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77화
부전주의 안내로 문을 열고 들어간 동천은 약간 파리한 안색으로 누워서 자고 있는 도연을 볼 수 있었다. 꽤 많은 인원의 인간들이 있었지만 도연이 혼자 뒤편에 따로 떨어져 있었기에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저기 있습니다. 가서 보지요.”
동천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부전주를 따라 도연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평상시 같으면 먼저 꿀밤을 한 대 먹인 뒤 깨웠겠지만 지금은 보는 눈이 많았기 때문에 점잖게 도연을 흔들어 깨웠다.
“도연아.. 야.. 일어나 봐. 야..”
“하하.. 그렇게 깨워서는 일어나질 않습니다.”
“예? 그게 무슨 소리죠?”
원래 잘 웃는 것인지 아니면 동천의 놀라는 표정이 웃겨서 웃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부전주는 계속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 혈을 짚었으니 그렇게 해서는 깨어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제가 깨우죠.”
‘이 인간이… 열받게 하네? 그렇다면 그렇다고 진작 말해줄 것이지.. 누구 똥개 훈련시킬 일 있나…’
늘 그렇듯이 동천의 변덕은 죽 끓듯 했다. 방금 전까지 마음에 들어 했다가 자신이 보기에 조금만 잘못해도 동천의 바라보는 시선은 금세 변했다. 그러나 이번 상대는 만만치 않기에 늘 그렇듯이 겉으로만 웃으면서 부전주의 행동을 막았다.
“아닙니다. 영양실조로 누워 있는데 괜히 깨워서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냥 가죠..”
그 말에 부전주는 감탄의 빛을 띠었다. 역시.. 소전주는 소문과는 다른 예의 바른 아이라고 확신했다.
“흠.. 그러시다면야. 제가 며칠 내로 건강하게 돌려보내겠습니다. 염려 마시고 돌아가시지요.”
건강하게 돌려보내든 병신 돼서 돌려보내든 동천하고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지만 예의상 웃으며 인사를 하고는 마차를 타고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동천의 예상대로 땅 파는 일은 도연이 없자 순풍에 돛을 단 듯 순조롭게 진행됐다. 대충 해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이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놀면서 땅을 파던 동천은 도연이 쓰러진 지 이틀 후에 찾아온 사부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부님. 생각보다 돌덩이들이 너무 많아요. 이건 땅을 파는 건지 돌을 파내는 건지 도저히 모르겠어요. 그래서 늦어지는 거니까 너무 나무라지 마세요.”
그 예로 동천은 증명이라도 해 보이듯이 한 곳에 모아둔 큼지막한 돌덩이들과 자잘한 돌들을 보여주면서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래서 의문을 느낀 역천이 한 줄을 왕복할 때까지 서서 지켜보았다. 당연히 모아놓은 돌덩이만큼의 돌들이 나올 리가 없었다. 그 돌들은 동천이 사부가 올 것을 대비해서 하인들에게 미리 가져다 놓으라고 시켰던 것들이었으니 나오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에 대해 역천이 어찌 된 것이냐고 물어보자 동천은 별것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에이, 사부님도 참… 금 캐는 인간들이 한 곳에서만 금을 캐지 여러 곳에서 금을 캐는 거 봤어요? 아마, 이 돌덩이들도 한 곳에만 모여있었나 보죠.”
좀 어폐가 있는 동천의 말에 묵묵히 서있던 역천은 그때부터 하인 하나를 붙여줬다. 도연이 영양실조로 누워있으니 다시 돌아올 때까지 감시자로 데려놓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역천의 행동은 오히려 동천을 편하게 해주었다. 그때부터 동천은 누워서 책이나 읽으며 낄낄거렸고, 잠시 졸음이 올 때면 화정이를 데려다 놓고, 무릎베개를 삼은 뒤 낮잠을 즐겼다.
그렇다면 땅은 누가 파는가?
“야! 더 파 이 자식아.. 너, 죽고 싶냐? 내가 균일하게 파라고 했어.. 안 했어? 그래.. 그거야. 히힛!”
동천은 감시하러 온 하인을 시키고 자신은 놀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 녀석이 없으니 너무 기분 좋다.. 화정아.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오늘도 어김없이 화정이를 데려와 무릎에 머리를 올려놓고, 누워있던 동천은 기분이 너무 좋아서 대답을 안 할 게 뻔한 화정이에게 물어보았다. 늘 그렇듯이 동천의 질문에 화정이는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생각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자신의 말에 긍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여주자 동천은 싱글벙글했다.
“랄랄라… 응? 야! 힘드냐?”
이를 악물며 겨우겨우 땅을 파던 사내가 결국은 거친 숨결을 내쉬며 잠시 멈추자 동천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어보았다. 조금 풀린 눈으로 동천을 쳐다본 사내는 소전주의 얼굴 표정을 재빠르게 살펴본 뒤 별로 화나있는 것 같지 않자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예에.. 조금..만 쉬면 안 되겠습니까…?”
잠시 생각을 한 동천은 그러라고 했다. 그 말에 안도를 하고 주저앉은 사내는 다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 대신.. 오늘 한 줄 더 파고가.”
퍼버버벅!
자신의 말을 듣고 있는 힘. 없는 힘. 다 짜내서 곡괭이질을 하는 사내의 모습에 동천은 만족의 웃음을 지었다.
‘역시, 저런 놈들에겐 약간의 위협만 주면 된다니까? 우히히히!’
동천이 자신의 생각이 웃겨서 배를 부여잡고 낄낄거리고 있을 때 한 여인이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넌, 뭐야?”
안 그래도 긴장하며 걸어온 여인은 퉁명스럽게 물어보는 소전주의 모습에 지레 겁을 먹고 주춤거렸다. 그런 모습에 더 짜증이 났는지 동천은 더욱 크게 소리를 질렀다.
“에이씨.. 야! 너 뭐냐니까?”
“그.. 그게요. 부전주님의 명령으로 왔는데요…..”
“응? 부전주님의 명령으로 왔다고?”
“예.. 부전주님께서 도연이라는 아이를 내일 보내주시겠다고 그러셨습니다.”
순간, 동천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드디어 놀고먹는 일도 이렇게 끝나는 것인가…? 잠시, 생각하는 듯이 인상을 찡그리던 동천은 아직도 안 가고 멀뚱히 서있는 시녀의 모습을 보았다.
“야.. 더 할 말 있냐?”
시녀는 조금 창백해진 얼굴로 대답했다.
“아니요.. 저는 소전주님께서 가라고 하셔야…”
동천은 더 이상 상대하기도 싫었는지 손을 휘저었다.
“가!”
올 때와는 달리, 엄청난 속도로 사라지는 시녀의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동천은 곧이어 시선을 바꾸더니 내일부터 도연이 온다는 말에 속으로 희희낙락(喜喜樂樂)거리며 땅을 파는 사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음.. 힘들지?”
내일부터는 이런 힘들고 지긋지긋한 일을 안 해도 되었는데 힘들 리가 없었다. 오히려 안 나던 힘까지도 동원돼서 신나게 땅을 파던 사내는 무슨 소리냐는 듯이 씩씩하게 말했다.
“아닙니다! 이 정도야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오… 그 말에 감탄을 한 동천은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더니 화정이의 무릎에서 일어났다.
“역시, 내가 사람은 잘 봤다니까? 좋아. 좋아.. 그렇게 힘이 남아돈다니까… 그러지 말고, 아예 다 파고가.”
“예?”
갑작스러운 말에 놀라 하는 사내의 질문에 동천은 웃으면서 대꾸해줬다.
“히히.. 얼마든지 할 수 있다며? 나는 그게 너무 힘들어서 못하겠어. 그러니까, 좀 힘들더라도 내가 내일 일어나기 전까지는 모두 해놔. 알았어? 나는 말야.. 네가 잘 해내리라고 믿는다. 잘 해봐!”
“…….”
동천이 화정이를 데리고 나갈 때까지 멍하니 서있던 사내는 문득, 손이 쥔 곡괭이에서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터덕…
곡괭이가 땅에 떨어졌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다만… 다만, 이제 자신은 죽었다는 것만 머릿속에서 뱅뱅.. 맴돌 뿐이었다. 신나하며 방으로 돌아와 화정이와 놀고 있던(목 조르기. 허리 꺾기. 물론, 당하는 건 화정이만.) 동천은 소연이 인기척을 낸 뒤, 흥분해서 들어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주인님-! 알아냈어요. 제가 화정이의 진화를 앞당길 수 있는 방법을 알아냈어요.”
얼굴이 상기된 채로 말하는 소연의 말에 엎어져있는 화정이의 다리를 잡고, 허리를 꺾고 있던 동천은 얼른 다리를 놓았다. 그리고, 동천도 약간 구미가 당기는 듯한 표정으로 물어보았다.
“그래? 뭔데?”
동천의 허락이 떨어지자 소연은 우선, 숨을 고른 다음 기대해도 좋다는 식으로 웃었다.
“호호.. 제가 며칠 동안 돌아다니면서 남녀 사이가 좋아지려면 어떻게 해야 되냐고 물어봤거든요? 그랬더니요. 서로, 입맞춤을 하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래요. 더러는… 성..교..라는 것도 있었는데요. 그건, 그냥 넘어가고 어쨌든 뽀뽀가 제일 좋대요.”
성교(性交)라는 대목에서 동천도 못 알아들을 정도로 작게 말하며 넘기는 소연의 모습에 앞에 ‘성’자만 알아들은 동천은 자신이 물어보면 또, 소연이 궁상을 떨까 봐 자신이 알아서 생각했다. 어쨌든, 동천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야. 그건 좀 더럽잖아. 난, 싫어. 그러니까, 그거 말고 다른 거 알아와.”
자신이 며칠 동안 밤마다 다리를 주무를 정도로 돌아다니며 얻어낸 성과(成果)를 주인이 간단하게 무시해버리자 수긍보다는 오기가 일어난 소연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안 돼요! 이건, 확실한 방법이라고요. 주인님.. 제발, 다시 한번 생각해 보세요… 예?”
이미 한 번 안 된다고 정한 것을(더군다나 자신이 더럽다고 생각한 일.) 번복할 리가 없는 동천은 매정하게 거절했다.
“안된다면 안 되는 거야. 너, 맞고 싶어?”
맞고 싶냐는 말에 조금 쫄은 소연은 한풀, 기가 꺾인 듯한 얼굴로 애원했다.
“그래도요.. 사람들이 그게 제일 좋다는데….”
자꾸만 미련을 못 버리는 소연의 행동에 한 대 치면, 그만이지만 그래도 며칠 동안 그걸 알아내느라 돌아다녔다는 게 기특하다고 생각한 동천은 뭐, 다른 말로 소연을 포기시키는 방법이 없을까.. 하고, 잠시 머리를 굴려봤다. 역시, 이런 일은 머리를 잠깐만 굴려도 좋은 대처 방안(對處方案)이 생각나는 게 동천이었다.
“음.. 좋아. 그러면, 너와 내 사이가 더욱더 좋아지자는 의미로 우리끼리 먼저 뽀뽀해 보자. 만약에 그리해서 너랑 나랑 아주 좋은 관계가 유지된다면 네 말대로 할게. 어때? 한번 해볼래?”
해볼 리가 없었다.
“아.. 아니요. 제가 한 말은 없었던 일로 해주세요. 저, 갈게요.”
부리나케 달려 나가는 소연을 보고, 동천은 득의의 웃음을 지었다.
“까불고 있어.. 히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