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6권 – 제11부 : 앞을 보지만 뒤를 생각한다 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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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치가 낙오되었어!”
샌슨의 고함소리. 샌슨은 급히 말을 돌리려고 했지만 한참 전속력으로 달리던 말을 급정지시킬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일행이 멈춰 선 것은 열린 성문 안으로 들어간 다음이었다. 밖에선 오크들이 무섭게 육박하고 있었다. 칼은 입술을 깨물었다.
“제길! 경비대원! 성문을 닫아! 어서!”
샌슨은 기가 막힌 얼굴로 칼을 바라보았다.
“아니, 안 돼! 닫지 마!”
샌슨은 그대로 도로 달려나가려 했다. 하지만 칼이 재빨리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샌슨은 그대로 밀고 지나갈 듯이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이 자식들은 구하면서 후치는 포기한단 말입니까! 그건 절대로 안 됩니다!”
그러나 칼은 꿈쩍도 하지 않을 얼굴로 차갑게 말했다.
“지금 성문이 열리면 칸 아디움의 시민들은 어떻게 되지?”
샌슨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는 힘없이 말에서 내렸고 성문은 닫혔다. 네리아는 잠긴 성문을 거세게 두드렸다.
“아앗! 시민 따위 알 게 뭐야! 어서 성문 열어! 열어줘요!”
경비대원들이 무거운 얼굴로 네리아를 외면했을 뿐 성문은 열리지 않았다. 네리아는 통곡했다.
“후치야아악! 아악! 후치얏!”
길시언은 눈물을 뿌리며 성벽 위로 올라갔고 샌슨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비통한 얼굴을 한 채 망연히 땅을 내려다보았다. 운차이는 조금 떨어진 곳에 꽂꽂이 선 채 지 푸라기를 주워모아 검을 닦아내고 있었지만 그 손길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칼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성문 밖에서는 내 고함소리가 들려왔지만 곧 이어 오크들의 환성이 울려퍼지면서 내 고함소리는 들리지 않았다고 한다. 네리아는 성문을 긁으며 비명을 질렀고 하늘을 올려다보던 칼은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 다.
그때였다. 길시언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후치는 죽지 않았소!”
네리아와 샌슨은 놀란 얼굴로 성문 위를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성벽 위로 올라간 길시언이 성벽 바깥을 가리키며 숨찬 목소리로 외쳤다.
“오크들에게 붙잡혔소! 하지만 아직 살해당하지는 않았어!”
“뭐라고!”
이때 일행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내가 살아 있다는 소식에 놀란 나머지 모두들 하슬러와 자크를 까맣게 잊어버린 채 성벽 위로 줄달음질친 것이 다.
“설마…… 칼도?”
“그래. 칼 씨도 정신없이 성탑 계단을 뛰어올랐지. 그 굉장한 속도를 봤어야 하는데. 하하.”
아프나이델은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엑셀핸드가 다시 수염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난 아래쪽을 보고 있었지. 성벽 아래쪽에서 칼과 샌슨, 길시언, 그리고 운차이와 네리아가 올라오는 것을 보고 고함을 지르려 했지만 이미 늦었어. 하슬러와 자크는 재빨리 달아나버리더군. 아래쪽을 향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것이 전부였지.”
아프나이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엑셀핸드 님께서 ‘저놈들 잡아라!’ 하고 고함을 지르시기에 고개를 돌려보니까 그 사람들은 시내 쪽으로 달아나고 있더군. 경비 대원들이 쫓아가긴 했지만 놓 치고 말았어. 경비 대원들이 시내를 샅샅이 수색했지만 끝내 발견하지 못했어.”
“흠. 그 자크는 원래 도둑이니까 숨는 데는 재주가 있겠지요. 하슬러도 만만찮은 사람이고.”
네리아가 뺨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응. 우리들은 네 생존 소식을 듣고는 순간 갈팡질팡해 버렸거든. 난 내려가서 하슬러랑 자크를 쫓아야 할지, 성벽 위로 올라가서 네가 살아 있는 것을 확인해야 할 지 혼란스러웠어. 칼 아저씨마저도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구.”
“그것 참. 어쨌든. 그래서 어떻게 되었지요?”
칼은 발을 동동 굴렀지만 그답게 그 행동에 많은 시간을 들이진 않았다. 욕설 몇 마디를 하늘로 띄워보낸 다음 칼은 성벽 위로 올라와 날 관찰했다. 내가 오크들과 싸 우는 모습을 보면서 모두들 바짝 긴장해서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땀을 뻘뻘 흘렸다. 마침내 나와 넥슨이 오크들에게 끌려가는 모습을 보면서 칼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죽지 않았으니 됐어. 구출하면 돼.”
마치 스스로에게 확신을 시키는 듯한 목소리였다. 샌슨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습니다. 어떻게 하지요?”
“일단은 생각을 좀 해봐야겠네.”
그렇게 일행이 궁리를 하고 있는 동안 오후가 빠르게 지나갔다.
황혼이 어스름하게 펼쳐질 무렵, 성문 위의 경비 대원은 밖에서 날아온 화살 하나를 발견했다. 화살에는 편지가 묶여 있었고, 그래서 병사는 그 편지를 전투 지휘소 인 야전 막사로 가져왔다. 우리 일행들은 야전 막사에 몰려 있다가 크레블린 대장과 함께 그 편지를 보게 되었다.
크레블린 대장은 편지를 읽어내려가다가 몹시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우리 일행들은 모두 궁금한 얼굴로 초조하게 기다렸고 그러자 대장은 편지를 칼에게 건네었다. 칼은 소리내어 읽기 시작했다.
“’나는’ …………? ‘괴물 초장이’라고 썼다가 그 위에 줄을 그었군. 으흠. 어쨌든 ‘나는 후치다. 달아난다. 밤에 성문을 열어라. 내가 들어간다..”
순간 작전지휘소는 엄청난 정적에 휩싸였다고 한다. 그 정적이 깨어진 것은 제레인트의 폭발적인 웃음소리 때문이었다.
“푸흐히어히아히에에에!”
제레인트는 그렇게 인간의 웃음소리 같지 않은 웃음을 터뜨렸고 길시언은 운차이의 어깨를 쾅쾅 두드렸다. 운차이마저도 고개를 조금 돌린 채 쓴웃음을 지었으며, 네리아는 얼빠진 얼굴로 칼에게서 편지를 빼앗아 꼼꼼히 읽기 시작했다. 엑셀핸드는 품위 없게도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지만 당시엔 아무도 그를 허물할 생각을 못했 다. 샌슨은 의자에 주저앉아서 숨도 제대로 못 쉬면서 웃었고 아프나이델은 테이블을 짚은 채 헉헉거리며 웃었다. 레니는 당황해서 주위를 둘러보다가 조심스럽게 질 문했다.
“저, 저, 그럼 후치가 달아난 거예요?”
“크카카카카! 레, 레니 양! 요건 오크의, 오크의 솜씨올시다. 하하하하하!”
제레인트는 의자에 쓰러질 듯이 앉으며 말했다. 레니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주위를 살폈다.
“예에……?”
칼은 이마를 짚고 웃으며 말했다.
“허, 허허, 프허허. 오크들 주제로선………… 괜찮은 작전이군. 하지만 그…………… •떨어지는 문재(文才가 큰일이로군. 헛허허.”
네리아는 아직 미심쩍은 얼굴로 편지를 들여다보다가 샌슨에게 내밀었다.
“샌슨, 샌슨! 이거 후치 글씨 아니지?”
“글씨 볼 필요가, 크힉! 어디 있냐. 그래, 어디, 어디 보자. 크히히히히! 오, 맙소사. 이건 후치 글씨 아냐. 그래도 오크치곤, 치곤, 꽤나 훌륭한 글씨· 푸하하하!” “후치가 아니에요? 아앙! 난 모르겠어요. 설명 좀 해주세요.”
레니가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은 주위의 웃음소리가 더욱 커지게 만들 뿐이었다. 레니는 볼이 부은 채 주위를 노려보았고 그러자 칼이 간신히 진정하면서 말했다. “오크들은, 우리로 하여금 후치가 달아났다고 생각하게 만들려는 겁니다. 레니 양. 그래서 밤중에 성문을 열어젖히게 하려는 거지요. 그리고 성문을 열면 곧장 뛰어 들겠다는 것이 오크들의 생각일 겁니다. 괜찮은 작전이에요. 아니, 훌륭한 작전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다만, 다만………….”
칼은 네리아가 들고 있는 편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저 불쌍한 문재가……………. 핫하하하!”
그때까지도 웃지 못하고 있던 크레블린 대장도 드디어 웃음을 터뜨렸다. 아넨드 씨의 경우엔 혀를 내두르면서 말했다.
“우와! 그거 교활한 방법이네? 오크 머리에서 나왔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야.”
“오크들에게 조금이라도 글쓰기 재능이 있었다면 위험했겠지요. 하하하.”
“아니, 후치가 조금이라도 글쓰기 재능이 엉망이었다면 위험했겠지요. 이힛히히히!”
일행은 그렇게 오크의 계략에 대해 실컷 비웃었다. 일행이 더 웃을 힘도 없을 만큼 웃어버리고 난 다음, 칼은 곧 작전을 펴나가기 시작했다.
“좋습니다. 밤중에 성문을 열어줍시다.”
크레블린 대장은 신나게 대답했다.
“에! 알겠습니다. 오크들의 작전을 역이용하는 것이군요?”
“그렇습니다. 대장님께서도 이미 이해하셨을 테니 제가 더 드릴 말은 없군요. 허허. 대장님께서 알아서 부대를 배치해 주십시오. 그리고 저희들도 대장님을 돕지요. 시켜만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크레블린 대장은 쾌활한 동작으로 일어나 경비 대원들에게 달려갔다.
“아이고……, 맙소사.”
내 감탄사에 엑셀핸드는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네리아는 깔깔거렸고 아프나이델은 웃으며 말했다.
“뭐, 그렇게 된 거야. 그래서 뒷일은 간단했지. 크레블린 대장은 성문 주위의 모든 주민들을 소개시킨 다음 집집마다 병사들을 매복시켜 두었지. 아넨드 씨와 칼 씨 의 지휘하에 병사들은 적재적소에 배치된 거야.”
“이 친구도 꽤 활약했지. 하하하!”
엑셀핸드의 말에 아프나이델은 겸연쩍게 웃었다.
“별 말씀을. 그래. 나도 성문에서 도시로 이어지는 대로에 약간 손을 봐두었지. 하지만 다른 분들이 더 고생을 했지. 경비 대원들은 저녁도 굶어가면서 함정을 팠거
든. 사수들도 모두 지붕이나 옥상에 올라가 자리를 잡았고. 굉장한 잔치판이었지. 그 다음은 간단해. 밤중에 누군가 성문을 두드리게 된………… 하하하! 그때 정말 대단했지.”
“대단했다구요?”
“샌슨과 길시언이 성문 주위에 대기하고 있었거든. 밤도 꽤 깊었을 무렵 누군가가 성문을 두드리는 거야. 샌슨은 웃음을 참으며 질문했지. ‘후치냐? 대답은 들려오 지 않았고 대신 성문 두드리는 소리만 더욱 커졌어. 샌슨과 길시언은 성문의 가로대를 치워버리고는 재빨리 물러났지.”
“그러고는 오크가 밀어닥친 거군요?”
“그래. 맞았어. 오크들은 함성을 지르며 물밀듯이 밀어닥쳤어. 녀석들은 작전이 성공했다고 여겨서인지 무서운 기세로 들어오더군. 그런데 선두에 있던 놈들은 갑자 기 당황하기 시작한 거야. 성내에 아무도 없었거든.”
“흐음.”
“그래. 무리 전체가 거의 다 들어오고 나서야 오크들은 뭐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하지만 뒤에서 밀어붙이는 힘이 있기 때문에 멈추지도 못했어. 그때 선 두의 오크들이 함정에 빠지기 시작한 거야. 그리고 매복해 있던 경비 대원들은 오크들의 뒤를 치고 들어가 성문을 봉쇄해 버렸지. 오크들은 미친 듯이 저항했지만 이 미 기세가 꺾여 있었어. 사방의 집 위에서는 불화살이 쏟아져내리기 시작했고 집집마다 경비 대원들이 튀어나오는 거야. 오크들은 어떻게든 포위망을 풀어보려고 했 지만 경비대원들이 지리에도 훨씬 익숙했거든. 아넨드 씨의 말마따나 자기 집 안마당에서 싸우는 셈이었지. 오크들은 함정 쪽으로 밀려나거나 하면서 혼란에 빠졌 고…………. 놀라지 마. 엑셀핸드는 골목 하나를 맡아서는 오크 서른두 마리를 베어넘겼지.”
“서른세 마리야!”
“엑셀핸드………. 마지막 녀석은 길시언이 쓰러뜨린 오크 아니었습니까?”
“녀석은 일어나려고 했다구!”
“휴우. 하하, 예. 알겠습니다. 서른세 마리야. 후치.”
“흠. 자네의 그 굉장한 불꽃들은 왜 말하지 않는 건가, 아프나이델?”
“예? 하하. 뭐 다른 분들의 활약에 비하면 별 것 아니지요. 안티고어 시장님은 사재를 털어서라도 보상할 테니 민가에 신경 쓰지 말라고 명령했거든. 주민들은 미리 귀중품들을 가지고 대피한 상황이었고. 그래서 경비 대원들은 오크들을 집안으로 몰아넣고 불을 지르는 식으로도 꽤 많이 쓰러뜨렸지. 그 불꽃과 함성, 곳곳에서 나 타나는 경비대원들의 창과 밤하늘을 뒤덮을 듯이 날아드는 화살, 그리고 밟는 땅마다 꺼지는 함정들 속에서 오크들이 제정신을 유지하긴 어려웠겠지.”
“아……, 굉장했겠군요.”
“응. 날이 밝을 무렵엔 칸 아디움으로 돌진한 오크들 중 열에 하나도 살아남지 못한 정도였지. 몇 마리들이 살아남아서 시내를 도망쳐 다니고 있어서 칼과 나머지 사 람들이 경비대원들과 함께 추격에 나섰어. 우리들은 널 찾으러 밖에 나갔다가 구덩이에서 널 본 것이고.”
아. 그렇게 된 것이구나. 그래서 밤하늘에 그토록 불길이 솟아올랐군. 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그럼 넥슨은………… 벌써 묻었어요?”
“응? 넥슨?”
아프나이델은 갑자기 이상한 얼굴이 되었다. 왜 저러는 거야?
“어, 내 옆에 있던 넥슨의 시체 말이에요.”
“뭐야? 시체라니?”
순간 소름이 쫙 돋아올랐다. 아프나이델은 내 얼굴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우리가 널 발견했을 땐 넌 혼자 구덩이 안에 있었어. 어떻게 거기까지 달아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넌 굉장한…
“뭐라구요? 그럴 리가! 넥슨이 없었다구요?”
난 어처구니없는 얼굴이 되어 주위의 사람들에게 설명했다. 어제 밤 오크들이 야습을 위해 떠나간 다음 나와 넥슨이 오크들의 진지에서 함께 달아난 일, 중간쯤에 구 덩이를 발견하고 그 속으로 쓰러지듯이 들어간 일, 끝내 견디지 못한 넥슨이 죽어버린 일, 그리고 나 또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던 일.
“넥슨이 죽은 것이 확실해?”
・모르겠어요. 난 그가 죽었다고 생각했어요. 맥박을 확인하거나 호흡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그 창백한 얼굴과 꼼짝도 하지 않는 몸을 보면서, 그렇게 믿었어 요. 그래서 하슬러의 환상…..?”
다시 한번 머리끝이 곤두서는 느낌이 들었다. 주위의 일행들은 의아한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지만 난 머릿속으로 하슬러의 모습을 생각하고 있느라 거의 그 얼굴 들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만일 내 생각과는 달리 넥슨이 아직 죽지 않았다면? 우리 일행들은 하슬러와 자크가 달아났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하슬러와 자크는 밤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오크 와 인간들 사이에 전투가 벌어져 소란스러운 틈을 타고 성 밖으로 나올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고는 구덩이에서 나와 넥슨을 발견하고는 넥슨을 데리고 갔을 수도 있다. 만일 넥슨이 이미 죽었다면 그들이 넥슨을 데리고 갔을까?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들은 도망자의 몸이고 시체 하나를 들고 다니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닐 것 이다. 차라리 그냥 내버려두면 칸 아디움의 사람들이 알아서 매장해 줄 테니까. 그렇다면 넥슨은 살아 있었던 것이구나!
가능성이 있다. 나도 살아 있으니까 넥슨도 살아 있을 수 있다. 물론 그는 사흘 동안 45펜큐빗을 달려서 몸의 상태가 엉망이긴 하지만, 그렇지만 시체를 들고 달아날 녀석들이 얼마나 있을까? 이럴 땐 무슨 말을 해야 되지?
“다행이군…….”
샌슨은 날 지그시 바라보다가 내 등을 철썩 때렸다.
“괜찮아. 귀 하나 없어졌지만 여전히 미남이야. 오, 유피넬이여, 오늘도 거짓을 말한 저의 입을 용서해 주십시오…… 낄낄낄.”
샌슨은 그 따위 헛소리를 하면서 낄낄거렸다. 그의 엉덩이를 걷어차 주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면서 난 풀죽은 표정을 지었다. 레니는 어깨에 숄을 두르다가 풀죽은 내
모습을 보면서 말했다.
“괜찮아. 머리를 조금 더 길러서 덮으면 되겠네. 음…………, 여자면 이런 거라도 줄 텐데. 둘러볼래?”
레니는 어깨에 두르던 숄을 흔들어보였다. 난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아. 그런데 보기 끔찍하지?”
“음…………, 사실대로 말해서 좀 그렇긴 해. 하지만 말이야, 그러니까 더 경력 있고 실력 있는 모험가처럼 보여. 매력 있어.”
“그래? 좋아. 그럼 반대쪽도 잘라내지, 뭐.”
난 힘없이 웃어주었고 옆에서 걷던 네리아는 손을 뻗어 내 귀가 있던 부분을 쓰다듬었다.
“소리는 잘 들리니?”
“조금 이상하긴 해요. 이쪽으로는 소리가 잘 모이지 않나 봐요.”
“소리가 모여? 무슨 말이니?”
“네리아. 귓바퀴가 왜 달려 있는지 몰라요? 귓바퀴는 소리를 모아서 고막으로 보내주기 위해 달려 있다고요.”
“어머나………… 유식하네, 후치는.”
날 치료하기 위해 힘을 많이 써서 졸도 비슷한 잠에 빠져 있던 제레인트는 눈을 비비면서 계단을 내려갔다.
“그 귀를 재생시킬 수 있을지 모르겠네. 수도에 가게 되면 큰 신전에 들러보자구. 그랜드스톰의 하이 프리스트께서는 디바인 파워가 막강하다고 들었어.” “예. 참! 제레인트, 고마워요.”
“아……함. 괜찮아. 뭐. 솔직히 말하자면 네 상태가 워낙 엉망이라 걱정이 좀 되었었지. 하지만 이렇게 일어나니 내가 오히려 고맙구나. 하하하.”
칼은 빙그레 웃었다. 그는 문 앞에 서더니 갑자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그래, 네드발 군. 각오 단단히 하게.”
“각오라구요?”
칼은 여전히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빙긋이 웃더니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문이 열리면서 햇살이 무자비하게 쏟아져 들어와 눈이 부셨다. 그리고 느닷없이 고함소리 가 들려왔다.
“후치 네드발이다!”
“괴물 초장이 만세!”
“유피넬의 이름으로! 괴물 초장이 만세!”
귀가 멀어버릴 것 같은데. 난 기막힌 표정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짙푸르렀다. 초겨울 하늘치고도 최고로 맑은 하늘이었다. 앙상해진 나뭇가지들에서도 열띤 생명의 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은 상쾌한 오후였다. 바람마저도 오 늘은 모래를 나르지 않기로 결심한 것 같았다.
시장님의 관사 앞 넓은 공터에는 지금 시민들이 빽빽하게 모여 서 있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저 대단찮은 공터에 칸 아디움의 시민들이 모조리 몰려들 수는 없다. 하지만 아무래도 칸 아디움의 시민들 전부가 모여든 것 같은걸. 사람들은 모두 땟국물에 젖어 있고 옷차림도 흐트러져 있었다. 아낙네들은 머리도 제대로 다듬지 못 한 채 어깨 위로 흐르게 내버려두었고 사내들은 턱의 수염도 제대로 다듬지 못한 모습들이다. 어제 낮과 밤 동안 오크들과 싸우고 그 뒤처리를 하느라 고생들이 많았 던 모양이다. 하지만 지금 몰려든 사람들에게서 지친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은 모두들 입이 터져라 외치고 노래 부르고 비명과 함성을 질러 무슨 말인지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한 마디만은 또렷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내 이름이었다.
“후치 네드발 만세! 만세!”
“후치 네드발! 괴물 초장이 만세!”
난 기막힌 얼굴이 되어 칼을 돌아보았다. 이 사태가 어떻게 된 것인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지금의 이 광란스러운 소음 속에서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난 멋쩍은 얼굴로 손을 들어올려 흔들어주었고 그러자 시민들은 우레 같은 함성으로 대답했다.
시민들을 가로막고 있는 경비 대원들은 모두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수많은 소녀들과 처녀들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면서 앞으로 나오려 들었고, 그런 아가씨들 에게 냉정하게 대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저 젊은 경비 대원들에게 너무 가혹한 일이 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경비 대원들은 진심으로 기뻐하면서 그 임무를 수행중이 었고 경비 대원들에게 밀려나면서도 소녀들은 고함을 지르며 웃어대었다.
“네드발 씨잇! 후치 네드발 씨! 사랑해요!”
“이쪽 좀 봐줘요! 후치잇! 후치잇!”
에고에고…………. 내가 죽을 때가 됐나 보다. 대륙 최고의 미녀 100명은 아니지만 어쨌든 저 많은 처녀들이 내 옷깃이라도 만져보려고 애쓰는 장면이니까 이대로 죽어 도 좋겠군. 난 얼빠진 미소를 짓지 않기 위해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사내들은 좀더 경의가 담긴 박수를 쳐보내면서 말했다.
“용감하오! 소년! 소년의 기백이 우리를 살렸소!”
“최대의 경의를 그대에게! 후치 네드발 만세!”
그리고………… 그리고 내 또래의 사내아이들은 모두 다리뼈가 부러진 듯한 표정을 지으며 날 쏘아보았다. 미안해, 친구들. 어쩔 수 없잖아. 걱정 말라구. 내가 떠나면 저 소녀들에게 다시 도전해 봐. 오늘만은 날 용서해 주고 말이야. 사실 그 사내아이들도 질시와 분노보다는 경외감 쪽에 더 많은 표정을 할애하고 있었다.
그 혼란스러운 인파를 뚫고 안티고어 시장과 크레블린 대장 등의 인원이 나타났다. 안티고어 시장은 시민들이 열렬히 휘두르는 주먹에 턱을 한 방 맞아가면서 힘들 게 걸어왔지만 만면에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그는 나에게 다가와 내 앞에 섰고, 난 참 싫었지만 어쩔 수 없이 멀뚱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안티고어 시장은 팔을 들어올렸고 그러자 시민들의 소란이 사그라들었다.
굉장한 침묵 속에서 시민들의 눈이 반짝거렸다. 시장은 땀을 닦아내더니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후치 네드발 공.”
“아? 예? 아, 예. 안티고어 시장님.”
정말 싫다……………. 으. 저렇게 입을 꽉 다물고 있는 시민들의 침묵 사이로 이렇게 얼빠진 대답을 해야 되다니. 시장님의 미소가 더욱 커졌지만 그는 침착하게 말했다.
“우리의 이 사랑스러운 도시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져들었을 때, 우타크와 차넬의 일이 우리 앞에 현실로 되살아날 줄을 그 누가 알았으리오!”
뭐라구? 난 당황한 얼굴로 시장을 바라보았지만 시장은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그러나 우타크와 차넬의 저 믿어지지 않는 위업도 오늘 우리 앞에 서 있는 후치 네드발 공의 일에 비하면 참으로 작은 일일 것이니. 우타크와 차넬은 위대한 전사들 이었으나 적진에 뛰어들 때 그들은 서로에게서 위안을 얻었으리라. 하지만 용맹한 후치 네드발 공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단신으로 천 명의 적들에게 뛰어들어 목 숨을 걸고 그들을 기만하였으니, 이 놀라운 업적 앞에서는 여덟 별에게 바쳐진 모든 헌사를 합쳐도 오히려 모자라다 할 것이오! 그렇지 않소, 여러분!”
시민들은 함성으로써 안티고어 시장의 연설에 맞장구쳤고 난 현실에 작별 인사를 보내려 드는 정신을 가까스로 붙잡았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난 의혹이 가득 한 눈으로 칼을 바라보았지만 칼은 그저 빙긋이 웃으면서 내 눈길을 피했다.
“전사들의 전설을 믿지 못하는 의혹 많은 자라 하더라도 오늘의 이 태양 아래엔 전설들과 노래 속의 업적을 무시하지 못하리라! 보라! 우리 앞에 17세의 어린 나이로 천 명의 적들을 단신으로 격퇴한 자가 있지 않은가! 이는 가장 전설 같은 전설보다 더욱 전설 같음이나, 바로 우리 눈앞에서 현실이니! 이 어찌 놀라워하지 않을 수 있 겠는가, 여러분! 최고의 경의 속에 그를 있게 하라, 칸 아디움의 수호자 후치 네드발 만세!”
“으와아아아! 후치 네드발 만세! 칸 아디움의 수호자 만세!”
아이고, 맙소사………. 아무래도 이 사태에 대해 뭔가 책임 있는 대답을 해야 될 사람들이 꽤 있을걸? 어디 두고 봅시다, 칼, 시민들은 이제 나에게 연설을 요구하기 시 작했다.
“후치 네드발 공! 한마디 하시오!”
“후치 네드발 공! 칸 아디움의 수호자!”
시장은 웃으면서 날 조금 앞으로 나오도록 밀어내었다. 난 거의 비틀거릴 뻔하다가 간신히 몸을 바로잡고는 시민들 앞에 섰다. 와! 떨리는 위치다. 난 저 엄청난 환호 의 물결 앞에 단신으로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목청껏 고함을 지르고 팔을 휘두르고 박수를 치고………… 어쨌든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찬양 수단을 동원 하고 있었다.
난 말하다가 웃지 않도록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말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저를 칸 아디움의 수호자라고 불렀지만, 그 명예로운 호칭은 엉뚱한 자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사람들 속에서 잠시 당황을 의미하는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난 목소리를 좀더 높여서 외쳤다.
“이 도시를 정녕 사랑하고, 오늘 사랑했던 것처럼 내일도 사랑하며 이 도시를 일구어나갈 여러분들이야말로 칸 아디움의 수호자입니다! 여러분들이 지켜낸 도시이 며, 여러분들의 자랑인 이 도시가 앞으로도 영원히 번영하길 기원합니다! 칸 아디움 만세!”
그러자 사람들은 만족하면서 크게 고함을 질렀다.
“우와아아! 칸 아디움 만세!”
“후치 네드발 만세!”
“괴물 초장이 만세!”
“후치 네드발 씨이이! 사랑해요!”
그만해, 관두자구. 하지만 속마음과는 상관없이 난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은 저 환호를 향해 힘차게 손을 흔들어주고 있었다. 잠시 후 시민들은 거의 폭동을 일으킬 만 큼 흥분해서는 우리 일행을 어깨에 태우고는 칸 아디움의 시내를 돌았다.
“어떻게 된 거죠?”
시장님이 우정의 선물로서 내어준 마차 속에서 난 시트에 고꾸라진 채 말했다.
칸 아디움의 시민들의 어깨를 타고 시내를 돌았던 것은 정말 기분 좋은 일이지만 굉장히 피곤한 일이기도 하다. 그 광란스러운 행진이 끝나자마자 우리들은 안티고 어 시장님의 작별과 칸 아디움의 시민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화려하게도 칸 아디움을 떠나올 수 있게 되었다. 시민들의 열렬한 환호도 썩 겸연쩍은 일이었지만 안티고어 시장의 작별에는 놀랍게도 6두 마차가 포함되어 있었다. 세상에. 6두 마차라는 말을 들어보긴 했지만 정말 말 여섯 마리가 매어진 마차는 처음 보는군. 그렇 지만 칸 아디움의 시민들도 우리 일행들이 6두 마차에 다섯 마리의 말과 한 마리의 황소를 묶는 모습을 보고 꽤나 놀랐을 것이다. 어쨌든 경비 대원들은 마차에 산더 미 같은 보급품을 실어놓았고 우리들은 멋진 모습으로 칸 아디움의 성문을 나설 수 있었다.
맞은편 의자에 앉아 책을 읽던 칼은 책을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이야기가 간단해서……………. 시민들에겐 그게 정말 기분 좋은 이야기 아닌가? 병사들에게 설명하기도 간단했고. 그래서 우리들은 그덴 산의 거인 이야기를 따와서 자네 가 오크들에게 일부러 잡힌 다음 그들을 함정으로 끌어들였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만들기로 하고는 서로 입을 맞추었지.”
“맙소사. 아니, 왜지요?”
칼은 침착한 얼굴로 말했다.
“뭔가 떠들썩하게 즐거워할 일이 필요했다네. 네드발 군.”
“떠들썩하게 즐거워할 일이오?”
“그렇다네. 오크들은 물리쳤지만 사실 저 도시는 얻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네. 뭐, 오크들이 사용하던 무기나 갑옷 같은 것은 충분한 전리품이라기에는 좀 모자라지. 사람들의 머리가 차가워지면 그들은 전사한 경비 대원들이나 오크들이 끼친 피해를 생각하며 슬퍼하겠지. 그래서 그들에게 뭔가 크게 즐거워하고 환호를 지를 수 있 는 일이 필요했네. 누구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일이니 더욱 좋은 일이고.”
“음…………. 그래도 거짓말이잖아요.”
당신은 국왕이 당신을 핸드레이크라도 되는 양 꾸미려고 했을 때 크게 화를 냈잖아요. 이런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다가 멈추었다. 하지만 칼은 내 목구멍에 있는 말 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래. 나로서도 별로 내키는 일은 아니었다네. 하지만 안티고어 시장님이 그것을 요구했고, 그 뜻에 삿된 구석이 별로 없는 것 같아서 그만 허락했지. 저 시민들은 적어도 내일이나 모레까지는 크게 즐거워할 수 있을 테고 그 정도의 시간이라면 시장님의 위무 활동이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겠지.”
“흐음.”
그때 갑자기 내 옆에 앉아 있던 레니가 비명을 질렀다. “꺄악! 네리아 언니!” 고개를 돌려보니 창문에서 네리아의 머리가 거꾸로 나타나 있었다. 네리아는 밀어닥치 는 바람에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말했다.
“기분 좋은 일이잖아, 후치야. 그리고 덕분에 이런 마차도 하나 얻었고.”
“조, 조심해요! 지금 달리는 마차라구요!”
“까르르……………. 괜찮아.”
네리아는 다시 몸을 들어올려 지붕 위로 올라갔다. 어이구, 수명 짧아졌겠다. 지붕 위에서 네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생각은 어때, 운차이? 너도 마차 여행이 편하지 않아? 고삐에 신경 쓸 필요가 있나, 등자에 신경 쓸 필요가 있나? 얼굴에 부딪히는 바람을 즐기기만 하면 되 고…………. 여행이란 이런 거지, 뭐.”
그러자 곧 운차이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이봐! 샌슨! 귀찮게 굴면 지붕에서 던져버릴 거라고 전해 줘!”
그러자 마부석에 앉아 있던 샌슨은 운차이의 말을 전해 주는 대신 낄낄거리고 웃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 대답은 샌슨의 옆에 앉아 있던 길시언이 대신 하는 모양이었 다. “운차이는 조용한 마차 여행을 원한답니다. 네리아.” 그 대화를 들으며 마차 안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동시에 미소를 지었다. 칼 옆에 앉아 있던 엑셀핸드는 고개 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나 역시 마음에 들어. 다른 건 몰라도 이거 하난 정말 마음에 드는군.”
엑셀핸드는 시트 위에 두 다리를 다 올려놓고는 기분 좋게 말했다. 아프나이델은 웃으면서 엑셀핸드에게 말했다.
“저도 마음에 듭니다, 엑셀핸드. 말타기가 힘든 것은 드워프나 마법사나 마찬가지인 모양입니다.”
“껄껄껄!”
마차는 신나게 굴러갔지만 요동은 거의 없었다. 꽤나 훌륭한 마차인가 보네. 지금 다섯 마리의 말과 한 마리의 황소가 이 마차를 끌고 있었다. 흐음. 선더라이더는 그 렇게 끼워놔도 말들에게 전혀 뒤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굉장한 황소야. 아, 원래 말이지. 어쨌든 여섯 마리나 되는 말이 끌고 있는 것이라 마차는 무서운 속도로 이스 트 그레이드를 가로질러 갔다.
창 밖으로 보이는 지평선은 강물처럼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지평선에서 일어나는 흰 구름들이 게으르게 움직이는 모습은 졸음을 불러왔다. 난 시트에 몸 을 파묻으면서 말을 꺼내었다.
“그럼 말이지요. 이제부터 마차 여행의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내가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해드리지요.”
“재미있는 이야기? 그게 뭔데? 난 이야기라면 사족을 못 써.”
반쯤 졸고 있던 제레인트가 반색을 하며 일어났다. 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덟 종족과 여덟 별에 대한 이야기.”
마차 안에 있던 일행은 모두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난 특히 엑셀핸드의 얼굴을 주의 깊게 살폈지만 엑셀핸드는 그저 심드렁한 의문을 담은 표정이었을 뿐이었다. 엑 셀핸드가 표정을 저렇게 잘 관리할 리야 없으니 아무래도 그 역시 모르는 이야기일 것이다. 하지만 엑셀핸드는 300년 전에도 살았잖아? 이상하네.
칼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들어보는데? 어서 해보게. 네드발 군.”
난 되도록 말 한 마디도 빠뜨리지 않도록 주의해서 말했다. 이야기를 하는 동안 마차 안의 사람들의 표정은 숨쉴 사이 없이 바뀌었다. 아프나이델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긴장해 있었고 제레인트는 숨을 헐떡거렸다. 엑셀핸드는 도대체 믿을 수 없는 이야기라는 듯이 투덜거렸고 칼은 자기 얼굴에 무엇무엇이 달려 있는지 잊어먹 기라도 했는지 계속해서 턱과 관자놀이, 코 등을 만져댔다.
어느새 이야기가 끝났다. 창밖을 바라보니 지평선은 여전히 그대로인 것처럼 보였지만 구름의 모양은 꽤나 많이 바뀌어 있었다. 난 일행들의 얼굴을 주욱 둘러본 다 음 이야기를 마쳤다.
“이 정도면 넥슨이 한 말은 전부 다했어요.”
일행들은 잠시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켰다. 칼은 심각한 표정으로 미간을 문지르다가 어렵게 입을 떼었다.
“운명을 결정하는 보석이라고…………? 그것 참. 그리고 그게 왜 있는지도 모른다고?”
“예. 적어도 넥슨의 말로는 우리가 그것을 이해할 수 없으므로 그 존재 이유도 설명할 수 없다는데요.”
“그래? 흐음. 이상한 일이군. 그렇다면 그 별들은 유피넬과 헬카네스의 손길과 상관없이 존재하는 것이란 말인데. 만일 그 별들이 유피넬과 헬카네스의 손길이 닿은 것이라면 그런 식으로 말할 리가 없지.”
“왜 그런 식으로 말할 수가 없는데요?”
그 말에 대한 대답은 제레인트가 대신했다.
“어, 그거야 만일 그 별들이 실재하고 유피넬과 헬카네스의 힘으로 만들어진 사물과 같은 것이라면 그 존재 이유를 설명 못할 까닭이 없잖아. 물론 우리로서는 설명 할 수 없겠지만, 그럴 경우 그 별들 역시 다른 사물들과 마찬가지이므로 분명 어떤 존재 이유가 있을 것이 분명하거든? 따라서 굳이 우리는 모르고 이해할 수도 없다 는 식의 말을 할 필요는 없는 것이 된다구.”
제레인트의 말을 듣다가 나는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세상에 이유 없이 태어나는 존재는 없다…………. 모두는 서로에게 의지한다. 그것이 세상이다.”
레니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고 난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제레인트는 손가락을 딱 튕기면서 말했다.
“그래! 정확한 말이다. 유피넬과 헬카네스의 힘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 중엔 이유 없이 태어나는 것이 없지. 따라서 우리가 그 이유를 모른다는 식으로 말할 필요는 없어. 왜냐하면 이유가 있을 것이 분명하니까.”
“넥슨이 해준 말이에요.”
“그래? 음. 재가 프리스트도 프리스트니까.”
칼은 심사숙고하는 표정을 짓다가 엑셀핸드를 바라보았다.
“엑셀핸드. 저 이야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엑셀핸드는 잔뜩 노한 얼굴로 말했다.
“이거 참. 기막힌 말이군!”
“기막히다고요?”
“그럼! 그렇다면 뭐야? 드래곤 로드는 우리 드워프들을 얼마든지 멸망시킬 수도 있었지만, 다만 세상의 균형을 위해 우리를 내버려뒀다, 뭐 이런 말이야?” “그런 말인 것 같습니다.”
“난 저런 이야기 들어본 적이 없네! 물론 우리 드워프들이 전승 지식이나 학식에 대해 뭐라 말할 수야 없겠지만 말이야, 그래도 난 저런 이야기를 태어나서 처음 듣 는구먼.”
“그러시다고요…………. 음. 네드발 군? 당시 넥슨의 상태는 어떤 것처럼 보이던가?”
“그의 상태요? 저랑 마찬가지였지요. 아, 아니 저보다 더 지쳤을 거예요. 무슨 수로 그렇게 달렸는지는 모르지만 그 작자들은 정말 사흘 동안 우리 뒤를 추적해 왔나 봐요.”
“그래? 음. 그럼 치밀한 거짓말을 구사할 수는 없는 상태라는 말인가?”
“그렇게 물어오신다면, 그래요. 그리고 내 생각인데요, 넥슨처럼 기억이 불분명한 사람이 과연 능숙한 거짓말을 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잘못된 기억을 가질 수는 있겠지. 책에서도 그렇지만, 중간 부분이 빠져버리면 전체 이야기는 전혀 다른 것으로 바뀌는 일이 많다네.”
책이라는 말에 엑셀핸드는 눈썹을 찡그렸지만 제레인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잘못된 기억에서 나온 이야기가 그렇게 명료할 수 있을까요?”
“그래요…………. 그렇게 생각하긴 어렵겠지요. 음. 네드발 군. 그러니까 그 여덟 별이라는 것에 대한 증거로서 넥슨이 말한 것은, 첫째, 루트에리노 대왕의 여덟 별. 둘 째, 드래곤 로드의 모든 종족 지배. 맞는가?”
“그렇지요.”
“여덟 별이 누구누구더라………….”
“제로딘, 캄드리, 일스, 라인버그, 우타크, 차넬, 멜다로, 허즐릿입니다.”
칼이 말하자마자 제레인트가 대답했다. 칼은 빙긋 웃었다.
“예. 여덟 별이 그 여덟 명의 기사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란 말인가.”
“예. 그 사람 상태가 조금만 더 좋았다고 해도 다른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었을 텐데. 어쨌든 그 사람이 말한 것은 그게 전부예요. 아, 핸드레이크가 실망한 것으 로 보아 일곱 개의 별은 파괴되었을 것이라는 말도 있긴 한데,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핸드레이크가 실망했다라…………, 그가 실망했다? 무엇에 대해 실망했을까?”
“핸드레이크가 실망할 일이 있어요? 그는 루트에리노 대왕을 도와 드래곤 로드를 물리쳤어요. 그리고 바이서스를 건국했고. 도대체 그만한 일을 이루어낸 사람이 무 엇에 대해 실망할 수 있지요?”
아프나이델과 제레인트는 동시에 그럴 듯한 고민에 빠진 얼굴이 되었다. 엑셀핸드는 머리가 아프다는 표정을 지으며 눈을 감아버렸고 칼은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내가 할 일이 없어져서 레니와 함께 스무고개 놀이나 말잇기 놀이라도 할까 생각할 무렵, 칼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첫 번째 증거 말인데………….”
제레인트와 아프나이델은 동시에 고개를 들어올렸다. 아무래도 두 사람 모두 별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난 피식 웃어버리고는 칼을 바라보았다.
“첫 번째? 첫 번째라면 루트에리노 대왕의 여덟 별 말씀인가요?”
“응. 그래. 그 비유는, 언뜻 보기엔 그럴듯해 보이지만 사실 이상한 말이지.”
“어째서 이상한 말인데요?”
“왜냐하면 그 여덟 별이 제로딘, 우타크, 캄드리, 라인버그, 차넬…… 또, 일스와 허즐릿, 멜다로의 여덟 명이긴 하지만, 사실은 기사들은 모두 아홉 명이거든.” 제레인트가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예? 아홉 명이라니………, 핸드레이크를 포함해서 말입니까?”
“아니지요. 핸드레이크는 기사가 아니니까요. 하지만 모두가 간과하는 기사가 하나 있습니다.”
마차 안의 사람들은 모두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어라? 숨겨진 기사가 하나 있었던 말인가? 칼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루트에리노 대왕 자신도 기사였지 않습니까? 그 스스로도 기사 중의 기사라고 자부하셨으니까요.”
“아! 그렇군요!”
아프나이델은 얼빠진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고 제레인트는 손가락을 딱 퉁겼다. 아이고 맙소사. 그렇군! 누가 뭐라고 해도 루트에리노 대왕 자신도 기사다. 왜 그걸 생각하지 못했지? 넥슨의 말마따나 루트에리노 대왕은 기사도 맹신자인데 말이야. 칼은 침착하게 말했다.
“따라서 그 별이라는 것이 기사들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엄밀하게 말해서 아홉 별이라고 불러야 정확한 것이 됩니다. 루트에리노 대왕 자신은 항상 다른 기사들을 친구로 대했지 상명하복의 주종관계로 인식하기를 꺼려 했으니까…………… 그래야 더 그분의 성격에 맞는 일이 됩니다.”
“맙소사! 그렇군요. 아홉 별이라고 불러야 되는군요.”
그때 레니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하지만 보통 루트에리노 대왕의 여덟 별이라고 하잖아요.”
“그렇지요. 레니 양. 그래서 아무도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은 것입니다. 하지만 네드발 군의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 그 여덟 별이라는 명칭이 아무래도 이상하 게 여겨지는군요. 어쩌면…… 그 여덟 별에서 루트에리노 대왕이 빠져 있다는 사실 때문에 그런 식으로 불리게 된 것인지도 모르지요. 아홉 별이라고 부르는 대신 루 트에리노 대왕의 여덟 별이라는 식으로.”
“음. 그럴 듯합니다. 일리가 있어요. 그러니까 후치의 말이, 아니 넥슨의 말이 맞다면………… 이렇게 된 것이군요? 루트에리노 대왕과 여덟 기사들은 원래 자신들 아홉 명을 가리켜서 여덟 별의 추구자, 에잇 스타 시커라고 불렀는데, 그 명칭이 와전되어 루트에리노 대왕의 여덟 별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군요?”
제레인트는 열띤 목소리로 말했다. 칼은 빙그레 웃었다.
“예. 하지만 이건 억지로 끼워맞춘 말이 될지도 모르지요. 넥슨의 말 이외엔 아무 증거가 없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상당히 진실성이 있을 법한 이야기입니다. 대왕의 성격을 생각해 보자면…….”
아프나이델 역시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칼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두 번째 증거. 드래곤 로드의 전 종족 지배…………. 글쎄. 이건 굳이 종족의 창생 사멸을 결정하는 신비의 보석이 없어도 설명이 가능할 것 같은데. 드래곤 로드 의 강력함이야 말할 필요가 없지 않는가.”
엑셀핸드는 꾹꾹 눌러참았다가 터지는 목소리로 외쳤다.
“보게! 칼. 지금 자네는 그 웃기는 이야길 사실로 받아들이려 하는 것 같구만?”
칼은 잠시 당황한 얼굴로 엑셀핸드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곧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니오. 사실인지 거짓인지 판단하기 위해 고찰해 보고 있는 중입니다.”
엑셀핸드는 굵은 눈썹을 잔뜩 찌푸리며 칼을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그는 체념한 목소리로 말했다.
“원, 그놈의 혀 잘도 돌아가는군. 하지만 그거 정말 웃기지도 않는단 말일세!”
“웃기기로 말한다면야…………….”
칼은 갑자기 창밖을 바라보았다. 마차 안의 사람들은 모두 칼의 시선을 따라 창밖을 바라보게 되었다. 칼은 혼잣말을 하듯이 가락을 붙여서 말했다.
“어쩌자고 저렇게 많은 구름이 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지요?”
“뭐라구?”
엑셀핸드는 콧잔등을 한 방 맞은 표정으로 말했다. 난 당황한 얼굴로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과연 또 다른 구름 하나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칼은 변함없이 침착한 목 소리로 말했다.
“어쩌자고 저렇게 많은 흙이 있지요? 왜 저녁이면 가라앉고 말 태양이 저렇게 힘겹게 솟아오르는 것일까요? 도대체 그 많은 나비와 그 많은 꽃들은 어쩌자고 세상을 저토록 어지럽혔을까요? 가을이 다가오면 모두 시들고 사라져버릴 것들이? 어쩌자고 사람들은 서로를 사랑하고 죽어버릴 운명의 자손을 힘겹게 키워내는 것일까요?” “여, 여보게?”
“별은 또 왜 그렇게 많다는 말입니까? 땅 아래 보석은 왜 그리도 많지요? 새들은, 저녁에 둥지로 찾아들 새들은 왜 아침이면 깃털에 묻은 이슬을 흩뿌리며 날아오르 는 것이지요? 양지기는 피리를 불어 모아들일 양들을 왜 풀어놓는 것이지요?”
엑셀핸드는 입을 딱 벌린 채 칼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칼은 변함없이 창턱에 팔을 괸 채 약간 지루하다는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는 다시 바드처럼 웅얼거렸 다.
“소멸의 축복을 받지 못한 신들은 우리를 경배할까요?”
“예?”
제레인트의 숨막힌 반문이었다. 그러나 칼은 그것도 무시해 버렸다.
“웃기기로 따진다면 이 만물, 이 세계보다 더 우스운 것이 어디에 있을까요.”
마차 안에는 칼 이외에 다섯 명이나 되는 일행들이 있었지만 그중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칼은 누구에게도 얼굴을 보여주지 않은 채 그렇게 밖을 쳐다보았다. 마 차 바퀴 구르는 소리, 그리고 지붕 위에서 운차이를 괴롭히고 있는 네리아의 목소리만이 가늘게 들려왔다.
칼은 갑자기 고개를 돌리더니 히죽 웃었다.
“루트에리노 대왕의 말이 생각납니다. 바보는………….”
“앞을 보지만 뒤를 생각하지요.”
난 스스로 놀랄만큼 차분하게 대답했다. 칼은 여전히 그, 약간은 바보처럼 보이는 미소를 띤 채로 말했다.
“그렇지. 네드발 군. 범부는?”
“앞을 보지만 뒤를 생각하지요.”
“현자는?”
“앞을 보지만 뒤를 생각하지요.”
칼은 기분 좋게 웃더니 시트 속으로 몸을 파묻으며 팔짱을 끼었다.
“넥슨의 말에 대해서는 좀더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칼은 그 말을 작별 인사로 남기면서 자신의 사색 속으로 침잠해 버렸다. 좌중의 한 사람이 자기 속으로 몰입해 버리니 다른 사람들도 대화를 계속하기 어려웠다. 그 래서 모두들 입을 다물고 제각기의 생각 속으로 파고들었다.
난 지루한 심정으로 자신도 모르게 베어져나간 귀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음. 꺼끌꺼끌한 느낌이 참 괴상한 기분에 젖게 만드는군. 그때 레니가 내 팔꿈치를 찌르 는 것이 느껴졌다.
“저, 후치야. 그게 무슨 말이니?”
“응?”
“바보도, 범부도, 또 현자도 모두 앞을 보지만 뒤를 생각한다고?”
“하하하…….”
갑자기 아그쉬의 그 멍청한 인용이 생각나서 난 웃어버렸다. 그러자 레니는 눈살을 찌푸렸고 난 즉각 사과했다.
“다른 이야기가 생각나서 웃었어. 그 이야기는…………… 말 그대로지.”
“말 그대로라구?”
“그래.”
“뭐가 그래?”
“그냥 그래.”
레니는 눈썹을 곤두세우더니 말했다.
“너, 지금 나 놀리는 거지? 난 학교 같은 것 다닐 여유가 안 되었단 말이야. 그러니까………….”
“나도 학교는 구경도 못해 보고 자라난 사람이야. 그냥 생각해 봐, 레니. 이건 별것 없는 말장난이야.”
레니는 새침한 표정을 지으면서 대답했다.
“난 말장난은 같이 웃을 수 있을 때만 좋아해.”
“하하. 그러니? 음. 앞을 보면서도 뒤에 따라오지도 않는 추적자를, 혹은 자신의 과거, 어제의 실수 따위를 생각하면서 진구렁에 발을 빠뜨리는 사람이 있다면 넌 그 사람을 뭐라고 부를 거지?”
“바보…………지?”
“그래. 바보는 마치 곰곰이 생각하기만 하면 지나간 실수가 바로잡아질 것처럼 믿지. 과거는 절대로 바꿀 수 없는 것, 완전히 고정된 것인데 말이야.”
“그럼 범부는?”
“범부도 어떤 의미에선 바보와 마찬가지야. 다른 점이 있다면 지나간 실수를 생각해서 앞으로는 실수를 하지 않는 것이 범부, 보통 사람일 뿐이지. 하지만 범부라고 해봐야 결국은 그 사람도 과거가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야. 바보든 범부든 과거라는 시간의 산물이지. 바보는 그것에 매달리고, 보통 사람들은 그것에서 배운다 는 점이 다를 뿐이지.”
제레인트와 아프나이델의 저 감춰진 시선을 느끼는 것은 퍽 유쾌한 일인걸? 두 사람은 모두 안 듣는 척하면서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고 두 사람 모두 능숙 한 거짓말쟁이나 사기꾼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라 자신의 행동을 잘 감추지는 못하고 있었다. 키키키키. 레니는 한참 고민하는 얼굴이 되었다가 그 풀려버린 표정 그대로 말했다.
“그럼……현자는?”
“현자는 과거의 시간과 상관 없는 존재가 현자야. 그는 현명하므로 과거를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미래를 깨달을 수 있지. 사실 이런 사람은 드물지. 핸드레이크나 그 렇게 불릴 수 있을까? 어쨌든 그런 사람들은 역사책을 읽지 않아도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사람들이지. 왜냐하면. 그들은 사물의 보이지 않는 이면을 생각하니까. 여기서는 사실 ‘앞’이라는 말과 ‘뒤’라는 말이 다른 의미로 쓰이는 거야. 음, 그러니까 레니, 넌 지금 나의 앞을 보고 있지?”
“그렇지.”
“그렇지만 만일 네가 내 앞 모습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것을 생각해서 볼 수 있다면 넌 현자인 셈이지.”
“아……, 그래?”
“그래.”
레니는 입술을 잡아당기면서 곰곰이 생각에 잠기는 표정을 지었다. 난 고개를 돌리다가 눈을 감고 있는 칼의 얼굴을 보게 되었고, 칼의 입술 가장자리가 슬며시 올라 가 있는 것을 보고는 폭소를 터뜨리지 않기 위해 허벅지 사이에 두 손을 파묻고는 꽉 틀어쥐었다. 우헤헤헤!
지붕 위에서는 나이트호크가 간첩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가운데, 사색에 잠긴 여섯 명을 태우고 두 명의 전사가 모는 마차는 신나게 신나게 달려갔다. 해가 지는 방 향, 저녁의 고향으로. 그러나 가장 무서운 드래곤의 아침을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