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78화
아침에 일어난 동천은 어저께 도연이 온다는 통보를 받고, 그 생각만 하느라고 내내 기분이 안 좋았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어제 그 녀석에게 마저 다 파라고 시켰으니 지가 친구를 시켜서 같이하든 어떻게 하든.. 다 해냈을 것이 분명했다. 동천은 이불을 걷어차고 한껏 기지개를 켰다.
“아아함.. 쩝… 배고프다.”
동천이 너무 뒤척였는지 그 바람에 곁에서 누워있던 화정도 천천히 눈을 떴다. 그걸 본 동천은 시큰둥하게 말했다.
“야.. 너도 배고프냐?”
“씨-익..”
“웃냐? 넌, 그거밖에 할 게 없냐?”
그래도 말없이 웃기만 하는 화정을 잠시 쳐다본 동천은 더 이상 지체하는 것은 시간 낭비라는 생각에 화정이의 볼에 뽀뽀를 해주었다. 그리고 자신도 화정이의 뽀뽀를 받았다. 어저께 소연이를 내보내고 좀 생각해 봤었는데 그것도 괜찮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전히 입맞춤은 더럽다고 생각해서 생각해 낸 것 볼에다 하는 뽀뽀였다. 둘밖에 없었지만 좀 어색했는지 화정이가 뽀뽀를 한 곳을 잠시 손으로 비비던 동천은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화정이에게 말했다.
“화정아.. 오늘도 날이 밝았다. 새 시대를 살아가는 나와 네가 과연, 이 험한 세상을 올바르게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틈만 나면 생각해봐라. 알겠냐?”
화정이 그런 동천의 말에 해답을 줄 리가 없었지만 어쨌든 이렇게 생각하라고 시키면 자신이 그만두라고 할 때까지 머리를 굴릴 거라는 것을 안 동천은 시키나 마나 한 문제를 내주고 속으로 자신이 내준 문제가 너무 끝내준다고 흐뭇해했다.
조금 후에 소연과 화정이와 같이 밥을 먹은 동천은 오늘도 화정이를 잘 가르치라고 소연에게 엄명을 내린 뒤, 가벼운 걸음걸이로 뒷마당에 갔다. 동천의 예상대로 뒷마당에 가보니 그 녀석이 일을 착실히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큭큭큭…! 그러면 그렇지.. 지가 안 해놓으면 어떻게 되려고 안 해놨겠어. 으헤헤헤!”
기분이 좋아진 동천은 이제 도연이 와도 감시할 일이 없어졌으니 이제 와보라는 식으로 혼자 으쓱해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가만…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도연이를 기다려야 하는 거지?”
다시 기분이 나빠진 동천은 씩씩거리며 도연이 있는 방으로 가려했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도연의 방이 어딘지 모른다는 것을 자각(自覺)한 동천은 할 수없이 소연의 방으로 건너갔다. 안으로 들어가니 소연이 화정이를 앞에 앉혀놓고 씨부렁거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어? 주인님. 수련은 어떻하고, 여기에 오셨어요?”
자리에 남은 의자에 앉은 동천은 소연의 말을 무시한 채 탁자에 놓여있는 책을 집어서 책의 제목을 보았다.
“천자문(千字文).. 그래. 이걸로 화정이를 가르치겠다는 거냐?”
좀 뚱한 얼굴로 물어보는 주인을 주의 깊게 쳐다본 소연은 하는 말투는 저래도 결과적으로는 자신에겐 아무런 해가 안 온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웃으며 얼른 대답했다.
“예. 다른 분들께 종합적으로 물어본 결과. 처음에 배우는 것은 아무래도…”
딱!
“아야!”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소연의 머리를 때린 동천은 들고 있던 책을 다시 탁자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 바보야. 먼저 말을 트이게 해야지.”
안심하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꿀밤을 맞아서 머리를 비비던 소연은 동천의 말을 듣고, 억울하다는 듯이 반박했다.
“아니에요.. 그.. 용독경에서 그러는데, 강시는 말보다 글자를 먼저 익혀야 학습능력이 더 뛰어나진다고 그랬다구요.”
“그래? 정말이야?”
“네. 정말이에요. 강시는 입이 퇴화되었기 때문에 아무리 애를 써도 단시간에는 효과를 보기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쓰여 있었다구요. 전.. 억울해요! 제가 왜 맞아야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얼굴을 붉히면서까지 볼멘소리를 하는 소연의 기세에 잠시 주춤! 한 동천은 가만히 생각해보니 자신이 왜 소연에게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떫냐?”
“예?”
“떫냐고…”
동천의 말에 그제서야 상황을 인식한 소연은 얼른 손을 저었다.
“헤헤.. 아닌데요.”
“좋아. 나는 여기서 네가 가르치는 걸 보고 있을 테니까, 마음 편히 가지고 가르쳐봐.”
동천이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데 마음 편히 가르쳐질 리가 없었지만 괜히 그런 눈치를 보였다가 방금처럼 또 맞을까 봐 소연은 그러라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인 후 화정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자.. 다시 써봐. 이게 땅지(地)자 거든?”
소연의 말에 엉성하게 지필묵(紙筆墨)을 집는 화정이를 잠시 쳐다본 동천은 손을 내밀어 화정이의 행동을 제지시켰다. 그러고는 소연을 바라보며 인상을 썼다.
“야! 내가 화정이를 가르치라고 한 지가 언젠데 아직도 땅지자야?”
안 그래도 가르치고 또, 가르쳐줘도 며칠 내내 천(天)자만 가지고, 어물쩡대는 화정이 때문에 속이 상했었는데 그걸 모르는 주인이 자신을 나무라자 소연은 정말로 억울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힘없는 소연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제가.. 그러고 싶어서 지금, 이러고 있는 게 아니에요.. 이건 순전히 화정이가 머리가 나빠서 그러는 거예요. 가르치고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다시 가르치고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어휴..! 전, 정말 화정이 때문에 힘들어요.”
처음에는 변명 비슷하게 말을 꺼내다가 나중에는 푸념 섞인 말을 꺼내는 소연을 잠시 쳐다본 동천은 정말 그런가? 해서, 자신이 직접 화정이를 가르쳐 보았다.
결과는…
“음.. 그래, 그럴 수도 있지. 그럼, 그렇고말고! 소연아. 잘 해봐라. 나는 너를 믿는다. 잘해봐. 알았지?”
주인이 결과적으로 자신에게 계속 화정을 가르치라는 말에 가슴이 무거워졌지만 그래도 자신이 화정이를 가르치는데 얼마나 많은 고충이 있는지 주인이 알아줬다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예..”
소연이 화정이를 가르치는데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알게 된 동천은 내심 좋아하면서 탁자에 상체를 엎드렸다. 그러고는 소연에게 다시 가르치라고 시킨 뒤, 눈동자만 왔다.. 갔다… 하면서 둘이 하는 행동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똑같은 말과 행동만 반복하는 장면을 오랫동안 말없이 바라보면 당연히 졸리는 법..
“자, 다시 2백 번 써봐.”
남이 쓰기에는 어마한 분량이지만 화정이에게는 별게 아닌 분량을 시킨 소연은 누워서 침을 흘리며 자고 있는 동천을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어휴.. 더러.. 저 침 좀 봐… 앗? 들이키네? 우웁! 더는 못 보겠다…’
못 볼걸 봤다는 얼굴로 고개를 돌린 소연은 얼굴이 아름다운 화정이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속이 한결 나아지며, 아울러 기분까지 상쾌해지는 것을 느꼈다. 단, 화정이가 쓰고 있는 개발새발의 글씨를 보기 전까지는…
“쩝.. 아무래도 인간은 완벽한 게 아닌가 보다. 그치?”
“으.. 응? 뭐? 너, 지금 뭐라고 했냐?”
팔을 베고 자서 옆 얼굴에 이리저리 옷자국이 난 동천은 소연이 화정에게 말한 것을 자신보고 말한 줄 알고, 아직 잠이 덜 깬 얼굴로 눈을 게슴츠레 뜨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모습이 재미있게 보였는지 소연은 살풋이 웃었다.
“호호.. 아니에요. 화정이에게 말한 건데 주인님께서 잠결에 잘못 알아서 깨신 거니까 피곤하시면 좀 더 자세요.”
그 말을 듣고, 있는 대로 기지개를 켠 동천은 고개와 어깨를 이리저리 돌렸다. 그제서야 잠이 어느 정도 물러나는 것을 느꼈다.
“아-함… 잘 잤다. 야, 내가 어느 정도 잤냐.”
동천의 물음에 소연은 눈동자를 또르르.. 굴리더니 대충 시간을 계산해본 후, 입을 열었다.
“음.. 한 시진 조금 모자라는 것 같은데요?”
“그래?”
“예.”
소연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던 동천이 다시 물어보려는 찰나, 누가 방문을 두드렸다. 그리곤 곧이어 도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똑..똑.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분명히 자신을 찾아온 거라고 생각한 동천이 소연을 향해서 말하지 말라고 입 모양을 내는 동시에 손을 마구 휘저었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예? 그러세요.. 가 아니고요. 저기.. 아야!”
말하자마자 동천의 행동을 본 소연이 말꼬리를 흐리게 한 뒤, 말을 바꿨지만 그런 소연에게 날아온 것은 꿀밤이었다. 갑자기 들려오는 소연의 아픔 섞인 소리에 도연은 잠시 주춤했지만 그 소리는 자신의 주인이 여기에 있다는 확신을 가져다주는 소리였기에 내심 안심을 하고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을 여니 소연은 정수리 부근을 잡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동천은 뚱한 표정으로 도연이 들어와도 본체만체하고 있었다.
“여기에 계셨군요. 한참을 찾아다녔습니다.”
한참을 찾았다는 것을 증명(證明)이라도 하듯 도연의 얼굴과 목 주변은 땀에 흥건히 젖어있었다. 도연이 자식이 자신을 찾느라고 꽤 고생(苦生) 했다는 것을 직감한 동천이 속으로는 통쾌해했지만 겉으로는 아무런 내색도 안 한 채 말했다.
“흥.. 야, 뭐하러 날 찾아? 땅 파는 거는 다 했는데…”
동천의 말을 듣고 난 도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 일 때문에 주인님을 한참 찾아다녔습니다.”
“왜.”
“제가 전주님께 주인님께서 땅을 모두 파셨다고 말씀드리니 전주님께서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 주인님을 찾느라고 시간이 조금 지체됐으니 빨리 가시지요.”
한 가지 일이 끝났으면 다시 한 가지 일이 생기는 법.. 동천은 사부가 자신의 생각대로 또 다른 일을 시킬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분명히 무공 초식을 가르쳐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재빠르게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래? 좋아. 가자.”
마차를 타고 사부가 계신 곳으로 간 동천은 시간이 꽤 지났다는 도연의 말이 떠올라서 내리자마자 급히 사부가 계신 곳으로 달려갔다.
“사부님! 부르셨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