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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97화


소연은 동생이 하는 말을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게 무슨 소리니?”

수련은 한참을 울다가 소연의 품에서 고개를 들었다. 퉁퉁.. 부은 눈두덩이를 닦아낸 수련은 언니를 보며 말하려다 그 뒤에 보이는 도연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어머? 언니… 뒤에..”

동생의 말에 뒤를 바라본 소연은 도연을 한 번 보고 나서 피식! 웃고는 동생에게 말했다.

“쟤가 많이 다쳐서 그러는구나? 어쨌든 도연이 좀 같이 부축해서 밖으로 나가자. 아니면 네가 나가서 사람 좀 불러 오든지. 우리끼리는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아.”

그 말에 수련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게 아니고요. 저… 그러니까.. 저… 오.. 오빠가 왜 여기에 있는지 모르겠어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이리저리 굴리던 수련은 죽어있는 쥐를 보았다.

“히익? 저.. 저 쥐는 또…”

수련이 쥐를 보고 뒤로 물러서자 소연은 그제서야 무언가가 생각났는지 한방 맞은 표정을 했다.

“너, 설마… 기억을……”

수련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울상을 지었다.

“몰라요. 저, 오빠가 왜 여기에 있는지.. 왜 저 쥐가 주… 죽어있는지.. 몰라요. 모르겠어요..”

아무래도 동생은 지금 아까 쥐를 고양이로 착각했을 때로 돌아가 있는 상태인 것 같았다. 동생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던 소연은 얼마 안 있어 도연을 떠올릴 수 있었다. 소연은 더 급한 환자를 까먹었다는 데에서 부끄러움을 느꼈다.

“수련아. 잠깐만..”

소연은 도연에게 다가갔다.

“미안해 도연아. 내가 다시 부축해줄 테니까 어서 가자.”

도연은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오른팔을 끌어올려주는 소연의 손을 거부했다.

“그보다.. 사람들을 불러줘. 너로써는 무리야.”

소연은 듣고 보니 좋은 생각인 것 같았다. 도연에게 무안한 감이 있었던 소연은 조금 과장스러운 몸짓을 하며 말했다.

“그.. 그럴까? 그래, 그게 좋겠다. 그럼 너 여기서 기다려. 내가 쌩하니 달려가서 사람들을 불러올게.”

소연이 도연과의 말을 마치고 재빨리 뒤돌아 나가려 하는데 수련이 그런 소연을 황급히 붙잡았다.

“언니이.. 어디 가요. 나 혼자 두고 가지 말아요… 잉~ 무섭단 말이에요.”

소연은 눈물 찍. 콧물 찍. 하고 있는 동생을 차마 놔두고 혼자 갈 수 없었지만 자신이 수련을 데려가면 도연이 혼자가 되기에 남겨둘 수밖에 없었다. 소연을 동생의 양 볼을 잡아 자신에게 두 눈을 고정시켰다.

“수련아. 잘 들어.. 네가 봐도 알겠지만 지금 도연이가 무지 아파. 이 언니가 가능하면 빨리 사람들을 데려올 테니까 뭐가 뭔지 모르더라도 꾹 참고 쟤 좀 돌보고 있어줘. 알았지? 너만 믿어! 나 금방 갔다 올게.”

얼른 말을 마치고 달려나가는 언니를 뒤에서 수련이 애타게 불렀다.

“언니이!”

동생이 불렀지만 소연은 뒤도 안 돌아보고 달려나갔다. 대신 아래층 쪽에서 회답(回答)이 들려왔다.

“기다려!”

“잉잉….!”

수련이 징징짜자 차라리 같이 가주었으면… 하고 있던 도연은 은근히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수련의 울먹임에 한쪽 눈을 살짝 찡그렸다. 그러나 울면서도 곁눈질로 도연을 살펴보던 수련은 도연이 인상을 찡그리자 아파서 그러는 줄 알았다. 수련은 콧물을 훌쩍이며 물었다.

“저기.. 아파서 그래요?”

도연은 신경 쓸 일(울음소리)이 없어지자 금세 안색을 폈다. 그 후 수련의 말뜻을 이해한 도연은 오해를 한 그녀의 물음에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웃겨도 그것을 속으로 삭히는 성격의 도연은 희미한 웃음을 짓는 것으로 자신의 심중을 최대한 숨겼다. 피를 조금 흘려서 그런지 창백해져있던 도연의 얼굴색은 웃음을 참느라 서서히 붉어졌다. 여태까지 도연이 하는 짓을 자세히 지켜보던 수련의 안색은 도연과는 반대로 서서히 하얘졌다.

그녀는 두려움에 떨며 엉뚱한 단정(斷定)을 지었다.

‘회.. 회광반조(廻光反照)…?’

어디서 죽을 때가 되면 순간적으로 얼굴에 화색(和色)이 돈다는 말을 들었던 수련은 지금 도연의 상태를 잘못 이해한 것이었다. 그녀는 참았던 눈물을 다시 터뜨리며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아.. 채 못다 핀 한 송이 들꽃이 이렇게 허무하게 가는구나….’

수련은 진심으로 도연을 애도했다. 이런 사정을 알 리가 없는 도연은 수련이 다시 울자 웃음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수련은 도연의 안색이 다시 창백해져가자 복받쳐 오르는 슬픔에 어찌할 줄을 몰랐다.

‘죽는 것일까..? 흑.. 불쌍한….’

도연은 수련이 자신을 불쌍하다는 듯이 쳐다본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자신이 다친 것 때문에 그러는 줄 착각한 도연은 불쾌감을 억누를 수 없었다.

“이봐..”

자기 생각에 빠져있던 수련은 도연이 부르자 깜짝 놀랐다. 하지만 이내 진정하고는 도연의 물음을 침착하게 받았다.

“할 말이 있으면 해요.. 제가 나중에 꼭, 오… 오빠의 마지막 말을 기억해 두었다가 전해줄 상대가 있으면 전해줄게요.”

수련의 말에 이상함을 느낀 도연의 양쪽 눈썹을 미간 쪽으로 모았다.

“뭐?”

수련은 도연이 인상을 찡그리자 죽음이 임박했다고 생각했다.

“앗? 아직 죽으면 안 돼요! 말은 남겨야죠..”

이게 무슨 헛소리인가.. 하고 있던 도연은 어디선가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안색을 굳히며 손을 들었다. 조용히 해보라는 뜻이었다. 마침 같이 소릴 들었던 수련은 도연의 행동을 이해하고 울먹임을 멈추었다. 무서워진 수련은 엉금엉금.. 기어가서 도연의 곁으로 다가갔다. 소리가 사라지자 방안은 정적(靜寂)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극…

이번에는 정확히 들을 수가 있었다. 침대 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침대 밑에 있는 구멍으로 들어오기 위해 벽을 타고 올라오는 소리였다. 소리가 들리는 곳을 대충 짐작해보니 올라오려면 조금의 여유는 있는 것 같았다. 도연은 침대를 보았다. 그리고 비치는 햇살의 방향을 보았다. 행운이 따랐는지 빛살은 대각선으로 침대 안쪽을 향했다. 도연은 수련에게 고개를 돌렸다.

“거기 가만히 있어.”

말이 가만히 있어지 지금 도연은 수련에게 미끼가 되어달라는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런 사실을 알 리가 없었던 수련은 그저 무섭다는 이유로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싫어요..”

“안전할 거야. 내가 보장할게.”

수련은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저었다.

“무서워요.”

도연은 수련의 울먹임을 무시한 채 한 다리로 일어나서 소리가 안 나게 콩콩 뛰어 침대 위로 올라갔다. 수련이 황급히 따라가려고 하려고 했지만 도연이 눈을 부릅뜨자 찔끔하며 다시 앉았다. 수련은 벌벌 떨며 시커먼 침대 밑을 바라봤다.

딸깍..

도연은 어느새 침대 위에 넙죽 엎드려 단검을 꺼내들었다. 그 소리에 수련이 자신을 쳐다보자 도연이 낮게 속삭였다.

“절대 나를 보지 마. 쥐가 알아볼 수도 있어.”

수련은 무서움에 떨면서도 도연의 말을 잘 들었다. 그녀는 시선을 바닥에만 고정시켰다. 쥐가 조심스레 올라오는지 시간 간격을 두며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구멍 쪽으로 거의 올라오는 소리가 들리자 도연은 하마터면 긴장된 탓에 소리 내어 침을 삼킬 뻔했다.

마침내 구멍에 도착해 들어왔는지 바닥을 걷는 소리가 조용한 방안을 울렸다.

‘이잉.. 무서…. 히익? 와.. 왔나 봐…’

수련은 두려움에 떨며 몸을 한껏 움츠렸다. 침대 밑에서 주위를 이리저리 살피던 쥐는 별 볼일 없는 상대만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붉은 눈을 번뜩이며 마음 놓고 수련에게 몸을 움직였다.

‘한 칼에 보내주마.. 어서 나와라.’

도연의 눈빛은 서서히 광기에 물들고 있었다. 아마 수련이 이런 도연을 보았다면 놀라서 어쩔 줄 몰라 했겠지만 다행히 자신의 임무(?)에 충실했으므로 그럴 염려(念慮)는 없었다. 단도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던 도연은 침대 밑에서 쥐의 코가 살짝 비쳐 나오자 새하얀 이를 드러냈다. 운이 좋게도 자신이 움직일 필요도 없이 쥐는 바로 밑에서 나왔다. 쥐의 얼굴이 천천히 드러나자 내려치려고 했지만 이내 생각을 바꿨다. 잘못해서 빗맞으면 도루아미타불이 되기 때문이었다.

쥐의 목 부근까지 드러나고 이제 조금만 더 나오면 단도를 찍을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갑자기 쥐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도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설마.. 눈치챈 건가?’

쥐가 코를 씰룩! 거렸다. 안 좋은 예감이 도연의 뇌리를 스칠 때 쥐가 고개를 들어 두 붉은 눈으로 위를 쳐다보았다. 도연은 지체 없이 단도를 내리쳤다.

쉬익! 서걱-!

“쮜이-이-이이익–!”

베었다는 느낌은 들었지만 죽이지는 못했다.

“이런…!”

쥐가 황급히 도망 나가는 것을 들었다. 다 잡았는데 놓친 것이었다. 화가 났다. 도연은 소리쳤다.

“어째서! 어째서 알아챈 거냐! 으아아아!”

도연이 반 미쳐서 발광(發狂)을 했지만 수련은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다시 기절을 한 것이다. 어지간히도 무서웠나 보다. 사실 아까 그림자까지 꼼꼼히 계산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도연이 한 가지 지나친 것이 있었다. 그게 뭐냐하면 ‘냄새’였다. 침대 밑에서는 몰랐는데 막상 고개를 침대 바깥으로 내미니 피와 땀에 절은 냄새가 쥐의 후각에 잡혔던 것이다.

“어째서-어-!!”

도연의 울분에 찬 목소리가 방안을 휩쓸었다. 바닥에 꽂혀있는 단도가 피를 머금은 채 외로이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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