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동천(冬天) – 70화


그 사내는 얼른 맞장구를 쳐줬다.

“소전주님도 그걸, 느끼셨나 보군요? 그녀석 많이 다쳐있었는데, 깨어나더니 한사코 가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어쩌겠습니까? 자기가 치료를 안 받고 가겠다는데…. 왜 그러시죠?”

사내가 화가 나있는 동천에게 화를 좀 풀어주려고, 아부를 해봤지만 지금 동천의 상태는 아부를 받아줄 상태가 아니었다. 동천은 주먹을 말아 쥐고는 말했다.

“이 새끼야.. 의원(議員)이 그렇게 아픈 놈을 그냥 보내줘? 너, 진짜 의원 맞아? 뭐, 이런 자식이 다 있어?”

도연이 갈 곳이라곤 자신의 뒷마당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자신은 꼼짝없이 다시 땅을 파야 하므로 땅을 파기 싫었던 동천은 도연을 그냥 보내주는 데 일조를 한 눈앞의 사내가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한편, 동천의 기분을 풀어주려던 사내는 점점 자신에게 불리해지는 상황에 어찌할 줄 몰라 했다. 그는 얼른 바닥에 엎드려 다급히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살려 주십시오. 모르시나 본데, 저는 의원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그 아이를 막을 권한이 없었습니다.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동천은 싸늘한 미소를 띠었다.

‘이자식이… 내가 속을 줄 알고?’

“얌마! 어디서 거짓말이야! 내가 바보인 줄 알아? 그럼, 어째서 내가 들어올 때 저기 누워있는 인간한테 침을 놔주고 있었어? 너 그것에 대해서 자세한 설명이 없으면 죽을 줄 알아! 얘기해봐!”

‘이.. 이 꼬마 자식이… 생각보다 예리하구나.. 제길… 어떤 자식이 소전주가 대가리 빈 놈이라고 말했던 거지? 어쨌든 그럴듯한 변명을 해야 할 텐데…’

잠시 혼란스러운 생각을 정리한 사내는 벌벌 떨면서 최대한으로 처량하게 말했다.

“취… 취… 취미(趣味)로.. 크윽! 끄-에엑!”

마침 사내가 앉아있어서 때리기도 편했기에 동천은 신나게 밟아주었다. 요양실에서 안정을 취하려고 누워있던 사람들이 피 튀기는 장면(場面)에 안정은커녕, 오히려 공포에 떨었지만 그걸 상관할 동천이 아니었다.

퍽퍽.. 퍽!

“이런, 싸가지 없는 새끼를 봤나! 의원도 아니면서 환자에게 침을 취미로 놔줘? 그러다가 잘못되면 네가 책임질래? 너 같은 새끼들 때문에 다른 의원들이 욕을 먹는 거야 새끼야..”

한참을 때리던 동천은 어느 정도 화가 풀리자 그제서야 발길질을 멈추었다. 후련했다. 남을 때리는 게 이렇게 좋을 줄 몰랐던 동천은 화가 날 때마다 자주 애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에이.. 씨발. 오늘따라 재수 없는 일만 생기네…”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사내를 뒤로하고, 동천은 다시 밖으로 나왔다. 동천은 분풀이로 자신을 기다리던 하인의 아구창을 한 대 후리고, 뒷마당으로 걸어갔다. 하인을 때린 이유는 자신에게 분명히 들어가면 있다고 그랬는데 들어가니 없다는 것 때문이었다.

‘어디… 으윽! 저 새끼, 진짜로 왔네? 아이구.. 또 파야 하다니..’

뒷마당 초입(初入)에서 고개만 빼꼼히 내놓고, 쳐다보던 동천은 마당 한가운데 서 있는 도연의 모습에 나직이 치를 떨었다. 사부에게 철수와 같은 성격의 하인을 부탁했는데, 알고 보니 자신이 원하던 성격이 아니었다. 할 수 없다고 생각한 동천은 거드름을 피우며 천천히 걸어갔다.

“험험.. 야. 너, 쓰러졌으면 거기서 쉬고 있을 일이지 왜 여기까지 다시 왔어. 내가 친히 문병을 갔었는데 네가 없어서 할 수 없이 다시 오게 됐잖아..”

“걱정을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맞은 지 좀 돼서, 맞은 부위가 부어있던 도연이 깍듯이 인사를 하는데 뭐라 할 수 없었던 동천은 그 모습에 쫄은 감도 없지 않아서 얼떨결에 인사를 받아들였다.

“그.. 그래. 알면 됐다.”

동천이 인사를 받아주자 도연은 그때까지 굽힌 허리를 그제서야 펴고는 동천이 바닥에 던져버린 곡괭이를 집어 들어서 동천에게 건네주었다. 당연히 동천의 얼굴이 다시 찌푸려졌다.

“꼭.. 해야 하냐?”

“예.”

도연의 말은 간단했다. 동천은 도연의 대답과 행동이 왠지 사정화와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철수와도 비슷했다. 그래서 그 셋의 형상을 섞어 보았다.

부르르르르…..

‘으으…. 생각 말자.. 인간의 모습이 아니다.’

잠시 온몸을 떨었던 동천은 신경질적으로 도연이 들고 있던 곡괭이를 낚아챘다.

“넌, 저리 가 임마. 훈련하는 데 방해되니까.”

동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도연은 멀찌감치 물러서서 동천이 땅 파는 장면을 무표정한 얼굴로 지켜보았다. 그러다 간간이.. 덜 팠습니다.. 더 팠습니다.. 등의 말을 꺼냈다. 동천은 도연이 그럴 때마다 열불을 참으며 그 힘으로 겨우 왕복 일 회를 마칠 수 있었다. 합쳐서 왕복 이 회.. 오늘의 할당량을 마친 동천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나머지 파야 할 공간을 쳐다보았다.

‘헉헉… 저걸 언제 다 파냐?’

“수고하셨습니다.”

‘병신 새끼.. 육갑 떨고 있는 소리하고 있네…’

속으로 욕을 퍼부은 동천은 말없이 도연을 노려보았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물러설 도연이 아니었기에 담담한 시선으로 똑같이 마주보았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수련이 생긋! 웃으며 약왕전의 연호에게 인사를 건네자 연호도 황급히 인사했다.

“아.. 예. 오늘은 무슨 일로 오셨나요?”

“별거, 아니고요. 동천을 만나러 왔어요.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아세요?”

문지기 따위가 감히 소전주의 행동 사항을 낱낱이 파고들 수가 없기에 연호는 죄송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건, 제가 알 수가 없고요. 대신 소연이에게 물어보면 간단하게 알 수 있을 겁니다.”

수련도 그럴 줄 알고 그냥, 해본 말이었기에 그리 크게 기대하지도 않았다. 수련은 알았다는 듯이 연호에게 다시 인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좀 있다가 동천의 일그러질 얼굴을 생각하니 기분이 너무 좋은 수련이었다.

“호호! 이 나쁜 녀석. 엊그저께 내가 준 선물을 바닥에 내던져? 너 어디 아가씨에게 혼나봐라!”

신나게 흥얼거리며 걸어간 수련은 일각여를 걸어가서 암한문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당을 쓸던 한 하인에게 동천을 불러달라고 했지만, 그 하인은 자신의 직책(職責)은 마당 청소였기 때문에 고개를 절레! 내두르며 더 안으로 들어가서 물어보라고 했다. 이에 수련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른 사람에게 다시 물어보기 귀찮아서 그냥, 동천의 방으로 향했다.

“동천아… 야, 동천!”

불러보고, 문도 두드려봤지만 안에서 아무런 반응을 안 보이자 얘가 자나? 하는 생각에 문을 열고 들어가본 수련은 요리조리 열심히 찾아봐도 동천이 안 보이자 내심 맥이 빠져서 밖으로 나왔다.

“얘가 어디 갔지? 그럼… 언니에게 가서 물어볼까?”

언니는 동천의 직속 하인이었으므로 당연히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에 수련은 지체 없이 소연의 방으로 들어갔다. 방으로 들어간 수련은 언니가 왠 아름다운 여인하고 같이 있는 것을 보았다. 소연은 의자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고, 아름다운 여인은 마주 앉아서 소연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소연은 열심히 책을 읽고 있다가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어? 수련아. 너, 웬일이야?”

자신의 등장을 의외인 듯 쳐다보는 언니의 눈길에 수련은 좀 뚱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오랜만에 찾아왔는데, 언니의 반응이 시큰둥하자 좀 화가 났던 것이었다.

“웬일이냐니? 흥… 언니, 내가 온 게 싫어?”

그제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소연은 황급히 손을 흔들었다.

“뭐? 아냐. 그럴 리가 있겠니? 잘 왔어. 여기 앉아.”

수련은 좀 더 뚱한 표정을 지으려다가 자신이 들어왔음에도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는 여인의 모습이 궁금해서 곧 안색을 풀었다. 소연의 권유(勸誘)에 따라 자리에 앉은 수련은 소연을 바라보며, 말없이 화정이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누구냐는 뜻이었다.

이에 부응이라도 하듯 소연은 얼른 대답해 주었다.

“아아..? 화정이야. 나이는.. 음…. 모르겠고. 강시야. 어느 높으신 분께서 주인님의 연회를 축하하며, 보내주신 거래. 그런데 말이지.. 호호호!”

그동안에 있었던 일을 들으면서 수련은 신기하다는 듯이 화정이를 쳐다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믿기지가 않았던 것이었다. 사람을 자신의 뜻대로 조정하다니… 어쩐지 오싹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강시란 말은 몇 번 들어봤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보기에는 처음이었다. 수련은 조용히 소연 쪽을 쳐다보는 화정이를 보며 소연에게 다시 물어보았다.

“그게 정말이야? 이.. 강시 언니가 언니의 말을 듣는다고?”

“얘는.. 강시 언니가 뭐니? 이름을 불러. 화정이라고..”

소연이 말을 놓으라고 했지만 수련은 망설이는 눈치였다.

“하지만.. 나보다 나이가 많은 건 많은 거잖아..”

수련의 말에 소연도 고개를 끄덕였지만 말의 내용은 반대였다.

“하지만, 주종관계에는 나이가 무슨 소용이 있니? 안 그래? 나도 처음에는 너처럼 생각했는데, 생각이 없는 강시에게 꼬박꼬박 말을 높여주려니까 좀 그렇더라구.. 어떻게 말하면 지금 화정이는 내 시녀가 되기도 했고.. 난, 그냥 말을 놓고 있어.”

듣고 보니 그랬다. 나이 차만 생각했지 주종관계는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이었다. 물론, 자신의 시녀는 아니지만 언니의 동생인 자신은 자연스럽게 말을 놔도 무방한 위치가 되는 것이다. 자신의 생각이 짧았다는 것을 시인한 수련은 이제부터 화정이라 부르기로 소연과 약속(約束)했다. 그런 후 화정이가 언니의 말을 듣는 것을 신기하게 보고 있던 수련은 마음 한구석 어딘가가 허전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왜 이런 느낌이 드는 걸까.. 하고, 고심(苦心)히 생각하던 수련은 마침내 그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렇지? 어휴.. 내가 왜 이러지… 언니, 동천 어디 있어요?”

동생이 자기하고 재미있게 놀다가 갑자기 놀라면서 자신의 주인을 찾자, 소연은 대답 대신 자신이 궁금한 점을 먼저 물었다.

“왜? 주인님은 왜 찾는데?”

수련은 나직이 웃었다. 그 웃음은 보는 이로 하여금 무한한 상상을 하게끔 만드는 웃음이었다. 수련은 동천이 아가씨에게 혼날걸 생각하니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호호호… 별거 아니고요. 아가씨께서 동천을 찾더라고요.”

“으음.. 그렇구나. 지금, 주인님께서는 뒷마당에 계실 거야. 같이 가줄까?”

수련은 괜찮다며, 손을 내저었다. 이에 아쉬운 표정을 지은 소연은 입맛을 다시며 문 앞까지 바래다주었다. 다른 때 같으면 같이 가주겠다고 억지를 부려봤겠지만 소연은 참았다. 왜냐하면, 지금 수련의 방문으로 여태까지 읽었던 책의 내용이 머릿속에서 가물거렸기 때문이었다.

“내가 며칠 내로 놀러 갈게.”

그 말에 수련은 꼭, 놀러와야 한다는 눈초리로 말했다.

“언니, 그 말 지켜야 해요. 그럼.. 저 이만 갈게요.”

날아갈 것 같은 기분으로 소연의 방에서 나온 수련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신나게 걸어갔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