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685화
천마동으로…….
“컥?”
사람들의 틈에 파묻혀 군소후의 뒤를 조용히 따라가고 있던 동천이 난데없이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내색은 안 했지만 은근히 긴장을 하고 있던 마도의 무리들은 혹여 암습을 당한 게 아닌가 싶어 신속하게 사방으로 비산하며 소리쳤다.
“무슨 일이오!”
“누가 당한 것이오?”
“암흑마교 쪽에서 들렸소이다!”
복날에 개 떼가 흩어지듯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자리를 피한 사람들은 마지막에 들린 외침에 서둘러 암흑마교 쪽으로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러자 당황한 혁필상과 사전(四傳)의 당주들은 똥 씹은 얼굴로 동천을 바라보았다.
척 봐도 괜찮아 보이는데, 왜 멀쩡히 잘 가던 놈이 헛바람을 들이켰는지 도통 이해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동천은 자기가 안 그런 척 먼 산 보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 날씨 참 좋다.”
“…….”
어처구니가 없어진 혁필상과 당주들은 물어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을 직감하고 일단 한숨부터 내쉬었다.
저렇게 아닌 척 시치미를 떼고 있는데 여기에서 추궁해봤자(추궁이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집안 망신이 되는 형국이었으니, 결국 누군가는 나서서 죄를 뒤집어써야만 했던 것이다.
‘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녀석이 따라오게 될 줄 알았더라면 애초에 이 일을 맡겠다고 나서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했을 터인데……. 후우! 이제와 어쩔 수 없는 것이니 더 이상의 소란은 일으키지 않기를 바라는 수밖에.’
애써 좋은 쪽으로 생각한 혁필상은 현재 자신이 암흑마교를 대표하고 있었으므로 정중히 나서서 대답을 기다리는 다른 일행들에게 사과를 했다.
“허허, 긴장을 하다 보니 저희 쪽에서 사래가 걸려 실수를 한 모양입니다. 추후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주의를 강화할 것이니 가던 길을 계속 가도록 하십시다.”
이야기를 듣고 난 사람들은 기가 막혀 하면서 저걸 믿어야 하나 자못 의심스러운 눈길들을 보냈지만 결과적으로 암흑마교 쪽에서 부상을 당한 사람이 없었으므로 불편한 심기를 감춘 채 묵묵히 동의를 해주었다.
그러자 군소후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여러분, 다시 한번 말씀을 드리지만 기습은 절대로 없을 것이외다. 그럼 본인은 다시 길잡이를 하겠소이다.”
뭐가 그리 무서워서 피했냐는 말과 다름이 없자 마도의 거대문파들 답지 않게 지레 겁을 먹고 피신했던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자존심이 상하는 순간이었다.
사실 이들 중에 신분이 상당했던 고수들은 애초에 흠칫 놀랐을 망정 피할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군중심리라는 것이 있어서 하나가 튀자 자신들도 모르게 따라 튀었다가 망신 아닌 개망신을 당했던 것이었다.
그러니 더더욱 억울했던 그들의 구겨진 얼굴은 자연스레 암흑마교로 모였고 동천을 제외한 혁필상 등은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으로 애써 안면에 철판을 깔았다.
헌데, 이런 상황을 만들어 놓은 동천은 어째서 아까 그렇게 놀랐던 것일까?
이유는 간단했다.
오련에 생각이 미치자 크게 튀는 행동을 하지 않는 한 황룡세가에게는 들킬 염려가 없었는데 제갈세가에게는 튀지 않아도 자신의 얼굴을 알아볼 인간들이 꽤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동천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기겁을 할 수밖에…….
‘이런 씨! 거 더럽게들 우리 쪽만 쳐다보네? 아니, 막말로 확인도 안 해보고 튄 놈들이 병신이지 죄 없이 놀란 이 몸이 잘못이냐? 하여간 심성을 저따위로 처먹으니까 마도가 욕을 먹는 거야.’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에 잠시 생각을 분산시켰던 동천은 곧 이럴 때가 아니라는 생각에 다시금 심각하게 고민했다.
‘다른 인간들은 몰라도 제갈연하고 그의 오라비. 그리고 부진한 정도는 이 몸을 바로 알아 볼 텐데 어떻게 해야 그들의 눈에 띄지 않고 돌아갈 수 있을라나? 음, 그냥 갑자기 배가 아파서 돌아간다고 할까? 아냐. 배가 아파서 돌아왔다고 했다간 정화에게 배때기 밟혀서 죽을지도 몰라. 으으, 그렇다고 이대로 돌아 갔다간 무슨 변명을 해도 사단이 날 텐데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그때 동천의 뇌리에서 번쩍이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는 재빨리 혁필상에게 다가가 은근슬쩍 물었다.
“집법당주님, 혹시 죽립(竹笠)있습니까?”
혁필상은 이게 또 왜 이러나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상황에서 전혀 뜬금 없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그는 내심 조마조마해하며 대답해주었다.
“허허, 그런 것이 지금 있을 턱이 있겠소이까.”
그나마 기대를 걸었던 것이 없다고 하자 동천은 대뜸 실망하는 표정을 지었다.
“음, 그래요? 그런 것도 안 들고 다니시다니. 준비성이 부족하시군요.”
사돈 남 말한다고 생각한 혁필상은 그것을 떠나서 왜 지금 그런 게 필요했던 것인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쩐지 그는 물어 보고도 후회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궁금한 것은 또 못 참는 성격이었기에 지나가는 척 물어보았다.
“급하게 움직이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구려. 허허, 헌데 그것은 왜 갑자기?”
동천은 죽립도 없는 주제에 별걸 다 물어본다는 얼굴을 했지만 이내 표정을 풀고 대충 둘러댔다.
“아? 그게 말이지요. 제가 아무래도 어리다 보니 사람들이 외양만 판단하고 얕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미리 대비를 해놓고자 했던 것인데 없다고 하시니 그저 아쉬울 따름입니다.”
혁필상은 본교에서 협상의 주체는 자신이었는데 어린놈이 제 역량도 모르고 전면에 나설 것을 꿈꿨나 보다고 생각했다.
동천이 진실을 말할 수 없어서 둘러댄 것을 아직은 어린 철부지의 영웅심리로 착각했던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생각했던 것보단 무난한 대답이자 혁필상은 부드럽게 웃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허허, 그래서 갑자기 죽립을 찾았던 것이구려. 그리고 아까 전엔 그것을 염려하여 아차 싶었던 것이고. 하지만 전면에 나서는 것은 노부뿐이니 걱정하실 것 하나 없소이다. 허허허.”
‘니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이미 시큰둥해진 동천은 죽립이 없다는 늙은일 붙잡고 길게 이야기하고픈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대충 알겠다고 대답해주었는데, 잠시 후 그는 근처의 당주들에게도 차례로 죽립이 있냐고 물어서 혁필상의 심기를 건드렸다고 한다.
“과연 정파의 모든 내노라 하는 문파들이 모여있는 상태로군!”
장소량은 안쪽으로 들어가는 내내 길목과 요소 요소마다 진을 치고 있는 정파인들의 모습에 감탄하듯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렇다고 사천에 모여든 모든 문파와 협객들이 전부 무림맹의 그늘에 모여든 것은 아니었지만 어디의 어디하면 한번쯤은 들어봤을 만한 문파와 고수들은 거진 다 모여있다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마도이건 정도이건 배타적인 것은 마찬가지인데, 이럴 때엔 확실히 정파가 단합이 잘 됨을 느낄 수 있어.”
비록 속내는 제각각이고 가식적일지라도 적들의 단합된 모습에 그는 부러움을 느꼈다.
솔직히 단합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마도나 사파로서는 아직 정파에겐 무리였기 때문이다.
“그래봤자 몇몇 우두머리들을 빼 놓으면 오합지졸일 뿐입니다.”
우문자혜(宇文慈惠)가 옆에서 비위를 맞춰주고자 입을 열자 장소량은 가벼운 미소를 지어주며 입을 열었다.
“나를 위해주는 네 마음은 잘 알겠으나 그런 말을 너무 자주 듣게 되다보면 판단이 흐려질 수가 있느니 앞으로는 자제하도록 하거라.”
질책 아닌 질책에 찔끔한 그녀는 급히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예, 예에. 소공.”
그때 어쩔 줄 몰라하는 우문자혜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날카로워 졌다.
이유인즉, 암흑마교 쪽에서 젊은 놈이 은근슬쩍 소공의 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아니 너는……!”
동천은 그녀의 말이 채 이어지기 전에 아는 척 그녀를 상대했다.
“아? 그때도 입이 걸걸하더니 아직까지도 입이 걸걸한 소저구려. 만나서 반갑습니다. 사실 서로의 신분을 놓고 따지자면 제게 함부로 너라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만 그때의 인연도 있고 하니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아참? 반갑습니다, 장 소교주님. 진작에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공연히 바쁘신 분께 폐가 될까봐 그 동안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이, 이이!”
소공의 앞에서 민망한 꼴을 보인 우문자혜가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며 어쩔 줄 몰라하자 장소량은 곤궁에 빠진 그녀를 도와줄 겸 바로 말을 받아주었다.
“하하, 괜찮소이다. 그래, 그때 같이 있었던 화정이란 아이도 잘 있소이까?”
순간 눈빛이 기이해진 동천은 생각했다.
‘어? 이 시키 봐라? 혹시 화정이에게 흑심을 품고 있었던 거 아냐?’
의처증 기질은 절대(?) 없었지만 동천은 남자의 직감으로 상대가 화정이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포착해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당시에 도연도 있고 살각의 좌봉공도 있었는데 굳이 화정이의 안부만 물을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말이다.
“하하, 화정이야 잘 있습니다. 그리고 도연도 잘 있고 살각의 좌봉공이신 염화수(炎火輸)님께서도 무탈하게 계신답니다. 또한 오행은살수(五行隱殺手)들과 잔심마도(殘心魔刀) 양위(陽威)도 잘 있지요.”
장소량은 그 당시에 화정이의 뛰어난 무공실력을 눈여겨보았던 터라 제일 먼저 떠올라 그저 안부를 물었을 뿐인데, 상대가 기억에도 없는 별 잡다한 사람들까지 들먹이자 내심 난감해했다.
그러나 무안하지 않게끔 그러냐고 대답해주었다.
“그런데 약소전주께서도 같이 가시는 것을 보니 귀교에서 상당한 신임을 받고 있는가 보구려.”
“뭐 그렇지요. 인재를 기용함에 있어 나이를 따져서야 되겠습니까. 하하하!”
장소량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동천은 언제 둘 사이를 의심했냐는 듯 환하게 웃었다.
옆에서 지켜보는 우문자혜로서는 지극히 짜증이 났지만 말이다.
여하튼 그렇게 신변잡기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던 장소량은 물었다.
“생각 같아서는 더 오래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곧 당도할 듯 보이니, 약 소전주께서도 일행에 되돌아가시는 것이 좋겠소.”
아닌게 아니라 협곡의 끝이 보이고 있었다.
길목 자체가 좌측으로 둥근 곡선을 이루고 있어서 끝이 보이지 않았던 것인데 이제야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목적이 있어서 접근했던 동천은 서둘러 말했다.
“아, 벌써 도착했군요! 하하, 그래야지요. 헌데… 혹시 일행 분들 중에 죽립을 소지하고 계신 분이 있습니까?”
아까 근처에서 혁필상과의 대화를 들었던 장소량은 그제야 상대가 자신에게 찾아온 용건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는 하는 짓이 나름대로 귀여운 동천의 물음에 가볍게 웃으며 뒤쪽의 엽파(燁把)를 바라보았다.
“자네 혹시 죽립 있는가?”
엽파는 공손히 대답했다.
“속하와 다른 이들은 없사오나 저기 환마교의 일행 분들 중 한 분은 쓰고 계십니다.”
말은 장소량에게 했지만 죽립을 구하러 왔다면 장소가 틀렸으니, 더 늦기 전에 환마교 쪽으로 가보라는 이야기나 다름없었다.
그제야 환마교의 일행을 눈여겨보게 된 동천은 관덕청의 수하로 보이는 한 명이 죽립을 쓰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 젠장! 그런 건 진작에 가르쳐 줬어야지 잡놈아! 하여간 상관이나 수하나 정신이 다 빠져 가지고……. 에이! 괜히 여기 와서 심력만 낭비했잖아?’
속에서는 열불이 났지만 그것을 겉으로 드러낼 수 없었던 동천은 좋은 정보에 감사한다고 말한 뒤 배짱 좋게도 환마교 쪽으로 신형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