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6권 – 제11부 : 앞을 보지만 뒤를 생각한다 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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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복잡했다. 어떻게든 살아나고는 싶지만, 솔직하게 그렇지만. 그래서 난 넥슨의 말 중에서 몇 마디를 놓치고 말았다.
“…………그러니까 드래곤, 인간, 엘프, 드워프, 하플링, 페어리, 오크…………. 나머지 하나는 모른다. 어쨌든 땅 위에 발 디디고 사는 생물들 중 말을 하는 생물이 여덟 있지. 말을 하고 생각을 하는 생물 여덟.”
어라? 무슨 말이지?
“갑자기 웬 박물학이지?”
“닥치고 들어! 음………… 뱀파이어나 라이칸스롭은 말을 하지만 생물이 아냐. 도플갱어도 말한다고 우기지는 마라. 그건 생물의 모습을 훔치는 거니까. 자유롭게 태어나 생각을 하고 말을 하는 지적 생물…………, 신을 우러러볼 줄 아는 생물이 여덟 있지. 자유롭게 태어나 자유롭게 걷는 종족.”
“토끼도 자유롭게 태어나 자유롭게 뛰어다녀.”
넥슨은 한심스럽기 그지없다는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왠지 바보가 된 것 같군.
“멍청아! 토끼는 자신의 자유를 인식하지 못한다. 그래서 토끼는 자신이 자유롭다는 사실에 대해 기뻐할 줄도 모른다. 무지와 자유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자유는 그것을 인식하고 추구할 줄 아는 자에게 의미가 있는 거야. 황소가 자유를 위해 노력하는 것을 본 적이 있냐? 네가 황소를 풀어주면서 ‘자, 자유다.’라고 말하 면 황소가 좋아할 것 같냐? 머리가 달렸다면 생각하는 데 써! 투구나 모자걸이로 사용하지 말고!”
“아, 그런 거야? 그런데 그 여덟 종족이 어쨌는데?”
“그 자유로운 여덟 생물의 운명을 결정하는 보석이 있다.”
“보석?”
“그래・・ 정확하게 보석인지는 알 수 없지. 하지만 보통 별이라고 부르는 것은 보석일 가능성이 높지. 그것을 여덟 별이라고 하니까. 그것은, 우주가 열릴 때, 유피 넬과 헬카네스의 존재마저도 희미할 때, 수탉이 첫 번째 울음을 터뜨리기도 전에, 새벽 으스름 속에 첫 번째 샛별이 떠오를 때…………, 이런 말은 쓸데없지. 어쨌든 그런 보석이 여덟 개 있다. 왜 있는지, 누가 그것을 만들었는지, 아니면 누가 만들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는지 모른다. 어쨌든 그것에 관련된 모든 사항은 우리들로서는 모 른다. 우리가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발달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깨닫고 그 존재 의의를 설명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박수쳐 줄까?”
“집어치워!”
“좋아. 그런데 운명을 결정하는 보석이라니. 그 희한한 보석이 뭔 일을 하는데?”
“그 종족의 창생 사멸을 결정하는 보석…………, 그 번영과 그 사상과 그 마음을 지도할 수 있는 보석. 스스로의 의지는 없다. 결정권과 그 실행권. 그리고 그 권리를 행사 하기에 충분하리만큼 엄청난 힘이 있을 뿐이다.”
“뭐라구?”
이 자식이 드디어 돌았구나. 아무래도 오크들이 저 녀석의 머리 쪽을 때린 모양이다. 난롯가의 옛날 이야기도 저렇게 황당하지는 않겠군.
“이봐, 잠깐만. 그러니까 그 잘난 보석만 가지고 있다면, 예를 들어 내가 드워프의 보석을 가지고 있다면 드워프들에게 ‘모두들 왼쪽 콧수염은 잘라내라.’라고 말할 경우 모든 드워프들이 왼쪽 콧수염을 잘라낸다는 말이야?”
“이 무지하고 어리석은 꼬마놈! 만물을 네 수준으로 끌어내려 시시덕거리지 마라! 그것이 신을 조롱하는 방법 중 가장 손쉬운 방법임을 모르느냐?”
“다른 프리스트가 그런 식으로 말했다면 나도 좀 부끄러워했을 거야. 하지만 너 따위 엉터리 재가 프리스트에게 그런 식의 비난을 들을 순 없어! 까불지 마! 네녀석 의 입으로 신을 말해? 그게 어린 꼬마를 말로 밟아 죽이는 녀석의 입에서………….”
입에서 나오던 말이 입천장쯤에서 붙어버린 것 같다. 넥슨은 허옇게 질린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뭐라구? 어린 꼬마를………… 어떻게?”
“제기랄. 네녀석의 과거 행적 중에 하나다. 믿지 못하겠다는 식으로 떠들어도 좋아. 난 사실을 말할 뿐이야. 넌 말을 달리다가 그 앞을 가로막는 꼬마가 있자 그대로 밟아죽이면서 달렸어.”
“새빨간…….”
“새빨간 거짓말이라구?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면 그렇게 생각해! 마음대로!”
넥슨은 입을 다물었다. 그의 고개가 아래로 꺾이고 그 어깨는 크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보인다. 잠시 대화가 끊기자 곧 볼을 후려치는 차가운 바람이 느껴진다. 밧줄의 고통이 다시 몸을 파고든다. 어떻게 몸을 뜨겁게 만들 방법이 없을까? 이 지독한 경련을 멈추게 할 방법이 없을까? 뒤로 묶인 손을 비틀어보려 했지만 도대체 내 손이 어디쯤에 붙어 있는지 감각도 오지 않는다. 엄지손가락의 감각을 찾아보다가 난 포기해 버리고는 고개를 돌려 넥슨을 바라보았다.
넥슨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었다. 밤의 어둠은 더욱 짙어져가는 것 같다. 하늘엔 별이 떠오르고 있었지만 넥슨의 얼굴엔 아무 별도 없었다. “미안해.”
넥슨은 대답이 없었다.
“제길, 미안하다구! 하지만 어쩌란 말이야. 그건 네가 저지른 짓이야. 내 눈으로 직접 보았어.”
“됐어. 입 다물어. 내 차례야.”
많이 쉰 목소리. 그 울림엔 왠지 물기 같은 것이 묻어 있는 듯하다. 녀석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자신이 그런 짓을 할 만한 사람임을 납득하고 있을까, 아니면 과거의 그런 자신을 부정하고 있을까.
“뭐가 묻고 싶지?”
“내가 왜 바이서스를 파멸시키려고 하는 거지?”
“왜?”
・보통 사람들끼리의 대화라면, 그거 정말 웃기는 질문이야. 하지만 웃지는 않겠어. 그렇다고 대답해 주겠다는 말도 못하겠는데.”
“나도 모르거든. 당신이 왜 그러는지. 당신이 한 몇 마디의 말은 기억나지만.”
“그게 뭐지?”
“당신은 아버지가 부당한 대접을 받는 것에 대해 염증을 내는 것같이 말했어. 그리고 그렇게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귀족이나 왕족으로 불려야 된다는 것에 대해서 도 마땅치 않게 생각했던 것 같아.”
“아버지라. 그렇군. 우리 아버지의 죽음은 부당한 것인가 보군.”
“그래…… 아니, 잠깐? 어라, 당신 아버지는 아직 죽지 않았는데?”
“뭐라구? 무슨 소리야!”
“당신 아버지가 죽지 않았다고 말했어. 로넨 휴리첼 백작은 아무르타트의 포로가 되어 있을 뿐이지 죽은 것은 아니야.”
넥슨의 눈자위가 커졌다. 그는 한참 동안 입술을 꿈틀거렸지만 말을 꺼내놓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간신히 말을 했다.
“이봐! 후치! 우리 아버님은 돌아가셨어. 난 다른 것을 몰라도 그것은 기억해! 우리 아버님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었단 말이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난 당신 아버지를 직접 보았어. 우리 고향에 찾아오셨을 때 말이야. 그리고 과거의 당신도 그것을 알고 있었어. 그러니까 분열 되기 전의 당신 말이야. 그런데 당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죽었다니?”
“뭐라구? 어, 어엇? 아냐! 우리 아버님께서는 분명히 돌아가셨어! 우리 아버님의 이름이 로넨 휴리첼인가? 어쨌든 그분은 죽었단 말이야!”
이 작자가 지금 모자란 기억 속에서 무슨 망상을 만들어내고 있는 거야? 기억의 파편들이 모이면 얼토당토 않은 새로운 기억이 생길 수도 있다는 말인가? “그럼 설명해 봐. 당신은 당신 아버지의 죽음을 어떻게 알게 되었지? 당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죽었다면 누가 이야기를 해줬겠지. 그것은 기억나는 거야?” “그것은…….”
넥슨은 다시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수명이 짧아지는 느낌이군, 제기랄. 이렇게 답답한 대화라니. 넥슨의 입에서 말들이, 아니 단어들이 띄엄띄엄 나왔다. “부당한 죽음…… 억울함…. 사무치는 슬픔………… 배신………… 이러한 기분들. 명료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 내 하얀 머릿속은 마치 안개 속 같아. 안개 속에서 보는 사물 들처럼 희미하고, 그 윤곽마저 흐리고……………. 느낌은 기억나. 하지만, 하지만…………… 우리 아버님은 돌아가셨어! 돌아가셨다구! 형제의 손에 죽음을 당했….!”
넥슨은 자신의 말에 깜짝 놀랐고 나 역시 크게 놀라버렸다. 무슨 말이야? 로넨 휴리첼 백작이 형제의 손에 의해 죽다니?
“이봐, 이봐. 당신 아무래도 뭔가를 크게 착각하는 모양이야. 당신 아버지의 형제가 있기는 있었어. 그러니까 당신의 삼촌이지. 그 삼촌 되는 사람이 죽기는 죽었어. 하지만 당신 아버지는 죽지 않았단 말이야.”
“삼촌이라구?”
“그래. 아니, 그것도 기억나지 않는 거야?”
“아니…………. 기억나지 않아.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구. 제기랄!”
난 한숨을 내쉬었다. 묶여 있는 몸 때문에 벌써 정신을 잃을 정도로 힘든데, 이미 정신을 잃어버린 작자를 상대해야 되다니.
“좋아. 후우우…………, 이 빌어먹을 밧줄! 하나씩 하나씩 설명할 테니까 잘 들어. 그러니까………….”
“잠깐.”
넥슨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었다. 뭐지? 난 입을 다물고 넥슨을 바라보았다. 넥슨은 말했다.
“이 소리 들리지 않나?”
“무슨…… 어랏?”
그러고 보니 들려온다.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것인지 꽤나 희미한 소음이다. 하지만 불길한 소음이다. 비명소리, 욕설? 그리고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도 들려오고 말 의 울음소리도 들려온다. 이게 무슨 소리지? 잠깐! 오크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이지?
이 오크놈들이 야습을 시도하는 것이구나!
서쪽이 어느 쪽이지? 낮에 내가 묶여 있었을 때 석양이 보였었지. 그러니까 정면이 서쪽이다. 그렇다면 칸 아디움이 있는 방향은 바로 내 정면. 지평선이 있으리라 생각되는 방향을 노려본다. 이윽고 지평선에서 가느다랗게 피어오르는 불길이 보인다. 마치 피부를 살짝 베었을 때처럼 빨갛고 가느다란 선이 보인다.
“저놈들이잇!”
“야습에 성공했군.”
“뭐라구? 아냐! 그럴 리가 없어. 어떻게 성공했다는 거야?”
“멍청한 꼬마놈.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불길이 오를 리가 없지.”
“이이익! 제기랄!”
저쪽에 있던 오크들도 그 소리를 들은 모양이다. 놈들은 벌떡벌떡 일어나더니 불길을 가리키며 소란을 떨기 시작했다. 커다란 웃음소리와 왁자지껄한 환성을 올리며 놈들은 어딘가로 뛰어갔다. 젠장! 그럼 칼은? 샌슨은?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된 거지? 어떻게 오크들에게 야습을 허용한단 말이야!
“보는 눈이 없군. 됐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난 넥슨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넥슨 녀석은 갑자기 앞으로 쓰러졌다. 쿠당탕. 놈은 바닥에 쓰러져 벌벌 떨면서 두 팔을 부둥켜안았다. “어떻게 된 거야? 밧줄은?”
넥슨은 벌벌 떨리는 팔을 힘 있게 잡으며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는 머리를 위아래로 심하게 흔들면서도 미소를 지었다.
“난 도둑이었다, 후치. 이까짓 밧줄이야 아까 낮에 끊어두었다. 다만 달아날 수가 없어서 지금까지 기다린 거지.”
“뭐라구? 넌 도둑이 아니야. 도둑 길드의 마스터지.”
“뭐야? 아니……………, 마스터가 도둑이 아니라고……………?”
넥슨은 다시 멍청한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저 자식은 도대체 남아 있는 기억마저도 뒤죽박죽이군.
넥슨은 물끄러미 날 바라보다가 간신히 한쪽 무릎을 세웠다. 그 다리는 곧 옆으로 미끄러졌고 그는 무릎을 강하게 부딪혔다. 무릎이 꽤 아플 텐데도 놈은 꼼짝도 하 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손으로 다리를 끌어당겨서 앞에 세웠다. 그 손과 다리가 움직이는 모습은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고는 조금 전까지 자신이 묶여 있던 그 나무 기둥을 붙잡으며 힘들게 일어났다. 다리가 부들부들 떨려서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그는 나무 기둥을 거의 안다시피한 채 쓰러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비틀거리며 나에게 다가왔다. 그의 늘어뜨린 오른손에는 어디에 숨겨두었던 것인지 조그만 나이프 하나가 들려 있었다. 도둑이라구? 어쨌든 도둑 길드 의 마스터다운 솜씨다. 아니, 오크들의 소지품 검사가 엉망이었는지도 모르지. 어쨌든 그는 힘들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더니 내가 묶인 나무에 왼손을 짚었다. 녀 석의 기분 나쁜 얼굴이 내 얼굴 바로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 나이프는 똑바로 내 가슴에 겨누어졌다.
“너……?”
뒤통수의 머리카락이 모두 하늘로 곤두서는 느낌이 들었다. 넥슨은 씩 웃더니 밧줄을 끊었다. 툭, 투둑. 다리를 묶고 있던 밧줄까지 모두 끊어지자 난 뭐라고 말을 할 새도 없이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무릎이 땅에 호되게 부딪혔지만 둔한 아픔 외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허리가 땅에 닿는 순간 난 이를 꽉 깨물었 다. 그곳은 오전에 오크에게 깨물렸던 곳이고, 제레인트와 샌슨이 치료해 주었지만 아직 낫지는 않았던 모양인지 지독한 아픔이 느껴졌다.
난 땅에 나동그라진 채 부들부들 떨었다. 손으로 몸을 만져보았지만 손의 느낌도 몸의 느낌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마치 다른 사람의 손을 보듯이 내 손놀림 을 바라보았다. 아무런 느낌이 없으니 그렇게 느낄 수밖에.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다. 다리 쪽의 감각이 느껴지지 않으니 어떻게 일어난다는 말이야.
“일어나.”
빌어먹을! 다 참아도 저 녀석이 저렇게 날 깔보듯이 바라보게 할 수는 없어. 난 팔을 휘둘렀다. 마구 휘두른 팔은 나무 기둥에 세게 부딪혔지만 전혀 아프지가 않았 다. 어쨌든 난 나무 기둥을 부여잡고 일어났다. 간신히 일어나는 순간, 발이 옆으로 미끄러지면서 다시 쓰러지고 말았다. 입술이 땅에 부딪히며 눈앞이 번쩍한다. “크……흐윽. 허어, 허어엇.”
“일어나, 멍청아. 도와주는 것은…… 한계가 있어. 후우, 후우. 결국엔 자신의 다리로 달리는 거다. 그렇지 않으면 도와주는 것은 소용이 없어!”
“다, 다, 닥쳐라………… 일어날 거야!”
“그럼 어서 뜻대로. 널 걷어차서………일어나게 만들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쿨럭쿨럭.”
망할. 대꾸는 꼬박꼬박 했지만 도대체 어떻게 일어나지?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은 얼굴에 말라붙은 땟국물과 함께 입 안으로 들어온다. 일어나다가 쓰러지면서 몸이 급격하게 움직이자 뱃속이 뒤집히는 것 같다. 부들거리는 팔을 끌어모아 무릎을 꿇은 채 간신히 네 발로 선다. 머리를 들어 넥슨을 본다. 제길! 넥슨은 나무 기둥에 기 대어 선 채로 날 보고 있었는데 그 시선이 꼭 발치의 개를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그, 그렇게 보고 있지만 말고, 좀, 도, 도와줘.”
“도와달라구? 웃기는………… 소리. 밧줄도 잘라줬다. 이젠 너의 발로………… 일어서라!”
“빌어먹을!”
다시 팔에 힘을 준다. 땅을 거세게 밀면서 허리를 튕겨올린다. 하지만 모래가 미끄러지며 발은 뒤로 밀려나버리고 배가 호되게 땅에 부딪힌다. 콰앙!
“어커억! 쿠울럭, 쿨럭!”
난 배를 부여잡은 채 몸을 웅크리고 나가떨어졌다. 배가 터지는 느낌이 들면서 동시에 목에서 토기가 올라온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오는 지독하게 쓴 맛. 눈앞이 흐 리다.
“케엘록, 켈록, 쿨쿨쿨……럭!”
넥슨의 모습이 비스듬하게 보인다. 그것도 두 개, 세 개로 보인다. 어지러워, 어지러워. 눈을 깜빡여 눈물을 짜낸다. 그러자 경멸스러운 표정으로 날 내려다보고 있는 넥슨의 얼굴이 보인다. 놈의 입술이 빠르게 움직인다.
“퉤!”
볼을 타고 흐르는 진득한 액체의 느낌. 난 어리둥절했다. 넥슨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죽어랏! 죽어버렷! 그게 네가 살아가는 방식인가? 그 정도에 포기할 목숨이냐! 그렇다면 지금 죽어버려!”
“이 새끼야아아! 넌 맨처음 볼 때부터 한 번도 마음에 든 적이 없어!”
어떻게 된 거지? 난 일어나 있었다. 내 머리는 땅에서 한참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다리엔 감각이 없다. 난 땅을 내려다보며 현기증을 느꼈다. 말도 안 돼. 17년 동안 이 높이에 있었던 머리가 이제야 현기증을 느낀다고? 하지만 현기증을 느낄 사이가 없다. 팔을 마구 휘저으며 상반신을 앞으로 날린다.
“으윽!”
이 자식아, 그 턱이 깨졌지? 난 이마로 넥슨의 턱을 받아올린 다음 그대로 머리로 넥슨을 밀면서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이야야야야야야!”
퍼퍼퍼퍼퍽! 내 주먹에선 아무런 감각도 오지 않는다. 하지만 난 여전히 머리로 넥슨의 가슴을 밀면서 그 복부에 주먹을 꽂아넣고 있었다. 어라? 내 주먹이 어떻게 저렇게 움직이지? 난 내 주먹을 관찰하면서 어리둥절해졌다. 그 주먹들은 미친 듯이 튀어나가면서 넥슨의 복부를 때려대었고 그럴 때마다 넥슨의 입에선 숨막히는 신
음이 터져나왔다. 하지만 그는 비명은 지르지 않았다.
퍽! 마지막 한 방을 꽂아준 다음, 나는 마침내 팔을 늘어뜨렸다. 난 팔을 늘어뜨린 채 머리를 넥슨에게 밀어붙인 자세로 간신히 쓰러지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넥슨은 나무 기둥과 나 사이에 끼여 쓰러지지 못하는 모습으로 늘어져 있었다.
그때였다. 저 아래에서 넥슨의 손이 올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면서도 난 팔을 늘어뜨린 채 꼼짝도 못하고 기대어 서 있었다.
콰앙! 넥슨은 두 주먹을 깍지 끼고 내 뒤통수를 내려친 모양이다. 아무 힘이 담기지 않은 주먹질이었지만 난 무릎을 꿇고 말았다. 두 팔을 허우적거리다가 넥슨의 허 리를 붙잡았다. 순간 목구멍이 타오르는 느낌이 든다.
“우우윽!”
무릎을 꿇은 채 넥슨의 허리를 부둥켜안고서 그대로 토해 버렸다. 넥슨은 피하지도 못한 채 발에 내 구토물을 뒤집어썼다.
“화려한 복수군.”
“젠장……, 우윽! 우…………… 미안해.”
“걸을 수 있나?”
“……죽지는 않을 거야.”
“좋아.”
목구멍은 쓰라렸지만 속은 후련하다. 난 나 스스로 놀랄 만큼 경쾌한 동작으로 일어났다. 사실 허우적거리며 볼썽사납게 일어난 것이지만 그렇게 유쾌할 수가 없다. 넥슨은 그대로 나무 기둥에 기대어 선 채 고개를 옆으로 꺾은 자세로 날 비스듬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난 입을 쓱 닦은 다음 그를 노려보았다. 넥슨의 입이 열렸다. “……어깨 좀 빌릴까?”
“킥킥킥…………. 좋아.”
넥슨은 아무런 표정없이 그대로 내게 허물어졌고 난 그의 오른팔을 붙잡아 목 뒤로 걸쳤다. 그리고 왼손으론 그의 허리를 감았다. 넥슨은 그렇게 나에게 기댄 다음 힘없이 손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무기는…………… 저쪽에 있다. 지금은 감시가………… 없을 거야.”
“쿨럭, 무기가 그대로 있을까?”
“녀석들에겐 나나 네놈의………… 무기가 너무 크다. 그대로 있을 거야.”
“알았어. 가자구.”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기댄 채 발걸음을 놀리기 시작했다. 오크란 오크는 모조리 칸 아디움으로 달려가버린 것인지 야영지에는 한 마리의 오크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그 괴괴한 야영지를 흐느적흐느적 걸어갔다. 넥슨이 말한 방향에는 솥이나 밧줄, 방패, 깨진 투구 등의 잡동사니들이 쌓여 있었고 넥슨의 검과 내 바스타드도 거기 꽂혀 있었다.
우리 둘은 각자의 무기를 회수한 다음 바닥에 주저앉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넥슨은 지저분한 잡동사니들에 등을 기댄 채 하얗게 된 얼굴에 식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아까 너무 세게 때린 모양인데.
“괜찮아?”
“그렇게 맞고 괜찮을 것 같나?”
“미안해. 그런데…, 어디로 가지?”
넥슨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반쯤 드러누운 자세 그대로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곧 막혀버릴 듯한 호흡을 계속하고 있었다.
난처하군. 가장 좋은 방법은 칸 아디움으로 달아나는 것이지만 만일 오크들이 칸 아디움을 함락시켰다면 우리들이 힘들게 그곳으로 걸어가 녀석들의 승전 기쁨을 두 배로 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다른 도시로? 난 이곳의 지리를 전혀 모른다.
“이봐. 당신. 이 근처 지리를, 쿨, 쿨, 알고 있나?”
“모른다…………. 하슬러가 알지.”
“없는 사람은 거론하지………… 말자구. 크허험!”
“말이 없는지 살펴봐.”
“당신 미쳤어? 오크들이 말을 탄다고?”
“….제길. 혹시 모르잖아! 찾아봐! 보지도 않고…………… 쿨럭! 크하악!”
넥슨은 머리를 구부려 무릎에 묻고는 격렬하게 기침을 했다.
“오크들의 야영지에서…………… 말을 찾아? 왜? 유, 쿨럭! 유니콘이나 드래곤은 어때?”
“너 자꾸 그 입을…………….”
“시끄러워! 지금 두 다리 외에는 탈 만한………….. 것이 없어. 그러니 어서 일어나…………자구.”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도 전혀 일어날 기운이 없다. 정말 다리를 타고 달려야 되나? 바람이라도 탈 수 있다면, 이대로 날개가 돋아 날아갈 수만 있다면… 바람? 잠 깐만. 바람을 탄다고?
“어, 잠깐! 당신 에어 엘리멘탈을 다룰 줄 알잖아?”
내 기대에 어긋나게시리 넥슨은 경멸스러운 눈으로 날 노려보았다.
“이…………, 미친 꼬마야! 쿨럭! 이 몸으로 기도를 하라구? 디바인 파워는 신의… 힘이지만, 컥! 커. 그것을 행사하는 것은………… 내 몸이다!”
“제길, 필요할 때 못 쓰는 힘 따위……… 개나 줘버려. 일어나자구. 태어날 때부터 선물받은………… 이동 수단이 있으니까.”
이건 마치 말 구유로 술을 마신 것 같군. 일어나자 머리가 윙 돌면서 균형 감각이 상실된다. 난 허리를 숙이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넥슨은 여전히 창백한 얼굴로 날 쏘아보고 있었다. 난 손을 내밀었다.
넥슨은 내 손을 바라보더니 힘겹게 손을 들어올렸다. 난 그 손을 붙잡아 그를 일으켰다. 넥슨 역시 일어나서 한참 동안 호흡을 고르기 위해 애쓰더니 날 쏘아보며 말 했다.
“언제까지로 할까?”
“뭐 말이야?”
“우리 휴전 말이다. 언제까지로 할까?”
“아까 낮에 당신을 구하러……………, 쿨럭, 달려왔을 때부터 난 영원히 휴전이야.”
넥슨은 어두운 눈빛으로 날 노려보다가 말했다.
“나 혼자 탈출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했다. 그래서 널 살려둔 거야. 하지만 난…… 쿨럭! 네녀석이 날 돕도록 하기 위해……..거짓말을 하진 않겠어.”
넥슨은 눈을 부라리며 빠르게 말했다.
“안전해지는 순간 널 죽인다. 알았어?”
“왜지?”
“뭐라구?”
“당신은 말했어……………..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고. 그것은 나에 대한 증오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이지. 아무런 증오도 없이… 날 죽이고 싶다는 거야?”
넥슨은 잠시 주춤거렸다. 망할 녀석. 그 주춤거림은 모든 것을 설명해.
“좋을 대로 해라. 날 죽이려 드는 순간이………… 커험! 네녀석 숨 넘어가는 순간이야. 그때가 되면 영원한 휴전 따위 없어. 이제 내 할 말은…………… 다했어.” “좋아. 어디로 가지?”
“저 도시로…………, 쿨, 쿨럭. 이 황량한 곳에서 말을 구할 수 있는 곳은 저기뿐이잖아.”
지독한 밤이었다. 밤이 아니라 지옥이었다.
캄캄한 공간은 끝이 없었다. 눈을 들어보아도 별이 보이지 않는다. 오크들에게 두드려맞고 하루종일 묶여 있었던 것 때문에 눈이 침침해진 때문일까? 보이는 것이라 곤 저 멀리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불길뿐이다. 불길만을 바라보며 이 캄캄한 암흑을 밟아 나가는 우리들은 마치 부나비 같다.
“저기로 가서 우리를 불사를까.”
넥슨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것이 마지막 발걸음인 것처럼 옮기고 있었다. 그가 비틀거릴 때마다 그를 부축하고 있는 난 휘청거리거나 땅 에 쓰러졌다. 몇 번이고 딱딱한 땅바닥에 얼굴을 비비고 나자 더 이상의 고통은 느낄 수 없을 것 같던 몸에도 새로운 고통이 느껴졌다. 이 녀석이 왜 이리 유난을 떠는 거지? 설마 영원의 숲에서 이곳까지 달려와서 지쳐버린 것인가?
“당신들……거기서 헤어진 다음 여기까지 달려왔나?”
“…….”
뭐라고 대답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의 고개가 조금 끄덕여진 것 같다.
“맙소사. 어떻게? 어떻게 사흘 동안 45펜큐빗이 넘는 거리를?”
넥슨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이거 정말 인간인가? 어떻게 그 거리를 사흘 만에 걸었다는 거지? 그때였다. 갑자기 넥슨의 팔이 미끄러지더니 그의 몸이 아래로 허물어졌다.
“어, 어엇!”
넥슨이 허물어지자 나 역시 기댈 데를 잃고 쓰러졌다. 콰쾅! 아하! 별이 다 어디 갔는가 했더니 저기 있군? 젠장. 난 넥슨을 깔아뭉갠 자세로 쓰러져 땅에 호되게 부 딪힌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이, 이것 봐. 괜찮아?”
・비켜.”
“그래, 비켰어. 그런데 괜찮은 거야?”
・잠시만. 잠시만 쉬어 가자.”
“쉬기는 뭘 쉬어. 이런 데서 이 몸으로 있으면 영원히 쉬게 될 거야. 계속 걷는 것이 낫지 않겠어?”
“못 걷겠어……. 제길.”
“젠장.”
어렵게 되었는걸. 사방이 탁 트인 황야, 밤의 어둠 외엔 몸을 가릴 것이 아무것도 없는 곳이다. 오크들이 밤눈이 좋던가? 어쨌든 그렇다면 어둠의 엄폐물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런 당황스러운 곳에서 숨어 있어봐야 얼마나 숨어 있을 수……………
나무?
황급히 고개를 돌리던 내 눈에 커다란 나무가 하나 보였다. 저건 뭐지? 좀더 자세히 살펴본 다음 나는 그것이 오크들이 끌고 온 공성추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 다면 저건 아프나이델에 의해 파손된…………, 어라? 그새 이렇게 많이 걸어왔나? 그럼 성벽까지 남은 거리는 얼마 되지도 않겠군. 물론 지금의 우리 두 사람에게는 엄청
난 거리일 테지만.
“이봐, 넥슨 넥슨! 저기 구덩이가 있다. 저기까지만 가자구. 거기서 좀 쉰 다음 새벽녘에 성으로 잠입하자.”
넥슨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누운 채 힘들게 팔을 들어올렸다. 난 무릎이 후들거리는 것을 무시하면서 그를 일으켜세웠다. 구덩이까지는…………… 스무 걸음? 서른 걸음?
젠장. 어둠 속에서 거리 감각이 엉망이었던 모양이다. 아니, 탁 트인 황야에서 삐죽하게 솟아 있는 것이라 더 가깝게 느낀 것인지도. 어쨌든 그곳까지 걸어가는 데 10분도 넘게 걸렸다. 10분간의 지옥 같은 고통 끝에, 나와 넥슨은 애인의 무덤 속으로 쓰러지는 처녀 같은 모습으로 구덩이 속에 들어갔다. ……………너무 점잖은 표현이 다. 들어가기보다는 빠졌다고 표현해야 옳다.
“크…… 커허억! 헉!”
넥슨은 구덩이 속에 나동그라지면서 목이 찢어지는 신음을 흘렸다.
“뭐야? 왜 그래?”
“빌어먹을………… 공성추에 부딪혔어.”
“공성추는 차라리 낫지. 글레이브에 부딪히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야.”
난 그렇게 쏘아준 다음 구덩이 속에서 고개를 내밀어 황야를 살펴보았다. 왠지 땅쥐가 된 기분이군. 난 눈 높이에서 황야를 바라보며 주의 깊게 살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성벽 쪽에선 여전히 불그스름한 불기운이 하늘로 뻗어오르고 있었다. 아무래도 오크들의 야습이 성공한 모양이다. 단순히 횃불만 가지고 저런 불기운 이 일어나지는 않을 테니까. 칸 아디움의 시내가 모조리 불타는 것 같은 불기운이었다. 게다가 성벽에 의해 가려진 것인지 하늘 중간쯤에서 갑자기 나타나는 붉은 기 운은 섬뜩하기까지 했다.
소리는? 멈춰 서 들으니 비명소리나 창검 부딪히는 소리를 확실히 구분할 수 있었다. 빌어먹을. 우리 일행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난 다시 몸을 돌려 구덩이 속으로 주르르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것은 그저 발에 힘을 빼고 중력에 몸을 맡겨버린 행동이었지만 지금으로선 가장 편한 방법이다. 몸이 엄청나게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나오기는 했지만. 그렇지 않아도 캄캄한데 구덩이 속이다 보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봐, 넥슨. 어디 있지?”
“구덩이 속에.”
“아, 고맙군.”
넥슨의 목소리는 왼쪽 전방에서 들려온다. 난 구덩이 벽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잠들면 안 돼. 알았지? 날씨가 굉장히 춥다구. 이런 밤에 이런 곳에서 이런 몸으로 잠들면 간단하게 체온을 빼앗기게 될 거야.”
“네 녀석의 그 수다스러운 입이 있는데… 어떻게 잠이 들겠냐.”
“고맙다고 느껴지지?”
“빌어먹을 꼬마놈………….”
“이야기나 들려줘. 여덟 별에 대해서.”
넥슨은 대답이 없었다. 그래봤자 넌 내가 당기는 대로 움직이는 인형이지, 뭐.
“시오네는 말이야…….”
“뭐라구?”
넥슨은 정말 불쌍하리만큼 급히 말했다. 좀 잔인한가?
“아주 뛰어난 간첩이라고 들었어. 게다가 뱀파이어이고.”
“잠깐! 뱀파이어라구? 사람이 아니야?”
“그래. 사람이 아니야. 뱀파이어지.”
“이런 맙소사. 그렇다고? 시오네라는…………, 여자냐?”
“여자야.”
“그래…….”
“이제 내 질문에 좀 대답해 줘. 좀 딱딱한 흥정 분위기가 들지만. 여덟 별은 뭐지?”
・말했잖아. 종족의 창생 사멸을 결정한다고.”
“스스로의 의지는 없다면서?”
“그래…………. 의지는 없다. 그러니까 검과 마찬가지. 쿨럭. 검은 충분히 적을 죽일 수 있지만………… 검이 죽일 대상을 고르는 것은………… 아니다.” “좋아. 알겠어. 그럼 누가 그 별들을 이용할 수 있지? 소유자?”
“그런 셈이지.”
“그걸 어떻게 믿지?”
넥슨은 대답이 없었다. 녀석의 얼굴을 볼 수 없으니 답답하군.
“이봐, 그걸 어떻게………….”
“넌 바보냐! 드래곤 로드는 거의 모든 종족들을 억압할 수 있었지 않느냐! 그걸 알면서도 그런 멍청한 질문을 하는………… 어, 쿠울럭! 쿨럭쿨럭!” 어라? 이게 무슨 말이야? 드래곤 로드가 모든 종족을 지배한 것이 그것과 관련이 있는 건가?
“잠깐! 뭐야, 이런 말이야? 드래곤 로드는 300년 전 그 여덟 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종족들을 지배한 거라는………… 그런 말이야?”
넥슨은 밭은기침을 계속하다가 간신히 진정해서 말했다.
“그래. 투구걸이로밖에 못 쓸 텅텅 빈 머리를 가진 꼬마야.”
“어, 어? 하지만 드래곤 로드도 드워프나 엘프를 지배하지는 못했어.”
“하지만 드워프나 엘프들이 드래곤 로드를 억압하지도 못했다! 멍청아. 엘프는 혹 모르더라도, 지배받기를 죽기보다 싫어하는 드워프가 드래곤 로드를 믿을 수 없 는…………… 쿨럭!”
“믿을 수 없는 맹방이자 견제하지 않는 적. 그 말이야?”
“너…………, 의외로 많은 학식을 가지고 있군.”
그거야 헬턴트 마을의 독서가 칼의 복음을 어릴 때부터 무수히 받았으니까.
“그게 그런 건가? 드래곤 로드가 그 여덟 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종족들이 그에게 무릎을 꿇었다는 말이야? 하지만 그렇다면 왜 엘프나 드워프는 그에게 복종하지 않았지?”
“엘프는 유피넬의 어린 자식이며, 쿨럭, 원래 복종이라는 개념이 없는 존재…………다. 그리고 드워프들은 그 콧대 때문에 복속시키는 것이. 불가능하지.” “이봐. 그 여덟 별인지 뭔지를 가지면 그 종족의 창생 사멸을 결정할 수 있다면서? 그럼 복종하지도 않는 드워프나 엘프를 왜 멸망시키지 않은 거지?” “드래곤 로드는 너 따위……… 풋내 나는 꼬마보다는 훨씬 현명하니까.”
“칭찬할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칭찬으로 받아들이겠어. 내가 싱그러운 나이라는 말로 받아들이지. 드래곤 로드가 현명하다는 것은 무슨 뜻이야?” “세상에 이유 없이 태어나는 존재는 없다. 모두는 서로에게 의지한다. 그것이 세상이다.”
“유피넬의 이야기 같은데?”
“그래…………. 박쥐들이 보기 싫다고 해서 모든 박쥐를 없애버리면, 그 다음날 곧장 세상의 곤충들이 훨씬 늘어나버릴 것이다. 그 곤충들 때문에…………… 우, 우컥. 다른 동 물들이 죽어갈지도 모르지. 드래곤 로드는 드워프나 엘프를 복속시킬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현명하기 때문에, 쿨럭! 드워프나 엘프를 모조리 멸망시키 지는 않았다. ………다만 힘으로 억누를 뿐이었지.”
“이해가 되는 듯도 해. 엘프나 드워프도 분명 이 세상의 한 부분이고 그들이 없어질 경우 이 세상이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맞나?”
“맞아…….”
넥슨의 대답은 한숨소리 같았다. 난 어지러운 머리를 다잡기 위해 두 손으로 머리를 싸쥐었다. 하지만 머릿속은 계속 혼란스러웠다.
“이건…………, 도대체 믿을 수 없는 이야기로군………….”
넥슨은 내 혼잣말에 신경도 쓰지 않으면서 계속 말했다.
“그리고 그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루트에리노 대왕은 그 여덟 별을 빼앗기로 마음먹고…… 그와 싸웠지. 그 골빈 전쟁광, 기사도 맹신자답게……… 자신의 부 하들에게 여덟 별의 추구자라는 얼빠진 이름까지……… 붙여가면서.”
“뭐라구?”
“못 들었으면 집어치워!”
“이봐, 루트에리노 대왕 앞에 무슨 말을 붙였지? 골빈 전쟁광, 기사도 맹신자라구?”
“그래, 왜? 잘못 말했나?”
“당신이 그렇게 보겠다면, 좋아. 마음대로 해. 그럼 300년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드래곤 로드가 패배했으니까 그 별들은 모두 어떻게 된 거지?”
넥슨은 다시 대답이 없었다. 난 초조해진 나머지 고함을 질렀다.
“이봐! 말해!”
“몰라…………. 핸드레이크가 실망했으니…………, 그 별들은 파괴된 것이 분명해…………. 하나의 별만 제외하고…….”
“자, 잠깐! 꽤나 많은 말을 했는데 그중에서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하나도 없어! 핸드레이크가 실망하다니? 별들이 파괴되었다고? 그런데 하나의 별은 파괴되지 않 았다고?”
넥슨은 대답이 없었다. 다만 어둠 속에서 신음소리, 거친 숨소리만이 들려왔다.
“이봐!”
“시끄러워, 이, 이 자식아…………. 힘들어…………. 너무, 너무 힘들어.”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난 어둠 속을 더듬어 넥슨의 몸을 찾았고 잠시 후 시체처럼 차갑게 굳은 넥슨의 몸을 만질 수 있었다. 그는 극심하게 떨고 있었는데 이마를 짚 어보니 뜨거운 열이 느껴졌다.
“어떻게 된 거야? 몸은 차가운데 머리에선 이런 열이라니?”
“손…… 치워. 머리가 아파…………….”
넥슨은 잠꼬대를 하듯이 웅얼거렸다. 그의 눈가와 이마에선 굉장한 열이 느껴졌지만 몸은 추위 때문인지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제길, 이 노릇을 어떻게 하지? 모 포 없나? 불을 피워야 되나? 난 일단 넥슨의 몸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정신 차려! 이 작자야! 여기서 죽어 넘어지기 위해서 그렇게 달렸어? 당신 죽어도 난 가슴 아파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세상엔 단 한 사람 당신의 죽음을 안타까워할 사람이 있잖아!”
“……나 말인가? 크후후………….., 넥슨 휴리첼이? 그는………… 죽었어. 넥슨의 5분의 3은………… 영원히 사라졌어.”
“그럼 여기 내가 주무르고 있는 이 작자는 뭐야?”
빌어먹을,
“……이거? 조각………… 인간 파편………. 크흐흐흑! 크핫하! 파편이 아닌 척하기 위해………… 이유도 모르면서 나라 하나를 멸망시키려 드는………… 이유도 모르면서 미친 꼬마
를………… 죽이려 드는…………… 비참하기 짝이 없는…… 쓰레기.”
“떠들 힘이 있으면 움직여! 죽든 말든 상관없어. 알아? 네가 죽든 말든 상관없다구! 하지만 내 눈앞에서 죽는 것은 안 돼. 절대로 용납 못해!”
“감정도…………… 없이………… 기억도 없이………… 죽이고 싶어해야 되기⋯⋯ 때문에………….”
이 자식아, 무슨 말인지 알아. 네녀석은 잃어버린 과거 때문에 자신을 잃고 있어. 알고 있단 말이야!
“그럼 계속 날 미워해! 그렇게 해야 널 잃지 않을 것 같다면 마음대로 날 미워해! 이유 따위, 뭐가 중요해?”
땀이 돋아나면서 내 몸도 사정없이 떨린다. 하지만 난 넥슨의 몸을 주무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뻣뻣하기 그지없는 넥슨의 몸이 조금씩 유연해지는 것 같다. 입에 서 더운 김이 술술 나오면서 시야 주위로 자그마한 광점들이 명멸한다. 관자놀이가 터져나가는 것 같다. 눈꺼풀이 덜덜 떨린다. 끝내주는 밤이군.
“정신 차려!”
“그…… 커다란 입 좀…………… 다물어라. 주위의 오크란・・・・・ 오크는 다 몰려…………… 오겠다.”
“얼씨구? 지금 네가 날 걱정해? 그럴 기운 있거든 네 걱정이나 해! 절대로 내 눈앞에서 죽어 넘어지게 놔두지는 않겠다, 이 빌어먹을 놈아! 널 살려서, 그리고 눈물을 줄줄 흘리며 참회하게 만들겠어! 너의 모든 기억을 돌려주고 말겠어! 이 벼락 맞아 죽어도 할말 없는 자식아, 일어나!”
넥슨의 멱살을 잡아올린다. 그리고 사정없이 앞뒤로 흔든다. 놀랍군. 내게 아직도 이런 힘이 남아 있다니. 그런데 이게 이성적인 행동일까? 녀석을 눕혀놓는 것이 좋 을까, 아니면 이렇게 흔드는 것이 좋을까? 하지만 눕혀두면 왠지 그냥 죽어버릴 것 같다. 이 암흑 속에 누워 있는 넥슨의 모습은 시체를 연상시킨다. 난 어쩔 줄 모르 고 그의 몸을 흔들었다. 제길, 제레인트가 여기 있었다면…………. 어랏?
“자, 자, 잠깐! 넌 프리스트잖아? 엉터리지만 프리스트 아니야? 자신은 치료 못하는 거야?”
“못해…………. 사흘 동안 체력을………… 너무………… 소모했어. 제발………… 그만 흔들어.”
“사흘이고 나흘이고 못하긴 왜 못해! 어서 해! 기도해!”
“신이 줄 수…… 있는 것은…… 원래 인간이 가진…… 것이다………….”
“잡소리 집어치우고 어서 기도해! 기도하라고!”
“그러므로………… 기도는…………… 자신의 것에 대한 발견.
“기도해!”
“자신으로의…………… 회귀…………. 어두워………….”
“쿨럭.”
이젠 기침을 한 번 할 때마다 가슴 전체가 찢어지는 것 같다. 머리를 움직일 힘도 없어 내 눈은 하늘을 향해 대책 없이 열려 있다. 넓은 하늘. 지상의 한 점이 되어 저 것을 바라본다. 하늘의 부분부분을 내 얼굴과 연관시켜 생각한다.
이마 쪽에서는 보라색 기운이 감돌기 시작한다. 땀에 엉기고 흙덩이가 포도송이처럼 매달린 머리카락 하나가 왼쪽 눈썹 방향의 하늘을 둔한 각도로 가로지르고 있 다. 왼쪽 눈은 부어오를 데까지 부어오른 모양인지, 왼쪽 하늘은 찌그러진 모양이다. 게다가 뿌옇다. 왼쪽에 떠오르는 별무리들은 환상적인 모습이다.
미간 쪽 하늘에서 구름이 갈라진 모양이다. 지금껏 보이지 않던 별 하나가 나타난다. 별은 가물가물 빛나다가 다시 밀어닥친 구름에 가려 사라진다.
오른쪽 콧등을 바라본다. 콧등 위로 붉은 기운이 올라오고 있다. 칸 아디움에서 올라오는 불빛인 모양이다. 고작 저기까지 걸어가질 못해서 여기 이렇게 맥없이 누워 있군. 콧등에서 불길이 올라오는 것 같이 느껴진다. 내 코가 불타고 있나?
“키득…………, 쿨럭! 쿨럭, 쿨럭!”
갈비뼈가 모조리 아우성을 치는 것 같다. 차갑고 맑은 정신 때문에 통증은 더욱 고약하다.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다른 생각을 떠올리는 일 뿐 이다.
오른쪽 볼을 씰룩거려 본다. 새벽의 희미한 빛 속에서 넥슨의 모습이 떠올랐다 사라졌다를 반복한다.
넥슨은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 있다.
그의 몸은 추수가 끝난 들판의 허수아비처럼 을씨년스럽게 처박혀 있다. 구덩이의 검은 흙이 그의 어깨와 가슴에 떨어져 있다. 내가 마지막으로 그를 팽개쳤을 때 흘 러내린 흙이다. 그는 팽개쳐진 모습 그대로 사지를 집어던진 채 쓰러져 있다. 그리고 꼼짝도 하지 않는다.
죽어버린 거야. 내 눈앞에서 날 영면의 참관인으로 삼아.
·쿨럭.”
칼로 가슴을 도려내는 것 같은 아픔 속에서 넥슨의 얼굴을 바라본다. 어둠 속에서 창백한 얼굴은 두드러지게 떠오른다.
뭘 위해 살지? 당신은 과거를 잃은, 불완전한 현재만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시간의 미아. 현재는 과거라는 기단 위에 서 있는 탑이지. 하지만 당신의 탑은 기단 없 이 허공에 떠 있었어. 고집과 억측으로 과거를 만들어내는 것에도 실패해 버리고, 그렇게 쓰러져 당신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지?
시체는 무슨 꿈을 꿀까? 어쨌든 꿈을 꿀 시간은 영원하지.
하슬러의 얼굴이 떠오른다. 왜지? 저 친구의 주인은 저기 쓰러져 있다. 그런 눈으로 날 바라보지 마. 내가 죽인 것이 아니야. 제멋대로 죽어버렸어. 난 여기까지 그 친구를 끌고 왔어. 그리고 안간힘을 다했어. 하지만 넥슨은 죽었어. 이 상황에서 내가 뭘 어쩌란 말이야?
하슬러의 얼굴이 사라진다. 언제나 말이 없는 사나이. 당신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 말을 모두 합쳐도 제미니가 하루에 하는 말보다 적을걸? 에헤헤헤………
제미니. 날 기다리고 있을 거니? 내 생각을 하고 있니? 지금은 너의 포근한 새벽잠에 취해 있겠지. 조용한 평화 속에 잠들어 있겠지. 오우, 천만에! 시트를 걷어찬 채 그 사슴의 다리 같은 여린 다리를 마음대로 벌리고 두 팔은 밤하늘을 통째로 끌어안을 듯이 벌린 채 누워 코를 골고 있을 거다. 네가 옛날 잠버릇 그대로라면 말이야. 코에서 흘러내리는 콧물을 쩝쩝 마셔대던 시절의 제미니가 그랬지.
“킥, 키킥! 우헤헤… 쿨럭! 우하하……핫!”
기억해 둬. 제미니. 네 애인은 말이야, 대륙의 위기를 구한답시고 이름 없는 황야와 거친 산, 그리고 지하의 아름다운 미궁을 헤매고 다녔지. 한마디로 철이 없었어. 익숙한 침대에서 아침을 맞이하고 낮 동안 두 손으로 신의 작업을 흉내내어 빛을 세공하고 황혼이 피어오르는 시간이 되면 저녁 식사 메뉴를 최대의 고민거리로 생각 하며 살았어야지. 어울리지 않게시리. 그리고, 이스트 그레이드의 황야에 드러누워 지금 죽음을 기다리고 있지. 정말 어처구니없는 작자 아니야? 하하하. 세상의 여자 들에게 말해 줘. 철부지 애인은 감당할 도리가 없는 것이니 절대로 사귀거나 하지 말라구.
다시 넥슨의 얼굴을 본다.
그의 얼굴에 맺힌 서리들. 새벽이 멀지 않은 시간이군. 시간은 날 떼어놓고 잘도 흘러가버리는군. 난 여기 멈춰 섰고 이제 내게 주어진 시간은 다 쓴 것인가.
졸린다.
졸린다.
“후치야!”
당신도 죽었어요? 어젯밤 오크들이 칸 아디움을 야습했지. 어제? 뭐가 어제지? 이제 시간이라는 것은 더 이상 나에게 의미가 없는데. 그렇잖아요, 네리아? “후치야! 후치야! 후치야!”
이름을 세 번 부르는 사람에겐 그 이름의 소유권이 영원하라. 내 이름은 태어날 때부터 내 것이 아니었지. 난 내 이름을 부를 일이 없어. 내 이름은 항상 다른 사람의 것. 그래요. 나는 떠나가고 내 이름만 당신들 옆에 남게 되겠지. 드래곤 로드는 틀렸어. 우리는 불사의 생명이 아니야. 우리의 이름이 불사일 뿐이지………….
“후치야!”
주위는 따스하고 안온한 느낌이었다. 한없이 포근하다. 내 몸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의 중량감 상실. 그런데 누군가 내 몸을 주무르고 있다. 겨우 내 몸이 어디 있는지는 알겠군. 그거 좋은 느낌인걸. 거기, 그 위쪽을 좀더……………. 허공에서 일렁거리는 붉은 머리. 아름답게 흔들리는군. 그리고 그 아래에 보이는 좁은 이 마, 커다란 눈, 굳이 튀어나왔다고 말하기엔 좀 모자라게 튀어나온 광대뼈, 참 예쁘장한 저 얼굴은……
“네리아?”
“어마! 후치! 일어났구나! 우아아앙!”
커억! 네리아는 곧장 나에게 쓰러졌고 그녀의 가슴이 내 가슴을 강하게 압박한다. 네리아는 날 껴안은 채 펑펑 울면서 볼을 비벼대고 있었는데, 그거 기분 나쁘다고 는 말 못하겠지만 숨쉬기가 곤란한걸.
“수………… 숨막혀욧!”
네리아는 눈물 범벅이 된 얼굴을 들어올렸다. 하지만 그것은 자유로워진다는 의미가 아니었는데, 네리아는 내 볼을 끌어당기더니 숨막힐 정도로 키스를 퍼부어온 것 이다.
“읍! 으으읍! 그만해요!”
“살았구나! 요 미운 것! 살아났어! 우아앙! 이 이쁜 것아! 우아앙!”
“미운 거예요, 이쁜 거예요?”
“둘 다야!”
“여기는 어디지요? 만약 여기가 현실이 아니라 사후의 세계라면 괜히 눈길을 피하면서 ‘너도 짐작할 텐데?’ 하는 식의 눈짓은 하지 말고 똑바로 말해 주길…….” “정신 차리는 절차가 뭐 그렇게 복잡해!”
엑셀핸드의 호통 소리였다. 고개를 옆으로 돌려보니 역시 얼굴이 벌겋게 된 채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애써 감추려 드는 엑셀핸드의 주름진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그 뒤에선 엑셀핸드의 어깨를 부드럽게 짚은 채 서 있는 아프나이델의 얼굴이 보였다.
“일어났니? 다행이구나.”
그때 아프나이델의 등 뒤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났다구요? 후치가요? 일어났어요?”
아프나이델은 힘차게 달려온 레니에 의해 옆으로 밀쳐지면서도 빙글빙글 웃었다. 레니는 날 내려다보더니 곧장 시트 위로 몸을 던지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우아아앙! 얼마나 걱정했다구! 살아났어! 이 나쁜…… 아냐. 살아줘서 너무 기뻐. 으아아앙!”
어떻게 해야 되지? 난 난감한 얼굴로 내 가슴 위에 얹힌 레니의 붉은 머리를 내려다보다가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천천히 레니의 머릿결을 쓸어내리자 그녀는 눈물로 젖어 엉망이 된 얼굴을 들어 날 쳐다보았다.
“레니………….”
“응. 후치야.”
“……푸흐,
…킥, 푸하하핫! 눈물 좀 닦고 말하자! 우헤헤헤헤! 아이고, 죽겠네!”
“뭐…………야? 이 나쁜 놈아!”
“아, 아, 아냐. 농담이야. 으킬킬킬킬! 제, 오, 제발! 그 눈물 좀 닦아. 얼굴이, 얼굴이이이! 크학, 핫하하하!”
레니는 내 가슴에 힘껏 두 주먹을 꽂아넣었지만 그걸로 내 웃음이 멈춰지진 않았다. 살아났다는 사실이 너무너무 유쾌했다. 레니는 내 가슴을 두드리다가 자기 손을 붙잡고 팔짝팔짝 뛰었고 그 모습을 보면서 난 침대에서 굴러 떨어지도록 웃었다.
간신히 웃음을 멈추고 둘러보자 내가 누워 있는 곳이 어느 방 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꽤나 깔끔하고 정결해 보이는 것이 여관의 방 같은 곳은 아니었다. 채광이 좋은 창이라든가 커튼, 벽도제의 모습이라든지 기둥의 모습을 봐도 분명 큰 저택 안이다. 여기가 도대체 어디지? 내가 누워 있는 침대 옆에는 긴의자가 하나 있었는데 그 긴의자에는 제레인트가 길게 드러누워 코를 골고 있었다. 칼과 샌슨, 길시언, 운차이는 또 어디 있는 거지?
“프하, 하아. 좀 진정하고. 어떻게 된 거죠? 내가 정신을 잃은 동안 무슨 일이 있었어요, 네리아?”
네리아는 눈물을 닦아내면서(그녀도 레니를 보면서 꽤나 웃었다. 그래서 레니는 지금 볼을 몹시 부풀리고 있었다.)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응. 오늘 아침 우리들이 성 밖으로 나갔다가 구덩이 속에서 널 발견했어. 자칫 지나칠 뻔했지 뭐니. 아침 안개가 자욱하게 낀 데다가 온몸이 흙투성이가 된 채로 그 렇게 구덩이 속에 처박혀 있으니. 하지만 엑셀핸드 님이 네 신음 소리를 들었거든.”
“아………… 고마워요. 엑셀핸드.”
“별거 없어. 그렇게 커다랗게 신음을 뱉어내고 있었는데 드워프라면 당연히 들어야지.”
엑셀핸드는 수염을 쓸어내리며 그렇게 말했다. 그때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어, 잠깐. 그럼 여기가 칸 아디움의 성 안이에요?”
“그렇지. 여긴 시장님의 저택이야.”
“잠깐 잠깐! 어젯밤에 오크들이 야습하지 않았어요?”
그러자 갑자기 엑셀핸드는 잔인하게 웃기 시작했다. “크핫하하하!” 그리고 아프나이델도 미소를 짓더니 말했다.
“물론이지. 그리고 야습한 오크들 중에서 살아남은 놈은 손가락을 꼽을 정도일걸.”
“예?”
아프나이델은 의자를 끌어와 앉아서 어제 오후와 밤 사이에 일어났던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레니와 네리아는 침대에 앉았고 엑셀핸드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아 프나이델의 이야기를 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