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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673화


“후우, 이거 좀 힘드네?”

의술에 재미를 붙여 가는 요즘 동천은 무공에도 소홀하면 안 되겠다 싶어서 시간을 내어 틈틈이 연습을 했다. 그런 자신이 스스로도 신기했지만 언제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이곳에서 믿을 것이라곤 오직 자신의 힘밖에 없다는 위기의식이 발동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렸다.

그 당시에 동천은 자아도취에 잠깐(?) 빠졌지만 그런 행동을 묵인해줄 정도로 그답지 않게 열성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약소전주님, 교에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멀리에서 다가온 사내가 굽실거리며 말을 건넸다. 동천은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응? 본교에서? 아가씨가 계신 승봉산이 아니라?”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습니다. 신분을 확인도 할 겸, 그동안 저기 밖에서 잠시 기다리라고…….”

“동처어어어어언!”

사내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그의 등뒤에서, 그러니까 동천의 입장에서는 전방에서 가냘픈 인영이 무서운 속도로 그의 동공에 확산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실로 눈 깜짝할 사이에 와락 안겨들었다.

“엇? 화정아! 네가 어떻게 여길 왔지?”

얼떨떨해하는 동천의 얼굴에 자신의 볼을 비비던 화정이는 약간 떨어져서 해맑게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어떻게 오긴? 마차 타고 왔지!”

물어본 방향이 틀렸다고 생각한 동천은 다시금 물었다.

“소연이는?”

“소연이 저기 뒤에 있어. 헤헤, 뭐 좀 확인해야한다고 하길래 그냥 먼저 온 거야.”

역시나 소연이도 같이 온 상태였다. 기본적으로 통제할 인간이 있어야 화정이를 간수할 수 있었기에 소연이 아니고서는 화정이에게 명령을 내릴 인간이 없었던 것이다.

“야옹!”

화정이의 가슴이 꿈틀거리기 시작하더니 새하얀 고양이가 불쑥 고개를 내밀며 자신도 있다고 시위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호연화의 울음소리 덕분에 상념에서 깨어난 동천은 녀석을 꺼내서 양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자신의 눈높이로 바라보았다.

“에게, 아직도 코딱지 만하네? 너 더 이상은 안 크는 종(種)이냐?”

“야옹!”

마치 대답이라도 하듯 호연화가 가볍게 울었다. 사실 동천과 헤어진 뒤로 2배 정도나 자라난 상태였지만 동천이 보기에는 그 나물에 그 밥인 것 같아서 별로 큰 것 같지도 않게 보였던 것이다. 그때 마침내 기다리던 소연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주인님!”

절제된 듯하면서도 그리움이 절절히 묻어난 목소리였다. 호연화가 그 나물에 그 밥이었다면 소연은 잠시 못 본 사이에 훌쩍 시간을 뛰어 넘은 듯 이제는 소녀의 티를 완연히 벗어난 모습이었다. 순간적으로 ‘누님, 누구세요?’ 라고 물어볼 정도였으니 더 말해봐야 무엇하랴.

“어? 그게 그러니까… 어여 와봐.”

“예, 흐윽!”

그녀답게 떨어져 있던 시간이 그리웠는지 감정이 북돋아 올라 눈물을 글썽였다. 이럴 때 멋있게 안아주면 좋았으련만 동천은 그저 그녀의 볼을 살짝 잡고 흔들어줬을 따름이었다.

“넌 어째 커서도 눈물이 헤프냐? 뭐 이 몸을 애절하게 사모하는 네 마음을 알긴 하지만……. 어쨌든 잘 왔고, 물어볼 얘기가 많으니까 따라 들어와.”

“예, 주인님.”

소연이 눈가를 닦고 안으로 들어가자 탁자에 미리 앉아있던 동천이 자리를 권했다. 4명이 앉을 수 있는 자리에 화정이까지 합쳐서 2명이 더 앉는 것이니 자리가 모자라지는 않았다.

“어떻게 온 거야?”

“어떻게 오긴? 마차 타고 왔다니까?”

“화정아. 끼어 들면 맞는다.”

“응? 응, 알았어. 때리지마. 가만히 있을게. 헤헤.”

말을 제대로 알아들은 건지 어떤지는 잘 몰랐지만 일단 당장의 침묵에는 효과가 있으리라. 동천은 네가 대답해보라는 듯 소연을 바라보았고 그녀는 빤히 바라보는 주인님의 이글(?)거리는 눈빛에 볼을 발갛게 붉히며 대답해주었다.

“전주님께서요, 한달 보름 전쯤에 주인님께서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시고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셨어요. 그래서 일손도 놓으시고 불안한 모습을 보이셨는데 다행이 주인님께서 무사히 돌아오셨다는 소식을 들으시고는 정상적인 모습을 회복하셨지만 그래도 불안하시긴 하셨나봐요. 다음날 저희들보고 직접 찾아가서 수발을 들라고 명하시지 뭐예요? 그래서…, 그래서 기쁘게 한달음에 달려왔던 거예요.”

그런 사정이 있자 동천은 제자를 사랑하는 사부님의 마음에 가슴이 찡해짐을 느꼈다. 그렇다고 해서 기쁘게 찾아와준 소연의 마음을 간과했다는 것은 아니었다.

‘크윽, 역시 사부님께서는 이 제자가 무엇을 필요로 하시는지 족집게처럼 콕콕 찍어 올리시는구나! 여긴 뭐 사내새끼들 밖에 없어서 뭘 시켜도 기분이 더러웠는데 이렇게 다행일 수가! 하하하!’

너무도 기쁜 나머지 소리나게 큭큭거리던 동천은 뭐가 그리도 재미있냐는 화정이의 물음에 재빨리 정신을 차렸다. 아무 것도 아니라고 대답해준 그는 생각해보니 자신이 실종되었다가 돌아온 지도 벌써 2달이 다 되어 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지났나 싶기도 했지만 의술과 무공의 정진을 위하여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내오다 보니 순식간에 세월이 흘렀던 것이로구나, 하고 그는 생각했다.

“주인님? 주인님!”

“응? 왜?”

동천이 깜짝 놀라 소연을 바라보자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 컸음이 부끄러웠던지 그녀가 어색하게 웃으며 물어보았다.

“아까부터 뭘 그렇게 생각하세요?”

뭐라고 대답해줄까 잠시 머리를 굴린 동천은 무난한 대답을 해주기로 했다.

“뭘 생각하긴. 니들을 어디에다 재울까 생각하고 있었지. 흐흐, 당장에 잘 곳도 없을 텐데 이곳에서 같이 잘까?”

그게 왜 무난한 대답인지는 몰랐지만 당황한 소연은 화들짝 놀라 시선을 어디에다 둬야 할지 몰라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대답은 의외의 것이었다.

“아이, 몰라요! 짓궂으시긴……. 그리고 어차피 저희는 여기에서 못 지내요. 주인님과 다시 되돌아가야 한다구요.”

동천은 느긋하게 듣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되돌아가? 어디로?”

소연은 대답했다.

“이곳에 오기 전에 사 아가씨께 들렸는데 마침 잘 되었다며 주인님을 만난 뒤 아가씨께 데려오라고 하시더라고요. 아마도 무언가 일이 벌어졌나봐요.”

“무언가 일이?”

동천의 되물음에 소연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네, 승봉산에서 보니까 사람들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더라고요. 아마도 천마동의 소재지가 어렴풋이 밝혀진 것은 아닐까 생각했지만 자세한 것은 잘 모르겠어요.”

할말 다 해놓고 모른다는 소리에 동천이 소연을 째려보았다. 하지만 그는 소소한 문제는 제쳐두기로 하고 드디어 자신이 활약할 때가 다가왔음을 느끼며 한줄기 미소를 가느다랗게 그어 올렸다.

“호오, 그렇단 말이지?”

“예, 그러니까 가져가셔야 할 물건들은 미리미리 말씀해주시고 어서 돌아가실 차비를 해주세요. 저야 늦어도 괜찮지만 주인님께서 늦게 가시면 괜히 아가씨께 한소리 듣게 되시잖아요.”

그래도 자존심은 있는지 듣기에 거슬리는 부분이 있자 동천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쳇, 한소리를 듣기는 개뿔이! 백날 씨부리라고 해봐? 이 몸이 눈 하나 깜짝하나!”

씩씩거린 그는 말과는 달리 이것저것 바쁘게 챙기는 모습을 보여주어서 소연이 절로 웃음을 짓게 만들었다. 역시 그녀가 생각하는 주인님은 표현이 거칠긴 했지만 나름대로 순수하고 귀여웠던 것이다.

“뭘 그렇게 실실 쪼개냐? 이거 안 거들어?”

“예? 예에, 거들어요. 호호!”

“동천, 나도 거들까?”

“넌 사고 치지 않는 게 거드는 거니까, 지금처럼 연화나 봐주는 것으로 끝내.”

그게 칭찬인 줄 아는지 화정이가 아름다운 눈을 반짝였다.

“정말?”

동천은 약간 일그러진 얼굴로 심통 맞게 대답했다.

“정말이 아니면 어쩌려고? 니가 이 몸을 한 대 치게?”

순간 놀란 화정이는 기대가 된다는 얼굴로 재빨리 물었다.

“어? 그래도 돼?”

대답은 꿀밤으로 되돌아왔다.

딱콩!

“되긴 개뿔이 되냐? 이게 그새 못 본 사이에 간땡이만 커졌나, 너 물에 불어터진 시체가 살려달라고 벌떡 일어날 정도로 여기에서 한번 제대로 두들겨 맞고 싶어?”

동천이 위협한 뜻을 제대로 해석하진 못했지만 무언가 두려운 소리인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그녀는 울상을 짓고 뭘 잘못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자신의 잘못을 빌었다.

“동천, 잘못했어. 다시는 안 그럴 게. 히잉, 나 무서워…….”

“당연하지! 무서우라고! 응? 무서워?”

순간 동천의 눈이 번뜩였다. 강시가 무서움을 안다? 강시는 전투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존재였다. 상대가 신이건 악마이건 간에 주인이 명령을 내리면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어야만 하는 마물들이었다. 그래서 약간의 지능이 되돌아올지라도 두려움만은 결코 되살아나지 못하게 되어있었던 것이다.

“진짜 무서웠어?”

화정이는 어느 정도 진정된 얼굴로 대답해주었다.

“응, 무서웠어.”

“어느 부분이?”

“우웅, 잘 모르겠는데 그냥 듣고 나니까 무서웠어.”

이제 그녀의 얼굴은 전혀 무섭다는 표정이 아니었지만 동천은 상관없었다. 드디어 자신의 노력(?)이 결실을 맺고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졌기 때문이다.

“하하, 그래그래. 가능한 모든 감정들을 느끼는 게 좋아. 어느 순간 이게 뭘까? 하는 감정이 일어난다면 자꾸 파고들어서 느껴보란 소리야. 모르면 소연이에게 물어보고. 알았지?”

화정이는 활짝 웃었다.

“응, 알았어 동천. 나 잘한 거지?”

“그러엄! 잘했고 말고!”

고개를 끄덕여준 동천은 그녀의 허리를 가볍게 끌어안고 그녀의 입술 바로 옆에 살짝 입맞춤을 해주었다. 향기로운 여인의 방향(芳香)이 동천의 콧속으로 가득히 밀려들어왔다.

“앗? 뭐, 뭐 하는 짓이세요?”

놀란 소연이 소리치자 입술을 뗀 동천이 찡그린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짓? 이 몸의 기품 어린 행동이 니 눈에는 짓으로 보이디?”

“아니, 그게 아니고요. 여하튼! 화정이가 아무 것도 모른다고 그러시면……. 버, 벌받아요!”

용기 있는 그녀의 행동에 동천이 갑자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네가 질투하는구나? 알았어, 자 이리와. 이 몸이 화정이와는 달리 제대로 입맞춤 해줄게.”

“예? 꺄아! 싫어요!”

“싫기는? 좋아하는 거 다 아는데 말이지. 자! 이리와 보라니까?”

“으앙! 따라오지 마세요!”

“하하, 그러니까 멈추라고!”

도망치는 소연의 뒤를 동천이 재밌다는 얼굴로 뒤쫓았다. 동천은 그녀와의 차이를 바로 좁힐 수도 있었지만 늑대가 어린양을 가지고 놀 듯, 따라 붙을 만하면 속도를 늦추고 너무 멀어진다 싶으면 바로 뒤까지 따라가며 어쩔 줄 몰라하는 소연을 놀렸다.

‘저 인간이 이제는 발정 난 개가 됐구나!’

그 모습을 밖에서 지켜본 보초는 그렇게 생각했다. 사내는 도망치는 소연을 불쌍하게 바라보았다.

‘에그, 드디어 잡혔군. 헉? 입맞춤까지? 으으, 저 씨불 놈은 좋겠다! 나한테 저런 거 시켜주면 저 인간보다 더 잘해줄 자신이 있는데!’

그도 사내인지라 오만가지 상상을 다하며 동천을 부러워했다. 헌데, 갑자기 눈앞이 번쩍 하더니 묵직한 주먹들이 사방에서 그의 신형을 파고드는 것이 아닌가!

퍼버버버벅!

“크악? 으아악! 악!”

영문도 모르고 한참을 맞았다. 왜 맞는 것인지도 모른 채 그저 얻어맞았다. 그러나 다행히 때리던 상대를 말려주는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 주인님! 그만두세요! 왜 갑자기 이분을 때리시고 그러세요?”

그제야 구타를 멈춘 동천은 대답했다.

“몰라? 그냥 기분이 더러워서 쥐어 패고 싶더라고?”

“어휴, 그러시면 안 되요. 이렇게 이유 없이 때리시면 평판이 안 좋아진다구요.”

더 나빠질 평판도 없었지만 그녀의 입장에서는 주인님이 좋은 분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그녀의 진심이 어느 정도 통했는지 더 패줘야 함에도 불구하고 동천은 용서해주기로 했다.

“음, 그러지 뭐. 너 임마, 이 몸에게 뭘 잘못하긴 한 게 분명한데 소연이 때문에 산 줄 알아. 알겠어?”

“으으, 어버버!”

그가 겨우 고개를 끄덕이며 발음도 안 되는 말로 사죄하자 동천은 바닥에 침을 찍 뱉고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필요 없는 것들은 제외하고 돈과 그 동안 틈틈이 모아 두었던 고급 옷가지들을 바리바리 싸든 동천은 화정이와 소연에게 그것들을 떠넘기고 팔자걸음으로 유유히 앞을 향해 걸어나갔다. 그 날 석낙 고개의 마교도들은 아껴두었던 소를 잡아 잔치를 벌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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