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6권 – 제11부 : 앞을 보지만 뒤를 생각한다 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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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라자 6권 – 제11부 : 앞을 보지만 뒤를 생각한다 5화

5

넥슨 휴리첼은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그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우리들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어쩐지 이 사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 멍청한 입 좀 다물어! 이 소란통에서 일어나는 먼지는 모조리 그 멍청한 입 안으로 들어가겠군! 넥슨은 그렇게 가만히 선 채 입을 벌리고 우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나는 오크 하나가 넥슨의 등 뒤로 달려드는 모습을 보았다.

“조심해! 뒤!”

말하기가 무섭게 하슬러가 뒤로 돌아서 넥슨에게로 돌진했다. 하슬러는 넥슨을 옆으로 밀어내며 달려들던 오크의 글레이브를 튕겨올렸다. 카캉! 그는 튕겨올린 롱소 드를 그대로 한 동작으로 내리그어 오크의 얼굴을 갈라놓았다. 그러면서도 하슬러는 전혀 소리를 내지 않았다.

하슬러에 의해 옆으로 밀쳐진 넥슨은 잠시 주춤거렸다. 그는 잠시 허리를 굽힌 채 멍청하게 서 있었다. 저 작자가 정말! 치매에라도 걸렸나, 갑자기 왜 저래? 그때 넥 슨은 갑자기 고개를 홱 돌렸다. 그는 우리들을 노려보며 이를 박박 갈고 있었다.

“너! 죽어랏!”

저 미친 자식이! 넥슨은 롱소드를 머리 위로 들어올린 채 앞으로 돌진해 오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나는 살인이 꼭 죄가 되는가 하는 따위의 생각을 떠올리며 바스타 드를 뒤로 당겼다. 이 자식아! 사실 너무 길었어! 이대로 내려치기만 하면!

그때 무엇에 홀린 것인지 나와 넥슨 사이로 오크 하나가 뛰쳐나왔다. 그 녀석은 곧장 넥슨을 찔러 들어갔고 넥슨은 그대로 롱소드를 내리쳤다. 휘익! 글레이브와 오 크의 팔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취이에에엑!”

오크는 잘린 팔을 위로 쳐들면서 비명을 질렀다. 넥슨은 검을 내려친 자세 그대로 앞으로 돌진하여 어깨로 오크를 받아 쓰러지게 만들었다. 넥슨이 그대로 롱소드를 아래로 찌르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난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제미니가 앞발을 들어올리며 거세게 투레질을 했다. 힝힝힝힝힝!

정신이 팍 들면서 난 고삐를 당겼다. 다행히 굴러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내 정신은 현재 땅에 떨어져 구르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시야 옆으로 번뜩이는 반사광에 놀라 옆을 보니 오크 한 놈이 제자리에 서 있는 날 노리고 찔러 들어오고 있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난 바스타드를 옆으로 뿌렸다. 타당! 글레이브가 튕겨지는 느낌 이 손으로 전달되어 왔다. 그리고 그때 샌슨이 고함을 질렀다.

“넥슨! 당신들을 구하러 왔다! 그러니 지금은 싸우지 말자! 만일 덤빈다면 이대로 놔두고 가겠다!”

그리고 길시언도 옆으로 다가오는 오크를 베어넘기면서 고함을 질렀다.

“서둘러! 오크들이 크레센트를 형성한다!”

크레센트라구? 난 좌우를 급히 돌아보았다. 소름이 쫙 돋는걸? 우리 일행과 넥슨 일행 사이에서 빠져나가며 좌우로 갈라졌던 오크들은 그대로 비스듬히 달리면서 우 리 옆을 지나쳤다. 놈들은 이대로 우리 뒤를 가로막아 포위진을 만들려는 것이다! 난 넥슨을 향해 손을 저으며 고함질렀다.

“빨리 와! 도와주려고 왔단 말이야!”

“뭐…………야? 도와준다? 도와준다고?”

저게 도대체 인간이야, 트롤이야! 넥슨의 손과 가슴, 얼굴은 오크의 피로 범벅이 되어 악마 같은 모습이었다. 그런데 저 악마 녀석은 멍한 눈으로 날 바라보며 내가 한 말을 반복하면서 정말 악마 같은 소행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사람을 미치게 만들잖아? 젠장! 그때 네리아가 외쳤다.

“자아아크! 네 멍청한 마스터를 어서 이리로 데리고 와! 지금밖에 기회가 없어!”

그러자 넥슨의 그림자에서 솟아나기라도 하듯 자크가 홀연히 모습을 나타냈다. 넥슨은 뭔가 이상한 것을 느끼고는 뒤를 돌아보려 했지만 자크는 대거의 손잡이로 넥 슨의 목 뒤를 후려쳤다. 퍼억! 넥슨은 그대로 고꾸라졌고 자크는 그를 붙잡아 어깨에 둘러메며 외쳤다.

“하슬러 씨! 갑시다! 앞을 뚫어요!”

하슬러는 고개를 조금 끄덕인 다음 곧장 우리 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오크들은 우리들이 합류하지 못하도록 그 사이를 가로막으려 했으나 하슬러의 팔이 움직이 는 앞에서는 그 어느 오크도 3초 이상 서 있을 수 없었다. 하슬러는 달리면서 그 속도에 팔힘을 덧붙여 롱소드를 휘둘렀고 오크들은 모두 팔과 글레이브가 한꺼번에 날아가버렸다. 어떤 오크는 상하반신이 완전히 분리되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 뒤로는 넥슨을 둘러멘 자크가 달려왔다.

오크들은 내 쪽으로도 달려들었다. 그러자 제미니는 다시 앞발을 들어올리며 거세게 날뛰었고 오크들은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격한 고함소리와 비명소리, 그리고 말 울음소리에 귀가 멀어버릴 것 같았지만 난 떨어지지 않도록 애쓰며 날아오는 글레이브를 쳐냈다.

하슬러는 순식간에 나에게 다가오더니 날 흘긋 쳐다보다가 그대로 뒤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 뒤로 자크가 다가오더니 넥슨을 집어던지듯이 건네며 외쳤다.

“마스터를 부탁해!”

난 안장 앞에 넥슨을 받고는 그대로 제미니를 돌게 만들었다. 그리고 칼이 외쳤다.

“모두 반전! 네리아와 운차이! 좌우로 벌려 네드발 군이 달릴 길을 뚫는다!”

뒤로 돌아보니 자크는 길시언의 등 뒤에, 그리고 하슬러는 샌슨의 등 뒤에 올라타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 일행은 모두 뒤로 돌아 달려가기 시작했다.

“취이익! 잡아랏! 저놈들을 붙잡아!”

그러자 네리아는 앙칼진 고함소리로 응수했다.

“이 자식들아! 레이디에게 다가오려면 양치질부터 해!”

네리아는 그 긴 트라이던트의 물미 부분을 두 손으로 잡고는 도리깨질하듯이 전후 좌우로 휘두르고 있었다. 트라이던트의 창신이 번뜩이며 네리아의 몸 주위로는 거 대한 원호들이 그려졌다. 반면 운차이는 검을 아끼고 있었다. 그는 검을 별로 휘두르지 않고 있다가 가까이 다가오는 녀석들만 하나씩 찔러버렸다.

“Ahn choudar!”

그러면서 네리아와 운차이는 좌우로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오크들은 물러나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부딪히며 쓰러졌다. 두 사람이 좌우로 밀어붙이면서 그 사이에 공 간이 생기자 칼과 샌슨, 길시언이 곧장 달려나갔다. 그리고 그 뒤로 내가 달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달려올 때와 정반대의 삼각형이 만들어졌다. 최전방에 칼, 그리고 그 다음에 샌슨과 길시언, 제일 뒤에는 네리아와 나, 그리고 운차이가 달리게 되었다. 오 크들은 주춤주춤 다가오려고 했지만 길시언과 샌슨은 흉흉하기 그지없는 자세로 밀어붙였다. 오크들의 형성되다 만 포위진은 여지 없이 박살났고 우리들은 그대로 쏜살처럼 달려나왔다. 뭐야! 성벽이 저렇게 멀었나! 이스트 그레이드도 운차이의 사막처럼 움직여버린 건가? 그 높아보이던 성벽이 지금은 신전 담벼락처럼 보였다. 젠장! 저기까지 어떻게 달려가지?

그때였다. 성벽 위에서 뭔가가 번쩍였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곧장 성벽 위에서 광선들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우리들의 머리 위를 지나쳐 등 뒤의 오크들 을 맞추기 시작했다. 아프나이델의 솜씨군! 뒤쪽에서 오크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취이이익!”

칼은 고개를 뒤로 돌리며 외쳤다.

“모두 일자로!”

이번엔 뭔 말인지 알았습니다! 진작 그렇게 쉽게 말하시지! 난 넥슨의 뒷덜미를 붙잡으며 급히 왼쪽으로 비스듬히 달려가기 시작했다. 네리아 역시 나와 같은 방향으 로 틀었으며 운차이는 오른쪽으로 뒤틀었다. 다섯 명의 기수는 이제 일직선으로 늘어선 채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달리게 되었으며, 칼은 롱 보에 화살을 걸었다. 아 니, 어쩌시려는 생각이에요? 다음 순간 나는 칼의 모습을 보다가 넥슨을 놓칠 뻔했다.

칼은 허리를 젖혀 말 위에 드러눕더니 턱을 한껏 젖히고는 뒤로 활을 쏜 것이다. 피융! 취에엑! 길시언은 기막힌 목소리로 말했다.

“칼! 당신 혹시, 우타크의 자손 아닙니까?”

칼은 다시 똑바로 앉으며 외쳤다.

“내 가계에 대한 설명은, 성 안에 도착한 다음으로, 미릅시다! 이랴아!”

그렇게 멀어보이던 성벽이 어느새 높이 솟아올라 있었다. 성벽 위에선 경비 대원이 손을 흔들고 고함을 질러대고 있었다. 그리고 사수들이 흉벽 위로 몸을 내밀더니 화살을 마구 쏘아대기 시작했다. 우리 머리 위로 화살의 비가 쏟아졌다. 화살들이 날아가면서 내는 윙윙거리는 소리가 이렇게 기분 좋게 들릴 수가 없는걸? 눈앞에 목 책이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그 뒤로 성문이 서서히 열리는 모습이 보였다. 이제 됐어! 그때였다.

“절대로 도망 못 간다아아!”

등골이 쭈뼛하다는 말이 있지. 난 겁에 질려서 뒤를 돌아보았다. 검은 투구의 오크가 옆에 있던 오크의 글레이브를 빼앗아 어깨 뒤로 당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 런, 젠장!

“카아아악! 핸드레이이이이크!”

또 저 소리! 검은 오크는 그렇게 기합을 지르면서 글레이브를 집어던졌다. 글레이브는 황야 위로 검은 뱀처럼 머리를 흔들면서 날아왔다. 휭휭휭휭!

“히히힝!”

왜 하늘이 땅 밑으로 내려오는 거지? 몸의 무게가 완전히 사라지는걸? 꽈앙! 순간 머리 뒤에서 충격이 오면서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다. 크허, 허헉! 뺨이 땅에 쏠리면 서 지독한 아픔이 느껴진다. 등이 거세게 부딪히면서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 온다. 제발 좀 멈춰! 나는 데굴데굴 굴러가면서 속으로 외쳤다. 하늘과 땅의 자리바꿈은 영원히 계속될 것 같았지만 곧 언제 그랬냐는 듯이 멈추었다. 오크들의 고함소리. 퉤! 쓰러진 채 입 안으로 들어온 흙을 뱉어내니 피와 침이 섞여나왔다. 간신히 고개 를 들어보았다.

“이힝힝, 힝힝! 푸르릉! 힝힝힝힝!”

뭐가 뭔지 모르겠어. 저건 뭐야? 땅에 쓰러져 발버둥을 치면서 피를 콸콸 쏟아내는 저 덩치 큰 생물은 뭐지? 저 생물은 계속해서 발을 구르며 일어나려고 하는군. 왜? 일어나지 못하지?

“으……………, 으으. 제, 제미…………니?”

말인가? 저건………… 내가 타던 그 제미니? 그런데 왜 누워 있지? 말이 눕기도 하던가? 게다가 왜 저렇게 피를 흘리고 있는 거지? 어? 저건・・・・・・ 글레이브? 제미니는 계 속해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그것은 그저 다리를 흔드는 동작에 불과했다. 제미니가 왜 못 일어나는 거야?

“제미니이이잇! 으아아아아!”

“힝힝힝! 이힝, 힝! 푸르르릉!”

“으아아! 으아아! 으아아아아아!”

난 손을 짚으며 일어났다. 하지만 다리로 땅을 짚는 순간 발이 미끄러졌고 나는 다시 콰당 쓰러져버렸다. 난 다시 몸을 돌렸다. 휘청거리며 일어났다. 하지만 여전히 다리는 말을 듣지 않았고 나는 또다시 땅에 얼굴을 박으며 고꾸라졌다. 컥! 숨이 막히는걸. 다시 팔을 휘둘러 땅을 짚는다. 쓰러진다.

“카아아악! 헐헐헐르르르. 쿨럭쿨럭!”

땅을 짚는다. 다시 쓰러진다. 몸부림을 치며 팔을 휘젓는다. 다리로 땅을 밟으며, 하지만 다시 앞으로 쓰러진다. 몸을 뒤튼다. 일어나야 해. 일어나야 해! 다시 무서운 속도로 땅에 쓰러진다.

“이힝힝힝힝!”

제미니가, 제미니가! 이런, 빌어먹을! 일어나야 한다구! 콰당탕! 이 개 같은 땅이 왜 이래!

“후치야아악! 아악! 후치얏!”

네리아의 울음 섞인 비명. 제미니, 제미니! 난 일어날 거야. 그러니 너도 일어나란 말이야! 이… 개같은! 이 때려죽일 말대가리야! 어서 일어나! 콰당. 일어나! 몸부

림. 튀어오르는 핏방울. 일어나! 콰당. 입 안에서 단내가 팍 피어오른다. 목으로 들어오는 엄청난 먼지. 목이 콱 막힌다. 눈물. 부옇다. 귓가가 뜨겁다. 일어나아아아아!

“크아아아아! 으아아아아!”

하늘이 새카맣다. 벌써 밤인가?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수십 개의 팔이 나에게 날아든다. 저건.. 오크의 팔인가? 쿠우욱!

“카아악! 이 교활한 인간놈! 감히, 취이익! 어딜 뛰어들어!”

컥, 어허억. 그만…………, 그만 걷어차. 그만 때려. 그만해. 그만해…………. 제발 그만해. 그만하란 말이야!

“이 오크 새끼야! 그만하란 말이야! 우으으으아!”

몸이 솟아오른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검은 투구의 오크. 놈의 콧잔등을 쥐어박는다. 손등이 뒤틀려 나가는 느낌. 오크는 피를 흘리며 쓰러진다. 입술 사이로 들어와 혀에 닿는 피맛. 위장을 모조리 뒤집어 입 밖으로 토해 버리고 싶은 구토감. 옆으로 몸을 날린다. 어깨에 뭔가가 부딪힌다. 그대로 밀어버린다. 약속이나 한 듯이 날아 드는 글레이브. 서걱! 귓가가 시원한 느낌이 든다. 동시에 불같이 뜨겁다.

바닥에 떨어진 귓불을 본다. 조금 전까지 내 귀에 달려 있었던 것인데 지금은 땅에 떨어져 있다. 저게 내 귀인가? 저렇게 생겼었군. 신기하네. 자기 귀는 볼 수가 없 어야 되는 거 아냐? 오래 보고 있을 수가 없다. 오크의 글레이브를 잡는다. 오크는 눈을 커다랗게 뜨더니 빼앗기지 않으려고 반항한다. 놈을 매단 채로 허리를 뒤틀어 버린다. 귀에서 볼을 타고 피가 흐르는 모양이야. 목이 뜨끈한걸? 관자놀이를 타고 눈으로 피가 들어온다. 세상이 붉다.

“체에엑! 카악!”

“노래! 노래를 불러라, 이 새끼들아! 취이이익? 취이익! 취익취익거리는 노래를 불러봐!”

오크의 글레이브가 날아온다. 다리가 끊어지는 고통을 무시하면서 허리를 뒤튼다. 글레이브가 지나가게 하고, 균형을 잃은 오크의 정수리에 손에 든 글레이브를 꽂 아준다. 푸아악. 놈이 쓴 투구가 찢어지며 머리와 투구 사이로 피가 흐른다. 놈의 노란 눈알이 피에 젖는다. 놈은 그대로 허물어진다. 바스타드를 뽑아드느라 멈칫하 는 사이에 다른 쪽에서 웬 놈이 글레이브로 어깨를 내려찍는다. 상반신이 휘청거린다. 바스타드를 두 손으로 쥐고 그대로 돌기 시작한다. 주위의 오크들이 베어져나 간다. 갑옷이 깨지고 찢어지는 소리. 오크들의 노란 눈알, 핏발 선 노란 눈알들이 끝도 없다. 그것들이 피에 젖는다. 한 오크는 턱이 날아가버린다. 오크는 다시는 입 을 다물지 못하게 된 것을 알아차리고는 찢어지는 비명을 지른다.

“노래를 불러라!”

“케에에엑!”

“음정이 틀렸어! 가사가 틀렸다구! 취익거려야지!”

“크우우욱!”

“틀렸다구!”

쾅! 뒤통수에 충격이 느껴진다. 땅이 위로 솟아오르고, 곧 허리와 어깨, 허벅지 쪽으로 고통이 온다. 오크들이 내 몸을 걷어차면서 내는 소리가 왠지 낯설다. 욕설, 고 함소리, 그리고 비명소리 등이 가늘게 이어지다가 나는 암흑 속으로 빠져든다.

난 암흑이 싫어.

내 봄날은 잔혹한 비극의 전주곡이었나.

꽃잎이 무리지어 날아오를 때 난 행복했네.

“취이익! 뭐라는 거야?”

여름은 옷을 벗고 날아오르는 나의 여신

뜨거운 공기 속에 나는 숨이 막혔지.

“취익! 괴물 초장이! 뭐야? 이 자식 지금 뭐라고 떠들고 있지?”

봄도 아름다웠지. 여름도 즐거웠지. 하지만

내 주위는 어느새 낙엽. 난 가을에 서 있네.

누구나 한번은 맞이하는 마법의 가을이여

태양을 향해 달리는 말을 타고 나 동으로 달렸네.

찰싹! 볼에서 불이 튄다.

“취익! 이놈아, 뭐라고 떠드는 거냐!”

“검은 흙 위를………… 추수의 들판을……… 반짝이는 개울을……… 황량한 산봉우리를………….”

“이놈이 미쳤나? 취이익! 뭐야?”

“적막의 대지를………… 고통의 바위 언덕을…………… 나 달리고 또 달렸네.”

퍽! 숨이 막혀서 더 노래를 부를 수 없다. 누군가 창대로 내 배를 찍은 모양이다. 눈꺼풀이 어디에 있더라? 이 눈꺼풀이라는 녀석은 잠시만 신경 쓰지 않으면 곧 어딘 가로 달아나버리는 놈이라서.

눈을 뜨니 붉은 가슴이 보인다. 저건 내 가슴이군. 엉망진창이야. 볼품없군. 피와 흙이 묻어 끔찍스러울 정도인 데다가, 어디서 붉은 빛이 비치고 있는 것인지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얼굴을 들어올린다.

수백 마리의 오크들. 그 검은 얼굴들 위로 하늘엔 황혼이 펼쳐져 있다.

팔을 들어보려 하다가 내 몸이 나무 기둥 같은 곳에 묶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얼굴을 들어 석양을 바라본다. 노을이 지는 붉은 하늘에 태양은 붉은 불덩어리지만 눈을 부시게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 아래 오크들의 머리가 수도 없이 보인다. 위쪽을 보는 것이 낫겠군. 왼쪽 눈은 눈꺼풀이 부은 건지 거의 떠지질 않는다. 그래서 내 눈에 들어온 광경은 거리 감각이 맞지 않아 몽환적이다. 난 서편의 붉은 하늘을 바라보며 말한다. 목이 갈라지는 느낌이다.

“신사 숙녀 여러분………….”

오크는 어이없는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다. 태양을 등지고 있는 놈들의 얼굴은 검다. 그리고 그 가운데 하얀 이빨들이 번쩍인다. 멋진 이빨들이군.

“부디 뒈지시길…….”

오크들은 입을 쩍 벌린다. 기막힌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녀석들의 얼굴은 그대로 희극이다. 난 바싹 마른 입술이 그대로 갈라지려 하는 것을 무시하면서 미소를 짓는 다.

“에헤헤헤헤…”

“카아악! 이놈!”

오크 한 놈이 창대를 들어 내 복부를 찌른다. 퍼억! 웃다가 그대로 숨이 막힌다.

“코올록, 쿨럭쿨럭, 커, 커허어억!”

배가 뚫린 거 아냐? 목구멍에서 위액이 넘어오다가 만다. 미치겠다. 차라리 토해 버렸으면…………. 콧속이 간질거리고 목구멍이 타는 듯이 쓰리다. 그리고 머리는 쾅쾅 울리고 배에서는 찢어지는 고통이 온다. 온몸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나는 고통의 4중주로군. 젠장. 오크들은 일제히 떠들기 시작한다. 광란스럽군.

“이 자식! 취에에엑! 이제 좀 어울리는군!”

“저 인간 죽여! 왜 살려두는 거야! 취이이익! 죽여버려! 그 냄새나는 말처럼!”

냄새나는 말………… 말이라구?

“컥! 제미니?”

오크들은 화들짝 놀라면서 날 바라봤다. 그때 제미니는? 검은 투구의 오크가 던진 글레이브……………?

“내 말, 쿨럭쿨럭! 내 말은 ………….. 어떻게 되었어?”

가만히 서서 날 바라보던 오크들은 잠시 후 히죽거리며 웃었다. 그러더니 놈들은 곧 나에게 야유를 보내기 시작했다.

“아, 그 말? 고기가 퍽도 질기더군, 퉤! 취이익!”

“낄낄낄! 취취취익! 먹을 게 많은 점은 좋던데 말이야. 취엑!”

그러자 한 놈이 배를 쑥 내밀더니 길게 트림을 하는 것이 보였다. 거어어억. 다른 놈들은 그 모습을 보며 손뼉을 치며 웃어대었다. 이놈들이 제미니를 잡아………… 먹었 다고? 잡아먹었어?

“으아아아아! 제미니! 제미…………닉, 우크, 쿨럭!”

“제미닉? 취익! 제미닉? 쿠할할할할하!”

오크놈 중에 한 녀석이 내 흉내를 내면서 우는 시늉을 해보였다. 그러자 다른 놈들은 쓰러질 듯이 웃어젖혔다. 저 새끼들을 당장! 난 온몸을 비틀어보았지만 아픔만 더해갈 뿐이다.

“이・・・・・・ 죽일 놈들아.”

“아? 취잇, 취! 왜? 그 말을 도로 내놓을까? 웩, 웨에엑!”

오크 놈은 입안으로 손을 집어넣더니 게워놓는 시늉을 해보였고 그러자 다른 오크들은 박장대소했다. 웃어? 웃는다고? 네놈들이 지금 웃는 거야?

“이 죽일 놈들, 으아아아! 크헐, 쿨럭! 이거 풀어! …………주, 죽여버릴 거야!”

철썩! 가까이 있던 오크 한 녀석이 내 뺨을 올려붙인다. 오크의 거친 손바닥이 스치고 지나가자 살갗이 그대로 일어나는 것 같다.

“도로 내놓는다는데, 취! 불만인가 보군? 취이익!”

난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리는 것 외에는 아무 일을 할 수 없었다. 주위의 오크들의 웃음소리는 점점 높아만 가고 있다. 이렇게 되다니. 미안해, 제미니. 제미니. 이 멍 청한 말아, 미안해!

그때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오며 다른 목소리들이 모두 기어들어가게 만든다.

“닥쳐! 취이익! 지저분한 짓들 하지 마! 치칫, 취이익!”

눈가가 불타오르는 느낌이다. 힘들게 눈을 뜨지만 눈에는 눈물이 가득해서 앞이 보이지 않는다. 눈을 깜빡거려서 눈물을 흘려내니 볼이 뜨겁다. 볼의 상처에 눈물이 들어가나 보군.

“취이이잇! 어라? 눈물을 질질 흘리는 건가? 한결 보기 좋군, 취이익!”

잔인하게 웃고 있는 오크가 보인다. 다른 오크들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는 얼굴이 보인다. 그 검은 투구의 오크다. 저놈이야! 저놈이 글레이브를 던졌지!

“이봐. …………미안한데 당신의 위대한 이름을 좀 알려주겠어?”

“취이익! 난 아그쉬! 아그쉬다, 인간!”

“아……, 그래? 그럼. 쿨럭쿨럭. 후우. 커험! 위대한 아그쉬여. 후치 네드발이………… 당신께 충성과 사랑으로써 제안하는데·· 다른 오크와 키가 같아지도록 할 생각 없나?”

“취이이? 키가 같아진다?”

“그 위대한 대가리를 잘라내면… 어떻겠냐고 묻는 거야.”

콰앙! 아그쉬의 주먹이 내 얼굴에 꽂혔다. 눈앞이 빙빙 돈다. 꽉 감은 눈꺼풀 위로 쏟아지는 석양의 햇살 때문에 검붉은 암흑 속에 별이 보인다. 머리가 떨어져나간 것 아닌가?

“취이, 취이! 이건, 너의 용기에 대한 찬양이다! 크핫하하하. 배짱이 좋은 꼬마군. 취이익!”

“아……, 고마워. 하지만 한 번만 더 그따위 찬양을 하면…… 넌 죽어.”

“끝까지! 이 썩어빠진 오크놈들보다, 취이이잇! 백 배는 마음에 드는 꼬마군.”

“취이익! 아그쉬! 말 조심해!”

“닥쳐! 취익!”

아그쉬는 다른 오크들처럼 글레이브를 들고 있지는 않았다. 녀석은 마치 인간처럼 허리에 큼직한 브로드 소드를 차고 있었는데 지금 그 브로드 소드를 뽑아들고는 대화에 끼어든 오크를 죽일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 오크는 콧김을 풀풀 뿜어내면서 뒤로 물러났다. 욕지기 나는 꼴들이군. 난 다시 얼굴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 다. 핏빛 석양이 내 늘어진 머리카락에 부딪혀 반짝이고 있었다. 핏방울 때문인지 땀 때문인지 머리카락들은 볼에 붙어 얼굴을 간지럽히고 있었다. 제미니. 아름다운 황혼이지? 하늘 위를 달릴 땐 가끔 내 생각을 해다오. 제미니.

그런데 귀가 왜 이리 아픈 거지? 아……………, 아까 잘려나갔지. 그때, 오크와 싸울 때. 그때 우리는 오크와…………

우리 일행들은?

난 퍼뜩 정신을 차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먼저 내 몸이 완전히 꼼짝도 할 수 없도록 통나무에 묶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크 녀석들은 팔을 묶어놓는 데 그치지 않고 가슴과 허리도 밧줄로 칭칭 감아놓은 데다가 발목도 묶어놓았다. 이건 거의 오거를 묶어놓는 수준이군, 그래. 왼쪽을 돌아보니 또 다른 통나무 하나가 보였고 거 기에 묶여 있는 남자가 보였다. 순간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시체 아닌가? 하지만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넥슨이었다.

넥슨도 나와 비슷한 정도로 묶여 있었다. 기절한 거야, 그냥 고개를 숙이고 있는 거야? 넥슨은 석양의 햇살을 정면으로 받아 온몸이 불그스름하게 바뀌어 있었는데 자세히 보자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옷은 갈가리 찢어지다가 만 수준이었고 피가 엉겨붙은 머리카락은 앞으로 축 늘어져 있었다. 난 그의 손을 유심히 살폈다. 다행이 군. 넥슨은 OPG를 끼고 있었다. 그럼 내 손도 마찬가지겠군. 아무리 그래도 이런 밧줄을 끊을 수는 없겠지만 우선 다행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좌우를 돌아보았지만 오크 외엔 다른 것이 보이지 않았다. 그럼 나머지 일행들은 성문으로 들어갔군. 아그쉬는 날 보면서 배부른 미소를 지었다.

“그래! 췻췻, 취이익! 너희 간교한 인간놈들의 상투 수단이지! 이익! 네 친구들은 널 버리고 갔어!”

“…………..내 친구들은 그게 날 기쁘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지.”

“기쁘다고? 췻취익! 기쁜가? 기쁘냐고?”

커헉! 이 자식이! 아그쉬놈은 칼자루로 명치를 콱 찍었다. 숨이 막혀서 말도 안 나온다. 목구멍에서 허파가 튀어나올 정도로 격렬한 기침을 한 다음, 난 아그쉬 녀석 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조언하겠어. 지금………… 날 죽이는 것이 나을 거야.”

“취이잇? 왜지?”

“그러지 않으면 네가…………… 죽을 테니까.”

말을 하고 곧 이를 꽉 깨문다. 이상하다? 왜 창대나 주먹 같은 것이 날아오지 않는 거지? 난 눈을 떠 아그쉬를 바라보았다. 아그쉬는 웃고 있었다.

“그래? 취키키키! 킷키키! 누가 영원히 살 수 있지?”

“뭐라구?”

“널 죽이지 않는다고 내가, 취이익, 영원히 살 수, 취이킷! 있을까? 키키키! 취익!”

이거 뭐하는 녀석이야? 이거 헬턴트식 오크잖아? 눈꺼풀이 멍들어 앞을 보기도 힘들었지만 난 최대한 눈을 치켜떠서 아그쉬를 바라보았다. 놈은 밝게 웃고 있었다. 햇살을 등지고 있어 어두운 얼굴, 게다가 오크의 얼굴에 저렇게 밝은 표정이 떠오를 수 있다는 것이 의외였지만.

아그쉬는 킬킬거리는 것은 멈추더니 엄숙하게 말했다.

“취이이익! 영원히 사는 것은, 저 위대한 성자 핸드레이크, 취취, 그뿐이다. 그 외에 누가 시간의 수레바퀴에서, 취익! 자유로울 수 있단 말인가.”

뭐라구? 윽! 눈을 크게 뜨자 지독한 아픔이 느껴졌다. 내가 뭐라고 할 사이도 없이 아그쉬 놈은 오른팔을 높이 들어올리더니 외쳤다.

“핸드레이크 만세!”

그러나 주위의 오크들은 전혀 동조하지 않았다. 놈들은 그저 아그쉬를 조용히 바라볼 뿐이었다. 하지만 오크들이 저렇게 조용하다니? 저 침묵이야말로 완벽한 경의 의 표현인 것 같은걸. 아그쉬도 오크들의 침묵에 대해 별 기분 나쁜 기색 없이 팔을 도로 내렸다.

그때였다. 잔뜩 쉰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원히 살지는 못하지만…………… 영원히 죽을 수는 있지.”

나와 아그쉬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넥슨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였다. 그러나 그가 말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신처럼 영원성을 획득할 수 있지. 쿡, 쿨럭쿨럭. 어어흠! 죽어서 말이야.”

아그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넥슨을 바라보고 있었다. 못 알아듣겠지?

“누가 재가………… 프리스트 아니랄까 봐. 후우, 후우. 이것봐………… 오크들에게 설교를 하시는 건가? 이 엉터리 재가 프리스트………….”

갑자기 넥슨은 고개를 똑바로 들고 아그쉬를 바라보며 말했다.

“핸드레이크가… 아, 아직 영원성을 획득하지 못했다고………… 쿨, 쿨럭. 말했나?”

들어올린 넥슨의 얼굴에선 두 눈이 불꽃처럼 번뜩이고 있었다. 그래. 그거 정말 궁금한 건데 마침 잘 물었다. 난 넥슨에게 퍼부어줄 욕을 잠시 목구멍 속에 보관해 두 고는 아그쉬를 바라보았다. 아그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직 죽지 않았느냐는 질문이라면, 취이익! 당연히 그렇다! 위대한 성자 핸드레이크는, 췻취익! 절대로 죽지 않는 불사신이다!”

“왜? 왜 죽지 않는다는 말이지?”

“그야 그분은 위대한 마법사이시니까! 취이이익!”

“네가 보았나? 네가 살아 있는 핸드레이크를 보았, 컥! 콜로콜록! 보았냐고, 쿠우울럭! 카아악!”

넥슨은 말을 제대로 끝맺지 못한 채 격렬한 기침을 쏟아내었다. 그의 입에서 침과 핏방울이 함께 튀어나오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측은한 생각도 든다. 하지만 넥슨은 기침을 쏟아내면서도 끝까지 아그쉬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그쉬는 불쾌한 눈으로 넥슨을 바라보며 말했다.

“보아야 안단 말인가? 취이익! 안 보고도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인간. 취이, 취이! 앞을 보지만, 뒤를 생각한다면, 뒤에 있는 것도 볼 수 있다.”

주위의 오크들이 감탄하는 표정으로 아그쉬를 바라보았고 아그쉬 역시 우쭐한 얼굴이 되어 어깨를 으쓱거렸다. 대단하군. 오크의 입에서 나온 말로는 믿기 어려울 정도야. 하지만 그 말은 잘못 인용한 거야. 원래 그 말 뒤에는 다른 말이 이어지게 되어 있지. 그런데 저 녀석이 어떻게 루트에리노 대왕의 말을 알고 있는 것일까? 넥슨은 한참 동안 아그쉬를 노려보더니 곧 실망한 얼굴이 되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기침 소리를 몇 번 내다가 곧 조용해졌다. 저 빌어먹을 작자는 영원의 숲에서 분리되고 나서는 도대체 멍청하기 짝이 없는 행동만 하는군. 난 타는 입술을 힘들게 놀려 말했다.

“이봐아…………, 아그쉬. 푸후우. 오크가 왜 핸드레이크를, 휴우우, 친구라고 부르는 거지?”

아그쉬는 나에게 고개를 돌리더니 코를 벌렁거리며 말했다.

“친구를 친구라고 부르지, 취이익! 뭐라고 부르나?”

“핸드레이크는… 인간이잖아. 커험! 컥! 게다가 루트에리노 대왕을 도와서, 쿨럭! 오크들을 수도 없이 죽였는데…..?”

난 질문을 하다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아그쉬는 입을 쩍 벌려 그 멋진 이빨들을 나에게 선보이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아그쉬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날 바라보더니 말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취에엑?”

“내 말이…………… 틀렸나?”

“취이이이익! 핸드레이크가 대항한, 취익! 것은 드래곤 로드다! 오크가 아니다! 취익! 오크가 아냐!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취이이! 핸드레이크는 드래곤 로드와, 취이 치치칫! 싸운 것이다!”

뭐라구? 난 아그쉬를 똑바로 바라보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아그쉬의 모습은 계속 두 개, 세 개로 보였다. 그 말이 맞기는 하지만, 그렇지만? 이 멍청한 오크 녀석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아무래도 다시 정신을 잃으려는 것 같은데. 아그쉬의 목소리가 희미해지기 시작한다.

“그분은 우리에게, 취이익! 헤아릴 수 없는 은혜를 베푸셨다. 취칫! 우리를 드래곤 로드에게서, 취이익! 구출했다! 그분이 아니라면 우리 오크가 어떻게 살아남았단 말인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렇게 흔들면서………… 말하지 마.

귀가 미치도록 아프다. 나도 모르게 더러운 욕설을 뱉어내며 눈을 뜬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검은 색 배경으로 붉은 색의 동그라미들 뿐이다. 일렁거리는 붉은 동그라미들. 왠지 고향 언덕에서 바라보던 반딧불들 같아. 어지럽군. 난 다시 욕지거리를 뱉었다.

“시끄러워.”

넥슨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려온다. 네가 지금 나에게 시끄럽다고 했냐?

“누구한테 시끄럽다고 하는 거야?”

고개를 돌려보니 어둠 속에서 넥슨의 모습이 희미하게나마 보인다. 좀더 눈에 초점을 맞추고 보자, 주위는 어느새 밤이 되었고 오크들이 군데군데 모닥불을 피워둔 것이 보였다.

제길. 반나절 동안 묶여 있었던 몸은 내 몸 같지가 않다. 손끝이나 발끝에 감각이 없다. 가슴은 어디에 있고 허리는 어디에 있지? 크윽! 그럼 반나절 동안 묶인 채 서 있었던 건가? 온몸의 피가 몸 아래로 몰린 것 같은 기분이 드는걸. 퉁퉁 부은 다리에 밧줄이 쏠리면서 지독한 아픔이 느껴진다. 그리고 차가운 밤바람이 불 때마다 몸 은 정신없이 떨린다. 하지만 그것은 고통의 연속일 뿐이었다. 몸이 떨릴 때마다 밧줄은 살갗을 파고들 듯이 몸을 죄어왔다. 차라리 죽고 싶다…………. 빌어먹을! 웃기지 마! 아직은 살아 있고 앞으로도 살아 있을 거야!

다시 한번 눈에 힘을 준다.

오, 제기랄! 차라리 오크놈의 얼굴을 보고 싶어.

넥슨 녀석이 날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시체 같은 눈에선 침침한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렇게 무표정한 얼굴을 쳐다보자니 소름이 돋아오른다. 입이 저 절로 열린다.

“네놈 때문에 내가 이 지경이 되었다. 내 말은 오크들의 간식거리가 되었고, 더 원하는 것이라도 있냐?”

믿기 어려울 정도로 쉬어버린 목소리. 이거 내 목소리 맞나? 기침은 사그라들었지만 말을 할 때마다 입술이 터지는 느낌이 든다. 말라붙은 입술을 적시려 해보았지 만 침도 나오지 않는다.

넥슨은 한참 동안 날 쏘아보더니 다시 고개를 숙였다.

“미친 꼬마놈. 네놈이 좋아서 뛰어들어 놓고는 누굴 탓하는 거냐.”

“넌 오크에게 고마워해야 돼.”

“뭐라구?”

“난 지금 어떻게 달아나는가 하는 것보다 어떻게 널 죽고 싶을 만큼 괴롭힐까 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단 말이다. 오크들이 날 이렇게 칭칭 묶어두지 않았다면 난 지금 이라도 네 빌어먹을 목구멍에서 살려달라는 애원도 안 나오게 될 때까지 때려줄 거야.”

“더러운 입에서 더러운 말만 나오는군…………… 왜 그렇게 날 싫어하는 거지?”

“뭐야?”

“아둔한 놈. 왜 날 싫어하냐고 물었다.”

저 자식이 누구 복장 터져서 죽는 꼴이 보고 싶은 건가? 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려다가 멈추었다. 아차, 저 녀석 영원의 숲에서 자신을 잃었지? 갑자기 놈에 대한 분 노가 방향을 잃는 것 같다. 저놈에게 그 자신도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의 행적에 대해 비난해야 되나? 이런………… 우라질.

“말해 주지. 넌 사실 내 아들이다.”

“웃기지 마.”

“네가 나에게 저주를 걸어서 내 모습이 이렇게 어리게 바뀐 거야. 기억나지 않느냐, 아들아?”

·진짜냐?”

“당연히 거짓말이지.”

“이……, 망할 놈!”

난 힘없이 웃었고 넥슨 녀석도 미소를 지었다. 제길. 꼴 좋군. 저 때려죽이고 싶은 녀석과 같이 오크 무리 한가운데 묶여서 너절한 농담이나 늘어놓으며 웃고 있다니. 같은 입장에 빠졌다는 것이 이렇게도 희한한 작용을 일으키는 건가? 난 웃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 눈이 나빠진 건가? 주위엔 모닥불밖에 보이지 않았다. 몇 마리의 오크들이 좀 떨어진 위치에 앉아서 뭔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 쪽을 흘긋흘긋 바라보 고 있었다. 하지만 그 외에 다른 오크들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 녀석들이 도대체 다들 어디로 간 거지?

주위를 둘러보느라 고개를 움직이니 곧장 귀에서 다시 통증이 느껴졌다. 난 눈살을 찌푸리며 넥슨에게 질문했다.

“망할. 지독하게 아프군. 그런데, 당신. 도대체 기억하는 것이 무엇무엇이야?”

넥슨은 공허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내가 좀더 큰 목소리로 말할 것이냐, 아니면 나직한 목소리지만 욕지거리를 섞어서 화를 돋우는 식으로 말할 것 이냐를 놓고 고민할 때 넥슨은 입을 열었다.

“희다.”

“뭐라구?”

“기억…………. 하얗다. 대미궁에서 말한 대로. 머릿속이 지독하게 희다.”

흰 것은 네녀석의 뒤집어진 눈알이 희지. 쳇.

“대미궁엔 왜 간 거지?”

넥슨의 고개가 움직이며 그는 날 똑바로 쳐다보았다. 녀석의 눈은 여전히 증오의 빛이 담겨 있었지만 왠지 무언가를 갈구하는 듯한 눈이었다. 망할. 증오가 잊혀지는 군. 자신의 5분의 3을 잃어버리고 저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묶여 있는 것을 보니 동정심이 일어나려고 하잖아. 젠장.

“말해 봐. 그건 잊지 않았을 테잖아. 그럼 내가 뭔가를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모르고. 기억을 되찾게 해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말꼬리가 흐려진다. 설마 넥슨이 기억을 되찾을 수 있을까? 넥슨의 기억은 망각된 것이 아니라 아예 소멸되었다. 그 기억은 죽은 그의 다른 부분과 함께 영원히 사라 졌을 것이다. 그런데 뭘 되찾는다는 거지?

넥슨은 말을 시작했다. 그의 어조는 어두웠다.

“빌어먹을. 네놈을 아무리 노려보아도 감정이 일어나질 않아.”

“감정?”

“넌 상상도 할 수 없을 거다, 이 꼬마 녀석아. 아무리 쳐다보아도 감정이 일어나질 않는 사람을 바라보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날 안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사람인데, 그런데 마주보고 있어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사람을 보는 것이… 그것이 어떤 것인지. 이건 완전한 타인을 보는 것과 달라. 감정이 전달되어 오고 눈 빛이 전달되어 오는데, 난 아무런 기억이 떠오르질 않아.”

별로 할말도 없군. 난 차분히 기다렸다. 그건 당신 스스로가 감당해야 할 일이야. 어쩔 수가 없어. 지금의 나로선 입에 발린 말 해줄 기운도 없다구. 그럴 기운이 있어 도 해줄지 의문이지만.

넥슨은 포기한 듯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난 여덟 별 중 남은 하나, 드래곤의 별을 찾기 위해 대미궁에 간 것이다.”

“잠깐. 뭐라구? 여덟 별이 뭔데?”

“드래곤 로드의 여덟 별…………… 넌 그것을 모르는가? 아, 그래. 아무도 모르지. 하지만 난 그것을

갑자기 넥슨의 말이 끊어졌다. 그는 입을 조금 벌린 채 초점없는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을………… 그것을 누구에게…………? 누구더라?”

“누구에게 들었단 말이야? 하슬러? 시오네?”

넥슨의 머리가 급격하게 움직였다. 그는 날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시오네? 그게 누구냐? 말해! 그게 뭐야?”

맙소사. 저 녀석 도대체 뭘 기억하는 거야? 난 고개를 좀 가로저으려다가 기겁하며 멈추었다. 목에서 뼈가 부러지는 느낌이 왔던 것이다.

“이봐. 당신이 바이서스를 전복시키려 했다는 것은 잘 알고 있겠지?”

“물론이야! 그것은 계속 머릿속을 맴돌고 있어. 꿈에서도 지워지지 않아. 그런데 시오네는 뭐야?”

“시오네는 자이펀의 간첩이야. 당신을 돕고 있었는데.”

“자이펀의? 왜?”

“맙소사. 잘 들어봐, 이 작자야! 자이펀은 바이서스와 전쟁 중이잖아. 그런데 당신이 바이서스를 뒤집어버리면 자이펀으로서도 좋은 일이잖아? 그러니까 자이펀은 당신이 반역을 일으키도록 도와주고, 대신 당신은 왕이 되면 자이펀에 대해 사과하고 항복 선언을 하는 거야. 이해가 돼?”

넥슨의 눈에서 동조의 빛이 떠올랐다.

“그런가? 괜찮은 계획이군. 괴뢰 정부의 수립이란 말이지.”

“그래. 내가 아는 정도는 거기까지다. 나와 넌 서로 반대 입장이거든.”

“그랬나? 그렇겠군. 그래서 날 싫어하는 모양이군. …그래서, 시오네라는 그 자이펀 간첩이 날 돕고 있었단 말이지? 내가 반역을 성공시킬 수 있도록. 음. 괴뢰 정 부를 수립해서.”

넥슨은 마치 절대로 잊으면 안 된다는 듯이 단어 하나하나를 정성스럽게 되뇌었다. 불쌍한 녀석. 잃어버린 부분을 보완하려는 건가?

“그래. 그런데 드래곤의 별이라는 것은 뭐지? 여덟 별이라니, 그건 루트에리노 대왕의 여덟 별과 무슨 상관이 있는 거야?”

순간 넥슨은 교활한 눈으로 날 바라보기 시작했다. 저 눈빛은 마음에 안 드는데. 하지만 아무리 그래봐야 넌 기억을 잃었어. 내게서 무슨 정보를 긁어내려면 너도 아 는 것을 말해야 할걸.

“쿨럭, 커흠, 흠. 그………….. 그런데 시오네라는 사람은 왜 나와 함께 있지 않는 거지? 영원의 숲에서 나와 함께 있었던 것은 하슬러와 자크, 그리고 레니라는 그 계집애 뿐이었다. 그 사람은 왜 없었지?”

이놈이? 나도 그렇게까지 오냐오냐 해줄 수는 없어.

“질문을 하려면 먼저 내 질문에 대답해.”

“이 못된 꼬마놈, 어서 말해!”

“닥쳐! 대미궁에서의 기억은 남아 있을 텐데? 난 너에게 겁먹은 적 없어.”

얼씨구? 네가 날 죽일 듯이 바라보면 어쩔 건데? 운차이의 눈은 어떤지 알아? 난 똑같은 눈으로 넥슨을 바라봐 주었다. 넥슨은 이를 북북 갈더니 이빨 사이로 새는 소리로 말했다.

“네녀석은 정말 죽이고 말 테다. 이 꼬마놈아!”

“하, 내가 영원성을 획득할 수 있도록 해주시겠다고?”

넥슨은 움찔했다. 제대로 된 대답이었나 보지? 잘 봐둬. 득의만만한 웃음이란 바로 이런 거야. 넥슨은 내 얼굴을 바라보더니 곧 시무룩한 얼굴이 되었다.

“여덟 별, 그리고 드래곤의 별이 뭐야?”

넥슨은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루트에리노 대왕의 여덟 별이라는 것은 들어봤겠지.”

“바이서스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이야기잖아.”

“천만에! 누구나 잘못 알고 있는 이야기지!”

“뭐라구?”

“키키키・・・・・・, 그 정식 명칭이 뭔지 알고 있나?”

“정식 명칭이라니. 그런 것이 있었던가?”

“그래. 그 정식 명칭은 여덟 별의 추구자다. 에잇 스타 시커. 그걸 줄여서 여덟 별이라고 부르게 되었지.”

에잇 스타시커? 그게 줄어서 에잇 스타라구? 넥슨은 말을 이어나갔다.

“여덟 개의 별을 추구하는 사람들이지. 그래서 그 숫자를 맞춰서 여덟 명의 기사가 있었고. 하지만 그 이야기는 잊혀지고 변형되어서 여덟 별이란 여덟 명의 기사를 가리킨다고 알려졌지. 난생 처음 들어보는 말일 테지?”

“어, 그래. 그런데 원래의 여덟 개의 별이 뭔데?”

넥슨의 머리가 휘익 움직였다.

“내 차례다, 꼬마놈!”

수탉이 지렁이를 쪼기 전에 머리를 움직이는 것이 꼭 저렇지. 무섭도록 빠르게 움직이는 머리. 하지만 상체는 꼼짝도 하지 않고. 보기 싫은 놈.

“뭐가 알고 싶지?”

“시오네라는 그 간첩은 왜 나와 함께 있지 않은 거지?”

“휴우. 내가 알기로 그 여자는 국왕 전하를 암살하기 위해 바이서스 임펠로 갔다고 알고 있어.”

넥슨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나지막했다.

“국왕 암살?”

“그건 당신들로서는 비밀이었겠지. 그래서 우리들은 잘 알지 못해. 하지만 당신은 델하파에서 우리들과 싸울 때는 시오네와 함께 있었지. 그런데 그 다음부터 시오 네가 보이지 않았어. 그리고 며칠 후 바이서스 임펠에서는 임펠리아 침투 소동이 일어났지. 그러니 간단한 거잖아. 당신은 델하파에서 시오네와 헤어진 거야.”

“델하파? 그 세이크럴라이즈된 도시 말인가? 거기서 너희들과 내가 싸웠나?”

“그렇지…… 잠깐! 당신 세이크럴라이즈에 대해 알고 있나?”

“뭐? 어, 그야 알고 있지…….알고 있다? 안다?”

넥슨은 멍한 얼굴이 되어 날 바라보았다. 그 눈은 날 향하고 있었지만 초점은 거의 맞지 않았다. 저 불안한 얼굴이 진짜 넥슨 휴리첼의 얼굴인가? 내 OPG를 자기 것 처럼 빼앗고, 길을 막는 아이를 말로 밟아 죽이고, 평화스러운 델하파 시를 아무런 이유도 없이 세이크리드 랜드로 만들고, 영원의 숲으로 부하들을 끌고 가서 다 죽 게 만든 남자의 얼굴인가?

“이상하군. 세이크럴라이즈는 자이펀에서 개발한 기술이야. 당신이 그걸 기억한다고? 그럼 자이펀과의 협력 사항도 기억한다는 거야?”

“자이펀? 협력? 몰라. 모르겠다. 하지만 세이크럴라이즈는 기억난다. 그래…………, 그날 새벽. 난 게덴의 디바인 마크를 묻고…………. 잠깐, 디바인 마크를 묻었을 때… 혼자였던가? 아냐. 혼자가 아니었어. 난 그것을 누군가에게서 받았지. 그건 내가 만든 것이 아니고…………. 그래. 그것에 대해 누군가에게 질문했지. 이 디바인 마크는 어 떻게 만들어진 것인가를 물었지.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왜 게덴의 디바인 마크를 묻었지? 그걸 왜 묻어야 하는 거지?”

“이건 정말이지…………, 세이크럴라이즈는 기억한다면서!”

넥슨은 마치 야단맞는 어린애처럼 애처로운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이봐, 왜 게덴의 디바인 마크를 묻는 거지? 난, 난 그것을 받았어. 그리고 물었지. 이것을 준비하기 위해 어떻게 했냐고. 그래. 물었어! 물었다는 것은 그것이 내가 준비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일 테지? 그렇지, 꼬마야?”

“후치라고 불러. 제길. 그 디바인 마크를 묻는 것이 의식의 마지막, 그러니까 의식의 증거야. 의식이 치러졌다는 것을 증명하고 그 땅은 세이크리드 랜드가 되는 거 지.”

“아, 제물처럼 말인가?”

“그래. 아, 아냐. 난 신학에 대해선 잘 몰라. 그러니까 제물처럼 신력에 대한 반대 급부인지, 아니면 무슨 도장처럼 그냥 증거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어. 그건 당신이 더 잘 알 텐데?”

넥슨은 곰곰이 생각하는 얼굴로 질문했다.

“다른 제물 같은 것은 없나?”

“난 잘 모른다고 했잖아. 에, 내가 아는 것은 이렇다. 난 어떤 영지에서 그 시오네라는 여자가 디바인 마크를 사용해서 그 영지를 세이크리드 랜드로 만드는 것을 보 았지. 하지만 나보다 똑똑한 누군가가 말하길 그 힘은 디바인 마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50명의 꼬마들의………… 뭐라더라? 무슨 신앙인데?”

“전신앙?”

“아, 그래. 전신앙. 그게 뭔데?”

넥슨은 침착하게 설명했다.

“전신앙은 합목적성이 배제된 순수 형태의 신앙을 말한다. 어린 아이의 순수한 신앙은 방향성이 없어. 어른들이라면 에델브로이나 그랑엘베르나 레티 등 정해진 신 을 알고 그 신을 이해하기 때문에 따를 수 있지. 그 신앙은 방향성이 뚜렷해. 하지만 아이들의 신앙은 단지 무섭고 위대한 것에 대해 맹목적으로, 막연하게 따르지. 그 래서 그 순수한 신앙의 힘을 이용할 수 있다면 어느 신에게든 그 힘을 바칠 수 있다. 조악하게 설명하자면 한마디로 이런 거야. 어린 아이에게 오크를 가리켜 저것은 트롤이라고 가르칠 수 있겠지?”

“아…………, 그럼 그 신앙, 아니 전신앙은 잘만 유도하면 어느 신에게든 바칠 수 있는 힘이 된다. 이 말이야?”

“그래. 더군다나 완전히 맹목적이고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는 순수 형태의 신앙이기 때문에 강력하다. 그렇지만 어린 아이들의 전신앙을 유도하는 것은 어려운 일 이다. 전신앙을 유도할 ………시술자? 제사장? 어쨌든 그 시행자도 어린 아이의 마음을 가져야 되기 때문이지. 그런데 50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동원되었다고?”

“그래. 어라? 이상하군. 델하파에서는 어린 아이의 납치 같은 것에 대해선 들어본 적이 없는데? 그리고 델하파뿐만 아니라 일스의 도시들 곳곳에서 동시에 그런 일 이 일어났다고 들었는데…………. 이상하군?”

“뭐야? 무슨 말이야? 어린 아이가 동원되지 않았다고?”

“그래. 칼라일 영지에서는 어린 아이들이 사라졌어. 하지만 일스에서는 그런 일이 없었는데?”

넥슨은 다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그는 가볍게 대답했다.

“쳇. 간단하군. 자이펀 꼬마들이다.”

“뭐?”

“아이들을 50명이나 납치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야. 네가 말하는 그 영지라는 것은 필시 시골이었을 테지?”

“그런 셈이지.”

“하지만 일스 곳곳에서 그런 일을 하는 것은 어렵지. 간단해. 자이펀 꼬마들을 동원해서 그 일을 한 거야. 의식은 아마도 자이펀 국내에서 진행되었겠지. 그리고 그 디바인 마크는 의식의 증거, 그리고 신력이 나타날 장소를 표시하기 위해서 일스로 운반되었을 테고. 꼬마들을 끌고 다니거나 납치하는 것보다는 디바인 마크를 운반 하는 것이 더 쉬우니까. 그거 굉장한 무기로군. 디바인 마크를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야! 잠깐, 이거 좀 묻자. 그 의식에 동원된 꼬마들은 어떻게 되는 거야?”

“뭐라구? 어, 글쎄. 잘 모르겠는걸. 전신앙이 발달해서 신앙이 되는 거니까. 음. 아마 평생 동안 회의적인 인간이 되겠지. 무엇에 대한 신뢰나 믿음을 가지기 어려운 인간. 그런 사람들이 있잖아?”

“이런…………, 맙소사! 그런 잔인한 일을?”

“그게 어때서. 고대 의식에서는 아이들을 통째로 제물로 삼는 경우도 있는데. 훨씬 신사적인 방법이군, 그래.”

넥슨은 히죽히죽 웃기까지 하면서 말했다.

“설마 그거 진심은 아니겠지?” “진심이야.”

“이 때려죽일 가짜 성직자야!”

“뭐라구?”

“아무것도 못 믿는다며? 부모도 못 믿고, 애인도 못 믿고, 심지어 자기 자신도 못 믿으면서 평생 동안 살게 만드는 것이 신사적인 일이라고! 그게 성직자의 입에서 나 올 소리냐?”

넥슨은 갑자기 어깨를 심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밧줄은 꼼짝도 하지 않았고 그러자 넥슨은 나와 같은 방법을 사용했다. 고함을 지른 것이다.

“그게 어때서! 세상에 믿을 것이 어디 있어? 모두가 거짓이고 모두가 환상이라는 주장도 있지 않아? 살아남는 것만 해도 다행이지! 살아가는 데 뭐 특별하게 고상한 방법이 있을 것 같아?”

“고상한 방법은 없더라도 더 비참한 방법은 있어! 그 꼬마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그런 비참한 일을 당하게 만드냐구!”

“내가 했냐! 시끄러워!”

나와 넥슨은 잠시 말을 잊은 채 서로를 쏘아보았다. 놈의 눈빛은 아무래도 비정상이다. 그 입은 합리적인 듯이 말하고 있긴 하지만 그 내용은 아무리 생각해도 비정 상이다. 저게 자신의 절반 이상을 잃어버린 증후인가? 아니면 원래 저따위 녀석이었나? 알 수 없는 일이군.

저만큼 멀찍이 앉아 있던 오크들은 우리가 떠들자 곧 고함을 질러왔다.

“취이익! 시끄러워, 인간들! 그 나무 기둥 침대가 편한가 보지? 취췻! 더 편하게 만들어줄까?”

숨을 고르는 것이 참 어렵군. 몸의 고통도 고통이지만 미쳐버린 것이 분명한 녀석과 말을 나누는 고통도 만만치 않은걸.

“젠장. 좋아. 어쨌든 델하파에서 당신에게 그 디바인 마크를 건네준 것은………… 아마도 시오네가 당신에게 주었겠지.”

넥슨은 다시 반색을 했다. 말 한 마디에 저렇게 곧 밝은 얼굴이 되는 것을 보니 정말 동정심을 지울 수가 없군 그래.

“시오네가? 그 간첩이 준 거라구?”

“조금 전까지 이야기를 나눴잖아. 그건 자이펀에서 만들어내는 거라구. 그러니까 자이펀 간첩인 시오네가 당신에게 줬겠지. 왜 줬냐고는 묻지 마. 내가 하는 말은 전 부 추측이야.”

“이런 제기랄! 그럼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건가?”

“사실? 흥. 누가 사실을 알지? 네가 조금 전에 한 말 아니야? 모두가 거짓이라면서?”

나는 매몰차게 쏘아붙였고 그러자 넥슨은 턱을 한 방 맞은 표정이 되었다. 정말 저 표정 바뀌는 거 눈 뜨고 못 보겠군.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좀 덜 딱딱하게 바뀐다. “어쨌든 내 추측이 그렇게 틀리진 않을 거야. 당신이 그 디바인 마크를 준비하지는 않았잖아? 누가 줬다며? 그런데 게덴의 디바인 마크는 자이펀에서 개발해 내는 거니까 시오네가 줬겠지. 시오네와 당신 사이에 무슨 계약이라도 있었던 모양이군.”

“계약……, 계약이라구? 무슨 계약?”

“아앗, 이 빌어먹을! 시오네가 그것을 왜 당신에게 줬는지 뭔가 추측되는 것이 없어?”

넥슨은 다시 백치 같은 얼굴로 멍하니 날 바라보았다. 무슨 말인지 도통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틀림없군. 정말 골치 아픈 노릇이군.

“이봐, 계약이라면, 그러니까………… 시오네는 내가 괴뢰 정부를 수립하게 도와준다고 했는데…………… 그게 일스의 도시를 세이크럴라이즈하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지?” “알 게 뭐람. 이제 내 차례야.”

넥슨의 얼굴에 또다시 노여움이 떠오른다. 무슨 표정이든 마음대로 지어봐.

“원래의 여덟 별이 뭐지? 루트에리노 대왕은 그것을 찾기 위해 여덟 기사를 구성한 것인가? 아, 그리고 말해 둘 것이 있는데, 만일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느껴지면 나도 거짓말을 하겠어. 그런 느낌만 오면 아무 내색 없이 당신의 과거에 대해 거짓말을 해버릴 거라구. 알겠어?”

넥슨은 이를 북북 갈면서 날 바라보았다. 난 잠시 고개를 숙여 몸을 묶고 있는 밧줄을 내려다보았다. 한심스럽군. 이런 꼴이 되다니. 그런데 우리 동료들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성 안에서 어쩌면 내 구출 계획을 세우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크레블린 대장이나 안티고어 시장이 그것을 허락할까? 칼은 이성적인 척하지만 내 가 보기엔 전혀 그 반대다. 틀림없이 네드발 군을 구출해야 된다고 떠들어대고 있을 것이다. 음. 왠지 구차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할 수 없잖아. 구해 줬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날 구하기보다는 얼마 남지 않은 크라드메서의 웨이크닝을 대비해 달려가는 것이 낫지 않을까. 오늘 하루라는 시간이 속절없이 지나가고 말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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