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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695화


더군다나 죽립을 쓰고 있어서 살짝 치켜든 챙 아래로 비추어진 눈빛이었다.

그것만으론 자신만 바라보았다고 하기에는 약간 억지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고 이제 함께 힘을 모아야 할 처지이니 내 옆에 꼭 붙어 다니시게. 상당히 위험한 상황이 연출될 것 같으니 말일세.”

의미심장한 눈빛과 대화내용에 동천은 절로 이맛살이 찌푸려지는 것을 느꼈지만 의문을 잠시 뒤로 미룬 뒤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잘 이끌어주십시오.”

‘이끌어주다가 뒈지면 더 좋고.’

동천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냉현은 희미하게 미소했다.

그것을 본 동천은 상당히 기분 나쁜 느낌이 들었지만 원체 냉현만 보면 기분이 더러웠기에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다.

그렇게 개인적인 잡담들이 오고가는 가운데 강소홍이 소연에게 은근슬쩍 다가와 말을 건넸다.

“약소전주께서 천마동에 들어가신다 하니 벌써부터 걱정이 되는 모양이로구나.”

자신의 속내를 들킨 것 같자 얼굴이 붉어진 소연은 고개를 수그리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아, 아니, 그런 게 아니오라…….”

강소홍은 트집을 잡으려는 게 아니라는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소연을 안심시켰다.

“내 어찌 너의 마음을 모르겠느냐. 여기 문영이도 너와 같은 마음이라는 데.”

“아!”

“그래서 말인데 내가 다녀올 동안 문영이와 같이 있어주겠니?”

뜻밖의 제의에 놀란 소연은 살짝 벌어진 입술을 한 손으로 가리며 물었다.

“예? 제가요?”

강소홍은 재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까운 사람 중에 믿고 맡길 만한 사람이 없어서 너에게 부탁하는 거야. 또 네가 같은 여자이고 이해심이 많으니까 둘이서 잘 지낼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기도 하고.”

자신을 좋게 봐주어서 고맙긴 했지만 소연은 부담이 되는지 섣불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하지만 소녀가 어찌 감히…….”

자신의 부탁을 거절하는 소연의 모습을 보고도 강소홍은 전혀 불쾌해하지 않는 얼굴로 말했다.

“같은 시녀인데 어려울 것이 뭐 있겠니? 문영이도 착하니까 걱정하지 말고 말벗이나 되어 줘. 그래봤자 하루에서 이틀 정도잖아.”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거절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아니, 거절할 위치에 있는 그녀도 아니었다.

대답하기에 앞서 주인님 쪽을 바라본 소연은 어느새 이야기를 마치고 자신을 바라보는 주인님과 잠시 눈빛을 교환했다.

‘어떻게 해요, 주인님~.’

간절한 소연의 외침에 동천의 눈빛은 이렇게 대답하는 듯 보였다.

‘네 일 정도는 네가 알아서 해결하거라.’

주인으로서 상당히 무책임한 눈빛이었지만 엄밀히 따지면 그것도 명령이었기에 마음을 정한 그녀는 강소홍의 부탁을 받아드렸다.

“알겠습니다. 문영님은 제가 함께 있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강소홍은 재미있다는 듯 가볍게 웃었다.

“호호, 같은 시비인 처지에 문영님이라고 할 것까진 없어. 문영이가 올해로 17세니까……, 네가 지금 몇 살이지?”

자신의 나이를 말하기가 쑥스러웠는지 소연은 살짝 말을 더듬었다.

“여, 열 여덟 살이에요.”

“그래? 1살 더 많네? 그럼 네가 언니니까 잘 대해 줘.”

“예에…, 소문주님.”

일단 대답은 하고 보았지만 소연은 체질상 급속도로 이루어지는 관계를 부담스러워 하는지라 편하게 대하는 문제는 미지수였다.

그때 조용히 다가온 문영은 환하게 웃으며 소연의 손바닥에 ‘잘 부탁해요, 언니.’라고 적어주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거리낌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으응, 그래. 나도 잘 부탁해.”

문영을 반겨주고 난 후 조심스럽게 이야기가 오고 갔다.

소연은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꺼려했던 순간이 멋쩍었는지 쑥스러워 하는 모습이었고, 동천은 내심 하나의 주제로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죽립 때문에 남들이 보기에는 그저 침묵하는 듯 보였지만 말이다.

‘어떻게 된 게 이 몸의 주변에는 다 연상의 여인네들뿐일까? 소연이를 시작해서 정화, 수련, 제갈연, 소홍이, 화정이, 미미 년 등등. 그리고 저기 새롭게 등장한 문영이까지 죄다 연상이란 말씀이야? 왜지? 도대체 왜? 이 몸이 비록 올해로 16살이라지만 어떻게 엮이는 여자들마다 연하가 없으며 그나마 동갑도 없는 거지?’

어쩌다 지나치면서 보는 어린 하녀들은 논란의 대상이 될 수가 없었다.

우연일 수도 있지만 마음에 든 여자들이 죄다 연상이라는 것은 동천이 아닌 다른 사람일 지라도 한번쯤은 생각해 볼만한 문제일 것이 틀림없었다.

‘혹시! 현재로서는 이 몸 보다 나이가 어리면 후손을 보기가 어려우니 하늘님께서 조절을 해주시고 계신 게 아닐까? 호오, 그거 일리가 있는데? 그러니까 이 몸이 좀더 나이를 드시면 자연스럽게 연하녀가 나타난다는 말씀? 크크크큭!’

열 여자 마다하지 않는 게 남자라고, 자신을 이미 암흑마교의 떠오르는 신성(新星)으로 여기고 있었던 동천은 앞으로 영웅이 될 것이 확실한 마당에 삼처사첩은 절대로 무리가 아니라는 착각 속에 살고 있었다.

다다익선이 제일이니, 계속 여인을 받아들이다 보면 언젠가는 연하가 걸릴(?) 것이라는 한심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때 냉현의 나직한 목소리가 동천의 상념을 깨트렸다.

“이제야 오는군.”

“아, 그렇군요.”

눈을 번뜩인 동천이 냉큼 주위를 둘러보자 인파가 갈리더니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보무도 당당하게 걸어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무량수불, 다들 준비가 되셨다면 서둘러 출발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각 파에서는 인원점검을 마쳐 주시고 천마동의 입구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선두의 몇몇 사람들 중 무림맹의 대표인 무당의 자운진인(紫雲眞人)이 입을 열자 각 파의 대표들이 자파의 선발대로 스며들어갔다.

사정화는 동천이 내심 ‘무당 영감이 뭔데 나서서 이래라 저래라 명령이야?’라고 구시렁거릴 때 근처에 당도하여 말문을 열었다.

“다 왔어?”

“예?”

“다 왔냐고.”

설마하니 자신에게 물어 볼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동천은 당황하여 사람들이 제대로 왔나 황급히 살펴보았다.

“에 또, 그게 그러니까…….”

“후후, 빠진 사람은 없습니다.”

냉현의 웃음 섞인 대답에 동천은 그나마 다행이라며 안도했지만 가만히 여운을 곱씹어 보자니 어쩐지 아까 그 웃음은 자신을 비웃었던 웃음인 것만 같았다.

‘아니, 저런 썅늠을 봤나.’

주둥이를 찢어버려야 한다고 저 혼자 강력하게 화를 낸 동천은 어느새 다가와 자신의 죽립을 살짝 들어올리는 사정화와 정면으로 눈을 마주치게 되었다.

‘헉?’

그가 헛바람을 들이키는 순간 그녀가 말했다.

“니가 죽립은 왜 써.”

그녀로서는 보고만 받고 발굴현장에는 일절 발을 들여놓지 않았었기에 동천이 죽립을 쓴 모습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동천도 나름대로 불편하여 본진으로 돌아오면 죽립을 벗었기 때문이다.

여하튼, 동천은 사정화의 심유한 눈빛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곤 급히 얼버무렸다.

“아! 이건 요, 제가 너무도 어려 보여서 다른 무림인들에게 가벼이 보이지 않기 위해서 쓰는 거예요.”

사정화는 말했다.

“니가 행동만 바르게 하면 아무도 무시 못해.”

‘잘났다, 이년아!’

그따위 말은 자신도 하겠다는 생각에 동천은 화가 났다.

그러나 벗으라면 어쩔 수 없이 벗어야 하는 위기에 몰린 이때 무작정 속으로 화만 낼 수는 없었다.

마른침을 삼킨 그는 또 다른 변명을 위해 입을 열었고, 그보다 먼저 냉현이 자연스레 끼여들었다.

“당장에 필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죽립의 문제는 차후에 해결하도록 하시지요.”

맞는 말이자 동천을 흘낏 노려본 사정화는 신형을 돌리며 천마동의 입구로 걸음을 내딛었다.

동천은 나중에 곤혹을 치르겠구나 생각하면서도 움직이는 일행들을 따라 자연스럽게 묻어났다.

『주인님, 꼭 무사히 돌아오셔야 해요! 알았죠? 꼭 이요!』

갑자기 전음이 들려서 움찔한 동천은 차마 다가오지도 못하고 눈시울만 붉히며 손을 흔들고 있는 소연에게 간단히 회답을 해주었다.

『오냐!』

그래도 자신을 위해주는 것은 소연밖에 없다고 생각되어 코끝이 조금 찡해졌는데, 근소한 차이로 화정이가 밝게 웃으며 ‘응, 알았어!’하고 소연에게 대답하자 동천은 그 생각을 바로 취소해버렸다.

상당히 쪼잔한 동천이었다.

“이제 다 모이셨으리라 봅니다. 원치 않은 자리이지만 빈도가 잠시 통솔을 맡게 되었으니 군웅들께서는 깊은 이해를 바랍니다. 먼저 간략히 설명을 드리자면 지금으로부터 반 시진 전에 천마동의 입구가 열렸습니다. 그리고 시험삼아 기관술의 달인 몇 분을 안으로 보내드리자 갖은 함정들이 존재함을 알려오셨습니다. 하여, 각 파에서 모이신 분들과 대회의를 통한 결과, 특별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한 힘을 모아 함정들을 뚫고자 합의를 보았습니다. 현재로서는 통로의 크기가 넉넉지 않아 먼저 들어가는 문파를 제비뽑기로 선별했고 오련, 흑마궁, 척마신군님의 일행 분들, 만독문, 환마교, 혈사교, 암흑마교, 백의무검님의 일행 분들, 당문, 무림맹.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해군도 순으로 들어가게 되겠습니다. 혹여, 지금까지의 상황에 이의가 있으신 분이 계십니까?”

이의가 있을 리 만무했다.

윗선에서 이미 다 끝낸 상황이었고 자신들은 그저 들어가기만 하면 되었으니까.

자운진인 또한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형식적인 절차를 밟았을 따름이었다.

이윽고,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자 자운진인이 중후한 내력을 퍼트리며 말했다.

“무량수불! 그럼 아무도 불만이 없으신 것으로 알고 차례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오련 분들부터 준비를 하시고 천천히 안으로 들어가시길 바랍니다.”

자운진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오련 측은 제갈세가의 인물들을 앞세우고 좌우로 그들을 호위하듯 안으로 들어갔다.

다들 담담한 표정이었지만 속내를 전부 숨길 수는 없었던지 약간은 상기된 듯한 얼굴들이었다.

그들이 모두 천마동 안으로 사라지자 순서에 입각하여 차례차례 각 문파의 고수들이 안으로 들어갔고, 한참을 기다려 마침내 자신들의 순서가 된 암흑마교는 자운진인에 의하여 호명이 되자 사정화에게 인사를 하곤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때 동천은 사정화에게 ‘쓸데없이 나서지마. 그러다 죽는 수가 있으니까.’라는 충고 아닌 충고를 들었는데 잠깐 기분이 더럽긴 했지만 이내 떠오른 생각에 화를 풀었다.

사정화는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에 괜히 만만한 자신에게 질투 어린 한마디를 쏘아 부쳤던 것이라고 단정지었던 것이다.

‘그래, 마음이 대해와 같은 이 몸이 너그럽게 받아주자! 하하하!’

동천의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천마동에 들어가는 게 결코 부러운 일이 아니었으나 타인의 경우, 공을 세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에 사정화도 그러한 생각을 지니고 있을 거라 착각했다.

그것은 어느 정도 맞는 이야기여서 사정화도 처음에는 자신도 들어가겠다고 말을 꺼냈다가 수하들의 거센 반발로 금세 무마된 적이 있었다.

다음 대의 교주가 될 분을 어떠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아무도 모르는 천마동에 들여보낸 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어불성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 문파들의 경우도 정작 중요한 핵심전력은 빼 놓은 채 그나마 위엄을 갖출 수 있는 고수들을 내보내었던 실정이었고 말이다.

“모두 준비한 횃불이 꺼지지 않도록 각별한 주의를 바랍니다.”

당주 둘과 선두에 선 혈각주 초무강이 외부에서 초빙된 기관술사(機關術士) 둘을 보호하듯 둘러싸며 등뒤의 사람들에게 기본적인 주의를 주었다.

모두들 알겠다는 대답을 했고 동천은 자신의 것을 허리띠에 꼽은 뒤 화정이의 것을 가로채 자신이 들었다.

그러나 이게 아니다 싶자 들고 있던 횃불을 다시 화정이에게 건네주었다.

생각해 보니 주인인 자신이 들고 있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화정이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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