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4권 – 제7부 : 항구의 소녀 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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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라자 4권 – 제7부 : 항구의 소녀 8화

8

밤하늘과 별로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무반사의 검은 털빛을 가진 말, 그 발굽은 허공을 밟고 서 있으며 희뿌연 눈동자는 초점 없이 앞을 바라보고 있다. 팬텀 스티 드. 이 유령마들은 각자 하나씩 세 명의 사람들을 태운 채 도시의 야경을 밟고 서 있었다.

“으아아! 유령이다!”

“화렌차의 세 기사다! 달아나라! 보면 안 돼!”

저게 화렌차의 시간의 기사, 공간의 기사, 의미의 기사라고? 하긴 시민들에게는 그렇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도 퍽 놀랐지만 팬텀 스티드에 탄 그 작자들도 우리 가 뛰쳐나오자 좀 당황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들은 압도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여유 있게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떠 있는 자는 차갑게 웃기까지 하고 있었다. 젠장, 저 얼굴은 절대 잊을 수 없어. 이 시커먼 밤하늘에서 이런 괴상한 만남이라 할지라도 네 녀석의 그 얼굴은 못 잊어!

“넥슨 휴리첼!”

난 넥슨의 얼굴을 보고는 이를 갈았다. 넥슨의 양쪽으로 남자 하나와 여자 하나가 떠 있었지만 난 그 얼굴은 보지 않았다. 베란다에 서 있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넥슨 에게로 달려갈 뻔하다가 간신히 멈췄다. 넥슨은 싸늘하게 말했다.

“오래간만이군, 모두들. 역시 굉장한 친구들이군. 놀라게 해주려 했는데 이렇게 마중까지 나와줄 줄이야.”

기습을 못해서 안타깝다 이 말이지? 오냐. 성대한 환영을 해주지. 일행은 모두 무기를 뽑아들었다. 바스타드가 힘겹게 느껴지긴 했지만 난 이를 악물었다. “너의 머리를 날려주지. 아니면 네 머리에서 그 몸을 떼내어주지!”

넥슨은 빙긋 웃었다. 그때 네리아가 말했다.

“그거 내 트라이던트, 돌려줘.”

넥슨의 왼쪽에 떠 있던 남자는 그 마부였다. 젠장, 마부인지 아닌지도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과묵한 넥슨의 심복 녀석은 네리아의 트라이던트를 들고 있었다. 그 남자는 자기 손에 들고 있던 트라이던트를 살짝 들어보이더니 곧 우리가 서 있던 베란다에 집어던졌다.

네리아는 입을 딱 벌렸다.

“어라?”

진짜 던져주네? 허, 그것 참. 네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조심스럽게 그것을 주워들었다. 난 그 마부의 얼굴을 보았지만 여전히 무표정할 따름이었다. 이 상황에서 내가 입을 다물고 있으면 그건 내가 아니다.

“주인보다는 낫군. 도벽을 가진 주인 섬기기 어렵겠어?”

넥슨은 이를 드러내었고 마부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그런데 내 옆에서 롱소드를 뽑아들던 샌슨이 갑자기 멈칫거렸다. 샌슨은 넥슨의 옆에 떠 있는 한 여자를 바라보 고 있었다. 여자? 저건 누구지? 그때 샌슨이 질린 목소리로 외쳤다.

“너……, 그때!”

그 여자도 샌슨을 보더니 무언가를 알아보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희들, 죽지 않았어?”

“그거 질문이야, 확인이야?”

“확인이야. 어떻게 살아났지? 아, 그 유피넬의 어린 자식의 소행이로군.”

뭔 말들이야? 저 여자가 누군데? 저 여자는 시커멓고 엉망진창인 머릿결에 역시 시커먼 옷, 그리고 창백한 얼굴에 손엔 레이피어를 들고 있는 여자일 뿐인데, 에, 오 우! 빌어먹을! 칼이 낮게 신음처럼 말했다.

“그때의 그 뱀파이어!”

칼라일 영지에서 우리를 죽이려 들었던 그 뱀파이어다. 빌어먹을! 저 뱀파이어 여자는 자이펀의 간첩으로 활동하고 있었지? 그렇다면 바이서스의 배신자인 넥슨 휴 리첼과 함께 있는 것도 설명은 되는 것 같군. 길시언이 노한 표정으로 말했다.

“넥슨 휴리첼! 그대에게 실망했다! 누대에 걸쳐 그대 가문에게 내려진 성은이 작다 하지 못할진대 어찌 적국과 내통하여 그 성은을 배신한단 말이냐!”

나와 샌슨은 정말 놀라서 길시언을 바라보았다. 아니, 정확하게는 길시언이 들고 있는 프림 블레이드를 바라보았다. 길시언도 자기 말에 놀라서 프림 블레이드를 바 라보며 말했다.

“이, 이거 방해를 받지 않고 말하자니 그것도 이상하다…….”

우리 앞 허공에 떠 있던 넥슨은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

“누대에 걸친 성은이라고? 그래서 우리 아버지에게 늙어죽을 기회도 주지 않고 저 변경의 촌구석으로 쫓아내었나? 우리 아버지가 반생을 통해 어전에 바친 적의 수 급의 숫자는 명백히 기록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드래곤의 뒷바라지나 시켰는가?”

길시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캇셀프라임 말인가 보군. 나는 그 일을 잘 알지는 못한다. 하지만 카뮤 휴리첼의 배덕한 죽음에도 불구하고 너의 아버지에게 명예 회복의 기회를 선사한 성은이 잘 못되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배덕한 죽음이라. 하하하. 미드 그레이드가 파멸의 낭떠러지에 선 것은 크라드메서라는 드래곤의 머리가 돌아버린 것 때문이었다. 그것 때문에 왜 우리 가문이 핍박받아야 하는가?”

“공인으로서 그런 죽음을 맞이한 것이 잘못이 아니란 말이냐?”

“공인? 공인 중의 공인이자 기사 중의 기사인 너희 바이서스 왕족이 백성들을 함부로 전쟁터로 내보내는 것은 어떻고.”

“이놈! 입을 닥쳐라!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넥슨은 킬킬거렸다.

“웃기는군. 저기 저 칼과 샌슨, 그리고 후치는 그 먼 변경에서 여기로 달려왔지? 이봐. 칼. 당신은 바이서스와 자이펀의 전쟁에 대해 무엇을 알지요?”

엉뚱하게 화살이 우리에게 날아오네? 나는 칼을 바라보았다. 칼은 말했다.

“이 전쟁에 대해 거론하는 이유가 무엇이오?”

“우리에겐 왕의 명령으로 전장에 나가 죽을 권한, 왕에겐 우리를 아낌없이 사지로 보낼 권한이 있는 이 빌어먹을 바이서스라는 나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게 어쨌단 말이오?”

“억울하지 않으시오?”

넥슨은 갑자기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우리는 미심쩍은 얼굴로 넥슨을 바라보았다.

“억울하지 않습니까? 태어나면서부터 감당해야 하는 의무라는 것이 말이 됩니까? 루트에리노 대왕과 핸드레이크는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대지를 달려 나라를 세웠 고, 그래서 그들의 위엄과 권한을 오롯이했습니다. 그러나 그 게으르고 무기력한 후손들은 단지 왕가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손에 흙 한 번 묻힐 일도 없이 태연히 그 백성들을 전장에 내보내어 죽이고 있소. 그런 전쟁이 벌써 몇 년째입니까!”

어디서 들었던 말이로군. 칼은 착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영웅 시대를 꿈꾸는 젊은이로군. 당신은 루트에리노 대왕의 흉내를 내어보고 싶은 게로군.”

“그래서, 안 됩니까? 드래곤 로드의 지배를 받기 싫었던 루트에리노 대왕은 핸드레이크와 힘을 합쳐 그에 반대하여 이 나라를 세웠습니다. 나는 바이서스 왕가가 싫 습니다. 그래서 바이서스 왕가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나라를 세울 것이오. 누구도 상대에게 죽음의 명령을 내릴 권한 따위는 가지지 않는 나라, 인간의 나라를 세울 것 입니다!”

칼은 묵묵히 넥슨을 바라보다가 입술 사이로 새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루트에리노 대왕은 앞길을 가로막는 어린아이를 짓밟으며 자신의 길을 걷지는 않았소.”

넥슨은 입을 콱 다물었다. 칼은 낮지만 힘있게 말했다.

“나 또한 나라의 영속성, 세습의 권한 획득에는 관심 없는 사람이오. 대지는 넓고, 왕국은 원한다면 세울 수 있소. 나라는 영원할 수는 없고, 누구라도 왕은 될 수가 있을 것이오. 하지만, 하지만 당신이 어떤 나라를 세우든, 그 나라는 어린아이의 핏값을 전제로 한 나라가 될 것이오. 누구도 상대에게 죽음의 명령을 내리지 않는다 고? 그렇다면 당신이 그 어린아이에게 베푼 죽음의 손길은 어떻게 된다는 말이오.”

넥슨은 이를 갈듯이 말했다.

“완벽은 없소. 소수의 희생 없이 변혁을 꿈꾸는 것은 몽상가의 논리일 따름입니다. 당신이 그렇게도 비현실적인 사람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소.”

칼이 드디어 특유의 비꼬는 얼굴이 되기 시작했다.

“그렇소? 그렇다면 바로 당신을 희생시키는 것이 좋겠군. 그게 지금 이 나라의 현실에 가장 적합한 희생이 될 것 같소. 전쟁으로 어지러운 나라를 접수하시겠다고? 왜? 평화가 우선이 아니라 당신의 권력 획득이 먼저인가?”

“내가 가장 바라는 것이 평화고, 그래서 이 나라의 전쟁과 이 나라를 한꺼번에 끝낼 거요. 그리고 평화의 땅 위에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거요.”

칼은 넥슨의 옆에 있던 그 뱀파이어 여자를 흘깃 바라보았다.

“그렇군. 자이펀과 손을 잡고 전쟁을 끝내시겠다 이 말이겠군.”

뱀파이어 여자는 별말 없이 다만 싸늘하게 우리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여기서 저기로, 저기서 여기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칼이 결기 어린 목소리로 넥슨에게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시오. 당신의 정체가 드러난 이상 당신은 자이펀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소. 그 서류도 이미 국왕 전하에게 돌려주었소. 따라서 자 이펀에서 당신을 받아줄 까닭이 없소. 당신에겐 아무런 이용 가치가 남지 않았으니까.”

넥슨은 킬킬거렸다.

“웃기지 마십시오. 당신은 나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합니다.”

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도대체 뭘 어쩌겠단 말이오? 당신에게 무엇이 남아 있단 말이오. 당신이 건네주려 했던 그 서류는 이미 우리가 국왕께 돌려드렸소. 그리고 당신은 그랜드스톰의 은 혜도 바랄 수 없소. 도둑 길드? 글쎄. 도둑 길드가 당신을 얼마나 도울 수 있을지 모르겠군. 당연히 당신 가문의 힘을 사용하지도 못하게 되었소. 그런 당신이 무엇을 한단 말이오.”

“천만에, 천만에. 나는 여러 가지를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네리아가 그 말에 코를 찡그렸다. 갑자기 그녀는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헤이, 넥슨?”

그러더니 네리아는 트라이던트를 빙빙 돌려 허리 옆에 세웠다.

“말은 필요없어. 끝장을 보자. 덤벼라.”

샌슨과 길시언도 그 말에 네리아의 옆에 서서 검을 세워들었다. 그리고 나와 엑셀핸드는 약간 뒤에 섰고 아프나이델과 칼은 맨 뒤에 섰다. 넥슨은 히죽 웃었다. “싸우러 온 것이 아니오. 싸우러 왔다면 우린 간단히 당신들을 죽일 수 있지.”

칼은 미심쩍은 얼굴로 넥슨을 바라보았다. 넥슨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난 원한을 잊는 성격은 아닙니다. 하지만 날 패배시킬 정도의 능력과 힘을 알아볼 줄 아는 눈은 가지고 있지요.”

“무슨 말을 하는 게요?”

“협력하지 않겠습니까?”

“무엇을 위해…………, 당신과 협력한다는 말입니까?”

“당신들이 목숨을 걸 만한 대가를 원한다면 대가를 지불하지요. 당신들이 몸 바칠 이상을 필요로 한다면 이상을 드리지요. 원하는 바를 말해 보시오.” “당신에겐 받을 만한 것이 없을 것 같소.”

넥슨은 빙긋 웃었다. 밤하늘에 떠 있는 세 사람의 모습과 그 가운데서 웃고 있는 넥슨의 모습은 소름끼치도록 신비로운 것이었다. 넥슨은 차분하게 말했다. “들어보시오, 칼. 이 나라의 역사는 300년이 넘었소. 루트에리노 대왕이 드래곤 로드를 몰아내고 나라를 세우고 이미 3세기가 흘렀단 말이오. 고귀했던 이상은 잔재 도 남기지 않고 흩어져버렸고 남은 것은 타성뿐이오. 기사 중의 기사인 국왕은 섬기기보다는 섬김받기를 더욱 원하고 있소. 귀족들은 축적된 명예를 낭비하며 만인의 재산을 한 가문에 귀속시키려 애쓸 따름이오. 칼, 당신은 지금의 국왕이 기사 중의 기사로 백성을 섬긴다고 보시오?”

칼의 얼굴이 순간 흐려졌다. 길시언은 뒤를 돌아보고는 찌푸린 표정을 지었다.

“그렇군! 당신의 얼굴은 당신의 가슴 속에 있는 생각을 거부할 수 없음을 나타내고 있소. 칼! 당신도 느끼고 있는 것이오. 그리고 또 보시오! 300년의 영화가 아쉬워 그 영화를 연장시키기 위해 인간들을 교배시켜 우수한 품종을 만들어내려는 가문이 있소! 모른다 말하진 않을 테지.”

이번엔 우리 모두의 얼굴에 그림자가 스치는 것 같다. 넥슨은 여유 만만하게 말했다.

“너무 길었소. 타성의 모든 악덕이 자리잡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단 말이오! 힘을 가진 자는 그 힘을 계속 누리기 위해 변화를 절대로 인정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 고 그 불변성은 우리 모두에게 불평등만을 강요하고 있소! 알고 있겠지요! 당신은 알고 있을 거요! 저 멀고 먼 서녘, 석양의 빛이 마지막으로 닿는 서쪽의 황야에서 이 곳으로 달려오자마자 국왕을 놀라게 만든 당신은 알고 있을 것이오, 칼! 태양은 천공을 일주하며 바라본 바이서스의 모든 모습을, 일몰의 시간에 서 있는 당신에게 전 달했을 것이오. 당신은 알고 있을 것이오!”

칼의 턱이 꿈틀거렸다. 그는 잔뜩 쉰 목소리로 말했다.

“나에게 뭘 원하시오.”

넥슨은 팬텀 스티드의 안장을 놓고는 두 팔을 좌우로 쫙 벌렸다.

“나와 손잡읍시다. 그 아이의 일은 사과하겠소. 그러나 보시오. 칼은 위험하리만큼 날카로워야 됩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다른 자를 상하게 만들기도 하는 겁니 다. 내가 그 날카로운 칼날이 되겠소. 당신은 손잡이가 되어주십시오! 그리하여 우리가 손잡고, 저 루트에리노 대왕과 핸드레이크의 만남을 여기서 다시 재현하는 겁 니다!”

나는 침을 삼키며 뒤돌아보았다. 칼은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우울한 얼굴로 허공에 떠 있는 넥슨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이 천천히 움직였다.

“닐시언 국왕이 왜 날 화나게 만들었는지 모르시겠지.”

넥슨은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그가 말하려 할 때 칼이 재빨리 말했다.

“닐시언 국왕은 자신이 루트에리노 대왕이 되고 내가 핸드레이크가 되기를 원했지.., 당신처럼.”

넥슨의 얼굴이 굳었다. 그러나 곧 그는 다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치 않은 말이었군. 당신이 화를 낸 것은 당연합니다. 그는 자신의 왕권 강화를 위해 그런 요청을 했으니까. 나와는 전혀 다른…………”

“다르지 않아요.”

“예?”

칼은 크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다르지 않아요. 자신의 욕망을 위해 타인을 속이고, 위협하고, 억누르려 드는 것, 똑같습니다. 왜 자신의 솔직한 모습을 보여서 상대로 하여금 자신을 알게 하려 들 지 않습니까. 왜 자신이 더 위대해 보이고, 더 강해 보이고, 더 위압적인 모습으로 보이기를 원하는 겁니까?”

“예?”

“루트에리노 대왕은 루트에리노 대왕으로 살았고 핸드레이크는 핸드레이크로 살았소. 그러니 닐시언 전하는 닐시언 전하로 살아야 하고 넥슨 당신은 넥슨 당신으로 살아야 하오. 그리고 당신들 중 누구도 나에게 칼 헬턴트가 아닌 다른 자로 살도록 명령할 수는 없소.”

“이, 이보시오. 칼. 내 말은……………”

“천공을 가로지른 태양이 그 본 바를 낱낱이 가르쳐주어 무한한 지식을 갖추게 된 현자라……………. 멋있군요. 나에게 붙일 칭호를 꽤나 연구하신 모양이군요. 하지만 그 건 기만적입니다.”

넥슨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칼은 계속 말했다.

“난 이곳으로 여행하다가 어떤 젊은이를 보았소. 그는 마나에 몸을 맡긴 젊은이였지만, 아쉽게도 아직 그 정진의 세월이 짧았는지 그렇게 능숙하지는 못했소. 그래 서 그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자신을 위대한 대마법사로 보이도록 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지.”

나와 샌슨은 확실히 눈치가 없다. 이 순간에 아프나이델의 얼굴을 보다니. 아프나이델의 얼굴은 붉게 변했지만 칼은 푸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결국 알아차렸소. 그것이 자신의 모습이 아닌 것을. 그리고 그는 자신의 모습에 충실하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났소. 그 젊은이에게 부끄러워서라도 난 그 렇게는 못하겠소.”

아프나이델은 물기 어린 눈으로 칼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우리 둘보다야 확실히 눈치가 있는 칼은 아프나이델을 바라보지는 않았다. 그는 그대로 허공에 있는 넥슨

만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당신의 혁명 이론, 부분적으로 공감가는 곳은 있습니다만, 반대합니다.”

넥슨의 얼굴이 이젠 사나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칼의 목소리는 한점 흐트러짐이 없었다.

“내가 만난 또 다른 젊은이가 한 행동이 그 대답이 될 것이오. 그 젊은이 또한 자신의 왕국을 만들었지. 그는 50명의 고아들을 위해 자신을 위한 여행을 중단하고 그 의 인생을 고아들에게 바쳤소. 그 왕국의 국민들인 그 50명의 고아들은 자라나 사랑을 알게 되고 관용을 알게 되고 자비를 알게 될 것이오.”

샌슨은 눈을 끔뻑거리고 있었다. 저 오거, 틀림없이 눈물을 찔끔거리고 있는 거겠지.

“그러나 당신이 나라를 만든다면, 그 나라의 국민들은 서로가 서로를 희생되어도 좋을 소수로 인식하는 나라가 될 것이오. 그 나라의 국민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거 짓된 상만을 보여주고자 애쓰는 나라가 될 것이오.”

칼은 단호하게 끝맺었다.

“나는 그런 나라에 찬성할 수 없소.”

넥슨은 싸늘하게 칼을 노려보았다.

“잘못 봤군. 당신은 몽상가이며 낭만주의자였군.”

“그럴 것이오.”

칼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넥슨은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그렇다면 나의 복수의 필요성을 충족시키지. 시오네.”

그게 누군데? 그러자 그 뱀파이어 여자가 두 손을 들어올렸다. 저 여자가 시오네인가? 아프나이델이 기겁해서 비명을 질렀다.

“캐스팅한다!”

“파이어…….”

피! 칼이 어느새 한방 날렸다. 시오네는 기겁하면서 캐스팅을 중지하고 허리를 틀었지만 화살은 그녀의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고 칼은 낮게 말했다.

“하늘을 나는 자, 화살 앞에 두려움이 없을 수 있소?”

시오네는 크게 노한 얼굴이 되었다.

“너, 너!”

“매직 미사일!”

아프나이델의 때를 놓치지 않은 캐스팅. 그리고 하얀 빛의 화살 세 개가 떠올랐다. 그것은 각자 하나씩 세 명에게 날아갔다. 그리고 곧 칼은 화살을 마구 튕기기 시작 했다.

펑펑! 쉬유우우욱!

마부를 제외하고 두 명은 모두 매직 미사일에 맞았다. 넥슨과 시오네는 매직 미사일에 맞고는 주춤하면서 물러났지만 놀랍게도 마부는 검을 가슴 앞에 세워 매직 미 사일을 막아내었고 곧 사방으로 검을 휘둘러대었다. 미치겠다! 날아가는 화살이 모두 튕겨버렸다. 아래쪽에서는 엄청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으아아악!”

그러나 세 명은 돌격하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공중에 그냥 떠 있었고, 그러자 우리들이 하늘을 날지 못하는 바에야 저쪽을 어떻게 공격할 수가 없게 되었다. 게다 가 그들은 칼의 화살에 맞지 않기 위해 재빨리 더 높이 솟아올랐다. 칼은 활을 거의 수직으로 들어올려 쏘아올렸다. 그러나 화살은 그렇게 높이까지 올라가지는 못했 다. 그들이 너무 작아져 캄캄한 밤하늘에서 거의 알아보기 힘들어졌을 때 아프나이델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런, 캐스팅을!”

이런, 큰일났다! 칼은 고함을 질렀다.

“모두 안으로!”

“우아아아!”

엑셀핸드의 투박한 비명소리를 뒤로 하며 우리는 부리나케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역시 엑셀핸드는 다리가 짧아 좀 느렸지만 어쨌든 우리는 모두 방 안으로 뛰어 들었다. 그러고는 베란다로 통하는 문 양쪽으로 몰려섰다. 이런, 도대체 어떻게 해야 되지?

“들어와라! 이 자식들아! 그 빌어먹을 말에서 내려 들어와!”

샌슨은 막무가내로 바깥으로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밖에선 시오네의 앙칼진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클라우드킬!”

뭐야? 곧 창문 쪽에서 연두색 구름이 스며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런, 저건 아무리 봐도 향기로울 것 같지는 않은데? 아프나이델이 고함을 질렀다.

“숨쉬지 말아요! 독구름입니다!”

그 사이에도 연두색 구름은 창틀을 타고 넘실넘실 새어들어 왔다. 이런, 구름이라면 어떻게 피해야 돼? 코가 낮은 곳에 있는 엑셀핸드는 엄청난 표정을 지으며 물러 났다. 아프나이델은 빠르게 캐스팅했다.

“거스트 오브 윈드!”

곧 아프나이델의 손에서 무서운 바람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네리아의 머리카락이 마구 흩날리는 것이 보였다. 아프나이델의 손에서 일어난 바람은 매섭게 소용돌이 쳐 창문 쪽으로 불어갔고 창문에서 새어들어오던 연두색 독구름은 바람에 흩날려 뒤로 밀려났다. 안도의 한숨을 쉬기가 무섭게, 아프나이델은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여, 연속으로 너무 많이………….”

아프나이델은 연속으로 너무 많은 마법을 써서 피로해진 모양이다. 휘청거리는 그를 잡기 위해 엑셀핸드가 그의 허벅지를 붙잡으려다가 함께 넘어갈 뻔했다. 간신히 샌슨이 아프나이델을 잡아내었다. 그리고 그 동안 밖에서는 다시 시민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크윽! 사, 사람 살려!”

“수, 숨이……………. 으아아!”

“커어억!”

칼이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구름이 아래로 깔리는 모양이다!”

오우, 이런 얼어죽을! 아프나이델이 밀어낸 독구름이 그대로 아래의 길로 퍼져나가는 모양이다. 이런 망할 경우가 있나? 우리는 어쩔 줄 모르고 우왕좌왕했다. 공중 에 떠 있는 저들을 공격할 수 있는 사람은 칼 하나뿐인데, 베란다로 뛰어나가면 그대로 시오네의 마법을 맞을 것이다. 칼은 입술을 깨문 채로 달려나갈 자세를 취했지 만 길시언이 그의 허리를 붙잡았다.

“나가면 죽습니다!”

“그러면 어, 어떻게 하라고!”

“칼! 당신은 여기 그대로 남아 있으십시오. 나는 밖으로 나가서 저들을 유인하겠습니다! 아프나이델! 마법 남아 있는 것 있습니까?”

“며, 몇 개 정도…….”

“그럼 여기서 칼을 도우시오!”

길시언은 말을 마치자마자 밖으로 뛰쳐나갔다. 나와 샌슨도 그를 뒤따랐다. 여관의 홀로 내려오자 홀 바닥에 머리를 파묻고 덜덜 떨고 있는 하인 하녀들과 그들을 다 독거려 피하게 하려고 정신이 없는 여관 주인 리테들의 모습이 보였다. 우리는 설명해 줄 시간도 없이 그대로 달려나왔다. 길시언이 몸을 내밀었을 때다.

“라이트닝 볼트!”

퍼버벅! 길시언은 옆으로 몸을 날려 간신히 피했다. 하늘에서 내려꽂힌 벼락은 그가 서 있던 자리를 시커멓게 태워버렸다. 땅에는 패인 자국이 커다랗게 나버렸고 흙 과 연기가 흩날렸다. 뒤따라 나가려 했던 나와 샌슨은 건물 안에서 발이 굳어버렸다. 이런 젠장! 길시언은 땅을 구르다가 그대로 일어났고 샌슨은 곧장 창문 쪽으로 달려갔다. 샌슨은 창문으로 위쪽을 살펴보며 욕지거리를 뱉어내었다.

“저 빌어먹을 여자! 저건! 내려오지도 않고!”

밖으로 달려나간 길시언이 퍽 위험하게 보였다. 그러나 길시언은 흔들림 없이 프림 블레이드를 하늘로 뻗은 채 마구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주로 내 안위에 대해 신 경 쓰지 말고 날 공격해 보라는 식의 단순한 고함이었지만 그 시오네라는 뱀파이어도 마법을 무한정으로 쓰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우리는 틈을 봐서 밖으로 뛰쳐나갔 다.

밖으로 나오자 길가 곳곳에 쓰러져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독구름에 당한 것 때문인지 거의 모든 사람들이 피를 토하거나 코나 귀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 었다. 신음을 흘리는 사람 하나 없이 모두 고요했다. 그 말은 모두가 죽었다는 말. 우리는 눈에서 불을 튕기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에선 그 삼인이 당당한 자세로 우릴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기랄! 저 악마!”

“넌 시체의 나라를 만들 셈이냐!”

나와 샌슨은 악에 받쳐서 하늘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그런데 우리의 고함이 무슨 암시가 된 모양이다. 하늘에 떠 있던 시오네에게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것, 좋은 생각이군. ……………애니메이트 데드.”

“뭐야?”

우리는 순간 뒷골이 섬뜩해지는 것을 느꼈다. 나와 샌슨, 길시언은 황급히 몸을 돌렸다. 설마, 설마 아니겠지? 그건 아니겠지?

시체들이 하나둘 일어나고 있었다.

동공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시체는 피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차라리 연민이라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그 연민의 대가가 너무 비싸다. 그러한 연민을 느끼기에 앞서 엄청난 공포와 지독한 적개심을 지불해야 하니까.

꿈틀거리며, 그러나 딱딱한 동작으로 일어난다. 죽은 자, 누워 있어도 무서운 느낌이 들지. 그런데 지금 하나둘 일어나서 비틀거리며 걸어오고 있다.

“두 번을 죽여? 죽은 자를 모욕하지 마라!”

샌슨의 목이 터질 것 같은 고함소리, 그리고 나도 고함을 질렀다.

“말도 안 돼! 나이만큼의 날짜가 지나지 않으면………….”

길시언이 이를 갈면서 설명했다.

“저건 성직자의 디바인 파워가 아니라 마법사의 마나로 움직이는 것이다. 저건 좀비만큼의 지성도 없는 시체, 허수아비일 뿐이다! 제기랄, 그냥 쓰러뜨려! 시끄러! 어쩔 수 없다. 네가 아무리 언데드를 베기 싫다고 해도, 난 저 모습을 더 두고 볼 수 없다.”

난 덜덜 떨면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난 OPG도 없고, OPG의 부재는 내게 힘의 상실뿐만 아니라 용기의 상실까지 가져왔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 제기랄, 난 겨우 그거였나? 내가 부린 배짱은 헬턴트식 배짱이 아니라 OPG의 배짱이었나? 그렇지 않아!

샌슨이 먼저 돌격했다. 그는 고함을 질렀다.

“길시언! 후치를 지키고 위를 감시해 주십시오!”

“이런, 샌슨! 혼자서는 안 됩니다! 후치, 넌 들어가!”

길시언은 그렇게 외치며 날 밀어젖혔다. 난 길시언에게 떠밀려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났다. 내가 밀려났나? 그런데 왜 다행스럽다는 느낌이 들지, 왜 이렇게 치사스러

운거지?

샌슨은 은도금 롱소드를 기운차게 휘저었고 그것에 맞은 좀비들은 검이 아니라 무슨 메이스에 맞은 것처럼 퍽퍽 부서져 나갔다. 쓰러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떨어져 나간 살덩이들은 퍼덕거렸고 선혈이 낭자했다. 토하고 싶다. 그러나 길시언은 그 피를 뒤집어쓰면서 악을 쓰고 있었다.

“시끄러워, 시끄러워! 슬프지 않아. 제기랄! 슬프지 않아! 살려고 하는 짓이야. 시끄러워!”

아니다. 길시언은 눈물을 흘리고 있다. 알지도 못하는 음모 때문에 이 평화로운 밤길을 걸어가다가 갑자기 죽어버린 사람들. 친구를 만나기 위해 걸어가고 있었을 까? 따스한 저녁 식사 테이블을 기대하며 바삐 걸어가고 있었을까? 그러나 뜻없이 죽어버리고, 게다가 죽은 뒤에도 일어나 피눈물을 흘리며 사람들을 공격해야 되는 저 시민들을 베어넘겨야 되는 황야의 왕자. 프림 블레이드가 무슨 소리를 지르는지 대충 알 수 있다.

난 질려버린 채 입술을 덜덜 떨면서 하늘을 보았다.

아래쪽에서는 샌슨과 길시언이 시선을 끌기는커녕 좀비들을 상대로 싸우느라 자신들도 주체 못할 지경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위에서는 아프나이델이 처절하게 고함 을 질러대고 있었다.

“매직 미사일! 슬리프!”

아프나이델은 남은 마법을 다 쏟아내고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아프나이델이 구사하는 마법들은 거의 상대에게 타격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시오네는 코웃음을 치기 까지 했다. 그나마 시오네가 더 마법을 쓰지 못하는 것은 칼이 계속 화살을 날려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화살 때문에 시오네는 정신 집중에 필요한 시간을 얻지 못 했다. 그러나 강력한 전사들이 모조리 밑에 내려왔기 때문에 위에서는 네리아와 엑셀핸드가 넥슨과 마부를 막아내어야 했다. 엑셀핸드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저들을 막는 데 도끼는 전혀 쓸모 있는 도구가 아니었으니까. 오로지 네리아가 기다란 트라이던트로 상대가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간혹 대거를 집 어던지면서 막아내고 있을 따름이었다.

“위험해! 후치 이 자식아!”

뭐지? 퍼억!

위를 쳐다보는 사이에 좀비 하나가 다가왔던 모양이다. 난 턱이 돌아버리는 충격을 느꼈다. 허, 확실히 턱을 맞으면 고통이고 뭐고 없어. 난 그저 화끈하게 정신이 들 었다. 날 쳤어?

“제기랄, 죽어보자!”

“이 자식아, 어서 못 들어가!”

제기랄, 시끄러워! 날 쳤어? 이렇게 느려터진 상대라면 나도 상대할 수 있어. 난 바스타드를 마구 휘저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이지? 바스타드는 전혀 평소의 속도가 나지 않았고 그래서 난 허리의 회전과 팔의 회전 속도가 어긋나면서 그대로 균형을 잃었다. 간신히 쓰러지진 않고 몇 발자국 비틀거렸다.

제기랄, 크게 휘두를 수가 없어! 난 바스타드를 늘어뜨리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허리 높이에 똑바로 세워들었다. 휘두르지는 못한다. 젠장, 젠장! 그럼 어떻게 해야 되 지? 그 사이에도 내 턱을 때린 좀비는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입과 코에서 피를 줄줄 흘리고 있는 아저씨였다. 그 눈이 뒤집힌 것이 천만 다행이다. 만일 저 눈이 날 똑바로 본다면 곧장 기절해 버릴 것이다.

“에에에랏!”

내미는 팔에 맞추어 양팔 사이로 바스타드를 찔렀다. 크극! 바스타드는 겨우 끝부분 조금만 들어갔다. 그리고 곧 요동치는 좀비의 몸부림이 전달되어 하마터면 바스 타드를 놓칠 뻔했다. 좀비는 괴성을 지르며 팔을 휘둘렀고 난 부리나케 뒤로 빠졌다. 그러자 끝부분만 조금 박혔던 바스타드는 허무하게 빠져버렸다. 좀비의 가슴에 선 피가 흘렀지만 저 정도의 상처로 좀비가 쓰러지진 않을 것이다. 제기랄.

위쪽에선 아프나이델의 절망적인 발악소리가 들려왔다.

“이, 이젠 더 이상은! 으흐흑!”

“기운 차려! 아프나이델, 이놈아, 기운 차려!”

“엑셀핸드…………. 미안해요. 난, 난 역시 쓸모없는…..”

“시끄러워!”

엑셀핸드가 고함을 크게 질렀다. 네리아의 비명이 들렸던 것도 같다. 올라가야 되나? 그러나 좀비는 계속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고 계속 물러나 버리느라 어느새 여 관 입구에서 멀리 떨어져버렸다. 이런 낭패다! 그때였다.

“이야아압!”

여관 주인장 리테들이 의자를 들고 뛰쳐나오는 것이 보였다. 저 양반이 돌았나? 리테들은 멀리서 의자를 집어던져 내 앞에 있던 좀비를 맞추었다. 좀비는 콰당 쓰러 져버렸다. 리테들 씨!

“으아아아!”

난 뛰어올라 온몸의 체중을 실으며 좀비의 목에 바스타드를 꽂았다. 목을 날리지 않으면 별 소용도 없겠지. 바스타드는 기분 나쁜 충격을 내게 전달하며 좀비의 목을 관통했다. 난 눈을 딱 감으며 좀비의 머리를 걷어찼다.

“어, 우어어어!”

리테들의 비명소리. 젠장, 저쪽으로 걷어찼나? 난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으려 애쓰면서 여관 정문으로 달려갔다. 발가락이 부러진 거 아닌가? 난 절뚝거리며 달려갔 다. 리테들은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주위를 살펴보았다.

샌슨과 길시언은 두 마리의 미친 오크처럼 싸우고 있었다. 길시언은 방패로도 상대를 때려죽일 정도로 거칠게 움직이고 있었고 샌슨은 거의 한 번에 하나씩 상대의 수족을 끊어내고 있었다. 게다가 샌슨의 롱소드에 맞은 좀비들은 모두 살이 타들어가고 있었다. 피가 지글거리는 모습까지 보였다. 둘이 매섭게 공격해서 대로는 거 의 안정되었다. 그러나 위쪽에서는?

“꺄아아아!”

네리아의 비명소리다! 기겁해서 위를 보니 베란다 끝에 매달린 네리아의 모습과 그녀를 붙잡아 올리기 위해 활을 집어던지는 칼의 모습이 보였다. 칼은 활을 집어던 지고 허리를 숙여 네리아의 팔을 붙잡았고 그러자 네리아는 목이 터져라 욕설을 퍼부어댔다.

“이런 바보 아저씨! 죽으려고! 돌았어요?”

위에서 그 마부가 묵묵히 롱소드를 뽑아들어 달려드는 모습이 보였다. 안 돼! 칼은 잠깐 위를 보다가 다시 아래를 보았다. 그는 네리아의 손을 놓을 수 없었다. 네리 아는 몸부림쳤다. 그때 엑셀핸드의 노한 고함소리가 들렸다.

“카리스 누멘의 이름으로!”

뭔가 엄청난 소리가 들렸다. 베란다 쪽에서 뭔가가 빠르게 돌면서 무수한 빛을 튀겼다. 윙윙윙윙윙! 엑셀핸드가 도끼를 집어던진 것이다. 날아간 도끼는 곧장 팬텀 스티드 위에 있는 그 마부를 향했고 마부는 롱소드로 그것을 막아냈으나 곧 비명을 질렀다.

“으어억!”

롱소드가 부러지며 그 부러진 칼날 조각이 마부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마부는 비틀거리다가 황급히 위로 다시 떠올랐다. 도끼를 던져버린 엑셀핸드가 베란다 끝으로 달려오더니 네리아의 팔을 붙잡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그때 넥슨이 들이닥치고 있었다. 넥슨은 거리낌 없는 태도로 단호하게 날아오고 있었다.

“이런, 안 돼!”

이젠 아무도 막을 사람이 없다. 바스타드를 던질까? 젠장, 저 높이까지 올라갈지도 모르겠다. 난 죽어보자는 심정으로 바스타드를 어깨 위로 당겼다. 안 돼, 이건 미 친 짓이야!

“이루리일!”

아프나이델의 처절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달려들던 넥슨이 갑자기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푸드득푸득! 뭔가가 넥슨의 얼굴에 달라붙었다. 그 박쥐구나. 그 박쥐가 넥슨의 얼굴에 달라붙은 것이다. 그러나 넥슨 저놈은 나의 OPG를 가지고 있다. 놈은 얼굴에 붙은 박쥐를 떼어내더니 그대로 종잇장처럼 구겨버렸다.

“으아아아아!”

아프나이델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패밀리어의 죽음이 그대로 마법사에게 전달된 모양이다. 다행히 그 사이에 칼과 엑셀핸드는 네리아를 끌어올렸다. 칼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내려갑시다! 아프나이델, 아프나이델! 이런!”

“거기 섰거라!”

넥슨의 고함소리가 들렸고 곧 넥슨은 베란다에 뛰어들었다. 여관 안쪽 홀을 보니 위에서 뛰어내려오고 있는 엑셀핸드가 보였다. 그리고 그 뒤로는 아프나이델을 부 축한 채로 내려오고 있는 칼과 네리아의 모습이 보였다. 아프나이델은 거의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하고 있었다.

“후치, 이 멍청한 자식아!”

고함소리. 그리고 뭔가가 내 어깨를 확 잡아당겼다. 샌슨인가? 그리고 내가 서 있던 자리에 불덩어리가 내려꽂혔다. 아무의 방해도 받지 않은 사이에 시오네가 마법 을 사용한 모양이다. 쾅쾅!

나는 한참을 날아갔다. 데구르르. 하늘과 땅이 몇 번씩 자리바꿈을 한다.

온몸이 부서져나가는 것 같다. 털썩! 엎어진 자세로 포석에 쓸려버린 볼을 들어올리자 내 앞에 쓰러져 있는 샌슨의 모습이 보였다.

“새, 샌슨…….”

완전히 쉬어버린 목소리가 나왔다. 샌슨은 참혹한 모습이었다. 그는 아무래도 날 막아준 모양이다. 온통 그슬리고 곳곳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러나 샌슨은 눈을 똑바로 뜨며 일어나 앉으려 했다. 팔이 미끄러지며 그는 다시 호되게 땅에 몸을 부딪혔다. 쾅!

“으으윽…….”

“샌슨, 샌슨!”

일어나지지 않아! 이게 내 팔인가? 이게 내 다리인가? 난 힘겹게 일어나려고 했지만 그것은 마음뿐, 아무리 해도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여관에서 달려나온 네리아 가 비명을 지르며 샌슨을 들어올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날 보더니 다시 비명을 질렀다.

“후, 후치!”

“난 괜찮아요. 샌슨, 샌슨은?”

샌슨은 네리아의 부축을 받아가며 몸을 일으켰다.

“너만큼 괜찮아.”

“그럼 죽을 지경이겠군…….”

난 가까스로 턱을 들어 위를 바라보았다. 곧 엑셀핸드가 내게 달려오더니 그 강한 팔이 날 일으켜 앉혔다. 무지막지한 고통. 난 기절할 듯한 정신을 간신히 지탱하며 내 키의 반밖에 되지 않는 엑셀핸드의 품에 기대어앉았다. 저쪽에는 아프나이델이 칼의 품에 쓰러져 있었다.

넥슨과 시오네, 그리고 그 마부는 땅으로 내려왔다.

시오네가 뭐라고 중얼거리고 나자 팬텀 스티드들은 다 사라졌다. 그리고 세 명은 각자의 검을 뽑아들었다. 마부는 얼굴에 커다란 상처가 나 있었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걸어오고 있었다. 이제 사살인가. 이빨이 맞부딪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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