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578화
#67
대면(對面).
“제 늘어난 실력이 그렇게 궁금하십니까.”
사정화는 감히 자신과 눈을 마주치고도 피할 생각을 않는 동천에게 대답했다.
“물론이야.”
그녀의 주저 없는 대답에 동천은 조금 고민하는 듯했다. 매끄러운 턱을 쓰다듬으며 현 상황을 직시한 그는 자신의 방에서 문만 살짝 열고 훔쳐보고 있는 소연에게 명했다.
“소연아, 내방에서 검 한 자루만 가져오너라.”
자신의 이름이 거론되어 깜짝 놀란 소연은 말을 더듬거리며 물었다.
“자, 장식용으로 진열된 거요?”
“그래.”
“네, 주인님.”
재빨리 검은색 검집에 담겨진 장검을 들고 온 소연은 공손하게 건네주었고 그것을 받아든 동천은 장검을 사정화에게 내밀었다. 이를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던 사정화는 받을 생각조차 않고 물었다.
“뭐지?”
그녀는 증진된 실력이나 보자는 자신에게 동천이 장검을 건네주려 하자 선뜻 이해하지 못한 것이었다. 동천은 그런 그녀의 의문을 풀어주었다.
“앞서 말씀을 드렸다시피 수련하는 장면은 보여드릴 수가 없습니다. 수련이란 나름대로 체계를 잡고 반복 연습하는 것이기도 하기에 타인이 본다면 없던 약점도 쉽사리 드러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정화는 흥미가 동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동천은 얕게 웃으며 대답을 이어갔다.
“네, 그래서 제가 생각해낸 것이 비무입니다. 그것이라면 훈련체계를 보여주지 않더라도 그간의 실력을 가늠할 수 있으니까요.”
아직 동천의 손에 들려있는 장검을 가만히 내려다 본 사정화는 오랜만에 미소다운 미소를 얼굴에 떠올렸다.
“호호, 재미있구나. 그렇다는 것은 비무의 상대를 나로 정했다는 것이냐?”
그녀의 미소에 아찔한 충격을 받은 동천은 겨우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혹, 제 욕심이 너무 큰지요.”
사정화는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너답지 않은 모습이다만 지금도 나름대로 네게 어울리는구나.”
동천은 진지하게 현 상황을 대처했다.
“감사합니다.”
손을 움직여 장검을 수중으로 갈무리한 사정화는 ‘챙!’ 소리가 나게끔 검을 뽑았다가 잠시 살펴본 뒤 도로 검집에 꽂아 넣었다. 그것을 약간 떨어져있는 소연에게 던져준 그녀는 이번엔 반대로 의아해하는 동천에게 천천히 표정을 지워가며 말했다.
“자만심은 아니나 너에게 검을 사용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너 또한 무기를 사용할 자세가 되어있지 않으니 공평하게 하는 것이 좋겠지.”
동천은 상대의 기량을 잘 알기에 굳이 사양하지 않았다.
“그러시다면 좋습니다. 저는 수법(手法)과 신법만을 사용할 것입니다.”
사정화는 날카롭게 눈매를 좁혔다.
“어디에서 쓸만한 수법을 주워 배웠나 보구나. 그렇다면 나도 수법과 신법을 사용하마.”
“네, 시작하겠습니다.”
원래는 아무리 비무라 하더라도 자신의 공격 방법을 선언하고 겨루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있다면 한쪽이 상대적으로 강하여 약간의 제약을 두는 것과 교만한 자가 상대를 무시하고 공격 방법을 선언하는 것. 그 둘 중에 하나였다. 그러나 지금은 특수한 상황으로서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 대신 다른 부분을 사용하겠다고 공언한 비무라고 할 수 있었다.
사정화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을 감았다. 이미 시작된 비무였기에 동천이 이때를 노리고 공격한다고 해도 할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여유 아닌 여유를 부렸다.
“자아, 공격합니다.”
“…….”
동천은 공격선언이 채 여운을 맺기도 전에 이미 돌진하는 중이었다. 여전히 고개를 쳐든 자세로 눈을 감고있던 사정화는 돌연 눈을 번쩍 떴다.
파츠츳!
곧이어 그녀의 몸에서 살을 에이는 듯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설마, 죽일 작정으로 비무에 임하는 것인가?’
폭발하듯 터진 사정화의 기세에 눌려 공격로를 우회한 동천은 관성의 법칙을 이기지 못한 상체가 약간 한쪽으로 기울어짐을 느꼈다. 자연히 자세는 불안정해졌고 사정화의 손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휘우웅―!
큰 원을 그리듯 팔을 크게 돌려 후려치자 거대한 몽둥이를 휘두르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천은 소리가 소리였던 만큼 파괴력이 높은 대신 속도가 느릴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동천의 예상일 따름이었다. 약간의 숨을 돌리고 피하려는데 어느새 사정화의 손날이 그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큭!”
다급해진 그는 젖 먹던 힘을 다해 상체를 뒤로 눕혔고, 다행이 정화의 손날은 간발의 차로 동천의 이마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사정화의 공격이 그것으로 끝날 리가 만무한 법.
“아앗! 위험해요, 주인님!”
다급해서 자신도 모르게 소리친 소연은 곧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붉어진 얼굴로 양손을 꼭 쥐었다. 그런 소연의 바램이 효과를 발휘했던 것일까?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한 동천은 신법의 우위를 선점해서 가능한 거리를 벌려두었다. 그러나 완전히 피한 것은 아니었던 듯 귀영분광으로 빠져나오는 순간 한쪽 시야가 붉게 물 드는 것을 느꼈다. 눈가를 손으로 닦아낸 동천은 이내 이마가 찢어졌음을 깨달았다.
“주인님, 피가…….”
쓰윽, 이마를 손으로 훔친 동천은 약왕전의 소전주 답게 지혈을 쉽게 끝냈다. 여유인지 지혈을 끝마칠 때까지 시간을 내준 사정화는 훈계하듯 말했다.
“만일 내가 소매 속에 봉침(蜂針)이라도 숨겨놓았었다면 너는 최소 한쪽 눈을 실명했을 거야.”
동천은 굳이 부인하지 않았다.
“그랬겠지요. 하지만 아가씨께서는 그런 암기를 숨기고 계시지 않으십니다. 그거면 족하지 않을까요?”
동천의 말은 사정화가 암기를 사용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기에 애초부터 염두 해두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으니 피하는 것쯤은 문제도 아니라는 말이었고, 반대로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자신의 약점이 될 수도 있는 부분을 이른 시간에 알아냈다는 좋은 점도 있었다. 하지만 역시 은근히 분노가 치미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말 잘했어, 동천. 확실히 그거면 족해.”
얼굴을 굳힌 그녀는 묵직한 발걸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동천에게 다가왔다. 수라진결(修羅眞訣)을 오성(五成)까지 끌어올리자 그녀의 연분홍 빛 백의가 다소 부풀어오르는 듯 하더니 펄럭이기 시작했다. 감히 경시할 수 없었던 동천은 피하는 것을 포기하고 자신이 익히고있는 수법의 기수식을 취했다. 언뜻 엉성한 듯 보였지만 그 엉성함에서 뿜어져 나오는 파괴력을 접한 사람이라면 감히 그러한 말을 내뱉지 못하리라.
푹. 푹…….
한발 한발씩 옮기는 사정화의 붉은빛 감도는 당혜(唐鞋: 목이 짧은 신발)가 소담스럽게 쌓인 눈밭을 걷듯 바닥에 꺼져 내려갔다. 아울러 그 소리는 묘한 자극을 주며 주위에 퍼져나갔다. 실제로 동천은 소름이 다 돋은 상태여서 소매를 걷어 부치는 척하며 팔을 쓰다듬었다. 사정화는 그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하앗!”
귀영약문(鬼影藥門)에 귀영신법(鬼影神法)이 있다면 수라마가에는 그에 못지 않은 수라분광신법(修羅分光身法)이 있었다. 의외로 공격적인 것과 거리가 먼 이 경공은 상대의 공격을 흘려보내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빠름 속에서 빈틈을 찾아 공격하는 여타의 신법들과는 달리, 다소 느리더라도 확실하게 공격을 차단하거나 미리 알고 피하는 방법을 추구했는데 이를 거꾸로 생각한다면 상대의 공격을 회피한 다음 순간이 바로 공격의 기회라고도 생각할 수가 있는 것이다.
팍, 파팟!
사정화의 손이 희뿌연 잔상을 남기며 사방에서 불어닥쳤다. 팔목을 회전시킨 동천은 용케 사정화의 속도를 따라붙으며 그것들을 일일이 쳐냈다. 그러나 한번씩 막아낼 때마다 손등과 팔목이 시큰거리는 것이 오래 사용할만한 전술은 아니었다. 자신이 익힌 최고 치인 역심무극결을 사성까지 끌어올린 동천은 튕기는 것이 아닌 사정화의 수법과 정면으로 부닥쳤다.
퍼엉―!
손과 손끼리의 부닥침이라 둔탁한 소리가 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가볍고 묵직한 파장이 일어났다. 서로 반대쪽을 향해 떠밀리듯 밀려난 그들은 창백해진 얼굴로 약속이나 한 듯 숨결을 골랐다. 입안에 가벼운 피내음이 느껴진 동천은 이어졌다 끊겼다를 반복하는 진기를 서둘러 운기시키며 생각에 잠겼다.
‘음, 최소 비길 줄 알았는데 밀렸다. 그러나 허리띠의 착용을 감안했을 때 7할의 역심무극결을 사용해서 이 정도라면 해볼만하겠군.’
사정화 또한 동천이 실력을 가늠했듯 복잡한 심경으로 동천을 노려보았다.
‘이럴 수가! 이 녀석이 이 정도였단 말인가? 비록, 내가 두 발을 물러서고 녀석이 세 발 반을 물러섰지만 공격의 무게는 내 쪽에서 쏠린 상태였다. 그렇다면 대충 차이는 한발 정도. 아무리 내가 녀석을 생각해서 사할의 내공을 아꼈다지만 저 나이에 이 정도라면 녀석 나이 때의 나와 비교해도 별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소리가 아닌가!’
알고 보니 그들은 서로 실력을 아낀 상태였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사정화가 우위에 있었다. 동천의 치우도법이 아직은 일회성인 것을 감안했을 때 사정화도 수라파천섬일검법(修羅破天閃一劍法)이라는 걸출한 최후의 보루가 있었기에 커다란 변수가 없는 한 사정화가 이기게 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그녀는 천마심법을 바탕으로 한 수라진결을 사용하지도 않은 상태였다.
“동천, 제법이구나.”
혈색이 되돌아온 사정화는 이미 충격에서 회복된 얼굴이었다. 그러나 아직 3할 가량의 회복을 남겨둔 동천은 가볍게 미소지으며 자신의 상태를 숨겼다.
“실망하시지 않으셔서 다행입니다.”
내공 회복에 애쓰는 동천을 간파했는지 사정화가 자세를 풀고 말했다.
“무리할 거 없어. 네 실력은 충분히 알았으니까.”
‘츱, 눈치챘는가? 완패로군.’
충격의 강도는 비슷했지만 회복의 속도로서 아직은 사정화와 차이가 난다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동천은 내심 씁쓸히 웃음을 삼켰다.
“만족하셨으면 합니다.”
사정화는 솔직하게 동천의 실력을 인정해주었다.
“만족 정도는 넘어섰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어. 헌데, 방금 사용한 무공의 이름이 뭐지?”
동천은 설레설레 고개를 내저었다. 그도 몰랐기 때문이다.
“강호에 나갔다가 어렸을 적부터 잘 알고 지냈던 할아버님을 만났는데 그분이 가르쳐만 주시고 무공의 이름은 알려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죄송하게도 아는 바가 없습니다.”
사정화는 지금의 동천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흠……. 여러 고수들 앞에서 시범을 보여주면 누군가는 알아낼 듯도 한데.”
동천은 거절했다.
“송구하오나 여러 사람들 앞에서 드러내 보일만한 무공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습니다.”
자기도 나름대로 비장의 한 수를 가지고 싶다는 뜻이기도 했다. 같은 무인으로서 이해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던 사정화는 더 이상 그 문제를 언급하지 않기로 했다.
“알았어. 그리고 오늘 네 분위기가 변한 것에 관하여 무언가 숨기고 있는 듯 싶지만 언젠가 말해주리라 믿고 오늘은 그만 돌아갈게.”
동천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어느새 표정을 지운 사정화는 말했다.
“그 말, 새겨두지.”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주저 없이 암한문을 나섰다. 서로의 피로감을 잘 알고있었던 동천은 좀더 머물기를 바라지 않는 대신 마차까지 따라나와 그녀를 배웅해주었다.
풀썩!
사정화가 떠나자마자 역심무극결을 푼 동천은 극심한 내공의 운용으로 어지러움을 느끼고 바닥에 쓰러졌다.
“앗? 주인님!”
놀란 소연이 동천을 잡아 흔들자 동천은 다 죽어 가는 소리로 말했다.
“으이씨이……. 나 안 죽었어어어.”
안도의 한숨을 내쉰 소연은 주인님을 일으켜 세우며 물었다.
“괜찮으세요?”
동천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니 눈엔 이게 괜찮아 보이냐? 헥헥.”
소연은 다시금 주저앉으려는 주인님을 꽉 붙들어주었다. 그녀의 몸에 기댄 동천은 힘없이 말했다.
“야아, 너무 쌔게 안지마. 갑갑해.”
놀란 그녀는 반사적으로 동천에게서 떨어졌다.
“앗? 죄, 죄송해요!”
덕분에 동천은 바로 바닥을 뒹굴었다.
“켁? 사람 죽네!”
지 아플 때는 목청 한번 컸다. 이래저래 자신의 실수로 주인님이 고생한다고 생각한 소연은 울먹이는 소리로 동천을 다시 일으켜주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말싸움할 힘도 아끼고 싶었던 동천은 그녀를 봐주는 대신에 한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업어 줘. 헉헉, 봐줄 테니까.”
낯뜨거운 소리에 소연은 다시 한번 놀랬다.
“예에? 주, 주인님을 제가요?”
물론 동천 또한 다시 바닥을 뒹굴었다.
“아이고, 나 죽네! 이, 이놈의 계집애! 일부러 그랬지!”
사실 쓰러졌다고 저렇게 엄살을 피울 리는 만무했다.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는데 검지와 중지손톱 두 개가 사정화와 맞닥뜨렸을 때 깨졌던 것이었다. 넘어질 때 자꾸 잊어먹고 그쪽 손을 바닥에 집었던 것이고.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 그저 놀라서 그랬을 뿐이에요. 정말이에요, 주인님.”
하도 열 받아서 소리친 동천은 그게 진짜로 마지막 힘이었던지 모로 풀썩 누워버렸다.
“에고, 힘들어. 에고, 암흑마교 최고의 인재가 쓸쓸히 죽어가누나…….”
주인님 성격에 이렇게 끝낼 리가 만무했는데 의외로 쉽게 혼내는 걸 포기하자 소연은 정말로 문제가 있는 줄 알고 동천을 다급히 업은 뒤 약전을 향해 헐레벌떡 뛰어갔다. 의외의 환자에 놀란 약전의 의원들은 서둘러 진찰을 시작했고 그들이 한결같이 내린 결론은 극심한 체력의 고갈이었다.
전신에 땀이 범벅이 된 소연이 이곳까지 손수 업고 왔음을 알 턱이 없는 그들은 체력이 고갈되어 잠이든 소전주와 땀으로 범벅이 된 소연을 번갈아 보며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어허, 사정 좀 봐주며 일을 치르시지 그랬소.”
소연은 무슨 소리인가 했다.
“예?”
그녀가 의아한 눈초리로 반문하자 지들끼리 서로를 둘러싼 의원들은 ‘모르는 척 해주길 바라나봐…….’ 라고 속닥거린 후 대표 의원이 싱긋 웃어주며 말했다.
“하하, 아무 것도 아니외다. 그저 소전주님의 몸이 많이 쇠약해져 있으니 몸도 좀 돌봐가면서 일에 열중하게 하라는 뜻이었소. 이마와 손은 잘 치료했으니 상처가 덧나지 않게 끔도 해주시고 말입니다.”
그제야 이해한 소연은 그들의 염려에 감사해했다.
“아? 잘 알아들었습니다. 주인님이 깨어나시면 꼭 그렇게 전해드리겠습니다.”
의원은 멋쩍어하며 대꾸했다.
“뭘 그런 걸 가지고. 하하.”
그 날 동천은 그곳에서 하룻밤을 묵었고, 다음날 하인들 사이에서는 소전주가 여색을 너무 밝혀서 쓰러질 정도였다고 소문이 파다하게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