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5권 – 제9부 : 별은 바라보는 자에게 빛을 준다 3화

랜덤 이미지

드래곤 라자 5권 – 제9부 : 별은 바라보는 자에게 빛을 준다 3화

3

밤이 깊었다.

우리는 약 한 시간 거리를 두고 넥슨의 뒤를 따라왔다. 그들은 많은 인원이었고, 그래서 흔적을 많이 남겼다. 뒤를 따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게다가 그들도 밤에는 잘 것이다. 그럼 우리는 안 자면 되지.

우리는 주의 깊은 동작으로 말을 묶어두고 각자의 무장을 챙겨들었다. 그런데 여기서 곤란한 문제가 발생했다.

이 엄청나게 울창한 숲 때문에 달빛도 별빛도 비치지 않았다. 저녁마다 하는 일, 그러니까 장작은 충분히 해두었지만 혹시나 넥슨 쪽에서 우리를 볼까 싶어서 불은 피우지 않았다. 그래서 주위는 너무도 캄캄해서 우리들도 서로가 안 보일 지경이다. 그러니 몰래 넥슨의 무리에 다가가 레니를 구하기는커녕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할 지경이 되었다.

그래서 이루릴이 앞장을 섰다.

“보고 올게요.”

이루릴은 말소리만 남기고 스르르 사라졌다.

우리는 어떻게든 주위를 살펴보려고 애썼지만 사실 바로 옆에 있는 사람도 보이지 않을 정도의 어둠이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가만히 앉아서 기다릴 수밖에 없 었다. 주위는 지독하게도 캄캄했고 앉은 채로 꼼짝도 하지 않으려니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바로 우리 일행을 놓쳐버릴지도 몰랐다. 게 다가 소리도 낼 수 없었고, 그래서 우리들은 지독하게 지루한 기분을 느꼈다.

주위에는 우석거리는 숲 특유의 소리들도 들리지 않았다. 이거 참! 도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숲인지 모르겠다. 고요, 정말 인간이 만든 거대한 건물 안에 들어와 있는 듯한 짓누르는 고요만이 있을 뿐이다. 바람소리도 없고,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의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심지어 나 자신의 맥박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핸드레이크와 드래곤 로드의 이야기를 해주십시오.”

우화! 허, 하. 놀래라. 칼이 느닷없이 말을 꺼내는 바람에 뒤로 쓰러질 뻔했다. 갑자기 어둠 속 곳곳에서 커다란 숨소리들이 들려오는 것을 들어보니 다른 사람들도 대개 나와 비슷하게 놀랐던 모양이다.

어둠 속에서 느껴지는 시간의 연장감 때문에 제레인트의 대답은 꽤 늦다고 생각되었다.

“제게 하신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이 숲이 왜 생겨났는지 알고 싶습니다.”

“아, 예. 허허. 이것 참. 말하는 대상이 보이지 않으니 허공에 대고 이야기하는 기분이 듭니다?”

제레인트는 아마도 자세를 바꾼 모양이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조금 후, 제레인트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예, 그러니까, 루트에리노 대왕께서 드래곤 로드와 싸울 때, 그러니까 영광의 7주 전쟁이라고 하지요? 그 전쟁 초반기에 그 천재적인 핸드레이크에게 크게 밀리던 드래곤 로드는 비상 수단으로서 핸드레이크의 연인인 페어리퀸 다레니안을 인질로 삼았지요.”

“예? 인질이오?”

칼의 대답은 그의 당황을 잘 나타내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이야기야? 제레인트는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예. 그렇습니다. 인질입니다. 드래곤 로드도 어지간히 급했으니까요. 드래곤 로드는 페어리퀸 다레니안을 인질로 붙잡아 핸드레이크의 진격을 막았습니다. 그래서 핸드레이크는 자신 때문에 바이서스 군의 패배를 불러올 수도, 그렇다고 해서 사랑하는 다레니안의 목숨을 돌보지 않을 수도 없는 진퇴양난에 빠지게 됩니다. 아. 아 마 이 이야기는 잘 모르실 수도 있겠군요. 워낙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니까요.”

“그래서…………, 그래서요?”

“아, 예. 결국 핸드레이크는 단신으로 다레니안을 구출할 것을 결심했지요. 그가 성공한다면 당연히 좋고, 실패한다 해도 페어리퀸 때문에 약점 잡히는 사람은 자신 뿐이므로 자기가 죽으면 끝난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조금 통속적인 데가 있지요? 뭐 통속적인 것들에도 많은 진리가 숨어 있긴 합니다만.”

“아, 예………….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핸드레이크는 페어리퀸을 구출해 냅니다만 그 탈출 과정에서 페어리퀸은 분노한 드래곤 로드의 저주를 받게 됩니다. 그 저주를 위해 오크 100마리가 희생되었다던 가요. 어쨌든 그 저주 때문에 페어리퀸은 여왕의 권능의 상징인 날개를 잃게 됩니다. 페어리의 여왕의 권능은 그 날개에서 나온다나 봐요.”

뭐, 뭐야 이건? 이야기가 전혀 다르잖아? 데미 공주님께 들은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인데? 아, 결과야 비슷하기는 한데 전개가 너무 다르다? 어느 게 사실이 지?

제레인트는 계속 낭랑하게 말했다.

“그런데 페어리에게 있어 그 여왕이 권능을 잃게 된다는 것은 종족 전체의 비극입니다. 자칫 종족 전체가 멸망의 길로 들어설 수도 있는 문제지요. 인간들도 왕을 자 신의 대표자로 하고 페어리도 그렇지만, 인간들은 말로만 자신들의 대표자라고 할 뿐 왕이 죽든, 아니 왕이 바뀌든 어쨌든 종족으로서의 인간은 영원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뭐, 나라야 바뀔 수도 있고 왕조가 바뀔 수도 있지만 종족은 영원하지요. 따라서 인간의 왕은 나라를 대표할 뿐이지 인간의 대표는 아닙니다. 하지만 페어 리들은 그러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그야말로 자신들의 대표자로서 페어리퀸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페어리퀸이 자신을 잃게 되면 페어리 전체가 위험해집니다.”

“어머나…….”

네리아의 탄성이었다. 제레인트는 신난다는 듯이 말했다.

“다시 원래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에, 결국 드래곤 로드는 인질을 잃게 되고 또 그 무리한 저주 의식 때문에 힘을 많이 소모하여 영광의 7주 전쟁 후반기에 지리멸렬, 결국 그 마지막 날, 그 해의 첫눈이 내리던 날 그 처절한 전쟁의 끄트머리에서 루트에리노 대왕의 검 아래 쓰러지고 말았지요. 그러나 루트에리노 대왕 역시 그를 끝 장낼 힘은 남아 있지 못한 상태였고, 그래서 할슈타일 공은 드래곤 로드를 수습해 갈 수 있었습니다.”

“예. 그건 우리나라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이야기군요. 그런데 이 숲은?”

“아, 예. 에, 그리고 바이서스가 건국되고 나서입니다. 핸드레이크는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않고 단신으로 북쪽으로의 여행을 떠납니다.”

“여행이오? 그야 원래 여행을………….”

“예. 여행을 많이 하는 마법사였지요. 마법 수련과 재료 채집도 그렇고, 뭐 마법사답게 아티팩트나 고서적들을 찾기 위해서도 그랬습니다만 건국 초기의 나라라 곳 곳이 어수선하던 그 시절에는 주로 감찰 여행이었습니다. 공무적인 여행으로 많이 돌아다녔던 시절이지요. 그리고 북쪽 여행도 명목상으로는 북쪽 국경 지대의 감찰 여행이었지요. 하지만 그 여행은 뭐랄까, 좀 다른 면이 있었지요. 우선 단신이라는 점이 그렇고, 정확한 여정과 장소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 그렇지요. 그는 사실 드래곤 로드를 만나러 왔던 것입니다.”

“드래곤 로드를요?”

제레인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말했다.

“예. 그는 저주의 주체인 드래곤 로드를 만나서 페어리퀸에게 내려진 저주를 해소해 줄 것을 부탁하기 위해서 북쪽으로 온 것입니다.”

“허어…………, 이런.”

칼은 놀란 목소리였다. 이런 젠장. 캄캄해서 아무도 표정을 볼 수가 없잖아? 난 눈살을 찌푸리며 제레인트의 이야기를 들었다. 아무래도 저 이야기는 너무, 에, 뭐랄 까. 음………….

“당시 이 북쪽 황야는 할슈타일 공의 세력이 막강했던 장소입니다만 대마법사 핸드레이크는 무인지경을 걷듯이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찾아올 수 있었습니다. 할 슈타일 공을 만난 핸드레이크는 단도직입적으로 드래곤 로드를 만나고 싶다고 말했지만 기사의 본보기라 할 만한 할슈타일 공이 그것을 허락할 리가 없지요. 그는 자 신의 맹세를 지키기 위해서 인간의 적이 되면서까지 드래곤을 지켰던 기사 아닙니까. 핸드레이크가 드래곤 로드를 암살하기 위해 찾아온 것일지도 몰랐으니까요.”

“예, 예. 그래서요?”

“핸드레이크는 드래곤 로드가 죽으면 다레니안에게 내려진 저주는 영원히 풀 수 없으며, 그렇게 될 경우 페어리족 전체가 멸망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말했던 것 같습 니다. 어쨌든 여러 가지 설득으로 간신히 할슈타일 공으로 하여금 그를 대미궁으로 안내하도록 했지요. 하지만 할슈타일 공은 말했습니다. ‘당신이 날 설득할 수 있었 던 것처럼 드래곤 로드를 설득하기를 바란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대미궁에서 육신을 잃은 혼이 되어버릴 것이다.’ 뭐 이렇게 말했다지요.”

네리아가 듣기 싫을 정도로 할딱거리고 있었다. 몹시 긴장하는 모양인걸.

“어쨌든 그 말만 남기고 핸드레이크와 할슈타일 공, 이렇게 두 사람만이 대미궁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 두 사람은 다시 나왔다지요. 그 때, 그때 핸드레이크의 얼굴은 그야말로 사람의 얼굴 같지가 않았답니다. 할슈타일 공도 대단히 창백한 얼굴이었고요. 어쨌든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헤어졌 습니다.”

“아무 말도 없이?”

“예. 그런데 핸드레이크는 그날 할슈타일 영지를 떠나기 전에 영지를 가리키며 말했답니다. 이 땅에는 무한을 가둘 수 있을 정도의 숲이 자라나 시간을 희롱하며 영 원할 것이다.”

“무한을…….”

“예. 그러고는 바로 이 숲이 생겨났답니다.”

“허어…….”

제레인트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므로,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드래곤 로드는 핸드레이크의 부탁을 들어주었으며 그 대가로 핸드레이크는 영원의 숲을 만들어 그를 보호한 것입니다. 그는 아마도 할슈타일 공의 바이서스 귀속을 미리 내다본 것인지도 모르지요. 그리고 몇 대가 흘러, 할슈타일 가문은 과연 바이서스에 귀속되었습니다. 그러나 할슈 타일 가문 역시 드래곤 로드로부터 드래곤 라자의 혈통을 약속받았기 때문에 별로 나쁜 취급을 당하지는 않을 수 있었습니다. 결국 3자 모두가 좋은 결과를 얻었다고 나 할까요? 핸드레이크는 페어리퀸의 저주를 풀었고 할슈타일 공은 가문에 영광을 더할 수 있게 되었고 드래곤 로드는 영원히 평화로울 수 있는 휴식처를 얻었으니까 요.”

“합리적인 생각인 것 같군요.”

“예.”

“그런데 페어리퀸은? 그녀가 저주에서 풀려났다면 그녀는 계속해서 페어리의 여왕이며 페어리족 역시 존속할 수 있게 되는 겁니까?”

“아, 아마 그럴 거라고 생각됩니다만. 그런데 제가 들었던 이야기에서는 페어리퀸은 아마도 완전히 저주에서 풀려나지는 못했던 모양입니다. 아니, 한 번 저주에 걸 렸던 부작용이 크다고 할까요. 어쨌든 그래서 그녀는 활동을 삼가고 영원의 호수 아래에 은거하게 된 것이죠.”

그때 갑자기 투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물론 샌슨이 입을 연 것이다.

“그런데 그거 우리가 아는 이야기와는 많이 다른데요?”

“예?”

제레인트가 반문하고 나자 칼은 재빨리 말했다.

“아니, 퍼시발 군. 300년의 간격이 있다네. 흐음. 침버 씨. 그 이야기는 어떻게 아시게 되었습니까?”

“아니, 뭐 다른 점이 있습니까? 전 그 이야기를…………, 에, 어린 시절 어른들에게 들었습니다. 일스 국민들은 대부분 잘 아는 이야기인데요. 노래도 몇 개 남아 있지요. ‘낡은 대지 위에 새로운 바람이 분다.’ 뭐 이렇게 시작하는 노래인데.”

그러자 샌슨이 다시 말했다.

“그 노래는 전에 들어보았습니다. 그 노래에 그 내용이 담겨 있습니까?”

제레인트는 의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 들어보셨다면서 내용을 물으시는 겁니까?”

“끝까지 듣지를 못했습니다.”

“아, 그래요? 예. 그런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결국 이득을 본 것은 인간뿐이다. 뭐 그런 내용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드래곤 로드는 영원의 숲에 잠들게 되었고, 페 어리퀸은 영원의 호수 아래 잠들게 되었다. 그리고 핸드레이크는 나라를 만들었고, 할슈타일 가문은 드래곤 라자의 가문으로 영광을 계속 누리게 되었다. 그런 내용 일 겁니다. 아마.”

“영원의 호수라. 레브네인 호수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예.”

이거 정말 이상한 이야기이다. 칼도 입을 다물었고 샌슨도 말을 멈추었다. 그러자 다시 침묵이 우리를 감싸게 되었다. 모두들 방금 들은 이야기를 되짚어보고 있는 모양이다. 나 역시 그 이야기를 생각해 보았다.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은, 데미 공주의 이야기에서는 핸드레이크와 다레니안의 관계는 일방적인 것이었다. 다레니안 혼자서 행동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당시의 전사와도 맞아떨어진다. 핸드레이크는 정말 암살이라도 계획해 보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몰렸으니까.

반면 제레인트의 이야기는 그 뒷부분이 상당히 맞아떨어진다. 실제로 영원의 숲이라는 이 숲도 있고, 할슈타일 가문의 이야기도 맞아떨어진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 떻게 된 거지? 왜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인데 바이서스와 일스의 이야기가 이렇게 다른 거지? 방언이라는 그것처럼 이야기도 300년쯤 지나버리면 많이 바뀌어버리는 것일까? 혹시 루트에리노 대왕의 이야기들도 일스에서는 이상하게 전해지는 것이 아닐까?

난 너무도 이상한 이야기에 얼굴을 일그러뜨려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봐야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을 테니까. 난 캄캄한 허공을 향해 오크의 얼굴을 흉내내어 보 았다. 흠. 그거 재미있네. 난 계속해서 트롤의 얼굴을 만들어보고 그 다음에 샌슨의 얼굴………… 어, 그러니까 오거의 얼굴을 만들어보았다.

“후치, 왜 그러죠?”

이루릴의 목소리였다. 윽. 벌써 왔나? 난 보이지도 않는 이루릴에게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이루릴은 잠시 조용히 있더니 곧 캐스팅을 시작했다.

“자신의 적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령, 그를 감추는 어둠은 오히려 그의 먹이, 나와서 어둠을 삼켜요.”

파아앗! 지독한 암흑 속에 한참 동안 앉아 있었더니 윌로위스프의 빛에 눈물이 찔끔할 지경이다.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들 눈을 비비면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칼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세레니얼 양, 불빛을 비춰도 괜찮습니까?”

“예. 넥슨의 무리와 우리들 사이에는 언덕이 가로놓여 있습니다. 불빛은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윌로위스프의 파르스름한 빛은 마치 맥박치듯이, 아니 춤을 추듯이 이리저리 흔들렸지만 그 빛으로도 다른 사람들의 모습은 충분히 볼 수 있었다. 다만 파르스름한 빛이라 모두들 창백하게 보인다는 점이 문제였지만, 샌슨은 고개를 돌리다가 네리아의 얼굴을 보고는 기겁하는 표정을 지었고 그 표정을 본 네리아는 소리없이 웃었 다. 이루릴은 말했다.

“그들은 정확히 우리 앞쪽에 있더군요. 약 30분쯤 걸어가면 되겠어요. 보초들이 몇 명 서 있지만 그저 야외라서 불침번을 서는 정도입니다.”

“헤엣? 이루릴은 얼마 걸리지도 않아서 갔다왔잖아요?”

네리아의 놀라는 목소리에 이루릴은 대답했다.

“숲 속이니까요.”

아, 역시 엘프는 숲 속에서 엄청난 속도를 내는구나. 그때 칼이 말했다.

“그런데 불을 켜들고 접근하면 들키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지요.”

“그렇다면 우리들은 접근할 수가 없을 텐데요. 이런 암흑 속에서 30분 동안 정확히 걸어갈 수는 없습니다.”

이루릴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럼 제가 혼자 잠입해 볼까요?”

“아니, 그건 위험합니다. 세레니얼 양 혼자서라니, 말도 안 됩니다.”

“하지만 저들도 인간이니 이런 암흑 속에서는 제가 훨씬 유리합니다. 저쪽 야영장의 불을 꺼버리고 침입하면 거의 잡힐 일이 없을 것 같습니다만.” 그때 네리아가 말했다.

“아니, 그렇진 않을 거예요. 칼 아저씨 말대로 저 사람들이 길드 사람이라면 밤눈이 무시 못하게 좋을 텐데. 어림없어요.”

샌슨은 심각한 표정을 짓다가 말했다.

“새벽녘이 어떻겠습니까? 초병들도 그 시간이면 가장 해이해집니다. 그리고 새벽이면 우리들도 보다 접근하기 쉽지 않을까요?”

“일리 있는 말이네만, 그렇다면 달아날 때가 문제 아닌가. 그들도 우리들을 추적하기가 쉬울 텐데.”

“그들은 말이 없습니다.”

“아, 그렇군. 전속력으로 달려간다면 우리 쪽이 유리하겠군.”

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일단 잠을 자두도록 하세나. 그리고 새벽녘이 되기 직전에 움직이기 시작하도록 하지. 저, 그런데 세레니얼 양. 확실히 저쪽에서는 경계하는 눈 치가 없었습니까?”

“예. 말씀드렸다시피 일상적인 경계였습니다.”

“그렇다면 아직 우리들을 눈치채지 못한 것이로군. 음. 좋네. 일단 자도록 하세나. 아, 먼저 불을 피우지. 주위가 싸늘해서 이렇게 자다간 내일 아침에 일어나지도 못 하겠군.”

그래서 우리는 먼저 모닥불을 피웠다. 싸늘한 어둠 속에 앉아 있다가 모닥불을 피우자 정말 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기주를 해야 되는 이루릴과 제레인트는 먼저 잠들었고 나머지 네 사람이 교대로 불침번을 서기로 했다.

먼저 네리아가 불침번을 서고 나머지 사람들이 잠자리에 들었다. 나 역시 모포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이젠 정말 단단한 땅, 나뭇가지와 돌멩이들이 등에 배기는 이런 땅에서 잠드는 것에도 익숙해져 버렸어. 음, 나도 이만하면 경험 많은 모험자 아닌가?

난 머리 위까지 모포를 뒤집어썼다. 하지만 이 컴컴한 숲 속에서 다시 암흑 속으로 들어간다고 생각하니 그것도 이상했다. 그래서 난 머리를 내밀고 팔베개를 한 다 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사실 하늘이라는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나뭇잎들뿐이었다. 게다가 그것은 아래쪽의 모닥불 때문에 밑동은 검붉게 물들어 있었고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시커멓게 변하는 나무들이었다. 간혹 나뭇잎들이 바알간 불빛에 물들어 춤추는 모습이 보이긴 했지만 위쪽은 대부분 캄캄한 장막처럼 보였다. 그것은 나름대로 안온해 보이기도 했다. 지금껏 야외에서 잔 일이 허다했지만 이 숲처럼 밀폐된 느낌의 장소에서 잠든 적은 없었다. 겨울로 넘어가는 야외의 숲은 대 부분 헐벗은 나무들뿐이었고 이토록 울창한 침엽수림은 보지를 못했다.

위쪽은 마치 검고 단단한 천장 같았고 아래로 내려올수록 붉어지는 주위의 모습은 퍽이나 따스하게 느껴졌다. 난 눈을 깜빡거리다가 옆을 돌아보았다.

네리아는 느긋한 자세로 나무에 기대어 앉아서는 간혹 나뭇가지를 부러뜨려 넣거나 했다.

그녀의 얼굴엔 음영이 깊게 패어 있었다. 모닥불의 일렁거림에 따라 그녀의 얼굴에서 그림자가 춤을 추었다. 그것은 마치 그녀가 계속해서 표정을 바꾸는 것처럼 보 였다. 하지만 그녀는 별로 표정이 없었다.

“뭘 보니?”

“범죄에 속할 만큼 아름다운 나이트호크.”

네리아는 방긋 웃으며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그런데 왜 나 사랑하는 남자는 어디에도 없을까?”

“에엣?”

네리아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끅끅 웃었다. 허어, 참.

“시집가고 싶어요?”

“아니. 거, 시집은 안 가도 상관 없고. 그냥 나 좋다는 남자 있으면 좋겠네.”

“그런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응.”

“잘 관찰하지 않아서 그렇겠죠. 또 직업도 문제고.”

“응? 직업이 문제야? 어떻게?”

그녀는 갑자기 고개를 들고 비상한 관심이 담긴 시선을 보내었다. 이봐, 이봐! 아가씨! 지금 하는 질문이 사춘기를 간신히 통과하고 헉헉거리고 있는 17세 소년에게 물어볼 만한 거라고 생각한다면 당신도 정말 큰일이야!

“숨어다니는 직업이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나 담장 위로 날아다닌 적은 별로 없는데, 아, 물론 성실한 나이트호크로서 조심하긴 했지만…………. 음. 그거 때문인가?”

“실례일진 모르겠는데, 사귀는 도적은 없어요?”

“도둑놈들은 싫어.”

“아, 그러시군요.”

네리아는 고개를 빠꼼히 내밀어 잠든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음, 음. 후치야?”

“예?”

“너희네 마을 사람들은 모두 너희들 같으니?”

“예? 글쎄요. 아니, 잠깐 나와 칼과 샌슨을 하나로 묶어서 너희라고 할 수 있어요? 우리가 무슨 공통점이 있나?”

네리아는 해죽 웃으며 말했다.

“설명할 수 없는 공통점이 있어.”

“그렇다면, 음, 이렇게 대답하지요. 난 우리 마을 사람들이 괴상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그렇다면 그건 아마도 나와 우리 마을 사람들이 비슷하기 때문이겠죠?” “음. 옳지. 옳은 말이다.”

네리아는 갑자기 하늘로 올라가는 붉은 기운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 이 생활 걷어치우고 너희 마을에나 정착할까?”

“정착? 좋지요. 그런데 정착해서 뭘 할 건데요?”

“뭘 하냐고? 글쎄. 음. 농사는 못 짓고, 기술은 싸우는 기술하고 도둑질하는 기술밖에 없는데. 히잉. 너도 알다시피 요리도 못해.”

“요리를 못하는 거였어요?”

“응.”

“흐음. 의외로군요. 뭐, 상관은 없겠죠. 천천히 배우면 되니까. 나도 어머니 없는 집안에서 아버지에게 구박받다 보니 늘어난 요리 솜씨인데요. 뭐.”

갑자기 네리아의 눈에서 엄청난 빛이 번뜩였다.

“너희 아버지 미남이시니?”

맙소사! 안 돼!

“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죠?”

“멋지다. 음, 정말 멋져.”

“예. 멋진 것은 알겠는데, 중요한 것은 그 멋지다는 감정에 내가 동참하지 못하는 거예요.”

“남편은 초를 만들고, 아들은 요리를 만들고, 음, 완벽해. 난 할 일이 없겠네?”

“이거 보세요오오.”

“괜찮아, 괜찮아. 널 보면 네 아버지도 짐작이 가. 음. 나이가 무슨 상관이람.”

“예, 사랑엔 나이도 국경도 없다지만.”

“너희 아버지 혹시 사귀는 여자분 계시니? 아, 괜찮아. 우히히. 용모가 받쳐주니까 경쟁을 해도 자신 있어.”

오, 순결한 소녀와 엘프를 돌보시는 그랑엘베르여! 아, 참 오래간만입니다. 그 동안 별일 없으셨는지? 아니, 도대체 이 무슨 망발입니까! 도대체 당신이 돌보시는 여 자들은 전부들 왜 이 지경입니까? 예? 네리아는 순결한 소녀가 아니라구요? 이거 보세요. 신이시니까 그렇게 쩨쩨하게 굴지 맙시다. 내가 보기엔 네리아는 순결한 소 녀, 아니 처녀인가? 어쨌든 그렇단 말입니다. 레니처럼 시집도 안 가겠다는 소녀만 순결한 소녀라고 하신다면 그것도 참 곤란해요. 아악! 그러고 보니 당신 근무 태만 이야! 당신은 레니를 돌보지 않았어!

난 하늘에서 느닷없이 벼락이나 운석 등이 떨어진다 해도 피할 수 있도록 주의 깊게 하늘을 보면서 말했다.

“그럼 도대체 뭘 할 건데요? 돈은 남편이 벌고 밥은 아들이 하면? 아마 빨래나 집안 청소도 모조리 아들 몫이 될 거라는 점은 미루어 짐작되는데?”

“집안에 어머니가 있음으로써 생기는 따사로움을 선사하지.”

“졌군요.”

네리아는 턱을 들어올리더니 하늘을 향해 소리없이 웃었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자요, 자. 난 잠이 다 달아났어요. 네리아는 수면 부족인 것 같아. 이런 캄캄한 암흑 속에 잠자리에 드러누워 머리가 돌아버릴 정도로 황당한 말을 듣는 한 순수한 소년의 가슴을 헤아려봐요.”

“그게 누군데?”

“…..누워요!”

네리아는 히죽거리며 모포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난 그녀가 기대어 있던 나무로 다가가 기대앉았다.

네리아는 모포 속으로 들어가면서 혼잣말처럼 웅얼거렸다.

“난 좋은 어머니가 될 수 없겠지?”

난 잠시 침울한 눈으로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네리아는 모포 속에 얼굴을 묻은 채 내다보지 않았다. 난 역시 혼잣말하듯이 말했다.

“네리아는 네리아의 아이에겐 좋은 어머니가 될 수 있겠지요. 그러니 내 어머니가 될 생각은 하지 말아요.”

잠시 후 다시 네리아의 잠꼬대 같은 말이 들려왔다.

“하아…………, 모르겠어. 내가 과연 뭘까. 난 서툰 손재주를 가진 나이트호크일 뿐이고, 이날 이때까지 이룩한 것이 없어. 내가 과연 무엇이 될 수 있을까.”

“미래는 다가오지 않았어요.”

“그러니.”

그리고 네리아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난 왜 네리아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대답을 못했을까.

앉아 있자니 조금 싸늘했다. 난 모포를 들고 와 어깨 위로 둘러쓰고는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주위는 여전히 캄캄했다. 간혹 그 검은 장막 사이로 뭔가가 움직이 는 느낌이 들지만 움직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굳이 따지자면 바람이 움직이고 있다고 할까? 밤바람은 모닥불 주위로 조심스럽게 접근하다가 모닥불의 열기에 휘말 려 위로 솟구쳐버리는 것 같았다.

낮은 가지들에 생기는 그림자는 묘한 모양이었다. 나무들에 생기는 기기묘묘한 그림자들은 흡사 날 바라보는 얼굴이나 스쳐지나가는 동물의 모습처럼 보였다. 난 피 식거리며 나뭇가지를 부러뜨렸다.

우드득, 뚝.

잠깐. 이상하다? 나뭇가지는 한 번 부러뜨렸는데 소리는 두 번 나네?

뚜둑.

난 슬그머니 다리를 뻗어 샌슨의 어깨를 차면서 나직하게 말했다.

“말하지 말고 들어. 뭔가 다가오는 것 같아.”

샌슨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분명히 정신을 차린 모양이다. 그는 천천히 손을 움직여 롱소드를 당겨 쥐었다.

뚝. 뚜둑.

이젠 확실하다. 나는 오른쪽으로 달렸고 샌슨은 왼쪽으로 몸을 굴렸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우리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말없이 황급한 동작으로 주위의 사 람들을 두드려 깨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그때 공격이 시작되었다.

채챙!

“습격이다!”

두 가지 소리가 동시에 났다. 샌슨이 무언가의 공격을 검으로 막아내는 소리, 그리고 내 고함소리다. 사람들은 속속 일어났지만, 저쪽에서도 속속 들이닥쳤다. 나무 들 사이로 무엇인가가 빠르게 움직이는 소리가 요란했다. 두두두, 버석버석. 그때였다.

“으아아악!”

피가 얼어붙을 것 같다고 하나? 샌슨은 무시무시한 비명을 질렀다. 놀라버린 난 뒤를 돌아보았다.

“어어어억!”

샌슨이 둘이다!

두 명의 샌슨이 서로 롱소드를 맞댄 채 밀어붙이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놀라움에 떨면서 서로 물러났다. 얼어붙은 얼굴까지도 똑같았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그때였다. 다른 쪽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테페리여!”

“맙소사, 저건 나잖아!”

제레인트? 고개를 돌려보았다. 서로 디바인 마크를 꺼내어 들다가 상대를 보고 놀라는 제레인트들의 모습이 보였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장면이야? 그때 하늘 위 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트라이던트의 네리아!”

뭐라구? 젠장, 우습지도 않아! 난 간신히 일자무식으로 바스타드를 들어올려 위에서 내려지르는 트라이던트를 막아내었다. 상대는 나에게 막힌 다음 뒤로 훌쩍 뛰다 가 외쳤다.

“으악! 후치? 너 여기서 뭐해?”

맙소사, 날 공격한 사람은 역시 네리아였다. 그리고 그 뒤쪽에서 또 다른 네리아가 외쳤다.

“넌 뭐야?”

날 공격했던 네리아는 뒤를 돌아보고는 경악에 질려버렸다. 그건 저쪽의 네리아도 마찬가지였다.

“꺄악!”

“나잖아?”

내 뒤에서 칼이 달려나오며 외쳤다.

“이건 도대체…………, 으억?”

난 앞을 보고 질려버렸다. 저쪽엔 내가 바스타드를 든 채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선 황급히 활을 내리는 칼의 모습이 보였다. 난 나의 모습을 보며 부들 부들 떨었다. 이게 무슨!

그때였다. 이쪽과 저쪽의 칼이 동시에 외쳤다.

“도플갱어?”

그들은 서로 상대의 말을 듣고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난 나와 똑같이 생긴 놈을 바라보며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건 저쪽도 마찬가지였다. 저쪽의 후치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이거 무슨 말도 안 되는 장면이야? 이봐, 너, 나야?”

저 자식이 도대체 누구에게 질문하는 거야? 잠깐, 마음을 가라앉히자.

“잠깐, 이렇게 결정하자구. 샌슨의 애인 이름은 뭐지?”

“어? 너라면 대답했겠어?”

“대답을 안했어…… 저건 나잖아?”

저쪽의 샌슨은 저쪽의 후치를, 그리고 이쪽의 샌슨은 날 후려쳤다.

“이 자식아!”

딱! 아이고 머리야. 음. 이 상태에서도 의리를 지켜 대답하지 않은 것을 보니 저건 확실히 나다. 저쪽에서 서로를 멀뚱히 바라보고 있던 이루릴들도 마찬가지였다. 젠 장! 어느쪽이 우리(?) 이루릴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한쪽 이루릴이 말했다.

“당신은 나인가요?”

“이상하군요. 당신은 나로군요?”

“그렇군요. 음. 놀라운 일이군요.”

“예. 이해할 수가 없군요.”

맙소사. 이루릴들은 서로 예의 바르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자니 머리가 돌아버릴 것 같다. 칼들도 허둥거리며 말했다.

“잠깐! 싸움을 멈추시오! 아무도 공격하지 마시오!”

“그래요! 일단 이 사태를 설명해 보도록 하십시다!”

정말 똑같군. 칼들은 서로를 흘끔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닥불 주위에 원래 잠들어 있던 자들은 내 옆으로 모이시오!”

“그렇지! 멈추시오! 넥슨 일행을 기습하려던 사람들은 내 옆으로 모이시오!”

저쪽과 이쪽의 칼은 그렇게 외치면서 다시 서로의 말에 기가 찬 표정을 지었다. 뭐라구? 넥슨 일행을 기습하려고 했다구? 그럼 바로 우리잖아?

잠시 후 우리는 대치 상태로 서로를 마주보게 되었다. 젠장, 이 무슨 괴상망측한 일이야? 저쪽의 네리아는 우리를 보면서 얼빠진 얼굴이 되었다가 다시 자기 일행을 바라보며 의혹에 찬 표정을 지었다. 샌슨들은 서로를 노려보며 검을 사납게 들어올리고 있었고 이루릴들은 차분히 서로를 관찰하고 있었다. 나는 나와 똑같이 얼떨떨 한 표정을 짓고 있던 후치에게 말을 걸었다.

“이봐, 에, 일단, 후치라고 부르지. 네가 나라면 예절 차릴 필요는…………, 젠장! 머리가 아파.”

“얼씨구, 이봐. 누가 머리가 아프다는 거야? 말해 두겠는데 네 녀석이 진짜라느니 하는 주장을 받아들이기엔 난 나에 대한 자의식이 너무나 투철하다구.”

“저 말버릇…………, 맙소사. 징그러울 정도로 닮았어. 이봐! 너 헬턴트 마을의 뭐야?”

“너 설마 나처럼 초장이 후보라고 대답할 생각은 아니겠지?”

우와우와! 이거 미치겠다. 아무리봐도 저건 나다. 똑같잖아? 네리아는 의아한 얼굴로 네리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이거 봐. 무, 묻겠는데……. 아니, 관둬.”

“어, 어? 너 설마 나와 똑같은 질문을 떠올린 거야?”

“어머나!”

“어머나!”

네리아들은 서로 얼굴을 붉혔다. 도대체 무슨 질문들을 떠올린 거야? 저쪽의 일행은 저쪽의 네리아를, 그리고 우리 일행은 우리 네리아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우리 쪽의 칼이 먼저 말했다.

“아무리 봐도………….. 도플갱어는 아닌 것 같소. 에, 헬턴트 씨라고 불러야 되나?”

저쪽의 칼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건 적합하지 않을 듯하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자신에 대한 호칭으로는 부적합하지 않겠소?”

“그렇군요. 음. 그러나 시의 적절한 호칭이 생각나지를 않는구려.”

미치겠군! 저쪽의 샌슨은 머리를 벅벅 긁다가 말했다.

“이봐! 어, 너! 너 여기서 뭘 하고 있었지?”

이쪽의 샌슨은 이를 박박 갈면서 말했다.

“우린 넥슨에게 납치당한 레니를 구출하기 위해 여기서 대기중이었다. 넌 뭐냐?”

“젠장. 우리는 레니를 구출하기 위해 뛰어든 거야!”

그러자 우리 쪽 샌슨이 환호를 질렀다.

“야하! 그래? 너 이 자식, 잘 걸렸다. 네가 가짜지?”

“뭐야? 입조심하시지!”

“네가 가짜가 아니라면 20명이나 되는 도적들에게 이렇게 무모하게 뛰어들 리가 없어! 적어도 나라면 절대로 그러지 않아!”

“웃기네! 이루릴이 샌드맨을 부르고 슬리프로 다 재우기로 했단 말이다! 그리고 잠들지 않은 녀석들은 우리가 공격해서 끝내고!”

그러자 이쪽의 이루릴이 놀란 표정이 되었다. 우리 이루릴은 저쪽 이루릴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렇군요. 그런 방법이 있군요. 하지만 그 방법을 시행하려면 넥슨의 무리에게 접근할 수 있어야 될 텐데, 어떻게 밤눈이 좋지 않은 인간 일행을 데리고 접근할 수 있었지요?”

그러자 저쪽의 이루릴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밤눈이 어둡기는 하지만 이쪽의 모닥불은 멀리서도 잘 보이던걸요.”

“아, 그렇습니까? 이해가 됩니다. 이 모닥불을 넥슨의 모닥불로 생각하셨군요?”

“네. 제레인트 씨의 말에 의하면 이 숲에는 절대로 사람들이 들어오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저희는 다른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사실 저희들도 그런 계획을 생각했지만 넥슨의 일행이 너무 멀리 있어서 어둠 속에서 접근할 수가 없더군요. 그래서 시야가 좋아지는 새벽까지 기 다렸던 것입니다.”

“아아…………, 그러시군요. 이해했습니다.”

아무래도 너무 이상한 대화다. 이루릴들은 서로를 향해 살포시 미소를 짓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우리들은 서로 칼부림을 일으키고 싶은 기분을 억누를 수 있 었다. 저쪽의 칼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오가는 말들로 미루어보아 우리는 동일인이군요. 기이합니다. 우리는 일스 공국의 나우르첸에서 이곳까지 추격해 오는 동안의 모든 기억이 완전합니다. 아마 그쪽 도 그럴 것 같은데?”

“예상하시는 대로요. 물론 그 이전의 모든 기억이 확실하시겠지요?”

“그렇습니다.”

“이 현상을 설명할 만한 이론이 있으십니까?”

“당신이 나라면?”

“없습니다.”

“그렇군요.”

제레인트는 나에게 바싹 다가서면서 말했다.

“잠깐, 그렇다면 우리 서로를 해치는 일은 삼가도록 하지요? 에, 우리가 공존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일단은 서로 무기를 치우고 대화해 보지요?”

저쪽의 제레인트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저쪽의 칼을 바라보았다. 이쪽과 저쪽은 서로 암묵적인 약속 하에 무기를 다시 집어넣었다. 샌슨들이 마지막으로 불평섞인 표정을 지으며 무기를 꽂아넣는 것까지 똑같았다.

그리고 우리들은 다시 서로를 노려보았다. 젠장! 저 후치놈, 보면 볼수록 기분이 나쁘군. 눈, 코, 입 어디 한 군데 다를 것 없이 똑같이 생겼잖아? 저쪽의 후치는 팔짱 을 끼면서 못마땅하다는 듯이 날 바라보았다. 칵! 네가 날 노려봐? 녀석아, 네가 날 의심하다니. 내가 진짜인데? 윽.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쪽의 후치 녀석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듯하다.

이쪽의 칼이 크게 심호흡을 하며 말했다.

“분명 도플갱어는 아니군. 서로의 기억까지 똑같을 수는 없으니. 그렇다면 이건 도대체 무엇이지?”

“으아아악!”

네리아, 왜 이래요? 칼의 말이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아? 난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네리아는 엉뚱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네리아가 바라보는 방향 을 바라보았다.

“허, 허허…….”

칼은 실성한 듯이 웃고 말았다. 뭐 별로 탓하고 싶지는 않았다.

모닥불의 가녀린 빛이 퍼지는 경계 저쪽에서 나타나서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우리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우리 일행이었다.

세 명의 칼은 서로 심각하게 쳐다보았고 세 명의 샌슨은 서로에게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세 명의 이루릴은 두 명이나 되는 자신과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이런 진귀한 상황에 퍽 기뻐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보였다. 뭐 실제로 기뻐하지는 않았지만 그 침착하고 차분한 모습이 나에겐 꼭 그렇게 보였다.

세 명의 네리아는 서로를 못 볼 것처럼 쳐다보면서 떨고 있었고 세 명의 제레인트는 서로를 의심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세 명의 나는…………… 퍽 재미가 없었다. 농 담을 걸려고 해도 전부들 나이기 때문에 도대체 농담이 통하지가 않는 것이다. 아니, 일단 농담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다!

어느 칼인지는 모르지만 칼이 일단 말했다.

“자, 설명은 천천히 하고, 일단 서로 섞이지 않도록 구분합시다. 마지막에 여기로 걸어온 사람들은 내 옆으로 모이세요. 그리고 모두 오른쪽 소매를 걷어올려요.” 음, 저 칼은 마지막에 나타난 칼인가 보군. 그러자 다른 칼이 또 말했다.

“모닥불 옆에서 자고 있던 일행들은 모두 왼쪽 소매를 걷읍시다. 하지만…………….”

조용히 있던 칼이 그 말을 받았다.

“나를 나와 구분하다니, 그것도 정말 이상한 일이군요.”

“그렇소. 하지만 대화의 편의를 위해선 어쩔 수 없구려.”

그래서 나는 일단 왼쪽 소매를 걷어붙였다. 정신이 나가버릴 듯한 광경 속에서 사람들은 서로의 소매를 흘끔거리다가 곧 끼리끼리 모였다. 난 뒤죽박죽인 머리를 감 싸며 왼쪽 소매를 걷어붙인 칼 옆으로 걸어갔다.

“아무래도 무슨 마법에 걸린 듯하오. 이 숲이 우리에게 주는 마법일까요?”

“예. 그것 참. 음. 일단 서로의 기억을 비교해 보십시다.”

“그러지요. 제가 먼저 물어볼까요?”

어떻게 칼들은 저리도 싹싹하게 이야기를 잘도 주고 받을까! 미치도록 존경스럽군, 그래. 세 무리나 되는 우리들은 칼들의 대화에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한 칼이 말했다.

“에, 그럼 묻겠소. 헬턴트 영지의 영주의 이름은 무엇이오?”

“그야 나의 형님이신…….”

한 칼이 대답하려다가 갑자기 머뭇거렸다. 어라? 저건 왼쪽 소매를 걷어붙인 칼, 그러니까 우리 칼인데? 왼쪽 소매를 걷어붙인 샌슨이 놀라서 물었다. “어, 이, 이봐요! 칼. 왜 그래요?”

우리 칼은 절망적인 얼굴이 되었다.

“기억이 안 나…… 맙소사! 내가 형님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해!”

당장 다른 무리들의 우리들이 우리들을 쏘아보기 시작했다. 아니, 젠장! 나에게 날 의심받게 되다니! 오른쪽 소매를 걷어붙인 샌슨이 씩씩거리며 말했다. “하아! 이건 말도 안 되지. 칼이 우리 영주님의 이름을 잊을 리가 있나?”

우리 샌슨은 당장 욱하고 나서려 했다. 바로 그때 내가 외쳤다.

“잠깐! 너, 이봐, 후치! 젠장. 이게 무슨 노릇이람. 날 불러야 되다니. 어쨌든, 우리 아버지 이름이 뭐지?”

소매를 걷지 않은 후치가 피식 웃었다.

“자식아, 장난치냐? 우리 아버지는…………, 아버지는…………….”

소매를 걷지 않은 후치의 얼굴이 갑자기 창백해졌다. 저 후치가 갑자기 괴로운 표정을 짓는 것을 보는 것은 통쾌하면서도 동시에 나까지 괴로워지는 일이었다. 정말

지금 누군가 나에게 미쳐버리는 기분에 대해 질문한다면 난 아주 상세하게 대답해 줄 수 있을 거 같다. 소매를 걷지 않은 후치는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자, 잠깐! 이건 말도 안 돼. 내가 우리 아버지 이름을 기억 못하다니………….”

그러자 소매를 걷지 않은 제레인트가 오른쪽 소매를 걷은 제레인트에게 질문했다.

“저, 이보세요. 나 이거 참. 야! 너, 결국 나니까 기분 나쁠 거 없지? 말해 봐. 우리 수도원에서 기르는 오리의 숫자는 모두 얼마지?”

참 대단한 질문이다. 오른쪽 소매를 걷은 제레인트는 턱을 치켜들면서 대답했다.

“그야 열두 마리지.”

“틀렸어! 저번에 그 수련사…………가 아플 때 그 오리를 잡았어! 그걸 기억 못하는군? 그런데, 잠깐. 그 수련사가 누구더라?”

그러자 왼쪽 소매를 걷은 제레인트가 대답했다.

“혹스였어. 그래. 혹스가 아팠지. 그런데 그때 오리를 잡아 먹였나?”

왼쪽 소매를 걷은 샌슨이 외쳤다.

“이런, 말도 안 돼! 야! 너! 우리 경비대 대원 총수가 얼마야?”

지적을 받은 자는 소매를 걷지 않은 샌슨이었다. 그는 턱을 부들부들 떨더니 힘없이 말했다.

“이 무슨 웃기는…………. 기억이 안 나.”

“말도 안 돼! 이 자식아! 경비 대장이 대원 총수를 모른다구!”

“제기랄, 기억이 안 나! 이 자식아, 그럼 너도 말해 봐라. 대원들 중에 은도금 롱소드를 가진 사람은 누구누구야?”

“뭐야? 그거야 해리와 터너지!”

그러자 오른쪽 소매를 걷은 샌슨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어? 잠깐. 자렌과 터너 아니야?”

그러자 소매를 걷지 않은 샌슨이 머리를 짚으며 말했다.

“맙소사…………, 이 멍청한! 잠깐. 내가 날 욕하는군. 해리, 자렌, 터너 전부 다야!”

우리는 서로를 얼떨떨하게 쳐다보았다. 그때 오른쪽 소매를 걷은 이루릴이 말했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에 있는 세 명의 자신들은 각자 상대가 가지지 못한 기억들을 가지고 있군요. 바꿔 말하자면 각자 자신의 얼마씩은 잃은 상태이군요.”

뭐라구?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우리들은 말을 잃은 채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그때 왼쪽 소매를 걷은 이루릴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런 것 같군요. 그렇다면 우리는 현재 세 개로 분리되어 있는 셈이군요. 서로 상대가 가진 것은 가지지 못한 부분들이 된 셈이군요.”

“멈춰!”

어느 칼인지는 모르겠지만 칼이 갑자기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다른 칼들도 허옇게 질린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당신…………, 내가 생각하는 걸 생각하는 모양이군요?”

“역시 같은 사람이라 서로 잘 통하는군요.”

오른쪽 소매를 걷은 네리아가 질린 얼굴로 오른쪽 소매를 걷은 칼에게 말했다.

“칼 아저씨, 뭐예요? 왜 그러죠?”

오른쪽 소매를 걷은 칼은 입술을 깨물면서 말했다.

“서로에게 질문하지 마시오. 그럴수록 잊어버리게 됩니다. 난 방금까지 어떤 기억을 가지고 있었소. 그런데 여러분들이 서로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내 기억을 잊어 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단 말이오.”

“예?”

“잠깐 기억을 되짚어 보시오. 중요한 기억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소. 어쨌든 뭔가 도저히 떠오르지 않는 기억이 있을 거요.”

“맞소.”

그 대답은 칼의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 있는 칼들은 모두들 입을 다물고 있었다. 세 무리의 우리들은 기절해 버리고 싶은 심정으로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 다.

네 번째의 우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