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회의는 비공식적인 것이었으며 주로 길시언의 요구에 따라 실제적인 필요성으로 모인 것이다. 즉 궁성의 대단히 비밀스러운 장소에서 닐시언 전하와 길시언, 그리고 엑셀핸드와 아프나이델, 그리고 전시 내각 몇 명이 모였다고 한다.
닐시언 국왕은 먼저 충혈된 눈을 한 채 의자에 반쯤 기대어 앉은 그의 형 길시언에게 충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정말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형님. 감사합니다.”
길시언은 피로한 얼굴이지만 씩 웃으며 말했다.
“천만에요, 전하. 필부들의 집안에서도 형제는 서로 돕는 법입니다. 하물며 왕실의 근친들끼리야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비록 야인으로 떠돌고 있지만 저는 언 제라도 전하를 보필하려는 마음가짐을 잃지 않습니다.”
아프나이델은 다시 경악할 뻔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고는 저 매끄러운 말은 틀림없이 프림 블레이드의 작품일 거라고 단정지었다. 닐시언 국왕은 그 사실을 짐작도 못한 채 길시언에 감동의 눈길을 보내었다.
정보부의 국장이 간략하게 사태를 설명했다.
“수도의 여론은 이제 안정적입니다. 헛소문의 유출은 거의 없었고 귀족들의 움직임에도 수상한 점이 없습니다. 사태는 진정국면인 셈입니다. 하지만 말씀드렸다시 피 포로들로부터 입수한 정보가 퍽 적습니다.”
“시오네라는 그 여자를 잡았어야 했는데…………. 아쉽군요.”
말을 꺼낸 것은 내무장관이었다. 그러나 그는 곧 길시언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아, 전하를 비난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 저로서도 아쉽습니다. 그녀의 몸매가 지금도 눈앞에………, 빌어먹을!”
아프나이델은 픽 웃었다. 프림 블레이드의 장난기가 다시 도진 모양이다. 테이블 주위의 각료들 사이로 가벼운 웃음이 번지고 나서 길시언은 말했다.
“이 암살건에 대해 자이펀에 항의할 수는 있겠지만 별로 소득은 없을 겁니다. 그리고 일스 공국에 고발하는 방법도 역시 소용이 없겠지요. 스카일램 트리키의 보고 에 의하면 사절은 임무에 실패했다고 하니까요.”
외무장관은 기분 나쁜 표정으로 턱을 쓸어내렸다.
“그 약삭빠른 일스 대공은 정의가 별로 필요없을 때만 정의를 부르짖습니다. 하지만 정말 정의가 필요할 때는 꽁무니를 빼지요.”
“오렘의 이름이 아깝군요.”
“하지만 우리들이라도 세이크럴라이즈의 위협을 받는 마당에 다른 나라를 도울 수는 없을 겁니다. 그의 입장도 이해해 주어야겠지요.”
“역시 한 나라를 책임지는 자이니만큼.”
“평소의 행실이 문제란 말입니다. 평소엔 정의의 화신인 양 떠들지 않습니까.”
몇 마디 한담이 오고간 다음 정보부 국장이 다시 발표했다.
“시오네라고 알려진 그 뱀파이어 여자는 상당히 위험한 여자입니다. 그녀는 뱀파이어이며 고급한 마법에 익숙해 있습니다. 대륙 곳곳에 발이 넓지만 발자취를 숨기 는 데도 능합니다. 저번 131 전선의 키다린 장군의 암살건도 이 여자의 소행이 아닐까 추측되고 있습니다. 그것도 암살자의 정체를 전혀 알 수 없다는 이유로 그런 추 측을 하는 겁니다.”
다른 각료 하나가 책망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
“행적은 물론 파악이 안 되겠군요.”
그러자 정보부 국장은 인상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파악이 되었다면 당장 붙잡았을 겁니다. 이 여자는 악마입니다. 우리 정보부에서도 이 여자에게 많은 전사들을 잃었습니다.”
길시언은 턱을 쓸어내렸다.
“의외로 유명한 여자인가 보군요? 하긴 운차이도 그렇게 말했지요.”
“그렇습니다. 대단히 유명하지요.”
“그래요…………. 뭐 잡을 수 없다면 지금으로선 정보부의 계속적인 활약을 기대할 뿐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길시언은 닐시언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전하. 어젯밤에 밝혀진 바와 같이 이곳의 궁내부원들은 음탕합니…………, 이이잇! 위험합니다. 궁내부원의 전통적인 심사, 그 엄정함이 크게 의 심받게 되었지요.”
궁내부장 리핏 트왈리전은 붉은 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표정을 지어보였지만 길시언은 냉정하게 말했다.
“그러니 전하께서는 한궁으로 옮기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닐시언 국왕은 씨익 웃었다.
“기사가 성을 비울 수야 없지요. 형님께서는 우제를 시험하지 마십시오.”
그러자 길시언도 웃었다. 국왕은 기사 중의 기사. 그가 전시에 본성을 비운다는 것은 전선의 전사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모른다. 그는 전사들의 마음의 고향인 장 엄의 홀의 호스트로서 이곳에 있어야 한다. 이 성은 루트에리노 대왕의 아들 세류델헨 왕자의 작품이며, 루트에리노 대왕의 혼이 서린 성지인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에게 다른 것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무엇을 원하십니까?”
“전 일스로 갔던 사절인 칼 일행을 만나보고 싶습니다. 뼈에 사무치는 연정이…………, 젠장! 에, 어쨌든 그들을 만나려 합니다. 제게 동료를 선발할 수 있는 권한을 허락 해 주십시오.”
그러자 다른 각료 하나가 말했다.
“그 사절은 임무에 실패하자 그를 그 영화스러운 자리로 끌어올려주신 국왕 전하의 은혜를 잊고 도주했다지 않습니까? 그자를 만나서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길시언은 잠시 말을 꺼낸 자를 싸늘하게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 사절 일행은 지금 자이펀과 바이서스의 전쟁 따위는 상대도 되지 않는 중요한 일 때문에 황야를 방랑중이오. 그들은 바이서스의 도움도, 아니 세상 그 누구의 그 어떤 종족의 도움도 받지 않은 상황에서 그들 자신들의 힘만으로 대륙을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입니다.”
각료들은 잠시 놀란 눈으로 길시언을 바라보았지만 길시언은 팔짱을 낀 채 그 시선들을 모조리 되받아 주었다. 그때 닐시언 국왕이 말했다.
“형님. 저도 트리키 공으로부터 그 칼 일행의 여정과 목적에 대해서는 이미 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낮 그랜드스톰에 들렀을 때 하이 프리스트로부터 언질을 받았지요.”
“그럼 잘 알고 계시겠군요.”
“예. 형님께서는 모험가이고 모험가가 오고 가는 것은 모두 그의 의지에 있을 뿐입니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제 욕심 같아서는 형님께서 계속 이 우제의 옆에 계시면 서 일깨움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만…………. 이미 형님께 커다란 은혜를 입은 참에 다시 그런 송구스러운 말을 드릴 수가 없군요.”
길시언은 말없이 고개를 숙여보임으로써 닐시언 국왕의 말에 대답했다. 그리고 닐시언 국왕은 말했다.
“그런데 모험가가 동료를 고르는 데 있어 국왕의 허락이 필요하지는 않으실 텐데요. 왜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제가 원하는 동료 중의 하나가 현재 왕실 여관 0층에 있기 때문입니다.”
왕실 여관 0층이라는 말에 내각들은 실소했다. 물론 그들도 그 말의 의미는 잘 알고 있다. 궁성의 지하, 그러니까 지하 감옥을 말하는 것이다. 닐시언 국왕도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형님께서는 죄수를 원하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죄수를………… 그 법의 지엄함으로부터 사사로이 방면하는 것은 국왕으로서도 함부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만. 하지만 우제는 형님께서 누구를 거론하 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형님께서는 운차이라는 그 자이펀 간첩의 이야기를 하시는 것이겠지요?”
“그의 공은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예. 그의 고발이 아니었던들 암살자들의 추악한 음모가 사실로 진행될 뻔했지요. 그리고 어젯밤의 그의 활약은 제 눈으로도 직접 확인했습니다.”
“죄 있는 자 공을 이루었으니 죄도 공도 없어지도록 하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형님께선 왜 그자를 원하십니까?”
“전 그자에게 정보의 대가로 자유를 약속했습니다. 그는 국사범이지요.”
그러니까 길시언은 이렇게 말한 셈이다. 왕자 길시언이 그의 신병을 책임질 것이니 간첩 운차이를 풀어달라는 의미이다. 법무장관과 국방장관의 불평 (아무리 공이 있 으되 간첩을 풀어줄 수는 없다는 불평)에 대해 왕자 길시언의 명예를 대가로 바치는 것이다. 닐시언 국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에겐 더 이상 얻어낼 것도 없으며 해될 것도 없습니다. 그는 이미 우리들에게 완전히 협조하기로 했으나 일스에서의 성과가 만족스럽지 못해서 그 신병 처리에 애를 먹고 있던 참입니다. 그가 형님을 도울 수 있는 재목이라면 얼마든지 내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래서 일행은 바로 그 다음날로 빛의 탑에 들러서는 마법사들에게 우리의 위치를 투시하도록 의뢰하여 우리가 영원의 숲 방향에 있다는 것을 알아내었다. 그러곤 영원의 숲으로 향하는 이 세피아파인 고개를 향해 달려온 것이다. 아프나이델은 바이서스 임펠에서 이스트 그레이드를 대각선으로 크게 가로질러 세피아파인 고개를 넘는 그 질주의 대목에 대해서는 간단하게 요약했다.
“죽는 줄 알았습니다.”
아프나이델의 간결하고도 정확한 설명이 끝나자 우리들은 잠시 침묵했다. 칼은 관자놀이를 심하게 문지르다가 말했다.
“시오네, 그 여자가 그렇게 유명한 자입니까?”
“나도 그 여자에 대한 보고서를 읽어보고는 정말 놀랐습니다. 과거가 상당히 화려하더군요. 기밀이라 알려드리지는 못합니다만 지금 칼 씨가 생각하시는 것보다는 훨씬 대단할 겁니다.”
“놀랍군요.”
그러나 길시언은 푸근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이제는 괜찮습니다. 저희들은 여러분들이 레니 양을 납치당하고 곤경에 빠졌을까 봐 도움을 드리기 위해 달려온 것입니다만 여러분들은 이미 레니 양을 구 출하셨군요. 역시 여러분답습니다. 이제 갈색 산맥으로 달리기만 하면 되겠군요.”
그때까지 참으로 대단한 인내심을 발휘하기 위해 턱수염을 잡아뜯고 있던 엑셀핸드가 마침내 더이상 참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잠깐!”
우리는 놀란 눈으로 엑셀핸드를 바라보았고 그러자 엑셀핸드는 자신의 목소리에 놀라버렸다.
“커험, 허흠. 흠. 그러니까, 에, 자네들 정말 대미궁에 들어갔나?”
“예?”
“시치미 떼지 말게! 그 빛의 탑인지 뭔지 하는 장난꾸러기 소굴에서 자네들이 영원의 숲에 있다는 말을 듣고는 내가 얼마나 놀랐는 줄 아나? 가슴이 뛰어 쓰러지는 줄 알았네. 영원의 숲, 오! 대미궁이 잠들어 있는 그곳! 자네들 설마 그곳에 들어가 보지도 않고 영원의 숲을 빠져나온 것은 아니겠지?”
“아…………, 예. 하하. 그곳에 들어갔습니다.”
엑셀핸드의 얼굴은 확 밝아졌지만 아프나이델과 길시언은 크게 놀란 얼굴이 되었다. 아프나이델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 저, 그러니까 드래곤 로드가 잠들어 있다는 그 대미궁 말씀입니까? 그것이 실제로 있다는 말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믿을 수 없군요.”
그러자 네리아가 톡 튀어나오면서 말했다.
“증거를 보여드릴까요?”
우리들이 그녀를 바라보는 가운데 네리아는 안장에서 묵직한 주머니 하나를 꺼내었다. 우리는 그 주머니를 알아보고는 쓴웃음을 지었지만 길시언과 엑셀핸드, 아프 나이델, 운차이 등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잠시 후 그들은 얼굴을 후려갈기는 황금빛에 졸도하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인원이 얼마 없어서 조금밖에 못 가지고 나왔어요.”
“그, 그, 금화! 그 금화는! 제발, 네리아! 그중 하나만 좀 보여주겠나?”
엑셀핸드의 간곡한 말에 네리아는 히죽 웃으며 금화 하나를 꺼내어주었다. 엑셀핸드는 눈빛으로 금화를 녹일 듯이 바라보았다.
“이건 익시노아 크레벤 시대의 금화야! 이걸 마지막으로 본 것이 100년도 더 되었는데!”
엑셀핸드는 당장 300년 전의 열정으로 돌아가서는 우리들을 안내역으로 삼아 대미궁에 돌아가자고 외치려 했다. 할 수 없이 내가 그를 현실로 끌어내렸다. “노커여! 크라드메서는 어쩌고요?”
“……Aaaaak! Kzaht! Choracairam hened ailsh!”
“맞아요, 맞아. 참 좋은 말씀이세요.”
“욕한 거야.”
“참 훌륭한 욕설이셨어요.”
우리 둘 다 앉아 있었기 때문에 엑셀핸드는 별 부담없이 내 뒤통수를 가격할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 드워프들의 위대한 노커 엑셀핸드는 그야말로 눈물을 뚝뚝 흘릴 듯한 얼굴이 되어 동북쪽의 밤하늘을 쏘아보았다. 가만 내버려두면 동북쪽의 하늘을 바라보며 노래라도 한가락 할 태세였다. 그러나 그는 간신히 자신을 억누르고는 말했다.
“우리가 버린 집이야…………. 어쩔 수 없지. 그러나 이 모든 일이 끝난다면! 자네들은 내 안내가 되어주어야 해.”
“뭐 어려울 것은 없지만, 왜 직접 찾아가지 않으세요?”
엑셀핸드는 처연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모든 기억, 모든 비밀 암호가 다 사라졌지. 우린 자네들 인간처럼 열심히 기록하는 종족은 아니거든. 대미궁의 드워프들은 거의 생존자가 남지 않았고 그래서 기억 은 잊혀졌네. 게다가 우린 숲, 그것도 영원의 숲을 쏘다니면서 대미궁을 추적할 재능은 없다네.”
“아, 그러세요?”
엑셀핸드는 신세타령처럼 혼잣말을 계속했다.
“난 대미궁의 공사에 동원되지 않았기 때문에 환란의 시대를 피할 수 있었지. 난 당시에는 젊은 드워프, 아니 어린 드워프였고 대미궁의 공사에는 드워프 최고 기술 자들만이 동원되었거든. 게다가 난 돌의 혼, 그러니까 광부 부족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그 공사에 참여할 기회는 전혀 없었지.”
“자, 잠깐 잠깐. 당시라구요? 그럼 그때 살아 계셨단 말인가요?”
“이놈아! 그러니까 지금 노커를 해먹고 있지 않느냐? 넌 내가 무슨 나이에 노커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게냐?”
“어? 아, 그렇겠군요. 으음.”
그러고 보니 엑셀핸드는 루트에리노 대왕과 같은 시절의 인물인 셈이잖아? 역사가 삽시간에 현실의 내 인생에 끼어드는군 그래.
아프나이델이 말했다.
“그런데 이제 묻겠습니다. 아까 그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여러분들과 대치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일단 공격하기는 했습니다만.” 그러자 길시언과 엑셀핸드도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운차이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음울하게 우리를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칼은 우리들을 습격하던 마법사에 대해 길시언에게 설명했다. 그러자 가만히 듣고 있던 아프나이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군요.”
“예?”
“이런 말씀 우습습니다만, 굳이 습격할 의도가 있다고 볼 때 저 같으면 파이어볼 몇 방으로 간단히 끝내겠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빈사 상태에 빠질 테니 간단히
뒷처리를 할 수 있습니다.”
아프나이델의 말에 제레인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도 그 사실에 대해 물어보았지요. 그자의 목적은 우리의 생명이었습니다.”
“생명이라구요?”
“그렇습니다. 우리 앞에 일을 당한 그 목동들은 생명력이 모두 고갈되어 버렸답니다. 그리고 리츄라는 그 목동의 리더 역시 뱀파이어릭 터치 계통의 마법을 당했다 고 하더군요. 그리고 우리들에게 직접적인 해는 입히지 않으려고 애썼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를 죽여버리면 생명력을 빨아낼 수가 없기 때문이겠지요.”
아프나이델은 입을 딱 벌렸다.
“생명이라구요? 인간이 아니라는 말씀입니까?”
“아니, 인간처럼 보이더군요. 하지만 그 목적이 생명력을 빨아내는 데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확실한 겁니까?”
우리 일행은 당장 맹렬한 토론에 빠져들었다. 아, 사실 맹렬한 토론에 빠져든 것은 우리 일행이 아니라 칼, 아프나이델, 제레인트의 세 명이었고 샌슨과 네리아, 길시 언은 주로 옆에서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일에만 전념했다. 그리고 엑셀핸드와 운차이는 별 관심이 없이 주위를 경계하는 축에 속했다. 그러자 남는 것은 레니와 나, 이루릴이었다. 우리 세 명은 뭘 했냐고? 레니의 경우엔 다시 잠이 들었고 나는 이루릴을 관찰했다.
이루릴은 일행에게서 좀 떨어져서 깊은 고민에 빠진 얼굴이었다. 내가 그녀 옆으로 다가갔는데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난 조용히 말을 꺼내었다.
“아까 그 마법사………, 120년의 두 배 이상 마법을 수련했다고 했지요?”
이루릴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앞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랬지요.”
“그가………… 그라고 생각하세요?”
이루릴의, 깎아 만들어도 저렇게 만들 수 있을까 의심스러운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녀의 얼굴은 정말 유리로 만들어진 조각처럼 보였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요, 후치?”
“어, 그러니까. 음. 그 마법사가…. 그러니까…….”
“모르겠군요.”
이루릴의 말은 여러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나로서도 의혹은 있다. 하지만 당신이 그 말을 입 밖에 냄으로써 내 생각이 어느 한쪽 방향으로 쏠리게 되는 것을 원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어떤 확인의 의미를 띨지도 모르는 말은 꺼내지 말아달라.’ 이런 복잡한 의미의 말을 ‘모르겠군요.’라는 한 마디로 다 말해 버렸다. 그러자 나는 할말이 없어졌다.
난 그녀가 자신의 상념에 빠지고 싶어한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조용히 물러났다.
이것 참. 그 마법사가 정말 그일까?
난 머리를 가로젓고는 운차이에게 다가갔다. 운차이는 웅크린 자세로 나무에 앉아 있었지만 조용히 주위를 경계하는 것은 확실했다. 그리고 엑셀핸드는 여전히 동북 쪽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의 옆에 주저앉았다.
“그럼 길시언이 당신의 보증을 선 건가요?”
음. 이거 정말 무턱대고 말을 해버렸군. 운차이는 슬쩍 고개를 들어 날 바라보더니 다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렇다.”
“언제까지지요? 무슨 약속이 있어요?”
“길시언은 이 일이 끝날 때까지 도와달라고 하더군. 그 다음엔 자유를 약속했다.”
“아, 그래요? 그러니까 크라드메서에게 레니를 데려갈 때까지?”
“그렇게 되겠지.”
“기쁘시겠군요?”
운차이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멀리 바라보았을 뿐이다. 그래서 난 말을 더 못 잇고는 떠들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흐음. 시끌벅적하군. 어쨌든 11 명이나 되는 대인원이니 안전은 이제 확실하다고 봐야 되겠는걸. 어느 몬스터라도 가까이 왔다가는 큰일 나겠군. 그러고 보니 레니도 그것 때문인지 안심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난 대륙의 희망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각자 마력, 신력, 그리고 학력(?)을 대표하여 토론에 들어간 세 명은 결국 결론을 내렸다.
“거의 확실한 것 같습니다. 그자는 리치일 겁니다.”
“리치가 특별히 타인의 생명력을 빨아들인다는 것은 좀 의아스럽습니다.”
“아뇨. 고문(古文)에 희귀하지만 몇 가지 예가 있습니다. 리치의 부작용에서 중대한 것 중에 하나인데, 리치가 자신의 생명력을 동결시킨 용기가 불완전한 경우가 있 습니다. 그경우 보존되어 있던 생명력이 서서히 고갈되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허엇 술병 같은 것이 새는 것처럼 말입니까? 흐음. 마나에 대한 설명으로는 좀 그렇군요.”
“분명히 그런 예가 있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그럴 경우 생명력의 고갈을 막기 위해 마법을 적당히 응용하여 타인의 생명력으로 용기를 다시 채우는 방법이 있다고 하더군요.”
“허어! 참으로 괴악한 짓이 아닐 수 없군요!”
“리치가 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극도로 사악에 물든 행위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그럼요.”
거의 정신을 빼놓은 상태로 세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길시언, 샌슨, 네리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리치. 리치라면 죽지 않는다. 아까 그 마법사는 분명히 그렇게 말 했다. 자신은 120년의 두 배 이상 마력을 연구했다고. 그렇다면 그가, 그가 그일까?
과연 정말 그가 그일까? 나는 다시 한번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이루릴은 여전히 주위의 모든 사물과 격리된 듯한 모습으로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습을 받은 장소에 계속 야영을 하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밤중이지만 다시 걸어가기로 했다. 좀더 으슥한 위치나, 그렇지 않으면 아예 밤중에 고 개를 넘어버릴 생각이다.
이루릴이 윌로위스프를 불러내어 앞길을 밝히게 한 다음 앞쪽에서는 샌슨과 제레인트가 탄 슈팅스타, 그리고 길시언이 탄 선더라이더가 선도했다. 그리고 그 뒤로 네리아와 레니, 엑셀핸드와 아프나이델이 따랐으며 운차이와 이루릴이 양 옆에 벌려섰다. 뒤쪽으로는 칼과 내가 따랐다.
뒤쪽에 칼과 나란히 선 김에 나는 칼에게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뭘 말인가, 네드발 군?”
“리치, 그 리치 말이에요.”
“그 리치가 왜?”
“리치란, 불사마법사잖아요.”
“그렇지.”
“그렇다면, 어쩌면 300살쯤 먹었을지도 모르지요?”
칼은 잠시 말을 멈추고는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그는 앞에서 걸어가는 이루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칼은 나지막하게 말했다.
“자네………….”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되는데요.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 있잖아요.”
칼은 턱을 쓸었다.
“리치라는 것이 희귀하긴 하지…………. 그러니 그럴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그가 그런 선택을 했을 것이라고는…………. 그가 살아간 방식은 그런 것이 아니 었네. 흠. 아냐, 아니지. 사람이란 알 수가 없는 동물이지.”
칼과 나는 동시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정말 그일까? 그 리치가 정말로?
그때 네리아가 말을 조금 천천히 걸리더니 우리 위치까지 처졌다. 그녀의 등 뒤에 있는 레니는 졸음을 참지 못하고 말 위에서 잠들어 있어 불안해 보였다. 네리아는 칼에게 질문했다.
“저, 아까는 너무 어려운 말씀들을 나누셔서들 질려서 질문을 못했는데요. 리치가 도대체 뭐지요? 전 그게 무시무시하다는 것 외에는 잘 알지 못하거든요.”
“아, 리치란 대단히 높은 수준의 마법사 중에 불사의 길을 선택한 일부의 마법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불사? 죽지 않아요?”
“그런 셈이라고 봐야겠지요. 대마법사라 불릴 만한 마법사가 자신의 모든 마력을 집중하여 만든 특수 용기에 자신의 생명력을 모두 주입시키면 리치가 됩니다. 혹자 는 마법사의 언데드를 리치에 포함시키기도 합니다만 지금 우리가 말하는 리치는 내가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어, 어, 그러니까 은행에 재산 넣어두는 것처럼요?”
“그렇지요. 그리고 은행에 넣어두었을 경우와 마찬가지로 생명력은 안전하게 보관되는 셈입니다. 따라서 그 몸에는 생명력이 남지 않기 때문에 그 몸을 아무리 공격 해도 다시 부활해 버립니다. 그 용기를 파괴하지 않는 이상 절대로 죽지 않습니다.”
“우우우와! 좋은 거네요?”
그 말에 나와 칼이 동시에 쓴 미소를 지었다. 네리아는 미간에 세로 주름을 만들더니 말했다.
“두 사람 다 표정이 이상해. 음. 좋은 거 아니에요?”
“네리아 양. 영생을 원합니까?”
“음. 뭐, 죽는 게 좋은 사람은 없잖아요.”
“그렇긴 합니다. 예. 그들도 죽음의 공포 때문에 그런 길을 선택한 것이겠지요. 하지만 그런 생에 어떤 즐거움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예? 어떤 즐거움이라니오?”
“루트에리노 대왕이 한 말이 있지요.”
“뭐라고 했는데요?”
“그가 말하길….”
칼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갑자기 이루릴이 낮게 외쳤기 때문이다.
“모두들 주의하세요!”
그리고 그와 동시에 조금 앞쪽에 있던 제레인트도 허둥지둥 말했다.
“어, 심상치 않습니다. 이건, 이 기운은……………”
모두들 잔뜩 긴장하면서 멈춰 섰다. 뭣 때문이지? 제레인트와 이루릴은 아까와는 달리 충분히 경계하고 있었기 때문에 뭔가를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뭘 느
낀 것일까?
운차이는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더니 곧 혀를 찼다.
“빌어먹을 지형이군!”
난 허둥지둥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우리들이 서 있는 장소는 두 개의 절벽 사이로 난 소로였다. 이런 젠장. 좌우가 막힌 셈이잖아? 앞이나 뒤로밖에 움직 이지 못해. 앞쪽에서 샌슨이 빠르게 말했다.
“후치. 뒤를 주의해라. 일단 여기서 빠져나가도록 하지.”
“빠져나간다고?”
이것은 내 대답이 아니다. 갑자기 허공에서 들려온 누군가의 쉰 목소리였다.
“이힝힝힝!”
말들이 놀라서 뒤로 물러나려고 버둥거렸다. 위를 올려다보자 새카만 밤하늘에 뭔가가 떠 있었다. 그것은 양쪽의 절벽 사이로 보이는 검은 하늘에 떠 있었는데 별들 이 가려지는 모습을 보고서야 거기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네리아가 비명을 질렀다.
“그 리치다앗!”
모두들 당황하며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상대는 공중에 떠 있고 우리들이 있는 곳은 완전히 노출된 지형이니 어떻게 숨을 도리가 없다.
리치라는 소리를 듣자 그자는 완전히 쉬어버린 목소리로 말했다.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 새 나에 대해 몇 가지를 짐작해 낸 모양이군.”
“어, 어쩔 셈인가?”
칼의 말이었다. 그런데 공중에 떠 있는 상대가 대답하기도 전에 다른 목소리가 말했다.
“이 목소리를 알아. 하지만 지금 듣고 있다는 사실은 믿어지지 않는데.”
길시언의 목소리였다. 그러자 하늘에 있는 검은 마법사도 놀란 기색이었다.
그는 천천히 땅으로 내려오기 시작했고 우리는 더 물러났다. 하지만 길시언과 선더라이더는 전혀 물러나지 않았다. 그자는 우리 앞 30큐빗 정도의 높이까지 내려오 더니 길시언을 바라보았다. 아래로 내려오자 윌로위스프의 빛이 닿았기 때문에 그 모습을 확실히 볼 수 있었다. 역시 우리들을 공격했던 그 검은 로브의 마법사였는 데 지금은 어깨에 무언가 커다란 자루 같은 것을 걸머지고 있었다. 그 마법사는 길시언을 향해 탁한 목소리로 외쳤다.
“너, 넌…… 길시언!”
어라? 둘이 아는 사이인가? 길시언은 프림 블레이드를 높이 들었고 그러자 프림 블레이드는 마구 울어젖히기 시작했다. 웅웅웅웅!
“어쩐지, 선더라이더의 저주가 풀리지 않았지. 제기랄. 네놈이 살아 있었군! 리치몬드!”
리치몬드라구?
길시언은 프림 블레이드로 리치몬드를 겨냥하면서 외쳤다.
“하지만 넌 분명히 죽지 않았나! 스네어트레일의 네 간악한 탑 꼭대기에서 널 집어던졌어. 그때 절벽으로 떨어져 몸이 산산 조각나며 굴러내려가는 네 모습을 똑똑 히 보았다. 그건 착각이 아니야.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
리치몬드라는 그 마법사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탁한 목소리에다 나지막하게 말하니 알아듣기가 정말 힘들었다.
“정말 고통스러웠지. 난 죽음을 초월한 존재지만, 거기에도 단점이 있지. 그 끔찍한 고통, 몸이 산산 조각나는 고통을 산 채로 맛보며 신음해야 했지. 네놈 때문에!” “죽지도…………… 못해? ……………너!”
옆에서 제레인트가 입술을 물어뜯으며 말했다.
“당신, 역시 리치인가!”
리치몬드는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공중에 떠 있었다. 길시언은 이를 악물면서 말했다.
“제기랄! 네녀석이 리치였구나! 난 네놈이 죽은 줄 알고는, 그래서 물러났는데. 빌어먹을! 어쩐지 선더라이더의 저주가 풀리지 않은 까닭이 있었군. 저주의 시전 자, 저주의 주체인 네녀석이 죽지 않았기 때문에!”
리치몬드는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크흐흐흐…………, 크핫하하하!”
“뭐가 좋아서 웃는 거냐?”
리치몬드는 통쾌하게 웃더니 다시 음울한 목소리로, 하지만 이를 북북 갈면서 말했다.
“복수의 때가 원하지도 않았을 때 찾아오는군. 내게 화렌차의 가호라도 있었나? 도대체 네녀석이 어떻게 여기 온 것이지? 믿을 수가 없군, 길시언! 하지만 잘됐어. 네녀석 때문에 난 다른 놈의 생명력이나 빨아들이는 신세가 되었지!”
“무슨 말이냐!”
“그 빌어먹을 마법검!”
리치몬드는 날카롭게 외치며 손을 뻗어 프림 블레이드를 가리켰다. 그리고 프림 블레이드는 거세게 울기 시작했다. 웅웅웅웅웅!
“그 빌어먹을 마법검! 그건 도대체 뭐로 만들어진 거지? 그 마법검 때문에 내 용기에 커다란 타격이 있었지. 생명력이 새어나가고 있어! 그래서 매일같이 사람을 죽 이는 귀찮은 일을 해야 돼.”
“역시…………, 그랬군. 부작용이 아니라, 프림 블레이드 때문에·
아프나이델이 떨면서 혼잣말 비슷하게 말했다. 그러나 리치몬드는 그 말을 듣지 못했는지 계속해서 말했다.
“정말 안됐군. 너희들 말이다. 그 지저분한 생명이나마 사용할까 생각했기에 상처 없이 붙잡으려고 애썼지. 하지만 저 길시언 녀석이 있는 한 그 계획은 수정해야 되 겠군. 모두들, 모두들 가장 끔찍스러운 죽음을 맛보게 해주지!”
길시언이 무서운 눈으로 말했다.
“난 이미 너를 한 번 죽였다. 그것도 나 혼자서! 이번에는 나보다 우수한 동료들도 함께 있지. 다시는 부활하지 못할 죽음으로 널 인도해 주마! 화렌차의 가호라구? 천만에! 아샤스의 가호가 나에게 있음이다. 이번에야말로 널 확실히 죽이고 선더라이더의 저주를 풀겠다!”
“크그그. 언제나 그렇듯이 자신감이 넘치는 모양이군, 왕자여.”
그때 이루릴이 앞으로 나섰다.
이루릴은 허공에 떠 있는 리치몬드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두 손을 옆으로 벌리며 힘들게 말을 꺼내었다.
“리치몬드 씨. 당신의 이름은 그것뿐입니까?”
다시 냉수 한 양동이. 떨리는군. 일행들 중 몇 명은 이루릴의 질문에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난 잘 삼켜지지도 않는 침을 힘겹게 삼키며 리치몬드를 바라보았 다. 후드에 뒤덮여 있는 리치몬드의 얼굴은 알아볼 수가 없다. 그러나 목소리는 들려왔다.
“이름?”
“네. 당신은 처음부터 리치몬드였습니까?”
“난 많은 세월을 살아왔고 그래서 많은 이름을 가졌지.”
이루릴은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표정을 지었다.
“설마…….”
설마, 설마 그 이름 중의 하나가 아주 유명한 어떤 이름이라는 말인가?
“설마, 당신이…….”
일행들은 모두 당황하여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루릴은 말을 맺지 못했다. 그녀는 갑자기 리치몬드에게서 고개를 돌리더니 하늘의 한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리치몬드는 말했다.
“엘프, 역시 귀가 좋군. 알아차린 모양이군.”
“왜 그러십니까, 세레니얼 양?”
칼이 물었을 때 이루릴은 창백한 얼굴이 되었다. 그녀는 갑자기 리치몬드를 바라보았다.
“이 소리는……………, 설마?”
리치몬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갑자기 어깨에 메고 있던 그 커다란 꾸러미 같은 것을 들어내렸다.
모두들 질겁해서 물러나는 가운데 리치몬드는 그것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으악! 폭발하는 건가? 아니면 불덩어리가 일어난다든가 지진, 화산, 혹은 태풍이..
그런 것은 일어나지 않았다. 리치몬드가 던진 것은 그냥 툭 떨어져 땅에 뒹굴 뿐이었다. 우리는 의아한 얼굴로 땅에 떨어진 그것을 바라보다가 다시 리치몬드를 쳐다 보았다. 리치몬드는 말했다.
“크핫하하하! 죽음이 무엇인지 경험해 보라!”
그리고 리치몬드는 위로 솟아오르더니 그대로 밤하늘 어딘가로 날아가 버렸다. 저게 뭐야? 우리는 서로를 의아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다가 리치몬드가 던지고 간 물 건으로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샌슨과 길시언이 먼저 말에서 내려서는 검을 뽑아든 채 그 물건으로 접근했다. 마법사가 주고 간 물건에 섣불리 접근하는 것은 바보짓일 것이다. 우리는 최대한 주의 깊게 접근했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감에 따라 이상한 냄새가 났다. 이게 무슨………… 피냄새?
우리는 리치몬드가 던지고 간 물건 주위에 모여섰다. 윌로위스프의 창백한 빛 아래에 드러난 것은 큼직한 도마뱀의 시체처럼 보이는 것으로서 원래는 푸른색의 몸이 었을 듯하지만 지금은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면 날개가 달려 있는데다가 이마엔 뿔도 돋아나 있었다. 우리는 정신이 나간 표정으로 그것 을 바라보았다.
칼이 신음을 흘렸다.
“맙소사……! 웜링이다.”
그러자 제레인트는 곧 입을 감싸쥐었다. 아마 혀를 깨문 모양이다. 그는 입을 틀어막은 채 숨가쁜 목소리로 말했다.
“으거, 어, 워리이라며, 그러다며?”
곧 우리 모두는 기가 막힌 얼굴로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엑셀핸드가 덜덜 떨면서 물었다.
“이, 이거 봐. 무슨 소리를, 무슨 소리를 들은 거야?”
이루릴은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 그 거대한 소리는 우리들의 귀에도 들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거대한 날갯짓 소리였다.
웜링은 드래곤의 어린 새끼. 드래곤은 자신의 보물을 훔쳐간 자와 자신의 새끼를 공격한 자에 대해서는 무자비한 복수를, 목숨을 건 복수를 한다. 혹 선한 드래곤이 라면 자신의 보물을 영웅이나 현자들에게 선물하기도 한다고 들었다. 우리는 영웅이나 현자는 아니지만 어쨌든 드래곤 로드에게 보물을 선물받았지. 하지만 아무리 선한 드래곤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새끼를 공격한 자는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다. 가장 확실한 자살의 방법이 있다면 드래곤의 새끼를 건드리는 것이라던가.
그런데 우리 앞에는 그 웜링이 피투성이가 된 채로 떨어져 있었고 하늘 저편에서는 날갯짓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다. 멋진 밤이로군. 최고야!
모든 사람의 입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고함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제, 제기랄, 이걸 먹어! 아, 아니 치워!”
“먹어치우라구요?”
“으아아아! 없애버려요! 아, 아니 달아나!”
“날아오는 것으로부터 도망갈 순 없어! 어, 어서 저 웜링 시체를 없애!”
“어, 어떻게 없애죠? 땅을 파나? 태울까요?”
우리 일행은 혼란에 빠져버려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모두들 무턱대고 고함이나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고 말들 역시 무턱대고 푸르릉거렸다. 드래곤이, 드래곤이 날 아오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새끼의 죽음 때문에 아마도 눈이 뒤집혀 있을 것이 확실한 드래곤이! 우와, 이거 미치겠네! 그때였다.
“카아아아아아!”
무서운 포효 소리. 귀가 찢어져나가는 것 같다. 레니는 땅에 무릎을 꿇고는 귀를 틀어막았다. 서 있는 사람들도 모두 귀를 틀어막았다. 젠장! 다리가 떨려! 도망가야 되는데, 도망가야 되는데? 어디로 도망가지? 하늘에서 광포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말들은 비명을 지르며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이힝힝힝! 하늘에서 내려오 고 있으니, 하플링처럼 땅을 파고 숨는 것이 아니라면 숨을 도리가 없잖아?
“카아아아아아!”
우리가 당사자가 아니라면 폐부를 찢을 정도로 가슴 아픈 소리라고 느낄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드래곤은 목놓아 울부짖고 있었다. 다만 우리 스스로가 그 분노와 울분의 대상자가 되어 있었기에 동정의 마음이 생기지는 않았다.
이윽고 하늘의 별이 다 사라져버렸다.
드래곤의 거대한 몸이 절벽 사이의 하늘을 모조리 가려버린 것이다. 그때문에 별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가 머리고 어디가 꼬리일까? 이 황당한 상황에서 난 그것을 궁금하게 여겼다.
“카아아아아!”
이번에는 정말 포효 소리에 날아가버릴 뻔했다. 그때였다. 난 드래곤의 머리가 어느쪽에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타오르는 선홍색의 눈, 그리고 입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밝은 빛 때문에 그림자로 보이는 검은 이빨들이 보인 것이다. 그것은 마치 새카만 밤하늘이 입을 벌리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입 안이 왜 밝은 거지? 입 안에 불이라도 피워놓고 있나? 잠시 후 나는 그것이 마구 불타오르는 번개의 덩어리라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탓탓탓탓탓! “벼, 벼락의 브레스! 블루 드래곤이다!”
그때 칼이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블루 드래곤의 입 안에서 튕겨지는 번개는 점점 더 강렬해졌다. 바아바아아 바아아아 바아아아아앗. 이윽고 블루 드래곤 은 우리들을 향해 번개의 폭포를 쏟아놓을 준비를 갖추었다. 그때였다.
“우리를 공격하면 이놈을 당장 죽이겠소오오!”
칼? 오, 맙소사!
칼은 웜링의 시체를 안아들고는 그 목에 나이프를 들이대고 있었다. 나이프로 찌르든 말든 이미 죽은 웜링이 또 죽을 리가 있나!
하지만 블루 드래곤은 웜링이 죽었다는 사실을 모른다.
“쾌애애애애!”
블루 드래곤은 브레스를 뿜기 직전 급격하게 목을 틀었다. 콰자자자작! 눈알이 타버리는 느낌이다. 블루 드래곤이 토해 놓은 벼락의 강은 암흑의 밤하늘을 발기발기 찢으며 우리 머리 위를 지나쳤다. 모두들 되지도 않는 비명을 지르며 땅에 몸을 던졌다. 땅이 내 몸을 호되게 후려친다. 그러나 우리 일행들이 제각기 질러댄 비명소 리는 벼락의 굉음 때문에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벼락의 폭포는 아슬아슬하게 우리들의 위를 지나쳐서 옆의 절벽에 명중했다.
“캬아아악! 벼락이다!”
네리아는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그리고 절벽이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쿠…… 쿠…… 쿠………… 쿠웅!
쏴르르르. 자갈 굴러내리는 소리가 요란하다. 그리고 쨍! 쨍! 하는 바위 깨지는 소리도 자욱한 흙먼지가 일어난다. 난 땅에 엎드린 채 눈을 꼭 감고 그 모든 소리가 사라지기만을 기다렸다.
잠시 후 흙먼지가 가라앉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난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맙소사!
벼랑의 모양이 바뀌어 있었다. 조금 전만 해도 수직에 가깝던 벼랑이 거대하게 무너져 경사를 이루고 있었다. 무너진 벼랑에서 쏟아져내린 바위덩어리와 흙무더기는 우리 등 뒤의 길을 완전히 막아버렸다.
고개를 다시 앞으로 돌린 순간 난 눈을 감고 말았다.
짐작했어, 짐작했다구! 뭘 보게 될 건지는 분명히 짐작했어. 하지만 정말 저런 모습이라니! 난 속으로 제미니의 이름을 다섯 번 정도 부른 다음, ‘이 시점에서 제미니 를 부르다니 난 완전히 코가 꿰인 녀석이구나.’, 어쩌고 하는 말을 역시 한 다섯 번 정도 웅얼거리고 나서 다시 눈을 떴다.
눈앞에는 꼿꼿하게 서 있는 칼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앞에는 거대한 푸른 발이 보였다. 발을 따라 시선을 올리니 곧 실팍한 다리와 가슴, 고개를 더 들어올렸 으나 목의 아랫부분만이 간신히 눈에 들어왔을 뿐이다. 그 위로 목이 더 이어지고 거대한 머리가 달려 있을 것은 확실하지만 아무리 고개를 뒤로 꺾어도 그 윗모습은 볼 수가 없었다. 이 자리에서 천 큐빗 정도 떨어지지 않는다면 저 거대한 몸 전체를 본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았다.
그러나 난 그 위에서 암흑을 배경으로 번득이는 붉은 눈은 볼 수 있었다. 두번 다시 바라볼 엄두는 나지 않았지만.
블루 드래곤의 발 크기와 비슷한 칼은 안간힘을 다해 기절하지 않고 서 있었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 드래곤이 고개를 좀 숙이기만 한다면 그 웜링이 이미 시체인 것
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사실을 들킨다면…………. 말도 하기 싫다. 칼은 뼛조각 하나도 남지 않게 되겠지만 그건 나도 마찬가지겠지.
칼은 말했다.
“……!”
하나도 안 들린다. 칼은 잠시 숨을 고르고는 간신히 들릴 만한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뒤, 뒤로 물러나시오!”
“크르르르…….”
오, 맙소사. 기절해 버릴 것 같아. 이건 드래곤 로드와 만났을 때와는 전혀 다르다. 드래곤 로드의 위압감은 너무 강렬해서 오히려 현실감이 없었다. 완전히 포기하게 되는, 그래서 오히려 안심이 되는 위압감이랄까? 하지만 눈앞의 블루 드래곤은 그야말로 박진감 넘치는 위압감을 선사하고 있었고 그래서 까무러치지 않는 내 정신이 불만스러울 지경이다. 젠장.
블루드래곤은 천천히 발을 들어올렸다. 으악! 칼, 이제 한 때는 칼이라 불렸던 시체가 되시겠군요. 아니, 나도 곧 한 때는 후치라고 불렸던 뼛조각과 고깃덩어리로 바뀔 테니………….
블루 드래곤은 뒤로 물러났다.
간신히 일어설 수 있었다. 그래서 자존심의 미약한 끄트러기나마 잡을 수 있었다. 주위를 돌아보니 모두들 죽다가 살아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네리아는 벼락에 놀라 서 웅크린 채 펑펑 울고 있었고 레니는 네리아의 등 위에 엎드린 채 그녀를 달래고 있었다. 네리아는 번개를 무서워했지.
“네리아 언니, 괜찮아요. 끝났어요. 이젠 괜찮아요.”
글쎄. 과연 정말 이제 괜찮을 걸까?
난 후들거리는 팔에서 바스타드를 떨어뜨리지 않으려 애쓰면서 칼에게 다가갔다. 겨우 대여섯 걸음밖에 되지 않는 거리가 헬턴트에서 델하파까지의 거리보다 더 길 게 느껴졌지만 난 간신히 칼의 옆에 설 수 있었다.
칼의 몸은 그대로 부서져버릴 듯이 떨리고 있었다. 하긴 그건 나도 마찬가지지. 난 칼에게 말을 걸었다.
“조, 조금 물러나는 것이 어떨까요?”
“아, 안 되네, 네드발 군. 그, 그러니까, 에, 자신 없는 모, 모습을 보였다간………….”
“아, 알겠어요. 그런데, 그런데 이제 어떻게 하지요?”
블루드래곤은 뒤로 다섯 발자국쯤 떨어졌다. 드래곤의 다섯 발자국이다 보니 거리는 삽시간에 100큐빗 정도로 떨어져버렸다. 하지만 여전히 무시무시한 크기였다. 이윽고 길시언과 샌슨도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우리 네 명은 사이 좋게 떨면서 블루 드래곤을 바라보았다. 샌슨이 칼의 귀 가까이 대고 속삭였다.
“카, 카, 칼, 어, 어, 어떻게 하지요?”
“제길, 제기랄! 왜 모두들 그걸 나, 나한테 물어보는 거지? 나도 모, 모, 모르겠다구!”
그때 이루릴이 입을 열었다.
후우, 후우. 자, 이 노릇을 어떻게 한다? 이미 죽어버린 웜링을 가지고 인질극을 벌이는 데도 한계가 있다. 뒤쪽은 무너진 절벽 때문에 막혀버렸고 앞쪽은 블루 드래 곤이 떡하니 막고 있다. 요행히 여길 빠져나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되었다가는 우리는 남은 평생 동안 블루 드래곤에게 쫓겨다니는 신세가 될 것이다(그리고 틀 림없이 그리 오래 살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드래곤에게 사실을 설명하는 방법뿐이다. 하지만 그걸 믿어줄까? 이미 인질극을 벌이고 있는 마당에 ‘사실대 로 말하자면, 이 애는 이미 죽었는데요, 우리가 죽인 건 아니에요.’ …이런 말이 통할 수 있을까? 혹시 통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블루 드래곤이 새끼가 죽었다는 사 실을 알게 된다면 머리 끝까지 화가 나서 우리 같이 하찮은 생물을 단숨에 밟아죽이려들지 않을까?
어떻게 이렇게 빨리 생각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이루릴이 말을 시작한 것은 칼의 말이 끝나고 곧장이었는데 그새 이렇게 많은 생각을 떠올린 것이다.
“위대한 드래곤이여.”
이루릴의 말은 평온했다. 도대체가 말이야! 엘프와 순결한 소녀를 보호하시는 그랑엘베르여! 좀 너무한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왜 엘프는 드래곤을 앞에 두고도 저 렇게 심드렁하게 말한단 말입니까?
블루 드래곤이 고개를 숙였다. 보나마나 그 눈은 지글지글 타고 있을 테지만 감히 올려다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래서 난 고개를 돌려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이루릴은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왔다. 그녀가 내 옆을 지나칠 때 그녀의 머리카락이 물결치는 모습을 잘 볼 수 있었다. 왠지 그녀는 밤의 여왕처럼 보이는군. 나도 큰 일이야. 이런 상황에서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이루릴은 블루 드래곤 앞에 섰다.
검은 폭포수 같은 그녀의 머릿결이 매끄럽게 쏟아져내리다가 아름답게 흩날린다. 한결같은 평온함. 우리는 한조각 희망을 품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확고하고 흔들림 없는 태도는 우리를 불안에서 끄집어내었다. 그녀는 두 팔을 옆으로 조금 벌리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 웜링은 이미 죽었습니다만.”
……역시 그녀는 엘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