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68화
생각을 마친 동천은 후다닥! 일어나서 다시 밖으로 나갔다. 때마침 뒤쫓아오던 소연을 중간쯤에서 만난 동천은 소연의 손을 잡고 다시 자신의 방으로 끌고 왔다.
“좀.. 천천히 가요.. 주인님…”
“이년아! 내가 지금 그런 거나 생각하고 있을 여유가 어디 있어? 나는 지금 뭐가 뭔지 도대체가 모르겠단 말야! 잔말 말고.. 휴.. 다 왔다. 헥헥… 그 새끼가 안 와서 편히 쉬나 했더니, 오히려 더욱더 힘들어졌잖아? 제길…”
동천의 투덜거림에 눈치만 보고 있던 소연은 괜히 먼저 말을 꺼냈다간 혼쭐이 날지도 몰랐기 때문에, 그저 잠자코 동천이 하는 짓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이윽고, 동천이 말을 꺼냈다.
“소연아. 저기 바닥에 앉아있는 화정이한테 뭐라도 시켜봐!”
소연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 화정이? 일어나봐.”
소연의 말에 잠시 동천을 쳐다보던 화정이는 곧이어 일어섰다. 그걸 본 동천은 자연히 인상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아닐 거라고 그렇게 믿었는데…. 동천은 침중한 안색으로 다시 소연에게 말했다.
“다른 것도 시켜봐..”
‘어휴.. 괜히 말했나? 주인님의 표정을 보니, 내가 말을 잘못 꺼낸 것 같아…’
곁눈질로 동천을 살펴보던 소연은 잠시 후 동천이 자신을 향해 말없이 눈깔을 부라리자 기겁을 하며 다시 명령했다.
“야.. 야! 도.. 돌아봐! 됐어. 그리고.. 손을 올려봐. 내려봐. 다시 올려봐. 응? 이봐, 화정아. 올려보라니까? 야…”
소연의 말에 그대로 따라하는 화정이의 모습에 점점 화가 나서 윽박지르려던 동천은 화정이가 자신을 쳐다보며 움직임을 멈추자 의아해했다.
“쟤 왜 그래?”
화정이의 이상한 행동에 동천과 마찬가지로 똑같이 놀란 소연이 알 턱이 없었다.
“저도 모르겠는데요..? 화정아. 손을 다시 올려보라니까?”
그래도 화정이가 동천을 바라보며 움직이질 앉자 그제서야 뭔가를 느낀 동천은 이번에는 자신이 명령했다.
“화정아. 손을 올려봐!”
화정이는 그제서야 손을 올렸다.
“우히히히! 그럴 줄 알았다구! 화정이는 내 말만 듣게 되어있는데, 쟤가 네 말을 듣겠어? 아이구.. 우리 화정이 예쁘다… 야! 이럴 때는 네가 키가 크니까 고개를 숙이는 거야! 그래, 그래! 너, 진짜로 착하다.”
화정이가 고개를 숙이자 기분이 좋아진 동천은 화정이의 이마가 벗겨질 정도로 힘차게 쓰다듬어 주었다.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소연은 그럴 리가 없는데..? 하며, 다시 명령을 내렸다.
“화정아.. 상체를 일으켜봐.”
그러자 다시 화정이가 상체를 들어 올리는 게 아닌가? 이에, 진짜로 열 받은 동천은 부실 강시가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어어? 이게 또 소연이 말을 듣네?”
소연은 그것 보라는 식으로 웃었다.
“호호! 어때요? 제 말이 맞죠?”
“이년아!! 맞긴 뭘 맞아? 맞고 싶다고? 너 맞아볼래?”
자신의 주인이 이 정도로 화를 내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소연은 기가 죽어서 거의 울듯한 표정으로 울먹이며 말했다.
“아.. 아니요… 잘못했어요.. 오….”
그런, 소연을 잠시 노려보던 동천은 화정이에게 고개를 획! 돌렸다. 한대 쥐어박으려던 동천은 아랫입술을 악다물고, 끄응… 소리를 내며 주먹을 풀었다. 자신을 향해 싱글거리며 웃고 있는 화정이의 모습에 차마 주먹을 휘두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동천은 한숨 섞인 말투로 화정이에게 말했다.
“그래.. 네가 뭐를 알겠냐… 너, 네 자리로 가서 꼼짝 말고 있어라. 아아.. 나의 부덕(不德)함 때문인가? 하필이면 나에게 부실 강시라니.. 하늘님… 너무하십니다요.. 하늘님.. 뭐라고 말씀 좀 해보십시오. 하늘님.. 너, 죽어 볼래요? 하늘님.. 그러고 싶진 않겠죠? 이.. 씨발놈아!! 내가 뭐를 그렇게 잘못했냐? 엉? 이 씹새야!!!”
쾅! 빠박-! 우당탕탕….
그 말을 끝으로 돌아버린 동천은 주위의 기물(器物)들을 발로 후려차기 시작했다. 넘어지고, 부서지고.. 아주 난리가 아니었다. 자신만의 충실한 부하가 생겼다고 좋아했던 동천에게 아무에게나 말을 듣는 부실 강시의 존재는 정말로 열 받는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런 동천의 행동에 옆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던 소연은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뒤에서 얼른 동천의 허리를 껴안았다. 어떻게 해서든 주인의 행동을 말려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주.. 주인님… 그만, 하세요.. 이러시면, 안 돼요…”
그러나 그런 소연의 행동은 별 효험을 거두지 못했다. 동천의 힘이 어찌나 셌던지 허리에 묶은 푸대자루처럼 질질.. 끌려 다녔다.
“우아악!! 다.. 죽여버리겠어!”
한참을 끌려다니던 소연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뒤 손을 놓고, 얼른 역천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뭐? 내 제자가 미쳤다고?”
동천을 거의 미친놈으로 설명해준 소연은 다급한 표정으로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미쳐있다는 게 틀린 말도 아니었다.
“예.. 흑흑.. 지금 제정신이 아니시라구요.. 빨리.. 빨리 가보세요. 주인님을 진정시킬 수 있는 것은 전주님밖에 없으시다구요…”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는 것을 느낀 역천은 소연의 말을 끝으로 얼른 달려나갔다. 마침내 동천의 방에 도착한 역천은 완전히 개판이 된 방안의 풍경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동천은 그런 방 한가운데 서 있었다.
“제자야… 이게 무슨 일이냐?”
역천이 보기에 등을 돌리고 있던 동천은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사부의 물음에 넋이 빠진 얼굴로 고개를 돌려 힘없이 말했다.
“사부님….”
자신이 보기에도 심상치 않은 제자의 상태에 역천은 최대한으로 부드럽게 말해주었다. 미친놈에게는 신경 쓰이는 말투가 금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그래! 말해보거라…”
역천의 그런 말투가 효과를 거두었는지 동천은 별다른 흥분을 보이지 않고, 그저 조용하고 침울한 음성으로 말했다.
“제 강시가요… 부실 강시예요…..”
“뭐? 그게!… 무슨 말이냐..?”
알아듣게 설명해주지 못하는 제자의 말에 잠시 언성(言聲)을 높였던 역천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는 다시 소리를 죽여 물어보았다. 이에 자신의 설명이 너무 짧았다는 것을 눈치챈 동천은 그간에 있었던 일을 최대한으로 자세하게 설명해주었다.
“…. 그렇게 된 거예요. 소연이가 사부님께 뭐라고 떠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제 강시가 아무에게나 명령을 따라서 제가 잠시 침울해있었던 거예요..”
침울해서 집안의 상태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았다면, 그놈은 정밀 검사를 받아봐야겠지만 지금 상황이 상황인지라 역천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그래? 그럼, 어디.. 내가 한번 시켜볼까?”
동천은 그러라고 말해준 뒤, 멀찌감치 있던 화정이를 불렀다.
“화정아.. 이리 와봐.”
“엉? 화정이? 하하! 제자야. 벌써 이름을 지어줬느냐?”
침울해있던 동천은 그제서야 약간의 웃음을 띠었다. 동천은 자신의 옆으로 다가온 화정이를 바라보며 으쓱! 했다.
“예. 헤헤.. 이름 잘 지었죠? 쟤 이름이 동화정(冬華情)이에요.”
그러나 동천의 웃음과는 반대로 역천의 눈살은 살짝 찌푸려졌다.
“동화정? 무슨 기루(妓樓)이름 같다?”
역천의 찌푸림에 동천도 따라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흥분하면서 펄쩍! 뛰었다.
“예에? 무슨 소리예요? 어디가 기루 이름 같다는 거죠? 예?”
‘허허… 애새끼한테는 농담도 못하겠군….’
역천은 침착하라는 듯이 두 손을 아래위로 흔들어주었다. 물론, 제자가 지어준 이름을 칭찬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래.. 그래. 웃으라고 한 말이었다. 동화정이라고? 하하! 아주~! 좋구나.”
그제서야 동천이 흥분을 가라앉히자 역천의 시선은 제자에게서 강시에게로 옮겨졌다. 역천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화정이를 잠시 요리조리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흐음… 화정아. 고개를 돌려봐라.”
“…… .”
역천의 명령에도 화정이는 꼼짝도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역천을 마주보기만 했다. 이에 역천이 어떻게 된 거냐는 눈빛으로 동천을 쳐다봤다. 그러나 동천도 놀랍고 의아해서 고개만 도리도리 저었다. 제자에게서 별다른 대답을 듣지 못하자 역천은 고개를 갸웃! 하다가 다시 명령을 내렸다.
“화정아. 왼쪽 팔을 올려봐라…. 음… 싫으냐? 그럼, 오른쪽 팔을 올려도 된다. 그것도 싫으냐? 그렇다면, 왼쪽 다리를 들어봐라. 응? 그것도 싫다고? 흐음… 어쩔 수 없구나. 그럼, 마지막으로 오른쪽 다리를 들어 보려무나… 호오? 그것마저 싫다는 것이냐? 그렇다면…….”
사부의 행동에 더 이상 못 참겠는지 옆에서 동천이 끼어들었다.
“됐어요. 사부님.. 화정아. 내 쪽으로 몸을 돌려봐. 그래.. 잘했어. 그렇다면.. 폴짝! 뛰어올라봐. 오오! 잘 뛰어오르는구나?”
이를 옆에서 지켜보던 역천은 잠시 생각하는 것 같더니 제자와 강시를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
“제자야.. 아무한테나 말을 듣는다는 게 맞긴 맞는 거냐?”
동천은 멋쩍은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아요. 얘가요. 제 말도 듣고, 소연이 말도 듣고…… 사부님 말씀은 안 듣고… 다른 사람들은 모르고…. 그러고 보니, 헤헤! 저 이외에 사부님과 소연이 빼고는 화정이에게 말을 걸어본 사람이 없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