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620화
“소교주께서 오셨습니다.”
강소홍은 오늘 중으로 방문한다던 소식을 접한 터라 당황하지 않고 냉현을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산관과 함께 당도한 냉현은 빙긋 웃으며 그녀의 방으로 들어섰다.
“하하, 여전히 아름답구려.”
지그시 고개를 숙인 강소홍은 약간 발그레한 얼굴로 말했다.
“과찬이십니다.”
그동안 자주 만나며 자연스러워진 그들은 대화 또한 격식이 많이 줄어든 터였다.
이어 그녀는 자리에 앉기를 권했고 그곳에 자리를 잡은 냉현은 문밖에서 대기중인 산관에게 명했다.
“늘 그렇듯 옆방에서 대기하고 있거라.”
강소홍은 산관이 대답하려는 순간에 앞서 먼저 말했다.
“그래요. 우리 문영이도 심심해하던 차였으니 같이 데리고 말상대가 되어 주세요.”
산관은 약간 쑥스러운 표정을 내비쳤다.
“예, 알겠습니다.”
그가 문영과 함께 옆방을 향하자 냉현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저 녀석과 이야기한다고 해서 문영이 재미있어할 것이라 생각하오?”
강소홍은 짐짓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머, 모르셨나요? 문영이 말하길 제법 이야기도 잘하고 사람을 즐겁게 해준다고 했는데.”
냉현은 의외라는 듯 새삼스런 눈길로 옆방을 바라보았다.
“이날까지 여자라고는 가까이 한 적이 없는 녀석이라 무뚝뚝하게 시간만 때우고 마는 줄로만 알았는데 그랬단 말이오?”
강소홍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렇긴 한데, 그 나이 먹도록 아직까지 혼자란 말인가요?”
아마도 그녀는 가정을 이루고 있는 줄로 알았나보다.
고개를 끄덕인 냉현은 어느새 준비된 차를 들려고 하다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다시 내려놓았다.
“차는 마시지 않겠소. 그저 간단하게 다과나 준비해주시오.”
강소홍은 왜 마시지 않겠다는 것인지 의아했으나 그녀가 어찌 알겠는가.
귀배에 중독된 것이 차를 통해서라는 것을 알고 난 다음부터 냉현이 그 좋아하던 차를 꺼리게 되었다는 것을 말이다.
물론 그렇게 말한다면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에 중독될 때마다 그 매개체를 꺼려하는 멍청한 짓을 반복할 생각이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귀배의 경우에서 상당히 엄한 교훈을 얻게된 냉현은 경각심을 잃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것이라고 보면 무난할 것이다.
이때 현명한 강소홍은 무언가 이유가 있을 것이라 여기고 굳이 연유를 묻지 않았다.
그녀는 직접 과일을 가져와 깎아주며 물었다.
“요즘 천마동에 모든 시선이 몰려 있는데 다른 곳들의 행동은 어떠한가요?”
냉현은 굳이 숨길 것도 아니어서 바로 대답해주었다.
“아직까지는 큰 움직임이 없는 것이 아마도 나름대로 연구는 하고있지만 사천을 의심하고 있지는 않은 모양이오.”
강소홍은 잠시 생각하는 듯 하다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암흑마교를 주시하는 세력이 한둘이 아니어서 이미 정예들이 출발한 것을 눈치챘을 거예요. 그들이 곧 수상한 낌새를 느끼지 않을까요?”
두어 개 깎아 놓은 과일로 손을 움직인 냉현은 아삭 깨물어 먹더니 만족한 얼굴로 말했다.
“마치 이 쟁반에 놓인 과일들처럼 미끼를 여러 개 풀어놓았다면 어떻게 생각하겠소?”
강소홍은 흠칫했다.
“미끼? 지금 미끼라고 했나요?”
냉현은 약간 굳은 듯한 그녀의 표정이 재미있었던지 들고있는 과일을 다 먹어치울 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그렇게 음미하듯 과일을 먹고 난 그는 마침내 말문을 열었다.
“후후, 이것 참 맛있구려. 아마도 소홍 당신이 깎아주어서 더욱 그런가 보오. 아? 그건 그렇고 어디까지 이야기하다가 잠시 끊겼더라?”
강소홍은 냉현이 일부러 그런 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내색하지 않았다.
“미끼에 관한 것까지 이야기했어요.”
“아참, 그랬지? 하하, 그러니까 굳이 모든 인원이 사천으로 갈 필요가 있겠느냐, 하는 것이오. 아시겠소?”
똑똑한 그녀는 무슨 말인지 바로 알아낼 수 있었다.
“아, 실로 그렇군요! 몇몇 부대는 사천으로 향하고, 몇몇 다른 부대들은 전혀 엉뚱한 곳으로 향한다면 적대세력들은 그 의도를 파악할 수 없어 상당한 시간을 헤매게 될 것이 분명하겠어요!”
그녀답지 않게 흥분했던 강소홍은 곧 추태를 부렸다고 생각하여 침착하게 숨을 골랐다.
그녀는 기이해진 눈으로 냉현을 바라보았다.
“이건 상당한 기밀에 속하는데 저에게 말해주셔도 되는 건가요?”
냉현은 그저 미소를 지었다.
“왜. 외부로 유출할 생각이라도 있으시오?”
그렇게 묻는다면 딱히 해줄 대답이 없었다.
그는 과일을 깎는 강소홍의 손길이 주춤하자 점차 강렬해지는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농담이었소. 어차피 당신은 내 사람인데 내 어찌 숨기고 자시고 할 것이 있겠소. 후후, 안 그렇소?”
섬뜩한 집착이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강소홍은 일순간 안색이 창백해졌지만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안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그녀는 억지로 살짝 웃었다.
“호호, 틀림은 없어요. 그러나 아직은 완전하다고 할 수 없으니 방심하시면 큰코다칠지도 몰라요.”
그러자 냉현은 언제 그랬냐는 듯 이글거리는 눈빛을 지우고 밝게 웃었다.
“하하하! 이거 한방 먹었군! 좋소, 좋아! 내 오늘은 바빠서 이만 가지만 다음에 올 때엔 좀더 확실히 가까워지는 계기를 마련하고 오겠소. 하하, 과일 잘 먹었소이다.”
그저 미소하며 냉현을 배웅한 강소홍은 한동안 방안에 머물러만 있었다.
약간 우울하여 그랬던 것이었다.
그녀는 양손을 꼬옥 쥔 채 눈을 감았다.
‘초혼, 내게 힘을 줘요. 나에게 조금만 더 버틸 용기를 줘요. 그렇지 않다면 난…….’
항상 힘이 되어주었던 그를 떠올려서인지 몰라도 답답했던 마음이 상당히 호전되었음을 느꼈다.
그런데 뒤이어 문득, 동천이 떠오른 그녀는 무언가 못 미덥고 영악해 보이기까지 했지만 누님이라는 소리를 들어서 그런지 정말 동생 같다는 생각에 가슴이 따스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로서는 설마하니 살아오며 누님이라는 소리를 듣게될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때의 동천의 행동이 신선하게 각인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영악한 건 영악한 거야.”
곁에 있던 문영은 주인의 혼잣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고 한다.
“음냐∼.”
무슨 행복한 꿈을 꾸는지 동천은 자는 중이면서도 만면에 미소를 머금었다.
이쪽으로 눕고 저쪽으로 누우며 간혹 헤헤, 웃기까지 하자 조용히 맞은편에서 책을 읽고있던 사정화는 마침내 눈살을 찌푸렸다.
여행이 보름째 접어드는 시점에서 동천은 어느 사이엔가 모르게 사정화가 예견한대로 행동의 부자연스러움이 많이 가신 상태였다.
무얼 하나 해도 죄인이 간수에게 물어보듯 눈치를 보며 허락을 받았는데, 그런 일이 지속되자 나중에는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하고싶은 대로 하더니 이제는 아예 대놓고 누워 자기까지 했던 것이다.
잠시 동천을 깨울 까도 생각한 사정화는 잠버릇이 고약한 게 자의는 아니었으므로 그냥 두었다.
“헤헤. 으헤헤.”
잠시 조용 하는가 싶었는데 참 방정맞은 꿈이라도 꾸는지, 손까지 가끔씩 허공에 내저으며 실실거렸다.
그런데 아뿔싸!
그는 죽고 싶었는지 차마 내뱉어서는 안될 이름을 거론하고야 말했다.
“헤헤, 정화 이년…….”
빠직!
아마도 사정화의 이마에 솟아오른 핏대가 소리를 냈다면 이러한 소리를 냈을 것이다.
감히 무슨 꿈을 꾸기에 자신의 이름을 거론하며 희롱하듯 헤픈 웃음을 흘린단 말인가.
일단 그녀는 더 볼 것도 없이 동천의 따귀부터 날렸다.
철썩!
“으엑?”
시원한 따귀소리가 울려 퍼지는 동시에 잠에서 깨어난 동천은 아직 덜 깼던지 맞은 부위를 어루만지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 아가씨, 혹시 저 맞은 건가요?”
사정화는 무서운 얼굴로 말했다.
“네가 더 잘 알 거야.”
동천은 생각했다.
‘모른다, 이년아. 워쩔겨?’
생각 같아서는 배 째라는 식으로 말하고 싶었지만 어쩐지 사정화의 얼굴이 심상치 않자 아무래도 뺨을 맞긴 맞은 것 같고, 그 이유는 자신도 모르는 잠결의 실수가 아닌지 어렴풋이 의심했다.
그는 원래 맞은 이유를 몰랐기 때문에 정말 실감나게 어이없어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예에? 제가 진짜로 맞은 겁니까? 왜요?”
사정화는 모른다고 잡아떼는 동천을 보고 정말 모른다면 저질스런 상황을 굳이 언급해서 좋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가 동천에게 한두 번 속았던 것이 아니었으므로 일단 손부터 올라가고 보았다.
철썩!
“아이쿠! 왜, 왜 때리십니까요!”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동천. 그 이유는 네가 더 잘 알 것이라 분명 말했어. 이래도 대답하지 않을 셈이야?”
억울해진 동천은 저게 오늘이 그 날인가, 왜 잘 자는 사람을 깨워서 시비를 거는 것인지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지, 진짜 몰라요. 정말이라니까요? 으으, 가슴을 열어서 보여줄 수도 없고!”
그녀가 보기에 이번만큼은 진실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더 이상 진행해봤자 기분만 더러워질 것 같아 그만두기로 했다.
하지만 이대로 지나쳐가기엔 정말로 기분이 더러워서 그녀는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좋아, 정말로 모른다고 하니 넘어가 주겠어.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네 사상이 의심스러워. 이제부터 저녁 외에는 오수(午睡)를 즐기지 말고 내가 권장해주는 유용한 서적들이나 읽도록 해. 알겠어?”
동천은 그 꿀맛 같은 낮잠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하자 파랗게 질려서 입을 살짝 열었지만 그보다 앞서 따귀가 날아와 얻어맞는 바람에 무조건 알았다고 대답해주었다.
‘씨팔, 저년 혹시 미친 거 아냐? 아니면 왜 죄 없는 이 몸에게 이러는 거냐구!’
그동안 편하게 지냈던 나날이 일장춘몽(一場春夢)처럼 되어버린 동천은 억울해서 치를 떨었다.
영문을 모르는 그로서는 억울할 만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보자면 잘못한 것은 맞는 것이기에 그의 억울한 마음은 별 소용이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멈추시오!”
억울해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동천은 어디에서인가 멈추라는 소리가 얼핏 들린 것 같았는데 마차는 계속 달려가는 중이자 하도 열이 받아서 헛소리까지 들렸는가 싶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던지 예의 그 소리는 아까보다 가깝게 들려왔다.
“멈추시오! 멈추란 말이오!”
환청이 아닌 것을 확인한 동천은 고개를 번쩍 들었고, 사정화의 눈치를 보며 살금살금 창가로 걸어가 밖을 내다보았다.
하지만 자세히 둘러봐도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중얼거렸다.
“반대쪽을 봐야 하나벼…….”
그의 중얼거림은 사정화가 들으라고 한 것이기도 했는데 뭐가 보이냐고 했다가 못 봤다는 대답이 들려오면 자신을 또 때릴지도 몰라서 그랬던 것이다.
물론 사정화는 그럴 생각이 없었지만 하도 맞아서 의심병이 생긴 동천으로서는 유비무환이 아닐 수 없었다.
바로 그때 마차가 서서히 멈추어 서기 시작했다.
동천은 마부석 쪽으로 난 창문을 열고 물었다.
“방삼, 무슨 일이냐!”
방삼은 앞의 마차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고로 솔직하게 대답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몇몇의 무림인들이 우측을 가로질러 따라와 선두의 마차를 막아선 모양입니다.”
산길을 달리는 중이었기 때문에 동천은 제일 먼저 산적을 의심했다.
그러나 산적치고는 너무도 공손하게 멈추어달라고 소리쳤으니 그것은 아닐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나가봐야 자세한 사정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동천은 사정화에게 먼저 물었다.
“같이 나가보실래요?”
사정화는 흥미 없는 눈초리로 대답했다.
“아니.”
동천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자신이라도 갔다오겠다며 문을 열고 나왔다.
그는 이미 밖으로 나와 기웃거리는 의원들을 제치고 살폈는데 이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녀 둘이 부전주와 이야기를 나누고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두 사람은 실로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미남미녀였는데 특히 여인의 용모가 어느 측면에서는 사정화와 비견될 정도여서 동천은 적잖이 놀랐다.
그러나 노숙생활을 오래 했음인지 옷들이 다소 삭아 보여 그 아름다움이 약간 가려졌다고 생각했다.
동천은 일단 악의들은 없어 보이자 지켜보기로 했다.
“으음, 죄송합니다만 저희들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어 동행은 어려울 듯 싶습니다.”
마차에 태워달라고 했던지 소진이 정중히 거절을 내비쳤다.
그러자 사내가 난처함을 호소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을 태워주기에는 세상이 험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근 10일간을 걸어다녀 그런지 상당히 지쳐있는 상태입니다. 많은 것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사례는 충분히 하겠으니 마을이 보일 때까지 만 동행을 허락해 주십시오.”
소진은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딱한 사정은 알겠으나 태워달라고 해서 태워주고 내려달라고 해서 내려 줄 권한이 제게는 없으니 그만 물러가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잠자코 지켜보던 여인이 아름다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럼 책임자를 잠시 불러주시겠어요? 만일 그분께서도 거절하신다면 저희들도 포기하고 물러서겠어요.”
소진은 잠깐동안 신중하게 생각했다.
‘현재 책임자는 소전주이지만 실질적인 권한은 사 아가씨에게로 넘어간 상태이다. 그러나 사 아가씨는 이런 자들이 함부로 만나 뵙게 할 분이 아니다. 역시, 소전주를 만나게 해드려야 하는데 귀가 얇은 듯 보이는 소전주께서 무사히 넘어가실지 모르겠군.’
그때 상황을 듣고있던 동천이 알아서 나서주었다.
“무얼 하시는 분들이십니까?”
소리가 들린 곳으로 일제히 고개를 돌린 사람들은 소전주가 서 있자 고개를 숙이는 한편, 남녀일행은 동천을 대하는 이들의 모습에서 필시 그가 책임자라 여기고 그에게 다가갔다.
일정 거리를 유지하여 신형을 멈춘 그들은 살짝 포권을 취해주었고 여인이 입을 열었다.
“우리는 오련(五蓮)과 당문(唐門)의 사람이에요. 이분께서는 남궁세가(南宮世家)의 장자이신 남궁연경(南宮連境)이시고 본녀는 당가의 당문영(唐文永)이라고 해요.”
일순간 사람들이 흠칫했다.
당문은 대대로 폐쇠적인 성격에 중립을 취해오는 가문이어서 별 상관은 없었지만 오련이라면 정도세력의 주축 중에 선두를 달리는 곳으로서 암흑마교와는 적대적인 관계를 취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천은 그 흠칫한 사람들 중에서 열외였는데 이유는 오련에 속해있는 황룡세가에서 자라서 그런지 정사(正邪)개념이 뚜렷하지 않았던 것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