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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629화


빠져나갈 구멍은 확실하게 마련해놓고 핏물을 씻어낸 그는 몰려오는 쥐 떼를 살기 등등하게 바라보았다. 그런데 살기 등등한 그의 얼굴이 점차 묘하게 바뀌어갔다.

“으음! 어째 좀 많다?”

도망쳐 올 때만해도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거의 눈앞에 당도한 지금은 족히 1천을 헤아릴 정도의 숫자였다. 아마 돈주고 사람들을 동원해서 계곡 내의 쥐들을 전부 잡아오라고 시켰어도 이 정도의 숫자를 이뤄내기는 불가능하리라.

“이것들이 밥 처먹고 그 짓들만 했나? 뭐가 이렇게들 많은 거야!”

시작하기도 전에 질려버린 그는 빠져나갈 구멍부터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방팔방으로 몰려드는 새까만 쥐 떼들을 보자니 쉽게 도망칠만한 틈이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안전한 곳이라고는 뒤쪽의 폭포로 이루어진 작은 호수였는데, 어렸을 적에 몇 번 몸을 담갔던 것 외에는 물가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었던 동천은 쉽사리 뛰어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폭포로 올 때에는 뛰어들면 그만 이라는 생각으로 왔는데 막상 바닥이 보이지 않는 깊은 호수를 바라보자니 경시하던 생각이 싹 날아간 것이었다.

‘으으, 어쩐다지? 그냥 눈 딱 감고 물로 뛰어 들어봐? 아냐. 그러다가 임종하시면 누구 좋으라고? 또 역사상 처음으로 쥐 떼에 몰려 익사했다는 오명까지 쓰게될 텐데 내가 미쳤어? 깊이도 가늠할 수 없는 저기로 뛰어들게? 제길제길! 그렇다고 이 몸이 초상비(草上飛)를 이용해서……, 어? 초상비?’

초상비는 풀잎을 밟고도 풀이 휘어지거나 꺾이지 않는다는 상승의 경지로서 경공으로 명성을 날릴 자신이 있는 자들은 기본적으로 이것이 가능해야 무림에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는 공부(工夫)라고 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 동천은 꼭 풀잎을 밟고 전진할 필요 없이 쥐 떼를 밟고 나아가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고 말이다.

찍! 찍찍!

그러는 사이에도 쥐 떼는 멈출 생각이 없는 듯 계속 몰려오고 있었다. 망설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진 동천은 가볍게 몸을 띄우더니 가장 가까이에 있는 쥐의 머리를 밟고는 튕기듯 살짝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곱게 뛰어오를 생각은 없었는지 밟힌 쥐의 머리가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터져 버렸다.

다음 낙하지점을 예상하고 정신을 집중하는데 흥분한 쥐들이 뭐가 그리도 급했던지 펄쩍펄쩍 뛰어오르며 동천을 물고늘어지려는 시도를 반복했다.

“나 니들을 안 좋아하거든? 그만 좀 뛰어오를래?”

좀더 여유 있게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입을 열자 기가 흐트러졌다. 하는 수 없어진 그는 하고픈 말들을 중간에 끊은 뒤 귀영낙화(鬼影洛花)의 초식으로 회전을 가미하며 마침 뛰어오른 쥐의 머리를 내리찍었다. 그 반동을 이용하자 처음의 시도와는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멀리 뛰어오를 수 있었다.

그렇게 같은 동작을 서너 번 반복하던 동천은 우연히 시선을 발끝에 고정시키고 있다가 밟았던 쥐의 전신이 터져 나가는 것을 발견하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제일 처음 쥐의 머리를 터트린 것은 기교가 아니라 단순히 힘에 의존하여 밟아 죽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했는데 귀영낙화에 찍힌 쥐의 경우는 살의(殺意)가 담겨있었다고는 하지만 그저 반동을 이용하여 뛰어오른 것일 뿐이었다.

헌데, 놀랍게도 귀영낙화에 머리를 밟힌 쥐가 그곳에서부터 시작하여 회오리치듯 겉가죽이 일그러지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몸 전체를 갈기갈기 찢어발기는 것이 아닌가!

“헉? 저게 뭐시여?”

그것은 마치 작은 파문에서부터 시작한 소용돌이가 거칠게 돌변하여 주위의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동천에게 있어서 하나의 충격으로 다가왔다.

‘흐미∼! 귀영낙화가 이런 방식으로도 공격이 가능했었단 말야?’

동천은 그저 안전하게 착지한 뒤에 다음 행동으로 이어지는 초식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뜻하지 않은 효과를 발견하게 되자 도망치던 것도 잊고 멀거니 죽은 쥐를 바라보았다. 허나 곧 정신을 차리고 몰려드는 쥐 떼를 피해 계속 도망쳤다.

그러던 중 동천은 어쩐지 자신이 쥐들의 의도대로 특정한 곳에 몰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다름이 아니라, 자신이 목조건물 쪽으로 이동하면 쥐의 무리가 둘에서 셋으로 갈라져 미리 그쪽을 차단하는데 계곡의 바깥쪽으로 방향을 틀면 하던 짓 그대로 그냥 덤벼들었던 것이다.

이쯤 되면 동천도 쥐 떼들이 사람에 의해 조종되고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젠장, 누가 지랄마왕 아니랄까봐 추잡하잖아? 아니, 그렇게도 할 짓이 없나? 쥐새끼들을 조련하면 누가 칭찬해준대?”

동천은 쥐들을 조종하는 상대가 석추양임을 단언하면서도 그가 전면으로 나서질 않고 있자 간이 배 밖으로 튀어 나왔는지 그를 마구 씹어댔다.

이제 아예 겁을 상실한 그는 나올 테면 나오라는 식으로 대놓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더불어 동천은 이 기회에 새로운 면을 발견한 귀영낙화를 좀더 다듬으려는지 쥐들에게 아낌없이 발 도장을 찍어주었다.

“하하, 악(惡)은 지옥으로! 지랄마왕도 지옥으로! 하하하! 하하…, 엥?”

사사사―삭!

한참을 몰두하고 있는데 쥐들이 갑자기 물러나기 시작했다. 동천은 쥐들도 소용이 없음을 알고 후퇴하는 줄 착각했지만 뒤이어 신비롭게 등장한 중년여인으로 인해 그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중년여인은 선이 가늘고 유려한 듯 보였지만 고집이 서려있는 듯한 매서운 눈썹으로 인하여 전체적인 용모를 차갑게 만들고 있었다.

동천은 그 여인의 얼굴을 보고 매우 기이한 기분을 느꼈는데 좋은 것 같으면서도 울렁거리는 것이 결코 편하게 받아들일 수만은 없는 기분이었다.

“저어, 누구세요?”

동천과 마찬가지로 무언가 생각하는 표정을 짓고 있던 중년여인은 말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리 가까이 와보거라.”

자신도 모르게 앞쪽으로 신형을 기울일 뻔한 동천은 얼른 정신을 차리고 경계했다.

“무엇 때문에 오라고 하시는 겁니까?”

동천의 경계심을 읽어낸 중년여인은 어처구니가 없어져 피식 웃었다. 그녀는 일부러 미소를 지우지 않고 동천에게 다시 말했다.

“해를 입히려 했다면 벌써 그렇게 할 수 있었다. 걱정하지 말고 가까이 와보거라.”

‘으음, 이 몸의 옥체에 해를 입힐 수 있는 존재가 어디 있다고 저런 개뻥을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일까? 나는 과연 저런 아줌마를 믿고 다가가도 되는 것일까? 쓰읍! 가야 하나? 아니면 씹어?’

근래에 이렇게까지 고심한 적이 없었던 동천은 다가가긴 다가가되 전부가 아닌 절반 정도의 거리까지만 다가가기로 결정했다. 그 정도의 거리라면 무슨 일이 벌어져도 충분히 빠져나갈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정중히 폼을 잡고 말했다.

“여기까지 밖에 허용할 수 없는 이쪽의 입장도 고려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중년여인은 사내가 되어서 배포도 없이 의심만 앞서는 듯하여 마음에 안 들었으나 자신이 조종한 쥐 떼에 혼란을 겪었음을 상기하고는 내키진 않는 타협을 해주었다.

그녀는 여전히 동천을 뚫어져라 살펴보며 물었다.

“좋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동천은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동천이라고 합니다.”

중년여인은 대뜸 눈살을 찌푸렸다.

“동천이라? 성이 동(冬)씨란 말이냐?”

동천도 그녀를 따라 눈살을 찌푸렸다. 상대가 자신의 이름을 듣고 눈살을 찌푸리는데 어느 누가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겠는가.

“그렇습니다만……, 무슨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습니까?”

중년여인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다. 그보다 너는 이곳엔 무슨 일로 들어왔느냐.”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아참, 그러는 부인께선 어떻게 이곳에 머물고 계시는 겁니까? 여긴 살인마왕 석 노선배님의 거처라고 들었는데? 아! 혹시, 석 노선배님과 부부가 되시는…….”

철썩!

“으왁?”

갑자기 뺨을 맞게 된 동천은 눈앞에서 별이 번쩍 하는 것을 보았다. 아울러 자신에게 해를 입히고자 했다면 진작에 입혔을 거라고 말했던 상대방의 말에 내심 코웃음을 쳤던 그였는데 순식간에 다가와 자신의 뺨을 때리고 되돌아간 중년여인을 보자 동천은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아나는 것을 느꼈다.

‘으씨이! 여, 열라 고수잖아? 헉? 혹시 이러다가 그 옛날 민낭 꼴이 나는 거 아냐?’

그때의 안 좋은 기억부터 떠오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지사였지만 사실 동천이 당한 것은 그가 너무 방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기 멋대로 실력을 맞춰 놓았던 상대가 그보다 몇 배의 실력을 발휘하자 당황해서 움직일 수 없었던 것이고, 살기를 일으키고 다가왔던 것이 아니었기에 안심하고 있던 상황에서 어이없이 당한 것이었다.

“규중여인을 앞에 두고 함부로 짝을 짓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난 엄연히 남편이 있는 몸이고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있으니 행여 라도 허튼 소리할 생각은 말거라!”

동천은 서릿발같은 중년여인의 질책에 방심하던 마음을 싹 지운 뒤 은근슬쩍 1장 가량을 더 물러서며 대답했다.

“예에, 제 생각이 짧았나봅니다. 비록 우연히 들어온 것이지만 제가 이곳에 발을 들여놓은 것 또한 예의가 아니니 이만 물러갈까 합니다.”

석추양과의 관계고 뭐고 일단 후퇴하기를 원한 그는 여기에서 이러고 있느니 차라리 돌아가서 사정화에게 몇 대 맞는 것이 더 낫겠다고 생각했다.

중년여인은 호기롭기는커녕 소심하기까지 한 동천의 모습에 흥이 깨어져버리는 것을 느꼈으나 마지막으로 확인해볼 것이 있어서 상대해주었다.

“가더라도 어려운 부탁은 아니니 들어주고 가줬으면 한다.”

‘아줌마, 그런 부탁이 더 무서운 거예요.’

실지로 그런 경우가 허다해서 마냥 허튼 생각은 아니었다. 그러나 동천은 시치미를 떼고 대답했다.

“말씀처럼 어렵지만 않다면야……. 부탁하실 게 뭡니까?”

“정말 별 것 아니다. 네 몸을 진맥해봤으면 한다.”

“예에?”

동천은 이럴 줄 알았다며 속으로 화를 냈다. 일반적으로 무림인들 사이에서 손목을 내주는 행위는

‘나 죽여주십시오.’

하는 것과 마찬가지여서 믿을 수 있는 자가 아니면 허용하지 않는 것이 통례였기 때문이다.

일단 손목을 내주어 완맥을 잡히게 되면 상대가 얼마나 고수인가에 따라 적게는 3할에서 많게는 내공 전부를 끌어올릴 수 없게 되고, 피해자가 상대보다 2배에서 3배 가량이 뛰어나지 않는 이상 주도권을 빼앗기게 되는데 누가 과연 처음 보는 사람에게 진맥을 맡기겠는가.

‘이 아줌마가 누굴 병신으로 아나. 미쳤어? 다가가기도 꺼려지는데 손목까지 내주게?’

그의 성격상 펄쩍 뛰지 않은 것만 해도 많이 참는 것이었다.

그때 하늘에서 전신이 갈색으로 물든 작은 새가 내려오더니 뾰로롱 소리를 내며 중년여인의 어깨에 앉았다. 그녀는 침입자가 들어왔다는 새의 보고에 귀찮아진 표정을 지었다.

“동천이라고 했던가? 혹시, 본곡에 너 혼자만 왔더냐?”

동천은 사람의 어깨에 내려앉은 새가 신기해서

‘저런 거 잡아먹으면 맛있을까?’

라는 생각하다가 급히 정신을 차렸다.

“글쎄요? 일단 이곳에 온 것은 저 혼자뿐이었습니다만?”

중년여인은 못 마뜩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대답이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이더냐. 되었다. 누군가 본곡을 침입한 듯 보이니 해결하고 올 때까지 여기에서 잠시 기다리고 있거라.”

그러고는 동천이 뭐라 할 사이도 없이 휙 사라져버렸다.

“어? 저기요! 그러고 보니 제 편일 수도 있어요! 저기요!”

뒤늦게 산채에서 자신을 찾아 나섰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동천이 중년여인을 불렀지만 그녀는 이미 대화를 나눌 공간에서 벗어난 후였다.

물론 뒤따라가자면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겨우 위험에서 벗어난 동천이 미쳤다고 그런 짓을 하겠는가?

비로소 안전해진 자신을 깨닫고 기뻐하던 그는 보아하니 그녀가 석추양과 깊은 관계도 아닐뿐더러 그자까지 이곳에 없는 듯 하자 자연스레 목조건물로 향하는 자신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오호? 저곳이 그 말로만 듣던 무주공산(無主空山)이로구나!”

눈을 반짝인 동천은 당장에 위험에서 벗어나자 호기심을 참을 수 없었던지 서둘러 목조건물을 향해 신형을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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