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665화
“웁, 크웩! 헉헉!”
피를 쏟아낸 흑혈단주는 온 몸에 힘이 쏙 빠지는 듯한 현상을 겪었다. 내공의 일부를 같이 내보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독은 다 몰아 냈겠지?”
“헉헉……. 네, 형님.”
신기하게도 여타의 다른 독들과는 달리 쉽게 모이고 쉽게 배출되었다. 그 대가로 20년 가량의 내공이 소실되었기에 그들의 입장에서는 개뿔이 신기하겠냐고 하겠지만 전혀 듣지도 보지도 못한 독이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당찬은 아니다. 당가의 그놈이라고 보기엔 너무도 신중해.”
확실히 그였다면 암수(暗手)에 성공하고도 숨어있을 성격이 아니었다. 그러나 상대가 밝혀지기 전까지는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는 법이었다.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나오란 말이다!”
흑혈단주의 발악 섞인 외침은 허무하게 퍼져나갔다. 대답해주는 이가 없었으니 당연할 수밖에. 그런 그의 어깨를 살짝 집어준 혈랑단주는 진정하라는 듯 그에게 말했다.
“나오지 않겠다는 적에게 굳이 심력을 소비할 필요는 없다. 그보다 퇴로가 막힌 것은 아니니 서둘러 벗어나고 보자.”
말처럼 움직이는 것은 다소 무리였지만 앉아서 당하는 것은 확실히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알겠다고 대답한 흑혈단주는 힘겹게 내공을 짜내며 그의 형과 도주 아닌 도주를 시작했다. 그러나 부실거리는 몸으로 오랫동안 경공을 지속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크윽! 더, 더 이상은 무리요, 형님!”
“헉헉, 좋다. 이대로 가다가는 지쳐서 적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터이니 일단 쉬고 보자.”
혈랑단주는 자신들이 너무 불리한 입장이어서 도망치고 보자는 심리가 너무 앞섰던 탓에 되려 힘만 쏙 빼게 될 것이라고는 미처 예측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자신의 실책을 거론하기엔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고 말이다.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이놈이 우릴 말려 죽이려고 작정한 듯 싶소이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요, 형님! 기왕에 죽을 거면 우리 형제의 자존심을 세우고 죽읍시다!”
혈랑단주는 동생이 흥분하는 틈을 타서 상대가 공격해 들어오지 않을까 냉철하게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전혀 그런 낌새가 없었다. 그는 무성의하게 고개를 끄덕여주며 좀더 살핀 뒤 약간이나마 긴장을 풀었다.
“되었다. 아직 안심할 단계는 아니지만 적어도 이 주위에는 적이 없는 듯하다. 서둘러 운기조식 후 기운을 차리고 이후를 대비하기로 하자.”
눈을 빛낸 흑혈단주는 대답했다.
“예, 형님!”
“그래, 어서 운기조식에 들어가거라. 호위는 내가 맡을 터이니.”
둘이 같이 운기조식을 한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한 명은 호위를 맡아야 했는데, 말은 안 했지만 자신이 또 먼저 호위를 서야 하는구나 생각하고 있었던 흑혈단주는 뜻밖에도 형님이 자신부터 기운을 회복하라고 하자 찡한 형제애를 느꼈다.
‘역시 우리 형제의 우애는 따라올 자들이 없을 것이다!’
흑혈단주가 기쁜 마음으로 운기조식을 시작하자 혈랑단주는 혹시 모를 기습에 대비하여 날카로워진 눈으로 사방을 차근차근 둘러보았다. 처음에는 고요한 정적만이 감돌았지만 어느 순간 앞쪽에서 천천히 걸어오는 인영이 그의 시야에 잡혔다. 체격이 왜소한 사내였다.
“헥헥, 아직도 멀었나?”
어딘지 피곤해 보이는 얼굴과 목소리였다. 혈랑단주는 숨을까 생각도 해봤지만 이제와 숨는다는 것도 어설펐고 안력을 돋우자 상대가 나이 어린 청년임을 확인할 수 있었기에 그만두기로 했다. 더더군다나 어딘가 낯이 익어 생각해보니 동굴에서 제갈연의 치료를 맡겼던 애송이 의생이 아니던가.
‘응? 저놈이 어떻게 여기에?’
의아함이 가득한 얼굴로 상대를 쳐다보는데 마침 그쪽에서도 이쪽의 존재를 눈치챘는지 주춤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는 경계심이 가득한 모습으로 무언가 생각하는 듯 하다가 천천히 다른 방향으로 신형을 틀었다.
아마도 자신들의 모습을 보고는 관여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그 모습에 확신이 선 혈랑단주는 냉큼 상대에게 달려들었다.
“이놈! 어딜 도망치느냐!”
깜짝 놀라 도망치려던 청년은 발이 엇갈려 넘어지자 양팔로 얼굴 부위를 감싸며 머리를 조아렸다.
“히익? 자, 잘못했습니다! 전 별 것도 없는 의생이고요, 그저 조용히 길을 가려던 것일 뿐입니다요! 예예!”
필요 이상의 비굴한 반응이었지만 이런 곳에서라면 확실히 남들보다 살아남을 확률이 높은 행동이었다. 혈랑단주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어린놈의 뺨을 후려갈긴 뒤 한 손으로 멱살을 잡고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며 싸늘하게 물었다.
“죽고 싶지 않거든 본좌를 똑바로 보거라. 본좌가 누구인지 알겠느냐?”
의생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잠시 후 나지막하게
‘아!’
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이어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순식간에 혈랑단주의 전신혈도를 점해버렸다. 실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고 그만큼 대비할 틈이 없었던 혈랑단주는 ‘어?’ 하는 사이에 그대로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의생, 즉 동천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한창 운기조식 중인 흑혈단주에게 쏜살같이 달려가 일장(一掌)을 먹인 뒤, 피를 토하며 뒤로 나자빠진 흑혈단주의 혈도를 제압해 움직임을 봉해버렸다. 실로 번갯불에 콩 구워먹는다는 소리가 무색할 정도의 재빠른 솜씨가 아닐 수 없었다.
“파하하! 역시 이 몸이 하시는 일에 실패란 없다니까?”
의기양양해진 동천은 잠시 제멋에 빠져 낄낄거리다가 운기조식 중에 당해서 기혈이 역류하는 흑혈단주의 상태를 보고는 급히 바로 잡아 주었다.
굳이 운기조식 중인 흑혈단주를 공격할 필요는 없었으나 책(3류 소설)에서 보니까 주인공이 가끔 이렇게 하기에 그래봤을 따름이었다. 언젠가 기회가 오면 꼭 따라해 보고 싶었는데 막상 눈앞에서 그 상황이 벌어지자 옳다구나 공격했던 것이다.
“감히 이런 짓을 하다니! 네놈은 누구냐!”
아혈을 풀어주자 혈랑단주가 원독에 찬 두 눈으로 소리쳤다. 동천은 그에 앞서 따귀를 먼저 후려갈겼다.
퍽!
“켁?”
“어? 미안미안. 아까 댁이 이 몸의 뺨을 때려서 이 몸도 댁의 따귀를 때린다는 게 주먹으로 후려쳤지 뭐야? 그런 의미에서 다시 때릴게.”
퍼억!
“으잉? 또 주먹으로 쳤네? 왜 이러지?”
퍽! 퍼퍽! 퍼버버벅!
“얼레? 또 그러네? 이번에도? 어허? 어랍쇼?”
“크헉? 그, 그만! 그만해라!”
“뭐? 해라? 그럼 나도 아이고 미안해라. 손이 안 멈추네?”
퍽퍽퍽! 퍽퍽!
“커억! 악! 그, 그만 해라…십시오! 크흑!”
역시 매 앞에서는 장사가 없었다. 그도 사람인지라 고통을 당하지 않기 위하여 어린놈에게 존댓말을 하긴 했는데 뒤늦게 정신을 차렸는지 울분의 분노를 머금었다.
이 정도면 되었다고 생각한 동천은 처음에 때리고자 했던 따귀를 마저 때린 뒤 혈랑단주의 단전에 손을 올려놓았다. 불길한 예감을 느낀 혈랑단주는 기겁을 하며 소리를 지르려고 했지만 그보다 동천의 행동이 약간 빨랐다.
“큭! 무슨 짓을 하는 것이냐!”
혈랑단주의 단전으로 무언가 시큰한 기운이 흘러 들어갔다. 갑자기 배가 뜨거워졌다. 그 기운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이내 머리까지 타고 올라와 형용할 수 없는 역겨움을 유발시켰다.
“우웩! 웩! 네, 네놈이 설마 단전을? 으으!”
먹은 것을 토해낼 때 충분히 옆으로 물러나 관망하던 동천은 다시 다가오며 ‘너무 강했나?’ 라고 중얼거린 뒤 단전에 다시 손을 올려놓았다. 잠시 후 머리까지 치솟았던 기운이 수그러들더니 단전으로 빨려들듯 되돌아가는 느낌을 감지할 수 있었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동천의 손으로 말이다.
“이놈, 이게 무슨 짓이더냐!”
분노한 그가 소리쳤고, 되돌아 온 것은 주먹이었다.
퍽!
“시끄러 이 영감아! 영감 때문에 독 조절이 힘들잖아! 자꾸 옆에서 깨갱거리면 확 그냥 독을 쏟아 부어서 흐물흐물 녹여버린다?”
당하는 중간에 짐작은 했지만 역시나 독을 사용한 것이 눈앞의 애송이자 혈랑단주는 본능적으로 입을 꾹 다물면서도 퍼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서, 설마 네가 암흑마교의 약왕전 소전주?”
순간 동천의 눈꼬리가 무섭게 치켜올려졌다.
“네가? 소전주? 이 몸을 함부로 부르는 것도 모자라서 반말로 끝내는 겨, 지금?”
흠칫 놀란 혈랑단주는 체면을 따지기 이전에 자신의 처지를 떠올리곤 서둘러 말을 바꾸었다. 비록 당장에는 치욕을 당할지언정 과정이 어찌 되었든 마지막에 웃는 자가 진정한 승자였기 때문이다. 어쩌다 보니 동천과 같은 사고방식을 지녔지만 그는 그것을 몰랐다.
“아, 아니다! …요. 소, 소전주…님이십니…까?”
때맞추어 독의 주입 조절을 끝마친 동천은 혈랑단주의 단전에서 손을 떼고 약간 몸을 비튼 뒤 팔짱을 끼며 말했다.
“음! 자네가 뭘 좀 아는군. 그렇다네! 이 몸이 바로 암흑마교의 위대한 약왕전의 소전주이시라네. 앞으로 이 몸을 부를 땐 약소전주님이라고 부르시게.”
‘크으으! 참아야 한다!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어쩌다 이런 일들을 겪지 않았더냐! 기회의 순간은 꼭 찾아온다! 그때가 오면 바로 저놈을 제압하여 껍질 채 발라 씹어먹으면 될 것이다!’
실제로 완숙의 경지에 도달하기 전에는 적에게 제압되어 갖은 모욕과 수모를 당한 적이 더러 있었다. 그러던 것이 절치부심 노력 끝에 동생과의 합격진을 대성하게 되자 감히 그들을 건들일 자들은 찾아보지 못했었다.
그렇게 십여 년이 흘러 이제까지 어깨에 힘을 주고 살았으니 적응이 힘들 만도 하건만 그는 냉철한 이성으로 참고 버티며 자신을 낮출 수 있었다.
“예에, 약소전주…님.”
그래도 아직은 좀 어색했다.
“뭐 좋네. 자네는 무식해서 당연히 모르겠지만 방금 자네의 단전에 불어넣은 건 무시무시한 독(毒)일세. 자네의 몇몇 혈도를 풀어서 움직이게는 하되 금제를 가해서 내공을 운용하지 못하게는 하겠지만 그래도 만일이라는 것이 있기에 자네의 단전 주위에 독을 풀어 넣었지. 즉, 억지로 내공을 사용하려고 하면 독이 흘러 들어가 그대로 꽥하고 이름 모를 산길에서 맹수의 먹이로 갈기갈기 찢어진다는 말이지. 음, 이 몸이 말씀하시고도 참 시적으로 표현했군. 하하하!”
아직 당해보지 않은 상태였다면 혈랑단주의 성격상 내심 코웃음을 쳤을 것이 분명했다. 비록 방심하여 당하긴 했지만 어린놈이 그 정도의 경지에 이르렀을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번 겪어본 이후였기 때문에 그는 결코 동천의 경고를 무시할 수 없었다. 독전의 소전주가 아니라 약왕전의 소전주가 하독(下毒)의 달인이라는 사실이 조금 의아했지만 말이다.
“우릴 어쩔 셈이오.”
“셈이오? 오?”
‘젠장 맞을 자식! 끝까지 존댓말을 들으려고 하다니!’
서로의 나이 차와 연륜으로 보아 반 존대 정도면 충분할 텐데, 한 성격 하는지 집요하게 존댓말에 물고 늘어진다고 생각했다.
“아, 아니외다. 우릴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동천은 그래도 좀 모자라다 싶었지만 너무 지적하는 것도 군자가 할 행동이 아니라 여기고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사실 말이지. 본좌가 사천은 초행길이라 어디 갈 곳이 있는데 혼자 찾아가면 가긴 가겠지만 예정보다 며칠은 더 걸릴 것 같거든? 그래서 나이로 보나 늙은 외모로 보나 이 몸보다 두어 군데는 더 돌아다녀 봤을 자네들이 이 몸의 길 안내를 해주어줬으면 하네. 어떤가? 목적지까지 잘 바래다만 주면 본좌의 이름을 걸고 해독은 물론 아무 위해도 끼치지 않고 돌려 보내 줌세.”
혈랑단주는 자신들이 고작 길잡이가 된다는 것이 어처구니 없었지만 패는 저쪽에서 쥐고 있었으므로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이미 닳고닳은 마인들이라면 자신의 이름을 걸고 약속한 것 따위야 손바닥 뒤집듯 바로 뒤집을 수도 있었지만 아직 어린놈이라 자신의 이름을 내걸었으니 약속을 지킬 확률이 높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그도 나름대로 보는 눈이 있어서 상대가 아직 본성이 악하지 않고 그저 악동기질이 있을 뿐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여하튼, 내심 이를 간 그는 나중을 기약하며 별다른 잡음 없이 바로 허락해주었다.
“우리들의 안전만 보장해주신다면 최단기간으로 모셔다 드리겠소이……, 아니 드리겠습니다.”
“오오! 탁월한 선택일세! 그런 의미에서 자네의 동생도 금제를 가한 뒤 깨워야 하니 잠시만 기다리시게.”
흑혈단주에게 가서도 똑같이 단전의 주위에 독기를 불어넣은 동천은 뺨을 서너 대 때려서 그를 깨운 뒤 반항하며 욕을 퍼붓는 그에게 덜도 말고 더도 말고 딱 혈랑단주만큼 때려준 뒤 그에게 데려가서 동생을 잘 설득시키라며 임무 같지도 않은 임무를 내려주었다. 확실히 형제는 형제였던지 그들은 몇 마디 주고받지도 않았는데 나중을 기약하자는 암묵적인 대화를 나누고 금방 설득에 응해주었다.
“형님의 뜻에 따르기로 했…습니…다.”
‘니가 안 따르면 어쩌려고?’
동천은 한 마디 해주려고 했지만 상대도 사람인지라 계속 시비를 걸면 자신만 손해라고 생각해서 참았다. 대신에 그는 석낙 고개를 아느냐고 물었고, 그들은 가보진 못했지만 부딪혀서는 안 될 곳 중에 한 곳이었기 때문에 길은 안다고 대답해주었다.
“하하, 그랬는가? 그럼 어서들 앞장서시게. 당장에는 내공이 없어서 힘들겠지만 좀더 지내다 보면 익숙해질 테니까 그건 염려말고.”
‘으으, 죽일 놈의 새끼!’
‘두고 보자! 꼭 산채로 찢어서 죽여줄 테니까!’
움직이는데 지장이 없을 정도의 자유만 허락된 그들은 내심 이를 갈며 안내를 시작했다. 과연 복수를 할 수 있을지나 의문이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