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593화
소 뒷걸음치다 쥐를 잡다 2.
따다다다당!
부드럽게 검을 움직인 도연은 수월하게 암기들을 막아냈다. 암기들의 위력이 생각 외로 약해서 가능했던 것이었는데 애초에 진짜 공격은 검이어서 혼란용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우연인지 몰라도 마지막에 처리한 암기가 제일 바깥쪽이자 도연은 벌써 자신의 가슴으로 파고드는 환살의 공격에 마음이 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리를 해서라도 검을 안쪽으로 끌어들인 그는 재빨리 수십 가락의 검세를 터트렸다. 바로 태의 3초식인 연주무태(演奏舞太)였다.
‘이런!’
순간적인 공세에 빈틈을 찾아낼 수 없었던 환살은 계속 파고들었을 시에 동귀어진의 수를 염두해두지 않을 수 없자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여기에서 죽거나 다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막아내며 물러섰음에도 목 줄기를 스치는 검 날에 섬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법이로군!”
물러섬과 동시에 다시 도연에게 뛰어든 환살은 도연의 머리 위를 뛰어넘으며 검법을 시전 했다. 도연은 상대가 자신의 머리 위로 뛰어넘게 한 것 자체가 실수였음을 깨달았으나 이미 환살의 검은 그의 목숨을 위협하고 있었고 그는 그것을 막아야내만 했다. 허나, 이런 경우라는 건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도연은 극히 짧은 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뱀처럼 교묘히 파고드는 환살의 검을 다 막아낼 수 없었다.
스억―!
섬뜩한 소리가 도연의 몸을 타고 울렸다. 동시에 그는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아무리 대단한 무공을 지니고 있다해도 경험과 비 경험의 차이가 어떠한지를 여실하게 보여주는 승부였다.
“으윽!”
목숨을 건 대결이라는 것에 딱히 경험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었던 도연은 머리에서부터 등뒤까지 포괄적으로 노려오는 환살의 검법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생전 처음 당해보는 수법에 손까지 어지러워지자 그만 등을 당하고만 것이다. 반면, 죽음의 세월을 살아오며 자연스럽게 체득한 공격방법들 중에 하나를 성공시킨 환살은 피로 물 드는 도연의 등뒤를 슬쩍 바라보더니 손가락을 튕겨 도연과 마부의 혈을 점했다. 도연이 마음에든 것인지, 어떠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죽일 생각은 없는 듯 싶었다.
“애송이! 살예총요를 내놔라!”
분노에 물든 환살의 목소리는 그가 물 흐르듯 움직인 자리에서 흘러나왔다. 그만큼 신속한 동작으로 동천을 노렸다고 할 수 있다.
“헉? 도, 도연이!”
조금은 믿었던 도연이 그렇게 허무하게 당할 줄 몰랐던 동천은 뒤에서 몰래 환살을 암습하려다가 기겁을 하며 도망쳤다.
“으악! 사람 살려! 아, 아니, 약소전주 살려! 살수다! 환영혈이 쫓아온다!”
그냥 사람 살려달라고 하면 안 도와줄 것 같아서 바로 약소전주 살려달라고 외친 동천은 누군가 자신의 구조요청을 듣고 도와주러 와주기를 바랬지만 아쉽게도 이곳은 운치 있는 정자와 작은 호숫가뿐인 외진 곳이었다.
“흐흐, 동료들 따위는 기대하지 마라. 지원군은 아직도 본 살이 포위망에서 벗어나지 못한 줄 알고있을 테니까. 그러니까 그들은 네놈이 도망치는 곳이 아닌 정 반대쪽으로 모일 거라는 말씀이니라. 크크크!”
자신감에 가득 찬 환살의 목소리에 안면을 구긴 동천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 무의미한 구조요청은 도망치는데 있어서 쉽게 지치게 할 뿐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 경우는, 확신할 수 없었던 환살이 자꾸 입을 놀리면 큰일이라는 생각에 그럴싸하게 말을 꾸민 것이었는데 운 좋게도 잘 먹혀 들어 간 경우라고 할 수 있었다. 동천은 그것도 모르고 이렇게 된 자신의 처지를 모두 도연에게 돌렸다.
‘뭐? 태의 묘리를 10성이나 깨달아? 아니, 그런 새끼가 재주넘기 한 번에 무릎을 꿇나?’
생각만 해도 화가 났다. 도연이 쉽게 무너진 것 때문에 화가 났다기보다는(무시는 못한다) 자신이 그렇게 허무하게 당할 놈의 성취도를 부러워하고 질투했다는 것에 화가 났던 것이다. 이를 악다문 그는 뒤따라오는 환살을 노려보며 경공에 박차를 가했다.
“이 영감탱이야! 죽으려면 계속 따라와 봐라! 이 길로 계속 가다보면 분명히 본교의 무사들이 진을 치고 있을 테니까!”
환살은 여유 있게 받아쳤다.
“흐흐, 그랬으면 좋겠구나.”
하지만 웃으면서 대꾸한 환살은 아무리 자신이 중상을 입은 상태라고는 해도 도저히 격차가 좁혀지지 않는 이 현실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귀영약문이 의술과 경공에서 만큼은 천하에 부러울 것이 없다고 하더니 과연 허명(虛名)만은 아니었구나.’
기실, 심한 중상을 당하고도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했던 환살은 몸이 점점 지쳐만 가는 것을 부인할 수 없었다. 만일 동천과 도연이 조금만 강호의 칼밥을 먹었더라면 허세를 부린 환살의 상태를 눈치챌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지 못했다는 데에서 현 상황이 벌어진 것이니 이제와 그 누구를 탓하리요. 물론, 동천은 도연을 탓했지만.
“엇? 여기요! 환살이 쫓아오고 있으니 어서 도와주시오!”
동천과의 격차가 어느 정도 벌어진 환살은 그가 보일락 말락 하는 시점에서 앞을 보며 소리치자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거짓이던 아니던 간에 일단은 살펴봐야만 하는 것이다. 숨을 죽이고 은신한 뒤에 조금씩 앞으로 전진한 그는 곧 전방에 아무도 없음을 깨달았다.
“으득!”
이가 부러져라 꽉 깨문 환살은 살기를 터트리며 신형을 띄웠다. 몸에 한계가 오고 있는지 진기가 이어졌다 끊기는 현상이 일어났지만 그는 여기에서 물러설 수 없었다. 지금이라도 몸을 생각해서 은신한다면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숨어 지낼 자신이 있는 그였지만 애석하게도 지금이 아니면 살예총요를 수거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포기할 수 없다! 헉헉, 그것으로 인해 혈육과도 같은 아우들이 죽었기 때문이다!’
강한 집착을 보인 환살은 쏜살같이 뒤쫓았고 노력의 대가로 멀리에서나마 동천의 꽁무니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지치고 숨이 헐떡였으나 안 그런 척 진노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이놈! 지금이라도 물건을 돌려준다면 무사히 보내주겠느니라!”
그러자 동천의 회답이 바로 들려왔다.
“에이, 영감탱이야! 지금 그걸 이 몸보고 믿으라는 소리냐? 그 물건이 수중에 없기도 하지만 만일 그것을 받는다면 바로 팔다리를 병신으로 만들어 놓은 다음에 목을 따려는 속셈을 누가 모를 줄 알고? 카악, 퉤퉤퉤!”
그가 보았던 삼류소설에서는 다 그렇게 죽었기 때문에 동천은 확신에 가득 찬 음성으로 말했다. 어처구니가 없어진 환살은 다시 외쳤다.
“한낱 살수일지라도 명예가 소중하거늘, 어찌 믿지 못한다는 말이냐! 오냐, 그렇게 못 믿겠거든 살예총요의 전반부를 던져놓고 계속 도망치면 될 것이 아니냐! 어차피 본 살은 시간이 없느니라!”
원하는 것을 얻는다면 용담호혈에서 재빨리 도망칠 것이니 더 이상 동천을 쫓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듣고 보니 드러내놓고 활동하면 할수록 꼬리가 잡히는 짓인지라 동천은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그렇군! 쳇, 여기 있으니까 잘먹고 잘 살던지, 말던지!”
품속을 뒤진 동천은 좌측으로 멀리 작은 책자를 내던졌다. 눈을 반짝인 환살은 재빨리 방향을 틀어 그것을 주워들었고, 희열에 가득 찬 손으로 『누가누가 잘사나』 라는 책자를 집어들었다.
“…….”
한순간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분간할 수 없었던 환살은 서서히 제정신이 돌아오자 부들부들 떨지 않을 수 없었다. 살아오며 이렇게 약올라보기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이놈! 죽이리라!”
분노가 정신을 지배해서인지 몸이야 어떻게 되건 말건 그는 한 걸음에 삼사 장씩 미끄러지듯 쭉쭉 뻗어나갔다. 덕분에 그는 바로 동천을 뒤따라붙었고, 거리가 좁혀지는 상황에 놀란 동천은 개발에 땀나도록 내공을 극한까지 끌어올렸다. 한참을 쫓고 쫓기는 상황이 그렇게 이어지자 멀쩡한 신체와 그렇지 못한 신체의 차이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것을 감지한 동천은 자신도 지치는지라 재빨리 소리쳤다.
“이봐, 영감! 진짜 난 없어! 살예총요인지 살어릿다인지 본 적도 없다구! 후우, 후우. 은형포단은 가지고 놀기에 괜찮을 것 같아서 가지긴 했지만 그 외에는 건드리지 않았단 말야! 헥헥, 말하니까 지치네. 하여튼 살예총요라면 제발 좀 딴대가서 알아봐! 응? 그럴 거지? 그치? 응응? 그치그치? 에이 씨, 왜 대답이 없어 이 호로 영감탱이야!”
동천은 환살의 추적에서 벗어날 생각이나 있는 것인지, 성질이 난다고 바로 욕을 해댔다. 어쨌든 동천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상황을 정리한 환살은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처음 그가 서북당주 위지천이 아닌 동천을 목표로 삼았던 이유는 그 살예총요라는 물건이 바로 암흑마교의 이각(二閣) 중에 하나인 살각(殺閣)의 비전무서(秘傳武書)였기 때문이다.
위지천이 죽고 싶어서 환장하지 않은 다음에야 내성수호 1단주인 연평을 만났을 때 살예총요의 전반부에 관한 이야기를 언급했어야 했다. 헌데, 혈살을 죽이고 왔다는 그가 아무런 언급도 없자 혈살의 죽음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동천을 의심한 것이었다. 약소전주야 아직 어리고 모르는 것이 많을 시기라서 살예총요가 살각의 비전무서인 줄도 모르고 몰래 슬쩍했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설마… 헉헉, 서북당주였단 말인가? 그, 그런 것인가?’
이제와 동천이라고 확신했던 부분이 상당히 빛이 바랬지만 워낙에 동천이 암흑마교 내에서 사악하고 약삭빠른 인간이라고 소문이 나있는 상태인지라 포기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것을 열외로 놓더라도 여기까지 와서 포기를 하기에는 너무도 멀리 와있는 상태였다.
‘하, 한계가 찾아옴을 느낄 수 있다……. 허억, 허억! 하지만 나는 절대로 포기할 수 없음이니!’
환살이 이렇게 살예총요에 집착하는 이유에는 아우들의 죽음 이외에도 다소 복잡한 비사(秘事)가 있었다. 은중각의 살수로서 최고의 살수라는 환영혈의 칭호까지 받게된 그들은 한때 무서울 것이 없는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오만하고 자만심에 가득 차 있었으며 주위의 간부들조차 은근히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무림이라는 피의 역사를 돌이켜보았을 때 주인보다 뛰어난 수하는 짧은 생을 마감했음을 그들은 나이를 먹어가며 절감할 수 있게 되었다. 각주를 내려다볼 정도의 명성을 지니게 된 환영혈은 청부를 해결하면 할수록 불안해졌고 명성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남몰래 각주의 눈치를 보게 되었는데, 그렇게 그들의 불안감이 나날이 커져만 갈 즈음 마침내 사건이 터지게 되었으니, 바로 불안감에 참다 못한 혈살이 각주의 기밀문서들을 훔쳐보다가 자신들의 위험성이 내포된 건의안을 읽게 된 것이었다.
그때부터 그들은 각주를 위시한 고위간부들과의 일정한 거리를 두었고 꼬투리라도 잡히지 않게끔 조심하는 철저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고위간부들이 술을 마시며 환영혈을 험담하다가 술기운에 제거를 하던가 물러나게 해야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몰래 엿듣게 된 그들은 분노하여 그 자리에서 모두를 몰살시키는 사건이 일어나고야 만다. 실로 은중각이 발칵 뒤집히지 않을 수 없었던 사건이 터진 것이다. 대노한 각주는 환영혈의 척살 명령을 내렸지만 되려 절명(絶命)에 가까운 치명상을 입었고, 바로 그 날을 기점으로 환영혈은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그 이후, 은중각의 내부에서는 환영혈이 각주를 죽일 수도 있었지만 고아였던 자신들을 데려다 키워준 은혜 때문에 차마 목숨은 거두어가지 못했던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소문에 불과할 뿐이어서 그이야기는 쉽게 그들의 뇌리에서 잊혀져 갔다. 그리고 은중각은 발빠르게 현재의 환영혈이 살수계에서 은퇴를 했음을 만천하에 공표(公表)했다. 반란자들이라고 떠들어대기에는 내부의 치욕을 뒤로하고서라도 살수 집단이라는 명성에 큰 치명타를 입게 되었기 때문이다.
“제길! 제기랄! 그만 좀 따라와 이 영감탱이야! 으으, 좋아. 좋다구! 시팔, 누가 이기나 해보자니까?”
확실히 젊은 놈답게 지친 상태임에도 오기로 다시금 힘을 낼 수 있었다. 하지만 혈살은 늙은 나이이고 또 중상까지 입은 몸이라서 그런지, 동천이 순간적으로나마 아까 보여주었던 최고의 속력을 내자 체감하는 속도의 차이가 엄청 나는지라 그만 얼굴이 핼쑥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허억, 허억. 혀, 혈제. 왜 하필이면 저런 놈에게 죽었는가…….’
차라리 위지천이나 다른 누구에게 죽었더라면 이런 고생은 안 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는 살예총요라는 목표가 있었기에 좌절하지 않았다. 그것을 얻는다는 것은 곧 먼저 간 아우들을 위로하는 동시에 은중각을 향한 복수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우, 우리는. 헉헉, 우리를 키워준 각주가 죽기 전까지는……. 으, 은중각의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보, 보류하기로 서로들 약조했다. 허억, 허억. 그리고 각주는……. 이, 이년 전에 죽었다. 헉헉헉!’
그들이 여기까지 오게된 배경은 이렇다. 이년 전, 마침내 각주가 죽자 그들은 은중각을 무너트리기 위하여 슬금슬금 가지치기를 시작했다. 그러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은중각의 대처는 재빨랐고 환영혈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후대의 환영혈들은 죽은 각주가 평소에 그들의 침입을 두려워했던지 그들 못지 않게. 아니, 그들보다 더욱 강한 자들로 키워 놓은 것이 아닌가! 은중각을 무너트리려다 되려 죽을 고비만 수십 차례를 넘긴 그들은 예전보다 두세 배나 강해진 은중각의 모습에 무력함을 통감했고, 하는 수 없이 눈물을 삼키며 다시 음지로 숨어들어야만 했다.
그러던 차에 어떻게 알고 왔는지 암흑마교에서 그들에게 접촉을 시도했다. 그때가 바로 일년 전이었다. 이유야 어쨌든 은퇴한 살수들로 소문이 난 그들은 처음엔 단호히 거절했지만 영살이 암흑마교의 살각에서 살예총요를 빼돌린 후 은중각에 몰래 숨겨놓는 것은 어떻겠냐는 계획을 짜면서 생각이 바뀌게 되었다. 개개인으로서는 도저히 은중각이란 단체를 무너트릴 수 없음을 절감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암흑마교의 제의를 수락했고 바로 무림맹의 파양호 분타주인 형음풍(形吟諷)을 아무도 모르게 제거해주었다.
하지만 일개 사주를 받은 자들이 그거 하나 성공했다고 감히 암흑마교의 중심부로 들어올 수나 있겠는가? 그들은 그 이후로 더 이상의 접촉이 없음에 내심 포기하고있는 상태였는데 고맙게도 질투에 눈이 먼 상관은혜가 암흑마교의 내교(內敎)로 불러들이는 것이 아닌가! 환영혈은 옳다구나 상관은혜의 제의를 받아들여주었고, 은신술의 대가들답게 살예총요를 훔친 뒤 강소홍을 죽여야만 열어두는 탈출로로 유유히 빠져나가기 위해서 그녀를 공격했다가 지금의 상황으로까지 이어진 것이었다.
부르르르!
그때 당시의 기억이 떠오르자 환살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으으! 무, 문영이라는 한낱 시비 따위가 그렇게 강할 줄이야…….’
그들 환영혈은 애초에 강소홍이 데려온 자들은 누구를 막론하고라도 무시할 수 없다는 전제를 깔아놓는 뒤 살행을 시작했다. 문영도 그런 자들 중에 하나여서 시비의 신분으로 데려오긴 했지만 나름대로 한 수는 갖추었을 것이라고 예상은 했었다. 헌데, 그 한 수가 만독문의 요인들을 모두 합친 것보다 대단한 것일 줄이야.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던 그들은 강소홍과 숭의겸을 궁지에까지 몰아넣고 거의 일을 끝마치려는 순간에 문영의 장법을 막다가 오장육부가 크게 뒤틀리는 중상을 입고야 말았다. 환살과 혈살은 뒤늦게 대경하여 전심전력으로 막은 탓에 미비한 충격을 받았지만 영살이 그로 인해 중상을 입고 도망치다가 1단주 연평에게 어이없는 죽음을 당하고 만 것이다.
‘하, 하늘이 도와주지 않았음이다. 헉헉, 누군가가……. 누, 누군가가 만독문의 소문주에게, 헉헉! 우리가 노리고 있음을 알려주지만 않았더라도… 소, 손쉽게 처리하고 떠났을 텐데……. 흐윽, 흐윽! 이, 이렇게 원통할 때가!’
애초에 그들은 살예총요를 훔친 그 날에 강소홍을 처치하고 떠나고자 했었다. 그녀를 살해한 뒤에는 살예총요를 훔칠만한 시간적인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헌데, 하필이면 그 날에 강소홍의 입에서 환영혈에 관한 소문이 은밀히 퍼졌고, 상관은혜에게 자초지종을 따진 그들은 곧 누군가가 그녀와 접촉했었다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상관은혜는 시간을 더 준다면 그자가 누구인지 알아내도록 하겠다고 했지만 이미 살예총요를 훔친 터라 시간을 끌면 끌수록 불리하다고 생각한 그들은 경비가 철저함에도 불구하고 바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결과는 앞서 말해준 대로이니 그들로서는 정말 운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더, 더 이상은 몸이!’
중상인 상태에서도 용케 동천의 꼬리를 놓치지 않았던 환살은 아무리 애를 써도 몸이 비틀거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바로 그때 동천이 앞을 보며 반갑게 소리쳤다.
“여, 여기요! 헉헉, 이제야 만나는군! 어, 어서, 내 뒤의 환살을 처리해주시오!”
“개, 개새끼…….”
살수생활을 해오며 뒤쫓던 상대에게 환살이 욕을 해보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무성한 수풀로 들어서거나 산등성이를 내려가서 잠깐 보이지 않을 때면 어김없이 자신의 편을 만난 양 저렇게 떠들어댔으니 그로서는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어린놈의 잔꾀라고 하기엔 무식하리만치 계속 똑같은 방법만 써대고 있었는데 그게 또 계속 당하다 보니 ‘으으, 한번쯤은 진짜일 것이다. 그럴 것이다!’ 라는 의심을 하지 않고서는 배겨나질 못했던 것이다. 결국 이번에도 멈춰 선 그는 숨을 죽여야 함에도 제어할 수 없었음인지 거친 숨결을 내뿜으며 전방을 살폈다. 그리고 결과는 언제나처럼 같았다.
“으으으! 내 살다살다 이런 놈은 처음이로다!”
분노하여 신법을 전개한 환살은 빛살처럼 앞으로 나아가려는 순간 그의 몸 어딘가에서 뚝, 하고 끊어지는 섬뜩한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동시에 진기가 흩어진 그는 하단전과 가슴팍에서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컥, 쿨럭! 웨엑! 웩!”
앞으로 나동그라진 그는 두어 모금의 피를 토한 뒤 급격히 두 눈의 정기(精氣)를 잃어가며 고통스러워했다. 이는, 내공이 소멸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쿨룩, 쿨룩! 허억, 허억! 복수가……, 그륵, 보, 복수가 눈앞에 있었거늘……! 흐으, 흐으.”
생각해 보니 살예총요의 후반부만 은중각에 가져다 놓았더라도 복수는 충분히 해낼 수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죽일 놈의 애송이를 이렇게까지 뒤쫓지 않았어도 되었고, 또 이렇게 허무하게 죽어가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말과 일맥상통했다. 그것을 깨닫게 된 환살은 갑자기 인생의 허무함이 물밀 듯이 밀려들었다.
‘허허, 결국 이렇게 끝나는 것을…….’
불현듯 어릴 적 그들을 손수 가르쳐주던 각주의 말씀이 떠올랐다.
“쿨럭! 헉헉. 그, 그 어떠한 경우일지라도……. 사, 살수는 복수할 자격이 없는 자들이라고… 해, 했던가? 큭큭큭! 옳소. 가, 각주의 말씀이 참으로 옳소이다……. 허억, 헉.”
그것을 어겨서 자신과 앞서간 아우들이 이런 비참한 꼴을 당하게 된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와 생각한들 다 부질 없는 짓이었다.
‘그, 그러고 보니 애초에 살수가 무슨 놈의 복수란 말인가. 헉헉, 그만큼 손에 피를 묻혔으면 은퇴로 소문이 났을 때 조용히 평생을 속죄하며 가여운 자들의 삶에 투자했어도 모자랐거늘…….’
죽음의 순간만큼은 진실하게 되는 것이 인간이라고 했던가? 아니면 마지막 순간까지도 편하게 죽고 싶다는 인간의 이기심 때문인가. 이제 곧 꺼져갈 생명임을 잘 알고 있었던 환살은 자신의 죽음이 추하고 싶지 않았던지 바둥바둥 일어나 자세를 바로 하고 겨우 앉았다. 꺼져 가는 생명과는 반대로 그의 숨결은 점차 안정을 되찾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