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84화
동천은 변종이란 말에 꺼림칙했는지 눈살을 찌푸렸다.
“나쁜 건가요?”
역천은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글쎄다.. 그건 네가 앞으로 내공을 어느 쪽으로 써나갈지에 따라서 좋은 일이 될 수도 있고, 나쁜 일이 될 수도 있단다.”
“예?”
“그러니까, 아직은 본문의 심법과 항광의 심법이 비슷한 상태이지만 네가 한 방향을 선택해서 익히지 않고 어정쩡하게 익힌다면 나중에 너에게 커다란 타격(打擊)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던 동천은 갑자기 떠오르는 의문점이 있었다.
“사부님. 제가 항광 할배의 심법을 모르는데 제가 어떻게 독공 쪽으로 익히는 게 가능해요? 말이 안 되지 않아요?”
간만에 질문다운 질문을 한 동천은 자신이 말해 놓고도 그럴듯하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의외로 터진 제자의 날카로운 질문에 역천은 놀라다가 곧이어 안정을 되찾고는 대견하다는 듯 동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오오..! 그래, 말 한번 잘했다. 역시 내 제자로다. 좋다. 말해주마. 지금 너의 몸속에는 현재 최고의 독공 고수라 할 수 있는 만독노조 항광의 진원지기(眞元之氣)가 무려, 삼갑자나 들어차있다. 그중 일갑자 반만 활용되고 있고, 나머지 일갑자 반은 네가 꾸준히 격발(激發)시켜 네 것으로 만들어야 하지. 내공이라는 놈이 참으로 오묘해서 어떠한 성질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으면 얼마든지 그것을 키워나갈 수 있단다. 즉, 네가 본문의 심법을 운용할 때마다 마음속으로 독기를 생성시키도록 노력한다면 얼마든지 네 심법의 성격을 바꿀 수가 있다는 말이다. 더군다나 본문의 심법은 여타의 심법들보다 정신적인 부분이 강하기 때문에 좀 더 수월할 수 있단다. 알겠냐?”
동천은 감탄의 표정으로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그런 제자의 시선에 우쭐해진 역천은 신이 나서 다시 말을 이었다.
“정도인들은 독공을 천시하는 경향이 있다. 같은 마도에서조차 그런 경향이 없지 않아 있지.. 하지만! 강호의 세계는 냉정하다. 입만 가지고 나불대다가는 언제 뒈질지 모른다는 얘기다. 독공은 익히긴 어렵지만 일단, 익히기만 한다면 거의 천하무적이라 할 수 있다. 이 사부의 말을 잘 새겨듣고 네 몸속의 독기를 사장(死藏) 시킬지.. 활용(活用)할지 잘 생각해 보거라.”
동천은 사부의 말을 들으면서 무언가 흥미 있는 걸 발견했는지 눈을 가늘게 모았다.
‘호오? 익히기는 어렵지만 일단, 익히기만 하면 거의 천하무적이라고? 음.. 나는 역시 운이 좋은 아이라니까? 항광 할배… 고마워요. 비록, 할배가 모자라서 나를 환골탈태 시켜주진 못했지만 할배가 남겨준 내공으로 잘 활용해 볼게요. 히히히..!’
속으로 좋아하던 동천은 좋아하면서도 뭔가를 빠뜨린 것 같았다. 그 빠뜨린 게 뭘까.. 고민하던 동천은 순식간에 사부의 말을 세 번이나 되짚어 보고서야 자신이 빠뜨린 부분을 골라냈다.
“사부님! 완전히 천하무적이 아니라, 거의 천하무적이라구요?”
제자가 또다시 물어오자 역천은 그렇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냐.. 완전히 아니라 거의라고 했다.”
동천은 재차 물었다.
“그럼, 독공보다 더 강한 무공이 있다는 얘기네요?”
“그렇지. 세상에 가장 강한 무인이 없듯이 무공 또한 마찬가지로 완전한 무공은 없단다. 무공에는 주류 무공과 비주류 무공이 있는데 독공은 비주류에 속한다. 비주류 무공은 독공, 화공, 음공, 빙공, 뇌공. 이렇게 다섯 가지가 있다. 이들은 먹고 먹히는 천적(天敵) 관계에 놓여있지. 그중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전체적으로 보면 음공이다. 비주류 무공들의 특징은 적수공권(赤手空拳)이기 때문에… 물론, 음공은 제외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강력한 음파(音波)를 상대에게 한 대 먹인다면 치명적이라 할 수 있다. 단, 음공의 단점은 근접전에 약하다는 것이다. 성취도에 따라서 어느 것이 낫다고 할 순 없지만 서로 힘이 같다는 전제하에 독공은 빙공과 음공에 강한 면모를 보이지만 불(火)에 약하기 때문에 화공과 뇌공에는 약한 면모를 보인다. 즉, 불의 기운을 쓰는 인간들만 조심하면 거의 천하무적이라는 얘기다.”
동천은 앞으로 자신이 익히기로 마음먹은 게 천적인 무공에 밀린다는 말을 듣고 마음에 안 들었지만 자기가 어찌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기에 불만스러워도 참았다.
“네, 알겠습니다.”
역천은 걸어가며 발로 애먼 돌을 걷어차고 있는 동천에게 물었다.
“결정(決定)했느냐?”
동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독공 쪽으로 내공을 키워볼게요.”
역천은 제자의 선택에 웃어주었다. 제자의 성격상 독공을 대성하면 거의 천하무적이라 했으니, 당연히 독공을 선택할 것이라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하! 좋다. 이제부터 이 사부가 너에게 기초적인 독공부터 고차원적인 독공까지 차근차근 책으로 보내주마. 그것들을 보면서 모르는 점이 있다면 이 사부에게 물어보거라. 내가 모르는 것만 빼고 다 가르쳐주마.”
항광이 준 책자가 있기에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려던 동천은 가만히 생각해보니 용독경은 무공 책자가 아니기에 입을 다물었다. 또한, 동천이 입을 다문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고 그 말을 하면 자신이 사부 몰래 항광의 책을 보고 있다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에 알았다고 말했다.
“그래.. 마침, 이 사부의 방에 아주 기초적인 독공 책이 있으니까 가서 너에게 주마. 많은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호호호!”
“깔깔…!”
오랜만에 밖으로 나온 매향은 예전의 쓰라린 기억을 떨쳐버리고는 전주인 역천의 방 앞에서 명령을 대기하고 있는 초향과 보영에게 가서 신나게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왜 그렇게 쳐다보냐고 했더니.. 내가 너무 아름다워서 그렇다고 하는 거야! 사실은 그게 아닌데.. 호호!”
보영은 뭐가 그리도 재미있는지 언니인 매향이 하는 수다를 들으며 허리를 잡고 웃어댔다.
“깔깔깔! 언니.. 하이고.. 배가 아퍼요.”
옆에서 그런 보영의 말을 초향이 거들었다.
“그래. 그래서 그 다음은 어떻게 됐어? 응? 말해봐.”
다른 사람들이 신나하며 자신의 말을 듣자 당연히 흥이 난 매향은 그 뒷얘기를 하려 했다. 그녀가 말을 하려고 입을 떼는 순간 회랑에서 한 여아가 헐레벌떡 뛰어오는 게 아닌가? 그 순간 그녀들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게 아니기를 바랬다. 열 살쯤 돼 보이는 여아는 언니들이 보이자 얼른 자신의 맡은 바 임무를 보고했다.
“언-니-드-을!! 와.. 왔어요! 소전주님이 이 근처에 왔다구요!”
설마 했는데… 두려움에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녀들 중 가장 신속하게 움직인 것은 매향이었다. 그녀는 갑자기 얼굴을 부여잡고 신음했다.
“으음… 얼굴이 화끈거려. 얘들아 아무래도 난 이만 가봐야겠다. 아직도 얼굴에 독기가 남아있나 봐… 소전주님 오시면 잘 바래다드려.. 나 갈게.”
그리고는 아픈 사람 같지 않게 후다닥! 뛰어나갔다.
그다음 움직인 것은 초향이었다. 그녀는 소전주의 움직임을 담당하는 여아에게 말했다.
“미령(美靈)아. 소전주님께서 지금 어디에 계시지? 그리고 여기로 오시는 것 같아?”
미령은 조그마한 얼굴을 도리도리 저었다.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구요. 소전주님이 약전에까지 왔었는데 얼마 안 있어서 전주님과 밖으로 나오셨대요.”
전주님과 같이 나왔다면 확실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었다. 전주님의 명령을 대기하는 시녀들은 타당한 이유가 없이 자리를 이탈하면 중죄 내지 죽음이었다. 물론, 주인이 좋은 사람이면 벌만 받고 끝난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들은 다행이지만 어찌되었든 쓸데없이 주인의 눈 밖에 날 행동을 할 필요는 없다. 초향은 미령을 불렀다.
“미령아.. 잘 들어. 지금 밖으로 나가서 약전에서 여기로 오는 길목을 지키고 있어. 그냥, 지키면 의심을 받게 되니까 거기서 놀고 있는 척하는 거 잊지 말고!”
“예. 언니..”
미령은 자신의 임무가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는지 초향의 말을 듣고 얼른 뛰어나갔다. 그런 미령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본 초향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어디론가 뛰어갔다.
“앗? 언니, 어디로 가세요! 무단 이탈하면 전주님께 엄벌을 받을 텐데…”
보영이 당황해서 자신을 부르자 초향은 금방 온다며 재빠르게 나갔다. 언제 올지도 모르는 전주님 때문에 속으로 애를 태우던 보영은 얼마 안 있어 초향 언니가 오른손에 하얀 봉지를 들고 오는 것을 보았다. 보영에게 다가온 초향은 이마에 솟은 땀을 훔치며 말했다.
“아직, 안 오셨지?”
보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에.. 근데, 그게 뭐예요?”
동생의 질문에 초향은 굳은 안색으로 흰 봉지를 열어 보여줬다. 안에는 푸르스름한 약재가 들어차 있었다.
“설사약이야.”
“예?”
“나는 소전주님이 오시면 이거 먹고 뒷간에 갈 테니까 보영아.. 잘 부탁해.”
보영은 어찌나 당황했는지 놀라서 벌어진 입을 쉽사리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뭐라고 항의해 볼만도 하지만 이런 하녀의 세계에도 엄연히 서열이 존재하기에 속으로만 끙끙 앓았다. 다만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소전주가 안 오기를 속으로 빌고 또 비는 일뿐이었다. 그러나 하늘이 무심했는지 저 멀리서 미령이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표정을 보니 아마, 여기로 오는 것 같았다.
“언니-! 와요! 오신다구요!”
보영은 거의 울 듯이 다그쳤다.
“뭐어? 정말이야?”
“예. 헉헉.. 아이고 힘들어. 소전주님하고 같이 오고 계세요.”
이미 각오를 하고 있었던 초향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더니 자신이 준비해 놓은 설사약을 미련 없이 씹어 삼켰다. 약초라서 그런지 좀 썼지만 그런 것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초향은 “직빵!”이라는 말을 듣고 한 의원에게 얻어낸 설사약이 얼른, 효과를 나타내길 마음을 졸이며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소전주가 오기 전에 효과가 나타났다.
꾸르르-르륵…!
“아…!”
배가 아프지만 정작 나오는 신음 소리는 기쁨의 소리였다. 초향은 기뻐하며 보영에게 손짓을 해준 뒤 멀거니 서있는 미령을 데리고 사라졌다.
“히잉…! 난 어떻게 해.”
혼자 남게 된 보영은 주저앉아 울고 싶었지만 그럴 새도 없이 전주님과 소전주님이 걸어오자 다급히 표정 관리에 들어갔다. 한편, 자신의 거처로 돌아온 역천은 한 명이 모자라자 의아해했다.
“보영아. 어째서 초향이가 없느냐?”
긴장한 보영은 말을 더듬으며 말을 했다.
“저.. 저기, 초 언니는 점심에 밥 먹은 게 탈이 되어서…. 거기 갔는데요..”
거기라는 말에 역천은 알았다는 듯이 손을 젓고는 제자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제발 자신이 아니기를 바랬지만 역천은 제자에게 책을 준 뒤 보영에게 바래다주라고 시켰다. 할 수 없이 보영은 울며 겨자 먹기로 동천을 바래다주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