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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646화


“신, 초무강! 아가씨를 뵈옵니다!”

“아가씨를 뵈옵니다!”

혈각주 초무강이 포권지례를 취하며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자 그의 뒤에 도열해 있던 마교도들도 뒤따라 인사를 올렸다. 동천은 은근슬쩍 사정화에게 근접하여 자신이 인사를 받는 듯한 기분을 음미한 뒤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아! 좋긴 좋은데 이 몸은 언제쯤 당당하게 저런 인사를 받아보려나? 물론 약왕전에서 존경받는 인물들 중 1순위에 꼽히는 이 몸이시지만 아무래도 큰물에서 놀아야 이 몸도 성장하시지 않겠어?’

씨알도 안 먹히는 생각으로 자신의 미래를 설계하는데 인사를 받고 난 사정화가 움직이자 썰물이 빠지듯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러자 뒤늦게 망상에서 벗어난 동천은 자신만 놔두고 먼저 가는 인간들을 매섭게 쳐다보았다. 지가 그래봤자 지만 말이다.

“현재 진행사항은 어떻게 되고 이곳의 분위기는 어떻지?”

장소를 옮겨서 회의실로 들어간 사정화가 묻자 초무강이 준비한 자료들을 꺼내들며 대답해주었다.

“지도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본교에서 보유중인 지도부분과 흡사한 곳들이 하나 둘씩 발견되고 있습니다. 파란 점이 유력한 지점이고, 빨간 점이 의심이 가는 지점입니다.”

확대된 지도의 파랑과 빨강은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정리가 잘 되어있었다. 그것을 유심히 들여다보던 사정화는 녹색 점을 발견하곤 물어보았다.

“이건 뭐지? 여기도 있고, 여기도 있고.”

그녀가 지적한 녹색 점들은 총 6개로서 가까이 몰린 것들도 있는 반면 멀찍이 찍혀진 점들도 보였다. 그러자 초무강은 깜빡했다는 얼굴로 알려주었다.

“아? 그 점들은 차단로(遮斷路)입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그곳들은 본교에서 찾아낸 지점들로 들어갈 수 있는 진입로입니다. 처음에는 제일 외곽 쪽까지 수비를 세워놓았지만 현재는 인원부족으로 안쪽 세 군데를 제외한 나머지 세 군데는 포기한 상태입니다.”

사정화는 눈살을 찌푸렸다.

“심각한 거야?”

초무강은 웃음을 내비치며 대답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한 손으로 열 손을 막을 순 없는 고로, 본교의 출혈도 생각해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곳 외에는 철수를 시킨 것입니다. 이는 본교뿐만이 아니라 다른 문파들도 마찬가지라고 보시면 되는데, 잠정적인 무림고수만 1천을 상회하는 가운데 여섯 곳을 모두 차단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기 때문입니다.”

일리가 있는 말이자 사정화가 수긍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녀는 다시 물었다.

“다른 세력들의 현재 상황은?”

“쉽게 단정할 수는 없으나 무림맹은 파견한 인원만큼 활용하는 것 같지가 않고, 오련은 큰 충돌 없이 무림인들과 연합을 도모하려고 하는 듯 보입니다. 또한 혈사교는 한동안 혈풍(血風)을 일으킨 후 무림인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일단 물러난 상태이고, 환마교는 뜻밖에도 아주 소수의 인원만을 보낸 상태입니다. 아마도 내부적으로 진통을 겪고 있다는 소문이 사실인 듯 싶습니다.”

환마교는 초대 교주인 환마(幻魔)를 시작으로 대대로 미요(美夭)의 후계자와 혼인하여 3대 마교 중 가장 독자적인 체계를 구축하고 있었는데 아쉽게도 현재는 차기 교주의 핏줄이 끊어진 상태였다. 소교주로 내정된 사보만(死寶滿)이 절맥들 중에서 가장 희귀하다고 알려진 천주양절폐맥증(天呪兩絶閉脈症)을 13년 동안 앓다가 결국에는 2년 전에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아들 사랑이 지극했던 환마교주 환잔영(幻殘影) 사전(死戰)은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좋다는 방법들은 모두 동원해보았지만 끝끝내 절맥을 이기지 못한 아들이 죽어버리자 크게 낙심했다. 그러나 한 단체의 수장으로서 언제까지나 슬퍼할 수만은 없었다. 그는 환마교의 교주자리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듯 빠른 시일 내에 정신을 추슬렀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곳에서 생겼다. 환마교주 사전은 초대 환마와 미요가 합심하여 만들어낸 자천마강(紫天魔剛)을 보기 드물게 극성으로 익혔던 탓에 더 이상 자식을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환마교는 알게 모르게 흔들리기 시작했고, 실권자들은 하루속히 양자를 들여야 한다는 둥 미요의 후계자를 유능한 후기지수와 합방시켜 그녀가 낳은 아들을 후계자로 삼아야 한다는 둥 예전이었다면 감히 거론하지도 못할 이야기들을 자기네들끼리 떠벌리기 시작했다.

미요의 후계자가 되는 조건은 최상의 근골과 뛰어난 미색. 그리고 지혜로운 마음인 3박자가 조화로워야 가능했는데 그게 어디 말처럼 쉽게 찾아낼 수 있는 사항이던가? 그나마 겨우 3년 전에 갓 태어난 아이를 후계자 반열에 올려놓은 상태로서 차후 지혜로운 부분만 시험에 통과한다면 그제야 진정한 후계자로 내정될 상황이었는데, 벌써부터 교내의 후기지수와의 합방설이 나돌았으니 말 많은 호사가들이 입방아를 찧을 만도 했다. 지금의 환마교는 차기의 권력을 노리는 실권자들의 암투장으로 변했다고 말이다.

“죽었다던 아들 문제 말야?”

그녀의 물음에 초무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교주 자체로도 형제 자매가 없고 그나마 귀하게 낳았던 외아들까지 세상을 떠났으니 어떠한 결론을 내리던지 자식을 이을 수 없는 몸인 이상 환마교는 새로운 혈통이 교주위로 앉을 수밖에 없게 된 것이죠.”

가만히 듣고 있던 동천은 구미가 당기는 소리에 눈을 반짝였다.

‘호오! 새로운 혈통이라면 유능한 인재를 말하는 것이고, 유능한 인재라 함은 이 몸을 따를 자가 없을 터인데 이 기회에 고무신 거꾸로 신고 환마교로 한번 투신해봐? 또 누가 알아? 이 몸이 환마교의 차기 교주로 내정될지?’

꿈도 야무지다는 말은 이럴 때에 적용되는 것이리라. 그 순간에도 사정화의 이야기는 계속 되었다.

“설마 분열되지는 않겠지?”

초무강은 신중하게 대답했다.

“글쎄요. 환마교주의 나이가 올해로 54세이니, 아직은 무리가 없다고 보셔도 되지만 향후 20년 정도 후에는 예측하기가 어려울 듯 보입니다. 물론, 후계자 문제를 조속히 마무리짓는다면 무슨 문제야 있겠습니까 만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딴 마음을 먹는 인간들이 늘어나기는 하겠지요.”

결국 환마교주의 빠른 결단력이 관건인 사항이었다. 시간이 흐른다 해도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니 환마교주가 살아있는 동안은 후계자 문제를 확실히 매듭지어야 한다는 소리인 것이다.

“음, 그럼 마교는?”

“그게… 가장 종잡을 수 없는 곳이 마교입니다. 사천지역에 천마동이 존재할 거라는 소문이 퍼진 이후론 너무 조용합니다. 그 전까지는 천마지가와 천마도해를 수집하느라 열을 올렸던 마교인데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활동을 접은 상태입니다.”

순간 사정화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사천으로 유입된 마교도는 없다는 말이야?”

초무강은 대답했다.

“적어도 이곳에서 사방 백여 리 내에서는 보고된 바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번 천마도해, 천마지가 사건의 배후에 마교가 있었던 것이 아니냐는 추측들이 조심스럽게 거론되고는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미 천마동의 소재지를 좁힌 것이 아닌가 하는 경계도 늦추지 않는 중입니다.”

그럴 수도 있는 일이자 사정화의 표정이 더욱 신중해졌다. 잠시 침묵으로 일관한 사정화는 대답을 기다리는 초무강에게 말했다.

“혈각주도 알겠지만 천마대제(天魔大帝)님의 사후 발자취는 마교도 모르는 일이야. 그 당시에 심복이었던 사마(四魔)님들조차 모르셨던 일이었으니 마교 측에서도 알고 있을 리가 없어. 물론, 차후에 알아냈을 수도 있지만 이제와 발견했다는 것도 좀 그렇고……. 아무래도 천마동에 관해서 무언가 중요한 단서를 발견한 것이 분명해. 좋은 쪽이건 나쁜 쪽이건 말야. 이건 생각 외로 중요한 정보가 될 것 같아. 본교에 연락을 취해서 중점적으로 조사해보라고 해.”

“옛, 알겠습니다!”

초무강의 힘있는 대답에 고개를 끄덕여준 사정화는 멀거니 앉아있다시피 하고 있는 동천에게 물어보았다.

“동천, 너는 하고 싶은 말 없어?”

잡생각만 하다가 눈을 동그랗게 뜬 동천은 자신에게 물어봐서 뭘 어쩌자는 것인지 당황했다.

“예? 에에, 그러니까 마교는 배후세력이 아니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득보다는 실이 더 많거든요.”

사정화는 완전히 동천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뭐가 득보다 실이 많다는 거지?”

동천은 빛나는 듯한 그녀의 눈빛이자 어쩐지 말하기가 거북스러워 졌다.

‘그렇게 빤히 쳐다보지마, 정화야. 이 몸이 부담스럽잖니.’

그러나 이미 말을 내뱉었고 대답은 해주어야만 했다. 하는 수 없어진 동천은 천천히 머리를 굴려가며 적어도 말은 되도록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천마지가에 적혀진 구결들은……. 아무리 불완전하다고 해도 그것 자체로도 굉장한 심득을 얻을 수 있는 보물이나 마찬가지인데, 아무리 음모에 사용된다고는 하지만 마교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자존심이자 상징적인 무공인 천마님의 무공구결들을 그렇게 쉽게 남발하지는 않았을 거란 말이죠. 이미 적대세력의 거대 문파들은 본교를 비롯하여 천마지가의 무공구결들을 제법 소유한 상태이고 그것들을 토대로 차후 천마님의 무공을 파훼할 파훼법들이 만들어질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제정신이 아니고서야 그것들을 공개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죠. 안 그래요?”

애초에는 그냥 생각 없이 떠벌린 것이었는데 서두를 제법 괜찮게 장식하다 보니까 이야기가 술술 나왔다. 덕분에 신이 난 동천은 약간 흥분한 상태로 설명했고 나중에는 이의를 제기해보라는 식으로 말을 끝냈다. 그러자 초무강은 자신의 무릎을 탁! 내려치며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소리쳤다.

“그렇군! 생각해보면 쉬운 문제인데 다들 천마님의 무공구결을 얻었다는 흥분에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생각을 못했던 게야! 하하, 과연 약왕전의 소전주로구먼!”

‘험! 그걸 인제 알았수? 파하하!’

어깨가 으쓱해진 동천은 뒤늦게 자신의 진가를 알아주는 초무강에게 한껏 자신을 과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사정화는 그런 동천의 모습에 피식 웃었지만 그것은 그녀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으므로 간만에 그가 하는 짓을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

“괜찮은 의견이야. 혈각주는 이 부분도 추가해서 조사에 착수하라고 일러 둬.”

“예, 아가씨!”

이제 더 이상 궁금한 것이 없어진 사정화는 이만 끝을 내기로 했다.

“좋아. 대략적인 것은 다 파악한 듯 하니까 자세한 부분은 내일 아침회의에서 듣도록 할게. 아무래도 장기간 여행을 해서 피곤한 것도 있으니까.”

초무강으로서는 거절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그래, 알았어.”

그 대답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사정화는 거처를 둘러보고 온 정원의 안내를 받아 떠났고, 동천 또한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방을 배정 받게 되었다.

“음, 여기가 이제 이 몸이 지내실 곳인가?”

승봉산 중턱에 자리 잡은 산채의 건물들은 기본적으로 목재였지만 장기간 머물 것을 예상하고 지었던지 공을 들여 만든 흔적들이 곳곳에 보였다. 나무 특유의 강렬한 냄새가 없었고 어디 하나 거칠게 지어진 부분 또한 없이 단단한 내부설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동천은 비록 넓은 공간은 아니었어도 그다지 불편한 점은 느끼지 못했다.

“근데 뭐가 이따위로 쪼따매? 지금 이 몸 더러 개미집에서 주무시라는 소리야? 내 이것들을 그냥 확!”

다만 더 넓은 공간을 원했을 따름이었다.

“……너는 너무 즉흥적이다. 이런 썅! 사물을 바라봄에 있어 너무 계산적이다. 어쭈? 이 자식이? 어제 일을 상기시켜 보라. 뭘 상기시켜? 니 똥이다! 그 때에…….”

콰작!

결국 끝까지 못 읽고 서찰을 짓이겨 버린 동천은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던지 다소 붉어진 얼굴로 화를 냈다.

“이런 씁쌔를 봤나! 감히 이 몸에게 충고를 해? 도대체 완전무결한 이 몸에게 충고할 게 어디 있다고 이 지랄인 거지?”

이곳에 온 지도 어느덧 2주일이 흘렀다. 사정화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든 시기에 도착했기 때문인지 생각했던 것보다 위험한 일은 없었지만 사흘에서 심하면 매 하루마다 자신의 품속에 들어가 있는 서찰을 보는 동천의 마음은 짜증 그 자체였다.

더군다나 그 서찰의 내용이 하루의 일과를 낱낱이 집어가며 자신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이었는지라 심히 눈에 거슬렸다. 사부인 역천 이후로 자신을 가르칠만한 인간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하는 동천이었기에 더욱 그러했고 말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자기가 자신에게 충고하는 형국이었으니…….

“좋아! 좋다고! 어디 네놈이 지적한 것들을 다 수용해주실 테니 다음에도 이따위 글을 적어놓나 보자고!”

한때는 반감이 일어나 수련을 더욱 소홀히 한 적도 있었다. 그래봤자 일주일이 고작이었지만 문득 생각해보니 참으로 멍청한 짓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안 그래도 게으른 편에 속하는 그였는데 거기에다 기본적인 수련까지 멈추자 본신의 실력이 제자리에서 빙빙 맴돌게 되었던 것이다.

“이놈의 시키! 수십 배는 차이가 나게 강해져서 서로 합치기보다는 아예 잡아먹어 버릴 테니까 두고 보자!”

아무리 지리적인 요충지에다가 본교의 고수들이 방비를 철저히 하고는 있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곳이 위험천만한 곳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언제 어디에서 생사의 위협이 다가올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반항심리 따위로 무공을 등한시한다는 것은

‘나 죽여주시오…….’

하고 비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자신의 처지를 깨달았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나? 여하튼 그는 종이를 꺼내어 붓으로 한 줄 한 줄 무언가를 써 내리기 시작하더니 잠시 후 만족스런 웃음을 지으며 자신이 쓴 것을 살펴보았다.

계획표(計劃表).

아침식사 후 진시(辰時 : 오전 7∼9시)부터 정오(正午)까지 수련.

점심식사 후 미시(未時 : 오후 1∼3시)부터 유시(酉時 : 오후 5시∼7시)까지 수련.

저녁식사 후 술시(戌時 : 저녁 7∼9시)부터 해시(亥時 : 밤 9∼11시)까지 수련.

그 이후에 취침.

“캬아, 끝내준다! 어느 분이 쓰셨는지 명필이로구나! 흐흐, 이대로만 한다면 천하제일고수는 개울가에서 헤엄치기이고, 아울러 역심무극결을 자연스럽게 혼합시킬 수 있겠지? 싸가지 없는 자식! 감히 이 몸의 심기를 건드린 대가가 무엇인지를 톡톡히 깨닫게 해주마.”

아주 자신만만한 그였지만 솔직히 하루라도 버티면 사정화라 해도 칭찬해줄 만한 계획표였다. 아니, 오전 시간의 계획표대로만 실천해도 동천의 실력은 나날이 눈에 띄게 늘어날 것이 분명했다. 문제는, 과연 그가 손안에 쥐고있는 내용대로 움직일 것이냐 하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똑똑!

“누구냐.”

기분 좋은 순간에 방해를 받는 것은 굳이 동천이 아니더라도 과히 달가운 순간이 아닐 것이다. 그런 이유로 동천의 목소리가 낮게 깔리는 가운데 문밖에서 시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녀이온데 아가씨께서 부르십니다.”

‘정화가?’

“왜?”

속으로 반문하고 이어서 물어봤지만 시비가 알아듣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죄송하오나 그것까지는…….”

그때 문을 벌컥! 열어 제킨 동천은 깜짝 놀라하는 시비를 가만히 노려보다가 잠시 후에 입을 열었다.

“야, 이 몸이 아무리 가슴 따듯하고 마음이 넓은 분이라지만 이놈이고 저놈이고 저년이고 니년이고 아무 생각 없이 찾아 와서는 무조건 누가 부른다고 하면 어떻게 하냐? 적어도 기본적인 대처나 할 수 있게 이 몸을 부른 이유 정도는 알고 왔어야 하는 거 아니겄어? 그래, 안 그래.”

두려움에 떤 시비는 마냥 틀린 말도 아니었지만 문제는 그녀가 감히 명령을 내린 윗분께 ‘왜요? 그분은 왜 찾는데요?’ 라고 물어볼 정도로 미치지는 않았다는 데에 있었다. 물론, 명령을 내린 자가 이러이러한 이유가 있으니 모셔와라, 라고 친절하게 가르쳐준다거나 어느 정도 경력이 있는 시비의 경우 살짝 물어볼 수도 있는 사항이었지만 무사들만 득실거리는 이곳에서 단계를 거치지 않고 바로 떨어지는 명령에 토를 달만큼 간이 큰 그녀가 아니었다. 그래도 당장의 위기는 모면해야겠기에 그녀는 재빨리 무릎을 꿇고 빌었다.

“죄송합니다, 약소전주님! 시, 시정하겠습니다. 시정하겠습니다.”

동천은 이렇게까지 빌지 않아도 그냥 경고 차원으로 끝내려고 했는데, 상대가 알아서 기자 더 이상 가타부타 이야기하지 않기로 했다.

“아아, 됐어. 됐으니까 빨리 안내나 해. 이 몸은 아주 거국적이고 찬란한 계획을 세우신 상태이기 때문에 한시가 급해서 네 사정 따위는 들어주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신 몸이라고.”

“예? 예에, 약소전주님.”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서둘러 움직인 시비는 두어 개의 건물을 총총히 돌아서 한군데의 경비를 지나친 후 무사히 동천을 안내할 수 있었다. 집밖의 호위대에게 얼굴을 보이는 것을 끝으로 당당히 안으로 들어간 동천은 살짝 문을 연 다음 사정화가 보이자 바로 저자세로 들어갔다.

“헤헤, 부르셨다고요?”

들어오는 동천을 일별한 사정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리 와서 앉아.”

탁자에 앉아 미리 차를 마시고 있던 그녀가 마주 앉기를 권하자 동천은 군말 없이 다가와 앉았다. 뒤이어 그는 시비가 가져다 주는 차를 바라보며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 씨! 또 차야? 차라리 확! 한약을 달여 달라고 할까보다.’

그때 동천을 바라보던 사정화가 물었다.

“차가 싫어?”

뜨끔해진 동천은 되물었다.

“예?”

사정화는 다시 물었다.

“차를 싫어하냐고. 생각해 보니까 가끔 차를 내올 때마다 인상을 찌푸리는 것 같던데.”

예리한 그녀의 지적에 잠시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던 동천은 어차피 편한 게 좋은 거라고 있는 그대로 자신의 생각을 말해주었다.

“그게 그러니까요. 실은 그렇게 싫어하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지만 굳이 마신다면 물을 마시는 게 좋은 정도? 에에, 뭐 그러네요.”

돌려서 말하긴 했지만 결론은 싫어한다는 말이었다. 사정화는 차를 싫어하는 특이한 식성은 둘째 치고라도 이날까지 용케 남들 앞에서 차를 마셔왔던 동천의 인내심에 놀라했다. 알다시피 동천은 먹을 것에 유난히도 까탈스러워서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는 음식에는(정말 거의 없다) 아무리 사정화가 노려본다 한들 절대로 입을 대지 않는 성격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볼일을 볼 때마다, 혹은 다른 사람과 마주 하는 것을 지켜 볼 때마다 웃는 낯으로 차를 마셔댔으니 어찌 그녀인들 놀라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여기에는 다 그럴 만한 사정이 숨어 있었으니…….

사실 동천은 다른 건 다 관대하게 넘어갈 수 있었어도 자신의 고결한(?) 품위를 해치는 문제에 관해서 만큼은 절대로 쉽게 용납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초기에 하인의 신분이었다는 열등감이 대단했던 동천은 일반적인 예의범절은 몸에 묻어나지 않더라도 가장 쉽게 상류층의 행색을 흉내낼 수 있는 것이 바로 고급 차를 즐기는 것이자 유난히 차가 입맛에 안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참고 즐기는 척 지내왔던 것이었다.

그러던 것이 나이가 들면서 점차 그 열등감이 희석되기 시작했고, 결정적으로 사정화와 지내는 내내 차를 마셔야 했던 동천은 의도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알게 모르게 차를 마실 때마다 인상을 찌푸렸다가 결국 이 순간을 맞이하게 된 것이었고 말이다.

“흠, 그래? 그렇지만 기름기 많은 음식들을 먹다보면 차가 필수일 텐데?”

동천은 씨익 웃었다.

“에이, 그거야 과일을 먹는 것으로 해결하면 되죠.”

그러고 보니 과일을 자주 먹는 동천을 보아온 그녀였다. 그러나 꼭 기름기 제거 때문이 아니더라도 먹을 것을 입에 달고 사는 동천이어서 간파하지 못했던 것이었을 뿐, 그녀의 눈치가 둔해서 이제야 깨달은 것은 단연코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다른 한편으로 동천처럼 참을성이 없는 녀석이 타인의 기호를 맞춰주고자 묵묵히 차를 마셔주었다는 것이 참으로 기특했다. 진실을 알면 허탈해질 그녀겠지만 어떻게 보면 모르고 지나치는 편이 나을 수도 있으리라.

“그런 방법이 있었군. 그렇다면 동천. 다음부터 적어도 내 앞에서는 굳이 차를 안 마셔도 돼.”

동천은 반색했다.

“앗? 정말요? 헤헤, 그렇다면 저야 좋죠. 아참! 그런데 무슨 일로 저를 부르셨어요?”

사정화도 차 문제 때문에 잊고 있었다가 뒤늦게 생각났던지 표정을 고쳐잡고 차분하게 용건을 꺼내들었다.

“사실 그동안 너무 조용했어. 그 때문에 다들 심심해했고.”

‘이 몸은 안 심심했는데?’

놀고 먹는 게 몸에 배었으니 심심하면 그게 이상한 거였다. 어쨌거나 사정화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어제 적들의 움직임이 시작되었어. 전에 너도 보았던 3군데의 차단로 중에 석낙(夕落) 고개라고 불리는 한곳이 뚫릴 뻔했다는 보고야.”

동천은 깜짝 놀랐다.

“예? 그런 일이 있었어요? 언놈들이래요?”

사정화는 말했다.

“사천에 모여든 무림고수들의 연합이야.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을 뒤에서 밀어주는 오련(五蓮)이라고 할 수 있지.”

동천은 또다시 놀라는 한편 인상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윽! 하필이면 왜 오련이야? 혈사교도 있고 무림맹도 있고 기타 등등의 대문파들도 있는데 하고많은 문파들 중에 오련이 관련될 게 뭐람? 으띠, 거긴 상대하기가 꺼려지는 인간들이 좀 있는데……. 특히나 황룡세가.’

사정화는 동천의 주된 고민거리를 알고있는 듯 잠시 생각할 시간을 준 뒤에야 입을 열었다.

“이제 곧 그 문제로 회의가 열릴 거야. 아마도 강경 대응에 목소리가 모일 것이고 나 또한 그 의견에 동조할 셈이야. 동천 너도 그때 같은 의견을 내도록 하고, 투입되는 교도들을 따라가서 간접적으로나마 보고 배우도록 해.”

아니 될 말씀에 동천은 눈을 크게 떴다.

“따, 따라가라고요?”

“그래. 약왕전의 의원자격으로 가는 거니까 안전하게 뒤에서 지켜봐도 상관없어. 그리고 황룡세가가 꺼려지는 건 알겠는데 언제까지고 피해 다닐 생각은 아니겠지?”

물론 그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곳에 갔다가 예전의 신분이 탄로 나는 것은 아닌가 그것이 저어될 따름이었다. 이미 암흑마교 내에서는 너무도 유명한(어떠한 의미이건 간에) 동천인지라 하인들까지 대부분 그의 과거사를 알고 있었지만 정작 당사자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어서 만일 황룡세가의 인물들에게 자신의 신분을 들킨다면 자신을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사는 것은 아닌가 염려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뭐 그렇다고 꼭 주눅이 들 동천도 아니었지만 한때 황룡세가의 하인이었다는 사실을 홀가분하게 날려버리지 않는 한 매사에 사람을 대할 때마다 찜찜하게 살아야 할지도 몰랐다. 상대가 겉으로는 웃으며 대화를 하지만 속으로는 자신을 하인 취급하는 것은 아닐까, 의심하는 상황이 오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속이 좁은 인간이었으니까.

“피해 다녀요? 누가요? 제가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허세를 부린 동천은 그나마 후방에서 지켜봐도 된다는 소리에 안심했다. 그녀 말대로 의원의 자격으로 뒤에서 몇 놈들만 고쳐주면 오련의 무리들과 마주칠 일이 없었으니까 말이다. 아니, 직접 치료해줄 것도 없이 그가 아니더라도 약왕전의 의원들이 포함되어 있는 상태였다. 동천은 그저 손만 까딱거리며 그들을 지휘하기만 해도 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거리낌이 없는 표정이었고 사정화도 깊게 생각할 것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아니면 됐어. 조금 있다가 산채를 한바퀴 둘러보러 간 할멈이 올 테니까 그때 같이 나가서 회의에 참석하기로 하자.”

그러고 보니 사정화의 곁에 있어야 할 정원이 안 보였다. 다행이 때를 잘 맞췄다고 내심 자위한 동천은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자신이 너무 사정화의 의견에 끌려 다녔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저기 아가씨.”

“말해.”

“예, 말씀하신 제 차출에 관해서인데요. 사실 제가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마음먹고 무공수련에 들어가려고 했었거든요?”

동천은 나름대로 진지하게 말했지만 사정화는 다소 냉소적으로 대꾸했다.

“그런데?”

동천은 어째 분위기가 냉랭해지려는 것 같자 서둘러 품에 지니고 있던 계획표를 꺼내들었다.

“에에, 이걸 보시면 아시겠지만 제가 적어 놓은 계획표인데요. 제가 이번 일에 동참하게 되면 무공수련에 막대한 차질이 오는 고로 어떻게 좀 빠질 수는 없을까요?”

사정화는 대답 대신 검지를 까딱거렸다. 동천은 자신에게 오라는 줄 알고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가 ‘그거말고’ 라는 소리에 바로 깨닫고 계획표를 건네주었다. 그것을 받아든 사정화는 아침일과를 본 뒤에 동천을 한번 바라보고, 점심일과를 보고 또 동천을 바라보고. 마지막인 저녁일과까지 본 뒤에도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더니 결국에는 피식 웃고야 말았다.

“재미있네. 만일 네가 이 계획표대로 일주일을 버틴다면 천마동의 소재지가 밝혀질 때까지 네가 하고픈 대로 다 하고 다녀도 아무 말 않을게. 어때, 해보겠어?”

대번에 눈을 번뜩인 동천은 흥분한 얼굴로 바로 되물었다.

“그게 정말이세요?”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사정화.

“물론이야.”

‘아싸!’

좋아서 입이 쫙 벌어진 동천은 마다할 이유가 없었기에 바로 대답해주었다.

“할게요! 할 테니까 나중에 무르시기 없기예요?”

사정화는 말했다.

“난 네가 아냐.”

동천은 사정화가 자신의 정직한(?) 성격을 깎아 내렸음에도 전혀 화를 내지 않았다. 여기에서 화를 내기엔 조건이 너무도 좋았기 때문이다.

‘흐흐, 정화야. 정화야. 네가 이 몸을 너무 과소평가 하는구나. 이 몸이 알고 보면 끈기로 뭉쳐진 의지의 사나이였음을 네가 정녕 모르고 있었구나! 으하하!’

뜨겁게 의지를 불태우며 사정화의 코가 납작해질 일주일 뒤를 즐겁게 상상한 동천은 그로부터 이틀 뒤에 석낙 고개로 지원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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