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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714화


“동천에게 지나치는 말로 들었어. 제갈세가에 있었다고?”

“예, 아가씨.”

도연이 예의를 갖춰 대답하자 그녀는 슬쩍 장노삼 쪽을 쳐다보며 말했다.

“누굴 기다리는 임무라고 들었는데 저 노인이었던 모양이구나.”

도연은 아까도 그랬지만 대놓고 아랫사람을 대하는 듯한 사정화의 태도에 난감함을 금치 못했다. 그가 본 장노삼은 절대 무시해도 될만한 하수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곧 교주의 자리에 오르게 될 그녀의 신분상 내심 욕은 먹을지언정 대놓고 비난할 개재는 아니었다. 암흑마교의 교주가 된다 함은 배분을 따진다 해도 결코 무림에서 허술한 위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도연은 최대한 장노삼의 위치를 끌어올리는데 주력했다.

“그렇습니다. 주군을 어렸을 적부터 돌봐주시던 분인데, 주군께서 예기치 않게 본교로 오시는 바람에 헤어지게 되셨다가 몇 해 전에야 다시 만나 뵙게 되어 계속 연락을 주고받던 분이십니다. 저로서는 감히 추측 불가의 고수로서 황룡세가에 계셨을 때에도 이분께 감히 함부로 대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헹!”

도연의 말이 끝내자 정원이 누가 봐도 기가 찬다는 얼굴을 내비쳤다. 지닌바 능력을 떠나서 고작(?) 해봐야 약소전주를 돌봐주었던 노인이라는데, 그런 노인을 치켜세워 주기에 여념이 없자 우습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사정화는 우습고 말고를 떠나서 이야기를 집중할 수 없음에 은근슬쩍 화를 냈다.

“할멈, 이야기 끊기니까 조용해.”

정원은 찔끔하여 대답했다.

“예, 아가씨. 켈켈.”

사정화는 그제야 정원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이어 그녀는 도연에게 말했다.

“동천이 의외로 복이 많구나. 이런 고수와 인연이 닿았다니.”

“으음!”

장노삼은 사정화의 간략한 평가가 끝나자 돌연 인상을 찌푸렸다. 그것을 본 도연은 어르신이 대우가 마뜩치 않아 화가 난 것이라고 생각하여 송구함에 덩달아 안색을 굳혔고 말이다. 하지만 장노삼의 심기 불편함은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우리 천아가 생각 외로 힘들게 지내는 것 같구나. 예절 교육이 한없이 미흡한 상전에 그 못지 않게 여겨지는 심술보만 가득한 노파.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했음이니, 그동안 어떻게 생활을 했는지 알 것 같기도 하다. 그나마 수하 복은 있는 것 같아 다행이지만 서도……. 크흠!’

지금의 생각 같아서는 동천을 이런 수준 낮은 자들의 소굴에서 빼내오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이 미리 짐작하고 일을 벌였다가 틀어지기라도 하는 날이면 자신은 그렇다 치고 동천의 앞날에 크나큰 누를 끼치게 되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분하지만 이럴 땐 그저 참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이도 저도 못하는 상황에서 사정화가 말했다.

“내 말투가 기분 나쁜 것 같은데 그건 노인장이 이해해줬으면 해. 외부인의 경우, 난 내가 인정한 사람이 아니면 배분을 무시해 버리니까.”

“허허, 그렇습니까.”

딸아이가 죽고 나서 모든 것이 부질없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장노삼. 황룡미미의 성격도 받아준 전적(?)이 있는 장노삼. 그래서 그는 지금도 그냥 그러려니 생각하고자 했다.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으로 때웠던 것이지만 상대가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다는데 더 무슨 할말이 있겠는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정화는 여전히 담담한 표정으로 자신의 궁금증부터 풀어보고자 했다.

“그건 그렇고, 동천이 황룡세가에 있을 때 보살펴준 은인이라고 했는데 정확히 동천과는 어떠한 관계지?”

그녀의 물음에 뒤에서 시립 중인 정원은 대뜸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뭐 별것 있겠냐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이와 달랐던 도연은 정말로 궁금했던 문제가 거론되자 긴장한 눈초리로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눈빛이 너무도 강렬하여 피부가 다 따끔거릴 정도였지만 장노삼은 개의치 않고 대답했다.

“자세한 설명은 어렵겠습니다. 그저 대충 천아와 관련된 늙은이로만 생각해 주십시오.”

장노삼은 자신이 대답해 주고도 상대가 쉽게 납득하지 못하리라 생각했지만 설사 상대가 황제일지라도 외인에게는 자신의 가족사를 흘려보낼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왜냐하면 자신의 가족사가 한낱 흥미 거리로 전락하는 상황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역시나 정원이 흥분하여 소리쳤다.

“이노옴! 감히 아가씨의 물음에 건성으로 대답하다니! 네가 이곳에서 뼈를 묻고 싶은 모양이로구나!”

정작 당사자인 사정화는 눈만 살짝 찌푸리고 말았는데, 정원이 안면을 바꿔 노발대발하자 사정화의 안색이 차갑게 굳어졌다. 정신 사나운 것을 싫어하는 그녀의 한계가 마침내 폭발한 것이다.

“할멈. 나가 있어.”

“예? 아니 그게…….”

사정화는 한번 버텨보려는 정원에게 더욱 차갑게 말했다.

“나가 있어.”

그 기세가 만만치 않자 정원은 찔끔했다.

“예에, 아가씨. 켈켈켈.”

절대 웃을 상황이 아니었는데, 정원은 자존심상 외부인 앞에서 쫓겨난다 는 인식을 주기 싫었는지 낮게 웃으며 마지못해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어쩐지 주위가 환해지는 듯한 착각이 느껴질 정도로 분위기가 달라져 보였다. 뭐 그런다고 사정화의 얼굴까지 환해지는 일은 없었지만 말이다.

“도연아, 너도 이만 되었으니까 돌아가도록 해. 난 이 노인과 할 말이 아직 남았으니까.”

“예, 아가씨.”

도연은 뭔가 사단이라도 일어날까 싶어 불안했지만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노삼은 그런 도연에게 간단하게 눈인사를 해준 뒤 담담한 시선으로 사정화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시선을 내려 차 한 모금을 마셨고 이내 입을 열었다.

“노인장, 난 당신이 과거에 동천과 연관이 있었다지만 그건 과거일 따름이라고 보고 있어. 자세한 사정을 알지 못하는 한 계속 그렇게. 또한 나는 동천의 주군으로서 신분이 불확실한 자는 만나게 해줄 생각이 없어. 그런데다 정파에 머물렀고 그 정파의 성향까지 짙은 당신은 말야.”

그녀의 공격적인 이야기에 잠시 침묵한 장노삼은 ‘이 아이가 기어코 듣고자 작정했구나.’ 라는 생각을 하며 대화를 건네 받았다.

“음, 장노삼이라고 합니다. 노부는 그 어디에도 속한 사람이 아니고, 천아와 노부는 과거든, 현재든, 미래든. 시간에 묻혀지고 잊혀지는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그것은 아가씨께서 자세한 사정을 알던 모르던 상관없이 말입니다. 또한 노부는 사람을 볼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대화를 이어갈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답니다. 허허허.”

사정화와 비슷한 이야기의 형식을 취했지만 장노삼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반말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사정화가 자신이 인정한 사람이라야 대우를 해준다고 말했던 것을 비꼬며, 자신은 사람을 볼 줄 모르는 사람(그녀)에게는 대화를 진전시킬 의사가 없다고 못을 박았던 것이다. 당연히 그런 속뜻을 모를 리 없었던 사정화는 슬며시 한쪽 입 꼬리를 올리는가 싶더니 신기루인 양 그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그녀는 그와 동시에 말문을 열었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이야기라면 그렇게 해주지.”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겠다면 그렇게 하지요.”

“날 그렇게 봤다는 건 아니겠지?”

“허허, 그럴 리가요. 그리고 제게 듣게 될 이야기는 특히 천아의 귀에 들어가서는 안됩니다. 모든 것은 때가 되면 다 밝혀줄 예정이니 말입니다.”

“걱정하지마. 녀석에게 얘기 해줄 정도로 한가하지 않아 난.”

“음, 허허허.”

그녀의 태도가 너무도 단호하여 멋쩍게 웃을 수밖에 없었던 장노삼은 특유의 무표정으로 꼬박꼬박 다짐해주는 모습만큼은 믿음이 간다고 생각했다. 조금 흠이라면 여전히 사가지가 없어 보인다는 점이었지만 마음의 수양이 깊었던 장노삼은 거기에 현혹되지 않고 머릿속의 기억들을 차곡차곡 정리한 후에야 진지한 눈빛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것은 꽤나 긴 내용이어서 이야기를 끝마칠 때까지 제법 긴 시간이 소요되었지만 사정화는 전혀 지루해하지 않는 얼굴로 되려 집중하는 자세를 보여주었다. 그래서인지 이야기의 흐름이 가파른 기세를 탔고, 한참을 치솟아 오르다 천천히 내리막길을 걸어 마침내 끝을 맺었다.

“……그렇게 된 것입니다.”

길고 긴 이야기를 끝낸 장노삼의 얼굴은 홀가분하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누면 배가 된다더니, 고작 타인에게 해준 말임에도 많은 짐을 던 것 같은 기분이로구나. 허허허.’

원래 장노삼은 자신의 비사(泌事)를 타인에게 들려줄 생각이 없었지만 오늘 자신이 입을 다물면 그 화가 동천에게 옮겨갈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에 마지못해 입을 연 것이었다(장노삼의 예감은 매우 정확한 것이었다). 아울러 그런 예감 때문에 입을 여는 것이니 만큼 처음에는 거짓이 없는 선에서 대충 관계를 지어낼 작정이었다. 그런데 이때 얘기치 못한 사태가 발생했으니, 바로 그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사정화의 태도가 지닌바 모든 감각을 동원이라도 한 듯 너무도 진지하고 소름끼치기까지 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었다. 우스갯소리로 그의 살아 생전 이야기 하나 듣자고 이렇게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는 여자아이는 단연코 처음이었던 것이다. 덕분에 조금은 가볍게 생각하고 시작했다가 심히 당황한 장노삼은 그도 모르게 하나둘 진실을 꺼내들게 되었고, 나중에 가서는 도저히 대충 끼워서는 결론을 낼 수 없는 지경까지 되어 버렸다. 정신을 차리고 난 뒤에는 이미 물이 엎질러진 상태로서 예절교육은 형편없이 받은 것 같았지만 자신이 내뱉은 말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킬 듯이 보이는 사정화의 기도에 자신도 모르게 넘어간 것이다.

“그랬군……요. 좋아요. 확실히 가치가 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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