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642화
“으음!”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이상야릇한 느낌 때문에 깨어날 수밖에 없었던 사정화는 미약한 신음소리를 내며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하지만 이때의 동천은 황급히 내공의 주입방식을 바꿨던 터라 그녀는 흥분한 것 같았던 자신이 그저 꿈이었나 생각할 따름이었다.
‘내가 얼마나 정신을 잃었던 것일까?’
눈앞의 침대 쪽을 바라보자 노을 빛으로 추정되는 은은한 연주황색의 빛깔이 창가를 통해 흘러 들어왔다.
흠칫!
비무를 시작해서 내상을 입은 시기가 아침이었는데 해가 지는 이 시기까지 동천이 내공을 주입해주는 것 같자 그녀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개인의 내공으로 상대의 내상을 치유해주는 것에는 한계가 있어서 1시진 정도도 정말 대단한 희생이라고 볼 수 있는데, 무려 4시진에서 5시진 가량을 내가요상술(內家療傷術)로 치유해주는 것 같았으니 동천의 성격을 잘 알고 있던 사정화로서는 감동하기 이전에 놀람부터 앞섰던 것이다.
‘엇? 이, 이럴 수가!’
이어 그녀는 재차 놀랐다. 사실 그녀는 혼원대천력을 정말 조금 더 한계 이상으로 끌어올렸다가 낭패를 본 상태였다. 그런데 지금 보니까 미약한 내상만이 감지될 뿐 말끔히 나아 있었던 것이다.
‘내상을 입었던 아침에 선대의 경고를 무시했던 나를 얼마나 자책하고 후회했었던가. 그럼에도 자존심 때문에 내상을 비밀로 하고 처음의 의도대로 동천만을 불러들였었다. 그 뒤에 정신을 잃어가며 당황하는 녀석의 모습을 보고 내심 불안하게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믿기 힘든 결과를 보여주다니…….’
그녀는 차마 생각하지도 못했지만 결과로 놓고 보자면 역천보다 뛰어난 실력이었다. 역천은 신기에 가까운 실력과 지식을 겸비했고, 동천은 어느 정도의 지식과 기묘한 내공의 활용법을 알고 있어서 둘이 실력을 겨눈다면 몇 명은 비등하게 치료하겠지만 결국은 내공이 딸리게 되는 동천이 지게끔 되어있었다.
그러나 단 1명만으로 실력을 겨누게 된다면 상황은 달라지게 된다. 침술과 영약이 대단하기는 하지만 자연의 힘을 끌어다 쓰는 귀의흡수신공을 활용하게 된다면 아무래도 환자의 몸에 전혀 부담을 주지 않고 완치시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역천이 내공의 활용법을 알아낸 뒤 자신도 귀의흡수신공을 활용한다면 상황이 또 달라지겠지만 과연 그것만으로 동천과 같은 효과를 볼 수 있을까? 모든 것은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법인 것이다.
“깨, 깨어나셨어요? 후우, 후우!”
사정화의 눈치를 보던 동천은 내공을 거두어들이며 죽겠다는 얼굴로 헉헉거렸다. 그 때문인지 사정화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으음! 그래.”
“흐아, 다행이네요. 아침에는 정말 큰일나실 뻔했다구요. 진짜 돌아가시는 줄…, 에에! 그러니까 그런 말이 아니라요.”
“수고했어.”
“에이, 그거야 당연한 거고. 제 말은 그게 아니라……. 예?”
자신의 말실수를 트집 잡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자 놀란 동천이 되물었다. 평소의 사정화라면 되묻는 동천에게 인상을 찌푸렸겠지만 상황이 특수해서인지 살짝 미소해주었다.
“수고했다고.”
“아!”
동천은 좀처럼 표정의 변화가 없는 그녀가 웃어주자 절로 입이 벌어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의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흥분을 했던 상태여서 얼굴에 옅은 홍조가 피어올라 있었는데, 그 때문인지 보일 듯 말 듯한 매력적인 미소가 아름다움을 한껏 발산하고 있었던 것이다.
‘허억? 얘가 또 이 몸을 유혹하려고 드는구나. 오, 하늘이시여! 제발 저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말아주시옵소서∼!’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 무릎 꿇고 하늘님께 빌고 싶었지만 여건이 안 되는지라 동천은 참고 또 참았다. 대신에 그는 끝도 없이 아래로 향하는 턱을 다물고 나름대로 결의에 찬 얼굴을 보여주었다.
“수고는 요. 아가씨께서 저를 믿어주시고 치료를 맡기셨는데 제가 어찌 실망을 시켜 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저 이 몸이 부서져도 맡은 바 소임을 완수하겠다는 그 일념 하나만으로 겨우 치료를 해드릴 수 있었던 것이었 던 만큼 당연한 것이었을 따름이에요.”
간만에 기특한 대답을 들어서인지 사정화는 방금 전 동천의 수상쩍은 행동을 기억에서 지워버렸다. 아울러 그녀는 궁금한 것이 많았기에 물어보았다.
“그래, 알았어. 나중에 네 공적은 충분히 치하해줄게. 그런데 무슨 방법을 썼기에 이 정도로 완치에 가깝도록 치료를 할 수 있었던 거지?”
동천은 대답하기에 곤란한 것을 묻자 잠시 주춤거렸다. 그가 생각할 때 귀의흡수신공의 효능은 자신만이 알아낸 것으로서 남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었던 것이다. 거기에는 그의 사부인 역천까지도 포함하고 있었음이니, 동천도 슬슬 나이가 먹어가며 소유욕이 사부의 사랑을 앞질러 가고 있는 셈이었다.
“아아, 그거요? 말도 마세요. 아가씨를 되살리느라고 호심혈왕단 2개를 탈탈 털어서 섭취를 시킨 다음에 제 내공이 고갈될 때까지 운기요상술을 시전 하느라 저까지 위험할 뻔했다니까요? 으으, 정말 그 때 생각하면 아직까지 치가 떨리는 것이……. 보세요. 제 손 떨리는 거. 보여요? 예?”
사정화는 동천이 손을 떨든 말든 호심혈왕단의 이야기가 나오자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가 기억하기로 그 단환은 본교에서 제작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동천. 호심혈왕단은 혈사교의 물건일텐데?”
어쩐지 의심받는 눈초리이자 동천은 기분이 상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의심부터 받는 느낌은 정말 사양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년아, 너 그거 처먹고 살아났어. 그래도 떫냐?’
생각 같아서는 바로 내뱉고 싶었지만 좋은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서 참았다. 그는 은중각의 일을 설명해주며 호심혈왕단을 얻었던 배경까지 거론하고 나서야 사정화를 납득시킬 수 있었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고지식한 면이 있었던 그녀는 적대 세력의 단환을 동천이 지니고 있었다고 하자 무언가 기분이 나빴던 것이다. 그제야 고개를 끄덕인 사정화는 재차 물었다. 그리고 이번의 물음은 동천을 상당히 난처하게끔 만들었다.
“흐음, 그랬군. 그런데 그걸 어떻게 먹였지?”
“예? 뭐, 뭘 요?”
당황한 동천이 말을 더듬자 갑자기 안색을 굳힌 사정화는 날카롭게 벼려진 눈으로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그 호심혈왕단을 실신한 나에게 어.떻.게. 먹였냐고.”
한순간 핼쑥해진 동천은 정말 은혜를 원수로 갚으려는 년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살아났으면 되었지 도대체 그런 게 왜 궁금하단 말인가.
“어, 어떻게 먹이긴 어떻게 먹여요. 그거 입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스르르 녹는 거 모르세요? 아가씨의 입을 벌리고 넣어드리니까 바로 녹아서 기도로 들어가더라구요.”
“그런데 왜 말을 더듬지?”
“어휴! 생각해보세요. 존귀하신 아가씨의 얼굴을 제가 감히 만지게 되었는데 뜨끔하지 않으면 그게 사람이에요? 그래서 지레 놀라 말을 더듬었던 거예요. 그래도 정말 못 믿으시겠어요? 으아, 이거 가슴을 열어서 보여드릴 수도 없고! 답답해 죽겠네?”
물꼬가 트였는지 동천의 행동이 자연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아울러 그는 자신이 변명하고도 완벽한 것 같자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캬! 오랜만에 이 몸의 재치가 빛을 발하는구나. 제발 이 몸의 이런 능력을 다른 누군가 시기하지만 않았으면 좋으련만…….’
쓸데없는 걱정으로 잠시 시간을 소비한 동천은 그 와중에도 억울한 표정을 풀지 않고 사정화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녀는 진위여부라도 가릴 생각이었는지 동천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나 이미 완벽하다고 자화자찬을 한 동천에게서 무엇을 건져낼 수 있겠는가. 무언가 찜찜함이 느껴지는 그녀였으나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다.
“네 표정을 보니 사실인 것 같군.”
‘그래, 생각 잘했어. 사실 안 믿으면 니가 어쩔 건데? 공연히 결백한 이 몸을 의심해봤자 너만 골치 아파질 따름이라구.’
다행이 잘 넘어간 동천은 씩씩거리느라 벌게졌던 얼굴을 바로 진정시켰다.
“휴우, 이제야 믿어주시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사정화는 일단 결정을 내린 사항에 미련을 갖는 성격이 아니었던 만큼 의심을 떨쳐낸 뒤 다시 본론으로 들어갔다.
“알았어. 헌데, 아무리 이치를 따져 생각해도 그 단환과 내가요상술로만으로는 이토록 완치에 가깝게 고쳐낼 수가 없어. 다시 한번 묻겠는데 어떻게 한 거지?”
동천은 이제 어렵지 않게 대답할 수 있었다. 그 사이에 생각해뒀던 변명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들로는 부족하다는 말씀이 맞지만 아가씨의 치료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내가요상술이 맞아요. 다만 제가 몇 년간의 연구 끝에 극적으로 발견한 치료법이라 설명을 드리기가 좀…….”
아무리 주종관계라지만 수하의 무공이나 비전지식을 함부로 강요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수하 된 자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건네준다면 모를까, 그것이 아닌 이상 자칫 잘못하다간 인심을 잃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정화는 그 원리가 궁금했음에도 더 이상 캐묻지 않기로 했다. 그녀로서는 내가요상술이었다는 것만으로 궁금증을 많이 해소한 셈이고, 혼원대천력을 사용하고도 반나절만에 완쾌할 수 있다는 희소식에 깊이 파고들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너 혹시, 혼원대천력이라고 알아?”
동천은 갑자기 화제가 바뀌자 뜻밖이라는 얼굴을 했지만 더 이상 캐물을 생각이 없는 듯 보이자 내심 환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재빨리 대답했다.
“아뇨? 그게 뭔데요?”
사정화는 약간 놀란 듯 눈을 번뜩였다.
‘역천이 알려주지 않았는데도 증상을 정확히 파악하고 치료했단 말인가? 저 동천이?’
누가 가르쳐 주어서 실전에 활용하는 것과 전혀 모르고 있는 상태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전자는 답안지를 들고 있는 것이고, 후자는 문제지를 들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정화는 그동안 동천이 역천에게 많은 가르침을 받았어도 외우는 것 외에는 빛을 보지 못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녀는 새삼 놀라는 한편 확증된 것도 없는 동천에게 치료를 맡겼던 자신이 우습기도 하고 어처구니가 없자 공연히 눈살을 찌푸렸다.
왜 그랬던 것인지는 몰랐지만 그 당시에는 믿음이 갔었던 듯 했다. 물론 지금은 자신을 고친 증거가 있었기에 부담 없이 그의 실력을 믿어줄 수 있었지만 확실한 것이 아니면 납득하지 못하는 자신의 성격상 그때의 결단을 설명할 수가 없자 화가 났던 것이다.
“저기, 제가 그거 모르고 있으면 안 되는 거였습니까?”
사정화는 동천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정신을 가다듬고 말했다.
“아냐. 하지만 어차피 네가 알아야 할 것 같으니 말해줄게. 혼원대천력은 본가의 비전무공으로서…….”
잠시 후 그 활용도와 위험성을 자세히 설명해준 사정화가 말을 끝마쳤다. 그러자 동천은 퍼득 깨닫는 것이 있었다.
‘이런 씨! 얘가 이 몸을 걸어다니는 비상약으로 활용하려는 속셈이구나!’
사정화는 그런 의도가 아니었는데 말하고 보니 그런 내용이 되어있었다. 즉, 모르고 치료하는 것보다는 자세한 원리를 터득시킨 후 치료시간을 더욱 앞당기게 하려는 은근한 바람이 섞여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동천도 가만히 듣고만 있지는 않았다.
“아하! 그래서 그때 아가씨의 내부가 산송장 저리 가라였던 거군요? 헌데, 다음에 아가씨께서 또 그런 일을 겪으셨을 때 치료를 할 수나 있을지…….”
“왜. 무슨 문제가 있어?”
동천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요. 아시다시피 고갈된 잠력을 보충해주려면 제 내공으로는 어림도 없거든요. 그러니까 제 말은 호심혈왕단 정도의 영단(靈丹)이 최소한 2개는 있어야 어떻게든 불씨를 살려볼 수 있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또 아시다시피 제 수중에는 이미 소비한 호심혈왕단이 다였거든요.”
그러고 보니 완치된 것도 모자라 내공이 약간 상승해있는 것이 느껴졌다. 비록 고갈된 생명력을 보충해주느라 단환의 효과가 흡수되지는 못했지만 동천의 귀의흡수신공이 영향을 주어 세맥 깊은 곳으로 스며들었던 단환의 기운들을 3할 가량 내공으로 환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알 턱이 없었던 사정화는 그저 단환의 기운이 흡수된 것이라고 착각할 따름이었다.
“그런 거라면 괜찮아. 본교에 연락을 띄우면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으니까.”
‘너나 어렵지 않지, 이것아. 다른 사람이 필요하다고 연락했어봐? 재정상태 빤히 알면서 니가 제정신이냐고 회답이 올걸? 음, 물론 이 몸이 부탁한다면 위대하신 사부님께는 흔쾌히 내주시겠지만 말야. 에헴!’
괜히 목에 힘을 준 동천은 반색을 하며 물었다.
“아! 그렇다면 어렵지……이는 어렵지만 가능할 거예요. 사실 이번엔 모르는 상태에서 겁 없이 덤빈 거라 무사히 치료할 수 있었지만 다음에 또 성공하리란 보장이 있나요? 에 또, 그러니까 그저 노력만이 살길이다! 라는 말씀을 해드리고 싶은 건데, 그러니까설라무네…….”
처음부터 너무 쉽게 보이면 심심할 때마다 부려 먹힐 소지가 컸다. 사정화가 그런 위험한 무공을 자주 사용할 리 없었지만 대게 생각 없는 것들은(동천 자신) 뒤에서 수고해주는 사람들의 노력을 무시하는 법이었기에 미리 사전작업을 해놓았던 것일 뿐이었다. 사실, 무척 어려운 치료라는 것은 분명했기에 거짓말도 아니었고 말이다.
“됐어. 하고픈 말을 잘 알겠으니 그렇게 알고 있어. 나도 이번 일을 계기로 생사의 위기가 아닌 다음에는 사용하고픈 생각이 전혀 없으니까.”
그 대답 하나는 정말 마음에 들었다. 동천에게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치료였지만 위험부담이 너무 크고, 차후 같은 일이 반복되었을 때 사정화가 정신을 잃지 않은 상태에서 치료를 받게 된다면 귀의흡수신공의 치료가 필수인 만큼 야릇한 기분을 느끼게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것에 관하여 변명할 것을 생각하자니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리는 동천이었다.
‘음, 그냥 그때가 되면 기절해야 치료가 가능하다고 말한 뒤 기절시킬까? 오오, 그거 괜찮은 걸?’
쓸데없는 잡생각에 잠시 정신을 다른 곳에 두었던 동천은 아가씨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재빨리 현실로 돌아왔다.
“식사해야지?”
사정화의 목소리 때문이라기 보다는 ‘식사’ 라는 단어가 그의 귀를 번쩍 트이게 만들어 놓은 것 같았다.
“예? 아, 그러네요. 벌써 저녁이 되어가니까 거의 2끼를 굶은 셈이네요?”
동천은 밥 때를 놓쳐버린 자신이 의아했지만 귀의흡수신공으로 내공을 공유하며 신체를 활성화시켰기 때문에 배고픔을 느끼지 못했던 것일 뿐이었다. 음과 양이 하나가 되니 서로에게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게 되어 배고픔 따위는 저차원의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그럼, 먹어야지. 난 잠시 옷을 갈아입어야 하니 네가 알아서 일러 놔.”
“예, 아가씨.”
동천은 그녀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자 왠지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딱히 구석에 몰린 것도 아니었는데 기운이 쏙 빠진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고개를 갸웃거린 동천이 밖으로 나가자 시비가 대기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까 정화가 아침에 들어가며 명을 내리기 전까지는 함부로 들어오지 말라고 엄포를 내렸었지, 참?’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렇게 서 있는 인생이었다고 생각하자 내심 불쌍한 기분도 들었지만 그것이 저녁식사를 앞지르지는 못했다. 기다리던 시비에게 식사준비를 하라고 명령한 동천은 그것만 끝나면 푹 쉬라고 말해준 뒤 맛있는 저녁을 먹었다. 그 후에 자신의 처소로 되돌아가던 동천은 갑자기 소연이 생각났다.
“아까 멍청하게 계속 서 있기만 하던 시비 때문에 그런가? 오늘따라 걔가 잘 있나 모르겠네? 화정이도 생각나고, 호연화도 잘 크나 알고 싶고……. 도연? 걔는 뭐 절벽에서 떠밀어도 끈질기게 살아남을 녀석 같으니 제쳐두지 뭐. 그러고 보니 제갈세가에는 잘 갔나 모르겠네? 이 자식. 혹시, 길 잃고 울고 있는 거 아냐?”
사람이 다 저 같은 줄 아나보다. 여하튼, 어깨를 으쓱거린 그는 한참을 빙빙 돌다가 집안으로 간 뒤에 깊은 숙면을 취했다. 그리고 정확히 19일 뒤에 사정화는 소수의 정예를 이끌고 신경전이 팽팽한 사천 남부로 이동했다.
‘으악! 이 몸은 왜 끌고 가냐구우우∼!’
물론, 동천도 따라(?) 갔음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