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664화
잠시 후 언덕 위까지 올라와 숨을 돌리기 시작한 두 노인은 멀리에서 봤을 때는 잘 몰랐는데 상당히 낭패를 당한 몰골이었다. 의복은 구질구질했으며 머리는 봉두난발에 지칠 대로 지쳐서 마치 힘없는 늙은 노인들이 산적들에게 쫓기다가 넘어지고 까지고 깨지고 난리도 아닌 가운데 겨우 도망쳐 나온 것만 같았다. 모르는 누가 보았다면 말이다.
‘어라? 저 늙은이들 중에 한 명은 분명… 제갈연을 붙잡아 갔던 혈랑단주인지 뭔지 하는 그 늙은이인데? 왜 저 꼴을 하고 있지?’
동생을 찾는다며 기세 좋게 나갔던 인간이 수하들은 다 어디에다 팔아먹었는지 달랑 볼품 없게 생긴 노인네 한 명만 데리고 나타났으니 동천으로서는 당연한 의문이었다.
‘그보다 얄팍하게 생긴 저 인간이 찾으러 갔던 그 동생인가? 그러고 보니, 저 더러운 인상 어디에선가 본 것 같기도 한데……. 누구였더라?’
동생이 맞다면 대충 상황이 정리되었다. 필시 저들은 원한관계에 있다던 당문에게 수하들을 다 잃고 도망치는 중이리라. 진실은 조금 달랐지만 당장에 보이는 것만으로는 거기까지가 동천의 한계였다.
“후우, 후! 여기에서 잠시 쉬자꾸나.”
“예, 형님. 헉헉.”
동천이 언덕에서 내려보다가 그들을 발견했듯 그들도 비슷한 경우를 생각했음인지 언덕 위에서 망을 보며 잠시 쉬기로 했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잠시 숨을 돌린 그들은 심각해진 얼굴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형님, 그 죽일 놈들이 아까부터 보일 생각을 않는데 혹시 포기한 것이 아닐까요?”
혈랑단주의 동생은 작은 키에 생각이 얇고 독선적이게 생긴 얼굴이었다. 형인 혈랑단주와는 정 반대로 생겼기에 평소에는 비교대상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도 형제라고 잔인한 면에서는 누가 먼저랄 것이 없었지만 말이다.
“그렇진 않을 것이다. 금면마제라면 몰라도 당찬(唐贊) 그 늙은이는 포기할 리가 없지. 아마도 숨을 고르며 우리가 빈틈을 보이기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형의 대답에 동생인 흑혈단주가 이를 악물었다.
“죽일 놈의 당문! 고작 눈에 거슬렸던 문인 한 녀석 죽였다고 이토록 집요하게 쫓아들다니!”
혈랑단주는 동생을 달랬다.
“흥분하지 말거라. 흑마궁 정도면 당문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할 것이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던 우리의 잘못도 있다. 그놈들이 그토록 막무가내이고 집요할 줄 우리가 어찌 예측할 수 있었겠느냐.”
자신들의 안일함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당문이 미친개처럼 행동했던 것이라는 이야기이자 흑혈단주도 수긍하는 눈초리로 화를 가라앉혔다. 그러나 그는 곧 다른 생각 때문에 다시금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놈들이야 그렇다 치지만 그 복면을 한 두 새끼들은 도대체 뭡니까? 그놈들 때문에 싸우지 않아도 될 싸움을 해서 부하들도 다 잃고 이렇게 도망치는 신세가 되었으니……, 으으!”
흑혈단주의 두 눈에서는 원독으로 가득 찬 살기가 줄기줄기 흘러나왔다. 분노하는 것은 혈랑단주도 마찬가지였지만 확실히 그는 동생보다 냉정한 인물이었다.
“너의 그 답답한 심정은 모르는 바가 아니다. 하지만 그놈들은 더 이상 우리와 관계될 이유가 없다. 우선은 안전한 곳으로 도피하는 것을 강구하는 것이 먼저다.”
“크으! 알고는 있지만 그 복면인들을 잡아 죽여야 속 시원히 발뻗고 잘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랬던 거외다.”
“되었다. 이제 그만 일어나자.”
“예, 형님.”
어느 정도 쉰 그들이 떠날 준비를 하는 와중에 동천은 여태까지의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 할지 고민했다. 금면마제가 거론된 것으로 보아 그때 동굴로 쳐들어왔을 때 바로 추적하여 혈랑단주와 맞닥뜨린 것이 분명했다.
거기에 여러 인물들이 더 얽혀 있는 것 같았지만 현재로서는 눈앞의 상황 때문에 딱히 관심이 없었다.
‘여기에서 저 늙은이들을 제압한 뒤에 죄를 뒤집어 씌우면 본교로 당당하게 돌아갈 수 있는데 문제는 하나가 아니라 둘이란 말씀이야? 으음, 척 보기에도 지쳐있고 내상도 입은 것 같지만 그래도 저 늙은이들은 명색이 고수. 어떻게 상처 없이 잡는다지?’
지금 동천은 저들에게 상처를 입힐까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행여나 자신이 다칠까봐 걱정하는 것이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저들의 팔이 잘리던 다리가 짓이겨지던 알 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되려, 그런 것을 걱정하면 동천이 아니리라.
‘그게 잘 될까 모르겠는데 한번 해봐? 뭐 밑져야 본전이니까 해보지 뭐.’
순간적으로 고민한 끝에 결론을 내린 그는 서둘러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목표는 저 형제들이 가는 방향으로 앞질러 가는 것이었다. 다행이 멀찌감치 떨어져서 전력질주를 했기 때문에 혈랑단주들은 낌새를 눈치채지 못했다.
설마하니 뒤에서 쫓아오는 것이 아닌 자신들을 추월한 누군가 앞쪽에서 매복해 있으리라고는 생각을 못했는지 그들은 움직이는데 거침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전방에 푸른 기류가 흘렀음에도 그 흔적이 미미하여 지나친 후에야 그들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형님, 방금 무언가 역겹고 시큼한 냄새가 나지……, 헉? 형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소! 내상이 그렇게나 심각했던 겁니까?”
무슨 소리냐는 듯 동생을 쳐다본 혈랑단주 또한 깜짝 놀랐다.
“너도 창백하기 그지없다! 혹시?”
서로 통하는 것이 있어 황급히 단전의 내공을 끌어올리기 시작한 그들은 기겁을 했다. 전신의 혈맥이 터질 듯이 요동치며 반발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누가 뭐라 할 것 없이 동시에 피를 한 움큼 게워냈다.
“쿨럭! 도, 독이다! 아까 그 이상한 냄새가 원흉인 듯 싶구나!”
가만히 놔뒀다면 모를까 중독된 독을 제어하려고 하다가 내공이 모자라자 반발력이 생긴 것이다. 여하튼 흑혈단주는 더욱더 창백해진 얼굴로 말했다.
“설마 당찬 이놈이 암수를?”
주위를 황급히 둘러보았으나 없는 상대가 보일 리가 만무했다. 혈랑단주는 눈앞이 핑핑거리고 그대로 쓰러질 것만 같자 서둘러 주저앉아 운기조식을 취하며 말했다.
“나는 서둘러 독을 몰아낼 터이니 잠시만 참고 경계를 서다가 그 후에 너도 뒤따라 독을 몰아내거라.”
흑혈단주는 자신도 겨우 버티고 서 있는 것인데 호위를 서라고 하자 기가 막혔다. 이건 형만 아니었어도 모가지를 잡아 비틀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어쩌랴. 형은 형이었고 일단 냉철한 형이 독을 몰아내야 뭘 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그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동생이 세간에는 비열하고 냉혹한 놈으로 불려지고 있었지만 자신에게만큼은 한다면 하는 착한 동생이었다. 그는 믿고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그는 운기조식을 풀어야만 했다.
“커헉, 웩! 헉헉, 이럴 수가! 이건 독인 것 같으면서도 독도 아니고……. 이게 도대체 뭐란 말이냐!”
형의 중얼거림을 들은 흑혈단주는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는 형이 운기조식을 푼 것이기에 약속은 지켰다는 듯 재빨리 자신의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단전에서 끌어올린 내력을 기경팔맥으로 천천히 유입시키자 독의 존재를 감지한 진기가 그것들을 한쪽 팔로 몰아넣는 작업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잘만 되는구만 무슨 헛소리를……, 헉?’
능력이 모자라 독을 몰아내지 못하자 창피해서 그랬나보다고 내심 득의의 웃음을 짓던 흑혈단주는 몰아내던 자신의 진기와 몰리던 정체불명의 독이 합쳐지기 시작하자 기겁을 했다.
이건 독을 몰아내고 몰아내지 못하고의 차이가 아니라 자칫 잘못하다간 내공을 거두어들이지도 못한 채 몸 속에서 맴돌다가 주화입마에 걸리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런 낭패가 다 있나! 으으, 이 상태에서 내공을 단전으로 거두어들이면 진원지기가 손상을 입게 된다! 그렇다고 이대로 놔두자니 단전의 경유 없이 무한정 내공을 돌려야 하는 악순환이 계속될 터인데!’
흑혈단주의 고민은 독으로부터 단전을 보호하며 대항하는 것과 독을 단전 안으로 들여와 대항하는 것의 차이라고 할 수 있었다. 보통 전자의 경우가 독에 중독되었을 때 흔히들 사용하는 정석의 방법이었는데, 이 경우에는 내공과 합쳐졌기 때문에 둘을 떼어놓는 방법이 없는 한 단전으로의 회수는 자살을 시도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모든 무공의 위력은 단전에서 시작하고 단전을 경유해야만 나타나는 것인데 그곳에 진기를 흘려보내면 생명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진원지기의 중독을 피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곧 단전의 붕괴로 이어져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때 형인 혈랑단주의 전음이 힘겹게 들려왔다.
『머, 멍청한 놈! 무언가 이상했다면 내 말을 듣고 나서 행동하던가 했어야 하지 않았느냐! 후우, 어쨌거나 잘 듣거라. 시간을 끌수록 그 이상한 독과 네 내공이 합쳐질 것이다. 그 전에 가능한 합쳐진 내공을 압축하여 한 곳으로 몰아 넣은 뒤 피와 함께 토해내거라!』
흑혈단주는 그제야 형이 운기조식 후에 피를 쏟아냈음을 상기시켰다. 하지만 그 방법은 내공을 피에 섞어 몸밖으로 배출하는 것이기 때문에 천금을 주고도 바꾸지 않을 내공의 일부를 소실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로써는 죽기보다도 싫은 선택이었지만 그 와중에서도 그런 방법을 떠올리고 실행한 형의 결단에 감탄하는 흑혈단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