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678화
서장(序章).
필요한 것들이 하나 둘 갖춰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기나긴 시간과 기나긴 어둠을 지나, 밝은 빛으로 나아갈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후후, 이 어찌 즐겁지 아니할까?
하늘의 도리(道理)란 항상 그러하다.
무언가를 얻는다면 무언가는 잃게 되는 것이 세상사 당연한 이치…….
아아! 얻는 것은 확실하건만 잃는 것을 알지 못하매, 하늘의 공정함이 너무도 야속하구나!
후후…, 그러나 얻는 것에는 변함이 없음이리니, 일단은 마음 편하게 웃어 볼 예정이로다.
잠정적인 합의(合意).
촤아악!
차가운 물이 엉망진창인 몰골의 사내에게 쏟아졌다. 한눈에 보아도 고문을 받고 있는 듯 했으며 인사불성인 얼굴을 보건대 이렇게 깨워서는 정신을 차릴 것 같지도 않아 보였다.
“제기럴, 이거 이러다 뒈지는 거 아냐?”
작달만한 체구에 듬성듬성 보이는 얼굴의 곰보자국으로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인상을 찌푸리게 할 용모를 지닌 사내는 벌써 3통의 물을 퍼부었는데도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는 눈앞의 사내를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하긴 뭐 잡혀 왔을 때부터 이랬으니까 여태까지 살아있다는 게 용치. 킁!”
누가 들어주는 사람도 없건만 이 사내는 고문한 자신의 잘못은 터럭만큼도 없다는 듯 눈앞에서 인사불성인 사내의 현재 상태를 회피했다.
펄럭!
그때 고문자의 뒤쪽에서 천이 걷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정화였다.
“헛, 아가씨를 뵙습니다!”
화들짝 놀란 사내는 급히 무릎을 꿇었다. 그는 혹시나 자신이 중얼거렸던 말을 들었던 것은 아닐까 조마조마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나 사정화는 가타부타 말없이 거의 초죽음이 된 적도를 바라 볼 뿐이었다.
“알아낸 것은?”
마침내 그녀의 입이 열리자 고문을 담당한 사내는 차라리 침묵할 때가 더 좋았다 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름대로 한다고 노력했는데 정작 알아낸 것은 전무했기 때문이었다.
“그, 그게…….”
“없어?”
“죽여주십시오!”
마도인들 사이에서는 죽여달라는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되었다. 그러다가 정말로 죽는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도인이라고 다 손속이 잔인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잔인해야할 때에는 충분히 잔인한 자들이 그들이었지만 그들도 때와 장소, 그리고 상황을 봐가면서 잔인한 자들이 대다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기분 내키는 대로 아랫것들을 살해한다면 그 누가 자발적으로 수하가 되길 자처할 것이며 어느 세력이 번창해 나갈 수 있겠는가 말이다.
“깨워봐.”
“예, 옛! 아가씨!”
그녀의 명령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고문자는 의식이 불명인 사내의 얼굴에 물을 끼얹고 뺨을 때리며 경혈을 자극하기를 수 차례 반복한 뒤에야 겨우 상대의 눈을 뜨게 만들 수 있었다.
“으으!”
의식불명이었던 사내가 지극한 고통과 함께 깨어나자 무심한 눈길로 바라보던 사정화는 형식적인 물음을 꺼내들었다.
“네 이름은?”
“으음…….”
“네 소속은?”
“으으으…….”
일방적인 질문이 두어 차례 이어지자 사정화는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상대가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 것이 대답을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않아 비몽사몽간에 신음만 흘리는 것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눈까지 뜬 상태였지만 알고 보면 무의식의 늪 속에서 겨우 얼굴만 빠져 나온 상황이라고나 할까? 여하튼 이 정도면 대화 자체가 이루어질 리 만무했다. 그것을 눈치 챈 사정화는 시선을 돌려 전전긍긍하는 고문자를 바라보았다.
“너, 일단 살려 놔. 다음에 와서도 지금과 다를 바가 없다면 네가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명심하고.”
“며, 명을 받듭니다!”
기겁을 한 고문자는 후들후들 다리를 떨며 허리를 숙였다. 밖으로 나온 사정화는 짙은 혈향이 가시자 가볍게 공기를 들이마신 뒤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밖에서 대기 중이던 호위대와 정원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사정화는 혼잣말하듯 말했다.
“혈사교에서도 같은 일을 당했다고?”
당연하다는 듯 정원이 대꾸해주었다.
“예, 아가씨. 켈켈, 우리와는 다르게 녀석들을 놓쳤다고 합니다. 꼬리를 잡았어도 전부 자결을 하는 바람에 배후를 캘 수 없었다고 합니다. 켈켈켈.”
“의심 가는 쪽은 없고?”
“켈켈, 그놈들 내색은 안 했지만 처음에는 본교도 용의 선상에 놓은 듯 보였으나 같이 피해를 봤다는 점과 습격자까지 한 놈 잡아들였다는 것 때문에, 의심을 접고 잡은 놈에게 상당히 관심을 보이는 눈치였습니다.”
그 순간, 잠시 자리에서 멈춘 사정화는 정원을 마주보며 억양 없이 말했다.
“할멈, 의심이 가는 쪽은 없냐니까.”
정원은 잠시 흥이 나서 이야기하다가 잊어버렸던 듯 살짝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아! 켈켈, 죄송합니다 아가씨. 그들도 우리와 같이 정파 쪽을 의심하는 중입니다. 특히 무림맹을 말입니다. 아시다시피 그쪽으로 도망을 쳤거나 도망을 치다 꼬리가 잡혀 자결을 했으니 그렇게 의심할 만 하지요. 켈켈, 하지만 너무 뻔히 보이는 수작이라는 의견도 만만치 않아 섣부른 장담은 자제하자는 쪽이 중론입니다.”
사브락.
그녀가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하자 비단 옷자락이 부대끼며 슬며시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여전히 감정을 배제한 목소리로 물었다.
“오련의 가능성은?”
정원은 즉각 대답했다.
“혈사교와 연계하여 정찰과 경계를 공고히 한 관계로 그들 쪽에서 넘어온 놈들은 아니라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켈켈켈.”
사정화는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에 혈사교일 가능성도 점쳐 보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엔 그들이 얻는 것이 없었으므로 그저 가능성만 심중으로 떠올리고 말았다.
“그렇군. 그럼, 무림맹의 동태는 어떻지?”
“그거라면 어제와 같습니다. 켈켈, 철통같은 경계를 펴고 있습죠. 아무래도 본교 외에 혈사교까지 등장한 것이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그런 것으로 보아 괜히 본교와 혈사교를 건드렸을 리는 없다는 것이 노신의 개인적인 생각이기도 하고 말이지요.”
일리가 있자 사정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젯밤의 일은 무림맹의 성격과도 맞지 않았을 뿐더러 공연히 대치상태인 적들을 건드렸다가 전면전이라도 일어나면 그들로서도 양패구상(兩敗俱傷)을 생각해야만 하기 때문에 아직 보물조차 드러나지 않은 이런 상황에서는 바보가 아닌 이상 먼저 도발을 해올 리가 없었던 것이다.
“좋아. 의문의 적들도 멍청이들만 있는 것이 아닌 이상 경계가 강화된 며칠 동안은 추가적인 습격을 자제할 거야. 그렇다고 너무 안심하지는 말고, 오늘이라도 다시 올 수 있다는 생각으로 경계를 서게 해.”
“물론 입죠, 아가씨. 켈켈켈!”
정원의 대답을 끝으로 잠시 대화의 맥이 끊어졌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이럴 때 상대의 눈치를 보거나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가고자 노력을 했을 테지만 사정화의 성격을 익히 잘 알고 있었던 정원은 굳이 그런 노력을 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그저 물어보면 대답만 해주는 것이 제일 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뜻밖에도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정원이었다.
“헌데, 약소전주의 실력이 그렇게 일취월장(日就月將)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아가씨. 켈켈켈.”
정원은 잡아온 녀석이 누구일까 생각하다가 문득 동천의 활약이 떠올랐기에 물어본 것이었다. 사정화는 그녀를 힐끔 바라보다가 다시 시선을 원위치 시키며 입을 열었다.
“할멈은 동천을 너무 낮게 보는 경향이 있어. 물론 어젯밤의 일은 내가 생각하기에도 놀랍고 칭찬해줄 만한 일이었지만 동천의 실력은 이미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 있지. 생각이 모자라고 경박한 것이 여전히 문제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약소전주의 지위에 있는 녀석을 너무 무시하는 것은 문제가 있으니 고치도록 해. 알았어?”
정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가씨. 노신이야 약소전주가 어젯밤처럼만 사내답고 늠름하다면 충분히 신분에 맞게 대우해 줄 용의가 있습지요. 켈켈켈.”
얼핏 듣기로는 알겠다고 하는 것 같았지만 실상은 역의 성격을 보이는 동천이라면 어느 정도 수긍을 하겠지만 평소에는 그렇지 않으니 별로 내키지가 않다는 말이었다.
그런 것을 모를 리 없었던 사정화.
그러나 그녀는 추가적인 말을 아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평상시의 동천은 쉽게 보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잠재된 성격이라던 차분한 성격의 동천은 아무리 그녀라 할지라도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진중한 기도가 느껴졌다.
그런 동천을 대하는 그녀의 솔직한 감정은 호승심(好勝心) 그 자체!
마치, 평생의 호적수를 대하는 듯한 전율과 기쁨이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서부터 회오리처럼 몰아쳤다. 들불처럼 번지는 불길은 아무리 태워도 모자란다는 듯 끊임없이 그녀를 자극하고 있었다. 어서 검을 빼들고 서로의 실력을 가늠해 보라는 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