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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717화


정해진 운명의 만남.

흠칫!

치켜 떠진 두 눈을 부라리기에 여념이 없었던 척마신군은 느닷없이 변한 어린놈의 기세에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상체를 뒤로 물렸다. 그나마 정신력이 강했기에 망정이지 한 수 쳐지는 사람이었다면 벌써 두어 걸음 이상을 물러나 있었을 것이 분명했다.

‘보는 이가 저놈 하나밖에 없다지만 하마터면 창피를 당할 뻔했다. 크흠!’

물러난다 함은 그만큼 상대에게 겁을 집어먹었다는 소리나 마찬가지였으니, 강호 명숙의 체면상 안도해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가 사람의 속내를 꿰뚫어 볼 수 있는 자가 아니었던 만큼,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알지 못했다.

“이놈, 궁지에 몰리니 이제야 할 마음이 생겨난 모양이로구나.”

“그런 것 같소.”

아주 대놓고 그렇다는 소리를 지껄이자 척마신군은 분노 이전에 어이가 없었다. 그나마 아까 그놈과 같은 인간이었나 싶을 정도로 달라진 모습에 나름대로 신중해져서 이성을 잃는 불상사는 없었지만 기가 차는 것은 매 한가지였다.

“흐, 흐하하하! 큭큭! 이거 도저히 못 봐주겠군. 이놈! 그냥 죽어라!”

스파앗―!

비웃는 표정과는 달리 척마신군의 검에서는 서슬 퍼런 검기가 파도 치듯 밀려 나왔다. 그가 오늘날까지 강호에서 살아 남을 수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감(感)이었는데, 기가 찬 것도 좋고 어처구니가 없는 것도 좋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불길함이 느껴졌던 것이다.

‘이럴 때 자존심을 세우는 것은 멍청이들이나 하는 짓이지!’

그는 자기 자신을 협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마인들을 제거함에 있어서 협객만큼 비명횡사하기에 딱 좋은 부류들은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고, 마인을 상대하려면 적어도 손속만큼은 마인들 만큼, 아니 그들보다 더욱 잔인하고 악랄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평소 지론이었다.

자신은 협객이니 등을 보인 자는 상대하지 않는다, 자신은 협객이니 선객(先客)을 상대하여 기운 빠진 상대는 기다려 준다, 자신은 협객이니 상대의 딱함을 듣거든 물러나 준다, 등등……. 이 얼마나 멍청한 짓이란 말인가! 한마디로 다 개소리였다. 그의 관점상 진정한 인과응보를 논하자면 마인은 마인 답게 상대해줘야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런 지론을 지녔기에 아무리 어린놈이라 할지라도 봐준다거나 방심하지 않고 검법을 전개한 그는 물샐 틈 없이 촘촘한 검망(劍網)을 형성하여 상대의 지척까지 공격해 나갔다.

그 와중에 척마신군은 자세를 약간 수그리고 발도(拔刀) 자세를 취한 동천이 뭐라고 웅얼거리는 모습을 보았는데, 순간 그는 ‘제발 이기게만 해 달라고 부처님께 소원을 비는 것인가?’ 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들리지 않았지만 내용인즉슨, ‘너나 죽어라.’ 였다.

지이이이잉.

묘한 떨림 소리. 척마신군은 처음엔 이게 무슨 소리인가 했다. 하지만 그 찰나간의 생각은 뒤이어 벌어진 전율스런 광경에 휩쓸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어둠보다 더 진한 암흑의 물결이 그를 덮쳐왔던 것이다.

“헉?”

기겁할 틈도 없이 전면을 뒤덮은 어둠이 그가 발산한 검기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는 이를 악물고 재차 검법을 시전 했지만 상황은 이미 밑 빠진 독의 물 붓기였다. 다급해진 그는 생각을 달리하기 시작했고, 그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빠져나가야 한다는 그 생각 하나 뿐이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무사히 어둠의 영역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크윽! 겨, 겨우 빠져 나왔…….’

푸하학!

“커어억? 부, 분명 피했거늘! 크어으윽!”

심하게 휘청거리기 시작한 척마신군은 피 분수를 뿜어내기 시작한 가슴을 억지로 움켜쥐었다. 천운으로 심장까지 도달하진 않았지만 분명히 피했다고 생각한 상황에서 당한 치명상이자 그의 머릿속은 혼란스럽기가 그지없었다.

‘부, 분명히 피했다. 분명히 피했어! 분명……, 큭? 이, 이놈이 어딜 갔지?’

그가 혼란스러워 했던 순간은 극히 찰나에 불과했다. 생사를 가늠하는 상황에서 아주 찰나일 지라도 정신을 놓친 자신의 멍청함을 탓해야 했지만 그만큼 듣도 보지도 못한 무공에 당했기에 그가 느낀 정신적인 충격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순간의 시간을 허비한 대가로 상대의 행방을 놓친 척마신군은 타는 듯한 갈증에도 불구하고 감히 침을 삼킬 생각도 못할 만큼 극도로 긴장했다.

그는 분명히 길을 막고 있었고 누군가 자신을 스쳐지나 가는 감각을 느끼지 못했다. 그렇다는 것은 전방의 막힌 곳 어딘가에 있어야 한다는 소리인데 그 어디를 둘러봐도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보일 생각을 안 했다.

‘그럴 리 없다! 그놈이 나보다 고수가 아닌 이상! 아닌 이상……. 젠장할!’

갑자기 그의 머리에 혼선이 오기 시작했다. 그 무공의 위력만을 따진다면 자신보다 고수가 아니라고 단정하기 힘들었으니, 도저히 믿기 어려웠지만 그 나이에 화경에 이른 고수가 나타나지 말라는 법도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순간 그는 갑자기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오싹한 느낌이었다. 그는 머리가 쭈뼛 솟아오르는 듯한 공포를 느끼며 뒤를 휙! 돌아보았다.

땀으로 범벅이 된 그의 얼굴은 미친 듯이 주변을 살폈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봐도 뒤쪽에는 그 어떤 변화조차 없었다. 그저 텅 빈 어둠만이 그를 반기고 있을 따름이었다.

“으으, 나와라! 나와라, 이놈!”

반 실성한 그는 소리를 지르며 앞과 뒤를 쉴새 없이 번갈아 보았다. 그 와중에 현기증이 일어난 그는 멍청하게도 상처를 지혈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흘러내린 피가 이미 그의 상체를 다 적시고 있었던 것이다.

툭! 툭툭!

그는 재빨리 지혈을 시도했다. 그런 행위 탓인지 뜨거웠던 머리가 다시금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직이 심호흡을 한 그는 자신의 최대 보루라고 할 수 있는 검을 양손으로 꼭 쥐었다. 그와 동시에 그의 벽 뒷면이 스르르 무너지기 시작했다.

“……!”

그는 느꼈다. ‘거기로구나!’ 하는 외침이 그의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왔다. 그는 재빨리 휘돌며 검을 횡으로 그었다. 하지만 상대의 무기는 이미 그의 등을 베고 지나간 뒤였다. 이어 그의 몸은 휘청거렸다.

쨍그렁!

“끄으으으으!”

자신의 패배라니. 이 믿을 수 없는 현실과는 별개로 부릅떠진 척마신군의 두 눈은 자신을 벤 상대를 찾아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그의 두 눈동자는 급속도로 생기가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봐야 하는데. 봐, 봐야 하는데…….’

왜인지는 몰랐다. 다만 그는 자신을 죽인 상대의 얼굴을 꼭 확인하고 싶었다. 과연 자신을 죽인 그 어린놈은 어떠한 표정을 짓고 있을까, 그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흐려지기 시작한 그의 시야는 극히 한정적인 것만을 받아들였고, 그가 기억한 상대의 마지막 모습은 처절할 만치 차갑게 빛나는 눈동자였을 따름이었다.

그는 비로소 웃으며 바닥으로 허물어졌다.

쿵!

척마신군이 마침내 쓰러져 명을 다하자 동천은 그제야 힘든 기색을 내비쳤다. 옆구리와 허벅지 바깥 부분에는 제법 깊은 상처가 드러나 있었다. 척마신군은 몰랐지만 그의 공격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던 것이다.

‘내 무공이 시야를 가려서 무사할 수 있었다. 만일 저자가 동귀어진을 생각하고 한번 더 공격을 했다면 아마도 누운 것은 나였을 것이다.’

그런 것도 있었지만 애초에 척마신군이 상당히 지쳐 있었다는 점도 승리의 한 요인이었다. 그러나 동천은 운도 실력이라고 생각하며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뒤이어 그는 바닥에 떨어진 은형포단을 주워 가슴 섶에 잘 갈무리한 뒤 진기를 다스리며 천천히 걸어갔다.

치우도법은 최하 반 갑자를 지녀야 1회를 시전 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지지만 상대가 상대였던 만큼, 그는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내공을 소모하여 탈진한 상태였던 것이다.

‘싸움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급하게 도우러 가봐야 오히려 짐만 될 공산이 크다. 일단은 침착하게 진기를 다스려야 하고 도움을 주는 것은 그 뒤에 생각해봐야만 한다. 다행이 화정이가 있으니 나 하나 없다고 크게 밀리는 상황은 아니겠지만…….’

거기까지 생각하던 동천이 돌연 생각을 멈추었다. 누군가 자신이 있는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상대는 그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동처언~!”

화정이였다. 반가운 얼굴이었지만 동천은 그 순간 내심 ‘아차!’ 했다. 척마신군을 이쪽으로 유인을 하더라도 일단 화정이에게 그곳을 계속 지키며 도와주라는 명령을 내렸어야 했는데, 그런 언급도 없이 자리를 이탈하자 마라신군을 해치운 그녀가 자신을 찾아 이곳까지 달려왔던 것이다.

‘화정이의 공백은 분명히 크다! 이런 멍청한 놈!’

자기 자신을 질책한 동천은 심각해진 얼굴로 서둘러 그녀를 향해 마주 달렸다. 그러자 안겨들 듯이 달려오던 화정이가 갑자기 주춤하기 시작했다. 거리가 가까워진 뒤에야 주인의 달라진 기도를 느꼈던 것이다. 덕분에 조심스러워진 얼굴로 동천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한 화정이는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도, 동천, 안녕? 에헤헤, 나 다시 가도 돼?”

그녀는 확실하게 주눅이 든 상태였다. 이는, 역의 성격으로 변한 동천을 무서워하는 그녀였으니 당연한 현상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간절한(?) 바람은 요원한 꿈이 되어 버렸으니, 바로 그녀를 뒤따라 비호같이 달려 온 무안신군 덕분이었다.

“이년! 고작 도망간 곳이 이곳이더냐? 흥! 그러고 보니, 제 주인을 찾아온 것이었군! 그러나……, 헛?”

살기로 무장한 무안신군은 무심결에 저만치 쓰러진 사람을 확인하곤 그녀와 동천을 지나쳐 재빨리 쓰러진 자의 상태를 확인했다.

“이보게! 좌무양! 이보게, 좌무양! 크흐흑!”

무안신군은 척마신군에게 진기를 주입하며 분노와 비통함이 뒤섞인 고함을 질러봤으나 그런다고 이미 주검이 된 상대가 깨어날 턱이 없었다. 그제야 현실을 깨닫고 허탈해진 그는 척마신군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스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누가 이랬느냐.”

그가 물었으나 동천은 가만히 바라보기만 할 뿐 침묵을 고수했다. 화정이가 상대하면 된다지만 사람의 일이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기에 최대한 시간을 끌며 내공을 회복하려는 것이었다. 잠시 후 대답을 기다리다 못해 시선을 뗀 무안신군은 핏발 돋친 눈동자를 동천에게로 옮겼다.

“누가 이랬느냐.”

그제야 동천의 입이 열렸다.

“나요.”

“…….”

갑자기 정적이 찾아왔다. 무안신군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다시금 말문을 열었다.

“네가 알 턱이 없지만 좌무양은 본좌와 더불어 오대신군 중 1명이다. 비록, 우리들 중 실력은 최하에 속했지만 화경에 근접한 고수로서 감히 너 따위가 말장난을 할 만큼 하류잡배가 아니다. 내 다시 한번 묻겠다. 누가 이랬느냐.”

무안신군의 살기 짙은 눈빛을 가감 없이 받아들인 동천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상대의 질문에 대답했다.

“나요.”

그러자 무안신군의 입매가 묘하게 비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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