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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85화


“랄랄라…!”

보영이를 따라 걸어가고 있는 동천은 뭐가 그리도 즐거운지 지 혼자 신이 나서 흥얼거렸다. 하지만 앞서 걸어가고 있는 보영이는 뒤가 근질거려 죽을 맛이었다. 긴장한 탓인지 선선한 초저녁임에도 불구하고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그렇게 걸어가고 있을 때 마침내 동천이 보영이에게 말을 걸었다.

“야!”

“네? 아… 예에. 마.. 말씀하세요.”

그렇게 언니들에게 “소전주의 손에서 살아남는 비법”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전수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이렇게 당황하자 보영은 울고만 싶어졌다. 그녀는 그 와중에도 살고픈 마음에 그 비법을 속으로 숙지(熟知) 시켰다.

‘첫째, 소전주는 딴짓하다가 갑자기 물어온다. 대처 방안 =절대로 당황하지 말고 자연스레 대답해주기.. 둘째, 소전주는 특히 길에 관해 민감하다. 대처 방안 =최대한으로 제대로 가고 있다고 인식시켜주어야 한다. 셋째, 소전주는 가끔 가다 물어보면서 듣는 사람을 궁금하게 만든다. 대처 방안 =오래 살고 싶으면 물어보지 마라..!’

아직, 자료가 모자랐던 그들은(매향과 초향) 우선 그 세 가지만을 새로 들어온 보영에게 가르쳐주었다. 그런데 언니들이 그렇게 인지 시켜주며 가르쳐주었음에도 처음부터 이런 실수를 했다니.. 유난히 겁이 많았던 보영은 앞으로 벌어질 일을 제멋대로 상상하면서 두려워했다. 동천은 이름이나 물어볼 심산에 불렀는데 눈앞의 시녀가 자신을 무슨 괴물 보듯이 보면서 두려워하자 엄청 기분이 나빠졌다.

“이씨…! 야! 왜 쌍판을 그따위로 하고 나를 쳐다봐! 나한테 불만 있어?”

소전주의 고함에 너무 두려운 나머지 풀썩! 주저앉은 보영은 울먹이며 엎드려 빌었다.

“흑… 소전주님. 잘못했어요. 제가 미천해서 그래요. 잘못했어요.. 용서해주세요. 용서해주세요…”

동천은 어이가 없어서 한동안 보영이가 하는 짓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보영은 소전주가 자신을 어떻게 할 듯이 소리를 쳐놓고 잠잠하자 의아한 마음에 빌기를 중단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소전주가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닌가? 무표정…! 보영은 그런 소전주의 표정을 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는 게 아무 생각이 없었다. 동천은 그 모습을 보고 한심하다는 듯이 표정을 바꾸며 고개를 저었다.

“쯧쯧.. 앞길이 창창한 나이에 안됐어.”

동천의 말이 잔잔히 흘러나오자 보영은 그 뜻을 해석할 새도 없이 다시 고개를 처박고 빌기 시작했다.

“소전주님, 잘못했어요.. 한번만 너그러이 봐주세요.. 용서해주세요.”

동천은 빨리 집에 가서 밥을 먹고 싶은데 눈앞의 시녀가 자꾸만 잘못했다고 울먹이자 열받아서 소리를 질렀다.

“이 년아! 잘못이고 지랄이고, 어서 길이나 안내해! 나, 배고프단 말이야! 난 다 참아도 배고픈 건 못 참아! 빨리 안 가? 이걸 그냥.. 콱!”

어디서 그런 힘이 생겼는지 몰랐다. 보영은 소전주가 길을 안내하라는 말을 듣자마자 허겁지겁 일어나 총총걸음으로 앞서 걸어갔다. 뒤에서 열받는다고 소전주가 자신의 엉덩이를 걷어찼지만 보영은 그걸로 끝났다는데에서 감격(?)한 나머지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이거, 미친 년 아냐…?’

동천은 그렇게 생각했다.


“언니-들! 헉헉.. 언니들!”

소전주의 마수(魔手)에서 무난히 살아온 보영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매향의 방으로 찾아갔다. 그 이유는 지금이 교대 시간인데 초향은 틈만 나면 매향의 방으로 가기 때문이다. 보영이 멀쩡해서 돌아오자 그녀들은 반갑게 맞이했다.

“보영아! 무사했구나!”

“너, 괜찮아?”

그녀들이 각각 물어오자 보영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여주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예, 괜찮아요. 그보다.. 저, 소전주님에 관해 새로운 걸 알아냈어요!”

그 말에 그녀들은 깜짝! 놀랐다.

“뭐어? 정말이야?”

언니들이 놀라자 보영은 자신도 한건 했다는 것에 우쭐해져서 자신이 알아낸 것을 얘기했다.

“그래요. 소전주님께서는요. 다른 건 다 참아도 배고픈 건 못 참으신대요. 저한테 화를 내시며 배가 고프니 빨리 가라고 제 엉덩이를 걷어찼는데 그때만 생각하면….”

보영의 말을 듣고 매향은 기뻐하며 서랍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한 권의 책을 들고 왔다. 그 사이 초향은 붓과 먹물을 준비해 왔다. 매향이 가져온 책에는 이런 제목이 쓰여 있었다.

생사비록(生死 綠)…

겉장을 넘기자 몇 줄밖에 안 쓰여 있었지만 그녀들은 그것을 매우 소중히 여기는 것 같았다. 글을 쓰는 것은 그녀들 중에서 글솜씨가 제일 나은 초향이 맡았다. 그녀는 신중히 글을 써 내려갔다.

넷째, 소전주는 배고픈 걸 못 참는다.

대처 방안 = 식사 시간이 가까워질 때에 안내를 맡았다면 되도록 빨리 안내해라. 소전주가 짜증을 낸다면 그때를 대비해서 먹을 걸 준비해 간다.

초향은 글을 다 마치자 마음에 드는 듯 희미하게 웃었다. 그녀는 주위를 돌아보며 동의를 구했다.

“어때? 이만하면 괜찮지?”

모두들 만족해하는 것 같았다. 매향이 소리쳤다.

“좋아! 우리 조금 더 분발해서 고통 없는 세상을 만드는 거야!”

“그래!”

“예, 언니!”

그녀들은 안의 내용에 비해 엄청나게 거창한 이름의 생사비록을 들여다보며, 굳은 의지를 보였다. 후에 이야기지만 그녀들은 몇 년 뒤 마침내 생사비록을 완성하게 된다고 한다. 그 책을 완성해 갈수록 그녀들은 동천에게 고통받는 횟수가 줄어들었으며 마침내 그 책이 완성되자 어쩌다가 빼고는 동천에게 혼나는 일이 없어졌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그 책은 약왕전에서 비싼 값에 복사되어 다른 하인들에게 불티나게 팔렸다고 한다.

어쨌든 나중의 얘기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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