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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79화


자신이 부른 지가 반 시진이 거진 넘어가는 시점에서 기다려도 오지 않는 제자 때문에 다른 하인에게 다시 시키려고 일어서던 역천은 제자가 헐레벌떡 달려오는 기척이 느껴지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점잖게 자리에 앉았다.

“왔느냐?”

“헤헤.. 좀 늦었죠? 아, 글쎄 그 녀석이 제가 소연의 방에 있는 줄도 모르고 다른 곳만 찾아서 돌아다녔다지 뭐예요? 나참.. 그래서 지금 오게 됐어요.”

자신이 물어보는 수고를 덜어준 제자를 웃으며 바라본 역천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품 안에서 하나의 책자를 꺼내 동천의 앞으로 건네주었다. 그것을 보고, 무공 책자라는 것을 직감한 동천은 기쁨에 환호성을 지르고 싶었지만 짐짓, 모른척을 하면서 사부에게 물어보았다.

“이게… 뭐예요?”

역천은 대답 대신 손가락으로 읽어보라고 겉표지의 글씨를 짚었다. 그리고 한자.. 한자.. 손가락이 글씨를 짚으며 옮겨갈 때, 동천이 따라 읽는 소리도 들렸다.

“귀(鬼)..영(影)..신(身)….법(法). 이건… 아하? 이건, 본문의 비전신법이죠? 그렇죠?”

자신의 제자가 단박에 알아버리자 역천은 기분이 좋았지만 억지로 그것을 참으며, 무게를 잡고 입을 열었다.

“그렇다. 네가, 이 사부가 설명해줄 필요도 없이 단 한 번에 알아맞히니 이 사부는 기쁘기 그지없구나… 앞으로 일주일간 아침, 저녁으로 나를 찾아와 이 신법의 기본적인 묘리(妙理)를 익히도록 해라. 알겠느냐?”

육체적인 노동을 안 하고, 말만 들으면 된다는 사부의 말에 동천은 신이 나서 대답했다.

“예! 알았습니다.”

“좋아.. 오늘은 대충 훑어보아라.”

“예. 예.. 히힛!”

신이 나서 밖으로 나선 동천은 말없이 서있는 도연을 무시한 채 마차에 올라섰다. 도연이 급히 문을 열어줘서 거드름을 피우며 안으로 들어간 동천은 앉자마자 책을 옆에다 던져버렸다.

“랄랄라… 좋은 날이야.”

도연을 내버려 두고 혼자 마차를 타고 가려던 동천은 무엇이 생각났는지 마차 밖에서 서있는 도연을 불렀다.

“야! 안 타?”

주인의 의외의 말에, 도연은 잠깐 동안 동천을 쳐다봤지만 이내 아무 말 않고 동천의 맞은편에 공손히 앉았다. 최소한 ‘왜요?’ 정도는 물어볼 줄 알고 미리, 대답을 준비했던 동천은 조용히 자신을 쳐다보다가 안으로 들어와서 앉는 도연의 행동에 눈알을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못마땅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하지만 곧이어 자신의 넓은 마음으로 봐주기로 했다.

다그닥.. 다그닥…!

마차가 달리는 동안 서로 아무 말 없었지만 어색함을 싫어하는 동천으로 인해서 곧이어 그 침묵이 깨져버렸다.

“야. 내가 며칠 전에 네가 왜 쓰러졌는지 들었다. 처음에 볼 때는 혈색만 좋더니, 왜 그때는 영양실조로 쓰러졌냐?”

“심려(心慮)를 끼쳐드려서 죄송합니다. 제가 쓰러지기 3일 전이 바로, 어머님의 기일(忌日)이었기 때문에 가난하게 자라온 제가 여기 와서 먹는 건 제대로 먹었지만 어머님께서 돌아가신 날은 차마 풍족하게 먹을 수 없어서 금식(禁食)을 했습니다.”

그제서야 의문이 풀린 것까지는 좋았는데..

“야! 그날은 그렇다 치고, 하루 굶었다고 쓰러지는 건 아니잖아. 그것도 굶은 다음 날 헐레벌떡 뛰던 것도 아니었고… 어떻게 해서 이틀이 지난 후에 달렸는데 쓰러진 거야? 말이 좀 안 되잖아!”

도연은 알아들었다는 듯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그날 이후로도 자꾸만 어머님이 생각나서 제대로 밥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루 한 끼도 안 되는 분량이었습니다.”

누군 날 때부터 혼자였냐고 대뜸 소리치려던 동천은 생각을 바꾼 후, 소연과 마찬가지로 도연의 과거사(過去事)를 듣고 싶어서 그만두었다.

“좋아. 그 얘기는 이제 넘어가고… 네, 옛날 얘기 좀 들어보자. 어떻게 자라왔냐?”

동천의 질문에 도연은 눈살을 살풋이 찡그렸다.

“꼭.. 대답해야만 합니까?”

“그래!”

자신의 말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나온 주인의 대답에 도연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뒤, 잠시 옛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얼마 안 가 도연이 입을 열었다.

“어려서부터 우리 집은 가난했었고.. 남들 다 하는 외식(外食) 한 번, 한 적이 없었고.. 일터에 계신 어머니 집에 없을 땐.. 언제나……”

“잠깐! 잠깐!!”

갑작스러운 동천의 제지에 도연은 의아해했다.

“왜 그러십니까..”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도연을 한참 동안 뚫어져라.. 보고 있던 동천은 자신과 마주 보는 도연의 눈빛에서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자 의심이 가득한 얼굴을 지우지 않으며 말했다.

“혹시 말야.. 그 뒷얘기가 매일 같은 것만 먹어서 어머님께 항의했더니 맛있는 걸 너한테만 사주고, 어머니는 안 드셔서 왜 안 먹냐니까 자신은 싫다고 하더라… 뭐, 그런 얘기 아니냐?”

동천이 마지막에 가서는 좀 빈정거리는 말투로 끝나자 도연은 예의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다 알고 계시는군요. 혼천부(混天府)에서 알아내셨습니까?”

가늘게 뜨고 있었던 동천의 눈이 잠깐 커졌다 작아졌다.

“응? 혼천부? 그게 뭐하는 데냐?”

“대내 정보를 담당하는 곳입니다.”

그 말에 동천은 실소(失笑)를 했다.

“하… 난 또 뭐라고.. 야! 내가 할 일 없어서, 하인 뒷배경이나 캐고 다니는 인간인 줄 알아? 나는 그저, 네가 하는 말을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기에 말했던 것뿐이야.”

동천의 말을 듣고 난 도연의 양 눈썹이 서서히 미간 쪽으로 가느다랗게 모여들었다. 마치 자신의 옛일을 알고 있는 듯한 주인의 말투에 잠시 혼란했던 것이었다.

“혹시.. 그 뒷이야기도 아십니까?”

“응? 그 뒷이야기? 잠깐만…. 그래. 생각났어. 그다음 얘기가 서당인가.. 학당에서 아이들과 점심을 먹는데, 부잣집 애새끼가 주인공의 반찬을 보고, 그게 뭐냐며 놀려대다가 주인공이 한 대 치니까… 그다음에.. 아? 그다음 일터에 계시던 주인공 어머니가 부잣집 어머니한테 잘못했다고 빌었다는… 그런 얘기 같았는데 맞냐?”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던 도연의 눈가에는 어느새 가느다란 물기가 맺혀있었다. 그 믿기지 않는 모습에 동천이 놀라고 있을 때, 정신을 차린 도연은 눈가에 맺힌 눈물을 얼른 닦아냈다.

“죄송합니다. 잠시.. 옛일이 생각나서….”

자신의 말이 도연의 옛일과 맞다는 말에 동천은 황당한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 뭐야? 그럼, 내가 어디선가 들었던 말이 네 옛날 일이랑 같다는 거냐?”

“예.”

“야! 솔직히 말해! 혹시, 네 옛날 얘기 해주기 싫어서 내 말이 네 얘기라고 뻥치는 거 아냐?”

도연은 분함을 억지로 참는 듯한 인상으로 말했다.

“저는 어머님에 관한 얘기는 거짓말을 못합니다.”

도연의 기세(氣勢)에 잠시 말문이 막혔던 동천은 이게 아닌데..라고 생각하고 화를 냈다.

“자식아.. 아니면 아니지 어디다가 눈깔을 치켜떠!”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도연은 이내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나직히 한숨을 내쉰 동천은 잠시 생각해보다가 짜증을 냈다.

“아아.. 몰라! 몰라! 난, 귀찮은 거 딱 질색이니까 이제 그 얘기는 그만두자.”

도연도 더 이상 슬픈 과거는 생각하기 싫었으므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후, 자신의 집에 도착한 동천은 책을 읽으러 방안으로 들어갔다.



“자.. 떨이요. 떨이…”

“쌉니다. 골라 보시지요.”

사람들이 한창 북적거리는 장터에서 상인들은 어떻게든 자신의 물건을 하나라도 더 팔아보려고 안달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독 한 사내만은 다른 상인들과 다른 행동을 보이고 있었다. 그 사내는 뭔가에 홀린 듯, 흐릿한 눈으로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 사내가 그 어떤 것을 보고 있느냐? 그건 아니었다. 그저 앞만 쳐다볼 뿐, 그의 눈빛은 초점(焦點)이 없었다.

“아저씨. 이거 얼마예요?”

그 사내가 자신의 물건을 사라고 권유한 것도 아니지만 눈에 띄는 식기가 있어 한참을 돌려보다가 말을 꺼낸 토실토실한 중년의 부인은 물건 주인이 대답을 안 하자, 인상을 찌푸렸다. 생각 같아서는 그냥 가고 싶었지만 워낙, 마음에 드는 물건이라 그 부인은 언성(言聲)을 높여서 다시 물어보았다.

“아저씨? 아저씨! 이거, 얼마냐니까요?”

“예? 지금.. 뭐라고 하셨는지….”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민삼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부인에게 물어보았다. 이번에도 말하면 무려, 세 번이나 말하는 거지만 그 부인은 꾸욱.. 참고, 다시 말했다.

“이거, 얼마냐고요.”

그제서야, 상황을 인식한 민삼은 죄송하다는 듯이 굽실거렸다.

“어이구.. 제가, 잠시 한눈을 팔았군요. 그건, 여섯 냥이지만 죄송해서 한 냥 깎아 드리겠습니다. 헤헤.. 죄송합니다.”

같은 질문 몇 번 해서 한 냥을 깎게 됐으니, 그리 밑지는 장사가 아니었으므로 그 부인은 만족해하며 돈을 내주었다.

“휴우… 내가 요즘, 왜 이러지?”

그늘진 안색으로 낙담을 하는 민삼의 모습에 옆에서 다른 장사를 하던 사내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어봤다.

“이보게.. 자네, 어디 아픈가? 며칠 전부터 안색이 안 좋아.”

“그렇게 보였나?”

“그렇다네. 어디 아픈 건가?”

민삼은 쓴웃음을 지었다.

“후후.. 아니네. 신경 끄게.”

저녁이 돼서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민삼은 부인과 함께 평소보다 일찍 잠이 들었다. 한 시진 정도 지났을까? 편안히 자고 있던 민삼의 얼굴이 서서히 찌푸려지면서 나직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으… 으. 으…..!”

그 신음 소리는 간간이 들려오다 그 크기를 더해갔다.

“흐으으…. 흐윽!”

튕겨 오르듯이 잠깐 몸을 뒤흔들던 민삼은 아직도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민삼의 행동은 옆에서 곤히 자고 있는 부인을 깨우기에 충분했다. 깜짝 놀란 민삼의 부인은 불안한 눈초리로 민삼을 흔들어 깨웠다.

“여보! 여보! 일어나 봐요!”

허공(虛空)을 향해, 손을 허우적대던 민삼은 자신의 의지가 아닌, 다른 의지로 자신의 손이 밑으로 내려가자 격한 숨을 들이키며 고통스러운 잠에서 깨어났다.

“허-억? 흐윽.. 헉헉..”

어둑한 밤이라서 제대로 된 남편의 얼굴 표정을 볼 순 없었지만 하는 행동으로 충분히 느낄 수 있기에 그의 부인은 걱정이 안 들래야 안 들 수 없었다. 그녀는 땀에 절어있는 남편의 얼굴을 자신의 손으로 닦아주었다.

“괜찮아요? 요새 자주 그러는데…”

아내의 손길에 점차 안정감을 찾은 민삼은 생각 날 듯하면서도 단 한 올의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 고통스러운 꿈을 상기시키자 다시 고통스러워졌다.

“크으윽…”

“여보…”

차라리 생각이라도 났으면 좋으련만… 깨어보면 아무런 기억도 안 나는 이 현실에 더욱 무서운 민삼이었다.

한편, 밖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던 한 인영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으며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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