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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624화


“가만 있자. 포목점(布木店)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할까나?”

한심의 한심한 소리를 듣다가 대충 얼버무리고 나온 동천은 아직도 근육통이 남아있는 상태였지만 돌아다닌 김에 사정화의 면사 문제를 해결하기로 마음먹었다.

별로 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나 그녀가 시킨 일을 뒤로 미뤘다간 나중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가 없었기에 냉큼 사오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손님, 포목점이라면 소인이 알고 있습니다요.”

뒤쪽에서 들린 소리에 고개를 돌린 동천은 상대가 점소이이자 그놈 참 싹싹하다고 생각했다.

동천은 기꺼워진 마음으로 물었다.

“그런가? 어디로 가야 하지?”

점소이는 친절하게 가르쳐주었다.

“이쪽으로 쭉 가셔서 장터로 들어가시면 얼마 지나지 않아 보이는데 혹시라도 찾지 못하시겠거든 그곳의 상인들 중 아무나 붙잡고 장씨네 포목점이 어디냐고 물어보시면 다들 친절하게 가르쳐줄 겁니다.”

“오오, 고맙네. 그곳이 마음에 들면 돌아와서 약소하나마 수고비를 주도록 하지.”

“어이구, 감사합니다.”

수고비를 주게 되는 것은 부전주일 테지만 그 계기는 동천이 만들어주었으므로 감사해야 하는 것은 맞다고 볼 수 있었다.

어쨌든 그건 그거고, 포목점으로 가는 길이 의외로 단순하자 동천은 동행 없이 그곳엘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도연 없이 혼자 나돌아다니는 것은 참으로 오랜만의 일이었는데 그래서인지 약간 흥분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묘한 자신감도 생기는 것 같았다.

“후후, 이제 이 몸도 다 크셨으니 혼자 물건을 사러 거리를 활보하실 만도 하지. 하하하!”

크게 웃으며 장터로 향한 그는 잠시 후 그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어 그는 먹거리와 물건들을 팔고 있는 상인들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흐음, 장터라고 하기엔 조금 모자라긴 하지만 웬만한 건 다 파는군.”

파는 사람들 입장에서 들었다면 상당히 기분 나쁜 말이었지만 다행이 다들 물건을 팔고 흥정들을 하느라 동천의 중얼거림 따위에는 관심을 두지 못했다.

동천 또한 싸구려만 팔고있는 상인들에게 관심이 없었으므로 한자리에 오래 있는 적은 없었다.

조금 더 걸어가자 물어볼 것도 없이 포목점을 발견하였다.

집터에서 장사하는 것이 아니라 천막을 치고 그 안에서 장사하는 것이어서 그동안 고급생활에 젖어든 동천이 보기에는 싸구려 티가 물씬 풍겼지만 그가 쓸 것도 아니었으므로 까다롭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안으로 들어가자 사십대의 콧수염을 기른 남자가 반갑게 그를 맞아들였다.

“어서 오십시오, 공자님. 무얼 찾으십니까?”

동천은 약간(?) 거만하게 상체를 펴고는 말했다.

“험! 얼굴을 가릴 면사를 구하러 왔네. 좋은 것이 있는가?”

포목점주는 어린놈에게 하대를 듣는 게 하루 이틀이 아니었는지 못마땅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

되려 그는 더욱 정겹게 미소하며 대답했다.

“물론이고 말굽쇼. 찾는 분들이 많지 않아 구비된 것이 적긴 하지만 반투명에서부터 단계별로 완전차단까지 종류는 많습니다. 어떤 것을 원하십니까?”

그러고 보니, 사정화의 취향을 알지 못했다.

그 때문에 동천은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괜히 생각 없이 샀다가는 그녀의 차가운 눈빛을 고스란히 받아내야만 했던 것이다.

덤으로 다시 사러가야 하는 귀찮음까지 불어날지도 몰랐고 말이다.

“일단 전부 볼 수 있겠는가?”

“그렇게 하시죠.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잠시 안쪽으로 들어간 점주는 구비되어있는 서랍 중에 둘째 칸을 열어 한 손 가득 집어왔다.

그는 색깔별로도 가져와 동천에게 보여줬는데 그 중 붉은 색 반투명 면사를 훑어 본 동천은 잠깐 요상한 생각을 하다가 이걸 샀다가는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얼른 내려놓았다.

결국 그는 무난한 하얀색, 하늘색, 검은색 면사들을 각각 반투명, 완전차단용으로 한 개씩 사버렸다.

당장에 그의 돈이 소비되는 것이긴 했지만 재정담당을 맡고 있는 부전주에게 가면 다 해결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사실상 색깔별로 다 쓸어 담았어도 상관이 없었던 상황이었다고나 할까?

“안녕히 가십시오! 또 들려주시길 바랍니다!”

생각보다 많이 사줘서 기분이 좋아진 포목점주가 밖으로까지 따라나와 인사를 했다.

동천은 또 찾아갈 이유가 없었지만 예의상 또 들르겠다고 말한 뒤 주루로 돌아왔다.

그런 뒤 식사 문제부터 해결한 그는 지극히 만족스런 표정으로 부풀어오른 배를 쓰다듬으며 별채로 들어갔다.

방이 바뀐 사정화의 방을 찾는 것은 비교적 쉬웠는데, 그 이유가 그녀의 방문 근처에는 혈각에서 보내온 고수가 호위를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수천희(收天熙)라고 소개한 자를 발견한 동천은 그에게 다가가 눈알을 부라리며 시비를 걸었다.

“뭘 봐, 띠꺼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래? 아님말고.”

자신을 가르치려고 했던 한 달 전의 사건 때문에 그를 싫어하게 된 동천은 유치하게 그를 볼 때마다 시비를 걸었는데 다행히 수천희의 성격이 무덤덤하여 큰 분란은 없었다.

“아가씨, 주무세요?”

방금 전에 해가 져서 사정화가 잠을 청했을 리는 없었다.

동천도 그것을 알지만 문을 두드릴 때 딱히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어쨌든 대답은 바로 들려왔다.

“들어와.”

그녀의 허락이 떨어져 조심스레 방문을 열고 들어간 동천은 창가에 서있는 그녀를 발견하고는 생각했다.

‘창가 문제로 방을 바꾸었다더니 뽕을 뽑으려는 건가?’

동천다운 생각을 하는 사이 사정화가 움직여 탁자로 다가가 앉았다.

자연스레 마주 앉은 동천은 그녀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품속에서 면사들을 꺼냈다.

“아가씨가 명령하신 대로 사오긴 했습니다만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알 수가 없어서 3가지 색상의 두 종류를 구해왔습니다.”

그러자 사정화는 탁자 위에 놓여진 면사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다가 입을 열었다.

“다 괜찮아. 수고했어.”

“그래요? 다행이네요. 사실은 더 많은 종류들을 사오려고 했는데 너무 난잡해질 것 같아서 그것들만 간추려서 사온 거거든요.”

사정화는 말했다.

“잘했어. 원래 안이 비치지 않는 하늘색 면사 하나면 충분하지만 네 성의를 봐서 다 사용해보도록 할게.”

‘내가 그 말 안 나왔으면 니 눈앞에서 면사 들고 찢으려고 했다.’

그럴 담력도 없으면서 내심 씨부렁거린 동천은 무사히 일을 마치게 되어 안도의 한숨을 내쉰 후 그만 나가보려고 했다.

“하하, 말씀만 들어도 기분 좋은데요? 그럼 이만 나가볼 터이니 편히 주무세요.”

“그래, 피곤했을 테니 쉬어. 그리고 내일 아침 일찍 면사를 사준 고마움의 표시로 선물을 하나 장만해줄 테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생각지도 못한 소리에 눈이 휘둥그레진 동천은 물었다.

“예에? 선물이요? 그게 뭔데요?”

공짜를 싫어할 리 없었던 동천이 기대에 찬 눈으로 물었지만 사정화는 표정의 변화 없이 대답해주었다.

“그건 내일 보면 자연히 알 수 있을 거야.”

자세히 알려고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덕분에 더욱 궁금해진 동천이었지만 감히 사정화에게 알려달라고 독촉할 그가 아니었기에 이쯤에서 물어보는 것을 자제하기로 했다.

잠시 후 그녀의 방에서 나온 동천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자리에 눕기는 했지만 사정화가 주겠다는 선물의 정체가 궁금했기 때문인지 쉽사리 잠을 청할 수 없었다.

그는 이리 뒹굴고 저리 뒹굴며 히죽히죽 웃었다.

“으으! 뭘 준다는 것일까? 말하는 투로 봐서는 범상치 않은 것을 주려는 것 같은데? 흐흐, 뭐 어쨌거나 준다는데 마다할 이 몸이 아니지? 크크큭!”

간만에 사정화가 기특해진 동천은 기분 좋게 웃으며 자정까지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다가 겨우 잠이 들 수 있었다.

그리고는 마침내 다음날 새벽이 되자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어 그는 난데없이 폼을 잡고 창문을 열었다.

시원한 바람이 방안에 스며들자 그것을 음미하듯 살며시 눈을 감았다.

동천은 즉흥적으로 떠오른 자작시를 읊었다.

“드디어 새 아침이 밝았구나! 선물을 준다던 첩년은 과연 무엇을 준비했을까! 구질구질한 것을 준다면 내 그년의 면상에다 그것을 던져 버려야지. 그것이 아니라면 기꺼이 그 선물을 받아 주리니……. 캬아! 끝내주는 자작시로다! 작가의 사상이 그대로 묻어난 뛰어난 명작이야! 하하, 역시 이 몸은 너무도 뛰어나다니까?”

사정화에게 들키면 맞아 죽을 소리만 하고 있던 동천은 말 나온 김에 그녀를 찾아가 선물을 요구하고 싶었으나, 아직 새벽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허벅지에 바늘을 살짝 갖다 대며(안 찔렀다) 인내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따, 이놈의 시간 더럽게 안 가네. 기왕에 일찍 일어난 거 운기조식이나 할까?”

잠시 생각한 동천은 이른 감이 있었지만 그렇게 하기로 했다.

“그래, 그 뒤에 환영해인지 환영혈인지, 그 영감탱이들이 남겨준 거나 수련해야겠다.”

처음에는 환영혈의 비급들을 가져왔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활용을 하지 못했다.

알다시피 하루종일 죽어라 뛰어다녀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것이 동천이 역심무극결을 운용하면서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는데, 신법으로 마차를 따라잡는 것이 차츰씩 익숙해지자 귀영신법을 펼치며 간간이 환영혈의 무공 중 하나인 영극류신법(影極流身法)을 펼쳤던 것이다.

그것은 영음살경(影陰殺經) 상의 신법이었는데 빠르기로 치자면 당연히 귀영신법을 따라올 수는 없었지만 기척을 죽이고 움직이는 데에는 효과가 탁월한 신법이었다.

본디 환영혈은 각각의 이름들에 맞추어진 독문무공들이 존재했다.

기본검법을 비롯하여 살수에 필요한 제반사항의 무공들은 동일했지만 환살은 환염살지(幻炎殺指)라는 지법이, 영살은 영극류신법이라는 신법이, 그리고 혈살은 혈잠적공장(血潛積功掌)이라는 장법이 추가로 각각 존재했던 것이다.

그 중에서 여건상 가장 펼치기 쉬운 것이 신법이었고 그래서인지 마차를 뒤따르는 것이 익숙해질수록 영살의 신법을 익힌 결과 이제는 4성의 성취를 이룰 수 있었다.

물론 나머지 무공들은 도저히 따로 익힐 시간이 없어서 감질나게 조금씩만 맛을 본 상태였고 말이다.

슥! 스르르! 휙!

동천은 잠입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영극류신법을 시전하자 땅을 디디면서도 미세하나마 허공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처음에는 적응이 잘 안 돼서 움직이다가 멈추고, 움직이다가 멈추는 행동을 반복했지만 그래도 꼴에 어느 정도 수련해보았다고 지금은 중도에 멈추는 일이 없어졌다.

원래 동천은 힘든 일과 머리 쓰는 일을 싫어했다.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처음부터 신경을 써서 익혀야하는 영극류신법은 절대로 동천의 흥미를 끌지 못해야만 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동천은 이 새로운 신법에 제법 흥미를 가졌다.

빠름을 위주로 하는 귀영신법만을 대하다가 잠입(潛入)과 은신(隱身)을 위주로 하는 신법을 대하자 새로운 세계를 접한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매일 쌀밥만 먹던 사람이 어느 날 고기 반찬을 곁들여서 같이 먹었을 때의 충격이라고나 할까?

역천은 제법 제자의 성격을 파악했다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그건 오산이었다.

동천이란 인간은 한가지의 일을 계속 시킬 것이 아니라 종종 다른 관심사를 곁들여서 일을 시켜야만 대성할 수 있는 종류라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귀영신법만을 죽어라 가르치는 것보다는 가끔씩 비교를 목적으로 다른 신법들을 선보여주며 동천의 흥미를 유발했어야 그를 좀더 깊은 경지에 이르게 했었을 거라는 말이다.

“후우, 후우! 좀 지치는데?”

소매를 들어 이마의 땀을 쓸어 내리던 동천은 어느새 아침이 밝아져 있자 그의 목적대로 시간 때우기는 충분히 달성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신이 난 그는 아침밥도 먹기 전에 사정화의 방으로 달려갔고 그녀가 이미 호위인 수천희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자리에 없는 그녀를 욕했을 테지만 이번의 경우는 필시 그의 선물을 사러 나갔을 터였으니 동천은 오랜만에 관대해질 수 있었다.

“뭘 사올까나∼. 뭘 사올까나∼?”

동천은 아침식사를 하고 난 뒤에 ‘뭘 사올까나.’ 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영문을 모르는 약왕전의 사람들은 저 새끼 또 지랄하는 것 아니냐며 뒤에서 소곤거린 뒤 다들 알아서 동천을 피해 다녔다.

그리고 마침내 속이 비치지 않는 하늘색 면사를 착용하고 돌아온 사정화는 기대에 찬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동천에게 묵직한 물건을 건네주었다.

텅―!

동천은 굉음을 내며 탁자에 놓여진 것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사정화를 한 번 보았다가 눈앞의 물건을 다시 보았다가 또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가…….

그렇게 왔다갔다 두어 번을 더 반복한 동천은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저, 저기 이건 뭡니까?”

사정화는 친절하게 가르쳐주었다.

“각대(脚帶)야. 한 개에 10근(5Kg)이 나가고 철로 만든 거야. 보기보다 튼튼하다니까 오늘부터 그걸 다리에 착용하고 뛰어.”

“…….”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가는 느낀 동천은 이럴 순 없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제정신이라면 이런 걸 선물이라고 줄 수는 없는 것이다.

문득, 정신을 차린 동천은 물었다.

“하, 하하. 설마 이게 선물은 아니죠?”

사정화는 날카로워진 눈으로 싸늘히 말했다.

“왜. 마음에 안 들어?”

“그, 그럴 리가요! 아주 마음에 들어요. 하하, 너무도 감격적이라 눈물이 다 나오려고 해요!”

진짜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흑흑, 내가 저런 년에게 기대를 걸었었다니……. 잠시 미쳤던 게 분명해. 흑흑흑!’

동천은 사정화가 순진한(?) 소년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는 자기도 소연에게 못할 짓 참 많이 했으면서 자기 억울한 거 하나는 진짜 잘 챙겼다.

“차봐. 맞나 보게.”

거부할 수 없는 목소리에 하나씩 다리에 차본 동천은 저주스럽게도 딱 들어맞는 각대를 바라보며 안면을 실룩거렸다.

‘윽! 이년이 혹시 나 잘 때 몰래 들어와 치수를 재 본 거 아냐?’

동천이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옆에서 지켜본 사정화는 오랜만에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눈대중으로 맞춘 건데 제법 잘 맞는 것 같군. 동천, 이제부터 수련할 때엔 그걸 다리에 차고 달려. 그래야 수련효과가 증대될 테니까.”

‘흑흑, 그렇게 좋으면 너나 써 이년아!’

생각 같아서는 각대를 풀러 그녀의 얼굴에 내던지고 싶었지만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을 보자 딱히 던질 곳이 없었다.

그렇다고 조각 같은 그녀의 몸에다 던지자니 마음뿐인데도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결국 동천은 여기에 계속 머물러 있어봤자 좋을 거 하나도 없다는 생각에 대충 얼버무린 뒤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그 날 동천은 생에 처음으로 음식을 먹고 체했다.

“워, 워∼!”

제법 인파가 몰린 거리에서 마차가 멈추자 그 안에서 섬세한 몸매의 여인이 살며시 내렸다.

면사를 쓴 여인은 다소 차갑게 보이지만 그것을 상쇄시키고도 남을 아름다운 눈을 들어 눈앞의 주루를 잠시 올려다보았다.

3층 주루의 입구 위에 걸린 현판에는 열래루(悅來樓)라는 글자가 쓰여져 있었다.

그녀의 주위로 모여든 몇몇 일행들은 공손히 그녀를 이끌자 그녀는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잠시 후, 헥헥 거리며 혀를 내민 소년이 죽겠다는 얼굴로 기진맥진한 몸을 이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미리 예약이 되어있는 듯 방으로 안내되었는데 간단하게 차를 내어준 점소이가 밖으로 나가자 주인으로 보이는 자가 들어와 대례를 올렸다.

“미천한 종 곽수양(郭修洋)이 아가씨와 약왕전 분들을 뵙습니다.”

여인. 즉, 사정화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일이 있어서 좀 늦었어.”

동천의 수련 때문에 본의 아니게 일정보다 2달이나 늦게 도착한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열래루의 주인 행세를 하며 항간에 떠도는 정보를 모아 정기적으로 암흑마교로 보내는 일을 담당하고 있는 곽수양은 더 조아릴 것도 없는 머리를 조아렸다.

“어느 누가 감히 아가씨의 행보에 감 나라 배 나라 하겠습니까.”

사정화의 옆에 앉아 아직도 숨이 차서 골골거리던 동천은 괜히 못마땅해져서 그를 씹었다.

‘헥헥! 십쌔기, 혀는 잘 돌아가네.’

때마침 곽수양도 동천을 힐끔 보았는데 예의 없이 아가씨의 옆에서 늘어져 있는 것을 보고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들어온 정보에 의하면 약왕전의 소전주임이 분명한데 저건 너무 하지 않은가. 그렇게 혼이 나고도 고쳐지질 않았단 말인가?’

사정화는 정말로 동천을 생각해서 수련을 시킨 것이었건만 바라보는 사람들은 그게 아니었다.

그들은 아가씨가 성질이 더러운 약소전주의 정신을 개조시켜주느라 뛰게 한 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그런 생각은 사정화가 각대를 착용하게 한 뒤부터 더욱 확신으로 굳어졌는데, 들려온 소식으로 그렇게 알고 있었던 곽수양은 두어 달 정도 혼이 났으면 정신을 차리고 똑바로 앉아 행동했어야 했건만 아직도 그게 고쳐져 있질 않자 어처구니가 없을 따름이었다.

“자네는 내 얼굴이 그렇게 멋있던가? 뭘 그리 유심히 쳐다보는가.”

어느 정도 숨을 고른 동천이 자신을 삐딱하게 훔쳐보았던 죽일놈(곽수양)에게 물어보자 곽수양은 움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 송구합니다. 오실 때부터 힘들어하시기에 소인도 모르게 고개를 들게 되었습니다.”

안 그래도 차를 가져다줘서 짜증이 났던 동천은 상대가 자신의 약한 모습을 가지고 뭐라 말하자 기분이 썩 안 좋았다.

그때 사정화가 동천을 제지했다.

“동천, 이야기 중에 끼여드는 건 실례야.”

‘그렇게 말하면 이 몸의 이야기 중에 끼여든 너는 뭐냐?’

성립이 안 되는 억지였지만 동천의 입장에서는 절대로 그렇지 않은가 보다.

승복할 수 없음에 잠시 대답을 늦춘 동천은 사정화의 눈빛이 싸늘해지려고 하자 바로 쭈그러들었다.

“헤헤, 잠시 제 생각만 했네요. 계속 말씀하세요.”

사정화는 한쪽 눈썹을 찌푸린 후 동천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다들 늦춰진 일정에 이의가 없다니 안심하고 다음으로 넘어갈게. 현재 상황은 어느 정도까지 진척되었지?”

곽수양은 대답했다.

“자세한 사항은 알 수 없으나 무산(巫山) 쪽에서부터 탐색을 시작하여 대파산(大巴山)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중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워낙에 지도를 대조하는 작업이 시일이 걸리는지라 이 상태로 가다가는 최소한 2년은 걸리겠다고 난감해하는 중입니다.”

“뭐? 2개월도 아니고 2년?”

깜짝 놀란 동천이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놀러 나오는 심정으로 이번 일에 지원했던 그였는데 앞으로 최소 2년 동안은 사정화와 있을 것이라는 소리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동천.”

“아, 죄송합니다. 놀라서요.”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인지한 동천이 물러서자 곽수양에게 다시 시선을 돌린 사정화가 입을 열었다.

“너무 오래 걸리는 것 아냐?”

사실상 사천에 터를 잡았다고 할 수 있는 곽수양은 대파산맥의 넓이와 험준함을 알지 못하는, 물론 어느 정도는 알고 있겠지만 자세히는 알지 못한다는 말이다.

여하튼 그는 사정을 잘 알지 못하는 윗분들이 이런 반응을 보일 것이라고 미리 예측하고 있었다.

그로서는 답답할 노릇이었지만 그런 윗분들에게 가능한 수긍할 수 있도록 잘 설명해야하는 것 또한 그의 역할이었다.

“이론적으로야 시간의 단축은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아시다시피 변수가 항상 존재하므로, 섣불리 기간을 정할 수 없는 그들의 입장도 너그러이 헤아려주셨으면 합니다. 더군다나 그곳만으로 끝나지 아니 하면 수색 범위 지역을 옮겨…….”

그때 사정화가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됐어. 그들도 다 생각이 있으니 그 정도로 시간을 정했겠지. 더 거론할 필요는 없고, 약왕전의 의원들이 움직일만한 사건은 없었어?”

그녀가 늦은 사이, 피 튀기고 사지 중 한 둘이 잘릴 정도의 일이 벌어졌었냐는 물음이었다.

곽수양은 공손히 대답해주었다.

“다행스럽게도 아직까지는 별 탈이 없었습니다. 다들 은밀히 행동하고 있고, 특별지시를 받은 터라 가끔 산적 집단을 쓸어버리는 것 외에는 무림인들과의 접촉을 피한다고들 합니다.”

“녹림과는 부딪히지 않겠는가?”

동천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곽수양은 대답하기에 앞서 사정화의 반응을 잠시 살폈다.

그녀가 또 제지하지는 않을까 싶어 바라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그녀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불필요한 질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재차 확인한 곽수양은 동천의 질문에 대답했다.

“일단 녹림72채 중 11채가 대파산맥에 모여있어서 그들의 영역은 제외해 둔 상황입니다. 붙어봤자 소득이 없을뿐더러 그들이 터를 잡은 지 아주 오래되었다는 것을 감안했을 때 천마동이 그들의 영역권에 있었다면 그 실체가 드러났어도 벌써 들어 났을 것이 뻔하므로 그곳들은 최후에 조사하기로 하고 열외로 제쳐놓은 상태입니다.

그리고 저희가 제거하는 산적들은 녹림과의 끈이 없는 곳으로서 차근차근히 지워버리는 중입니다.

약간의 끈이 닿아있는 곳이라면 가능한 들키지 않게 처리하고는 있습니다만 그도 여의치 않게 되면 본교의 휘하에 있는 사천의 상인들과 표국을 동원해서 산적토벌이라는 명목 하에 그곳을 쓸어버린 후 녹림과의 끈이 닿아있는 자들만 감금시키고 회유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물론, 철수를 하게 될 때까지 회유가 안됐을 시 그간의 녹림의 반응을 살펴본 후 그들은 풀어주거나 제거할 예정입니다.”

관여하지 않기로 작정한 이상 녹림과의 관계는 깊이 새겨들을만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저 대략적인 흐름만을 듣고 난 사정화는 말했다.

“알았어. 그리고 더 이상 들어야할 이야기가 없다면 여기에서 끝내기로 할게.”

“그렇게 하십시오. 보고할 사항이 생긴다면 추후에 다시 뵙겠습니다. 그리고…….”

“말해.”

“예, 수색지에는 언제 합류하실 예정이십니까?”

사정화는 생각할 것도 없이 말했다.

“내일.”

곽수양은 정말 짧게 말하는 사정화의 대답에 적응이 잘 안 되는지 쩔쩔매는 표정으로 고개를 조아렸다.

“아, 네에. 그럼, 그렇게 알고 물러가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곽수양이 물러나고 그가 마련해준 최고급 후원에 머물게 된 사정화 일행은 하루 푹 쉬고 난 뒤에 사흘을 움직여 대파산맥의 한 자락인 왕유산(往諭山)에 도착했다.

그때까지도 각대를 차고 움직인 동천은 산세가 험해 마차를 따라 달리는 시간이 비교적 적자 숨가쁠 일이 별로 없었지만 각대를 차고 사천까지 오는 동안 무게가 배나 늘어나 한쪽에 20근씩, 총 40근의 무게를 달고 움직여야했던 동천은 힘들어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헥헥, 은혜를 원수로 갚은 년 때문에 이 몸의 고통이 말이 아니로세!’

그동안 볼 것, 못 볼 것, 다 보여주었던 약왕전의 식구들만 있었더라면 힘든 표정을 좀 지어볼 만도 했는데 호위무사들과 안내자들이 새로 보강되자 자존심상 그러지도 못하며 겨우 도착한 그는 그제야 나직이 한숨을 돌렸다.

“하하, 어서 오십시오. 본교에서 이곳까지 오시느라 노고가 많으셨을 텐데 좀더 여장을 푸시고 오시지 그러셨습니까.”

혈각(血閣)의 각주인 초무강(肖武强)이 마중 나와 반갑게 맞이하자 동천은 얼른 인사를 올렸고, 사정화는 주위를 둘러본 후 입을 열었다.

“별로 피곤하지도 않았고 이곳의 일도 궁금하여 일찍 왔어. 별 일은 없었겠지?”

사정화는 며칠 전 곽수양에게 물어보았음에도 확인 차 다시 한 번 물었다.

그러자 초무강이 웃음 지으며 보고했다.

“소신이 관할하는데 그런 일이 일어날 리가 있겠습니까. 설사, 일이 있었더라도 금방 해결되었을 겁니다.”

자신감에 찬 그의 대답에 무언가 생각하듯 입을 다물고있던 사정화는 말했다.

“좋아. 지금까지 수색한 지역은 어느 정도나 되지?”

“여기에서는 대답해드리기가 곤란하니 막사(幕舍) 안으로 들어와 주십시오. 그곳에 사천성의 대략적인 지도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약소전주, 자네도 따라오게.”

“예, 혈각주님.”

동천과 사정화는 초무강을 따라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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