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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637화


“에이! 내가 거지도 아니고 계속 빌어먹을 것 같으냐? 내 더러워서 그만 만진다! 됐냐? 됐어?”

동천은 괜히 화를 냈다. 못생기기라도 했으면 정말 쉬웠을 텐데, 이건 정말 천하에서도 드문 미인이니 눈앞에 굴러 들어온 떡을 내치기가 상당히 어려웠던 것이다.

“그만두자, 그만 둬. 말 해봐야 이 몸의 입만 아프시니까.”

이제 더 이상 있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 동천은 천천히 걸어가 비밀기관을 작동 시켰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문이 안 열렸다.

“응, 뭐지? 이게 왜 안 열리는 거지?”

당황한 그는 계속 기관장치를 눌러댔다. 그러다가 주위까지도 눌러보았지만 당혹스럽게도 기관장치는 요지부동이었다. 어찌 그가 진실을 알랴. 사실 자인설 딴에는 마교의 반도(叛徒)가 되어 도망칠 동천의 삶에 도움을 주고

<쫓기는 인생을 좀 살아보다가 잡히라는 뜻이다>

자신이 간 뒤에 다시 한 번 기관이 작동되면 문이 열리고 나서 그대로 내부기관이 파괴되도록 건드려놓고 간 것이었는데 그 단 한 번의 기회를 동천이 걷어찬 것이었다.

즉, 자인설은 동천이 일단 비밀통로를 열고 나오면 적어도 추적자들이 이곳을 통해서는 쫓아올 수 없도록 배려를 해준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서, 설마, 고장난 겨? 으악! 어디에서 이런

<화정이가 치마에 응가 하는 개 같은 일>

이!”

도연에 이어 화정이까지 나왔으니 나중에 소연은 어떠한 비유를 할지 자못 궁금하다.

“으으, 진정하자. 이쪽으로 나갈 수 없다면 다시 되돌아가면 되는 거니까. 그, 그래! 아직까지 호위대가 들이닥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 유치한 진법에서 헤매고 있거나 이곳으로 통하는 비밀장치를 발견하지 못해서 자결할 준비나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 흐흐, 그러니까 이 몸은 문을 열고 나가서 이곳의 존재를 가르쳐준 뒤에 모든 이목이 정화에게 몰릴 때 유유히 벗어나면 된다는 말씀? 하하하! 역시, 천재로다!”

사정화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고 부풀려 이야기하면 빠져나가는 것은 일도 아니었던 만큼, 그다지 부담이 없는 좋은 작전이었다. 뭐라고 할 사람도 없긴 했지만 자기가 좋다는데 누가 말리겠는가.

“좋았어. 이제 가 볼까나?”

드디어 결단을 내린 동천은 들어왔던 통로의 입구까지 되돌아가서 통나무 벽을 열 수 있는 장치를 찾았다. 그러나 한참을 찾아도 장치는 만져지지 않았다. 여기에서까지 기관장치가 말썽이어서 화가 난 그는 마구잡이로 벽을 눌러보기도 했지만 마구잡이는 마구잡이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문제는 금방 해결되었다. 드디어 폭발한 동천이 통나무 벽을 발로 걷어차자 그대로 부서져 나갔던 것이다.

“…….”

설마 진짜로 부서질 줄 몰랐던 동천은 쩍 벌렸던 입을 황급히 다물었다. 사실 특별한 재질의 통나무도 아니었을 뿐더러, 집 자체가 이 비밀통로를 가리는 목적으로만 만들어진 것이었던 만큼 2갑자에 달하는 동천의 내공을 당해내지 못했던 것일 뿐이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동천이 그 이야기를 몸소 실천해준 것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에이, 기분 나빠. 그냥 부수면 될 것을 괜히 찾는다고 시간만 낭비했잖아? 퉤!”

몇 번 더 수고해서 사람 하나 겨우 드나들 정도의 공간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동천은 밖으로 빠져 나온 뒤 자신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 뜻밖에도 호위대가 아직도 진법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까이 다가가서 그것을 재차 확인한 동천은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은 너무도 쉽게 빠져 나와서 별 것도 아닌 진법으로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까 그 생각을 수정해야만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에그, 다들 얼굴이 반쪽인 게 고생들 좀 한 듯한 얼굴이네? 쯧쯧, 그러니까 자고로 사람은 주인을 잘 만나야 한다는 거라고.”

제 얼굴에 침 뱉는 줄도 모르고 호위대만을 탓하며 다가간 동천은 진의 가장 바깥의 쥐를 툭 건드렸다. 그러자 놀랍게도 반탄력이 생기며 동천의 발을 바깥으로 미끄러트렸다.

“어? 뭐야 이거. 꼴에 진법이라는 거야?”

처음엔 황당했지만 뒤이어 화가 났다. 고작 쥐 하나 걷어차는데 무형의 기운에 가로 막혀 방향이 틀어진 것이다. 그러나 진법은 동천이 생각했던 것만큼 우습게 볼만한 것이 절대 아니었다.

진(陣)이란 하나의 유기적인 통로들의 집합체와 같은 것으로서 비록 생명력을 띄고 있지는 않지만 하나와 하나를 더해서 셋 이상의 효과를 낼 수 있는 뛰어난 학문이자 술법의 일종이었다. 자세하게 파고들면 설명이 길어지는 고로, 간단하게 말해보겠다. 일정한 법칙에 의하여 배치의 순서와 간격에 따라 천차만별의 효과를 나타낼 수 있었던 진법은 귀곡자(鬼谷子)라는 전국시대의 학자가 천기의 흐름을 그대로 적용하여 땅 위에다 재현시킨 것을 시초로 발전하게 된 학문이었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 진법을 제대로 활용하려면 시전자의 정신력이 얼마나 강하고 깊은가를 따져봐야만 한다. 같은 진법일지라도 정신력이 어느 정도까지 반영되었는가에 따라 진이 형성될 시에 일류와 이류 같은 급수가 구분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법과 술법으로 대성한 자들 중에 정신 수양이 깊은 불제자나 도가의 도인들이 유난히 많이 배출되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비록 동천이 예지력의 영향으로 진법에 유난히 강한 인간이 되었다고는 하나, 직접적으로 그것을 파괴하려면 진법의 이해도가 충분하지 않은 이상 어렵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퉤퉤! 오늘 니가 이기나 이 몸이 당연히 이기겠지? 어디 해보자!”

이마에 실핏줄이 툭툭 불거질 정도로 내공을 최대한 끌어 모으기 시작한 동천은 수중에 무기가 없는 상태이자 하는 수 없이 장 할아버지에게 배운 수공을 펼쳤다.

콰앙!

그의 손에서 걸리는 것은 무엇이든 절단을 낼 듯한 기세가 쏟아지자 죽은 쥐를 둘러쌓던 반탄지기는 약간 저항하는가 싶더니 이내 산산이 부서져 나갔다. 그나마 진법 안에 빠져서 공격한 것이 아니었기에 좀더 수월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때 동천은 수공을 펼친 손을 내려다보며 무언가 생각에 빠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수공은 가볍게 쓰기엔 너무 강한걸? 강해서 좋기는 하지만 그만큼 내력소모가 커서 오래 사용하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어. 으음, 이 무공은 아껴두는 쪽으로 잡고 빠른 시일 내에 혈살의 혈잠적공장(血潛積功掌)이나 연마해야겠다. 하하, 숨어서 무공 좀 익히다가 나오면 천하무적은 따 놓은 당상이겠지? 으하하, 내가 곧 천하제일인이다!’

진법이 완전히 깨진 것은 아니었지만 동천 덕분에 균열이 일어난 곳으로 호위대가 속속들이 튀어나왔다. 그들과 수천희는 잠시 어리둥절하다가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들은 곧 양손을 치켜들고 저 혼자 만세를 부르며 낄낄거리는 약소전주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런, 아가씨는 어디에 계시고 혼자이신 겁니까?”

분홍빛 미래를 꿈꾸던 동천은 얼른 정신을 차렸다. 아울러 그는 추궁을 받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빴지만 이 상황에서 그것을 따져봤자 득 될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그런 것을 따져야 할 상황도 아니었고 말이다.

“아! 저기 뒤쪽으로 들어가면 비밀통로가 나오는데 아가씨께서는 현재 그곳에서 기절해 계신 상태야! 그 간악한 요녀와 싸우시다가 내상을 입으셨는데 내가 급한 불은 꺼놓았으니 어서 가서 호위를 서 줘! 나는 밖으로 나가서 도주한 요녀의 행방을 추적하라고 일러 둘 테니까!”

처음에 안색이 창백해졌던 그들은 동천의 이야기가 뒤로 갈수록 안도해하더니 종래에는 본래의 신색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이야기가 끝나자 공손히 포권지례를 올렸다.

“실로 큰일을 하셨습니다. 그럼 수고해주십시오.”

파팟, 파파팟!

동천은 신속하게 안쪽으로 사라지는 호위대를 보며 생각했다.

‘시팔놈들. 누가 보면 이 몸이 도망치는 게 아니라 저놈들이 도망치는 줄 알겠네.’

별걸 다 가지고 못마땅해한 그는 이럴 때가 아님을 깨닫고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문을 열자 일장 가량 떨어진 곳에서 수하들과 주위를 지키고 있는 초철산이 보였다.

“나오셨습니까? 일이 잘 해결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동천은 초철산의 염려 아닌 염려에 당황한 듯 소리쳐주었다.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야! 아가씨께서 그 요녀에게 당하셨단 말이다!”

초철산은 두 눈을 부릅떴다.

“헉? 무, 무슨!”

“자네 귀 먹었나? 무슨이고 저슨이고 간에 빨리 들어가서 호위대를 보좌해야 할 거 아냐! 들어가는 통로는 내가 뚫어놓았으니까 바로 보일 테고, 에 또……. 하여간 어서 들어가!”

“예, 옛! 가자!”

정신이 하나도 없었던 초철산은 분위기에 이끌려 허둥지둥 안으로 들어갔다. 물론 한치의 의심도 없는 것이, 아무리 약소전주라 할지라도 그런 중대한 일로 거짓말을 했다간 심한 문책을 면치 못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일을 벌린 동천은 초철산이 몇몇 향주들과 절반 이상의 수하들을 이끌고 들어가자 내심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후후, 모든 것이 이 몸의 예상과 딱 맞아떨어지는구나. 하긴, 어느 분이 계획한 작전인데 어긋나겠어? 파하하!’

그렇게 속으로 실컷 웃고 난 동천은 그러고 보니 이렇게 가까이 있었는데 초철산 일행이 어째서 호위대가 고생하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을까 의아해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진법의 영향이 방 하나 전체를 가득 메웠을 뿐더러, 음파를 차단하는 효과까지 있었기 때문인데 동천이 그런 것까지 알 턱이 없었던 것이다. 덕분에 안쪽에서 통나무 벽을 부쉈을 때도 밖으로 새어나가는 소리가 극히 미미했던 것이고 말이다.

‘알게 뭐야? 그런 건 나중에 생각해도 충분한데 말야. 하여간, 지금쯤 호위대가 기절한 사정화를 붙잡고……. 헉? 혹시 이놈들. 누가 안 본다고 우리 정화의 이곳 저곳 건드리고 있는 거 아냐?’

사람이 다 자기 같은 놈인 줄 아나 보다. 잠시 불손한 생각을 끝낸 동천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는 남아있는 자들에게 잘 지키고 있으라고 명한 뒤 서둘러 계곡의 입구로 몸을 날렸다. 남아있는 자들은 감히 어디로 가느냐고 물어보지도 못했고 말이다.

“좋았어! 드디어 빠져 나온 거야! 하하, 자유다!”

한참을 달려서 거의 바깥 출구에 도착한 그때 어디에선가 날카로운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직 아냐!”

“엇?”

놀란 동천은 감지력을 느낀 동시에 벌써 눈앞까지 다가온 의문의 상대를 보곤 재빨리 옆으로 피했다.

찌익!

상대의 손이 어깨를 스치며 살짝 옷이 찢어졌다. 평소의 동천이었다면 비싼 옷인데 찢었다고 지랄을 했겠지만 상황이 너무도 급박했다. 다짜고짜 덤비는 데다가 너무도 빠르고 신속하기까지 한 다음 공격이 바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우왓? 뭐지 이 자식은?’

상대는 날카로운 인상을 풍기는 중년인이었는데 동천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인물이었다. 다행이 죽일 생각은 없는지 금나수가 주를 이루고 있었지만 손끝에서 살점이 잡아뜯길 듯한 패도적인 기운이 쏟아져 나오는지라 감히 방심할 수가 없었다. 동천은 특기인 경공으로 간신히 피하고는 있었지만 이러다간 결국에 당할 것이 분명 하자 되려 뛰어들어 귀영분광을 시전했다.

스팟!

“응?”

상대는 의외의 행동을 보인 동천에게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둘로 나뉘는 동천의 분신을 보자 대번에 안색을 굳혔다. 그는 왼쪽으로 향하는 분신을 향해 권(拳)을 쭉 내밀었다. 우연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왼쪽이 동천의 본체였다.

‘쓰팔! 아직 화후가 모자랐나?’

원래는 공격이 이루어질 때까지 잔상이 남아있어야 했는데 채 공격을 하기도 전에 희미해지기 시작하자 약간 늦었지만 동천을 향해 공격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약간의 시간은 동천이 출수를 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슈슈슉! 펑, 퍼펑!

“컥? 으읍!”

상대와 마주친 뒤 서너 발자국을 뒤로 물러선 동천은 정작 밀린 것은 자신인데 상대가 경악에 물들어 있자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덕분에 어느 정도 숨을 돌릴 수 있었던 그는 이 때에 재빨리 물어보았다.

“뭐, 뭡니까? 왜 다짜고짜 공격했느냔 말입니다.”

중년인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조금은 겁먹은 듯한 눈빛으로 되물었다.

“네 녀석은 누구인데 단강수(斷剛手)를 익히고 있는 것이냐.”

‘단강수? 그게 뭐지?’

동천은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지만 뜻하지 않게 주도권을 잡은 듯한 상황에서 그게 무슨 소리냐고 순진하게 되물을 동천이 아니었다. 그는 짐짓 위엄이 서린 표정으로 말했다.

“보고도 모른단 말입니까? 단강수가 개나 소나 익힐 수 없는 무공이라는 것을…….”

그때서야 단강수가 무엇인지 깨닫게 된 동천은 기겁했다.

‘으헉? 단강수라면 전설의 삼대수(三大手) 중 하나라고 사부님께서 말씀해 주셨던 그거 아냐? 그, 그렇다면 설마 내가 펼친 게?’

상대방은 동천이 대번에 창백해져서 안색을 굳히자 자신의 질문에 기분 나빠져서 그러는 줄 착각했다.

“물론 알고 말고. 내 어찌 단강수가 자네 부친의 성명절기인 것을 모르겠는가.”

그 말에 퍼뜩 생각에서 깨어난 동천은 말했다.

“음, 알고 계시는군요. 헌데, 어째서 절 암습하셨던 겁니까?”

찔끔한 상대방은 급히 부인했다.

“암습이라니? 그런 소리 말게. 요새 하도 잡것들이 이곳 향화곡을 들락날락 거려서 보이는 족족 잡아다 가뒀는지라 자네도 그 부류인 줄 착각하고 보자마자 손을 썼던 것이네. 자네도 알다시피 노부가 자네 모친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지 않은가.”

눈을 번뜩인 동천은 그제야 상대가 누구인가를 깨닫게 되었다.

‘어? 이렇게 젊은 인간이 지랄마왕이었단 말야? 젠장, 늙어 보이기 싫어서 주안술을 익혔나 보구나. 그건 그렇고 정황을 보니 이 몸을 그 아줌마의 아들로 착각하는 모양인데 여기에서 되물어 보거나 놀라하면 의심을 사게 되겠지? 일단 장단이나 맞추어주자.’

생각을 마친 그는 태연하게 말했다.

“어머님이라면 비밀통로로 나가셨습니다. 헌데, 보이는 족족 잡아들였다 함은 암흑마교의 일당들 이야기입니까? 저도 오면서 부딪혔는데 석 어르신의 성격으로 보았을 때 의외로군요. 그간 심경의 변화라도 있으셨던 겁니까?”

석추양은 자신이 두려워하는 상대의 자식이 자신을 어르신이라 높여주자 우쭐해져서는 의기양양하게 대답해주었다.

“하하, 그렇지 않네. 처음에는 노부도 귀찮아서 죽일까 했는데, 생각해보니 암흑마교를 건드리는 것은 극히 위험해서 잠깐 잡아놓고 자네의 모친이 안전하게 피신할 때까지 시간을 벌어볼 생각이었네. 참, 비밀통로로 나갔다는 걸 보니 드디어 잠시 자리를 피한 게로구먼. 자네가 설득한 것인가? 노부가 설득할 때에는 피신할 수 없다면서 고집을 부렸었는데.”

틀린 말은 아니자 동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제가 이곳에 왔을 때에도 한창 놈들을 상대하시고 계셔서 거들어 준 뒤에 유유히 빠져나왔던 겁니다.”

고개를 끄덕인 석추양은 직접 암흑마교가 점거한 산채에 찾아갔다가 그들의 무리가 향화곡으로 향했음을 듣고(한심이 알려줬다) 바로 달려 온 길이어서 앞뒤가 정확히 맞아떨어지자 추호의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그랬었군. 그렇다면 이미 많이 죽였을 테니 이젠 그 인질들도 소용이 없게 되는 것인가? 이런이런, 인질들을 내세워서 적어도 10일간 얼씬도 않는다면 무사히 풀어줄 요량으로 잡고 있었던 것인데 공연히 식량만 축낸 꼴이지 않은가.”

석추양은 암흑마교를 의식해서 인질들을 잡은 게 아니라 자신이 위험에 쳐했을 때 약간의 시간을 벌어보고자 그들을 잡고 있었던 것이었으면서 짐짓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그것을 알 턱이 없는 동천은 그래도 한솥밥을 먹었던 자들이라고 구해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으음, 그게 또 그렇지가 않습니다. 하수들을 몇 명 죽이긴 했지만 나머지 녀석들은 모두 맛만 보여주었을 따름이니 차라리 그냥 풀어주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죽이는 것과 인질로 잡았다가 풀어주는 것에는 엄연히 차이가 있을 테니까요.”

그러나 석추양은 동조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아닐세. 공연한 짓이야. 마도의 수위를 다투는 암흑마교인데 인질로 잡혔다가 풀린 것을 알면 소문이 날까 두려워 더욱 집요하게 추적해 올 것이 분명하네. 그들에게 수치를 주느니 차라리 죽이는 게 낫다는 이야기지.”

단호한 듯 보이는 석추양의 대답이자 동천은 내심 답답해했다.

‘아, 이놈의 속 늙은 영감탱이! 누가 늙탱이 아니랄까봐 거참 더럽게 고지식하게 구네? 이봐, 솔직하게 말해봐. 당신 주위에 친구 없지? 그치?’

안 되겠다고 생각한 그는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힘을 좀 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을 죽인다면 타협의 여지가 전혀 없게 됩니다. 음! 아버님께서는 암흑마교와 얽히는 것을 꺼려하실 텐데 어쩌지요?”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오만상을 찌푸린 석추양이 끄응, 하고 못 먹을 걸 먹은 듯한 신음 소리를 내뱉었던 것이다. 잠시 후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 듣고 보니 자네의 말에도 일리가 있군. 하는 수 없지.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일단 이제까지 벌인 일을 무마해주는 조건으로 인질들을 풀어주는 수밖에.”

잘 풀려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동천은 문득 자신이 여기에서 뭐 하는 짓인가 했다. 지금쯤 발에 땀나도록 뛰어도 시원찮을 판에 한가하게 소문이 자자한 살인마왕과 잡담(?)을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럼 전 그렇게 알고 가볼 터이니 수고해 주십시오.”

석추양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온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간단 말인가?”

“괜찮습니다. 저는 어머님께서 무사히 떠나시는 뵈었으니 다시 돌아가려고 합니다.”

석추양은 그들의 관계를 잘 알고 있었는지라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자기 눈살을 찌푸렸다.

“가만, 그녀의 아들은 지금쯤 30세에 가까워야 하는데…… 으음, 자네는 누구인가?”

무섭게 다그치려다가 동천이 단강수를 익혔다는 것을 상기시킨 그는 다소 굳어진 얼굴로만 동천에게 물었다. 그러자 속으로 헛바람을 들이킨 동천은 본능적으로 더욱 태연히 말했다.

“예? 지금 저하고 장난하십니까? 제가 어머님의 자식이 아니라면 남몰래 얻은 첩의 자식이라도 된다는 말입니까?”

석추양은 너무도 태연해서 감히 다그칠 생각을 버렸다. 사실 자인설과 그다지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던 그는 그녀의 가정사를 자세히 알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이것은 물론 동천에게 천만 다행이었고 말이다.

“아, 아닐세! 그저 몰라서 그랬을 뿐이니 자네가 이해하게나. 음, 그래. 그녀가 이곳에 온 것이 15년 전쯤이었으니 대충 자네의 나이 대와 비슷하구먼. 자네를 낳고 왔다는 것을 생각했어야 했는데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네. 이거이거, 늙으면 죽어야지. 하하하.”

이렇게 쩔쩔매는 사람이 살인마왕 석추양이라고 한다면 아마도 모든 사람들이 콧방귀를 뀔 것이 분명했다. 그의 악명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절대로 믿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흐아∼! 간 떨려 죽는 줄 알았네. 그건 그렇고, 누가 지랄마왕 아니랄까봐 아주 지랄을 떨어라, 지랄을 떨어. 그렇게 바로 꼬리를 내릴 거면서 왜 의심은 하고 지랄인 거지? 내 참, 어이가 없어서…….’

등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렀던 동천은 위기에서 벗어나자 바로 본래의 동천으로 되돌아갔다. 그는 더 이상 있으라고 해도 있을 생각이 없었기에 기선을 잡은 기회에 서둘러 빠져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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