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602화
서장(序章).
세상에 절대강자란 없다.
그것을 본좌는 깨달았도다.
하찮은 미물이 천년을 살면 변신을 꿈꾸듯, 본좌 또한 천년을 넘게 이어져오며 또 다른 변신을 꿈꾸려 한다.
한 시대를 풍미한 자들 중에 대단하다 여기지 않은 자가 어디에 있을 것이며 또 감히 그들의 능력을 의심할 자가 몇이나 있을 것인가.
만일 하늘이 본좌에게 한가지 소원을 물어본다면, 본좌의 변신이 성공하는 날……. 그와 같은 자들을 만나게 해주기를 바랄 뿐이노라.
은중각(隱中閣).
“캬아! 경치 참 좋다!”
동천은 달리는 마차 속에서 느긋하게 풍경을 감상하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암흑마교를 떠나온 지 10여 일. 처음에는 경치가 좋다며 같이 떠들어댔던 화정이는 날이 갈수록 시들해졌는지 이제는 주인이 경치가 좋던 말던 옆에서 쪼그리고 누워 낮잠을 청한 상태였고, 강제로 잡힌 호연화는 그런 화정이의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바둥거리고 있었다. 태생이 만만치 않은 호연화임에도 불구하고 양손으로 살짝(?) 보듬어 안고 있는 화정이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보면 그녀의 악력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케 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야옹!”
“야, 연화야. 울지 말고 저기 아름드리 나무들이 우거진 산 좀 봐봐. 누군가에게 만들라고 해도 엄두도 못 낼 정도의 웅장한 힘이 느껴지지 않냐?”
“야∼옹!”
“야, 울지 말고 저것 좀 보라니까?”
“냐아∼옹!”
드디어 호연화를 힐끗 쳐다본 동천은 시선을 다시 바깥쪽으로 돌리며 화정이를 발로 툭툭 건드렸다.
“야야, 걔 좀 놔줘. 냐옹이고 소홍이고 다 좋은데 귀 따가워서 이 몸이 경치를 감상할 수 없잖아.”
그제야 잠에서 깨어난 화정이는 한 손으로 눈을 비비면서도 다른 한 손으로는 여전히 호연화를 안으며 부스스 일어났다.
“으응, 왜 그래 동천.”
동천은 손대중으로 화정이의 가슴에서 바둥거리는 호연화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걔 내려놓으라고.”
“개?”
“걔.”
“개?”
“…….”
설마하니 자신이 도연에게 자주 써먹던 방법에 그대로 당할 줄 몰랐던 동천은 지금 여기에서 화정이를 때리면 자신이 당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기에 신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남들이 보기엔 신중해야 할 하등의 가치도 없었지만 동천은 그랬다.
“허허, 우리 화정이가 많이 컸구나.”
뜬금없이 영감 흉내를 낸 그는 화정이에게서 살짝 호연화를 빼낸 뒤 그녀에게 물었다.
“음, 화정아. 옛날 옛날 한 옛날에 말 잘 듣는 고양이와 말 더럽게 안 듣는 강시가 있었단다. 그 둘은 한 주인을 섬기고 있었는데 뛰어난 성품의 주인은 그 둘을 잘 다독여주며 세상을 널리 복되게 하시려는 마음이 대단하셨지. 그런데 어찌된 것인지 이놈의 강시가 도통 말을 듣지 않았다더구나. 해서, 그 주인은 고심하고 또 고심했단다. 화정아, 너 같으면 그 강시를 어떻게 혼내주었으면 좋겠느냐?”
의외로 진지하게 주인의 말을 듣고 난 화정이는 곧 표정을 풀고 방긋 웃으며 말했다.
“헤헤, 그냥 놔두라고 해.”
“으음!”
무겁게 침음한 동천은 ‘설마, 이 계집애가 자신의 이야기인 줄 알고서 이야기한 것인가?’ 라는 눈초리로 화정이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화정이는 천진난만한 미소를 뿌리며 동천을 마주볼 뿐 그 어떠한 틈도 보여주지 않았다. 한쪽 안면을 실룩거린 동천은 소연 닮아서 머리가 그런 쪽으로만 굴러가는 것이라고 단정지은 뒤 착하다며 그녀의 볼 살을 마구 늘어트려 주었다.
“소전주님, 양위입니다.”
그로부터 이틀이 지난 이른 아침에 머물던 객잔에서 짐을 챙기던 동천은 (물론 그는 손가락 하나 안 움직였다) 잔심마도(殘心魔刀) 양위(陽威)가 인기척을 내자 들어오게 했다.
“무슨 일인가?”
양위는 즉시 대답했다.
“은중각(隱中閣)에서 사람을 보내왔습니다.”
눈을 반짝인 동천은 물었다.
“직위는?”
“교관급인 듯 합니다. 아래층에서 좌봉공님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내려가 보시지요.”
고개를 끄덕인 동천은 시큰둥하게 말했다.
“가서 다시 보내라고 해.”
“예?”
동천은 놀라 반문하는 양위에게 눈살을 찌푸렸다.
“말을 못 알아듣는가? 사람 다시 보내라고 하란 말일세.”
확실히 알아들었지만 쉽사리 수긍할 수 없었던지 양위가 미련이 남아 입을 열었다.
“허나, 좌봉공께서는 이미 상대에게 안내할 차비를 하라고 말씀하신 듯 합니다만…….”
‘아, 이 새끼 말 안 듣네?’
성질 같아서는 주먹을 휘두르고 싶었으나 약왕전 관할의 상대도 아니고 살각(殺閣)의 한 부대를 맡고 있는 대주였기 때문에 그렇게까지는 못했다. 대신에 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양위의 말을 받아쳤다.
“좌공봉께서 지위가 높은가, 아니면 내가 더 높은가!”
“물론, 좌봉공이십니다.”
“…….”
동천은 뒤늦게 깨달았다.
‘아참, 그 영감이 더 높지? 음, 이 몸께서 이런 실수를 하다니.’
그러나 동천은 마치 다음 말을 잇기 위하여 미리 포석을 깔아둔 듯한 표정으로 당황하지 않고 힘주어 말했다.
“틀림없는 말이네. 그렇다면 이번 일의 책임자는 누구인가!”
무언가 깨달은 듯 찔끔한 양위가 고개를 숙여 대답했다.
“약소전주님이십니다.”
여기까지 잘 이끌어낸 동천은 숨고르기를 하려는지 나름대로 위엄 있게 명령했다.
“그것까지도 알고 있으니 다행이로군. 나가서 그대로 이르게.”
이제는 양위도 어쩔 수 없었다.
“예, 그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대답을 마친 양위가 물러나자 동천은 그제야 제 성질을 못 이기고 화를 냈다.
“이런 젠장! 이 잡것들이 사람을 무시해도 분수가 있지! 기라면 알아서 기어야 할 거 아냐! 그리고 그 은중각 새끼들도 그래. 교관이 뭐야, 교관이? 각주 자식이 직접 와도 가줄까 말까 인데 감히 교관 따위를 이 몸께 굴려? 내 이것들을 그냥, 확!”
이미 암흑마교를 떠날 때 환영혈과 관련된 상황을 정리하여 은중각에 보낸 상태라는 것을 감안했을 때 교관급을 보냈다는 것은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고 있거나 반대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으니 들어와 보라고 하는 것. 그 둘 중 하나라고 생각하면 편했다. 씩씩거리는 그를 말릴 생각조차 않고 있던 도연은 짐을 다 챙긴 후 주군에게 다가가 물었다.
“정말 상대를 되돌려 보내실 생각입니까?”
동천은 매서워진 눈매로 그를 쏘아보았다.
“당연하지!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너 같으면 고작 은중각 따위가 길잡이라고 보낸 인간이 냉… 이 아니고, 사… 도 아니고, 어쨌든! 그런 것들이 와도 마음에 들어할까 말까 인데, 이 몸의 수준을 고려하지도 않고 이름도 모르는 삼류 건달 새끼를 보냈다면 좋아라 반길 수 있겠어? 어? 어?”
현재 주군이 은중각의 각주를 그 자신과 최하 동격으로 보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을 놓고 봤을 때 확실히 교관급은 급수가 낮다고 볼 수 있었다. 은중각이 독한 마음을 먹고 양패구상을 생각하는 중일지도 모르는 이 때에 너무 철없는 짓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어디 도연이 이런 주군의 행동을 한두 번 겪어 보았던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럼 다른 자를 기다리시는 걸로 알고 짐을 다시 풀겠습니다.”
그제야 화를 가라앉힌 동천은 다소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도 당연한 소리니까 한 대 맞기 전에 어여 풀어.”
똑똑.
동천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 두드리는 소리에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누구이더냐.”
“속하, 양위입니다.”
상대를 확인한 동천은 눈살을 찌푸렸다.
“무엇 때문에 다시 왔는가?”
양위는 약소전주의 심기가 상당히 불편해 있음을 피부로 느끼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그것이 은중각의 교관이라는 자가 송구하오나 오해를 풀어드리고 싶다며 사정하는 통에 일단 데려오기는 했사온데……. 이야기를 들어보시겠습니까?”
아니나 다를까, 문이 열린 사이로 양위의 뒤편에 공손히 서 있는 사십대의 장한을 발견할 수 있었다. 동천은 들어볼 것도 없다고 소리치려다가 뭐라고 지껄일지 그것이 궁금하기도 하여 마지못한 표정으로 허락해주었다. 그는 식탁 한쪽에 자리를 잡은 뒤 문밖에 서 있는 자들에게 말했다.
“일단 자리에 앉게들.”
양위와 은중각의 교관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동천은 그들이 자리에 마주 앉자, 깎지를 낀 양손을 식탁 위에 올려놓고는 상체를 앞쪽으로 기울이며 무표정하게 물었다.
“그래, 재주껏 본 소전주의 마음을 움직여보게.”
아무리 살수들을 키워온 냉혹한 교관이라 할지라도 힘의 논리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는지 그는 긴장한 눈초리로 말문을 열었다.
“먼저 약소전주님의 기분을 상하게 한 점 송구스럽기 한이 없습니다. 그러나 미천한 소인이 안내 역할을 맡게 되었을 시 약소전주님의 심기를 건드릴 줄 빤히 알고서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음을 알려드리고 싶었습니다.”
동천은 삐딱하게 받아들였다.
‘그렇겠지. 송구하고 심기를 건드릴 줄 빤히 알면서도 피치 못할 사정이라는 게 두어 개쯤은 있겠지. 몰리면 없던 사정도 생기는 게 인간이니까.’
그렇게 따지면 그 자신도 사정화나 냉현과 마주했을 때 없던 피치 못할 사정들이 즐비하게 쏟아져 나왔지만 자신은 털어 먼지 하나 안 나오는 인간인 양 내심 상대를 경멸하며 이야기를 계속 듣고자 했다.
“피치 못할 이유라……. 약간 궁금해지는군. 이어 말해보게.”
일단 비집고는 들어갔다고 여겼는지 상대 교관은 다소 밝아진 얼굴로 그 즉시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