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676화
“…….”
잠시 침묵이 돌자 하는 수 없다는 듯 초무강이 입을 열었다.
“무림맹은 백도(白道)입니다. 뒤에서 오는 중인 오련 또한 백도입니다. 그들이 마음먹고 양쪽에서 밀어붙인다면 몰살을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법이지요.”
혼천부의 집법당주(執法堂主) 혁필상이 이어 받았다.
“그러나 색깔이 다른 백도입니다. 또한, 단시간에 의견을 모으고 우리 쪽을 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 시간에 다른 변수가 발생할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고 말입니다.”
“그래서 하는 말일세. 이제 흐름을 보건대 굵직굵직한 세력들은 너나할 것 없이 몰려들 것이네. 하지만 정파는 마도와 달리 서로의 손을 잡기가 수월하지. 그것을 노린 그들이 어떠한 변수를 발생시킬지, 그것에 대비하자는 말일세.”
사정화는 그들의 의견을 취합했다.
“우리도 그것에 대비하여 혈사교와 공동노선을 펼치자는 말이야?”
“그렇습니다. 신중해야 함은 두말할 것도 없지만 일단 그들이 오면 운은 띄워놔야 할 듯 싶습니다. 현재 사천에서 본교를 제외한 가장 강력한 마도세력이 그들인 만큼 여기까지 온 이상 반목보다는 화합이 중요할 듯 보입니다.”
그 의견이 별로 마음에 안 드는 듯 정원이 끼여들었다.
“켈켈, 그렇게 되면 천마동의 신물(神物)을 사이좋게 나누자는 겐가? 어찌 천마대제님의 신물을 근본도 모르는 잡것들에게 나눠준다는 말인가!”
초무강은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이 다소 비웃음 적이어서 그는 재빨리 넘어가고자 대답을 해주었다.
“나눠주다니요. 그런 일은 당연히 없습니다. 그저 천마동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서로를 보호해주자는 말입니다. 아마 나눠 가지자는 말은 그쪽에서 먼저 믿지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천마의 무공이 현세의 무공들 보다 강하건 약하건 마교도들에겐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물론 더욱 강하면 반길만한 일이었지만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정통성의 존재가치를 확립할 수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였다.
비록 마교가 정통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오늘날까지 내려오며 암흑마교와 환마교는 마교 못지 않은 위세를 자랑하고 있었고, 반대로 정통마교가 아니었던 암흑마교와 환마교는 천마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는 증거가 부족했으므로 이번 천마동의 발굴은 다른 어느 세력들에게 양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행이 암흑마교는 동천 덕분에 천마삼해를 얻어 명분을 다소 세울 수 있었지만 환마교는 이렇다 할 천마의 유물이 없었으므로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상당히 힘든 상태라고 할 수 있었다.
“좋아. 혈사교에서 우리와 대치하게 되면 사자를 보내서 만남을 주선해봐. 중대한 일이니 만큼 내가 나서서 이야기를 해볼 테니까.”
이곳에 그녀가 없었다면 면담은 초무강의 몫이었지만 생사를 좌지우지하는 협상에 우두머리가 뒤에서 거드름을 피운다면 상대 쪽에서 기분이 좋을 리가 만무했다.
그러나 아직 여지가 있는 것이 상대 세력의 최고수장이 누구냐에 따라서 사정화가 나서도 될지 아닐지를 결정할 수 있었다. 그래서 초무강은 사정화의 안전이 최우선이었으므로 되도록 혈사교의 통솔자가 자신과 비슷한 직위였으면 하는 바람을 가졌다.
‘음! 이 몸이 가만히 앉아 계셔도 정화와 아랫것들이 잘 알아서 하는구나! 역시 세상은 이 몸을 중심으로 돌아가는가?’
그 상황에서 헛생각이나 하고 있던 동천은 밖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오자 드디어 혈사교가 왔구나, 하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러나 들어올 때는 마음 대로였지만 나갈 때는 사정화의 허락을 구해야만 했다. 그래서 그는 참았다.
“왔군. 어느 정도의 위세를 부리나 한번 살펴 봐야할 테니까 너희들도 나가봐.”
“존명!”
“옛! 아가씨!”
‘앗싸뵤!’
남들은 긴장도 조금 하는데 전혀 그런 것이 없던 동천은 튀지 않게 천천히 걸어나갔다. 밖의 상황은 암흑마교도들이 인(人)의 장막을 치고 있어서 그냥은 살펴보기 힘들었고, 앞으로 나아가 틈새를 엿보거나 뒤쪽으로 물러서 경사진 곳으로 올라가야만 할 듯 싶었다. 동천은 혹시 모를 위험 때문에 뒤쪽을 택했다.
“음, 여기면 될라나? 뭐 잘 보이면 됐지!”
“주인니임! 하아, 하아! 혼자 가시면 어떻게 해요!”
회의장에서 동천이 나오는 것만 기다리고 있었던 듯 소연과 화정이가 바로 뒤쫓아왔다. 동천은 소연에게 물었다.
“그거 뛰어왔는데 숨 차냐?”
“아, 그게. 주인님을 기다리는데 갑자기 혈사교의 엄청난 무리가 와서 긴장을 좀……. 호호호!”
쑥스러운 웃음으로 얼버무리는 소연을 보자니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와락 끌어 안아주고 싶었다. 그러나 보는 눈들이 너무 많아서 그는 참았다. 그래도 그는 은근슬쩍 그녀의 허리를 자신의 옆쪽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너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몸이 지켜줄 테니까 괜히 겁먹지 말고 그냥 즐겨. 저놈들 쪽수만 많았지 다 핫바지들이거든.”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오른 소연은 그래도 싫진 않은 듯 고개를 푹 숙이며 모기소리처럼 작게 대답했다.
“아이, 몰라요. 남들이 봐요.”
“괜찮아. 이 정도인데 뭘 어때? 막말로 우리가 불륜관계야?”
“그, 그래도.”
그때 화정이는 옆에서 뭐 하는 짓들인가 유심히 살펴보다가 좋은 일 같자 자신도 소연이처럼 허리에 손을 올려달라면서 반대쪽 빈자리를 꿰어찼다. 동천은 돈 드는 일도 아니고, 되려 즐거운 일이었기에 양손에 꽃을 쥐고 느긋하게 전방의 상황을 감상했다.
서로 대표인 듯한 사람들을 내보내 중간 지점에서 이야기를 나누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는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그리곤 혈사교와 이야기를 나눈 사내가 사정화의 앞까지 달려가 부복하더니 짤막하게 보고를 올리는 것 같았다.
고개를 끄덕인 사정화는 무언가 생각하는 듯 하더니 초무강과 이야기를 나눈 후 그와 함께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그것을 본 동천은 생각했다.
“어? 그러고 보니, 협정과정을 보려면 바로 옆에 있다가 따라갔어야 했는데 내가 왜 여기까지 와서 무언극이나 보고 있었던 거지?”
화정이가 물었다.
“동천, 무언극(無言劇)이 뭐야?”
동천은 대답했다.
“나중에 시간 나면 소연에게 물어봐.”
알려줄 수 있었음에도 한창 눈으로 사정화의 움직임을 따라가는 중이어서 그런지 손쉽게 소연에게 떠넘겼다. 그래서 화정이는 소연을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큰 주인을 따라 앞을 보기에 정신이 없는지라 볼을 약간 부풀리며 삐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기에 그냥 포기하고 전방을 바라보았다.
“소연아, 좀더 앞으로 갈까? 위험은 없어 보이는데.”
가고 싶기는 했지만 주인님의 말마따나 앞으로 가게 된다면 오붓한 친밀감이 사라질 것만 같아 고개를 내저었다.
“여기나 거기나 마찬가지일 것 같아서 싫어요. 그리고 주인님은 뛰어난 내공 덕분에 시야가 넓으셔서 여기나 저기나 마찬가지잖아요? 그러니까 그냥 여기에서 봐요.”
자신의 능력을 띄워주는 소연의 말솜씨에 동천은 기분이 좋으면서도 내심 찜찜했다. 여기에서 보자니 한계가 있었고, 최대한 가까이 가자니 허접한 내공을 지닌 인간으로 전락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결국, 남는 것을 택한 그는 혈사교 측에서 나온 젊은 사내가 급조된 자리에 앉아 사정화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멀뚱히 지켜봐야만 했다.
“뭐라는 겨…….”
어지간히 답답했나 보다. 그러나 의외로 전혀 뜻하지 않은 곳에서 해결사가 등장했다.
“동천, 뭐라는 지 몰라? 내가 말해 줘?”
순간 동천과 소연의 고개가 화정이에게로 홱 돌려졌다.
“뭐? 너 혹시 저 먼 곳에서 까대는 소리가 다 들려?”
화정이는 히히 웃고 말했다.
“잘 들리는 건 아니고, 아주 작게는 들려. 집중하면 그럭저럭 들을 만해.”
“세상에!”
놀란 소연이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화정이를 바라보았다. 여기에서 저곳 까지는 적어도 60장(120M)정도의 거리인데, 정적이 흐르는 것도 아니고 지켜보는 자들의 소음이 방해되는 자리에서 사정화가 말하는 소리를 들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너 그 말 정말이지?”
“그러엄~! 쟤네들 소리 다 들린다니까?”
“우씨, 아니기만 했단 봐라! 그럼 지금 뭐라고 대화를 나누는지 그대로 읊어 봐!”
믿을 수 없다는 눈초리들 속에서도 당당했던 화정이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 후 귀를 기울이는 시늉을 하면서 떠듬떠듬 말문을 열었다.
“에에, 그러니까. 그렇게 생각하진 않아요. 그리고 또오~ 하지만 모르는 것입니다. 에 또오~ 그래서 협상은 결렬인가요? 그러니까 쟤가 또오~”
“또 하고 친구냐? 또는 빼고 해!”
알려줘도 화를 내는 동천을 이상하다는 얼굴로 바라본 화정이는 그녀와 눈이 마주친 동천이 품속에서 육포 한 덩어리를 꺼내들자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 나갔다.
“……습니다. 엄밀히 따지면 마도라는 그늘 아래의 같은 공동체인데 이런 때일수록 서로 돕는 것이 예의이지요. 그럼 그렇게 결정하기로 하죠. 하 하, 너무 잘 성사되어 불안하기는 하지만 뭐 좋습니다!”
화정이는 착하게도 억양까지 잘 넣어주며 중계를 했다. 남자 목소리까지 따라하려고 해서 듣기에 좀 그랬지만 누가 어떤 말을 하는 중인지는 확실히 알 수 있어서 좋았다고나 할까?
“웅, 동천. 이제 말 안 하고 그냥 가는데 더 해야해?”
동천은 들으나 마나한 상황이나 마찬가지이자 괜히 신경질을 냈다.
“에이, 젠장! 앞의 내용을 들었어야 했는데! 그리고 너는 그런 거 들리면 진작에 알려줬어야지!”
화정이는 육포가 손안에 들어오자 먹는데 정신이 팔려서 건성으로 대답했다.
“얌냠, 미안해 동천. 다음부터는 알려줄 테니까 화 내지마.”
“이런 씨…, 가 아니라 뭔 소리를 했는지 가서 들어봐야겠지? 너희는 천천히 내려와!”
빠른 속도로 회의장으로 달려간 동천은 그곳에서 혈사교의 소교주와 나눈 대화 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 대충 요약하자면 사전 협약도 없이 급작스럽게 의견을 조율하는 만큼 너무 가까이 주둔하는 것은 피하고, 대신에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상대방이 위험을 요청할 때 도와주기로 했다고 했다. 오련의 문제는 그들이 지나가든 말든 알아서 피해갈 수 있도록 길목을 터주기로 했고 말이다.
‘젠장, 겨우 그거 이야기하려고 그렇게 시간 잡아먹었냐?’
다 듣고 난 동천의 소감이었다.
스슥!
한 무리의 사내들이 어두운 밤을 타고 산길을 뛰어가는 중이었다. 기초와 훈련이 탄탄한 자들인 듯 어지간해서는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한참을 경공을 사용해 움직이던 사내들은 전방에서 아지랑이처럼 불빛이 일렁거리자 선두의 사내가 손을 들어 멈추라는 신호를 보냈다.
“저곳이 맞는가?”
선두의 사내가 뒤쪽의 수하에게 묻자 복면을 쓴 사내들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정보가 맞다면 틀림없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선두의 사내는 비장한 어조로 말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암흑마교다! 일단 발각되면 바로 피신하고, 포위되거나 가능성이 없어 보이면 가차없이 독단을 깨물어야 한다! 제군들, 알겠는가?”
“옛!”
“물론입니다!”
복면 안에서 빛나는 눈동자들은 추호의 흔들림도 없었다. 만족의 웃음을 슬그머니 떠올린 선두의 사내는 수하들에게서 등을 돌리며 전방을 바라보았다. 그는 가볍게 몸을 띄우며 짧게 명령했다.
“가자!”
스스슥!
미리 침투하는 작전이 짜여져 있었던 듯 두 무리로 나뉜 복면인들은 반원을 그리며 암흑마교가 주둔한 곳으로 소리 없이 스며들었다.
서걱! 푹!
“으헉!”
“큭?”
여기저기에서 답답한 신음소리들이 울려 퍼졌다. 그러나 자고있는 사람들이 대다수여서 밖에서부터 야금야금 좁혀들자 의외로 적들의 침입을 늦게 알아챘다. 하지만 침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고 여기저기에서 적들의 기습을 막아내는 보초들이 하나둘씩 늘어났다.
“헉? 적이다! 적이 침입했다!”
복면인들 중 한 명이 그 시점에서 바로 외쳤다.
“후퇴한다!”
명령이 떨어지자 그들은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암흑마교에서는 즉각적인 반격에 나섰지만 워낙 적들의 도주가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깔끔했는지라 그들이 뒤쫓기에는 상당한 거리 차이가 벌어지고야 말았다. 하는 수 없이 암흑마교는 추적을 포기했고 밖으로 나와 상황을 주시하던 사정화는 보고를 받았다.
“의문의 적들이 침입하여 살인을 저질렀으나 곧 발각되어 도주를 했습니다!”
사정화는 물었다.
“우리측 피해는?”
“자세한 사항은 약간의 시간이 더 필요하지만 대략 10명 안팎인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쫓아. 그리고 잡아와.”
보고하던 사내는 약간 당황한 얼굴로 난감함을 표시했다.
“하오나 지금은 밤이고 적들은 이미 숨어들었습니다. 숫자도 상당한지라 되려 역공을 당하면 피해가 만만치 않을…….”
“잡아와.”
“조, 존명!”
보고자는 서둘러 자리에서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