명령대로 최대 일년, 최소 한달 이내로 약왕전의 약재 유통경로를 살펴본 결과 약 구 개월 전에 한번 약재들이 이동했고 십여 일 전에 한번 화기(火氣)를 가라앉히는데 주효한 약재들이 사용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보고가 끝나자 냉현의 눈빛이 빛을 발했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
산관은 확신하는 듯한 소교주에게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그런데 약간의 문제가…….”
입가에 회심의 미소를 띄우던 냉현은 금새 표정을 바꾸어 눈살을 찌푸렸다.
“문제?”
산관은 재빨리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네, 그렇습니다. 독전주님께서 소신의 정보를 입수하시고 말씀하시기를 약왕전에서 쓰인 것들이 중화용 단환을 만들기 위한 재료들인 것은 맞지만 그것을 만들기 위한 가장 핵심적인 약재 세 가지가 빠져있다고 합니다. 음봉석류(陰鳳石榴)와 천실연화초(天實連花草). 그리고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음극지실련(陰極地實聯)이 그것입니다.”
냉현은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무성의하게 되물었다.
“그게 어쨌다는 거지?”
산관은 날카로워진 소교주의 눈치를 살피며 차근차근 설명했다.
“그러니까 그 세 가지 약재가 빠진다면 절대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제대로 된 효능을 기대하기란 어렵다는 말입니다. 아마도 약전주 개인적으로 그것들을 소유하고 있다가 같이 사용한 것 같은데 그것에 관해서는 물증이 없으니 확실한 추궁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결론입니다.”
산관의 설명에서 무언가를 감지한 냉현은 물었다.
“일반적인 결론이 그것이라면 특별한 결론도 있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산관은 그다지 자신 없어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특별한 까지는 아니옵고, 일단 쓰여진 약재들이 따로 따로 제조되었는가. 아니면 단일 되어 제조되었는가를 내사하게 된다면 그것이 어느 곳에 사용되었는지를 좀더 확실하게 알아낼 수 있으리라 봅니다. 문제는 다른 곳도 아니고 약왕전의 전주께서 직접 관할하여 제조한 것을 무턱대고 조사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명분이 있어야 하는데 그럴만한 꼬투리가 없으니…….”
산관이 말끝을 흐리자 잠시 그 여운을 즐긴 냉현은 평상시의 표정을 회복한 뒤에 입을 열었다.
“그래서 현재 별다른 손은 쓰고있지 않다는 이야기야?”
“송구하오나 그렇사옵니다. 현재로서는 더 헤집지 않는 것이 이득이라고 판단되었기 때문입니다. 일단 소신이 보고한 곳까지 일을 진척시킨 후 활동을 멈추었는데 아무래도 그 다음은 소교주님의 명령을 듣고 움직이는 것이 낫겠다싶어서 그런 것입니다.”
보고가 마음에 든 냉현은 슬며시 웃음 지었다.
“네 딴에는 노력한 흔적이 보이는구나. 거기에서 멈춘 것은 잘한 일이야. 약왕전은 본교의 산하 기관들 중 정보력이 제일 딸리는 곳이긴 하지만 전주인 역천이 개입되었다고 볼 때, 아니 더 나아가 부교주가 뒤를 봐주고 있다고 가정할 때 준비도 없이 들쑤시는 것은 무모한 짓이라고 할 수가 있지. 아니, 어쩌면 벌써 우리의 움직임을 눈치채고 꼬투리가 될만한 것들을 사그리 날려버리고 있을 수도 있고 말이야.”
고개를 숙이며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산관은 움찔하여 고개를 들었다.
“소신이 직접 주관하여 소수의 인원으로 움직였으니 그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산관의 심중을 파악한 냉현은 손을 내저었다.
“아아, 일이 틀어질지도 모른다는 것 때문에 한 말이 아니니까 걱정할 거 없어. 쉽게 틈을 보여줄 녀석들 같았으면 이렇게까지 골치 아프게 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런 것보단 소전주 녀석이 이번 일에 어느 정도까지 연줄이 닿고 있는가를 살펴보자는 것이야. 만일 녀석이 부교주까지 등에 업고 있다면 궁지에 몰아 넣는다 해도 빠져나가는 것쯤이야 손바닥 뒤집기보다 쉬울 수도 있으니까. 이해하겠어?”
그제야 산관은 소교주가 상당히 앞을 내다보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만일 이 사건이 2, 30년 전에만 터졌어도 교주가 바뀌는 시기와 무관했기에 전면전으로 따지고 들어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권력이 교체되는 이런 시기에 괜히 부교주파의 심기를 건드려서 경각심을 곧추세우게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아? 소신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허면, 계획을 바꾸시어 좀더 지켜보는 쪽으로 결정을 내리실 예정이십니까?”
냉현은 비로소 웃음이라고 표현할 정도의 미소를 지었다.
“그런 셈이지. 확실히 어제는 분노에 이성을 잃을 정도였지만 밤새도록 고민해보니까 소전주 녀석의 처리를 너무 쉽게 생각했었더군. 원체 영악한 놈이니 웬만한 덫으로는 걸려들지 않을 것이 뻔해. 그런 녀석은 야금야금 파고들며 궁지에 몰아 넣는 것이 제격이라고 할 수 있지. 큭큭큭.”
산관은 소교주의 눈빛이 위험수위에 다다르려 하자 알아서 다른 방향으로 화제를 돌렸다.
“그것은 둘째치고 아직 이 일을 교주님께 알려드리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언제까지 함구하실 예정인지요?”
냉현은 음산한 표정을 풀고 대답했다.
“흠! 안 그래도 오늘 오후쯤에 말씀을 드리려고 했어. 방금 말했다시피 어제만 해도 비교적 쉽게 생각해서 소전주 녀석에게 일격을 가한 뒤 결과로서 알리려고 했는데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어쩔 수가 없지.”
고개를 끄덕인 산관은 문득 소교주가 듣고서 예민하게 반응할 질문이 떠올랐다. 그는 눈치를 봐가며 조심스레 말했다.
“그런데 만일 교주님께서 이 사실을 접하신다면 소교주님께 이번 일에서 손을 떼라고 하실 수도 있습니다. 약 소전주의 일은 교주님께서 전권을 이양 받으시고 소교주님은 다시 천마동(天魔洞)으로 돌아가라고 하실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진한 눈썹을 꿈틀한 냉현은 무시무시한 살기를 드러내며 산관을 노려보았다.
“그놈은 내 먹이야. 아버님께도 이번 일만큼은 양보할 수 없어!”
괜히 물어봤다고 생각한 산관은 주눅이든 얼굴로 대답했다.
“네, 네에. 소신이 너무 주제넘은 말을 했나 봅니다.”
“흥! 알긴 아는군.”
찔끔한 산관은 자라목을 하였다.
“죄송합니다.”
냉현은 한동안 산관을 노려보는 듯하다가 굳어진 표정을 풀었다.
“뭐 됐다. 잘못도 없는 네게 화를 낼 필요는 없지. 정작 중요한 놈이 있는데 이런 곳에서 심력을 낭비해서야 쓰나.”
그러면서 품속을 뒤적거린 그는 작은 옥함을 꺼내들었다. 딸깍, 소리와 함께 열린 안쪽에는 피처럼 붉은 색 단환이 놓여져 있었다.
“화리혈현단이 아닙니까.”
내용물을 살펴본 산관이 묻자 냉현이 대답했다.
“그렇지. 그놈이 선물해준 화리혈현단이지.”
산관은 다소 염려되는 표정으로 소교주에게 조언을 했다.
“영약은 되도록 공기에 노출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들었습니다. 차후 복용하실 때를 대비하셔서 그만 닫으시는 것이 어떨는지요.”
돌연 냉현은 웃었다.
“큭큭큭! 크하하하하하!”
어리둥절해진 산관이 입을 열려는 순간 웃음을 멈춘 냉현은 아직 여파가 남아있는지 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큭큭, 아 미안미안. 갑자기 즐거운 상상이 솟아나서 잠시 웃었어. 후후, 내가 왜 이걸 공기 중에 이렇듯 노출 하냐고?”
거기에서 말을 멈춘 냉현은 마치 산관이 대답해주기만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산관은 하는 수 없이 그 장단에 맞춰주었다.
“그렇습니다.”
냉현은 산관의 장단맞추기가 조금 미진하다고 느꼈지만 그냥 넘어가 주었다.
“그건 바로 이 화리혈현단이 아주 귀중하게 쓰일 예정이니까 그렇지.”
“예? 아니, 그런데 어째서…….”
산관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고 냉현은 그저 뜻 모를 웃음만 지을 따름이었다. 그는 아마도 산관이 헷갈려하는 모습을 즐기고 있는 듯 했다.
“하하! 너는 그 정도만 알고 있으면 되는 것이야. 알겠느냐?”
고개를 갸웃거리던 산관은 재빨리 대답했다.
“존명!”
동천과 냉현이 정 반대의 하루를 보내고 있을 때 강소홍 또한 나름대로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마음이 불안해질 때면 언제나 운기조식으로 평정을 되찾는 그녀는 오늘도 어김없이 운기에 들어갔다. 진기가 정해진 통로를 흘러 전신을 타고 흐르자 그녀는 자신이 원했던 불안감을 차츰 잊어버릴 수 있었다. 검푸른 진기가 희미하게 그녀의 주위를 맴돌았고 호법을 담당하는 문영은 멀뚱히 주인의 운기조식 장면을 지켜보았다. 문영은 무슨 생각을 하고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미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짝짝!
난데없이 문영이 박수를 가볍게 쳤고 그것이 신호였는지 강소홍이 주변에 흐르는 진기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스으으으윽.
“후우, 후!”
목표했던 것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운기를 끝마친 소홍은 귀를 기울여 기척을 감지했다. 역시, 누군가 오고 있음이 느껴졌다. 다름이 아니라 기척이 느껴지면 문영에게 박수로서 알려 달라고 미리 언질을 해주었던 것이다.
“소문주님, 소신 숭의겸입니다.”
문제의 상대를 알게 된 소홍은 그를 불러들였다.
“들어와요.”
시비가 열어주는 문을 기다렸다가 안으로 들어선 그는 먼저 인사부터 올리고 강소홍이 권해주는 자리에 마주 앉았다.
“아까 아침에 다녀갔으면서 또 오다니.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숭의겸은 소문주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문제의 소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 암흑마교에서 전달사항이 보내져온 관계로 그것을 알려드리려고 이렇게 찾아온 것입니다.”
“전달사항이라뇨?”
“연회가 사흘 뒤로 정해졌답니다.”
소홍은 벌써부터 긴장되는지 안색을 굳혔다.
“음, 장소는?”
숭의겸은 대답했다.
“저희가 처음에 방문했던 적룡등천각이라고 합니다. 정오부터 시작해서 이틀동안 쉬지 않고 연회를 열 계획이랍니다.”
소홍은 약간의 거부반응을 보였다.
“그렇다면 그 이틀동안 실없이 계속 웃고 있어야만 한다는 건가요?”
숭의겸은 풋내기 같은 질문에 껄껄 웃었다.
“하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처음 하루동안, 그것도 일정 시간동안만 자리에 앉아 계셨다가 돌아오셔도 됩니다. 그 이후의 연회들은 말이 소문주님을 위한 연회이지 사실은 신분이 좀 낮거나 해서 시작할 때 참여를 못한 자들을 위한 연회인 셈이죠.”
그제야 자신의 질문이 멍청했음을 간파한 강소홍은 살짝 얼굴을 붉혔다.
“아? 그래도 될 줄은 몰랐어요.”
사실 그녀로서는 만독문에 있을 때 수련에만 몰두했을 뿐 연회다운 연회에는 단 한번도 참석한 적이 없어서 아무 것도 몰랐던 것이다.
“괜찮습니다. 그런 것쯤이야 모르고 계셔도 삶에 아무런 지장이 없으니까요. 무인은 그저 자기수양을 통한 실력증진이 제일이라고 소신은 생각합니다.”
생각해주는 듯한 격려에 소홍은 고마움을 느꼈다.
“그 말을 들으니 힘이 솟는군요. 그밖에 다른 이야기는 없었나요?”
숭의겸은 혹시나 대답 않고 지나친 것이 있는지 머리를 굴려보았다.
“글쎄요. 그것 외에는……. 아? 별것은 아닙니다만 다른 누가 질문이라도 한다면 가급적 긴 대화는 나눠주지 않으셨으면 하는 눈치였습니다.”
듣고 보니 이상한 부분이었다. 그녀는 바로 되물었다.
“그래야만 하는 이유라도 알고 있나요?”
“그쪽에서는 대화가 길어지면 아직 이곳에 적응하시지 못한 소문주님께서 불편해하실 까봐 배려 차원에서 말했다는데, 소신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곳에 오게 된 상황이 드러날 까봐 그런 것 같습니다.”
총명한 그녀는 비교적 손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음, 그러니까 대외적으로는 본문이 열세를 만회하고자 나를 소교주에게 보낸 것으로 되어있는데 비슷한 입장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예전의 약속 때문에 보내진 것이 밝혀지는 것을 꺼려한다는 말인가요?”
숭의겸은 소문주님의 아픈 곳을 건드린 것은 아닌가 내심 우려했다.
“죄송합니다. 소신이 생각 없이 떠벌린 것 같습니다.”
소홍은 살며시 웃었다.
“아니에요. 어린아이도 아니고 그런 것으로 마음에 상처를 입을 시기 따윈 지난 지 오래예요. 그것보다는 교주측에서 그런 문제를 숨기려고 한다는 것이 좀 수상쩍군요. 그렇지 않나요?”
숭의겸은 그녀가 원하는 동의에 찬성표를 던져주지 못했다.
“수상쩍다고 보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소문주님도 알다시피 그때의 일은 드러내지 않는 상황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아마도 교주 측에서는 소교주의 실력을 숨기기 위해서이거나, 같은 이야기지만 교주가 대를 이어 바뀌는 특성상 견제를 덜 받기 위해서 그 사실이 거론되는 것을 꺼리고 있는 것이 분명할 겁니다.”
“과연 그런 걸까요?”
숭의겸은 자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네, 틀림이 없다고 사료됩니다.”
그 말이 틀렸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어쩐지 자신들이 놓친 어느 무언가 때문에 가급적 대화를 간소하게 하라는 이야기가 거론된 것일 거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그녀는 혼잣말하듯 다시금 했던 말을 반복했다.
“과연 그런 것일까…….”
“예?”
정확하게 듣지 못한 숭의겸이 묻자 그녀는 웃는 낯으로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그저 혼잣말일 뿐이에요.”
혼잣말이라는데 숭의겸이 더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는 사실상 보고를 끝낸 상태이므로 곧 물러갔고, 강소홍은 고뇌에 찬 눈으로 방안을 서성이며 긴 하루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