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2권 – 제4부 : 황소와 마법검 8화 (2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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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라자 2권 – 제4부 : 황소와 마법검 8화 (2권 끝)

“뭘까?”

샌슨의 단순하며 심각한 질문에 네리아가 대답했다.

“글쎄. 산적은 아냐. 자폭하는 산적이라니, 우습잖아? 그리고 하는 짓도 그래. 무기가 없어지니까 맨몸으로 덤볐어. 그건, 포로로 잡히느니 자살하겠 다는 거야. 에이, 소름끼쳐! 아까 일 떠올리기도 싫어!”

“게다가 보통 실력이 아니었어.”

“맞아. 그자들이 길시언 씨 외에 다른 사람을 무시해서 우리가 쉽게 상대한 거지.”

“음, 무장이 좋아도 꼭 좋을 건 없지. 공격은 혼자서 다 당하니까.”

우리는 모두 그 폭발 현장에서 좀 떨어져 있었다. 나무들이 연기를 피워올리고 있었기 때문에 있기가 힘들었다. 남자들의 시체는 모두 가루가 되었 거나 새로 생긴 웅덩이 속에 있어 조사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남자의 말들은 모두 무사했다. 다레니안은 말들도 모두 보호한 것이다. 다행이야. 말들 은 아무 죄가 없으니. 이루릴은 멀리서 선더라이더에 받힌 말들을 치료하고 있었다. 그 말들이 아무리 전투 훈련을 많이 받았다 해도 설마 전투 중에 황소를 만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겠지.

네리아의 말마따나 우리가 저자들을 쉽게 상대한 것은 저자들이 우리를 얕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긴 난 어린애고 샌슨은 덩치가 좋긴 하지만 무장 은 평범하다. 그에 반해 길시언은 하프 플레이트에 마법검에 방패까지 들고 있다. 그래서 남자들은 길시언을 노렸고, 우리는 그 틈을 타서 남자들을 제압한 것이었다. 남자들이 우리에 대해 제대로 알아차리기도 전에 말이다. 천만 다행이다.

칼은 볼을 긁적이더니 샌슨과 네리아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생각해 볼 수 있는 건, 우릴 노리는 암살자라는 것이겠군.”

네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암살자?”

“이름이야 어떻게 부르든……………, 목적은 우리의 살해였겠지요. 다른 목적을 생각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이유가 뭘까? 왜 우릴 노렸지?”

“아! 으악!”

샌슨이 손바닥을 딱 치더니 곧 자지러지는 비명을 질렀다. 어깨에 상처를 입고 붕대로 감아둔 사실을 잊었던 것이다. 이루릴이 힐링 포션을 좀 발라 두었지만 아직은 꽤나 아플 것이다. 샌슨은 어깨를 부여잡더니 힘겹게 말했다.

“으윽, 운차이! 운차이와 그 서류 때문입니다.”

운차이는 놀란 표정으로 샌슨을 바라보았다. 샌슨은 계속 설명했다.

“펠레일도 그렇게 말했지요. 우리가 그 보고서를 가지고 가지 않습니까? 그 서류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 서류를 제출하고 운차이가 증언을 하게 되 면 자이펀으로서는 대단히 곤혹스러워질 테니까…………… 그겁니다! 아니면 바이서스와 자이펀의 전쟁을 원하지 않는 비둘기파의 어떤 인물이라든지, 뭐, 그런 사람이………….”

“아닐걸.”

내 말에 샌슨은 고개를 돌렸다.

“무슨 말이야, 후치?”

“난 분명히 들었어. 내가 제일 가까이 있었다고.”

“듣다니?”

“그 남자 말이야. 자폭하기 직전, 분명히 ‘국왕 전하 만세’라고 했어.”

“국왕전하? 아! 그럼 자이펀의 국왕이 보낸…….”

“샌슨! 좀! 자이펀인이라면 왜 우리나라 말로 외치냐?”

“어? 어, 그렇군. 잠깐. 그럼 그게 무슨 말이야? 국왕 전하를 위해 우릴 죽이려 들었다고?”

우리는 잠깐 동안 아주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샌슨은 얼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 국왕 전하께서 우릴 죽이려 들 리가 없잖아? 후치 너, 나 모르게 무슨 반역질이라도 공모했냐?”

“샌슨, 순순히 자수하지?”

우리가 시답잖은 소리를 하는 가운데 칼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혹시 그런 이유가, 그런 말 같잖은 이유가 있다 해도, 그냥 수도에 도착하면 우리를 처리해도 되잖아? 왜 암살자를 보내어 우리를 처리한단 말인 가? 앞뒤가 맞지 않네, 네드발 군.”

“맞아요, 칼, 후치 네가 잘못 들었을 거야.”

“똑바로 들었다니까!”

“야, 그럼 국왕께서 왜 우릴 죽이려 했다는 거지?”

“어, 어, 그건…”

그 이유는 나도 모르겠다. 무슨 합리적인 이유를 댈 수가 없군.

난 인상을 찌푸리며 머리를 저었다. 길시언이 조금 떨어져 앉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길시언은 간혹 신경질적으로 잿빛 머리카락 을 헤집었고 그 얼굴 표정은 몹시 사나웠다. 또 프림 블레이드와 이야기하고 있는 모양이군. 샌슨은 단정짓듯이 말했다.

“산적은 아냐. 목숨을 걸고 죽이려 들었으니까. 그러니 암살자고. 그렇다면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역시 운차이 때문에 덤벼드는 암살자야. 펠레일 도 그렇게 말했잖아?”

하긴 그렇다. 그 똑똑한 펠레일도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우리가 운반하는 그 보고서를 노리는 암살자들이 우릴 쫓아올 것이라고. 그때 말들의 치료 를 끝내었는지 이루릴이 걸어왔다.

그녀는 우리 옆에 앉더니 말했다.

“여러분, 좀 다르게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예? 어떻게 말입니까?”

“우리는 그 보고서와 운차이를 호송하고 있어요. 하지만 여기에 여러 분들이 계십니다만 목적이 다 똑같은 것은 아니죠. 칼과 샌슨, 후치는 고향의 일을 보고하기 위해 수도로 가시죠? 그것은 어떨까요?”

“어? 그건 암살자가 쫓아올 만한 일은 아닙니다.”

샌슨의 말에 이루릴을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전 어떨까요? 제 생각에 제일 때문에 인간 암살자들이 쫓아올 것 같지는 않군요. 전 델하파의 항구로 가서 누굴 만날 계획입니다만 그건 인간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에요.”

이루릴은 고개를 돌려 네리아를 바라보았고 나와 샌슨, 칼도 모두 그 시선을 따라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네리아는 펄쩍 뛰었다.

“에, 아니에요! 난 그저 싸구려 도둑이라고요! 암살자들이 쫓아올 일은 없어요! 길드료도 착실히 내었고, 혹시 내게 털린 자들 중에 앙심을 가진 자 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자폭 암살대를 보내요? 겨우 도둑 하나 잡으려고?”

칼은 빙긋 웃었다.

“그럴 것 같지는 않군요. 네리아 양.”

그 말에 네리아는 안도의 한숨을 푸욱 쉬었다. 이루릴은 운차이를 바라보았다.

“운차이 씨는 암살자가 노릴 만하죠?”

운차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루릴은 고개를 끄덕였다.

“운차이 씨가 칼라일 영지에서 한 일이 들통나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죠.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자들이 죽기 직전 바이 서스어로 국왕 전하 만세라고 외쳤어요. 그건 저도 똑똑히 들었습니다.”

“이루릴도 들었어요?”

샌슨의 질문에 이루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이제 마지막 사람, 길시언을 바라보았다. 길시언은 그때까지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길시언 씨.”

“…….”

“길시언 씨.”

“예? 아, 왜 그러십니까?”

“혹시 암살자들이 따라다닐 만한 일을 저질렀나요?”

길시언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

“아까 그 암살자놈들이 날 노렸다고 생각합니까? 글쎄요. 모험을 하다보니 원한 살 일도 가끔은 했습니다. 복수를 원하는 사람은 많을 겁니다. 하지 만 저렇게 엄청난 암살자를 보내었을 거라고 생각되는 사람은 없는데요?”

“그런가요?”

“도무지…………. 그럴 만한 작자는 생각나지 않는데요?”

“예. 음, 이상한 일이군요.”

이루릴은 다시 고개를 꺾더니 생각에 잠겼다. 그래. 이상한 일이지. 그런데 그때 조용히 있던 운차이가 입을 열었다.

“길시언.”

길시언은 운차이를 바라보았다. 우리도 모두 운차이를 보았다.

“어제도 말했지만, 당신 정말 피 냄새가 많이 나.”

길시언은 무슨 시비냐는 듯이 마주보며 말했다.

“그래서? 그 이야기는 왜 자꾸 하는 겁니까?”

“아무래도 이상해. 당신 정도의 남자라면 그렇게 몸에 피 묻힐 일이 많지 않아. 오히려 적수가 적기 때문에 그렇지. 당신은…….”

싱긋 웃으며 말하던 운차이는 갑자기 말투를 바꾸었다.

“Yamus dsidafra un ert m’ kima?”

그는 갑자기 자이펀어로 이야기했다. 그러자 길시언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여보시오. 자이펀어로 말하는 이유가 뭐요?”

“Ert m’ kima unte raleil Djipenian. Releil?”

길시언은 이를 갈며 대답했다.

“Talledeon yahi nhannega durrtasatr unes rithroii.”

“Impawerr, en dikkasia nowms.”

“Xychro nen zima dsidfra yilkin jian diweelts.”

우리는 당황해서 두 사람의 대화를 바라보았다. 운차이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이보시오, 길시언. 당신 나에게 속았어.”

“속았다고?”

“여긴 자이펀어를 아는 사람이 또 있거든?”

길시언은 눈을 부릅떴고 샌슨과 나는 칼을 쳐다보았다.

칼은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보통 경악한 눈치가 아니다. 길시언도 칼의 그 얼굴을 보더니 체념한 듯한 표정이었다. 그는 뒤통수를 긁적거리더니 말했다.

“쳇. 아직 수양이 덜 됐군. 그런 간단한 유도 심문에 넘어가다니.”

칼은 당황한 표정으로 일어나려 했다. 그러자 길시언은 손을 내저어 말렸다.

“앉으십시오. 칼.”

“그, 그러나 전하…….”

전하라고?

머리 꼭대기에 벼락이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전하는 무슨. 궁성이나 귀족원에서는 내놓은 부랑아입니다.”

“전하.”

“전하라고 부르지 마십시오. 길시언이라고 부르십시오.”

“어떻게……………. 제가 감히……………”

“허어! 그것도 불충이라는 것 모르십니까? 국왕이나 태자 이외의 자를 전하라고 부르는 것도 국왕에 대한 모독입니다. 그거 중범죄입니다?”

“아………….”

칼은 그야말로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나나 샌슨보다는 훨씬 낫다. 칼은 그래도 뭔가를 알고 저렇게 말하지만 우리는 그야말로 장 에 끌려온 황소마냥 얼떨떨해져서 도대체 앉아야 할지 서야 할지 한쪽 무릎을 꿇고 있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최소한 누우면 안 된다는 것은 짐 작하니까 좀 낫다고 해야 되나? 전하, 전하라. 그리고 말을 들어보니 왕족이란 말이지? 샌슨이 조심스럽게, 그야말로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칼, 저, 설명을 좀…….”

칼은 길시언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자 길시언은 머리를 내젓더니 말했다.

“허 이것 참. 6년 동안은 입 밖에도 내지 않았던 이야기인데. 유피넬의 저울대는 도대체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 짐작도 못하겠군. 헬카네스의 추는

또 얼마나 무거운가. 에, 간단히 얘기하죠. 나 길시언 바이서스, 국왕 형입니다.”

“예에?”

나와 샌슨, 그리고 네리아까지 벼락 맞은 듯이 벌떡 일어섰다.

저자가! 저자가 바로 그 개망나니 태자…………, 이크. 어쨌든 그 사람이라는 말인가? 놀기를 하도 좋아해서 궁궐에서 도망쳤고 그래서 태자 지위를 폐 위당했다는 그 폐태자?

길시언은 우리들에게 앉으라는 시늉을 했다.

“괜찮습니다. 앉으십시오. 내 꼴을 보십시오. 어디가 왕족처럼 보입니까? 그리고 여긴 임펠리아도 아닙니다. 편하게 지내십시다. 앉으십시오.”

“아, 저,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라니. 앉는 법 모르십니까? 다리를 구부리며 몸의 균형을 잘 잡은 다음 먼저 손으로 땅을 짚으며 엉덩이를 부드럽게 땅에 가져다대 면 되는 겁니다. 균형을 잃으면 미골에 충격이 가해져 척추가 아플 수도 있으니 각별히 유념하시오.”

우리는 국왕 전하의 형님께서 세세히 지시하신 대로 앉았다. 긴장이 되어 웃지도 못했다. 성은이 망극하다고 말해야 되는 거 아닐까? 길시언은 한결 보기 좋다는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뭐, 대수로울 건 없고, 내 동생은 왕이고 난 방랑자고, 내 동생은 임펠리아에 있고 난 황야를 돌아다닙니다. 성격이 그렇게 생겨먹어서. 귀족원의 원로들은 판단을 잘했죠. 내 목을 친 다음, 내 동생을 왕위 계승권자로서 추대했으니까. 그것뿐입니다.”

“지당하신 말씀이시옵니다.”

샌슨의 대답에 길시언은 입을 조금 벌렸다. 샌슨은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다.

네리아를 바라보니 네리아는 몹시 실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지만 정말 표정만 봐도 여러 가지를 읽을 수 있군. 왕족의 물건 을 건드렸다가는 목숨이 위험할 테니 프림 블레이드를 슬쩍할 수가 없어서 실망스럽다는 것이렷다? 어쨌든 길시언은 그거면 설명이 충분하다고 느꼈 는지 더 이상 말할 의도가 없어 보였다. 그러나 칼은 거기서 끝장낼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그러나 전하.”

“아니, 제발! 전하가 아니란 말입니다.”

“전하. 어찌하여 도성을 버리시고 야인으로 계시는지요.”

길시언은 두 손 들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손짓을 해가며 설명했다.

“전후가 바뀌었습니다. 도성을 버리고 야인으로 있기를 좋아하니까 태자 자리를 박탈당했습니다. 난 국왕 노릇할 재목이 못 되었습니다. 그보다는 방랑 생활을 더 좋아했습니다. 천성이 게을러 국정을 보살필 능력이 결핍되어 있었지요.”

그러더니 길시언은 자기 목을 치는 시늉을 했다.

“그래서 귀족원 원로들이 목을 쳤죠. 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전하……. 전하께서는 100년에 한 번 나오기 힘든 성군의 재목으로 추앙받으셨던 분이십니다.”

“그 말은 어디서 들었습니까? 그거야 아첨꾼, 모리배들이 왕태자에게 하는 상투적인 어휘입니다. 내가 왕태자 책봉되었던 것이 다섯 살 때였죠. 다 섯 살짜리 꼬마에게 성군의 재목이 어쩌니 할 때는 다섯 살 꼬마였던 나도 어이가 없더군요.”

길시언은 시원시원하게 말했고 그러자 칼은 말이 곤궁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칼은 심기 일전하여 다시 말을 걸었다.

“그럼, 혹 전하께서는 자이펀과의 전쟁 때문에 국왕을 보필하기 위해 바이서스 임펠로 돌아가시는 겁니까?”

길시언은 지긋이 웃었다.

“아니, 그건 걱정 안합니다. 내 동생, 어려서부터 책벌레여서 병서도 엄청나게 읽었습니다. 그리고 좋은 신하들도 많습니다. 내가 가서 전쟁에 도움 될 어떤 조언을 하겠습니까? 그런 것이라면 내 동생 주위에는 전문가들이 넘치고 넘칩니다.”

“그럼 왜 바이서스 임펠로…………?”

“기억력이 좋지 못하십니다. 선더라이더에 걸린 저주를 해소하고 마법 칼집을 구하기 위해서라고 말씀드렸잖습니까?”

길시언이 그렇게 말하자마자 프림 블레이드가 울어젖히기 시작했다. 웅웅웅웅웅! 길시언은 잡아먹을 듯한 표정으로 자신의 칼집을 바라보았다.

“망할. 내가 임펠리아를 빠져나올 때 이것 하나 훔쳐나오고는 얼마나 좋아했는지 생각하면…………….”

“예?”

“임펠리아에서 쫓겨날 때 궁성 보물 창고에서 이것 하나 슬쩍했습니다. 그때는 마법검이라 도움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제길,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검인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칼은 난처한 미소를 지은 다음 질문했다.

“전하, 전하께서 그럴 생각이 없다면 전하께 암살자가 달라붙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길시언의 얼굴이 순식간에 떫은 표정이 되었다. 칼은 우리의 표정을 보더니 부연 설명을 해주었다.

“운차이 씨는 아까 그 암살자들이 이분을 공격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네. 그리고 저분의 살기를 읽고는 수많은 암살자들에게 쫓기는 인물이라는 것도 알아차렸던 거지. 그래서 저분이 전하임을 파악한 것일세. 정녕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군.”

운차이는 차갑게 웃었다.

“6년간이라는 말, 암살자들이 따라다니는 중요 인물, 1 더하기 1은 2요.”

흠, 창피스러운 일이군. 운차이는 흡사 우리들에게 자기 나라의 국왕의 형님도 알아보지 못하느냐고 묻는 듯한 얼굴이었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난 지금 당장 우리나라의 국왕이 나타나도 모를 텐데. 운차이야 간첩 교육을 받았을 테니 우리들보다 훨씬 우리나라의 왕족과 귀족들에 대해 잘 알겠 지만. 길시언은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것 참. 내가 마법의 가을에 들어섰나? 올 가을엔 이상한 일들만 일어나는군.”

“전하?”

길시언은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모르겠습니다. 누가 보낸 것인지 짐작이 안 됩니다. 요새 갑자기 나타나서 날 공격하는군요. 간단히 생각하면 내 동생의 측근들이 내가 왕권을 노 릴까 봐 날 제거하려 든다는 식으로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내 생활 태도를 보면 나에겐 제거 가치가 없다는 것을 알 텐데요. 난 근 6년 동안 수도 근처에도 가지 않았습니다. 그저 모험가일 뿐 왕권에 위험이 될 사람은 아닙니다.”

“……모험가는 비왕족으로서 왕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직종이 아닐까요?”

“옛이야기처럼 말입니까? 엄청난 모험을 겪는다면, 지방 세력과 혈연 관계, 동맹 관계 등 적절히 관계를 맺고 왕권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세력을 육성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러려면… 모험가의 나이 사오십 살은 되어야 합니다. 그것도 그 동안 내내 그러한 목적을 위해서 활동했을 경우 간 신히 가능합니다. 나처럼 살면 벌써 글렀죠.”

칼은 길시언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려 조용히 말했다.

“그러나 현재 바이서스는 전쟁중입니다.”

갑자기 길시언은 무서운 눈으로 칼을 바라보았다. 칼은 침착하게 말했다.

“전쟁중에는 많은 일이 가능합니다. 계속된 전쟁으로 왕권에 대한 신망이 약해진 틈을 이용하여 정부를 전복시키고 적국과는 동맹을 맺는 식으로 일처리가 가능해집니다. 자이펀과 손을 잡아서 왕이 되는 것을 간단히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당신 설마?”

“들어보십시오. 이런 식이겠지요. 자이펀의 도움으로 쿠데타를 일으킨 다음, ‘국왕이 자신의 야욕으로 불합리한 전쟁을 일으켜 백성을 도탄에 빠뜨 리는 것을 좌시할 수 없어 그를 멸한다. 그리고 그 대신 자이펀에게 사과하며 배상의 책임을 지겠다.’고 말하면 될 겁니다. 그러면 자이펀에서는 ‘길 시언 국왕의 등극을 인정하며 축하한다. 그는 현명하므로 전임자의 죄악을 답습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죠. 그리고 백성들은 전쟁을 끝내준 반란 자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맙소사, 유피넬이여! 나와 샌슨은 거의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 길시언은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들 듯한 모습으로 칼을 바라보았으나 칼은 조 용히 마무리를 지었다.

“특히나 길시언 전하께서는 귀족원에 의한 폐태자인 만큼 왕권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기가 용이합니다. 제 생각이 어떻습니까?”

길시언은 칼을 맹렬히 노려보았고 칼은 그 시선을 조용히 받아내었다. 길시언은 한숨을 쉬었다.

“날 회유하려 드는 것 같지는 않군요.”

“전 그럴 생각 전혀 없습니다.”

“당신은 놀라운 분이군요. 예. 인정하겠습니다. 내가 우려하는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군요………….”

“그리고, 내게 암살자를 보내는 측도 아마 그것을 우려하는 것으로 추측됩니다. 내가 전쟁을 틈타 내 동생을 쫓아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겠 죠. 아마도 내 동생은 아닐 겁니다. 그 녀석은 마음씨가 선량합니다. 그 녀석의 측근 중 자신의 야욕과 국왕에 대한 충성심을 혼동하는 돌대가리들 중 에 하나일 겁니다.”

“전하께서는 그럴 생각이 없으십니까?”

“짓궂으십니다. 칼.”

“죄송합니다. 용서하십시오.”

“날 두 번씩 시험하지 마십시오. 난 그럴 생각 없습니다. 그 자리가 탐났다면 어릴 때 행실 바른 왕태자로 남았을 겁니다. 하지만 헬카네스는 내게 옥좌에 앉아 버티지 못할 만큼의 자유에 대한 갈망을 주었습니다. 어쩌면 자유에 대한 갈망이 아니라 내 이마에 역마살 하나 박아줬는지도 모르겠습 니다.”

역마살이 뭐지? 이상한 단어를 쓰는군. 그러나 칼은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그러하시면, 바이서스 임펠에 가시면 더욱 위험한 것 아닙니까?”

“위험하겠죠. 하지만 내 마음에는 그런 야욕이 전혀 없습니다. 게다가 그곳이 아니라면 선더라이더의 저주를 풀 만한 성직자를 만나기 어렵습니다.”

“그럼 가실 겁니까? 이런 일을 겪고도?”

“여러분을 만나기 훨씬 전부터 겪어온 일입니다.”

길시언은 담담하게, 그러나 흔들림이란 있을 수도 없다는 식으로 자신의 결심을 이야기했다. 칼도 그 말이 아니라 그 말 뒤의 뜻을 읽었을 것이다.

“전하를 보필하겠습니다.”

길시언은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전하가 아니라니까요. 제발. 그리고 여러분과는 더 이상 함께할 수 없겠습니다.”

“예?”

“저 때문에 여러분이 위험해집니다. 곤란한 일이죠.”

칼은 입을 딱 벌렸다. 길시언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조금 전에도 그랬지요. 암살자들 때문에 샌슨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다행히 이번에는 그들이 여러분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에 승기가 있었습니다 만 그래도 이곳이 다레니안의 영토가 아니었다면 모두 죽을 뻔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그렇다. 우리는 모두 호수 옆에 새로 생긴 호수와 불에 타버린 숲을 바라보았다. 끔찍스러웠다. 길시언은 우리를 둘러보며 말했다.

“절대로 여러분과 함께하지 못합니다. 난 갈색 산맥의 다른 길에 대해서도 좀 압니다. 드워프들의 통행로를 이용하면 되겠지요. 여기서 헤어져야 되 겠습니다.”

“예? 아, 아니 안 됩……”

“더 말하지 마십시오. 칼.”

길시언은 단호하게 칼의 말을 끊었다. 칼은 입을 다물었다. 길시언은 쓸쓸한 얼굴로 말했다.

“어제 여러분들과 동행하기로 결심한 것은 정말 미안한 일입니다. 나를 마음껏 욕해도 좋습니다. 설마 이 험한 갈색 산맥 중간에까지 암살자들이 따 라다닐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내 불찰입니다.”

“전하……………”

“미안합니다. 6년 동안 야인이었으니, 이젠 야인인 길시언으로 봐줄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마음 편히 모험가로서 살아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 지만 세상은 아직도 날 길시언 바이서스로 보는군요. 그건 내가 감수할 운명입니다만, 그 때문에 여러분을 괴롭히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럼, 안녕히.” 길시언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그대로 몸을 일으켜 선더라이더에 올라탔다. 우리가 뭐라고 말할 새도 주지 않고, 길시언은 그대로 걸어갔다. “저, 전하!”

길시언은 멈춰 섰다. 그는 고개를 돌려 우릴 바라보았다. 그는 웃고 있었다.

“만일, 이것이 마법의 가을이고, 이 만남이 이 가을의 마법에 의한 것이라면, 여러분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겁니다. 그때까지는 작별의 말은 하지 않 겠습니다. 아샤스의 가호가 함께하길 기원합니다.”

저건 어디서 들었는데…………. 메리안의 말이다.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한다면, 작별의 말은 필요없다는…..

“하아!”

만난 지 하루도 되지 않아서, 길시언, 왕이 될 수도 있었지만 그 자유로운 영혼 때문에 왕좌를 물리쳤던 인물이 우릴 떠나가는군. 저주에 걸린 황소 를 타고, 수다스러운 마법검에 골머리를 썩이는 황야의 왕자.

우리는 망연히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인간은 관계에 의해 발전할 수 있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이루릴의 말이었다. 칼은 지그시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당신들은 우리들처럼 보장된 조화가 없기 때문에 서로 의견을 좁혀가는 방법, 합의하는 방법들을 익혀야 하며, 그렇게 타인을 이해하려고 드는 과 정에서 다른 피조물들에 대한 이해력이 길러진다고 알았지요.”

“엘프들의 생각입니까?”

“제 생각입니다만, 아시다시피….”

“아, 네. 엘프들은 모두 조화로울 테니, 아마 세레니얼 양의 생각에 대한 다른 엘프분들의 반대 의견은 없겠지요.”

“예. 그런데 저 왕자, 길시언 바이서스는 그 관계 때문에 오히려 괴로워하는군요.”

“괴로워한다라………….”

“그렇게 보입니다. 그는 자신의 모습을 만들려 들지만, 그러니까 모험을 즐기는 보통의 낭만가의 모습을 견지하려 들지만 그 자신의 관계가 그를 그 렇게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느낌이 듭니다.”

“정확하신 지적입니다.”

“그런가요? 기쁘군요. 저, 타인에 대한 이해력이 길러지는 것 같아요.”

“지금까지는 스스로 이해력이 없다고 생각하셨습니까?”

“예. 당연하지요. 항상 조화로운 관계 속에 살아온 저로서는 자신과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의 내면을 파악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칼은 멀리 갈색 산맥의 끄트머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제 생각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

“타인에 대한 이해력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만, 그것은 결국 감정 이입이지요. 그래서 같은 부피의 헝겊이 있을 때 인형 모양으로 만들어진 헝겊은 뭔가 다른 느낌이 드는 겁니다. 같은 부피의 돌이라 할지라도 조각으로 만들어진 것은 훨씬 애정, 혹은 두려움, 경배, 어떤 감정일지는 알 수 없습니 다만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그것은 물질에 대한 감정 이입의 결과이고, 결국 따스한 마음씨에서 비롯되는 거라고 믿습니다.”

“어렵습니다.”

“제 뜻은 이렇습니다. 선량한 마음씨가 있다면, 타인에 대한 이해는 자연스럽게 일어날 것이라 믿는다는 말씀입니다.”

이루릴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선량한 마음만으로 충분할까요?”

“이 세계에선…………,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일국의 왕자가 황소를 타고 마법검을 휘두르는 세계에서는…………….”

칼은 말을 맺지 않고 대신 빙긋이 웃었다.

<3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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