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하여 드래곤 라자는 분연히 일어났다. 그는 드래곤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자. 그러나 그 역시 그 스스로를 사랑하는 자인 것이다. 드래곤과 인간의 매개자였으되 그 스스로를 타인과 연결시켜 주는 매개물 또한 그 자신이다. 우리들 모두가 자신을 변화시켜 타인과의 매개물로 만들듯이. 보라. 그대는 부모에게 보이는 얼굴이 다르고 연인에게 보여주는 행동이 다르지 아니하냐. 그대의 원수를 향해 내 뱉는 언어가 다르고 그대의 은인에게 드리는 사례가 다르지 않으냐. 그러므로 그대와 타인을 연결시켜 주는 매개자는 다름아닌 그대 자신. 이는 저 드래곤 라자도 더불어 마찬가지였음이니………………
「품위 있고 고상한 켄턴 시장 말레스 추발렉의 도움으로 출간된, 믿을 수 있는 바이서스의 시민으로서 켄턴 사집관으로 봉사한 현명한 돌로메네 압실링거가 바이서스의 국민들에게 고하는 신비롭고도 가치 있는 이야기」 돌로메네 지음, 770년. 제3권 527쪽.
1
모두들 몸의 리듬이 엉망이었지만 억지에 가깝게 일어났다.
모두가 일어나고 나자 벌써 늦은 오후였다. 아프나이델은 그 동안 하이 프리스트가 몇 번 찾아왔다는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하이 프리스트께서?”
“예. 일어나는 대로 좀 보고 싶다고 하시더군요.”
“전부 다 말입니까?”
“아뇨. 칼만 오시면 된답니다.”
“그래요? 흠.”
문이 열렸다. 그리고 수련사들이 들어왔다.
우리가 일어난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수련사들은 황송스럽게도 대야와 물을 가져다주었고 우리는 감사히 세수를 마쳤다. 그러고 나자 곧 수련사들은 식사도 가져다 주었다. 길시언은 크게 감사했다.
“이런, 죄송합니다. 에델브로이의 지팡이여.”
여드름이 드문드문 나 있는 수련사는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천만의 말씀. 아직은 그 지팡이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예, 그럼 에델브로이의 어린 나무여. 종규에는 식사 시간에 대해 엄격할 것이 명시되어 있을 텐데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저희 길을 찾는 이들의 마음이 풀어지는 것을 경계하기 위함이지 손님들의 행동을 구속하기 위함은 아닙니다.”
길시언은 그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곧 적당히 감사 치레를 하고는 수련사들을 돌려보냈다. 늦은 오후니까 수련사들은 아마도 경전 봉독 시간일 것이다. 수련사 들은 맛있게 드시라고 말하고는 물러났다.
길시언은 식사를 들면서 말했다.
“하이 프리스트는 우리에게 많은 친절을 베푸시는군요.”
칼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이렇게 식사 시간까지 어겨가면서……………. 흐음. 그분의 희망을 꼭 들어드려야 될 텐데요. 부담스럽군요.”
다른 사람은 대략 대여섯 번쯤 베어먹어야 다 먹을 빵을 두 입만에 끝장낸 샌슨이 입에서 빵가루를 튀겨가며 말했다. 저건 샌슨 브레스다…………… 으으으
“그런데요, 쩝쩝, 지금쯤 시내에서는, 쩝, 꿀꺽! 난리가 났겠죠?”
“응? 왜 그러는가, 퍼시발 군?”
“아니, 저, 우리가 도둑 길드를 찾아갈 필요가 있을까요?”
“응? 무슨 말인가?”
“소문이 나지 않았겠습니까.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저택이 털렸다.’, 이런 식으로 시내가 대단히 삼엄할 것 같습니다만? 그러니까 넥슨더러 네리아를 데리고 여기 로 오라고 배짱을 부려보지요. 넥슨도 소문을 들었을 테니까 우리가 성공한 것을 알았을 겁니다. 도둑 길드로 찾아가는 것은 위험하지 않을까요?”
“위험하다라. 흠.”
맞아. 위험하겠군. ‘수고했다. 그럼 이만 죽어라.’ 헷, 옛날 이야기에 나오는 악당은 항상 그 모양이잖아? 뭐, 넥슨은 옛날 이야기에 나오는 악당과는 많이 다르긴 하 지. 품위도 있고, 게다가 재가 프리스트이기도 하고. 그러나 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확신할 순 없지만 아마 소문은 나지 않았을 걸세.”
“예? 그런 엄청난 집이 털렸는데?”
“퍼시발 군. 자네는 퍽 자랑스러운 모양이군? 하긴 우리는 도둑 길드의 누구도 들어갈 수 없다는 저택을 침입하기는 했네.”
그 말에 샌슨은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게 자랑스러운가? 결국 도둑질인데. 하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니까. 그러나 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소문은 나지 않을 것 같아.”
“왜지요?”
“도둑맞은 물건이 공개되어선 안 되는 물건이니까.”
“아! 그렇군요.”
샌슨은 자기 머리를 딱 쳤다. 아프나이델도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입니다. 하지만 샌슨 씨의 의견에도 일리가 있는데요.”
길시언도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샌슨에게 뒤지지 않는 모습의 반모범적인 식사 태도로 나를 상당히 감동하게 만들고 있던 위대한 노커 엑셀핸드가 위대한 트림 을 꺽꺽 하면서 말했다.
“그럼, 끄어억! 에, 그놈보고 여기로 오라고 하세!”
칼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 되겠군요.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서라도, 네리아 양과 서류의 교환은 안전한 곳에서 이루어져야겠습니다.”
나는 칼의 말에 그만 웃어버렸다. 아이고, 능구렁이!
“똑바로 말해야죠, 칼, 네리아와 가짜 서류의 교환이라고.”
“응? 허허. 그렇구먼.”
다른 사람들도 모두 그 말에 씨익 웃었다. 왠지 한겨울에 땅 파면 나오는, 뱀들이 득실거리는 땅굴 같다. 으……………, 이런 사악한 사람들 사이에서 내 섬세하고 순 진한 성품이 타격을 입지는 않을까?
칼은 하이 프리스트를 만나기 위해 떠났다. 그러자 심심해진 샌슨은 나에게 팔씨름을 하자느니 하면서 괴롭히기 시작했다. 망할. OPG 없다고 이렇게 괴롭히냐? 내 가 펄쩍펄쩍 뛰면서 악을 바락바락 써대자 샌슨은 길시언에게 대무나 하자고 말해서 길시언을 어이없게 만들었다.
“신전에서 대무를요?”
그래서 샌슨은 구석에서 몹시 가여운 얼굴을 하고 있게 되었다. 아프나이델은 그 모습을 보며 웃더니 이루릴의 그것만큼이나 큼직한 책을 꺼내어 읽기 시작했다. 엑 셀핸드는 숫돌을 꺼내어 도끼날을 갈기 시작했다. 쓰으윽, 싸아악.
모두들 평화스러워 보였지만 이 평화에는 숨겨진 면이 있다. 모두들 나름대로 왜 할슈타일 후작이 이 군사 기밀 서류를 가지고 있는지를 추측해 보고 있는 것이다. 갑자기 닥친 일이라 모두들 이해가 되지 않아서 고민하고 있었다. 결국 엑셀핸드가 먼저 도끼를 가는 손놀림에 맞추어 흥얼거리듯이 말했다.
“할슈타일이란 후작, 왜 이런 서류를?”
아프나이델은 책장을 넘기던 손을 잠시 멈추더니, 곧 책을 내려놓고 말했다.
“가장 쉽게 생각하면, 스파이겠죠.”
“후작이 무엇 때문에?”
“자이펀과의 거래를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요.”
길시언은 구미가 동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침착하지만 진지한 어투로 말했다.
“칼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프림 블레이드…………, 그만 둬엇! 에, 어, 죄송합니다. 칼은 전쟁중에는 많은 일이 가능하다 고 말했습니다. 후작은 자이펀과 손을 잡고 둥글게 돌며 춤이라도…………, 야 이, 빌어먹을 칼아아악!”
진지한 태도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길시언은 검무를 추기 시작했다. 그래서 구석에서 가여운 표정을 하고 있던 샌슨은 죽을 힘을 다해 도망쳤다. 길시언은 너무 흥분해서 검을 아무렇게나 휘두르며 욕지거리를 뱉어내고 있었기 때문에 잘못했다간 눈 먼 칼에 맞아죽을지도 모르니까. 아프나이델이 길시언의 말을 이었다.
“자이펀과 손을 잡고 바이서스를 전복시킨다, 이런 말입니까?”
길시언은 간신히 흥분을 가라앉히고 말했다.
“예. 그렇게 말했습니다. 내 생각에도 그건 말이 되는 것 같습니다.”
“예. 일리 있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전하께서 그를 체포, 구금하시겠지요.”
“그렇게 되긴 어렵습니다.”
길시언의 말에 아프나이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반역자를 건드릴 수 없다니요.”
“죄와 벌이 같이 다니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할슈타일 후작은 건드릴 수 없습니다. 후작은 건드리기엔 너무 민감해서…………, 아냐! 에, 건드리기엔 세력이 너무 큽니다. 캇셀프라임은 패퇴되었지만 아직 드래곤은 남아 있습니다.”
드래곤이 남아 있다고? 나는 질문했다.
“크라드메서요?”
“아니, 자이펀 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지골레이드. 지골레이드의 드래곤 라자는 역시 후작의 가문에 입양된 양자이긴 합니다만, 지골레이드를 생각해서라도 할슈타 일 후작을 건드리는 것은 현명한 일이 되지 못합니다.”
으어. 죄와 벌은 함께 다니는 게 아니군. 젠장. 아프나이델은 미간을 문지르다가 말했다.
“아, 그렇습니까. 하지만 그것은 국왕 전하께서 정하실 일이고, 우리는 이 서류를 가져다드리기만 하면 될 것입니다.”
길시언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긴 했다. 하지만 그는 아직 찜찜한 표정이었다. 그 얼굴이 재미있어서 나는 한마디 말을 걸어보았다.
“전쟁에는 관심 없다고 하시더니, 역시 걱정은 되시나 보군요?”
“응? 무슨 말이냐?”
“지금 나라 일을 걱정하고 있잖아요. 국왕 전하의 곁에는 전문가가 많아서 걱정하지 않는다고 말한 사람이 기억나거든요.”
길시언은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다시 창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의 굵은 눈썹이 부드럽게 움직여 창문 밖의 관목들을 향했다. 그는 나직하게 말했다.
“솔직히 걱정 안 될 수는 없다. 동생이고, 우리나라니까.”
‘우리나라’라.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텐데. ‘내 나라가 될지도 몰랐던 나라’라고. 어쨌든 그는 순종 모험가는 못 되겠군. 흐흠. 대화가 끊어질 즈음해서, 방문이 열렸 다.
방문이 열리며 들어선 것은 칼이었다.
“다녀오셨습니까?”
샌슨의 말에 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칼은 뭐가 그리 급한지 우리 쪽으로 걸어오면서 말했다.
“이상하군요. 소문이 났습니다.”
“예?”
칼은 테이블 옆에 앉더니 우리를 모두 모이게 했다. 모두들 빠른 몸놀림으로 테이블 주위에 모여앉자 칼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이 프리스트께서 물어왔습니다. 어제 할슈타일 후작의 저택이 도둑을 맞았다는 이야기를 꺼내시더군요. 나는 그랬냐는 식으로 대답하긴 했습니다만 하이 프리스 트는 지나가는 어투로 우리가 어젯밤 늦게 들어온 이유가 궁금하다는 투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
모두들 어이없는 얼굴이 되었다. 아프나이델이 고개를 크게 갸웃거리며 말했다.
“후작이 정신이 나갔나? 아, 그것, 이상하군요. 도둑맞았다는 것을 말한다면 도둑맞은 물건에 대해서도 말해야 될 텐데?”
“그렇소. 이상한 일이오. 어쨌든 하이 프리스트께는 모르는 일이라고 딱 잡아뗐습니다.”
엑셀핸드가 머리를 마구 긁적거리더니 말했다.
“흐음…… 그것 참! 골치 아프군.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모르겠어?”
칼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 서류는 조속히 전하께 전해 드려야겠습니다. 그러려면 먼저 네리아 양을 빨리 구해야 됩니다. 퍼시발 군, 네드발 군.”
“예.”
“네드발 군이 안내하게. 도둑 길드를 찾아가서 우리가 그 책을…………. 아니, 소문이 났다면 그쪽에서도 알고 있을 거야. 우리가 그 책을 가지고, 에, 길시언? 수도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왔다갔다하는 곳이 어디입니까?”
“예? 그야 중앙 광장이겠죠. 루트에리노 대왕 기념관이 있는.”
“알겠습니다. 오늘은 날씨도 좋고. 네드발 군과 퍼시발 군은 넥슨에게 우리가 책을 가지고 중앙 광장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네리아를 데리고 나오라고 전하게. 무 슨 말을 하든 듣지 말고 무조건 지금 당장 중앙 광장으로 오라고 말하게나. 알았지?”
“지금 당장이오?”
칼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방 한쪽에 놓여 있던 아프나이델의 배낭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그래. 그리고 길시언은 이 서류를 가지고 즉시 임펠리아를 찾아가십시오. 길시언은 전하를 바로 만나뵐 수 있을 것입니다. 아프나이델, 배낭을 열어 서류를 꺼내드 리십시오.”
아프나이델은 배낭을 열었다. 길시언은 서류를 받아들고는 말했다.
“책이 가짜라는 것을 알면 넥슨이 가만 있지 않을 겁니다. 내가 있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괜찮습니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 서툰 짓은 못할 테고, 그리고 그런 야외에서 책을 뒤지며 종이를 확인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네리아 양을 돌려받자마 자 임펠리아로 달려가겠습니다. 부탁이니 우리를 맞아들일 준비를 좀 갖춰주시겠습니까? 국왕 전하께 그 정도의 부탁은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예. 알았습니다.”
그때 아프나이델이 주저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임펠리아로 갑니까?”
“예. 그곳보다 안전한 곳이 있겠습니까?”
“음.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아프나이델은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지? 마법사는 궁성을 싫어하나?
어쨌든 나와 샌슨은 곧 도둑 길드로 출발할 준비를 갖추었다. 그리고 칼과 아프나이델, 그리고 엑셀핸드는 책을 들고 중앙 광장으로 출발했다. 길시언은 중앙 광장까 지 그들을 안내한 다음 임펠리아로 달려가기로 했다.
대로에서 소란을 피운다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 그러나 우리는 주위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 정도로 소란을 부리고 있었다. 특히 샌슨은 여전히 그 험악한 표정과 힘 이 넘치는 몸짓으로 주위 사람들이 감히 불평을 말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물론 우리에게서 꽤 멀어진 다음에 안 들리도록 구시렁거리는 것은 수도 시 민의 당연한 자유다.
“아닌 것 같은데.”
“이…………! 머릿속에 여자 생각밖에 없는 녀석아! 어떻게 모른단 말이야?”
나는 샌슨을 째려본 다음 그를 무시하며 다시 다음 골목으로 걸어갔다. 가벼운 발걸음, 그리고 그에 보조를 맞추듯이 가볍게 튀어나온 콧노래.
“성밖 물레방앗간에…………….”
“그만해! 말 돌리지 말고!”
“젠장, 나도 돌겠다고! 네리아 따라서 딱 한 번 와봤어. 이런 망할, 무슨 골목길이 이렇게도 복잡해? 거기가 거기 같고 저기도 거기 같고 요기도 거기 같단 말이야!” 거기란 말을 너무 많이 했더니 턱이 아프다. 샌슨은 인간이 망각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기로 작정했는지 ‘그래도 기억해 내야 된다, 멍청아, 한 번 가봤으면 당연히 알아야지, 넌 그럼 절벽에서 한 번 떨어지고도 다음번에 또 절벽으로 걸어갈 셈이냐?’ 등의 말도 안 되는 말을, 그것도 아주 큰 목소리로 뱉어내고 있었다.
“너무 늦잖아!”
“저기다!”
“어? 어디, 어디 말이야?”
“저기, 저기 있다! 바로 저거야, 샌슨에게 필요한 것은! 가서 머리 좀 식히고 와.”
샌슨은 내 손가락을 따라갔다가 건초상 앞에 있는 말 여물통을 보고는 펄쩍펄쩍 뛰면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크아악! 이 망할 자식아!”
샌슨이 너무 고함을 지르자 슈팅스타마저도 좀 놀란 모양이다. 샌슨이 서 있던 곳 바로 옆에 있던 포목점에서 주인이 더 이상 못 참겠는지 천 자르는 가위를 들어보 이며 고함을 질렀다.
“이 자식아! 입 닥치지 않으면 이걸로 혀를 잘라줄 거야!”
“뭐야? 말 다했어? 자식아! 잘라봐, 잘라봐!”
샌슨은 머리 끝까지 화가 나서 말에서 내린 다음 그 젊은 포목점 주인에게 삿대질을 하며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이구, 안 되겠다. 나도 재빨리 제미니에서 내려 샌슨 을 붙잡았다. 젠장, 질질 끌려가네. 난 있는 힘을 다해 샌슨을 끌어보려 애쓰면서 그 포목점 주인에게 대신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이 청년 겉보기엔 멀쩡해 보여도 사실 말로 해선 못 알아듣는 지진아예요. 정상인인 제가 대신 사과할 테니………….”
딱!오! 반가운 소리. 젠장.
분명히 이 근처 어디인 것 같은데? 샌슨은 내 귀를 붙잡아 당기며 말했다.
“자식아! 얼마든지 찾아갈 수 있다며? 뭐라고? 포목점 지나 건초상 돌아가면 바로 나오니까 눈 감고도 찾아가, 가, 가………….”
“어……?”
잠깐. 포목점과 건초상?
샌슨과 나는 서로 얼굴을 한 번씩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말들의 고삐를 쥔 채로 다시 뒤로 돌아서 우리가 서 있던 포목점에서 그 뒤의 건초상으로 지나갔다. 그러자 그 뒤에 구둣가게가 보였다.
샌슨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슬라임 같은 놈…….”
슬라임 같은 머리로 취급받게 되다니.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닌 샌슨에게! 죽고 싶다는 감정이 이다지도 쉽게 느껴지는 것이었구나. 으으. 그래도 별로 할 말은 없군. 우리는 말들을 세워두고는 구둣가게로 들어섰다.
역시, 기억난다. 여기다. 늙수그레한 노인 자크가 앉아서 구두를 쥐고 꿈지럭거리고 있었다. 노인 자크는 우릴 흘긋 보더니 곧 내 얼굴을 알아차렸다. 뭐라고 말을 꺼 내기도 전에 노인 자크는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걸린 구두 중의 하나를 잡아당기더니 말했다.
“내려가 봐.”
“수고하세요.”
어울리는 대답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그렇게 말해 주었다. 노인 자크는 괴상한 눈길로 날 보더니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가 망치를 들고 구두를 또닥거리기 시작했다. 샌슨은 벽의 구두를 당기자 구석 벽이 열리는 모습을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어쨌든 그대로 걸어갔다.
안으로 들어서자 역시 아래로 내려가는 나선 계단이 보였다. 샌슨은 신중한 걸음걸이로 계단을 내려갔고 나도 그 뒤를 따랐다. 아래에 내려가자 샌슨은 곧장 문을 두 드렸다. 정말 앞뒤 없군.
“누구야?”
샌슨은 잠깐 얼떨떨한 표정을 짓더니 곧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야.”
아이고 맙소사. 나는 머리를 좀 가로젓고는 대신 말했다.
“약속대로 네리아를 찾으러 왔다. 문 열어.”
“들어와.”
문이 열렸다. 샌슨은 문만 열고는 일단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밖에 선 채 안을 살폈다. 안에는 여러 명의 남자들이 모여 서 있었다. 몇몇은 테이블에 몰려앉아 있었고 몇몇은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넥슨 휴리첼도 보였다. 그는 전에 왔을 때 청년 자크가 앉아 있던 그 책상 뒤에 앉아 있었다. 넥슨은 우릴 보더니 말했다. “자네들인가?”
샌슨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젠장. 정말 당신이 길드 마스터였군. 프리스트가 도둑 길드의 마스터라니. 지나가던 개가 웃겠다. 쳇.”
샌슨의 이 막나가는 말에 안에 있던 남자들의 얼굴이 사나워졌다. 그러나 넥슨은 별로 표정을 바꾸지도 않은 채 말했다.
“그런데, 거기 서 있을 건가?”
샌슨은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가면 포위되기 쉬워서 그러는 모양이다.
“내 마음이야. 네리아는 어디 있지?”
“잘 있어. 물건은?”
“소문은 들었을 텐데.”
그러자 구석에 있던 남자 하나가 밝은 얼굴로 말했다.
“들었어. 자네들이 진짜 그 집을 털었……”
남자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넥슨이 사납게 그 남자를 노려보았던 것이다. 넥슨은 거의 이를 가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끼어들지 마라.”
남자는 창백해진 얼굴을 옆으로 꺾었다. 넥슨은 다시 고개를 돌려 우리 쪽을 보고 말했다.
“축하하지. 도대체 어디 가서 그런 도둑을 구했지?”
“응?”
우리는 얼빠진 표정을 지었지만 다행히도 어두운 바깥에 서 있어서 우리 표정은 잘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넥슨은 말했다.
“내가 모르는 도둑인 걸 보니 길드 소속은 아닌 것 같은데. 할슈타일 저택에 침입할 정도의 도둑이 그렇게 명성이 없다니, 놀라워. 그 이름을 알고 싶은데?” 샌슨은 빙긋 웃었고 나도 킬킬거리며 말했다.
“당신 알 바가 아니야. 어쨌든 그 이상한 책은 우리가 가지고 있어. 그런데 무슨 그런 책을 원하는 거지?”
“내용을 봤나?”
“그래. 술집 안내서가 왜 필요하지?”
“내가 그 책을 필요로 하는 이유를 자네가 알아야 할 필요는 있는가?”
“없지. 관심 없어. 그런데 네리아는 어디 있지?”
넥슨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그러나 샌슨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넥슨은 방 한가운데 서서 불빛을 등지고 서 있었 다. 그래서 그의 모습은 어두컴컴했으나 그의 눈만은 번쩍번쩍 빛나며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잠깐 숨이 막혀서 샌슨을 쳐다보았다.
샌슨은 바깥의 어둠 속에서 방 안의 넥슨을 바라보고 있었다. 샌슨도 바깥의 어둠 속에서 오로지 그 눈만이 타오르고 있었다. 넥슨이 번쩍거리는 눈빛이라면 샌슨은 불타오르는 눈빛. 운차이! 나 이제 당신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이것이 살기인가?
넥슨은 말했다.
“자네, 그날 아침 대무하는 모습을 봤지.”
“그랬지.”
“길시언 폐태자를 봐주면서 하고 있더군.”
뭐라고? 샌슨은 찔끔한 표정이더니 다시 씨이익 웃으며 말했다.
“눈이 좋군. 좋은 대무 상대는 구하기 어렵거든. 하지만 네게 시답잖은 칭찬이나 들으려고 온 것은 아냐. 네리아는 어디 있냐고 한 번만 더 물으면, 에, 어, 후치야?” “세 번째.”
“그래. 세 번째다. 대답해.”
넥슨은 갑자기 옆을 바라보았고 그러자 서 있던 사내들 중 하나가 옆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잠시 후 그는 네리아의 팔을 붙잡고 돌아왔다. 샌슨은 걱정스러운 표정 으로 네리아를 바라보며 뭐라고 말하려 했다. 그때 네리아는 크게 입을 벌렸다.
“흐아아아…… 아이, 씨이잉! 왜 깨워? 치잇.”
샌슨은 기막힌 표정으로 말했다.
“허, 참. 팔자가 좋았나 보지?”
네리아는 눈을 비비다가 샌슨의 목소리를 듣고는 놀란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더니 곧 문 바깥에 서 있는 우리들을 발견했다.
“음냐, 쩝. 응? 어라? 야! 후치! 왜 돌아왔어?”
“아이고 돌겠네. 당신이 인질이니 뭐니 하는 말을 해가지고서 죽을 고생을 해서 푸른 책을 찾아왔는데,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네리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뭐야? 진짜 그걸 훔쳐내었어?”
네리아는 그렇게 말하며 우리 쪽으로 걸어오려고 했다. 그러나 그때 넥슨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넥슨은 네리아의 팔을 쥐었다.
“아아아악!”
네리아는 비명을 지르며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저 자식이! 샌슨이 먼저 고함질렀다.
“무슨 짓이야!”
넥슨은 씨익 웃으며 샌슨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동안에도 네리아는 팔을 빼내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는 것이 보인다.
“아, 아윽! 좀, 야, 이 개 같은 자식아앗! 으, 으흑! 이, 이거 못 놔아!”
“저 새끼가!”
나는 앞으로 뛰어들려고 했다. 샌슨이 내 어깨를 붙잡지 않았다면 난 뛰어들었을 것이다. 샌슨에게 어깨를 붙잡힌 채 난 넥슨을 쏘아보았다. 빌어먹을 자식! 내 OPG 를 끼고 있었다!
“그건 내 거다! 돌려줘!”
“싫어.”
이 황당한 대답. 도대체 뭐라고 반박할 말이 없다. 몰염치하고 무자비하고 잔인한 대답이다. 무슨 논리가 닿지 않는다. 나는 얼빠진 얼굴로 넥슨을 바라보았다. 넥슨 은 피식거리며 말했다.
“이렇게 좋은 걸 왜 돌려줘? 바보 아냐?”
“이이익!”
말이 통하지 않는 놈, 좋아. 그럼 공격 방향을 바꿔보지. 난 옆에 서 있던 남자들에게 외쳤다.
“저따위 거지 같은 성격의 두목을 모시고 있냐? 끼리끼리 정말 어울린다. 하! 당신들 입에 든 것도 저 녀석에게 내어주지? 혹시 아내나 애인은 안 내줘? 그러고도 아 무 말도 못하지?”
내가 생각해도 좀 심하다 싶은 말이니 남자들의 표정이 극도로 험악해진 것이야 당연하다. 남자들 사이에서 폭언이 튀어나왔다.
“저, 새끼! 잡아! 이리와, 이새꺄!”
“네가 나와봐, 문 밖으로 머리만 내밀어봐, 어깨가 시원하게 만들어줄 테니까!”
그때 넥슨은 고함을 질렀다. “입들 닥쳐!” 그리고 그와 동시에 샌슨도 내 어깨를 잡아당겼다.
“그만해, 후치.”
넥슨은 샌슨보다는 훨씬 과격한 방법으로 부하들을 꾸짖었다. 그는 네리아의 팔을 놓더니 곧장 고함을 지른 부하에게 다가갔다. 다른 사내들이 허겁지겁 옆으로 비 키는 가운데 넥슨은 빠르게 그 남자에게 다가섰다. 남자는 질린 얼굴로 넥슨을 바라보며 엉거주춤 뒤로 물러났다. 퍽! 넥슨의 발이 남자의 배에 박혔다. 남자는 배를 감싸쥐며 쓰러졌다.
넥슨은 쓰러진 남자를 계속 걷어차며 으르렁거렸다.
“저런 꼬마의 말에 넘어가? 엉? 네가 그러고도 길드의 도둑이냐!”
퍽! 퍼벅! 남자는 신음소리를 토했다. 몇 번이고 쓰러진 남자를 걷어차던 넥슨은 마지막으로 세차게 걷어차 남자를 벽쪽으로 데구르르 구르게 만들었다. 주위의 남자 들은 모두 말릴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주저앉아 있던 네리아는 그 모습에 놀라더니 뽀르르 달려갔다. 그녀는 벽쪽에 굴러가 끙끙거리는 남자의 앞을 가로막았다. 넥슨은 험한 눈초리로 네리아를 바라보았지만 네리아는 눈을 쭉 찢으며 넥슨을 노려보았다. 죽어도 비키지 않겠다는 얼굴이다. 넥슨은 더 못 참겠다는 듯이 다리를 들어올렸고 네리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였다.
“차면 죽는다.”
샌슨의 낮은 목소리가 넥슨의 다리를 붙잡았다. 넥슨은 고개를 돌려 문밖의 샌슨을 바라보았고 샌슨은 굳은 얼굴 그대로 넥슨을 노려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해봐라. 넌 바로 죽는다.”
넥슨은 주춤하더니 다시 똑바로 섰다. 샌슨은 미동도 하지 않고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넥슨은 호흡을 가다듬더니 말했다.
“우리 거래 이야기나 하지. 책을 내놔.”
샌슨은 목에 뭐가 걸린 듯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따라와라.”
“응?”
“내가 머리가 빈 줄 알아? 여기로 책을 가져오게. 책은 다른 일행이 가지고 있다. 거기로 안내할 테니 네리아를 데리고 따라와라.”
“준비가 철저했군.”
갑자기 샌슨이 고함을 질렀다.
“이 자식아! 네게 칭찬 들으려고 온거 아니라고 했지! 네리아를 데리고 얌전히 따라와라. 그리고!”
샌슨은 애써 숨을 고르며 낮게 말했다.
“따라오는 동안, 다시는 네리아에게 손을 대지 마라.”
샌슨은 바위 같은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넥슨은 한숨을 쉬며 남자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네리아의 팔은 벌겋게 물들어 있었고 그녀는 고개를 떨구고는 손목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하 지만 쓰러진 남자 앞에서 비켜나지 않았다.
목에 뜨거운 것이 느껴진다. 네리아는 전혀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지만 그녀의 어깨는 위아래로 떨리고 있었다. 울고 있는 것이다. 넥슨은 다시 고개를 돌리더니 차분 하게 말했다.
“농담이 아니군. 알았어, 가자.”
샌슨은 대답하지 않고 몸을 돌려 계단을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다. 나는 네리아를 좀더 바라보다가 허둥지둥 샌슨을 따라 올라갔다. 다시 바깥으로 나온 우리는 각자 말에 올라탔다.
잠시 말 위에서 기다리는 동안, 나는 샌슨에게 물었다.
“진짜야?”
“뭐가?”
“봐주면서 했다는 말과 죽이겠다는 말.”
“길시언에겐 비밀이야. 그리고 두 번째 것은,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뛰어들었을 가능성이 높아.”
난 잠시 멀거니 샌슨의 얼굴을 바라보았으나 샌슨은 별 표정 없이 구둣가게의 정문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데 잠시 후 옆에 있던 건초상에서 누군가가 말을 타고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