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683화
‘오오, 이거 정말 흥미진진해지는데?’
쥐 죽은 듯 상황을 지켜보며 앞으로 어떻게 될까, 주시하던 동천은 세력과 세력의 힘이 부딪힌다고 생각하자 벌써부터 짜릿한 긴장감이 온 몸을 감싸고도는 것 같은 흥분을 느꼈다.
집법당주인 혁필상이 나가고 나자 남은 사람들 또한 각자 맡은 바를 수행하기 위해서 하나 둘씩 일어서기 시작했고 동천도 괜히 남아 있다가 사정화에게 걸릴 까봐 그들과 함께 자연스럽게 걸어 나왔다.
‘상황을 봐서는 정파 쪽도 합의를 하는 수밖에는 없겠는걸? 뭐 그렇지 않더라도 일단 천마동만 열리면 그 안의 유물들은 다 이 몸의 것이지만 말야.’
꿈도 야무진 생각을 하며 자신의 막사에 도착한 동천은 자고 있는 화정이를 깨우라고 소연에게 말한 뒤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빨리 먹을 거나 챙겨! 이따가 간식으로 먹게!”
소연은 급한 듯 보이면서도 먹을 것을 잊지 않는 주인님의 준비성에 절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궁금한 것은 궁금한 것이었다.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정말 무슨 큰 일이 벌어졌나 보죠?”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던 동천은 손사래를 쳐가며 건성으로 대답해주었다.
“그렇게 큰 일은 아니고 천마동의 입구로 추정되는 곳이 발견 됐대.”
“예에? 정말요?”
화들짝 놀란 소연이 묻자 주먹밥도 챙겨야 하나 고민을 하던 동천은 살짝 인상을 구겼다.
“그럼, 정말이지. 지금 이 몸이 너하고 농담 따먹기나 하고 계시는 줄 아냐?”
찔끔한 소연은 서둘러 대답했다.
“그, 그럴 리가요. 호호, 저는 그냥 그렇다는 말이었어요. 아! 그 주먹밥 제가 싸들고 갈까요?”
먹는 것 이야기에 동천의 표정이 바로 풀렸다.
“험! 그럴래? 어쨌든 이제 챙길 것은 다 챙긴 듯 하니까 빨리 나가자. 싸움은 무식한 것들이나 하는 거니까 우린 그냥 뒤에서 구경만 하자구.”
“와아! 동천, 우리 놀러 가는 거야?”
화정이의 천진난만한 물음에 동천이 대꾸해주었다.
“이 몸만 놀러 가고 너는 일하러 가는 거야. 무슨 일이 벌어지면 니가 나서서 해결해야 하거든.”
그러자 화정이의 안색이 대번에 어두워졌다.
“히잉, 그럼 먹을 것은 동천만 먹어?”
아무리 애처로워 보여도 먹을 것 앞에서는 서로가 경쟁자에 불과했다.
동천은 전혀 흔들리지 않는 모습으로 대답했다.
“야, 작작 좀 먹어. 아까 그렇게 먹고도 또 먹고 싶어서 이제는 주인 것까지 넘보냐? 그러고도 니가 인간이야? 엉?”
“하지만 동천도 아까 나하고 똑 같이 먹었잖아. 히잉!”
“그게 똑 같냐? 그게 똑 같아? 그리고, 니가 아까 반 접시 더 먹은 거 모르냐? 이게 죽으려고 어디에서 감히 거짓말이지?”
애들도 아닌데 먹을 것 가지고 또 싸운다고 생각한 소연은 이쯤에서 자신이 중재를 시켜야할 필요성을 느꼈다.
“주인님, 아직 생각이 짧은 화정이가 한 말이니까 너그럽게 용서해주시고 어서 밖으로 나가요, 우리. 이러다가 정작 중요한 순간에 뒤쳐지면 어떻게 해요?”
그도 그렇자 동천은 재빨리 정신을 차렸다.
“아참, 그렇지? 빨리들 따라와. 아직 출동하진 않았지만 괜히 늦게 나가서 뒤쳐지면 곤란하니까.”
“예, 주인님. 가자, 화정아.”
“응! 가자!”
화정이의 입장에서 혼난 건 혼난 거고, 가는 건 가는 거였다. 앞서의 일은 바로 잊어버리기 때문에 뒤끝이 없었던 것이다.
“와아, 많다.”
넓은 공터에 모인 무사들을 보며 소연이 나직이 감탄사를 터트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무질서하게 움직여서 잘 몰랐는데 이렇게 질서 정연하게 늘어선 사람들을 보자 날카로운 기세와 함께 장엄함까지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마치 시골에서 갓 상경한 처녀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렸고, 옆에서 화정이도 따라서 두리번거렸기에 그녀들만 놓고 보자면 상당히 산만해져 보이는 상태였다.
그러나 다행이라면 다행히도 그녀들을 주시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름이 아니라 작은 단상 위에 올라선 혈각주 초무강이 간단한 행동강령과 주의 사항을 일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이 씨. 그냥 가자고 하면 될 거 가지고 더럽게 말 많네.”
그것도 못 참고 혼자서 투덜거린 동천은 화정이에게서 호연화를 빼앗아 가슴에 끌어안고 머리나 쓰다듬어주었다.
그러자 호연화가 꽤나 날카롭게 야옹 거렸지만 안타깝게도 도와줄 사람은 주위에 없었다.
“그런데 주인님. 혈각주님의 말씀도 다 끝난 상황인데 왜 안 떠나고 이렇게 계속 있는 거예요?”
궁금해진 소연이 묻자 마침 따분했던 동천은 친절하게 대답해주었다.
“아아, 그거? 그게 말이지. 지금 아가씨께서는 혈사교의 소교주(小敎主)인지 뭔지 하는 놈팽이 하고 이야기가 한창 중이시거든? 그게 잘 마무리되어야 계획했던 대로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 다들 그거 기다리느라고 계속 대기중인 거야. 이럴 때 일이 터지면 그저 아랫것들만 불쌍한 거지.”
“아! 그랬구나.”
그제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소연은 그 아랫것들 중에 주인님도 포함된 것이 아니냐는 말을 건네 보고 싶었지만 힘이 없는 관계로 그만두었다.
그러자 동천이 그녀에게 물었다.
“또 뭐 궁금한 거 없어?”
갑자기 친절해진 주인님을 빤히 바라보던 소연은 딱히 더 없자 고개를 내저으며 살풋이 웃어주었다.
“이젠 더 없어요, 헤헤.”
‘헤헤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쳇, 무료함을 달래려고 했더니 평소에는 귀찮게 계속 들러붙던 계집애가 정작 물어보랄 때는 더 이상 없다네? 하여간 아랫것들의 생각은 도통 이해할 수가 없다니까?’
소연도 별로 이해 받고 싶은 생각이 없었지만 아쉽게도 그녀는 동천의 불평을 눈치챌 수 없었다.
드디어 사정화가 나타나 움직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싸! 드디어 간다!”
긴장감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주인님을 보며 소연은 나름대로 대단하다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대범해서 저러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지만 정말 이런 상황에서는 그 누구보다 강심장이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화정아, 그만 두리번거리고 내 옆에 딱 붙어서 따라와. 알았지? 그러다 서로 떨어지면 큰일이니까.”
소연의 애정 어린 당부에 화정이는 활기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았어! 그치만 애들이 하도 많아서 보는 게 재밌지 뭐야?”
그 말이 귀에 거슬렸는지 동천은 뚱하니 한마디 내뱉었다.
“이따가 가보면 쟤들은 숫자도 아냐. 그런 거 가지고 신기해하지 말고, 소연이 말대로 서로 떨어지지 않게 조심하기나 해. 알았어?”
화정이는 언제나처럼 긍정적으로 대답해주었다.
“알았어. 지금은 꾹 참고 있다가 이따가 애들이 얼마나 많나 살펴볼게. 헤헤헤!”
숫자 열까지 세면 다행일 거라고 씨부렁거린 동천은 대규모로 이동하는 중간에 껴서 서둘러 목적지에 도착하기를 기원했다.
하지만 무림맹의 주도 하에 지켜지고 있는 천마동의 입구로 다가갈수록 암흑마교의 움직임은 눈에 띄게 느려졌다.
그도 그럴 것이 기습을 하자는 것이 아니었기에 상대가 자신들의 움직임을 확연히 파악할 수 있도록 배려 아닌 배려를 해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야 그쪽에서도 준비를 갖추고 마중을 나올 것이 아니겠는가.
“주인님, 저기!”
난데없이 소연이 가리킨 곳은 협곡이라고 보기엔 완만하게 이어진 반 협곡의 위쪽이었다.
그곳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명령만 떨어지면 언제라도 공격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춘 뒤 기세 등등하게 아래쪽의 암흑마교도들과 나란히 붙어서 따라온 혈사교도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