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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643화


국면전환(局面轉換).

그는 생각했다.

‘왜?’

그는 또 생각했다.

‘도대체 왜?’

그는 계속 생각했다. 그리곤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그래, 이년은 심심했던 거야!’

자신의 가치를 심심함이란 결론으로 매도(賣渡)한 동천은 현재 불만이 쌓이다 못해 넘쳐흘러 입술이 한계 이상으로 튀어나와 있는 상태였다. 그러다가도 사정화가 시선을 돌릴라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입이 쏙 들어갔으니 과연 인간의 적응력은 뛰어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사천으로 오기 전처럼 죽도록 뛰어다니는 것이 아닌 같이 마차에 동승했다고나 할까? 처음 암흑마교를 떠났을 때와 같이 서로 마주보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었다.

‘젠장! 이 몸이 책벌레냐? 하루종일 책이나 읽으라고 떠넘기게?’

불만을 말하자면 끝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동천은 자신의 주위에 수북히 쌓여있는 책들에 치를 떨었다. 산채에 있을 때에는 잠잠하더니 마차에만 태우면 어찌된 게 가만히 놀고 먹는 것을 봐주지 못했다.

더욱 특이한 것은 무공서적이 단 하나도 없었는데, 이유인 즉 동천은 귀가 얇아서 고만고만한 수준의 무공서적들을 보여주면 그것들을 눈여겨보다가 되려 무공이 퇴보할 거라는 염려 때문이라고 했다.

듣고 보면 맞는 것 같기도 했지만 그게 어디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수긍이 갈 만한 이야기이던가? 다소 신경질이 뻗친 동천은 억지로 읽던 책을 구기며 슬그머니 옆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솔선수범 하여 책을 읽던 사정화가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

“동천.”

“예?”

“읽어.”

“아, 예에…….”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솟아난 동천은 자신이 잠시 미쳤었나보다고 스스로 질책하며 가슴을 쓸어 내렸다. 사실 그녀가 하라는 대로만 한다면 맞을 일은 없었다. 문제는 사정화의 지시가 동천이 지겨워하고 꺼려하는 종류라는 데에 있었다. 서로 극과 극을 달리는 성격들이었으니 약한 쪽에서는 나름대로 반항을 해보았지만 결국엔 당하는 일이 되풀이되었던 것이다.

“근데요. 금 누님이…… 아니라, 요림주님이 아가씨를 극구 붙잡으려고 했던 것치고는 호위대가 너무 적은 것 같은데 왜 일까요?”

현재 사정화의 호위대는 20명 안팎이었다. 암흑마교에서 그녀를 호위하던 5명의 호위들과 혈각주가 따로 붙여준 수천희. 그리고 단주급 3명과 그들의 수하인 10여 명이 고작이었다. 어떻게 보면 적은 숫자는 아니었으나 차기 교주의 호위로서는 턱없이 부족한 인원이었다. 그래서 동천이 물어보았던 것이고 말이다. 그러자 이미 책을 내려놓은 상태의 사정화는 동천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것이 궁금했었던 모양이로구나.”

말투로 보아 그녀는 그 이유를 알고있는 듯 했다. 동천은 자신의 지위도 나름대로 높은 위치에 속했다고 자부했는데 떠날 때 어떠한 내용도 전달 받은 기억이 없자 왠지 화가 나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표정으로 드러내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다.

“예, 알고 계세요?”

“그래. 사실 남에게 알려줘 봤자 좋을 것이 없어서 입을 다물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 문제가 거론된 김에 말해줄게. 우리가 도착하는 곳은 알고 있겠지?”

동천은 내심 혀를 찼다.

‘이게 누굴 병신으로 아나…….’

같잖다는 표정을 지을 뻔했던 동천은 급히 표정관리를 한 뒤에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면양(綿陽)을 경유해서 대파산맥의 지류인 승봉산(承奉山)으로 가야 하잖아요. 본교가 그곳에 자리를 잡아서.”

사정화는 피식 웃고 말했다.

“그래 맞아. 하지만 면양에 당도하기 전에 북천(北天)을 지날 거야. 그리고 그곳에서 청목할멈과 조우하게 될 거고.”

동천은 어디에선가 들어본 이름이 나오자 눈살을 찌푸렸다. 기분 나쁜 이름이라는 것은 확실했는데 갑자기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나쁜 기억은 어떻게든 떠오르기 마련이었다.

‘헉? 그 켁켁이 할멈이 동행하게 된단 말야?’

잊을 만하면 가끔씩 등장하여 자신을 신경 쓰이게 만들었던 청목신장(靑木神張) 정원(鄭元)이 며칠 후에 동행하게 된다고 하자 동천은 절로 인상이 찌푸려짐을 느꼈다.

사정화도 동천이 그녀를 꺼려하는 것을 대충 눈치채고 있었지만 개인의 좋고 싫음의 문제는 관여하지 않기로 했는지 별다른 지적은 없었다. 너무 노골적으로 적의(敵意)를 드러낸다면 문제가 있겠지만 그녀가 보기엔 그런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것이다.

“아! 그분이요? 그런데 그분이라면 잘 계시다가 왜 갑자기 움직이셨대요?”

차마 늙은 것이 기운도 좋다고 말할 수는 없었던 지라 동천이 말을 돌렸다. 그에 사정화는 개의치 않고 대답해주었다.

“원래 내 호위를 담당했었는데 그 동안 내가 수련동에서 홀로 수련하는 기간이 많아지자 요림에 간간이 관여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야. 그러던 차에 내가 움직이자 다시 호위를 자처한 거지.”

“아, 네에. 아직 정정하신 것 같아서 기분이 좋네요. 하하하!”

동천이 자신이 내뱉은 말과 반대의 생각을 하면서 웃자 더 이상 볼일이 없었던 사정화가 서적을 집어들며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너무 할멈 미워하지마.”

“예?”

“아냐. 책 봐.”

“…….”

소연은 누군가 챙겨줄 사람이 없어진 영향으로 제법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 누군가는 당연히 동천이었다. 하루의 절반 이상을 시중 드는 것으로 보냈었는데 그 시중의 주체인 동천이 빠져나가자 소연은 남아도는 시간을 주체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남은 시간에 화정이와 적당히 대화를 해주거나 요새 할 일 없이 빈둥거리는 수련이 놀러오면 같이 차를 마셔주며 주위의 신변잡기에 관해서 수다를 떨다가 헤어지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래도 그 외에 남는 시간에는 민낭에게 한참 배웠던 진법을 수련했고 고인이 되신 사부님의 무공도 틈틈이 익혀나갔다.

“언니, 그럼 또 내일 봐요∼!”

오늘도 어김없이 찾아왔던 수련은 두 시진 정도를 조잘거리다가 가는 중이면서도 내일을 기약했다. 덕분에 소연은 진땀을 흘릴 수밖에 없었고 말이다.

“내, 내일 또?”

수련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그럼요. 아직 채 반도 이야기를 풀어내지 못했는걸요? 호호, 내일 와서 마저 끝내줄게요.”

“으응. 그, 그래. 잘 가.”

“네, 잘 있어요!”

손을 흔들어주며 수련이 사라지자 갑자기 주위가 고요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쩔 때는 주인님의 잔소리가 그리워질 정도였으니 소연은 새삼 주인님의 빈자리가 그리워졌다.

“에휴! 오시려면 아직도 멀었다고 들었는데 보고 싶어서 미치겠다.”

오늘따라 어깨가 무거운 것 같았다. 고개를 푹 숙인 그녀는 주인님의 방이나 청소해야겠다고 생각한 뒤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녀는 침대 위에서 조그마한 흰 고양이와 뒹굴고 있는 화정이를 볼 수 있었다.

“화정아! 내가 주인님 방에서 놀지 말랬지? 너 자꾸 말 안 들을래?”

주인님이 오실 때를 대비해서 항상 말끔하게 정리해놓고 싶은 그녀였는데 화정이가 잠시 한눈만 팔면 방안을 어지럽히자 화가 나는 것을 느꼈다. 초반에 몇 번 오냐오냐 해줬더니 결국에는 제어하기가 힘들어진 상태여서 요즘은 강하게 나가는 중이었는데 화정이는 오늘도 어김없이 변명을 늘어놓았다. 문제라면 그 변명이 매일 똑같다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아냐. 나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우리 연화가 자꾸 동천 방으로 들어가서 그런 거야. 그래서 나오라고 따라 들어갔던 것일 뿐이야. 정말이야, 소연.”

역시나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변명이었다. 하지만 소연은 짐짓 모르는 척 물었다. 이번에야말로 크게 혼내주려고 마음먹은 것이다.

“아아, 그랬어? 그런데 왜 금방 나오지 않고 연화와 같이 침대 위에서 뒹굴거렸던 거야?”

그러자 뜻밖에도 화정이가 평소와는 다르게 대답했다.

“있지있지. 내가 요새 연화를 조, 조연? 조룐? 여하튼 그거 시키고 있는데 아주 말을 잘 듣는 거야. 그래서 기분이 좋아서 같이 침대에서 잠시 놀았어. 헤헤.”

아직도 어휘력이 모자란 감이 있어서 어려운 단어는 소연도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대충 유추해보는 게 전부였지만 오늘따라 감이 좋았던지 바로 알아들었다.

“조련(操鍊)? 훈련시키는 거 말야?”

갑자기 얼굴이 환해진 화정이는 재빨리 고개를 위 아래로 흔들어댔다.

“응응! 맞아. 그거야. 조련조련.”

소연은 너무도 해맑게 웃는 그녀의 미소에 차마 찬물을 끼얹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지 예의상 관심 어린 표정을 지어주었다.

“그래? 뭘 훈련시켰는데?”

“헤헤, 볼래? 자아, 연화야. 손!”

화정이가 연화에게 손을 내밀며 명령어를 외치자 연화가 앙증맞은 작은 앞발을 내밀더니 척 하고 올려놓았다. 화정이는 기뻐하며 팔 소매에서 육포 가닥을 한 줄 꺼내주었다.

“아이, 잘했어요. 자, 먹어.”

“야옹∼.”

성공하면 먹을 것을 주는 것은 어디에서 봤는지 화정이가 제법 그럴싸하게 행동했다. 소연은 약간 흥미가 동해서 물었다.

“잘 하네? 그런데 그거말고 또 없어?”

화정이는 씨익 웃었다.

“있지, 왜 없겠어. 자아, 연화야. 어흥!”

어흥은 동천이 시도했다가 끝끝내 실패하고야만 명령어였다. 그래서 눈을 반짝인 소연이 지켜보자 갑자기 새하얀 털을 곤두세운 연화가 제법 매서운 표정을 짖더니 낮게 으르렁거리는 것이 아닌가.

“캬르르르!”

“아이, 잘했어요. 자, 또 먹어.”

“야옹∼.”

언제 털을 곤두세웠냐는 듯 반색한 연화가 앞발을 움직여 육포를 받아먹었다. 뭔지는 잘 몰랐지만 신기해진 소연은 호연화의 머리를 툭 건드려보았다. 어쩐지 자신이 알던 고양이(?)가 아닌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히야. 화정이 너 대단하구나? 어떻게 훈련시킨 거니? 또 없어?”

소연의 칭찬에 기가 살은 화정이는 어깨를 으쓱 한 다음에 고개를 내저었다.

“앉아 일어서는 알 테니까, 더는 없어. 이제 시작한지 얼마 안 됐거든. 그리고 훈련은 얘가 나하고 말이 통해서 쉬웠던 거야. 헤헤헤.”

소연은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말이 통한다고? 연화하고?”

“응.”

“정말?”

“정말이야. 볼래?”

소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보여준다는데 사양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래, 해봐. 정말 서로 대화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면 내가 오늘 하루 맛있는 거 원 없이 먹게 해줄게.”

“우와! 정말이야? 정말정말?”

“그렇다니까.”

벌써부터 입가에 흐르는 침을 스윽 닦고 난 화정이는 허리를 낮추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호연화와 눈을 마주친 뒤 입을 열었다.

“안녕?”

“야옹.”

그녀가 또 말했다.

“안녕?”

“야옹.”

연화가 호응하듯 계속 울어대자 화정이가 소연을 보고 눈웃음을 쳤다. 어떻냐는 무언의 목소리였다. 소연은 확실히 호연화가 말대꾸하는 듯 보이긴 했지만 그런 간단한 것만으로는 모르겠자 화정이에게 확인 차 물었다.

“쟤가 뭐라는 거야?”

“나도 안녕 이래.”

“정말?”

“그러엄! 정말이구 말구.”

어째 믿음이 안 갔다. 그 후로 여러 가지 실험을 해보았지만 단순히 좋다, 아니다 라는 해석만을 듣게 된 소연은 어떻게 생각해냈는지 밖에 나가서 누런 잡종 개를 데리고 들어왔다. 이 개를 짖게 만들어서 정말로 짐승의 말을 알아듣나 확인해보려고 했던 것이다. 그 와중에 개가 짖질 않아서 애를 먹긴 했지만 꼬리를 살짝(?) 밟아서 ‘깨갱!’ 짖게 만든 후에야 소연은 화정이에게 물었다.

“얘는 뭐라고 해? 아프대?”

화정이는 말했다.

“뭐라고 하긴 뭐라고 해. 깨갱이라고 하지.”

“…….”

사정화 일행은 나흘이 지난 뒤에야 북천에 당도할 수 있었다. 제법 큰 중소도시여서 간만에 바글거리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던 동천은 기분 좋은 얼굴을 했지만 곧 켁켁이 할멈을 만나게 된다는 사실에 바로 안면을 일그러트렸다.

‘젠장, 살만큼 살았을 텐데 갑자기 심장마비로 안 죽을라나?’

아직 정정하다면 그렇게 만들어주고 싶은 것이 동천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어렸을 적에 각인된 정원의 인상이 너무도 강렬해서 좀처럼 좋게 봐주려고 해도 누런 이를 드러내며 켈켈거리는 생각할 때마다 먹은 것이 도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가 전대에 요림주가 되었던 것은 외모가 아닌 실력이었을 거라고 동천은 굳게 믿었다.

“아가씨, 다 왔습니다.”

밖에서 아수전의 1당주 초철산이 조심스레 말문을 열자 등을 기대고 앉아있던 사정화가 신형을 앞으로 기울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았어.”

간단한 대꾸가 끝난 뒤 면사로 얼굴을 가린 그녀는 소리 없이 신형을 움직였다. 뒤따라 나온 동천은 3층 높이의 주루를 올려다보다가 그 사이 저만치 앞서 가는 사정화의 얼른 쫓아갔다.

‘하여간 애가 새침해 가지고. 같이 가주면 어디 덧나냐?’

사정화의 움직임 하나로 꽤 많은 인원이 주루 안에 들어서게 되었지만 정작 위층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그 소수 중에 한 명이었던 동천은 차라리 밑에서 음식이나 시켜먹고 마음 편하게 기다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현실은 그를 놓아줄 생각이 없는 듯 했다.

“오셨습니까. 안으로 드시지요.”

3층 계단 입구에서부터 기다리고 있던 중년인이 공손하게 안내를 맡아 사정화 일행을 이끌었다. 제일 안쪽으로 들어가자 호위무사로 보이는 여성 둘이 강인한 인상을 내뿜으며 그들을 반겼다.

“아가씨를 뵈옵니다.”

그녀들은 절도 있는 자세와 더불어 직각으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에 사정화는 턱을 살짝 까딱였을 따름이었다. 그것을 본 동천은 눈을 반짝였고 말이다.

‘호오! 저거 나름대로 멋있네? 건방진 듯 하면서도 무언가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이 흐르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지. 흐흐, 나중에 이 몸도 한번 저렇게 해봐야지.’

살아가는데 별로 도움이 안 되는 것들에 집착하는 성격이어서 그런지 자신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정화의 행동들 하나 하나가 동천의 관점에서는 배워야할 것들처럼 보였다. 문제라면 앞서 말한 그대로 배우지 않아도 될 것들에 집착을 한다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켈켈, 오셨습니까.”

“그래. 정정해 보이는걸?”

“소신이야 언제나 힘이 넘쳐서 탈이지요. 흘흘흘.”

동천은 생각했다.

‘저러다 꼭 며칠 못 가서 뒈지던데…….’

그들의 대화에 끼여들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던 동천은 지들끼리 대화를 나누던 지지고 볶던 철저하게 타인으로 취급받고만 싶었다. 그러나 정원의 시선에 걸려든 상태에서 그런 것이 가능하기나 하겠는가? 동천은 알아서 먼저 아는 척했다.

“볼 때마다 젊어지시는 것 같습니다.”

듣기에 나쁜 소리는 아니었는지 정원이 크게 웃어주었다.

“켈켈켈! 약소전주가 이제 어른을 공경할 줄도 아는구먼. 그새 정신을 좀 차렸는가?”

‘참나, 이 몸이 댁 같은 줄 아슈?’

동천은 어이없음을 인내하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그런가 봅니다.”

정원은 그녀 특유의 가래 끓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야 지. 암, 그래야 하고 말고. 켈켈…….”

간단히 인사를 끝마친 그들은 때마침 점심시간인지라 식사를 하기로 했다. 동천은 맛있는 음식이 차려져도 정원의 얼굴 때문에 입맛이 뚝 떨어질 것을 염려했지만 고개를 숙이고 주위의 음식에만 젓가락질을 하자 의외로 참고 먹을 만하다는 것을 느꼈다. 식사는 조용한 편에 속했는데 중간쯤 무르익자 사정화가 말을 꺼냈다.

“할멈이 합류하면 끝이야?”

떼로 몰려다니는 것을 싫어하는 사정화의 성격을 정원이 모를 리 없었다. 그래서인지 정원의 표정이 밝았다. 동천이 보기엔 히죽거리는 얼굴이 기괴했지만 말이다.

“그건 아닙니다. 켈켈, 하지만 3명이 더 추가될 따름입니다.”

사정화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물었다.

“누구지?”

정원은 대답 대신 가볍게 손뼉을 쳤다.

짝짝!

그러자 미리 대기하고 있었던 듯 1남2녀가 소리 죽여 들어왔다. 긴 장발을 단정하게 틀어 올린 사내는 얼굴 선이 가늘어서인지 서생과 용모를 지녔고 여인 둘은 제법 예쁘장하게 생겼지만 어딘가 초점이 없어 보였다. 사내는 급히 한쪽 무릎을 꿇고 자신을 소개했다.

“신, 아수전 소속 아수당의 3당주 포석(鋪石)이라고 합니다!”

동천은 묘한 분위기가 풍겨서 왜 그런가 했는데 그제야 감이 왔다.

‘아하! 저 뒤의 계집들은 초혼강시로구나. 어쩐지 뭔가 기분이 얄딱꾸리하더라니…….’

동천은 아수전에서도 귀한 존재여서 어지간해서는 선을 보이지 않는 초혼강시를 2구나 데려왔다는 사실에 약간 놀랐다. 하지만 사정화를 호위하는 용도로 쓰이는 것이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지원이라고 할 수 있었다. 놀라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고 볼 수도 있었던 것이다.

사실 그의 놀람은 화정이와 같은 부류들을 이런 곳에서 보게 되자 그저 뜻밖의 놀람이었던 것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비교를 하자면 진화를 시작한 화정이에게는 한참이나 뒤떨어지는 강시들이었기에 호기심의 대상은 될지언정 욕심을 가질만한 존재들은 아니었던 것이다.

“네 뒤. 초혼강시야?”

사정화도 눈치를 챘는지 싸늘하게 물었다. 포석은 돌연 차가워진 아가씨의 물음에 절로 오한이 드는 것을 느끼며 성심성의 것 답해주었다.

“옛, 아가씨. 이미 전장에 8구가 투입된 상태이지만 아가씨의 안전이 더욱 중요하다는 판단 하에 예비용으로 보관하고 있던 녀석들을 깨워서 데려온 것입니다.”

“…….”

잠시 말없이 포석을 노려보던 사정화는 이내 시선을 거두고 정원에게 말했다.

“할멈, 더 이상 늘어날 인원은 없겠지?”

간접적인 말이었지만 사실상 이들의 동행을 허락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내심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 내린 포석을 뒤로하고 정원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켈켈, 앞서 말씀드렸듯 이들이 다입니다. 그리고 어디 더 데려간다고 아가씨께서 허락을 해주시겠습니까요? 켈켈켈!”

‘켁켁켁! 아, 저 할멈 진짜 짜증나네?’

식사 중에 웃는 소리가 안 들려서 다행이다 싶었는데, 남들과 다르게 이제야 식사 시작에 불과했던 동천에겐 입맛이 떨어지는 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성질 같아서는 식탁을 뒤집어엎고 ‘다시 차려와!’ 하고 싶었지만 이곳은 약왕전이 아니었다. 눈치를 봐야할 인간들이 주위에 널렸던 것이다.

‘참자! 참는 자에게 천하제일의 미녀가 품에 안긴다고 했다! 이 몸은 절대 저 할망구와 정화의 눈치를 보느라 참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천하제일의 미녀를 품에 안는 그 날을 위하여 참는 것이다!’

지어낸 말로 자신을 위로한 동천은 먹는 게 남는 거라는 생각에 주위의 접시들을 거의 다 비우다시피 했다. 다행이 같은 식탁에 앉아있던 정원과 사정화는 소식(小食)을 하는 편이어서 큰 말썽이 없었다.

“켈켈, 그런데 떠나시는 것은 언제로 하시겠습니까? 이 근처에 절경이라고 부를 만한 곳들이 꽤 많은데 그런 곳들도 한번 들려 보심이…….”

사정화는 바로 말을 끊고 들어갔다.

“내일 당장 떠나는 것이 좋겠어.”

그녀의 목소리는 차갑기가 그지없었다. 그 때문인지 파고들 틈을 찾을 수 없었던 정원은 좀더 시간을 끌어보려다 그냥 포기했다.

“예, 그럽지요. 켈켈켈.”

그렇게 하룻밤만 묵기로 한 뒤 잠을 청한 사람들은 아침이 되자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들이 바쁜 것은 아니었고, 일반무사들과 시녀들이 바쁜 축에 속했는데 윗전에서 솔선수범 할 까닭이 없으니 서둘러 자신들에게 주어진 일과를 처리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 덕분인지 동천은 챙길 것 하나 없이 느긋하게 아침식사를 끝마칠 수 있었다. 헌데, 문제는 다른 곳에서 불거져 나왔다.

“뭐? 지금 뭐라고 했는가.”

출발하기 위해 마차로 오르려던 동천은 3당주 포석이 초혼강시 중 1구를 같이 태우려고 하자 인상을 쓰며 되물었다. 여기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는데, 일반적으로 알려지길 초혼강시가 사(死)강시나 혈강시에 비해서 지능이 높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일 뿐이었다.

실제로 5살짜리의 아이와 비교해도 판단력과 행동능력이 모자라는지라 초혼강시를 비롯하여 강시의 곁에는 언제나 명령자가 붙어 있어야 했으므로 초혼강시를 태운다는 것은 곧 3당주도 같이 동승한다는 의미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러니 유일하게 마차 안에서 즐길 수 있었던 것이 넓은 자리였는데, 그가 자신의 자리 쪽으로 앉게될 짐짝(?)들을 반길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포석은 양해를 구하는 얼굴로 말을 꺼냈다.

“아가씨의 안전을 생각하여 어렵사리 내린 결론입니다. 최종 허락은 아가씨께서 내려주시겠지만 약소전주님의 의견도 무시할 수가 없어서 미리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동천은 내심 혀를 찼다.

‘이 서생 나부랭이 같이 생긴 자식이 이 몸을 물로 보나. 무시할 수 없다는 걸 알면 아예 이야기를 꺼내지 말았어야지!’

그때 천천히 뒤따라 나오던 사정화가 이야기를 듣고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포석, 그런 문제는 어제 이야기했어야지.”

포석은 급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리고 소신은 감히 탈 수 없으나 아가씨의 안전에 만전을 기하고 싶은 소신의 충정을 헤아려주시길 바랍니다.”

그러자 동천이 무슨 말이냐는 듯 물었다. 그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던 탓이다.

“그 무슨 말인가. 위험한 일이 발생했을 때 아가씨를 신속히 지키려면 옆에서 명령을 내려야 하는 것인데 3당주가 따로 떨어져 있겠다면 말이 안 되질 않는가.”

포석은 살짝 웃음 진 다음에 말했다.

“저는 마부석에 앉을 예정입니다. 또한 강시에게 기본적인 명령을 내려둔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기본적인 명령? 그게 뭐지?”

아가씨가 묻자 포석은 공손히 대답했다.

“예를 들어 아가씨를 향한 살기가 느껴진다면 그 대상을 처리하라는 명령만으로도 충분히 이행할 수 있을 겁니다.”

그의 말에 놀란 것은 동천이었다. 사정화를 향한 살기라면 시도 때도 없이 터트리는 것이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헉, 저놈이 이 몸을 음해(陰害)하려고 작정을 했구나!’

전혀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나 이렇게 되면 동천으로서는 정말 피해야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나서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잠깐! 의도는 좋으나 하루 종일 자신을 쳐다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면 심히 불쾌할 것이 분명하네. 더욱이 아가씨께서는 유난히 그러한 것을 꺼려하시는 분인데 그 문제는 어떻게 처리할 생각인가.”

포석은 아가씨도 아직 뭐라 하지 않는데 약소전주가 너무 나서는 듯 하자 불편한 생각을 내비치려다가 겨우 참고 말했다.

“안전을 생각하신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또한 초혼강시는 눈을 감게 해도 되고,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쥐죽은듯이 있게 할 예정이니 너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될 듯 합니다.”

안 되겠다고 생각한 동천은 은근슬쩍 사정화의 의중을 떠보았다.

“저기, 아가씨. 괜찮으시겠어요?”

“불가(不可)!”

사정화는 단호히 말했다. 동천의 입이 쫙 벌어졌음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아이고, 예쁜 것! 오늘따라 너 왜 이렇게 예쁘고 사랑스럽냐? 흐흐, 아암! 그래야지! 자고로 여자는 순종하는 맛이 있어야 사랑 받는 거라구. 으하하!’

기분이 좋아진 그는 어떠냐는 눈빛으로 포석을 바라보았다. 곤혹스러운 표정을 내비친 포석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의외로 순순히 포기했다.

“음, 하긴 태상요림주께서 같이 동승하실 예정인데 굳이 초혼강시까지는 필요하지 않을 듯도 합니다.”

‘켁?’

갑자기 숨이 턱 막힌 동천은 혹 떼려다 혹 붙인 격이 되자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라했다. 엄밀히 말해서 초혼강시야 무시하면 그만이지만 정원이라면 꿈에서도 볼까 두려운 얼굴이었는데 마차 안에서 최소한 열흘 간이나 같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자 갑자기 하늘이 노랗게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켈켈, 사실 나 혼자만으로도 충분하니 자네는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게나.”

호위대를 대신하여 이제 그림자처럼 사정화의 뒤를 맡고 있는 정원까지 그렇게 말해주자 포석은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겠습니다.”

‘잘 알긴 뭘 잘 알아 이 씹쌔야! 이건 무효야, 무효! 나 안가! 절대 안가!’

화가 난 동천은 결사반대를 외치고자 했다. 헌데,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정원이 냉큼 마차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들어오시지요, 아가씨. 켈켈켈. 아? 이제 내가 있으니 약소전주 자네는 들어올 필요가 없네.”

무언가 말할 듯한 동천의 낌새를 느꼈던지 정원이 먼저 선수를 쳤다. 그런데 그것이 되려 동천에게 이롭게 작용하자 그는 거의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처럼 기꺼워했다.

‘으아! 정말 잘 생각했어, 할멈. 사실 말이 나와서 말이지만 그 얼굴을 매일 눈앞에서 본다고 생각해봐. 할멈이 생각해도 할멈 자신의 얼굴을 보면 죽고 싶지? 그러니 보는 사람은 어떻겠어? 뭐 그렇다고 정말로 자살할 생각은 말고,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이니 즐기는 쪽으로 생각하는 게 나을 거야. 하하, 내 맘 알지?’

정원이랑 같이 타느니 냄새나는 사내들 틈에 끼여 가는 것이 백 번 낫다고 생각한 동천은 행여나 사정화가 참견하거나 정원이 말을 번복할까봐 급히 그녀의 말에 동조해주었다.

“그야 이를 말씀입니까. 아가씨를 잘 부탁드립니다.”

“켈켈, 말이 통해서 좋구먼.”

그들의 대화에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던 사정화는 동천에게 말했다.

“뒤의 마차를 타도록 하고, 책 읽는 거 게을리 하지마. 내가 시간이 나면 내용을 물어 볼 테니까.”

지랄한다고 생각한 동천은 대답했다.

“예, 아가씨.”

그렇게 해서 동천은 목적지에 당도하는 날까지 땀 냄새나는 사내들 틈에 껴서 적잖이 고생을 좀 해야만 했다. 자리가 비좁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아무래도 사내들만 있던 탓에 탁한 냄새가 코를 진동했던 것이다. 그나마 좀 씻는 자들이 이 정도였지만 어찌 보면 동천이 너무 깔끔을 떠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렇게 말하면 그들보다 더 안 씻는 인간이 동천이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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