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76화
도연은 감은 눈꺼풀을 파르르.. 떨더니 곧이어 눈을 떴다. 순간적으로 내리쬐는 빛살에 눈살을 찌푸렸지만 몇 번 깜빡이자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때 옆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깨어났느냐?”
도연은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얀 백삼에 가슴 쪽에는 약(藥)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는 것을 보아 약왕전의 회복실인 것 같았다. 며칠 전에도 왔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알아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일어나려고 했던 도연은 중년의 의원의 제지(制裁)로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제가 왜 여기에 있는 겁니까…”
“허허허.. 기억이 안 나느냐?”
의원의 물음에 도연은 자신이 왜 여기에 있는지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주인의 재촉으로 달렸던 것까지 기억은 하는데… 더 이상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도연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으음.. 그게 잘…”
의원은 기억이 안 나도 된다는 식의 표정을 지었다.
“괜찮다. 한숨 자고나면 기억이 날 거야. 자두거라.”
주인에게 가봐야 하기 때문에 안 된다고 말하려던 도연은 의원이 혈을 누르자 입을 약간 벌렸다가 다시 잠이 들었다.
“휘유.. 다행이다. 한 대밖에 안 맞았으니…”
그때 당시 무지하게 맞을 줄 알았던 동천은 다행히 처음에 딴생각하다가 맞은 것 외에는 맞은 게 없자 가슴을 쓸어내리며 동굴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아니지? 내가 왜 맞아야 했던 거지? 그년, 진짜로 싸가지없는 년이네? 도대체 나를 때려서 지한테 그 어떠한 이득(利得)이 있다고 그러는 거야? 누가 돈을 줘.. 밥을 줘… 가만? 그러고 보니 수련이 밥은 주겠군.”
이렇게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이던 동천은 밖으로 걸어나가면서 한 가지 난관에 부딪혔다.
“어떻게 가지?”
결국, 가기 싫다는 수련을 이끌고 약왕전에 도착한 동천은 이제 수련의 도움이 필요 없게 되자 소연이하고 놀려면 놀고, 말라면 말라는 식으로 말한 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동천은 밖에서 지랄하는 수련의 욕을 무시한 채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휴우.. 힘든 하루였다.”
결국, 제 풀에 지친 수련이 잠잠해지자 동천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키득! 거렸다. 그렇게 웃고 있던 동천은 순간적으로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잠깐만? 뭔가를 빠뜨린 것 같단 말야? 도대체 뭐를 빠뜨린 거지?”
자신의 몸속을 뒤져보고, 훑어보고, 털어보던 동천은 아무것도 빠뜨린 게 없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히 뭔가가 빠진 것 같은데 생각이 안 났던 것이었다. 밖으로 나선 동천은 자신이 어떤 물건을 흘린 게 아닌가 해서 돌아다니다가 지나가는 똥개를 보고 나서야 자신이 빠뜨린 게 무엇인지 알 수가 있었다.
“그렇지? 도연이 그 자식을 까먹었네? 얘가 아직 안 왔나? 어? 그러면 도대체 이 자식은 어디에 있는 거지? 그때 쓰러진 도연을 누군가가 봤다면…”
요양실밖에 없다고 생각한 동천은 시녀를 시켜서 거기에 있는지 알아보게 했다. 그 시녀는 총총걸음으로 달려가더니 이각여가 지난 후 땀을 흘리며 달려왔다.
“그래.. 있어?”
소전주의 물음에 확실히 대답해줄 건덕지가 있자 그 시녀는 가쁜 숨을 고르며 활기차게 웃었다.
“예.. 후우.. 거기, 가보니까요. 두 명의 어린아이가 있었는데요. 다행히도 그중에 도연이라는 아이가 있더라고요.”
그 말에 도연의 행방을 알아낸 동천은 시녀와 마찬가지로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 그런데 걔는 어디 있냐?”
순간적으로 당황한 시녀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예? 아.. 그게요. 그 아이가 영양부족(營養不足)으로 쓰러져서 움직일 수가 없다고 의원님께서 그러시길래…”
그 순간 동천의 신형은 공중으로 떠올랐다. 너무 높게 뛰어올라 때를 놓친 동천이 밑으로 내려오고 있을 때, 소전주의 행동에 놀라 고개를 들고 있던 시녀는 잔인한 웃음을 지으며 밑으로 하강(下降)하는 동천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아울러 더 빨리 내려오는 주먹도 볼 수 있었다.
따-악!
“아악-!”
두개골에서 밀려오는 엄청난 충격으로 시녀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자빠지자 바닥에 멋들어지게 착지한 동천은 아무도 보고 있지 않지만 지딴엔 멋있게 해보려고 천천히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일어섰다. 그리고 한 소리 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야! 가서 그 새끼가 있는지 알아봤으면 데려와야 될 거 아냐! 너는 내가 할 일 없이 그 자식이 어디 있는지 알아보기만 하라고 너한테 일을 시킨 줄 알아? 너는 그렇게 머리가 나쁘냐?”
나자빠져서 머리를 부여잡고 부들거리던 시녀는 동천이 큰소리로 자신을 나무라자 두려운 마음에 아픔을 추스르고 겨우 일어났다. 그녀는 울먹이며 빌었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머리가 나빠..서 그만… 용서해 주세요.”
두 손으로 싹싹! 빌며 말하는데 아무리 성깔이 더러운 동천이라도 더 이상은 어쩔 수 없었다.
“음.. 좋아. 봐주지.. 근데, 맞은 게 아팠냐?”
소전주가 봐준다는 말에 기쁨의 환호를 지른(물론, 속으로.) 시녀는 아프냐는 말에 얼른 고개를 저었다. 괜히 그의 신경을 건드릴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아니에요. 그럴 리가 있나요. 저.. 하나도 안 아파요. 정말이에요.”
그녀의 강한 부정에 동천은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그으래..?”
동천의 어감이 이상하게 변하자 시녀는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서… 설마?’
부웅–!
동천의 몸은 다시 위로 솟구쳤다…
동천은 두 대 맞고 기절해버린 시녀의 나약함을 탓하며 마차 안에서 중얼거렸다.
“에이.. 요즘것들은 왜 이렇게 나약한 거야? 쯧쯧.. 내가 어렸을 적에는 그렇게 허약한 아이는 없었는데.. 말세야. 말세…”
그 순간 마차가 멈추었다.
“소전주님. 다 왔습니다.”
“벌써?”
“예. 내리시죠.”
마부가 문을 열어주자 동천은 아쉬운 듯이 입맛을 다시며 밖으로 나왔다. 더 타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체면을 중시하는 동천이 그런 내색을 할 리가 없었다. 마차에 내려서 안으로 들어간 동천은 곧바로 요양실 쪽으로 걸어갔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어떤 이가 뒤에서 물어보았다. 당연히 고개를 돌린 동천은 한소리 하려다가 목소리의 주인공이 부전주라는 것을 깨닫고는 재빠르게 표정을 바꾸었다.
“어? 헤헤.. 부전주님 아니세요? 그때, 이후로는 뵌 적이 없었는데 요즘 어떻게 지내고 계시나요?”
부전주는 동천의 질문에 제법 멋들어지게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하하! 저야, 평소대로 쓸데없이 돌아다니다가 배가 고프면 여기 와서 밥을 축내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도 오늘은 길을 가다가 쓰러져있는 아이를 데려와서 밥값은 했답니다. 하하하!”
부전주의 너스레에 속으로 짜증을 내던 동천은 오늘 쓰러져있는 어린아이를 데려와 치료(治療)해 줬다는 말에 눈을 크게 떴다.
“혹시.. 걔 이름이 도연이라고 합니까?”
그 말에 부전주는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아시는지요? 그러고 보니.. 소전주께서도 어린 하인이 있다고 들은 것 같은데… 그 아이가..”
동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제가 일을 하나 시켰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오질 않더군요. 그래서 한참을 찾았는데요. 수소문(搜所聞)을 해보니 여기에 제 하인과 비슷한 녀석이 있다고 해서 맞나 확인해 보려고 왔습니다. 헤헤.. 부전주님의 말씀을 들어보니 다행히 맞나 보네요.”
아주 자연스레 나오는 동천의 거짓말에 부전주는 간단하게 속아 넘어갔다. 그는 잠시, 고개를 끄덕이더니 지금 도연의 상태에 대해서 말했다.
“그 아이가 맞나 보군요. 그런데.. 그 아이에게 밥은 제대로 주는 겁니까? 제가 오늘 보니까,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몸 상태가 아주 형편없었습니다. 소전주님께서 어련히 잘해주시리라고 생각합니다만.. 아무래도 며칠은 여기에서 요양을 해야겠습니다.”
아까전에 시녀의 말을 무심코 넘겼던 동천은 생각 외로 심각하게 말해주는 부전주의 얘기에 눈썹을 찌푸렸다. 그러나 속으로는 머리를 굴리기에 여념(餘念)이 없었다.
‘영양실조? 호오.. 그렇다면, 빌빌 거린다는.. 그건, 그렇고 여기에서 며칠 데리고 있겠다고? 그렇게만 된다면 며칠간 놀면서 땅 파도 된다는 얘기잖아? 킥킥킥.. 착한 아이에게는 복이 온다더니…. 아이구~ 좋아라….’
속과는 달리, 동천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묘하게 비틀었다.
“그런 일이.. 저는 겉으로 볼 때는 활발하길래 잘 먹는 줄 알았는데.. 내 이놈의 식사 당번 자식을…”
동천이 눈깔을 부라리며 달려 나가려고 하자 갑작스러운 소전주의 행동에 당황한 부전주는 저러다가 인간 하나 병신이 될 것 같아서 황급히 동천을 제지시켰다.
“아아.. 너무, 화만 낸다고 일이 다 해결되는 것이 아니니 확실한 진상(眞相)은 지금 들어가서 도연이라는 하인에게 물어보기로 하지요.”
원래 식사 당번을 혼내러 갈 마음도 없었던 동천은 부전주의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달려 나간 뒤 멈춰 서려 했다. 그런데 부전주가 그런 수고까지 덜어주자 내심 기뻐했다. 하지만, 소전주의 체면에 갑자기 표정을 바꾸면 헤픈 놈이 되기에 여전히 찡그린 인상을 펴지 않았다.
“씩.. 씩.. 부전주님이 그렇게까지 말해주시니 시시비비(是是非非)는 나중에 가리기로 하지요.”
화를 냈지만 금세 안정적인 마음가짐을 가지는 저 태도.. 부전주는 소전주라는 아이가 왜 성깔이 더럽다고 소문이 났는지 이해가 안 갔다. 자신이 보기에는 예의가 바르게 보이는데… 역시, 소문은 믿을 게 못된다고 생각한 부전주는 가만히 서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동천을 이끌었다.
“자.. 어서 들어가 볼까요?”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