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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658화


“진정하십시오. 이곳에서 나간 놈들의 발자취도 수두룩하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그 일행에 묻혀 간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자 금면마제는 쉽게 진정이 되는 것을 느꼈다. 원래는 약소전주를 손안에 쥐었다가 놓친 심정이어서 마음이 조급했던 것이었는데, 바로 대안이 떠오르자 냉정한 그로 되돌아갔던 것이다.

“그럴 수도 있겠군.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으니 서둘러 뒤쫓아야겠어.”

고개를 끄덕인 수하는 물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헌데, 이자들의 처리는 어떻게 하실 예정입니까?”

금면마제는 무릎을 꿇고 전전긍긍하는 오련의 무사들을 싸늘하게 바라보았다. 그의 말 한마디에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상황이어서 그런지 억류되어 있는 무사들의 긴장은 극에 달해 있었다.

실제로 모용상현을 제외한 나머지들은 금면마제에게 짐이었다. 그래서 제거를 명하려던 금면마제는 제일 끝에서 혼자 널브러져 있는 사내를 발견하곤 결단을 잠시 유보했다.

“저기 끝 쪽의 기절한 녀석은 뭐 하는 놈이냐.”

수하가 급히 대답했다.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미처 말씀을 드리지 못했는데, 아마도 가둔 자들을 감시하던 보초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자물쇠가 열린 빈 철창 근처에서 기절해있었으며 정황으로 보건대 갇혀있던 누군가에게 제압을 당한 뒤 의식을 잃은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무언가 깨닫는 것이 있었던 금면마제는 말했다.

“제갈연인가 하는 계집이 제압하고 달아났다는 소리냐?”

“심증은 가지만 꼭 그렇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이곳에 내통자가 있었거나 무시 못할 고수가 은밀히 구출해 갔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군. 어쨌든 물어보면 다 해결될 것이니 깨워라.”

그러자 대답을 해주던 수하는 상당히 난처한 표정으로 우물쭈물하더니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저기, 그게……. 마혈(痲血)을 제압 당한 상태인데 저희들의 능력으로는 당최 제압된 혈도들을 풀 수가 없는지라…….”

마혈이라 함은 인체의 움직임을 마비시키는 모든 혈도들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혈도를 점하거나 내공을 끌어올리지 못하게끔 금제를 가하는 수법들도 마혈의 범주 안에 포함된다고 보면 될 것이다.

“흠, 난해한 수법에 당한 모양이로군.”

차라리 그랬다면 이렇게 어찌할 바를 몰라하지도 않았을 터인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소, 송구하오나 그렇게 어려운 수법도 아니고 그저 일반적인 점혈법에 분근착골을 한 흔적만 있을 뿐입니다.”

눈살을 찌푸린 금면마제는 찰나간 수하를 노려보다가 싸늘하게 명령을 내렸다.

“이리로 끌고 오라.”

“존명!”

그제야 살았다는 얼굴의 수하가 다급히 움직이자 금면마제는 잘 한 것도 없으면서 존명은 무슨 개뿔이 존명이냐고 내심 한심하게 생각했다. 저런 것들로 기습에 성공한 것도, 어떻게 보면 기습이었기에 성공했다는 생각까지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길게 생각할 겨를도 없이 기절한 상태의 간수를 살펴봐야만 했다. 잠시 상대의 팔을 통하여 진기를 흘려보낸 그는 수하의 말대로 간단한 점혈법이자 주저 없이 막힌 두어 곳을 타통시켜 주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전혀 효과가 없는 것이 아닌가.

“응?”

마치 ‘이럴 리가 없는데?’ 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린 금면마제는 다시금 해혈을 시도했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뭐지? 왜 혈도가……?”

남이 막아 놓은 혈도를 자신이 풀지 못한다면 그것은 명백히 실력이 뒤쳐진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금면마제는 현재 대처하고 있는 상황이 자신의 능력 밖이라는 사실을 수하들이 보는 앞에서 시인할 수 없었다. 이것은 자존심의 문제였던 것이다.

‘이런 망신스러울 데가! 수하들이 보는 앞에서 이 무슨 창피란 말인가!’

퍽! 퍼퍽!

혈도를 풀겠다고 간수의 몸을 후려치기(?)를 반각이 되어가자 상대의 어깨와 가슴 아래쪽. 그리고 단전의 바로 위쪽에서 은은한 붉은 색이 감돌기 시작했다.

아닌게 아니라 피멍이 들다 못해 피부가 벗겨지고 짓이겨져서 혈흔이 드러나는 상황이었다. 내공을 최대한으로 끌어 모아 손끝에 집중했으니 간수의 몸이 멀쩡했다면 그게 더 이상한 것이리라.

“대단하군! 누구인지 몰라도 상대는 정말 극상승의 고수야!”

드디어 포기한 금면마제는 정말 감탄했다는 얼굴로 상대를 칭찬했다. 하다하다 안 되자 자신의 체면이라도 건질 겸 이름 모를 상대를 치켜세웠던 것이다.

헌데, 알다시피 간수를 제압한 것은 동천이었다. 내공과 기교를 따져 보아도 금면마제가 훨씬 우위에 있을 터인데 어찌하여 그가 동천이 막아 놓은 혈도를 풀지 못했던 것일까? 사실, 알고 보면 간단했다.

바로 직선과 회전의 차이였다. 동천의 귀의흡수신공은 원을 그리듯 자연지기를 흡수하고 내뱉는 묘리를 지니고 있었던 만큼, 기본적으로 그가 운용하는 내공의 모든 형태에는 회전이 가미되어 있었다.

치료를 함에 있어서도 회전을 가미하여 내공을 밀어 넣었고 다시 받아들일 때에도 같은 원리로서 거두어들였다.

검으로 치자면 그저 날카롭게 표적의 정 중앙을 찌르는 것과 검에 회전을 걸어 찌르는 것의 차이를 생각하면 쉬웠다. 파괴력 면에서 상대가 되질 않는 것이다.

퍼걱!

무정한 금면마제의 손이 간수의 머리를 쪼갰다. 단숨에 상대를 절명시킨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보기에 이자는 제갈연을 지키고 있다가 소리 없이 침투한 초고수에게 분근착골의 수법을 당한 듯 싶었다.

그렇다는 것은 이곳에 관하여 아는 대로 실토한 뒤 기절을 당한 것으로서 깨운다고 해도 알아낼 것이 없는 것이다.

물론 아닐 수도 있었지만 지금의 그는 자신의 치부를 드러낸 것과 같은 수치심을 느끼고 있었기에 간수를 주저 없이 제거했다.

동천으로서는 괘씸한 놈이어서 분근착골 후 기절을 시킨 것일 뿐이었는데 내공의 특성상 혈도를 점한 부위가 나선형으로 기혈(氣穴)을 막고 있었으므로 금면마제의 날카로운 내공은 개미귀신의 덫에 말려든 개미와 같은 형국으로 그저 스며들었을 따름이었다.

그럴 뜻은 전혀 없었지만 의도하지 않게 간수의 명줄을 앞당긴 결과가 되었다고나 할까? 이래저래 당한 자만이 불쌍할 따름이었다.

“시간이 지체되었다. 여기 이놈들은 3명이 남아서 석낙 고개로 이송하고 나머지는 본좌를 따른다. 가자!”

“존명!”

옷자락이 휘날릴 정도로 그들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동굴 안은 역겨운 피 냄새로 진동했고 죽은 자들이 널려있어서인지 안 그래도 어두운 동굴의 전경은 을씨년스러웠다.

모용상현 일행을 데리고 나간 암흑마교의 무사들까지 사라지자 적막한 내부의 공기조차 한기를 머금은 듯 했다.

일단 혼자 움직인 동천은 감방의 통로 끝 쪽에서 상황을 주시하다가 아무도 없음을 간파하고 마침내 되돌아와 제갈연을 조심스럽게 안아 올렸다.

“아!”

“응? 아파요?”

제갈연은 얼굴을 붉히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에…, 조, 조금요.”

아픈 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었지만 그녀가 전부다 대답할 의무는 없었다. 보이는 것만을 확인한 동천은 양해를 구하는 얼굴로 말했다.

“이제 신법을 전개할 거라서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이 아플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해드릴까요. 그냥 수혈을 점해드릴까요?”

제갈연은 고개를 내저었다. 이대로 잠이 들면 다시는 깨어나지 못할 것 같은 뜻 모를 불안감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그냥 이렇게 있을게요. 아무래도 뜻하지 않은 상황들이 닥쳤을 때 제가 깨어있는 것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까요.”

그녀가 무공으로는 도움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차후에 정파의 인물들과 부딪혔을 때 말로 설명해준다면 확실히 도움이 될 것 같기는 했다.

동천으로서는 숙면을 권장하고 싶었지만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경공을 시전하자면 그녀의 치료에 조금은 소홀할 여지가 있었다. 그녀의 상태가 결코 낙관적이지 않았던 만큼 깨어있는 것이 확실히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그럼 그렇게 하십시오. 하지만 참을 수 없이 아프다거나 어쩐지 몸의 기력이 빠져나간다 싶으시면 주저 없이 저에게 말씀을 해주셔야합니다. 안 그러면 소저의 생명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알겠습니까?”

“예, 공자님.”

제갈연은 처음 관통상을 당했을 당시에 자신은 살아남지 못하리라고 예감했었다. 그것은 깨어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는데, 동천의 신기한 내가기공(內家氣功)을 접한 후로는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살아날 수 있다는 희망과 더불어 죽음이라는 깊은 절망 속에서 헤어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새삼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 그녀는 무언가 열망이 담긴 눈동자로 동천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동천이 이동하자 복부의 충격에 비명을 지를 뻔하였다. 미리 단단히 준비하고 있어서 그나마 견뎌냈던 것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동굴이 떠나가라 비명을 질러댔을 것이 분명했다.

너무도 아프고 살점이 찢기어 나가는 듯한 고통에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 그녀는 어느 순간 고통이 말끔히 사라지자 그제야 몸의 경직을 풀고 가쁜 숨을 내쉬었다. 그때 동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흐음,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적어도 이틀은 조용한 곳에 숨어서 치료에만 전념을 해야할 듯 싶습니다.”

제갈연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흔들어댔다.

“하아, 하아! 아, 아니에요. 저는 어서 돌아가야만 안심이 될 것 같아요.”

많은 시간이 흐른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 너무도 큰 고통으로 인하여 돌아가는 상황을 감지할 새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으슥한 비탈길에서 자신을 비스듬히 앉히고 한 손으로는 어깨를 감싼 뒤 다른 한 손으로는 상처 부위에 손을 올려놓고 있는 동천을 바라보았다.

이때 동천은 치료비라도 받아 내야지 힘들어서 더 이상은 못 해먹겠다고 내심 투덜거리고 있었지만 그의 속마음을 알 턱이 없었던 제갈연은 꿈 많은 소녀처럼 자신이 너무 남자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음을 깨닫고 푹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이어서 계속 말했다.

“전 동 공자님의 신기에 가까운 치료술을 받으면서 충분히 버틸 수 있어요. 수, 수고스러우시겠지만 최소한 정파의 인물들을 발견할 때까지 만이라도 같이 움직이도록 해요.”

자고로 미인의 부탁은 거절하기가 힘들다고 했다. 더욱이 자신에게 호감을 느끼는 듯한 표정으로 얼굴을 붉히며 수줍게 요구하는 모습에는 더더욱 그랬다.

‘얼레, 얘가 이 몸에게 마음이 있나? 물론 이 몸의 매력에 넘어오지 않는 여자가 없긴 하지만……. 하아!’

동천은 절로 탄식이 흘러나옴을 느꼈다. 매일 착각 속에서 사는 그였지만 이번만큼은 제대로 집었음에도 결코 기뻐할 수가 없었다.

상대는 정파의 명문무가 여식이었고 자신은 마도에서도 명망 높은 절세미공자(絶世美公子)(?)였기 때문이었다.

‘제길! 이 몸이 너무 잘나지만 않았어도!’

더 두고보기가 민망할 수준으로 치닫는 가운데 동천은 우수에 찬 눈빛으로 제갈연의 고운 얼굴을 바라보았다.

제갈연이 보기엔 우는 건지 웃는 건지 모를 이상한 얼굴이었지만 동천은 우수에 찬 눈빛과 표정이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후우! 제가 제갈 소저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제갈세가에서 소저의 실종으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거라는 것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적들은 바보가 아닙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의 종적이 노출되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때로는 자세한 설명보다 나머지는 알아서 생각해보라고 놔두는 쪽이 효과가 클 때가 있었다. 지금이 바로 그러한 상황으로서 영특했던 제갈연은 다급한 상황에 너무 치이다 보니 생각의 폭이 너무 좁아졌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 그렇군요! 죄송해요. 제가 철모르고 억지를 부려서요.”

그제야 자신의 말을 알아듣는다고 생각한 동천은 가볍게 웃어주었다.

“하하, 아닙니다. 그보다 숨어 지낼 곳이 동굴이라면 정말 좋겠는데 무림인들이 널리고 널린 곳인지라 남아도는 곳은 없을 듯 싶습니다. 차라리 아까 동굴에서 그랬던 것처럼 은형포단으로 몸을 숨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비좁은 공간에서 몸을 의지했던 기억 때문인지 제갈연의 얼굴이 보기 좋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여줌으로써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 싱긋 웃어준 동천은 조심스레 그녀를 안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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