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5권 – 제10부 : 약속된 휴식 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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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라자 5권 – 제10부 : 약속된 휴식 4화

4

“그래서 솔로처는 말했지요.”

“뭐라고 했어요? 예?”

“아가씨. 난 오늘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것을 만났지. 당신의 사랑은 위험해. 아가씨의 사랑은 너무도 격렬히 타오르기 때문에 주위의 모든 것을, 심지어 내 차가운 가슴까지도 타오르게 만드는군.”

“와아…….”

네리아는 레니의 등 뒤에서 그녀를 안은 채 칼이 들려주는 옛날 이야기에 넋을 잃고 있다. 그리고 네리아에게 안겨 있는 레니 역시 마찬가지였다. 레니는 입을 딱 벌 린 채 칼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런데 저런 이야기가 재미있나? 닭살이 돋아오르는군 그래. 칼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솔로처는 100명의 데스나이트가 기다리는 콜로넬 계곡으로 찾아간 것이오. 천공의 3기사를 위해서도, 오렘의 저스티스 기사단을 위해서도 아니고 오로지 한 시골 처녀의 애인을 구하기 위해.”

네리아와 레니는 숨쉬는 것마저 잊은 채 칼의 이야기에 빨려들어갔다. 난 피식 웃으며 바스타드를 손질하는 작업을 계속했다.

숫돌을 가볍게 움직이며 날을 고른다. 젠장. 넥슨 녀석과 싸울 때 이가 많이 빠졌어. 이게 검날인지 톱날인지 구별도 안 되는군 그래. 난 날을 직선으로 만들기 위해 무진장 애를 썼다.

“그거 용광로에 집어넣고 다시 녹이기 전에는 제 날을 찾기 어려울 거야. 너무 오래된 검이라서 어려워.”

샌슨의 조언이었다. 난 한숨을 쉬고는 바스타드를 다시 꽂아넣었다. 그때 칼이 나에게 말했다.

“여보게, 네드발 군. 그 노래가 어떻게 되지? ‘콜로넬 계곡에 솔로처라는 번개가 치던 날.”

“싫어요.”

“응? 왜 그러나.”

“그 노래는 너무 조야해서 싫어요.”

그러자 네리아는 눈썹을 곤두세웠고 레니는 반대로 눈썹을 축 처지게 만들었다. 그녀들의 저 음험한 눈길이라니. “아, 좋아요, 좋아! 젠장.”

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하지만 이 노래는 정말 조야한데. 씨이.

사우스 그레이드에 석양이 내리고

밤의 여왕의 옷자락이 펼쳐질 때.

콜로넬 계곡 아름다운 수원에도

이슬의 전달자들이 눈꺼풀을 들어올릴 때.

공포, 절망, 어둠의 데스나이트,

그들의 검이 소리높이 피를 부른다.

‘얼어붙은 마음! 핏빛 깃발! 데스나이트의 율법!’

피리새의 가는 숨결도 잦아든다.

올빼미의 밝은 눈도 캄캄해진다.

‘얼어붙은 마음! 핏빛 깃발! 데스나이트의 율법!’

병사들의 전율, 투구끈은 풀려버리고

검집 속의 검이 조각조각으로 부러진다.

공포, 절망, 어둠의 데스나이트,

그 앞에 누구도 똑바로 설 자 없다.

그러나 지켜지지 못한 소중한 약속과

이루어져야만 하는 사랑이

지평선, 그 끝을 넘어 한 사나이를 부른다.

잿빛 황야, 빗발이 지평선을 세로로 쪼개고 마침내 하늘에 거대한 아치가 그려질 때

무지개의 솔로처. 그는 손을 들어올린다.

결국 나는 레니와 네리아의 환호를, 제레인트의 감탄을, 샌슨의 한숨소리를, 그리고 이루릴의 신비한 미소를 받으며 그 긴 노래를 다 부르고야 말았다. 으으. 사우스

그레이드 전체를 그들의 공포만으로 얼어붙게 만들었다가 솔로처의 마법 한 방에 노래 속의 공포로 바뀌어버린 100명의 데스나이트를 위해 묵념. 레니는 모포 속에 들어가서도 콧노래로 ‘솔로처라는 번개가 치던 날’을 웅얼거림으로써 내 볼이 화끈거리게 만들었다.

모포 속에서 뒹굴던 나는 샌슨의 손아귀에 코를 붙잡혀서 깨어나게 되었고, 하품을 하면서 주위를 둘러보자 모두들 곤히 잠들어 있었다.

난 눈을 비비며 모닥불 옆에 주저앉았다. 피곤한걸. 오늘 낮에 말을 너무 많이 탔어. 말들도 선 채로 잠들어 있었고 주위는 고요했다. 샌슨은 모포 속으로 들어가기 전에 말했다.

“잊지 마. 우리를 노리던 고약한 마법사가 있어. 다시 덤벼올지도 모르니까 철저하게 경계해.”

“알았어.”

“다음 차례는 칼이야. 별을 보다가 적당한 시간에 깨워.”

“으음.”

샌슨은 곧장 코를 골아대기 시작했다. 난 나무에 기대어 앉아서는 무릎 위에 바스타드를 올려놓은 채 주위를 매섭게 노려보기 시작했다. 올 테면 와라! 박살을 내어 주지!

하지만 5분도 지나기 전에 곧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주위는 캄캄했고 우석거리는 숲의 잠꼬대 외엔 별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런 싸늘한 밤에 숲 속에 앉아 있는 것은 주의를 산만하게 만들기에 최적이다.

캄캄한 밤하늘을 날카롭게 찢어버리는 별빛들, 휘황찬란하다. 밤하늘이 손에 만져질 듯 낮아보인다. 별이 머리 위까지 내려온 것 같다. 따스한 모포 속이 아니라 차 가운 공기 속에서 더 잠이 잘 오는 이유가 뭘까. 난 무의식적으로 모닥불에 장작을 던져넣으며 공상에 잠겨 들어갔다.

그래서 부스럭 소리가 들렸을 때는 머리가 곤두서는 느낌이 들었다.

이루릴이었다. 이루릴이 갑자기 몸을 일으켜 앉은 것이다. 그녀는 날 보더니 생긋 웃었다. 난 어느새 꽉 쥐었던 바스타드의 손잡이를 놓으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휴우. 이루릴, 왜……?”

“글쎄요. 잠이 오지 않는군요.”

이루릴은 그렇게 말하더니 곧 짐 속에서 책을 꺼내어들고는 윌로위스프를 불러내었다. 그녀는 땅바닥에 앉아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 싸늘한 겨울밤에 숲 속에 앉 아 여유 있게 책을 읽을 수 있는 자가 엘프 이외에 어디 있을까.

난 다시 하늘을 바라보며 공상에 잠기려 했다. 그때 한 생각이 들었다.

“이루릴, 저 방해가 될지 모르겠는데요.”

“하고 싶은 말이 뭔가요?”

“아, 저, 핸드레이크가 살아 있다는 것은 이젠 믿어야겠군요. 드래곤 로드의 말에 비춰봐도 그가 살아 있다는 것이 확실해지는 것 같으니까. 그런데 그에게 배우고 싶다는 클래스 10의 마법은 뭐지요?”

“그 마법 말인가요……………”

그때 칼이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나와 이루릴은 칼을 바라보았고 그러자 칼은 차분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 역시 그게 궁금한데요, 세레니얼 양.”

이루릴은 조용히 책을 덮어놓고는 윌로위스프를 돌려보내었다. 우리 세 명은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았다. 이루릴은 조용히 불길을 응시하다가 갑작스럽게 말했다. “어제도 이런 자리가 있었지요.”

“그렇습니다.”

“그 대화 마지막에 칼은 뭐라고 말하셨나요.”

“예? 어, 그러니까 엘프는 유피넬의 어린 자식이라는 말 아니었습니까?”

이루릴은 웃었다. 하지만 웃음기가 하나도 없는 웃음이다. 이루릴은 무릎을 모아 가슴 앞에 끌어안았다. 추위를 타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그녀의 볼은 모닥불 때문에 발그레하게 물들어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우리는…………….”

이루릴의 꿈결 같은 목소리가 울려퍼지는 순간.

우리는 갑자기 현실에서 단절되어 버렸다.

마치 엘프식의 시간 흐름 속으로 들어와버린 것 같다. 공간은 마구 물결처럼 흐르고 비틀려지고 있었다. 모닥불과, 나와, 칼과, 그리고 이루릴을 제외하고는 모든 공 간들이 사라져버렸다.

이루릴은 그러한 망각의 흐름 속에서 계속 말했다. 아니, 말했나?

“유피넬의 어린 자식………… 어린 자식………… 어린 자식이지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다. 이루릴이 말하는 동안 난 아무런 소리도 빛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이루릴의 목소리만 들렸다. 아니, 이루릴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 러나 나는 듣고 있었다.

“영원히 홀로 설 수 없는………… 영원히 자신을 책임지지 않는………… 영원히 살 수 없는….. 우리는 처음으로 만들어진 자이며………… 처음으로 걸었던 자이며………… 처음으로 사라져야 할 자…….”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다. 그저 듣고 있을 뿐이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는 느낌이다.

“사라진다고요!”

칼의 고함소리. 그리고 갑자기 세계가 원위치로 돌아왔다.

우리는 여전히 약간 싸늘한 11월의 밤 공기 속에 앉아 모닥불을 쬐고 있었다. 주위는 우석거리는 소리가 가득한 숲이었고 우리는 별로 대단할 것이 없는 여행자의 몰골로 모닥불 주위에 앉아 있었다.

털썩. 고개를 돌려보니 샌슨은 모포를 걷어차며 뒤척이고 있었다. 난 피식 웃으며 다시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칼의 얼굴이 왜 창백하게 바뀌어 있지?

그때 칼의 마지막 말이 기억났고, 그러자 이루릴의 말도 기억났다. 잠깐, 사라진다고? 사라지다니, 엘프가 사라진다는 말이야?

이루릴은 한결같이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래서 칼은 마치 별일도 아닌데 당황해서 외치는 노인처럼 보였다.

“사라지다니, 누가 말이오? 숲의 종족들이 사라진다는 말이오?”

이루릴은 싱긋 웃었다. 마치 세월을 적잖이 훔친 노인의 경박스러움을 꾸짖는 것 같았지만 지금 그 노인 역할을 맡은 칼은 정신이 없는 얼굴이었다. 이루릴은 차분하 게 말했다.

“우리는 정원사지요.”

“예?”

이루릴은 다시 고개를 들어 앙상한 나뭇가지를 바라보았다. 나는 문득 이상한 기분을 느끼고는 위를 바라보았다.

맙소사! 나뭇가지에 꽃잎이 피어나고 있었다!

“정원사들이 그들의 정원을 완전히 이해하듯이, 우리는 세상을 완전히 이해하는 종족으로 만들어졌지요.”

태양이 떠오르고, 다시 지기 시작했다. 밤하늘의 별들이 움직였다. 그리고 달이 뜨고, 다시 달이 지고 나자 태양이 떠올랐다.

봄이 오고, 꽃들은 앞다투어 피어난다. 여름이 오자 푸르름이 사방에 가득하다. 가을은 죽어가는 것들의 신비로서 아름답고, 다시 백설이 부드럽게 대지와 나무들의 눈꺼풀에 키스하면 봄의 눈뜸을 기다리며 만물은 잠든다.

“그리고 우리는 한없는 조화를 부여받았지요. 인간이 하늘을 보면 별자리가 만들어지고, 인간이 숲을 걸으면 오솔길이 생겨난다던가요. 우리는 그런 것을 모르지요. 우리 몸에 쏟아지는 별빛을 느낄 때 우리는 별이 됩니다. 숲을 악기 삼아 노래부르려는 바람을 만날 땐 우리는 허공을 날리는 나뭇잎이 될 뿐입니다.”

대지 위로 산이 솟아오른다. 자유로이 떠다니던 구름은 산에 걸리게 되고 마침내 높은 산의 이마를 적시는 빗물이 되어 사라진다. 계곡을 타고 흐르는 물은 대지에 이르러 마침내 강이 된다. 물살의 흐름에 계곡은 더욱 깊어지고, 산은 더욱 늙어간다.

“우리는 세상에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세상을 향해 손을 내밀 수 없는 존재들이지요. 정원사들은 한없이 정원을 이해하며 아름답게 가꾸지만, 그것 을 파헤쳐 곡식을 심어 내일을 대비한다는 것은 전혀 생각하지 못하듯이.”

계곡을 타고 흘러내려 온 격한 물살이 대지를 적실 때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난다. 바람은 거리낌 없이 만물을 질리도록 애무한다. 그러나 꽃들이 피어나던 대지는 어 느덧 황야가 되고 바람은 광폭해져서 흙먼지만을 피워올린다. 그리고 황야 위로 마지막 꽃잎이 떨어지고, 세상은 청초함을 잃는다.

그리고 거친 황야 위로 인간의 쟁기가 떨어진다. 시무니안의 가슴의 온기로 덥혀지던 대지는 식은 흙덩어리가 되어 부서져 나간다.

“유피넬과 헬카네스 양자는 공존을 위해 시간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은 유피넬과 헬카네스의 딸이자 모든 것을 무로 돌리는 광포한 힘을 가진 위대한 존재. 그것이 유피넬과 헬카네스의 실패라고 봅니다.”

“실패라구요?”

“예. 그들은 한 가지를 깨닫지 못했던 것일까? 무 앞에서는 질서도 혼돈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무 앞에서는…………. 아무것도 없다면 어지럽힐 수도, 정리할 수도 없다.

“그들은 공존이 아니라 공멸의 원인을 만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공멸이라고 하셨습니까?”

“네.”

태양의 뜨고 짐에 따라 이루릴의 얼굴에는 빠른 속도로 그림자가 움직였다. 주위는 우리를 내버려둔 채 미친 듯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때 칼이 말했다.

“클래스 10의 마법은 무엇입니까?”

이루릴은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이 되었다.

“인간의 말로는 옮기기 어렵군요. 굳이 말하자면…

이루릴은 적당한 어휘를 찾으려고 애쓰는 모양이다. 그녀는 잠시 후 말했다.

“창조입니다…………. 우주 창조.”

다시 싸늘한 11월의 겨울밤으로 돌아왔다.

발가락의 저림까지도 돌아왔어. 음. 오랫동안 말을 타서 그래. 불쌍한 내 엉덩이 같으니라구. 요즘 들어 의자나 침대에 앉아본 것이 얼마나 되지? 항상 딱딱한 안장 아니면 차가운 바닥이로군.

우주 창조라구?

뭐라 말하고 싶은 기분이 안 드는걸.

“우주 창조라면…….”

칼의 목소리는 희미했다. 이루릴은 혼잣말처럼 말했다.

“그곳엔 은행나무에 보라색 석류가 열리고, 그곳엔 땅이 하늘 위에 있고, 그곳엔 일곱 개의 태양이 있지만 낮은 없고, 그곳엔 강이 상류로 흐르고, 그곳엔 비가 하늘

로 쏟아져 오르겠지요. 단풍잎들 사이로 나비가 날아다니고, 수탉이 곰을 쪼고, 장미 꽃잎 한 장에 백만 개의 이슬이 맺히는 땅, 붉은 바다 위에 푸른 눈이 내리는 곳…….”

칼은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모든 법칙을 새로 만들고 모든 피조물을 새로 만든다는 말입니까? 그곳에는 시간이라는 개념이 없을 수도 있고 시간이 없다면 그곳에는 인과가 없을 수도 있는, 결 과만 있고 원인은 없는, 존재하지도 않는 것들이 존재를 겨루는….”

“항상 그러시지만 이번에도 정확하세요.”

이루릴은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 음. 칼은 정확하지. 난 괜히 웃어버렸다.

“그건 신이라도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까!”

웃다가 혀를 깨물 뻔했다. 칼의 고함소리가 너무 컸다는 것보다는 그 내용 때문에 놀랐다. 신이라도 불가능하다고? 이루릴은 평온하게 말했다.

“마력은 신력을 거부하는 법이지요.”

“그러나, 그래도, 허나……………”

칼 맞나? 난 의심스러운 얼굴로 칼을 바라보았다. 칼이 저런 머저리 같은 화법을 쓰다니. 할 수 없군.

“그걸로 뭘 할 생각인데요?”

“네?”

이루릴은 날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그 클래스 10의 마법을 가지고서 무엇을 하려는 것인가요? 이 세상이 마음에 안 들어서 새로운 세상을 하나 만드시겠다는 건가요?”

이루릴은 가만히 날 바라보았다. 언제나 그렇지만, 그녀와 눈을 마주하고 있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빛을 완전히 흡수해 버리는 새카만 눈동자만 있을 뿐이다. “세상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기보다는 우리들이 세상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 정확할 겁니다.”

웃어야 되나?

“어울리지 않는다, 어울리지 않다니. 세상에 그렇게 심한 농담이 도대체 어디 있지요? 엘프가 어울리지 않는다니오? 모든 것과 조화를 이루는 엘프가?”

난 기막힌 표정으로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이루릴은 슬프게 고개를 숙였다.

“어울리기 위해선 달라야 하지요.”

“예?”

이루릴은 고개를 숙여 자신의 발을 내려다보듯이 한 채로 말했다.

“유피넬은 그것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이제야 알게 되었지만.”

“어, 괜찮다면 나도 이제 알게 해주겠어요?”

이루릴은 고개를 숙인 채 쿡쿡 웃었다.

“당신은 불완전한 존재니까 제 말을 이해하긴 어렵겠지요. 하지만 생각해 보세요. 단단한 흙벽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되나요?”

“예? 어, 자갈과 모래, 지푸라기 등을 적당히 섞어서 반죽을 잘 하면…….”

“예. 그것을 보면 알 수 있을 거예요. 흙만 쌓아서는 단단하지 못하지요. 모래만으로는 쌓을 수조차 없고, 자갈들을 쌓아올리기는 어렵지요. 하지만 그것들을 모두 적절히 섞으면 단단한 흙벽이 되지요. 서로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서로가 달라야 된답니다.”

“조화를 위해서는………… 달라야 한다?”

“그래요.”

이루릴은 갑자기 일어났다. 그녀는 약간 떨어진 나무로 다가갔다. 그녀는 나무의 거친 껍질이 마치 어린 새의 깃털이라도 되는 양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후치, 당신은 칼과 달라요. 그리고 당신은 샌슨과도 다르지요. 그래서 당신은 칼과 샌슨과 조화를 이룰 수 있어요. 하지만 당신은 영원의 숲에서 보았겠지요.” 이루릴은 나무를 올려보며 말했다.

“그때 전 조금도 증오심 같은 것을 느끼지 않았지요. 하지만 여러분들은 맹렬한 증오심을 느꼈어요. 넥슨의 일행들 같은 경우에는 그 증오심 때문에 모두들 죽기까 지 했지요. 슬픈 일이었습니다만, 동시에 여러분들의 특징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당신들은 자신과 똑같은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도록 만들어졌지요.”

이루릴은 갑자기 몸을 빙글 돌렸다.

검고 긴 머리가 한순간 떠올랐다가 내려앉았다. 그녀는 손을 뒤로 돌린 채 나무에 기대어 서더니 말했다.

“우리들을 만들 때 유피넬은 그것을 알지 못했어요. 그래서 유피넬은 우리들로 하여금 모든 것과 하나될 수 있게 만들었지요. 조화롭고도 평화로운 세상을 바라는 선량한 마음으로. 하지만 선량한 마음이라도 무지의 아궁이에서는 좋은 물건을 만들어낼 수 없지요. 우리는 실패작이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이루릴은 마치 재미있다는 듯이 고개를 기울여 웃으며 자신이 실패작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한 손을 앞으로 돌려 뺨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예…………. 그래요. 그래서 유피넬은 저희들의 경우를 통해 알게 되었죠. 조화는 먼저 구별을 전제로 한 것임을. 그래서 그는 절대 스스로 다른 자와 같아질 수 없는 지 성을 만들려고 했지요. 그것이 당신들이에요.”

칼은 입을 벌린 채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거울이 없어도 내 표정을 알 수 있다. 칼의 얼굴을 보면 되니까.

“그러나 그것은 유피넬로 하여금 이율 배반에 빠지게 만들었지요.”

이루릴은 심술궂은 표정을 짓지는 않았다. 그녀의 차분한 목소리는 한결같았다. 하지만 왜 나에겐 그녀가 신의 실수를 꼬집고 있다고 느껴지는 거지?

“그는 조화의 유피넬. 다른 자와 항상 달라지려 하는 지성이라는 것은 그의 전체에 대한 부정. 재미있지요? 그래서 그는 헬카네스와 손을 합쳐 당신들을 만들 수밖에

없었지요. 결과적으로 당신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다른 자들과 같아지기를 거부하는, 그러나 항상 다른 자들에게 자신을 나눠주기를 바라는 지성이 되었어요. 유피넬 과 헬카네스 양자의 관심을 받아서.”

그런가?

멋지게 조화를 이룬다. 이 말은 둘이 같다는 말이 아니다. 멋지게 어울린다. 역시 둘이 동일하다는 의미는 절대로 아니다. 조화라는 말은 두 개가 다르다는 걸 전제한 다. 그렇군. 이제 알겠어.

“이해하겠어요…………. 아마 거짓말이 될 확률이 높지만, 그래도 일단 이해했다고 말해 두지요. 그래서 당신들은 어쩔 생각인가요?”

이루릴은 여전히 나무에 기대어 서 있었다. 호리호리하고 탄탄한 그녀의 몸이 왠지 가냘파 보인다.

“글쎄요. 그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우리들에게 남겨진 길은 두 가지로 좁혀집니다.”

“두………… 가지요?”

“네. 우리는 엘프. 끝없이 조화를 이루는 존재들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모습 자체가 이미 거짓된 조화, 가식적인 조화를 체현하고 있으니만큼 우리들은 지속적인 조 화를 위해 다른 존재들과 달라지려고 애쓰든지, 아니면 우리 스스로 조화로운 엘프라는 위치를 버려야 됩니다. 하지만 양쪽 어느 것도 우리의 길이 되기엔 어렵더군 요.”

칼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래서………, 세계를 버리시려는 작정이시오?”

난 흠칫해서 칼을 보다가 다시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이루릴의 머릿결이 물결치고 있었다.

“버리는 것이 아니에요. 탈출하는 것이지요.”

“핸드레이크에게서 클래스 10의 마법, 우주 창조를 배워서 새로운 세계를 하나 만들겠다는 말인가요? 그리고 이 세계를 버리고 새로운 세계로 떠나겠다는 말인가 요?”

이루릴은 대답 없이 칼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그녀의 모습이 흔들렸다.

난 흘러내리기 시작하는 눈물을 무시하면서 말했다.

“우리를 버릴 건가요?”

이루릴은 조금 슬픈 표정을 지었다. 난 흐느끼면서 말했다.

“그렇군요. 우리를 버리고, 당신들은 이 세계를 버리고 떠날 생각이군요. 당신들의 새로운 세계로 갈 생각이군요.”

“후치…………. 이 세계는 엘프를 원하지 않아요. 우리는 모든 것과 조화를 이루는, 따라서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인 존재에요.”

“그럼 그대로 있어요. 당신들은 아름다워요. 들판에 핀 꽃 한 송이는 세계를 위해 피지 않아요. 왜 당신들이 세계에 대해 책임을 지려고 들지요? 당신들 스스로를 위 해 살아요.”

바람이 분다.

밤의 바람은 검은 머릿결에서 무수한 이슬을 떨어뜨린다. 지금 이루릴의 머리가 꼭 그러하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밤바람이 되어 물결치고 있었다.

“우리는 엘프. 유피넬의 어린 자식입니다.”

이루릴은 아주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 호칭은 얼마나 정확했는지…………. 어린 자식들은 부모의 품에서는 영원히 행복합니다. 부모는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으면서 오직 어린 자식을 기쁘게만 해주려 하지요. 하지만 어린 자식은 그 행복을 알면서도 끝내 부모를 버리게 되지요. 시무니안의 아들들이 시무니안의 품을 떠나 그림 오세니아에게 달려가듯이.”

이루릴은 도저히 더 이상의 말을 꺼낼 수 없는 어조로 말했다.

“우리는 떠나갈 것입니다.”

이루릴이 다시 모포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칼은 허공을 응시한 채로 앉아 있었다. 난 우울한 마음에 바스타드를 뽑아 그 검신을 바라보았다. 싸늘한 검광이 모닥불빛 에 물들어 불길처럼 타올랐다.

바스타드를 다시 꽂아넣으며 난 칼에게 말했다.

“난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엘프들은 왜 떠나가려 하는 걸까요?”

내 질문에 칼은 고개를 다시 숙였다. 그는 잠시 이루릴을 훔쳐보다가 몸을 움직여 내 옆에 앉았다.

“나도 이해하지 못하네. 네드발 군. 하지만 말일세. 이런 점을 생각해 볼 수 있지.”

“들려주세요.”

칼은 턱을 만지작거리다가 말했다.

“우리가 흔히 호인이라 부르는 사람이 있네. 누구와도 싸우지 않고 어떤 일에도 얼굴 붉히는 일이 없는 사람. 누가 뭐라고 말해도 ‘그래, 좋은 말이야.’, 다른 자가 또 다르게 말해도 ‘그래, 그렇군.’ 이렇게 말하는 자가 있지.”

“몇 사람 알아요.”

“그런 작자들이 다른 사람과 싸우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아뇨. 그런 사람들은 절대로 싸우지 않아요.”

“그렇지. 호인이라 불리는 사람은 사실은 자신의 색깔이 없는 사람이네. 그리고 그런 자는 흔히 영웅이 될 수도, 위대한 인물이 될 수도 없는 작자이기가 쉽지. 심하 게 말한다면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인 자가 되기 쉽네.”

“엘프가 그러하다는 말씀이세요?”

칼은 자신의 말에 자신이 웃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너무 조악한 비유라 말하기 창피스러울 정도지만, 그걸 생각해 보면 조금 이해가 될 듯도 하네. 엘프들은 모든 것과 조화를 이루는 자들이지. 하지만 만물은, 아니 세계 자체는 서로 부딪히며 성장하는 거야. 물론 조화를 이루면서 발전하는 경우도 있기야 하겠지만 그런 경우는 드물지. 간단히 말해 볼까. 매일같이 화목하기만 한 두 나라 사이에 무슨 역사가 만들어지겠는가. 그들은 모두 행복하게 살다가 행복하게 죽어가고 그걸로 끝이야. 하지만 서로 피로써 피를 씻는 두 나라, 두 집단 사이 에는 역사가 만들어지는 법이지.”

“전쟁을 찬양하세요?”

칼은 음울한 눈으로 날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이는가?”

“아니죠…………….”

“꼭 전쟁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야. 예가 이상했군.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보게. 스승이 어떤 위대한 연구를 했네. 그 제자들이 모두 그 스승의 업적을 찬양하지. 하지만 그중 어느 특출한 제자 하나가 스승의 연구에 반대해서 새로운 해석을 내어놓는다면, 자넨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그게 제대로 된 해석인지 아닌지 알아봐야겠죠.”

“그래. 그 도발적인 제자는 최소한 우리들에게 새로운 방식, 새로운 해석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점을 일깨워준 셈이지. 그것이 발전 아니겠는가? 모든 제자가 스승 에 찬성해 버리면, 결국 그 연구는 거기서 끝나고 더 이상의 진척은 있을 수 없겠지.”

“이제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엘프에서는 그런 당돌한 제자가 나올 수 없다는 말씀인가요?”

“내가 엘프가 아니라서 잘 모르겠지만, 아마 그렇지 않을까 생각하네. 그 영원의 숲에서 세레니얼 양은 분열된 자신을 보고도 전혀 놀라지 않았네. 세레니얼 양은 통 일성, 동일성에 익숙한 것이 아닐까 하네.”

“일리 있는 추리 같군요.”

나와 칼은 잠시 나란히 앉아서 모닥불을 바라보며 각자의 상념에 잠겼다.

탁, 타닥. 가느다란 가지에 불이 붙어 탁탁거린다. 나는 허리를 숙여 커다란 나무를 뒤집어 불이 잘 붙도록 해놓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려고 했다.

뭐지?

분명히 봤어.

난 다시 편하게 앉았다. 그리고 졸리는 표정을 지으며 칼의 어깨에 기대었다.

“졸리나, 네드발 군?”

“아뇨. 웬 녀석이 우릴 감시하고 있을 땐 졸음이 달아나는군요.”

칼이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난 다시 일어나 앉으며 기지개를 켰다.

나무를 뒤집느라 허리를 숙였을 때 분명히 보았다. 수풀 속에서 모닥불의 빛에 반사되어 번쩍인 나이프의 모습. 녀석이 누군지 모르지만 비반사 처리도 모르는군. 그 마법사인가? 자, 이걸 어쩌면 좋지?

“칼! 활 쏘는 법 좀 가르쳐 줄래요?”

“응? 활 말인가?”

“예. 어디 보자.”

난 일어나서 칼의 짐에서 활과 화살을 하나 뽑아들었다. 그러곤 칼 앞에서 활을 잡아보이면서 말했다.

“자, 어떻게 하면 되지요?”

칼이 눈치를 채야 할 텐데. 칼은 침착하게 말했다.

“그럼 일단 서 보게.”

나와 칼은 천천히 일어났다. 칼은 지시했다.

“먼저 발을 어깨 넓이로 벌리게. 사선, 그러니까 화살이 날아가는 선과 직각 방향으로 서는 거지. 그렇지. 그렇게 서게.” 난 되도록 자연스럽게 보이려 애쓰면서 조금 전 나이프의 빛이 번쩍였던 방향에 직각으로 섰다. 요 녀석, 맛 좀 봐라. “먼저 어깨에 힘을 쭉 빼고 등을 똑바로 펴게. 그렇지. 그리고 그 다음 노킹일세.”

“노킹? 그게 뭔데요? 보여주세요.”

난 칼에게 활을 건네주었다. 자, 칼. 조금 전에 내가 방향을 가르쳐줬죠? 역시 칼은 내가 섰던 방향과 똑같이 섰다. 난 칼의 옆으로 물러나며 슬그머니 땅에 놓았던 바스타드에 발을 가져갔다.

“노킹은 스트링에 노크, 그러니까 화살 뒤의 여기 걸리는 부분을 끼우는 것을 말하네. 여기까지 활이나 몸이 움직여서는 안 되지. 그 다음엔………….”

칼은 순식간에 활을 들어올리며 외쳤다.

“그 다음엔 과녁의 확인, 넌 누구냐!”

그러자 곧장 풀숲에서 뭔가가 움직였다. 그것은 그대로 옆으로 움직여나갔고 칼은 활을 옆으로 틀면서 외쳤다.

“다 건너뛰고 릴리스!”

칼은 수풀 속으로 활을 쏘았다. 푸스석! 화살이 수풀을 뚫고 지나가면서 괴상한 소리가 났지만 맞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난 발로 바스타드를 차올 려 두 손으로 잡았다.

“교습은 다음에 받지요! 모두 기상!”

난 검집을 뽑아 팽개치며 앞으로 달려들었다. 땅! 하필이면 날아간 검집은 샌슨의 머리를 강타했다.

“으윽! 뭐야?”

그리고 샌슨의 잠이 덜 깬 듯한 고함소리, 네리아는 일어나자마자 아무 말 없이 트라이던트를 거머쥐었다. 난 수풀을 후려치며 외쳤다.

“손님이야! 일어나서 친절하게 환영!”

파사삿! 덤불이 베어지며 나뭇잎과 잔가지가 하늘로 솟아올랐다. 그 순간 난 시야 왼쪽에 무엇이 움직이는 느낌을 받았다. 거기 있냐? 그때 칼이 외쳤다. “네드발 군, 움직이지 마!”

쓩쓩쓩! 칼은 내 왼쪽으로 화살을 쏘아붙였다. 우화! 왼쪽으로 뛰었다간 화살꽂이 될 뻔했다.

“크으윽!”

“맞았어!”

난 뒤로 물러났다. 그때 신음소리 같은 캐스팅이 들려왔다. 등골이 쭈뼛해진다. 저놈, 화살에 맞고도 캐스팅을 하는 것인가? 막아야 해! 난 다시 앞으로 달려들려고 했지만 뒤로 물러나던 동작 때문에 몸이 흐트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때 캐스팅이 끝나고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스톤 스킨!”

순간 수풀 속에서 번쩍이는 빛이 뿜어져나왔다. 난 눈을 가리며 주춤주춤 물러났다. 갑자기 세찬 바람이 불어 모닥불에서 불티가 미친 듯이 휘날렸고 그러자 제레인 트가 얼굴을 가리며 물러났다. 네리아가 외쳤다.

“저 녀석! 무슨 마법이야!”

그때 샌슨이 앞으로 뛰어드는 것이 보였다. 그는 수풀을 향해 힘차게 롱소드를 찔러넣었다.

쨍그렁!

“크윽!”

샌슨이 뒤로 물러났다. 그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손목을 떨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샌슨은 신음을 흘렸다.

“뭐야, 이건! 철판도 아니고.”

“피부가 돌이 됐어요! 칼은 소용이 없습니다!”

“예? 칼이 소용이 없다고요?”

그때 수풀 속에서 뭔가가 튀어나왔다.

나와 샌슨은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수풀 속에서 뛰쳐나온 것은 검은 로브를 입고 있는 가냘파 보이는 사람이었다. 머리에 후드를 깊이 눌러쓰고 있어서 얼굴을 볼 수 는 없었다. 그런데 그의 몸 주위로 황금빛의 반투명한 기운이 어려 있었다. 그는 달려나오더니 그대로 모닥불 쪽으로 뛰었다. 난 얼떨떨하게 녀석을 바라보다가 그놈 이 모닥불을 걷어차려고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슨 짓을!

“하아앗!”

난 바스타드를 거칠게 휘둘렀다. 놈은 나에게 신경 쓰지 않고는 모닥불을 걷어차기 위해 다리를 들어올렸다. 피부가 딱딱해져서 칼이 두렵지 않나 보다. 하지만 그건 실수야!

퍼어억!

“쿠와앗!”

검은 남자는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이 자식아. 이건 날붙이로 치는 것이 아니라 힘으로 때린 거다! 샌슨은 탄성을 질러올렸다.

하지만 데굴데굴 굴러간 검은 남자는 별로 충격도 받지않은 듯한 모습으로 일어나 앉았다. 네리아는 혀를 내두르며 트라이던트를 뻗었다.

“움직이지 마!”

트라이던트는 남자의 가슴을 겨냥했다. 그러나 검은 남자는 네리아의 말에 신경도 쓰지 않고 그대로 일어나려 했다. 네리아는 입술을 깨물며 남자의 복부를 찔렀다. 철그렁!

네리아는 트라이던트를 놓칠 뻔했다. 네리아가 찌른 트라이던트는 남자의 황금빛 기운에 부딪혔을 뿐 남자에게는 전혀 타격을 주지 못했다. 아니, 아예 근처에도 가 지 못했다. 네리아는 당황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럼 저 녀석을 상대할 수 있는 것은 나뿐인가? 제기! 전사도 아니야. 그저 단단한 마법으로 보호되는 마법사라구! 너 맛 좀 봐라.

“이야아아아!”

난 재빨리 앞으로 달려들어 상대를 걷어찼다. 검은 마법사는 나의 공격에는 당황한 모양이었다. 콰아앙! 뒤로 우아하게 날아간 마법사는 그대로 아름드리 나무에 몸 을 부딪혔다.

“케에엑!”

그러나 부딪히는 그 순간 마법사는 손을 앞으로 내밀면서 외쳤다.

“매직 미사일!”

이런 젠장! 부아아악! 허공에 떠오른 빛의 화살 다섯 개가 순식간에 나에게로 날아왔다. 어떻게 하지? 난 머리를 가슴에 묻고는 두 팔로 머리를 감싸서 완전한 대응 자세를 갖추었다. 그리고 충돌.

텅텅텅텅텅!

우와, 우와, 머리 울려. 팔과 어깨에 세 발, 그리고 허리와 다리에 한 발씩 맞았다. 다리 다섯 개 달린 말이 날 걷어차는 느낌이 든다. 다리가 꺾이고 말았다. 난 주저

앉으면서 팔을 치웠다.

마법사는 나무 밑동 아래에 처박혀 있었고 난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순간적인 시선의 교환. 그러나 마법사는 후드를 깊이 눌러쓰고 있는데다가 얼굴을 무슨 가면인지 복면인지로 가리고 있어 보이지 않았다. 다만 보이는 것은 시뻘건 눈뿐이다. 모닥불의 불빛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 붉은 것인지 구별이 되지 않 는다.

“센데……?”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말이 입술 사이로 새어나왔다. 말을 하지 않으면 기절해 버릴 것 같았으니까. 그때 왼쪽으로 샌슨이, 그리고 오른쪽으로 이루릴이 다가섰다. 샌 슨은 마법사를 견제하면서 날 일으켰다. 내 겨드랑이를 붙잡아 올리는 샌슨에게 난 감사의 말 대신 신음소리를 좀 들려주었다.

“괜찮아?”

“시원찮아.”

그때 검은 마법사도 스르르 일어났다.

우리 세 명은 각자의 무기를 앞으로 내밀면서 마법사를 겨냥했다. 마법사는 나무를 등진 채 우리들을 쏘아보았다. 뒤쪽에서 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우리들을 공격하는 거요? 당신은 누구시오?”

마법사는 대답이 없었다. 대신 그는 손을 들어올려 가슴 앞에 세우더니 캐스팅을 시작했다. 샌슨이 고함을 지르면서 앞으로 달려들었다.

“캐스팅을! 막아야 해!”

병신! 스톤 스킨인지 뭔지 하는 마법으로 완전히 보호되고 있는데! 생각대로 샌슨이 휘두른 롱소드는 마법사의 주위에도 가지 못하고 그 황금빛의 기운에 막혀버리 고 말았다. 터텅! 샌슨은 손목이 부러지는 표정을 지으며 물러났다. 내가 가야 돼. 하지만 다리가 후들거려 바스타드를 휘두를 수가 없다. 제기랄. 마법사는 캐스팅을 끝내고 외쳤다.

“파워 워드 블라인드!”

번쩍! 마법사의 손에서 눈부신 빛이 번뜩였다. 바로 그 순간.

“프로텍션 프롬 매직!”

이루릴의 고함소리가 거의 동시에 울렸다. 그리고 샌슨은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 눈, 눈이!”

샌슨은 눈을 가리며 뒤로 물러나다가 넘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내 뒤쪽에서도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칼은 두 손으로 눈을 거칠게 문지르고 있었다. “보, 보이지 않아!”

네리아는 땅으로 주저앉으며 주위를 더듬어대었다.

“안보여! 칼 아저씨? 레니! 어디 있어!”

그러나 제레인트는 어느새 디바인 마크를 꺼내어 든 채 레니를 가슴에 안고 있었다. 제레인트는 침착하게 칼과 네리아를 뒤로 잡아당겼다. 난 왜 보이는 거지? 그러 고 보니 이루릴이 어느새 내 어깨를 짚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루릴이 그녀와 날 보호한 모양이다. 그리고 제레인트는 자신의 디바인 파워로 마법사의 마법을 막았고. 순간적으로 생각을 정리한 난 샌슨에게 달려가 그의 손을 붙잡아 당겼다. 급한 마음에 거의 샌슨의 팔을 뽑아놓을 뻔했지만 간신히 마법사의 공격 범위 내에서 빼낼 수 있었다.

“으아앗!”

“나야! 안심해!”

나의 이 거짓말. 난 샌슨에게 안심하라고 말해 놓고는 그대로 그를 뒤로 집어던져 버렸다.

“이 망할 자식아! 쿠엑!”

샌슨은 제레인트가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난 그를 집어던져놓고는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마법사는 이제 한결 여유 있는 모습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젠장. 공격할 수 있는 사람은 이루릴과 나뿐인가? 뒤에는 장님이 된 세 명이 제레인트와 레니의 보호를 받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제레인트는 싸울 능력이 없다. 레니는 말할 나위도 없고.

이루릴은 검을 뽑지 않고 대신 두 손을 앞으로 내밀고 있었다. 검으로는 공격이 되지 않으므로 마법을 쓸 작정인 모양이다. 난 그녀의 앞을 막아서며 마법사를 노려 보았다.

“이놈! 도대체 무슨 짓이야!”

마법사는 대답이 없었다. 남은 우리들을 어떻게 요리할까 고민하는 모양이다. 그때 뒤에서 레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 마법사님은, 우릴 죽일 생각은, 그런 생각은 없는 거예요? 그렇죠?”

마법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레니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하지만 뒤를 돌아볼 여유가 없다. 그때 제레인트가 조금씩 떨리는 목소리였지만 말했다. “레니 양의 말이 맞아요. 이 정도의 마법사라면 우리를 죽이는 것은 훨씬 간단할 텐데. 어, 그러니까 잠들어 있는 우리들 위로, 뭐, 미티어 스웜이라도 쏘아버리면 간 단한 해결 방식이 될 거요. 그, 그런데 아까 낮에도 마법사답지 않게 헤이스트를 사용하여 접근전을 하더니, 에, 지금도 스톤 스킨을 사용하면서 접근전을, 마법사답 지 않게 접근전을 펼치는군. 그리고 파워 워드 킬 같은 마법 대신 실명을 시키고.”

뒤에서는 네리아와 샌슨이 신음을 뱉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칼은 힘없는 목소리로나마 제레인트의 말에 찬성했다.

“침버 씨의 말이 맞군. 당신의 목적은 도대체 뭐요? 우릴 죽일 의도는 없는 거요?”

그렇다면 저 작자는 그렇게 나쁘지 않은 의도를 가지고 접근했다는 말인가? 하지만 살의가 없다 해도 나이프를 휘두르고 눈을 멀게 만드는 것이 호의일 수야 없지. 그때 처음으로 마법사가 대답했다.

“…..식탁에 돌을 던지는 바보는 없지.”

잔뜩 쉰 목소리였다.

식탁 식탁이라구? 엉뚱한 말을 들어서 난 잠시 말을 잃고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그때 다시 뒤에서 칼의 미약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동들은 생명력을 빼앗겼지. 당신이 우리를 죽이지 않는 까닭이 설마…….”

그러자 제레인트가 비명을 질렀다.

“너, 너! 새, 생명력을! 사람이 아닌가? 뱀파이어?”

“꺄아악!”

“레니야! 목, 목 좀 놔! 켁켁!”

마지막 비명은 네리아의 것이었다. 마법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저놈이 힘들여 가면서도 나이프로 찌르려 들고 실명 마법을 사용하고 한 것은 모두 우리들 이 죽지 않은 상태로 무력화되게 하기 위해서인가? 설마 저놈이 목적이…………….

“우리의 생명력을 흡수하겠다는 말이군요.”

이루릴의 침착한 말은 기분을 대단히 이상하게 만들었다. 난 침을 퉤 뱉은 다음 마법사를 노려보았다.

“어디 해볼 테면 해봐!”

난 바스타드를 단단히 고쳐쥐며 말했다.

“그까짓 스톤 스킨! 아까 맞아봤지? 기분이 어땠어? 이번엔 온 힘을 다해 치겠어. 네 녀석의 그 몸이 조각날지 안날지 두고 보자구!”

마법사는 조용히 날 쏘아보았다. 녀석, 캐스팅하는 흔적만 보였단 봐라. 바로 치고 들어간다. 캐스팅하는 순간이면 달아나지도 못하겠지! 그때 후드 아래에서 다시 잔뜩 쉰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안을 하나 하고 싶다.”

제안 제안이라니? 이루릴이 말했다.

“무슨 제안이지요?”

“너희 일행은 모두 일곱 명이군. 그중 두 명만 나에게 넘겨주면 나머지 일행의 안전을 보장하지.”

우리는 잠시 말을 잃은 채 그 검은 사나이를 바라보았다. 저 녀석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그때 제레인트가 말했다.

“어, 만일 내어주지 못하겠다면 어쩔 거요?”

“네가 말한 대로 모두 죽이는 수밖에. 하지만 그건 나로서도 손해야. 난 살아 있는 사람이 필요하니까.”

“이놈! 확실히 사람의 생명력을 노리는 것이구나!”

“그건 네가 알 바가 아니다.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면 모두 죽이겠다.”

남자의 침착한 말에 제레인트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하지만 내 입은 열려버렸다.

“누가? 누구를?”

난 마법사를 향해 악을 쓴 다음 아래를 바라보았다. 발밑에 돌멩이가 만져진다. 난 허리를 굽혀 돌멩이를 든 다음 허공에 몇 번 던졌다가 받았다.

“할 테면, 해봐! 하지만 네 마법과 내 돌멩이 중 어느 것이 더 빠를까?”

“그까짓 돌멩이로 어쩌겠다는 거냐.”

난 대답하지 않고 대신 그 마법사가 등지고 있는 나무를 향해 돌멩이를 던졌다.

콰자자작나무가 조각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돌멩이는 나무에 깊숙이 박혔다. 뒤쪽에서 레니의 헐떡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들어가 버렸어………….”

마법사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쉬어버린 목소리로, 하지만 미미한 울림이 있는 목소리로 말했을 뿐이다.

・OPG인가. 이런 아티팩트를 가진 진짜 모험가를 만나본 것도 정말 오래간만이군.”

헤헷. 진짜 모험가라구? 난 남은 돌멩이 하나를 던졌다 받았다 하면서 마법사를 노려보았다. 성질 같아서는 바스타드로 후려치고 싶지만 함부로 달려들 수가 없다. 만일 나까지 쓰러지면 남는 것은 이루릴과 제레인트, 레니뿐이다. 할 수 없지. 캐스팅만 해봐. 그러면 돌멩이를 던지고 단숨에 뛰어든다.

저놈도 아마 그 생각인 모양이다. 뜻밖에도 스톤 스킨을 무시하면서 공격하는 내가 있기 때문에 함부로 캐스트를 할 수가 없어서 주저하는 모양이다. 제기랄. 하지만 이런 골치 아픈 대치 상태라니. 그때 이루릴이 말했다.

“물러나세요.”

이루릴은 자신이 정중하게 말하면 모든 사람들이 마음을 열고 그 말에 귀를 기울여줄 것이라는 아름다운 착각에 빠진 모양인데. 저 마법사도 이루릴의 말을 받아들 일까? 난 그런 생각을 하다가 돌멩이를 놓칠 뻔했다. 이루릴은 계속해서 말했다.

“저야말로 당신이 물러나지 않으면 죽이는 도리밖에 없습니다.”

이루릴이? 어떻게? 칼은 들어가지도 않는데, 마법으로? 하지만 상대도 마법사이니만큼 만만하지는 않을 텐데. 마법사는 말없이 이루릴을 바라보았고 이루릴은 조용 히 말했다.

“죽이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의 이유 없는 공격이 아니었다면 친구가 되자고 말할 수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그건 이미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 저도 공격하겠 습니다.”

다시 잔뜩 쉰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프….., 느린 종족. 네가 인간 마법사를 마법으로 상대하겠다는 건가.”

“말씀하신대로 전 느리지만, 그래도 120년 이상 마법을 수련해 왔습니다.”

“난 그 두 배 이상 마법을 수련했지.”

순간 이루릴의 얼굴이 창백해져 버렸다. 뭐라구? 120년의 두 배 이상 마법을 수련했다고? 그게 무슨…………, 뭐야!

난 얼빠진 얼굴로 그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저 친구가 돌았나? 아니, 잠깐. 혹시 엘프인가? 아냐. 엘프가 저런 목소리를 낼 까닭이 없다. 아니, 엘프가 엘프를 공격할 리가 없다. 그들은 조화의 자식들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분명 인간이다. 그런데 이게 무슨 소리야?

이루릴은 창백한 얼굴로 더듬더듬 말했다.

“당신은…….”

마법사는 말없이 우리를 바라보았다. 이루릴은 침을 삼키며 다시 말하려 애썼다.

“당신은………….., 설마………….”

설마…………, 설마? 난 머리로부터 냉수 한 동이를 뒤집어쓴 기분이 들었다. 나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 검은 마법사를 바라보았지만 마법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설마? 설마?

그때였다.

“파이어볼!”

먼곳에서 느닷없이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숲 속의 허공을 뚫고 불덩어리가 날아들고 있었다. 부아아아! 불덩어리의 궤도에 있는 나뭇가지들이 마구 꺾이며 불 붙은 채로 흩날렸다. 나무들 사이를 뚫고 날아온 불덩어리는 곧장 그 마법사를 향했다.

“호핑!”

콰아앙! 마법사가 등지고 있던 나무는 불덩어리에 맞아 폭발을 일으켰다. 나무가 통째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법사는 나무에서 조금 떨어진 위치에 다시 나타났다. 누구지? 누가 마법사를 공격한 것이지? 캐스트 소리가 끝나자마자 질주하는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두두두두두! 마법사는 주춤했다. 마법사를 공격한 그 자가 이곳으로 오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한 둘이 아니다. 됐어!

마법사는 불만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방해자가 있군. 지금은 물러나지. 하지만 너희들에게 안식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마법사는 뒤로 물러났다. 캄캄한 수풀 속으로 그가 사라지자 잠시 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바스타드를 내렸다.

“갔군요.”

이루릴도 힘없이 팔을 내렸다. 두두두두두. 말발굽 소리는 계속해서 커졌다. 잠깐, 그런데 지금 다가오고 있는 것은 누구지? 레니가 말했다.

“저, 누가 오는 거지요? 물어볼까요?”

난 어깨를 으쓱이고는 말발굽 소리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이봐! 당신들은 누구인가?”

그러자 대답이 돌아왔다.

“우리가 누군지 알면 깜짝 놀랄걸? 와핫하하!”

그런데 그 대답하는 목소리가 왠지 낯익은 목소리다. 이루릴과 나는 서로를 돌아보았다.

“어라, 저 친구 꼭 엑셀핸드처럼 말하는데요?”

“그렇군요.”

그리고 잠시 후, 우리들 앞쪽으로 달려오는 말들과, 그리고, 음, 황소의 모습이 보였다.

우리는 얼빠진 얼굴로 빙글빙글 웃으면서 길시언과 운차이, 아프나이델, 그리고 엑셀핸드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엑셀핸드는 아프나이델의 등 뒤에 바싹 붙어 있었 다. 아프나이델은 반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오래간만입니다,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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