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598화
쏴아아아아!
간만에 시원한 빗줄기가 쏟아져 내렸다. 강소홍은 살짝 열어둔 창문 사이를 바라보며 부끄러워하는 듯 하기도 하고 고민하는 듯 하기도 하는 등 예측할 수 없는 갖가지 표정들을 연출해내기 시작했다.
“과연, 과연 그의 말이 사실일까?”
언제 입을 열었는지도 모르는 사이에 중얼거린 그녀는 갈등이 서린 눈망울로 양손을 꽉 쥐었다. 아울러 그녀는 서릿발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확인해보면 알 수 있겠지!”
다시 침묵하기 시작한 그녀는 닷새 전의 일을 찬찬히 떠올렸다.
“후우…….”
조그맣고 여린 듯한 입술에서 나지막한 한숨이 새어나왔다. 조용히 눈을 들어 방안의 내부를 바라보던 여인은 수건을 꼭 짜서 자신의 얼굴과 목덜미를 닦아주는 손길을 제지시키며 입을 열었다.
“문영아, 굳이 이럴 필요는 없으니 치우고 가서 쉬거라. 더 이상의 위험은 없으리라 본다.”
주인의 명령에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고개를 끄덕인 문영은 소리 없이 일어나 옆방으로 건너갔다. 문영이 밖으로 나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기척을 내고 들어온 숭의겸은 온몸 곳곳에 붕대를 감은 상태에서도 아픈 기색 하나 없이 허리를 숙였다가 곧게 펴들었다.
“냉 소교주님께서는 가셨습니까?”
자리에서 누워 있다가 일어난 강소홍은 고개를 끄덕인 뒤 웃는 듯 마는 듯 묘한 표정을 지으며 투정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내내 소교주께서 제 곁을 지켜주시다시피 하시는 바람에 숭 당주와는 암살시도를 당한 후 처음 보는 것인데 본녀의 상세가 괜찮은지 물어보지도 않는군요?”
흠칫한 숭의겸은 자신이 상처도 잊은 채 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연신 찧어 댔다.
쿵쿵쿵!
“죽여주십시오, 너무도 큰일을 당한 터라 경황이 없어 소홀했습니다! 하지만 소신의 충심은 헤아려주시옵소서!”
되려 당황한 강소홍은 서둘러 숭의겸을 일으켜 세운 뒤 다소 질책의 시선을 내비쳤다.
“그런다고 몸을 함부로 상하게 하시면 되나요? 그저 웃자고 해본 소리였으니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는 말아주세요.”
소문주가 일으켜 세워주는데 감히 거부할 수 없었던 숭의겸은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소신은 그저 죄송스러울 따름입니다.”
강소홍은 무거운 분위기를 일신시켜 보고자 했던 소리가 골치만 아플 뿐이자 괜한 말을 꺼냈다고 생각하며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이제 그 부분은 넘어가기로 하겠어요. 그리고, 약왕전의 소전주께서 환영혈 중 둘을 처치하셨다고 들었어요.”
그 일에 관하여 설명해달라는 소리이자 숭의겸은 자신이 아는 한도 내에서 동천에 관련된 소문들을 말해주었다.
“그렇습니다. 듣기로는 품행이 방정맞지 못하고 이유 없이 사람을 구타하는 등 아주 악질 중의 악질인 한량(閑良)으로 소문이 났는데 실력까지 그렇게 출중할 줄은 아무도 몰랐다고 합니다. 이번을 계기로 그의 실력이 드러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일단 고개를 끄덕인 강소홍은 첫인상이 괜찮았던 동천이 그렇게까지 악명이 높자 무언가 잘못된 소문일 것이라고 순진한 생각을 했다.
“소문이 어떠하든 그분은 환영혈 중 둘을 잡아서 제게 넘겨주었어요.”
숭의겸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시체들은 불결한 존재이기 때문에 이곳이 아닌 약간 떨어진 곳에다 안치해놓고 있습니다.”
희미하게 웃음 진 강소홍은 입을 열었다.
“좋아요. 그렇다면 사람을 시켜서 내일 중으로 약소전주를 모셔오도록 하세요. 숭 당주는 부상을 입은 상태이니 다른 사람으로 말예요. 그쪽에서 성의표시를 해주었는데 어찌 제가 감사의 인사조차 아끼겠어요?”
섣불리 대답하지 못한 숭의겸은 강소홍의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냉 소교주께서 타인과의 접촉을 엄금하셨는데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미약하게 인상을 찌푸린 강소홍은 대꾸했다.
“이 경우는 특별한 경우예요. 더군다나 왜 제가 그런 것까지 소교주 그자의 눈치를 봐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내가 아는 살인마독(殺人魔毒) 숭의겸은 이리도 간이 작은 자였던가요?”
엄한 질책이 서린 목소리에 안색을 굳힌 숭의겸은 이를 악물고 다시금 부복했다.
“잠시 이곳에 머물며 마음이 약해져있었던 모양입니다! 죽여주시옵소서!”
사람 다루기 참으로 힘들다고 생각한 강소홍은 한숨을 내쉰 후 그에게 명했다.
“일어나세요.”
“존명!”
크게 다친 곳은 왼 팔뿐이어서 무리 없이 방안을 거닐던 강소홍은 한참이 지난 후에야 조용히 입을 열었다.
“본녀 또한 냉 소교주를 의식하지 않는 것은 아니에요. 다만 그는 내일 이곳에 없을 예정이어서 숭 당주에게 그런 부탁을 했던 거예요.”
숭의겸은 그제야 깨달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 그런 일이!”
그녀는 그런 숭의겸을 돌아보며 위엄이 서린 목소리로 명령했다.
“잘 알아들었다면 그를 데려오세요. 감사의 인사정도는 해야겠으니까.”
숭의겸은 힘차게 대답했다.
“존명!”
다음날이 되어 동천을 모셔온 숭의겸의 심복은 자신의 임무를 무사히 마쳤음을 보고한 뒤 소리 없이 사라졌다. 미리 점심을 준비하고 있었던 강소홍은 동천을 부드럽게 반기며 그를 마주 앉혔다. 강소홍의 권유로 자리에 앉게 된 동천은 무언가 말을 꺼내려다가 그녀의 다친 팔 소매에서 약간 드러난 붕대를 발견했는지 걱정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저런? 그 팔, 심하게 다치신 모양입니다!”
강소홍은 형식적인 예의를 생략하고 바로 상처를 걱정해주는 동천의 모습에 살며시 미소를 보여주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차린 것은 없지만 약소전주님의 활약과 그 이후의 처리문제에 대하여 깊은 고마움을 표할 길이 없어 조촐하지만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맛있게 드셨으면 합니다.”
동천은 가볍게 양손을 모아 포권을 취했다.
“하하, 식사에 초대해주신 것만으로도 과분하니 그 점에 관해서는 염려 놓으십시오.”
그런 동천을 바라본 강소홍은 어쩐지 하는 행동이 귀여워 보였다. 그때문인지 자연스럽게 미소한 그녀는 약소전주가 자신보다 어리고, 거기다 또 동안(童顔)인 편인지라 더욱 그렇게 느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동천을 대하는 어투가 딱딱한 대화체에서 부드럽게 변화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면 안심인데요? 자아, 식기 전에 어서 드세요.”
“예, 그럼 염치 불구하고 먹겠습니다. 아참? 강 소문주님께서도 많이 드십시오.”
예의상 하는 말이 아니듯 하자 강소홍은 물었다.
“무슨 다른 이유라도 있나요?”
고개를 끄덕인 동천은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별 건 아니고, 자고로 환자는 많이 먹어야 치유가 빠르답니다.”
강소홍은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호호, 틀린 말은 아니로군요. 고마워요. 가능한 많이 먹도록 노력해볼게요.”
하얗고 고른 치열을 드러낸 그녀는 문영을 제외한 상대와 정말 오랜만에 편하고 식사다운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덕분에 식사를 하면서 가끔씩 동천이 뜻 모를 눈빛을 보내왔지만 악의적인 눈빛은 아니라고 느꼈는지 그저 궁금함으로 시작한 뒤에 좋은 느낌으로 끝을 맺는 여유까지 지니게 되었다. 잠시 후 식사를 끝마친 그녀는 동천에게 물었다.
“입에는 맞으셨나요?”
동천은 기운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정말 잘 먹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작은 보답이라도 할 겸, 소문주님의 그 팔목의 상처를 살펴보았으면 하는데……. 허락해주시겠습니까?”
비록 치료를 앞세웠으나 정혼자가 내정된 여인이 둘만이 있는 밀폐된 공간에서 손을 맡긴다는 것은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상대의 신분이 약왕전의 소전주였고, 또 어리게만 보이는 사람이어서 그녀는 부담 없이 손을 내밀어주었다.
“독전의 전주님께서 정성껏 치료를 해주셔서 달리 손보실 곳은 없으리라고 보지만 굳이 마다하지는 않겠어요. 잘 부탁드려요.”
“하하,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웃으며 그녀의 팔을 자신 쪽으로 살며시 끌어당긴 동천은 단단히 고정된 붕대를 천천히 풀어 흘리기 시작했다. 붕대가 거의 다 풀릴 즈음, 상처와 접촉이 되어있던 붕대가 떨어져나가며 쩌릿쩌릿한 고통이 찾아왔지만 그런 정도의 고통쯤은 우스운 것이어서 그녀는 전혀 표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마침내 모든 붕대가 풀어지자 동천은 마치 자신이 상처를 입은 것처럼 일그러진 얼굴을 했다.
“흐음! 듣던 것보다 상당히 깊게 베이셨군요. 그래도 상처부위를 잘 꿰맨 덕분에 지장은 없어 보이지만 미세한 흉터는 남을 듯 보입니다.”
그녀도 여자이기 때문인지 아닌 척했지만 씁쓸함은 감추지 못했다.
“무가의 여인에게 상처 한둘은 예사로 지니고 있기 마련이에요. 저는 상관하지 않고 있으니 걱정해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되려, 그것이 부담스러워 탈이 날 수도 있으니까요. 호호호.”
남은 한 손으로 살며시 입가를 가리며 웃던 그녀는 문득 다친 팔목이 따스해지는 것을 느꼈다. 의아해진 그녀가 바라보자 양손을 사용중인 약소전주가 그녀의 피부와 접촉하지 않으면서도 부드럽게 팔목을 타듯이 어루만져주는 것을 바라볼 수 있었다. 얼핏 보면 토속신앙의 하나로서 의식을 치르는 과정 중에 하나를 보는 듯 했지만 동천은 진지해진 얼굴로 현재의 진행상황을 설명해주었다.
“이 치료법은 본 전의 비전수법으로서 내공을 이용하여 치료하는 것입니다. 자랑할만한 것은 아닙니다만 적어도 상처는 남지 않으리라 봅니다.”
쉽게 믿을 수 없었던 소홍은 놀란 목소리로 반문했다.
“어머, 그런 것이 가능한 것인가요?”
동천은 겸손하게 말했다.
“하하, 작은 재주일 뿐입니다.”
처음에는 그저 따듯하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는데 그 따스함이 지속적으로 전달되어오자 놀랍게도 일각 정도가 흐른 시점에서부터는 상처 자국들이 희미해져 보이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팔의 통증까지 거의 느껴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내부적으로도 상당한 치유의 진전을 보였고 말이다. 그저 놀랍기만 해서 확인하고 또 확인을 해본 강소홍은 결국 진정으로 믿지 않을 수 없었다.
“대단해요! 이런 건, 이런 건 정말!”
강소홍이 신기함과 따듯함을 음미하면서 시간을 보낼 동안 동천은 엄청난 진기의 사용으로 아주 죽을 맛이었던지 창백해진 얼굴로 거칠어진 숨결을 가다듬었다.
“하아, 하아. 결과에 만족하셨다니 다행입니다.”
그제야 자신이 너무 들떴다는 것을 인지한 강소홍은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며 입을 다물었다. 이어 무슨 결심이라도 한 것일까? 그녀는 상당히 호전된 자신의 왼팔을 과시라도 하듯 양손을 움직여 동천의 손들을 마주 잡더니 눈앞으로까지 들어올리고는 서서히 진기를 불어 넣어주었다. 지금 그녀가 행하는 이것은 내력의 전수가 아니라 지친 쪽의 진기유통을 원활히 도와주는 방법으로서 기운이 왕성한 쪽이 그렇지 않은 쪽에 잠시 내공을 빌려주는 것이었다.
만일 지금이 내력의 전수였다면 동문(同門)이거나 같은 원류의 무공을 익힌 자들이 아닐 시에는 서로 다른 내공의 충돌로 인하여 주화입마는 반드시 뒤따른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러니 후자의 경우는 강소홍이 자살을 결심하지 않은 이상 이런 자리에서 행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무림인들 사이에서는 급할 때 요긴하게 사용할 정도로 위험하지는 않았지만 둘 중 하나가 독한 마음을 먹고 흡성대법을 익혔을 시에는 크나큰 위험이 따를 소지가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우우우웅!
강소홍의 손에서부터 밀려들어오는 진기의 흐름은 방대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끊어지지는 않을 정도로 계속 이어졌다. 그것을 받아들여 심법을 운용하려던 그는 강소홍의 목소리를 듣고 잠시 멈추었다.
“소주천(小周天)으로 간단하게 두어 번 진기를 돌린 뒤에 거두어들이기로 해요.”
고개를 끄덕인 동천은 상대의 내력을 흡수할지도 모르는 귀의흡수신공보다는 역심무극결을 운용할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곧 그 방법은 포기했다. 왜냐하면 소모한 진기가 귀의흡수신공이다 보니 그렇지 않았던 역심무극결을 백날 운용해봐야 귀의흡수신공에는 영향을 주지 않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간단하게 끝마칠 수 있는 소주천인 관계로 자신이 정신만 바짝 차리면 상대의 진기를 건드리지 않고 무사히 운기를 끝마칠 수 있으리라 예상하고는 결국 소모했던 귀의흡수신공을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는 틀린 예상도 아니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이제는 어느 정도 자신의 몸에서 진기를 다스릴 줄 아는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약소전주의 진기운용이 상당한 속도로 회복되어 가는구나. 이제 천천히 진기를 거두어들이면 무리는 없을 것이다.’
생각을 마치고 동천의 몸에 잠시 상주시켜준 내공을 천천히 되돌리기 시작한 그녀는 빨려오는 듯하던 진기가 갑자기 상대의 단전 쪽으로 흘러 들어가자 대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앗?’
급해진 그녀는 몸 속에 남아있는 내공으로 저항을 해보았지만 역부족이었다. 진땀을 흘린 그녀는 억지로라도 동천과 맞잡은 양손을 뿌리쳐 보았으나 마주한 손은 대못이라도 박힌 듯 단단히 고정되어 떨어질 생각을 안 했다. 한마디로 강소홍으로서는 어처구니가 없었던 것이다.
‘이럴 수가! 어찌 이 자가 순수한 성의를 흡성대법으로 갚는단 말인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강소홍의 입장에서는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더욱 분노한 이유는 마치 자신은 아무 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눈을 감은 채 무아지경에 빠진 것처럼 행동하는 약소전주의 그 가증스러운 태도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섣부른 호의에 개탄했고, 차라리 이렇게 된 마당에 미련 없이 세상을 등지는 것 또한 하나의 방편이라는 생각이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크게 마음이 뒤흔들린 그녀는 모든 것을 포기했는지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스르르 눈을 감았다.
‘그래… 힘든 나날이었어. 내세에는 좀더 편하게 미물(微物)로서의 생을 살아보는 것도…….’
슈우우우우.
그때였다. 동천의 전신모공이 열리고 그곳에서 푸른색 운무가 흘러나온 것은. 강소홍이 아마도 이 광경을 지켜보았더라면 기겁을 하고 만독혼원공이란 이름을 크게 외쳤을 테지만 운명이었던지 죽음을 받아들인 상태여서 그녀의 두 눈은 꼭 감겨있는 상태였다. 그러는 사이에 만독혼원공의 운무는 천천히 동천의 신형을 감싸는 듯 싶더니 재빠르게 강소홍 쪽으로까지 그 세를 넓혀갔다. 그리고는 다시 천천히 동천과 그녀의 몸 속으로 흘러 들어가기 시작했다.
‘아! 아아…….’
야릇한 느낌에 몸을 꿈틀한 강소홍은 아주 친근한 느낌이 그녀의 몸을 어루만지자 본능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묘한 쾌감이 그녀의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마, 마치 누군가에게 애무를 당하는 듯한……. 아아, 이 느낌은 도대체! 아흑?’
이런 느낌이 처음이었던 그녀는 참을 수 없는 쾌감에 전신을 심하게 비틀었다. 머리에서부터 시작한 어루만짐은 그녀의 얼굴을 타고 흘러 가슴 쪽으로 내려가더니 장난을 치듯 천천히 배꼽에서 머물다가 이내 그녀의 둔부를 타고 미끄러져 미지의 영역으로 강하게 흘러 들어갔다.
“흐윽……!”
묘한 신음을 터트린 강소홍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전신을 바르르 떨었다. 죽음을 인정한 상태에서 비롯된 환각인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님을 확실히 느꼈던 것이다.
‘설마!’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결과를 떠올린 그녀는 분노하여 두 눈을 부릅떴다. 이 상황에서 자신을 건드릴 사람이 동천 빼고 그 누가 있겠는가.
‘가, 감히, 이 쳐죽일 색마가!’
그녀의 욕은 거기에서 그쳤다. 어찌된 영문인지 그들 둘은 아직도 양손을 맞잡고 있었고 그녀의 단전에는 본래의 내공이 충만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영문을 몰라 그저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그녀는 멍하니 있다가 천천히 손을 떼자 이번에는 쉽게 손이 떨어졌다. 내심 안도한 그녀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동천과 자신의 전신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어찌된 일이지? 내공이 원래대로 되돌아왔음은 물론이고 깨끗한 물의 결정체처럼 지극히 순수하기가 이를 데 없지 않은가! 도대체 이게…….’
내공이 불어난 것은 아니었는데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순수한 만독혼원공이 몸 안에 가득 차 있음을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즉, 아무리 대단한 신공(神功)일지라도 내공을 쌓아 가는 와중에 알게 모르게 외부의 영향을 받아 사기(邪氣)가 약간씩 섞이기 마련이었는데, 지금 그녀가 느끼는 만독혼원공은 전혀 그런 외부의 사기가 느껴지지 않는 다는 말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 어떻게?’
모르는 것들 투성이었다. 그녀가 눈을 떴을 때에는 동천의 몸 안에서 흘러나온 만독혼원공들이 모두 그녀와 동천의 내부로 흘러 들어간 상황이었기 때문에 설마하니 동천도 같은 무공을 익히고 있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그녀가 답을 얻기 위해서는 동천이 운기를 끝마치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후우!”
마침내 길게 숨을 내쉰 동천이 눈을 뜬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곧 시선이 마주친 그들은 약속이라도 하듯 서로들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약간씩 돌렸다. 그래도 동천이 남자라고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자 먼저 말을 걸었다.
“에에, 그게 또 감사합니다.”
“네, 네에……. 뭘요.”
그것으로 서로의 대화가 끊어졌다. 그러자 이번에 먼저 말을 꺼낸 것은 강소홍이었다.
“갑자기 소녀의 진기가 회수되지 않고 약소전주님의 단전으로 빨려 들어갔는데, 경위를 설명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동천은 설명해주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던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애꿎은 아랫입술만 잘근잘근 씹었다. 그로서도 어찌된 영문인지 잘 몰랐던 것이다. 그저 그가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강소홍과 똑같은 일을 겪었다는 사실뿐이었다. 아무리 대범한 동천일지라도 직접적인 성행위에 가까운 쾌감을 맛본 터라 그는 다소 떨리는 음색으로 변명하듯 말했다.
“미,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간단하게 소주천을 한다고는 했는데 소문주님의 내력이 흘러들자 갑자기 포근해지면서 무아지경에 빠져버렸습니다. 그 다음에는 어찌된 연유를 모르겠고, 다만……. 에에, 또 기분이 좀.”
동천은 다른 여인도 아닌 강소홍을 앞에다 앉혀놓고 그런 말을 하기가 뭐 했는지 급히 말끝을 흐렸다. 강소홍 또한 상대가 자신과 같은 쾌감을 느꼈다는 확신이 들자 민망하기도 하고 창피하다는 생각에 그저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그녀는 창가로 걸어가 바람을 쐬었다. 그러나 한 번 화끈거리기 시작한 그녀의 얼굴은 도저히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그, 그런가요? 어쨌든 다시 소녀의 내공이 정상적으로 되돌아왔으니 그 문제는 덮어두기로 해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에 재빨리 고개를 끄덕인 동천은 멋쩍게 웃으며 분위기를 일신시키고자 했다.
“아하하, 그러는 게 좋겠죠?”
그제야 강소홍이 일파의 소문주답게 빠른 안정세를 되찾아갈 수 있었다. 어찌 동천이 알겠는가. 애초에 귀의흡수신공은 부부가 함께 내공을 공유하며 익히는 심법이라는 것을 말이다. 분실된 귀의흡수신공의 원본에 따르면
‘남성의 양(陽)으로 조화된 자연의 섭리와 여성의 음(陰)으로 조화된 자연의 섭리를 합치니 그 효능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위대함이리라. 이는 초오감력으로 들어가는 가장 손쉬운 단계일지니…….’
라고 말하는 부분이 있다. 그 정도로 그것의 효과는 대단했던 것이다.
그래서 동천의 귀의흡수신공을 중심으로 같은 무공인 만독혼원공을 잠시 공유했던 것이었는데도 순식간에 강소홍의 내공을 정순하게 걸러준 것이었고 말이다. 물론, 애초에 강소홍의 화후가 깊었던 요인도 무시할 수는 없었겠지만 아무래도 동천의 귀의흡수신공이 좀더 큰 비중을 차지했으리라.
“그래요. 그러는 게 좋겠어요.”
사실 사람들은 이 귀의흡수신공을 귀영약문의 개파조사가 창안했다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틀린 사실이었다. 귀의흡수신공은 개파조사 이전에 그의 3대조(代祖)께서 창안하신 무공으로서 그의 부모들까지만 해도 부부가 같이 익히도록 별 탈이 없이 전수가 되어졌다. 그러나 그의 대에 이르러 안타깝게도 강호를 경험하던 중 성불구자가 된 개파조사는 큰 충격에 평생 부인을 두지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그의 하나 뿐인 제자는 초야에 묻혀 살며 도를 닦고 연구했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었지만 그에 따른 영향 탓인지 자연히 부부가 같이 익혀야 한다는 부분이 유실되었고, 약왕전의 진전을 사내들만이 이어가다 보니 그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면서 오늘날까지 동천에게 이어져 내려왔던 것이었다.
“소문주님, 숭의겸입니다.”
때마침 찾아온 숭의겸의 등장에 동천과 강소홍은 너나할 것 없이 반기지 않을 수 없었다. 강소홍은 기쁜 마음에 그를 불러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