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715화
사정화는 실로 오랜만의 존댓말이라 약간 어색해 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잠깐일 따름이었다. 처음에 말을 꺼내는 것이 생소해서 그렇지, 그 이후로는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 자연스럽게 이야기했던 것이다.
“허허! 인정을 해주시지 않으면 어쩌나 했는데, 한결 마음이 놓이는군요.”
“아니에요. 솔직히 상당히 놀랐어요. 그런 가문이 있다는 것과 동천이 그 핏줄이고, 따로 떨어진 이유가 질투로 인한 제자의 복수…….”
사정화는 갑자기 그 부분에서 말문을 멈추었다. 자신은 그저 흥미로운 이야기일 뿐이었지만 듣는 장노삼으로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의 상처일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공연히 장 노인의 아픈 곳을 건드린 것 같군요. 사과할게요.”
장노삼은 흔쾌히 그녀의 사과를 받아주었다.
“괜찮습니다. 이미 잊었으니 괘념치 마십시오.”
고개를 끄덕인 사정화는 약간 침체된 분위기를 살리려는지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헌데, 만들러 갔다던 도가 혹시 아까 문 앞에서 실랑이가 벌어졌던 그 보자기 속의 물건인가요?”
장노삼은 돌연 껄껄 웃었다. 조금만 머리를 굴려보면 누구나 다 유추해볼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사정화가 묻자 어쩐지 영특하고 기특해 보였던 것이다.
‘이거 존댓말을 들으니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던 모양이로구나. 허허허.’
서둘러 웃음을 갈무리한 그는 의아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정화에게 미안하다고 말한 뒤 품 속에서 물건을 꺼내 보여주었다. 비록 내용물까지 보여준 것은 아니어서 진정한 모습은 확인할 수 없었지만 대충 봤음에도 절대로 긴 무기가 아니라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그렇게 잠시 올려놓기만 한 장노삼은 느리지도, 그렇다고 빠르지도 않은 손길로 새하얀 보자기를 풀었고, 마침내 그 속의 내용물을 확인시켜주었다. 순간, 사정화의 두 눈 깊은 곳에서는 기광(氣光)이 어리는 듯 보였다.
“이게 바로……. 음, 이건 무언가…….”
말끝을 흐린 사정화는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신비감이 느껴진다고 말하고 싶었다. 1척 반(90Cm)도 안 되는 길이에 아무 장식도, 아무 날카로움도 없는 투박한 도(刀).
그러나 영혼을 유혹하는 듯한 어두운 묵광의 넘실거림은 도신(刀身)을 타고 흘러 요사스러울 정도로 그녀의 마음을 끌어당겼다.
마치 그녀에게 손을 내밀라고, 그 뒤에 피를 뿌려달라고 강렬하게 호소하는 듯한 진한 울림이 사정화의 영혼에 호소하는 듯 보였다. 그 탓인지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움찔거렸고 장노삼은 재빨리 천을 덮었다.
“아!”
진한 아쉬움에 탄식을 토해낸 사정화는 눈앞이 새하얀 세상으로 변하자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도를 바라보던 곳이 천으로 싸였으니 하얗게 보일 수밖에. 그때 장노삼이 정신을 추스르는 중인 그녀에게 말했다.
“허허, 무방비 상태로 보면 안 된다는 것을 그만 잊고 있었습니다. 아직까지는 제 주인을 만나지 못해 요도의 기운이 강하지만 천아가 주인이 된다면 이 기운은 말끔히 사라질 것입니다.”
상당히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지만 사정화의 굳은 얼굴은 좀처럼 펴질 생각을 안 했다. 고작 쇠붙이 따위에게 현혹되었다고 생각하니 자존심이 상했던 것이다.
장노삼도 그것을 느꼈는지 더 이상 말을 붙이지 않았고 한동안 껄끄러운 침묵만이 이어졌다. 그리고 침묵을 깬 사람은 원인의 제공자였던 사정화였다.
“잘 견식 했어요. 하지만 도가 너무 작고 투박하군요.”
이걸로 어디 사람이라도 제대로 벨 수 있겠냐는 물음이자 장노삼은 너털웃음을 흘린 뒤 이야기했다.
“이것은 하나의 도구에 불과합니다. 치우도법은 시전 시에 발생하는 압축력이 상상을 초월하기에 단지 그것을 견딜 만한 도구가 필요할 뿐 크기에는 제한이 없지요.”
치우도법의 전개형식을 알지 못하는 사정화로서는 대충 감만 잡았을 뿐 크게 수긍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그러나 한번 견식 해본 적이 있었던 장노삼은 설명하는 와중에 새삼 그 날의 기억이 떠오르는지 자신도 모르게 전신을 살짝 떨었다. 그 심연 속에서 손을 뻗어오는 듯한 진동소리와 시야를 가득 뒤덮는 어둠을 말이다.
‘동천 이 녀석, 그런 도법을 익히고 있었다니.’
사정화는 장노삼이 치우도법의 전율을 인내하는 동안 동천이 익힌 도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동천이 익힌 도법이 아니라, 익히고도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는 점에 초점을 두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수하가 숨겨둔 한 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좋은 현상이었지만 정작 주군인 자신이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는 데에 작은 실망과 배신감을 느꼈던 것이다.
‘음흉한 녀석. 돌아오면 주의를 줘야겠어. 단단히.’
숨기는 것은 좋지 않다. 자잘한 부분은 사생활로 떼어내어 열외에 놓을 수도 있지만 주군이 수하를 써먹는데 있어서는 그런 무공을 지녔는가 아닌가에 따라 그 활용범위가 달라지므로 아주 중요한 사안이었던 것이다.
“…….”
“허허, 그건 그렇고 이만 돌아가도 되겠습니까? 긴 여행 탓인지 조금은 피곤하군요.”
사정화의 상념은 거기에서 깨어졌다. 때마침 헝클어진 생각들을 혼자서 조용히 정리하고 싶었던 그녀는 군말 없이 수락해주었다. 그녀는 장노삼과 함께 문을 나섰고 의외로 시끄러운 정원을 떼어놓고자 그녀에게 명령을 내렸다.
“할멈, 여기 장 노인을 도연이 머물고 있는 막사에 데려다 줘. 그리고 행여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공연히 분란을 피울 생각말고.”
의외의 명령을 받게 된 정원은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어디 애나 돌봐주었던 노인을 안내해 줄 정도로 허접한 위치였던가? 당연히 아니었던 그녀는 잘못 들었나 싶어 되물어보았다.
“예? 지금 소신에게 시키신 명령입니까요?”
사정화는 한치의 표정변화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저분을 바래다 줘.”
“저, 저분?”
이번에는 그녀를 포함한 주위의 호위대들까지 두 눈을 크게 치떴다.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아가씨가 장노삼에게 존칭을 써줬던 것이다. 덕분에 주위는 일순간 붕 떠버린 듯한 술렁임이 일어났고 정원은 그저 입만 뻐끔거렸다. 그들에게는 그만큼 충격적인 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모습이 한심했던지 사정화는 내공을 끌어 올려 차가운 기운을 방출했다. 정신을 차리게끔 조치를 취한 것이었다.
“할멈!”
“예? 예에? 아, 예에. 켈켈, 말씀대로 하겠습니다요. 켈켈켈.”
그제야 정신을 차린 정원은 켈켈거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사정화는 이만하면 되었다고 생각했는지 정원은 물론이고 장노삼 쪽 또한 더 이상 시선을 주지 않고 휙 돌아 안으로 들어갔다. 그것을 본 장노삼은 역시 사가지가 없다고 생각했다.
채쟁, 쨍! 푸하학!
“크악!”
“다친 놈들은 재깍재깍 뒤로 물러서라!”
숫자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비등하다 못해 이겨가던 싸움이었다. 그런데 새롭게 등장한 다섯 노인들과 십 수 명의 복면인들이 등장하자 상황이 허무할 정도로 역전되었다.
화경에 근접한 고수 다섯이 솔선수범 하여 밀고 들어오자 그들과 맞설 능력이 있는 고수들이 자리를 비워야 했고, 그 자리를 메울 정도의 고수들이 턱없이 부족했던 마도의 세력들은 줄 위의 곡예사처럼 위태위태하게 버텨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악! 으악? 악? 이런 씨발! 벌써 네 번이나 베였잖아?”
얼굴을 있는 대로 구긴 동천은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솟아 올라 씩씩거렸다. 상황이 급반전되면서부터 그도 진지하게 적들을 쓰러트리고는 있었지만 몰려드는 숫자가 너무도 많다보니 주특기인 경공이 반감되어 전부 다 피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봤자 다친 상처들은 미세한 흔적들일 따름이었지만 말이다.
“동천, 좀 더 붙을래? 헤헤.”
퍼걱!
빙그레 웃으며 적도의 머리를 으깨는 화정이의 모습은 상당히 괴기스러웠지만 이곳에서 가장 듬직한 존재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그녀였다.
사실 동천이 다쳐도 고작 혈흔의 수준이었던 이유가 그녀의 몸을 사리지 않는 보호 아닌 보호 덕분이었으니(웬만하면 한방에 적들을 해결해서 그녀의 주위에는 쉽사리 접근하지 못했다), 이보다 더 듬직한 존재가 또 어디에 있겠는가.
그래서인지 동천은 자신 있게 소리치며 앞으로 전진했다.
“야, 니가 붙어!”
대번에 흑의인과 마주한 동천은 현란하게 찔러오는 적의 검을 발견하곤 서둘러 반보를 물러서며 단강수를 펼쳤다. 그 와중에 등 쪽이 물컹해졌지만 그는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화정이의 동체임을 확신하고 무시했다.
아울러 그는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적의 검을 오른손으로 비스듬히 내친 후 왼발을 쭉 전진시키며 희미하게 옥빛으로 둘러싸인 왼손을 상대의 가슴에 작렬시켰다.
“크아악!”
손맛이 짜릿했고 입에서 피 분수를 쏟아내며 뒤로 넘어갔으니 최하 중상에서 최대 사망이었다. 그러나 동천은 결코 좋아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살인을 즐기지 않았던 탓도 있지만 그것은 부차적인 문제일 따름이었고, 주된 이유는 한 명씩 제거하는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문제 때문이었다. 적은 아직도 바글바글 한데 처치하는 속도가 더디자 적을 쓰러트리고도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던 것이다.
‘아나, 이것들을 다 죽이려면 쌀 한가마니 쏟아놓고 한 알, 한 알씩 일일이 다 세야 하는 형국인데 이러다가 날 새는 거 아냐? 어우, 답답해! 그냥 확 독공을 써버려?’
만독문의 외호법이 독을 살포하는 장면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던 동천으로서는 참기 힘든 강렬한 유혹이었다. 힘들게 피하랴 내력 소모가 좀 되는 단강수를 사용하랴 서서히 지쳐 가느니, 차라리 내력의 소모가 좀 더 크긴 했지만 한번에 세 네놈을 쓰러트리는 독공이 더욱 구미에 당겼던 것이다. 하지만 최대의 걸림돌인 냉현의 존재가 발목을 잡았으니, 그로서는 복창이 터질 노릇이리라.
‘아아, 하늘이 이 몸을 도와주지 않는구나! 냉현이란 개새끼는 소교주가 되가지고 전혀 도움이 안 되고, 상황은 가면 갈수록 암울해져가고…….’
여기까지 조금 진지했던 동천은 벌컥 화를 냈다.
‘아니, 어떻게 소교주가 되가지고 전혀 도움이 안된대? 소교주면 소교주답게 이럴 때 선천지기라도 확 써 가지고 살신성인의 자세를 보여야 하는 거 아냐? 어차피 좋게 생각하는 사람도 없었는데 그렇게 좋은 일하고 뒈지면 또 알아? 이 몸이 언젠가 생각나면 묘비에 술 한 병 사서 뿌려줄지? 아, 젠장……! 뭐 하긴, 하는 짓이 고따위니까 이제 곧 물러나게 되는 거지만. 큭큭큭!’
선천지기(先天之氣)는 사람이 태어날 때 모두가 기본적으로 가지게 되는 기(氣)였다. 사람은 그것을 바탕으로 인체를 조화시켜 생명력을 지탱할 수 있는 것인데, 각자가 태어난 환경과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기운에 따라 그 양이 제각각인 것이 특징이라면 하나의 특징이었다.
또한 이 선천지기는 보통 사람은 평생을 가도 그 기운을 뽑아낼 방도가 없었으며, 그것은 이변이 없는 한 오로지 무공을 익힌 무림인들 만이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선천지기는 후천지기(後天之氣)와는 달라서(내공을 뜻한다) 위력은 평소의 배 이상을 보장하지만 일단 뽑아서 쓰게 되는 순간 다시는 채울 수 없다는 심각한 문제점이 존재했다.
채울 수가 없다 함은 인체를 지탱하는 근본적인 힘이 사라지는 것이니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뜻이고, 무림인의 관점에서 보자면 아무리 내공이 넘쳐난다 한들 인체에 보이지 않는 구멍이 뚫렸으니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된다는 뜻이었다. 한마디로 동천은 지가 쓰는 거 아니라고 냉현이 선천지기를 쓰고 죽기를 바랐던 것이다.
스걱!
“읏, 따거! 아니, 이 새끼가?”
흑의인의 검이 잠시 긴장이 풀어졌던 그 사이를 기가 막히게 파고들어 동천의 팔뚝을 베고 지나갔다. 그 흑의인은 고작 그거 베고 화정이에게 일장을 맞아 한 많은 세상을 떴지만 이번의 상처는 제법 눈에 보일 정도로 큰 것이었다. 순간 동천의 두 눈에서는 불똥이 튀었고 급히 지혈한 그는 지체 없이 독공을 끌어올렸다.
“으으으! 이것들이 오냐오냐 해줬더니 감히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덤벼 들어? 씨팔, 다 죽었어!”
그렇게 감정이 격해진 동천이 독장을 뿌리자 화정이를 의식하며 힘겹게 방어하던 흑의인들은 잠시 후 픽픽 쓰러지기 시작했다. 너무도 쉽게 당한 그들은 영문도 모른 채 숨을 거두기 시작했는데, 그나마 내력이 높아 마지막까지 살아 남은 사내는 머리가 띵하고 속이 메스꺼워지며 피까지 토해내자 그제야 무언가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이, 이런 비겁한! 감히 도…….”
퍽퍽퍽퍽퍽!
“뭐? 안 들리는데? 도? 무슨 도? 아, 거 참 안 들린다. 큭큭큭!”
독공이 발설 될까봐 사내의 입을 무자비하게 밟아댄 동천은 그제야 어느 정도 진정이 되는 것을 느꼈다. 그는 절대로 때려서 화가 가라앉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급히 냉현 쪽을 찾아보았다. 혹시나 자신을 주시하고 있지 않았나 싶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