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죽어야 하는 존재들에게 고한다. 우리들의 약속된 휴식인 죽음은 문 밖에 도래하여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나 오늘 그대의 손엔 이 책 한 권이 쥐어져 있음이니, 그대는 이제 유구 한 시간의 흐름을 농락할 준비가 된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를 그대에게서 사라지게 하라. 그대는 이제 시간을 벗어난 존재이니……………
「품위 있고 고상한 켄턴 시장 말레스 추발렉의 도움으로 출간된, 믿을 수 있는 바이서스의 시민으로서 켄턴 사집관으로 봉사한 현명한 돌로메네 압실링거가 바이서스의 국민들에게 고하는 신비롭고도 가치 있는 이야기」 돌로메네 지음, 770년. 제1권 10쪽.
1
마부석에 앉아 있던 샌슨이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인지 싶어 바라보니 샌슨은 손을 들어 왼쪽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또 그 녀석들이야.”
이마에 손을 얹고 바라보니 왼쪽으로 한 9000큐빗쯤 떨어져 있는 언덕 위에 솟아오른 작은 점들이 몇 개 보였다. 이 막막한 황야에서 저렇게 작은 것을 보고 있자니 눈이 가물가물해진다. 난 함께 지붕 위에 앉아 있던 운차이를 바라보았고 운차이는 언덕 쪽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난 다시 앞을 보면서 투덜거렸다. “젠장. 덮치려면 그냥 덮치든가 아니면 몰래 따라오든가. 저게 도대체 무슨 꼴이야? 빤히 보이는 위치에서 사라지지도 않고 가까이 오지도 않고.”
샌슨 역시 언짢은 표정으로 괜스레 채찍을 휘둘렀다. 천천히 걷고 있던 말들은 갑작스런 명령에 당황하여 대오를 흐트러뜨릴 뻔했지만 그들을 선도하는 선더라이더 의 지휘하에 곧 일사불란하게 마차를 끌기 시작했다. 마차를 끌기 위해 훈련된 적도 없는 말들치곤 꽤나 잘 달리고 있단 말이야.
운차이는 하던 일, 그러니까 나이프로 나무 토막을 깎는 일을 다시 시작했다. 마차가 갑자기 속력을 높이자 그의 다리 사이에 놓여 있던 나무 부스러기들이 바람에 흩날렸다. 그러나 운차이는 그 마차의 흔들림 속에서도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나이프를 놀려대었다. 굉장하군. 홀릴 만한 솜씨야.
운차이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녀석들. 어떻게 야생마를 붙잡았을까.”
내 옆에 엎드려서 발을 까딱거리면서 운차이의 그 굉장한 작업을 구경하던 네리아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저 작자들이라면 자이펀 간첩으로 하여금 여자에게 말을 하게 하는 일도 가능할걸?”
운차이는 나무토막을 다듬던 손을 갑자기 멈추었다. 그는 네리아를 지그시 바라보았고 네리아는 엎드려 턱을 고인 자세로 눈을 치켜떠서 운차이를 마주보았다. 운차이는 다시 고개를 숙여 나무 토막을 바라보며 말했다.
“후치. 웃기지도 않는다고 전해 줘.”
난 말을 전해 주지 않았다. 귀찮은 일이야. 지붕 위로 올라오면 재미있을 것 같아서 올라왔더니 네리아와 운차이 사이에 끼여 피곤하기만 하다. 네리아는 몸을 뒤집 더니 내 허락도 없이 내 다리를 베고 누워서는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거리가 어어얼마나 떨어져 있니, 후치야?”
“한 9000큐빗 정도. 능선을 따라 우리들과 같은 방향으로 달려오고 있군요.”
“그럼 우리 보라는 듯이 달린다는 거네?”
“그렇지요.”
네리아는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 때문에 눈을 깜빡거리면서 말했다.
“운차이야, 운차이야. 저 친구들 짐은 있니?”
운차이는 나이프를 멈추더니 네리아를 향해 눈을 힘껏 부라렸다. 하지만 네리아는 말을 마치자마자 이미 두 손으로 눈을 가린 후였다. 그녀는 그렇게 눈을 가린 채 혀를 날름거렸다.
“안 보이네, 뭐? 마음대로 눈을 부라리라구. 에헤헤헤………….”
운차이는 씩씩거리더니 다시 나이프를 들고 나무 토막을 뚫어지게 보면서 거칠게 말했다.
“짐은 무기와 작은 꾸러미 몇 개뿐이라고 전해 줘!”
내가 말하기도 전에 네리아가 먼저 말했다.
“아, 그러니? 꾸러미라. 어디서 여행 물품을 구했을까?”
운차이는 이를 북북 갈기 시작했다. 그래서 내가 재빨리 대답했다.
“우리는 작은 마을 한두 개를 지나왔잖아요. 저 친구들도 우리 뒤를 곧장 따라왔으니까 아마 그 마을들 어디에선가 구했겠지요.”
“그렇구나. 그런데 어쩌겠다는 걸까? 저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만 확실히 보이는 곳에서 계속 어정거리고 있으니 말이야.”
“음. 이상하지요. 넥슨이 원하는 것이라면 레니겠지요. 우리들을 죽이고 싶어하지만 그건 감정이 개입되는 문제고. 뭔가 의미를 가지고 할 만한 일이라면 우리들에 게서 레니를 납치하는 것이겠지요?”
“그래 그래.”
네리아는 눈을 감은 채 대답했다. 난 다시 왼쪽 멀리로 희미하게 보이는 그 점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몰래 따라오는 것이 좋을 텐데. 도대체 무슨 생각일까요? 운차이?”
“왜?”
운차이는 나무 토막에서 시선을 떼지도 않은 채 대답했다. 난 뭐라고 말하려다가 다시 운차이의 손놀림에 매혹되어 버렸다. 히야! 그거 참. 어떻게 달리는 마차 위에 서 저렇게 나무를 깎을 수 있을까? 운차이는 어려울 것이 전혀 없다는 듯이 쉽게쉽게 손을 놀리고 있었지만 그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나무 토막 속에 숨겨져 있던 조 각품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런데………… 그런데 저게 도대체 무얼까? 지금 봐서는 아무래도 뭔지를 모르겠는걸.
“불렀으면 말을 해.”
운차이는 다시 고개도 들지 않고 말해서 난 그게 나에게 한 말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아, 혹시 저 친구들이 왜 저런 이상한 짓을 하는지 짐작할 만한 거 없어요?”
운차이는 내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들고 있던 나이프를 휙 던져서 마차 지붕에 꽂았다. 그러고는 깎고 있던 나무 토막을 품 속에 넣더니 갑자기 마차 옆으로 몸을 날 렸다.
“으악! 운차이!”
아래, 즉 마차 안에서도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운차이는 지붕 가장자리를 쥐고는 마차 옆으로 상반신을 거꾸로 내린 것에 불과했다. 아이고, 떨어지는 줄 알 았네! 운차이는 그런 불편한 자세로 마차 안을 향해 말했다.
“야, 드워프. 담배 좀 줘.”
곧 아래에서 엑셀핸드의 진노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이, 이놈! 카리스 누멘의 모루와 망치 사이에 넣고 석 달 열흘 두드려버릴 녀석! 네놈이 떨어지는 줄 알고 간 떨어질 뻔했잖냐!”
“간 떨어져 봐야 그 짧은 몸통 안에서 어딜 가겠어. 담배나 줘.”
곧 마차가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붕 아래에서는 동시다발적으로 외침소리들이 들려왔다. “으악! 엑셀핸드! 참아요!” “그, 그 도끼! 그 도끼! 여긴 실내입니다!” “으아아아! 테페리여!” “아빠! 어, 어멋! 아빠!” 마차가 뒤집어질 정도의 요동이 일어나더니 잠시 후 운차이는 무표정한 얼굴을 다시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의 입엔 파 이프가, 손엔 담배 쌈지가 들려 있었다. 네리아는 누운 채 배를 붙잡고 웃어대었다.
운차이는 담뱃가루가 날리지 않도록 바람을 등지고서는 주의 깊게 파이프를 채웠다. 그러고 나서 그는 파이프를 입에 딱 물더니 그제야 자신이 간과한 사실을 알아 차린 표정을 지었다. 난 그가 무엇을 간과했는지를 지적해 주었다.
“그거 어떻게 불 붙일 생각이지요?”
운차이는 입술을 씰룩거리면서 다시 파이프를 손에 들었다. 그때 네리아가 자신의 대거를 뽑더니 운차이에게 건네었다. 운차이는 의아한 표정으로 네리아를 바라보 았고 네리아는 헤죽거리며 말했다.
“손잡이 잘 봐. 발화 장치가 있어. 너도 간첩이니까 더 설명 안 해도 되지?”
아, 참. 그랬지. 네리아의 대거엔 그런 장치가 있었지. 운차이는 네리아가 내민 대거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서툰 손놀림으로 그것을 받아들었다. 잠시 후 그는 대거 손잡이를 어떻게 돌리는 듯하더니 곧 파이프에 불을 붙이는 데 성공했다. 그는 잠시 대거를 바라보더니 체념한 표정을 지으며 그것을 나에게 건네었다.
“돌려줘. 음. 그리고 고맙다고 전해 줘.”
이거야 정말……………. 난 기막힌 표정을 지으며 손을 내밀었지만 내 손보다 더 빠르게 네리아의 손이 튀어나갔다. 네리아는 그것을 받아들고는 한쪽 눈을 찡긋했고 운차 이는 헛기침을 몇 번 뱉었다. 마치 담배를 처음 피우기라도 하듯이.
운차이는 지붕 뒤쪽에 묶여 있던 짐들에 등을 기대며 파이프를 피우기 시작했다. 그의 입에서 나온 연기는 순식간에 마차 뒤로 날아가 버렸다.
“저 친구들이 저런 짓을 하는 건, 시위라고밖에 볼 수 없지.”
“시위라구요?”
“그래. 방심하지 마라. 언제든지 공격하겠다. 뭐 그런 시위지. 지금 저쪽에선 살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아.”
“살기가 느껴지지 않는다니. 그럼 우릴 죽이려 드는 것이 아니란 말이에요?”
“그렇진 않다. 살기는 당장 죽이려 들 때만 느껴지는 것이다.”
“아, 그래요?”
네리아는 좀더 잘 듣기 위해 옆으로 누운 자세가 되었다. 운차이는 네리아를 못 본 척하면서 계속 말했다.
“지금 저 녀석들은 우릴 죽일 마음이 없지. 지금은 말이야. 하지만 마음속으로야 그런 생각이 있을 수도 있지. 그러나 생각하는 것이 기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마음 속의 생각이나 사상 등이 행동으로 전환되기 직전, 그러니까 내면이 외면을 건드리기 시작할 때 기의 발출이 일어나게 된다.”
이 무슨 오크 밀알 헤아리는 소리냐? 난 얼떨떨한 얼굴로 운차이를 바라보았지만 운차이는 평온한 어조로 계속 설명했다.
“간단히 말하면 내면의 힘이 외면으로 나오려 할 때 몸 주위의 기가 밀려나온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거다. 잡담 제하고, 저 친구들에게 공격 의사는 없다. 그 러니 시위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지.”
“음. 그럼 왜 저런 시위를 하는 걸까요?”
“부르는 거다.”
“불러요?”
“우리를 부르는 것이지. 계속 우리의 신경을 건드려댈 것이다. 이건 시작에 불과해.”
“마음대로 하라고 해요. 그렇지. 운차이? 당신 저기까지 들리도록 고함 지를 순 없어요?”
“너무 멀어.”
“음. 어차피 오늘 저녁이면 바이서스 임펠에 들어가게 될 텐데요, 뭐. 저렇게 쫓아오는 짓도 더 못하지 않겠어요? 아무래도 수도 가까운 곳에서 돌아다니긴 힘들겠지 요.”
“그렇다면 오늘 오후로군.”
“예?”
“아냐.”
운차이는 파이프를 꺼내더니 담뱃재를 바람에 다 날려보냈다. 그는 파이프와 담배 쌈지를 자연스럽게 주머니에 쑤셔넣더니 다시 나이프와 나무 토막을 붙잡았다. 난
다시 고개를 돌려 넥슨 일행을 바라보았다. 정말 대단한 놈들이야.
저렇게 지칠 줄 모르고 계속해서 달릴 수 있다니. 게다가 수완도 좋지, 어떻게 야생마들을 붙잡았을까? 겨울철이 되면서 북부 대로에서 뛰놀던 야생마들은 남하를 한다고 한다. 아마 그렇게 남하한 야생마를 붙잡았겠지. 하지만 녀석들을 길들이는 것, 그리고 넥슨의 경우엔 상태를 회복하는 데에도 꽤 시간이 걸렸을 텐데 저렇게 우리 꽁무니를 쫓아오고 있는 것이다. 아니………….., 우리를 앞지르고 있다고 말해야 되나?
“앞으로 달려가는데?”
샌슨이 내 생각을 뒷받침해 주었다. 저 먼 언덕 쪽에서 어른거리고 있던 까만 점들은 갑자기 속도를 내면서 앞으로 죽죽 나아갔다. 이렇게 먼 거리에서도 저 움직임 을 느낄 수 있는 것으로 보아 대단한 속도를 내고 있는 것이 분명하군. 샌슨 옆에 앉아서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던 길시언은 그 모습을 보더니 크게 감탄했다. “저게 바로 바람의 아들, 야생마다! 아아! 하지만 선더라이더, 넌 저들보다 훨씬 더 커다란 엉덩이를…………. 이봐, 관두자구! 이 용광로에 쑤셔박을 녀석아!”
길시언의 아름다운 감탄은 버릇 없는 마법검에 의해 방해를 받게 되었다. 그때 마차 옆의 창문에서 칼의 얼굴이 불쑥 나왔다. 칼은 잘 보이지도 않을 텐데도 불구하 고 마치 잘 보인다는 듯이 이마에 손을 척 올리고는 말했다.
“우릴 앞질러 가고 있나, 네드발 군?”
“그래요. 칼.”
“그래? 음. 조심해야겠군. 저 친구들이 우릴 노리려면 오늘 오후밖엔 시간이 없을 테니까. 우리 앞길에 뭔가 고약한 계책을 준비해 둘지도 모르겠군.”
“칼이라면 세 명의 인원으로 달리는 마차를 붙잡기 위해 어떤 방법을 쓰겠어요?”
“생각 좀 해봐야 대답할 수 있겠군.”
칼은 그 말만 남겨두고 다시 마차 안으로 들어갔고 난 저 앞으로 사라져 가는 점들을 바라보았다. 이제 그 점들은 꽤 앞선 위치를 달려가고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자 그들의 뒤로 일어나는 먼지 구름을 볼 수 있었다. 확실히 굉장한 속도를 내고 있는 모양이군.
그 굉장한 속도는 야생마가 내는 것인가, 아니면 넥슨 당신이 내는 것인가.
난 넥슨 본인이라도 대답하기 곤란할 질문을 잠시 떠올렸다. 어느덧 넥슨 일행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잔뜩 긴장을 했는데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아무런 일이 없었는데도 뭔가 대단히 고약한 일을 당해 버린 느낌이 든단 말이야. 우리는 그날 오후 내내 넥슨의 습격을 대비하며 어깨를 바짝 긴장시키고 있었지만 서녘 하늘의 구름들이 보랏빛으로 물들 무렵이 될 때까지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어깨가 꽤나 아 팠다.
게다가 마차 지붕 위는 확실히 두번 다시 선택할 만한 장소도 아니었다. 하루종일 황야에서 몰려오는 흙먼지를 뒤집어쓴 끝에 지금 내 몸엔 조금 움직이기만 해도 먼 지 구름이 일어날 만큼의 먼지가 쌓였다. 난 맥빠진 동작으로 먼지를 털어내었다. 풀썩풀썩.
“켁켁! 숨막혀. 그러지 마.”
“그러지 말기는요. 네리아도 좀 털어요. 붉은 머리가 지금 회색 머리가 되어 있다고요.”
“자기 전에 씻을 수 있겠지, 뭐.”
“그건 가능하겠어요. 바이서스 임펠입니다.”
“다 왔어? 어디? 와!”
네리아는 지붕 위라는 것도 상관하지 않는 동작으로 벌떡 일어났다. 난 어깨를 털어내면서 눈앞으로 점점 더 커져오는 바이서스 임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래쪽 에서 제레인트는 창문 밖으로 상반신을 거의 다 내밀고는 팔을 휘두르며 환성을 질렀다.
“이야아아! 바이서스 임펠! 나 제레인트가 간다앗! 멀고 험난한 길을 달려, 숱한 모험과 재난을 뚫고서, 마침내 내가 간다!”
제발…………, 시내에 들어가서까지 저러지는 말아야 할 텐데. 제레인트의 반대쪽 창문으로는 레니가 몸을 내밀고 있었지만 레니의 경우엔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있을 뿐이다. 난 레니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어때, 레니야?”
레니는 잠시 날 올려다보더니 다시 바이서스 임펠을 바라보며 쌕쌕거리는 숨소리를 내다가 간신히 말했다.
“너무……, 글쎄.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 지금은 너무 크다는 생각밖엔 안 드는걸.”
난 고개를 끄덕였다.
언덕 위에서 내려다본 바이서스 임펠의 모습은 두 번째로 보는 나에게도 굉장한 장관이었다. 한없이 많은 지붕들과 번쩍이는 탑, 아름다운 건물들과 신전, 끝없이 늘 어선 대로들은 지평선까지 계속 이어져 있는 듯했다. 그리고 그 장대한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성벽은 그 굉장한 높이에도 불구하고 터무니없이 긴 길이 때문에 낮아 보였다.
나는 그랜드스톰의 모습을 찾아보기 위해 한참 동안 머리를 움직여야 했다. 분명히 외성 쪽에 붙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임펠리아는 도시 중앙 쪽 가까이 있을 텐데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도시 중앙 쪽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문득 내가 전혀 엉뚱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이서스 임펠은 내게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멀리까지 펼쳐져 있었고, 그래서 내가 바라보는 곳은 중앙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외곽 쪽이라고 불러야 할 만한 곳이었다. 석양을 받아 아스라 이 황금빛으로 빛나는 임펠 리버의 모습은 바이서스 임펠이라는 저 미녀의 머리에서 지평선을 향해 늘어뜨린 금발처럼 보였다. 아름다운 도시였다.
“저, 저게 뭐야? 도시에 불이 난 거야?”
레니는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나도 그때 바이서스 임펠의 가로등들이 켜지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대로들을 따라 천천히 점멸하듯이 피어나는 가로등들은 마침내 별의 강을 이루었다. 환한 빛덩어리들이 대로를 따라 줄지어 늘어선 모습, 가로세로로 늘어서 불타오르는 저 모습은 아마도 죽을 때까지 잊혀지지 않을 모습 이었다. 난 자신도 모르게 목메인 목소리로 말했다.
“저건.. 불장대야.”
성문 통과에는 시간이 조금 지체되었다. 제레인트와 레니는 외국인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제레인트는 계속 싱글벙글거림으로써 성문 경비 대원들이 엄한 표정을 짓는 것을 포기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레니의 경우엔 성문 경비대원들의 관심을 끄는 데도 실패해 버렸다. 내가 경비 대원이라도 저런 소녀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진 않겠다. 게다가 길시언이 경비 대원들에게 몇 마디를 하자 그들은 당황한 표정까지 지어보였다. 궁성까지 안내하겠다는 성문 경비 대장의 말을 점잖게 거절한 다음 우리들은 시내로 들어서게 되었다. 성문을 들어서자 저녁이면 오히려 더욱 부산해지는 바이서스 임펠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제레인트는 그대로 발작을 일으키는 것이 아닌가 싶은 모습이었다. 마차가 성내로 들어서자마자 제레인트는 모든 방향을 향해 손가락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으와! 후치! 저 불장대, 저 불장대!”
“가로등!”
“아, 그래. 가로등. 저 가로등은 매일 마법사들이 와서 켜는 거냐?”
“영원히 켜져 있는 거예요. 낮에는 덮어두는 거지요. 그리고 제발 목소리 좀 낮추면……
“맙소사! 저 건물 높이 좀 봐! 2층, 4층…… 5층이야! 어떻게 5층짜리 건물이 있을 수가! 테페리여, 하늘 아래 어찌 저런 것이! 으아! 칼, 카아아알! 저게 뭐지요? 저 기, 언덕에 있는 저, 저, 저!”
‘그랜드스톰입니다.’라는 칼의 대답은 매우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래도 마차 안에 있는 사람들은 좀 나은 팔자지. 마차 지붕 위에 올라앉은 나와 네리아, 운차이는 시 민들의 시선으로부터 몸을 숨길 곳도 없단 말이야. 난 주위에서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 매우 비통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마치 그런 표정을 지으면 저 행인들이 우리가 간질 환자를 옮기고 있다고 여기곤 우리 처지를 동정해 줄 듯이. 하지만 행인들은 우리 쪽으로 많은 시선을 보내지는 않았다.
네리아는 지붕 위에 오도카니 앉아서 게으른 동작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그녀는 갑자기 내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상하지?”
“예.”
확실히 뭔가 좀 이상했다. 주위가 너무 조용한 것이다. 저번에 우리들이 찾아왔을 때는 트윈문의 축제였기 때문에 소란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고려한다 하 더라도 이건 너무 조용하다. 거리를 걷는 인파들의 모습도 내 기억에 비추어봐서 5분의 1도 안 되는 것처럼 보였다. 저번에 찾아왔을 땐 그렇게도 내 눈을 즐겁게 해 주던 그 아리따운 아가씨들이 다들 어디로 가버린 거지? 그리고 골목골목을 돌 때마다 들려오던 노랫소리와 웃음소리들은 다 어떻게 된 거지? 이렇게 소란스러운 일 행이 탄 6두 마차라면 제법 구경거리가 될 것인데도 시민들은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아니…………, 그런 것이 아니다.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신경을 써야 될지 모르는 것이다. 거리를 걸어가는 사람들 중엔 어디서든지 알아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마치 이렇게 희한한 것은 처음 본다는 듯이 넋을 빼놓은 채로 가로등을 바라보는 사람, 주위의 위용에 짓눌려 잔뜩 위축된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 그러고 보니 긴 여행에 지친 사람들의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커다란 가방이나 짐꾸러미를 가진 사람들, 그리고 어린 아이들의 손을 꼭 부여잡은 채 걸어가는 부모들의 모습도 보였다. 그 꼬마들은 온몸에 먼지가 켜켜로 쌓인 채 피로에 지쳐 꿈결처럼 걸어가고 있었다. 확실히 바이서스 임펠의 시민들이 아니다. 저 사람들은 어디서 온 사람들일까? 그리고 왜 수도로 온 것일까?
난 운차이를 바라보았다.
“운차이. 당신 떠나올 때도 이랬어요?”
운차이는 찌푸린 얼굴로 주위를 바라보다가 음산하게 말했다.
“아니.”
“그럼 바이서스 임펠이 갑자기 이렇게 음산하게 바뀌었다는 건가요?”
“전쟁이니까.”
네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드디어 수도에까지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는 모양이네. 그 오랜 전쟁에도 끄떡없던 이 도시도 이젠 전쟁의 폭풍 속에서 혼자 꽃을 피울 수는 없는 거야.”
“시적이군요.”
제레인트와 레니는 시내 구경에 정신이 팔려 있었지만 난 불안했다. 국경까지, 아니 전선까지 굉장한 거리를 두고 있는 이 도시에도 전쟁의 여파가 밀어닥친다는 것 인가? 교역이 중단되고 젊은 남자들이 전선으로 달려가버린 여파가 이제야 이 거대한 도시의 위용을 잠식하기 시작하는 것인가?
저녁 별들이 가로등 위의 어둠 속으로 무리지어 움직일 무렵, 유니콘 인의 말구종은 이제는 정말 더 못 참겠다는 목소리로 우리를 맞이하게 되었다.
“맙소사! 이, 이, 이번엔 6두 마차입니까!”
제레인트는 이 해괴한 인사에 대해 몹시 의아한 표정이 되었지만 우리는 별 설명을 하지 않았다. 말구종은 여관 안쪽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주인님! 주인님! 나와보세요! 놀랄 거예요!”
“뭐야, 이 녀석아. 왜 그렇게 고함을 지르는 거야.”
여관 주인장 리테들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나왔다. 길시언이 쾌활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여! 오래간만입니다. 주인장!”
리테들은 퉁겨지듯이 뒤로 물러나다가 그대로 뒤통수를 건물벽에 들이박고 말았다. 그래서 오래간만의 재회는 먼저 리테들 씨의 뒤통수에 대한 심심한 애도의 표현 으로 시작되게 되었다.
“괜찮으십니까?”
“맙소사! 돌아오셨군요! 이건 또 뭡니까? 이런 6두 마차라니? 다음에는 유니콘이나 드래곤을 타고 오실 겁니까? 굉장한 마차군요! 엘프 마부는 없는 겁니까? 아, 옛 어르신들 말씀대로 세 집 처녀가 애를 낳으면 놀랄 일도 없는 법이라지요. 어서들 들어오십시오. 맙소사! 당신들이 돌아왔다니, 이 근처의 소문 좋아하는 패거리들은 모조리 몰려들겠군요! 우리는 아직도 그날 밤의 이야기를 즐겨 한답니다. 식사, 술, 침대, 욕탕, 화장실 어느 쪽입니까?”
길시언은 싱글거리면서 대답했다.
“그런 질문을 받은 손님들은 대개 무슨 대답을 합니까?”
“보통 앞의 두 개올습니다. 하지만 몹시 푸르죽죽한 얼굴을 한 채 짓눌린 음성으로 다섯 번째를 지정하시는 손님들도 계시지요. 와하하!”
난 아프나이델이 몹시 푸르죽죽한 얼굴을 한 채 짓눌린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을 깨닫고는 그 대신 리테들 씨에게 다섯 번째도 있다고 말했다. 아프나이델은 겸연쩍은 얼굴로 말했다.
“아니, 세 번째야. 마차 때문에 멀미가 나려고 해.”
아프나이델이 휘청거리는 모습을 보고서 엑셀핸드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부축하려고 했다. 키가 크고 깡말라서 더욱 껑충해 보이는 아프나이델이 탄탄하고 작 달막한 엑셀핸드의 부축을 받아 여관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은 여관의 하인 하녀들을 미소짓게 만들었다.
잠시 후 레니와 네리아는 시간이란 원래 욕탕에서는 흐르지 않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처럼 욕탕에 틀어박혀 있게 되었다. 우리들은 먼지투성이가 된 옷을 조심스럽 게 벗어던지고 얼굴과 팔 등을 대충 씻은 다음 홀로 내려왔다.
홀은 고요했다. 칼은 근심스러운 얼굴로 홀을 둘러보더니 맥주잔을 들고 온 리테들 씨에게 말했다.
“손님들이 적은 것 같군요.”
“말도 마십시오. 이런 시절에 여행을 하는 여행자가 진짜 금테 두른 여행자지요. 이 자식아! 그 접시는 거기가 아니야! 아, 실례했습니다. 요즘은 저도 괜히 까탈을 부리는 일이 많군요. 원참. 여관업으로 밥먹고 산 지도 30년이 넘었지만 올해 같은 불경기는 보다보다 처음입니다.”
“전쟁 때문입니까?”
“아니, 여러분들은 도대체 어딜 가 계셨던 겁니까?”
리테들 씨는 우리들에게 맥주잔을 돌리더니 벽난로에 장작 하나를 던져놓고는 불쏘시개로 잠시 벽난로를 뒤적거려 공기가 통하도록 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파이프 를 꺼내어 물고는 우리 테이블에 같이 앉았다. 홀 안엔 거의 손님들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는지라 주인장은 마음대로 게으름을 부리고 있었다.
리테들 씨는 파르스름한 연기를 하늘로 날려보내더니 풀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수선하기 짝이 없습니다. 뭐….., 이런 일이 일어나면 좋아하는 축들도 있긴 하지요. 하지만 말입니다. 이건 아침에 일어나고 낮에 일하며 저녁 시간엔 맥주 한 파 인트로 잠을 청하는 것을 생활의 도리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겐 어려운 시절입니다.”
“전쟁이 많이 어렵습니까?”
리테들 씨는 잠시 콧등을 만지작거리더니 목소리를 낮추면서 은근한 태도로 말했다.
“오시면서 피난민들을 혹 보셨습니까?”
피난민? 아, 그 이상한 여행자들. 그 사람들이 피난민이었나?
“예. 여행에 지친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랬군요. 역시 피난민들이었군요.”
“사우스 그레이드는 지금 완전히 쑥대밭이랍니다. 사우스 그레이드에서 돌아온 여행자에게 들었는데 말입니다, 그곳에선 대로변에 앉아 잠시만 기다리면 100명쯤 되는 피난민을 볼 수 있답니다. 피난민들이 줄을 잇고 있대요.”
길시언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아니, 그렇게 심각합니까?”
“말도 마십시오. 요즘 이 도시 인구가 두 배는 늘어난 느낌입니다. 여러분들은 밤에 오셔서 잘못 보았겠지만 말입니다, 낮에 어디 성문 근처에 서서 구경해 보세요. 믿어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저 많은 사람들이 어디서 오나 싶게 꾸역꾸역 몰려듭니다.”
길시언은 이를 꽉 깨물면서 신음처럼 말했다.
“이런……. 아니,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그것 참. 전쟁 일어난 것은 꽤 되는데 왜 갑자기 피난민들이 발생하는 것이지? 이해가 안 되는군요.”
칼도 근심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러자 리테들 씨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더니 나직하게 말했다.
“이건 모두들 쉬쉬하는 이야기입니다만, 아무래도 확실한 사실입니다.”
“무슨 이야기인데요?”
“전선에서 지골레이드가 없어진 모양입니다요.”
리테들 씨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우리들이 충분히 놀랄 시간을 주려 드는 모양이다. 하지만 우리들은 별로 놀라지도 않고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리테들 씨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칼은 말했다.
“그 이야기는 알고 있습니다.”
“예? 아니, 혹시 전선에서 오시는 길이십니까?”
“아니오. 여행중에 우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까? 어쨌든 그래서 지금 전선에서는 조금도 전진을 못하는 상태, 아니 뒤로 밀리지 않고 지키기에도 급급한 상태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우스 그레이드의 분위기가 굉장히 나빠요. 주민들이 피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지요.”
“음. 그렇군요. 하지만 그렇다면 마구 밀리는 상태란 말입니까? 지키기 급급하다는 말은 아직까지는 그렇게 심하게 밀리고 있다는 말은 아니겠지요?”
“예. 그렇긴 합니다.”
“그렇다면 이상하군요. 단순히 전쟁이 악화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주민들이 그렇게 피난을 올 리는 없을 텐데요. 뭐… 설령 완전히 패배하기 직전이라고 해도 어 차피 주민들이 싸우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혹시 자이펀인들의 앞뒤 없는 살육에 대한 소문이라도 퍼진답니까?”
리테들 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뇨, 아뇨. 단순히 전쟁에서 밀리는 것뿐이라면 오죽 좋겠습니까? 이상한 소문이 퍼지고 있답니다. 앞뒤 없는 살육이 문제가 아니지요. 녀석들이 그렇게 신사적일 까요? 놀라지들 마세요.”
운차이는 눈을 찡그린 채 리테들 씨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리테들 씨는 흥분해서는 그 눈길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낮지만 거센 목소리로 말했다. “자이펀인들이………… 악마를 불러낸대요!”
“악마라구?”
운차이의 눈이 번득였다. 우리들은 이게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를 못한 얼굴로 리테들 씨를 바라보았고 그의 목소리는 한층 낮아졌다. 그는 무시무시한 어조로 거의 속삭이듯이 말했다.
“예. 무시무시한 악마랍니다. 시뻘건 몸에 쇠꼬챙이 같은 꼬리를 하고 온몸엔 벌레가 들끓는 악마랍니다. 그 악마는 구름이 별을 가리는 캄캄한 밤중에 살그머니 바 이서스 군 진영으로 날아온답니다. 그래요. 몇몇 눈밝은 병사들이 분명히 목격했지요. 그리고 그 악마는 바이서스 진영을 고래고래 저주하고는 자신의 비밀 암호를 남겨둔답니다요. 다음날 아침이면 태양이 갑자기 불길로 바뀌면서 어제까지만 해도 팔팔하던 병사들이 픽픽 쓰러져나간답니다. 종군 프리스트들마저도 질병에 걸려 쓰러진대요. 이 무슨 괴악한 일이랍니까.”
리테들 씨는 이번에야말로 하는 표정으로 우리들의 얼굴을 주욱 둘러보았지만 아쉽게도 우리들은 이번에도 별로 놀라지 않았다. 대신 땅이 꺼질 것 같은 한숨을 쉬 었을 뿐이다(운차이의 경우엔 쓴웃음을 지었다.). 아마도 그 눈밝은 병사들이란 주로 보초를 서면서 유달리 졸기를 잘하는 병사라든지 몽유병 증세가 있는 병사, 혹은 허풍 을 잘 치는 병사겠지. 젠장. 자이펀놈들이 그 질병의 무기, 신의 권능을 훔쳐 만든 인간의 무기를 실전 배치한 모양이군.
길시언은 비통한 음성으로 말했다.
“스카일램 트리키 공이 그 사실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 언제인데. 아직 해결책을 찾아내지 못한 모양이군요. 제기! 그 귀족원에 푸르고 아름다운 소나무여, 관둬! 장난칠 기분 아니야! 제기랄. 그 귀족원에 건의 서류가 들어가면 곰팡이가 피기 전에는 절대로 결재가 안 나옵니다. 현실 감각 없고 느려터진 작자들 같으니.”
칼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건 현실적인 일이라 할 수도 없습니다. 내각이라 할지라도 무슨 대책이 있겠습니까.”
리테들은 당황한 얼굴로 이 사람 저 사람을 쳐다보다가 말했다.
“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까?”
“아, 별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 악마의 이야기는 시민들 대부분이 아는 겁니까?”
“예? 아, 시민이라고 해서 귀가 없는 사람들은 아니니까요. 진료소에 다니는 부인네들이라든지 궁내부원들의 입에서 줄줄 새어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피난민들의 입 에서도 나오고요. 사실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바이서스 임펠 시민이란 국왕이 입고 있는 속옷이 며칠째 입고 있는 것인지도 맞출 수 있는 자들이라고.”
길시언은 당황한 얼굴로 자신의 바지를 내려다보았고 그래서 난 웃음을 참기 위해 애써야 했다. 맥주를 홀짝홀짝 마시던 제레인트가 지나가는 말처럼 말했다.
“민심이 어지럽겠군요.”
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겁니다. 리테들 씨?”
“아, 그렇지요. 난리도 아닙니다. 도둑 길드에선 반역을 일으켜 도둑들의 시체가 교수대에 주렁주렁 매달리질 않나, 전선에선 지골레이드가 달아나버리고, 자이펀인 들은 악마를 불러낸다는데다가 피난민들은 꾸역꾸역 몰려오고, 또………… 이 모든 사태보다 더 무서운 이야기가 있습니다요.”
리테들 씨는 상당히 애써서 비장미 넘치는 얼굴을 만들어낸 다음 그 얼굴에 어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물론 우리들은 심드렁한 얼굴로 듣고 있었다).
“드래곤 로드가 부활한답니다!”
“푸흡!”
엑셀핸드의 반응은 기어코 리테들 씨를 만족시켰으리라. 리테들 씨는 저런저런………… 하고 말했지만 상당히 악질적으로 즐거워하는 얼굴이었으니까. 엑셀핸드는 마시 던 맥주를 턱수염에 온통 쏟아놓고는 입을 딱 벌렸다.
“이보시오! 거 무슨 이야기요?”
“정말입니다. 누구나 다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갈색 산맥에 잠들어 있던 드래곤 로드가 부활한대요. 드래곤 로드는 얼마 있지 않아 깨어나서는 루트에리노 대왕의 나라를 산산조각내 버릴 거라고들 합니다.”
갈색 산맥의………… 드래곤 로드? 아, 크라드메서겠지. 정말 소문이라는 것은 대책이 없는 것이로군. 우리들이 다시 한숨을 쉬는 모습을 보면서 리테들 씨는 어이가 없 는 얼굴이 되었다. 그러다가 그는 분노한 얼굴로 말했다.
“아니, 지금 절 실없는 헛소리나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들 하시는 겁니까?”
“아니오. 아닙니다. 하지만 그 말은 믿을 수 없군요.”
“하지만 이건 확실한 사실입니다! 여러분들도 잠시만 시간을 내어 시내를 돌아다녀 보십시오. 지금 제가 하는 말은 오히려 너무 냉정하게 말한 거라고 생각하게 되 실 겁니다. 웬 미치광이 같은 소문에는 말입니다. 드래곤 로드가 999마리의 드래곤과 함께 바이서스 임펠로 날아올 날이 멀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어디 그 것뿐인 줄 아십니까?”
순간 칼의 눈이 번뜩였다. 칼은 날카로운 얼굴로 길시언을 바라보면서 뭔가 묻는 듯한 눈짓을 했고 그러자 길시언도 날카로운 얼굴로 자신의 몸을 구석구석 내려다 보더니 근심스러운 어조로 대답했다.
“내 얼굴에 뭐가 묻었습니까?”
칼은 땅이 꺼지는 한숨을 쉬었다. 으으. 실없는 왕자님 같으니라구. 칼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소문 유포입니다.”
“예? 소문 유포라니…………… 아니, 이런, 빌어먹고 저주받을!”
길시언은 테이블을 쾅 내리쳐서 리테들 씨를 찔끔하게 만들었다. 운차이는 파이프를 꺼내어들면서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놈들이 꽤나 바쁘게 돌아다니는 모양인걸.”
난 운차이가 ‘놈들’이라고 말한 점에 주목했다. 난 그의 얼굴을 살펴보았지만 그 얼굴엔 뭔가 내심을 짐작할 만한 표정은 떠오르지 않았다. 샌슨은 당황한 얼굴로 세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고, 그래서 내가 설명을 해주기로 했다.
“이런 황당한 소문이 퍼지는 것은 자이펀 간첩들이 헛소문을 유포시키는 거야. 민심을 혼란시키는 거지.”
“우와! 그렇구나, 후치!”
반응은 엉뚱하게도 제레인트에게서 터져나왔다. 샌슨은 대신 말없이 자신의 이마를 딱 올려붙였다. 꽤 아플텐데. 리테들 씨는 놀란 얼굴로 날 바라보더니 다시 칼을 바라보았다.
“예? 가, 간첩이라구요?”
“예. 자이펀 간첩들이 바이서스 임펠에서 활동하고 있는 겁니다. 사실 별로 놀랄 일도 아닙니다. 간첩들이 적국의 수도에 있다는 것은. 게다가 그 소문들이라는 것이 하나같이 그럴듯한 근거도 있는 것들이니 이거, 참.”
내 말을 정정. 아까의 그 병사들이란 보초 서면서 졸거나 몽유병이 있거나 허풍을 친 것이 아니라 사실 병사의 탈을 뒤집어쓴 자이펀 간첩이었으리라. 정말 ‘이거, 참.’이다.
길시언은 흥분한 자세로 벌떡 일어났다.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난 지금 당장 임펠리아에 좀 가봐야겠습니다.”
“아, 예. 거기서 주무시겠습니까?”
“아니오. 이야기를 좀 나눠보고 돌아와서 여러분들에게도 전해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칼. 나와 함께 가지 않겠습니까?”
“예? 음. 그러고 보니 일스 사절 건에 대해서도 사죄를 해야 하고, 알겠습니다. 같이 가도록 하지요. 다른 분들은 어쩌시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모두 느긋하게 다리를 펴고 쉬고 싶다는 대답을 했지만 제레인트는 아주 간절한 표정으로 칼을 바라본 끝에 그와 함께 여관을 나서게 되었다. 그 모든 일은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났으며 리테들 씨는 이미 불 꺼진 파이프를 손에 든 채 멍한 얼굴로 우리들을 바라보았다.
운차이는 파이프에 다시 담배를 채우고는 엑셀핸드에게 담배쌈지를 던져주면서 말했다.
“저녁 메뉴는 뭐지?”
우리들이 저녁 식사를 마칠 때까지도 여관에 새로 들어오는 손님은 보이지 않았다. 정말 수도의 사정이 많이 좋지 않은 모양인걸. 대신 초라한 몰골을 한 돈 없는 피 난민들이 몇 번 얼굴을 들이밀었을 뿐이었다. 리테들 씨는 우리들에게 그가 악당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성인(聖人)은 더더욱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그는 상대의 몰골을 봐가면서, 눈살을 찌푸리며, 때론 여관비를 인하해 주곤 했지만, 무료로는 안 된다는 점을 확실히 말했다. 그것을 보고 있던 샌슨은 성질을 부렸다.
“에이, 참! 보고 있기 짜증나네!”
그러더니 샌슨은 곧 주머니를 뒤져 작은 보석 하나를 꺼내어 리테들 씨에게 건네주었다. 리테들 씨는 놀란 얼굴로 샌슨을 바라보았고 샌슨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 다.
“그거면 오늘 하룻밤은 충분하겠지요? 돈 있는 사람에겐 돈 받고, 없는 사람은 그냥 좀 재워줘요. 손해는 안 보시겠지요?”
손해? 저 보석이면 이 여관을 한 달은 빌릴 수 있을 게다. 리테들 씨는 입이 쫙 벌어져서는 샌슨에게 굽실거렸고 샌슨은 겸연쩍은 얼굴이 되었다. 난 빙긋 웃으며 말 했다.
“안 아까워?”
“전혀.”
그러니 샌슨 퍼시발이지. 하하하! 엑셀핸드는 일찌감치 침대에 곯아떨어져 있는 아프나이델을 위해 커다란 접시에 음식을 이것저것 담은 다음 술병도 하나 꿰차고선 2층으로 올라갔다. 간신히 목욕을 마친 레니는 소리 소문도 없이 자신의 방으로 사라져버렸지만 네리아는 맥주잔을 붙잡고는 테이블 위에 다리를 올려놓은 채 우리 와 어울렸다. 나와 샌슨, 네리아, 그리고 운차이는 유니콘 인의 넓은 홀을 독점한 채로 앉아서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네리아가 입에서 맥주잔을 떼놓으며 말했다. “카아……, 샌슨이 정말 그랬어?”
난 제대로 닦지도 않은 그녀의 머리에서 물방울이 맥주잔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보느라 대답을 놓쳤다. 네리아는 의자 뒷다리로만 균형을 잡은 채 앉아서는 빨간 궛 불을 만지작거리면서 샌슨을 바라보았고 샌슨은 그 시선을 무시하면서 맥주잔만 기울였다. 네리아는 싱긋 웃고서 다시 샌슨에게 말했다.
“수도가 그렇게 엉망이라구?”
“그렇다더군.”
“다른 건 몰라도 지골레이드가 없어져서 전선에서 밀린다는 이야기는 신빙성이 있는걸.”
그러자 샌슨은 팔짱을 낀 채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돌맨 할슈타일이 왜 지골레이드를 놔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 운차이는 돌맨으로 하여금 크라드메서의 라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 했지만, 그게 신빙성이 있는 이야기일까?”
“후작에게 찾아가 물어볼까?”
“그랬으면 좋겠군.”
운차이는 네리아와 샌슨의 이야기에는 관심도 두지 않은 채 낮부터 주물럭거리던 그 나무 토막을 붙잡고 나이프를 놀려대고 있었다. 그의 나이프가 은빛을 발할 때 마다 서걱거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나뭇조각이 테이블 위로 튀었다. 샌슨은 그 작업을 바라보다가 운차이에게 말을 걸었다.
“이봐. 네 의견 말이야. 그럴 듯하긴 하지만 아무래도 미심쩍은 데가 많아.”
“그래서 날더러 어쩌라는 거야.”
운차이는 고개도 들지 않은 채 퉁명스럽게 말했다. 샌슨은 조금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뭐 특별히 어쩌라는 것은 아니야. 토론을 좀 하고 싶다는 거지.”
“난 관심 없으니 내버려둬.”
“원 참 딱딱하게 구네. 그런데 그건 도대체 뭐야?”
운차이는 대답하지 않았고 샌슨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때 난 네리아가 고민스러운 얼굴로 천장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네리아는 천장을 보며 말했다. “후치야.”
“예.”
“이 일이 끝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예?”
“그러니까 말이야. 우리 일들이 모두 순조롭게 끝나면………… 어떻게 되는 거니? 우리들 모두의 미래가 어떻게 바뀔까?”
“미래요? 난 그 친구와는 소원한 관계인데.”
“그럼 넌 어떻게 되겠니?”
난 맥주잔을 들어올렸다. 맥주를 마시면서 나는 주위 사람들의 숨소리, 벽난로에서 장작이 부러지는 소리, 그리고 운차이의 손에서 들려오는 서걱거리는 소리를 들 었다.
“글쎄요. 갈색 산맥으로 가서, 크라드메서를 만나고, 그와 레니가 계약을 이루도록 도와주고, 그러곤 고향으로 돌아가는 거지요. 드래곤 로드에게 얻은 보석이 있으 니까 아무르타트에게 몸값으로 주고………… 억류된 사람들을 되찾아올 수 있겠지요.”
“그리고 모두들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다?”
맥주 한 모금이 필요한 대답인 것 같군. 그래서 난 다시 길게 한 모금 마신 다음 대답했다.
“그렇게 되긴 어렵겠지요. 우린 너무 큰 일에 휘말려버렸으니까 예전에 살아가던 방식으로 내일을 살아가긴 어렵겠지요. 하지만, 어차피 침대에서 눈뜰 때부터 다시 침대에 몸을 눕힐 때까지 무슨 일이 일어나도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는 거잖아요.”
“그래?”
“예…………. 먼저 자이펀의 일. 이 전쟁 말이에요. 잘 알지는 못하지만 어쨌든 그 일부에 대해서라도 알게 되었으니까 그 전쟁에 대해 계속 생각하게 되겠지요. 과연 바 이서스가 계속 평화로울 수 있을지 고민이에요. 지금으로선 대단히 위험한 셈이잖아요.”
“또 있니?”
“넥슨의 일. 넥슨은 과연 레니가 크라드메서의 라자가 되고 나면 모든 것을 포기할까요? 그 자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것은 바이서스에 대한 증오심뿐이고… 그 남 자의 인격 전체의 주춧돌로 남은 것이 그 증오심인 것 같아요. 음………….., 이런 것 같아요. 사랑과 증오는 둘 다 상대에게 어떤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어요. 그리고 그 반 응을 통해 자신을 찾을 수 있지요.”
“무슨 말이니?”
“핸드레이크의 말이지요. 나는 단수가 아니다. 모든 사람에 대해 아무런 감정도, 관계도 없는 사람은 죽은 사람인 것 같아요. 그리고 그런 감정과 관계는 기억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에게 축적되는 것 아닐까요. 뭐, 그걸 개성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 같고.”
네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내 얼굴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가 되는 것 같아. 음, 그런데?”
“그런데 넥슨은 그것을 잃었어요. 음………….., 영원의 숲이 생각나네요. 영원의 숲에 들어가면 자신이 사라진다고 했어요. 그런데 숲에 들어가지 않았던 그 친구들도 기 억을 잃지요? 그 사람에 대한 기억 말이에요. 영원의 숲에서는 ‘자신’이 없어지지요. 여기서 알 수 있잖아요. 우리는 이 몸 안에 있는 ‘나’과 다른 사람 속에 있는 ‘나’ 전체를 합친 것이 바로 우리들 자신이 아닐까요. 핸드레이크의 말처럼.”
“그런데 그것이 넥슨의 일과 무슨 상관이지?”
“예………, 그러니까 우리들이 살아 있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지요. 관계 중에 대표적인 것이라면 아마 사랑과 증오겠지요. 그런데 사랑과 증오 중에서 더 빠르고 손쉬운 것은 증오지요. 사랑은 어차피 개인주의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에겐 어려운 일이지만 증오는? 아주 쉬워요.”
“그래서?”
“넥슨은 자신을 되찾기 위해서는 화를 내는 편이 쉽다는 것을 알 테지요.”
“넥슨은 모두들 미워함으로써 거꾸로 모두를 미워하는 자신, 뭐 그런 자신을 찾으려 한다는 거야?”
“내 생각일 뿐이에요.”
네리아는 조용히 맥주잔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갑자기 히죽 웃더니 맥주 거품 속에 손가락을 집어넣어서는 조금 휘저은 다음 거품이 묻은 손가락을 입에 넣고서 빨 았다. 손가락을 빼면서 네리아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예?”
“세상이 한 인생에 대해 부리는 횡포에 대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비웃어주지요.”
“뭐라구?”
“비웃어준다구요.”
“……그래.”
샌슨은 맥주를 벌컥벌컥 마셔대더니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운차이는 여전히 나무 토막을 깎고 있었고 난 초에서 흘러내리는 촛농을 바라보았다. 삐이걱. 문이 열리면서 낯선 얼굴이 들어선다.
“원, 참! 장사 안 되는 날이로군.”
들어선 남자는 통자루 같은 외투에 귀까지 내려오는 모자를 쓴, 적당히 허름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뭔가 커다란 나무 궤짝 같은 것을 멜빵으로 매고 있었다. 입 구에서 몸을 툭툭 털자 먼지가 풀썩풀썩 일어났다. 이 여관의 손님인가? 여관 주인장 리테들 씨는 그 남자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어서 오십시오!”
“방 하나 주슈. 얼마요?”
“혼자십니까? 그럼 독실에 식사 제공, 하루 1셀입니다.”
남자는 거창한 외투를 들어올리더니 바지 주머니 속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한움큼의 동전을 꺼낸 남자는 모자를 벗어 겨드랑이에 끼고는 동전을 헤아리기 시작했 다. 모자를 벗으니 정수리 가까이까지 벗어진 이마가 드러났다. 저래서 모자를 쓰는 모양이군. 동전을 세던 남자의 얼굴에 당혹감이 떠오르는 것과 동시에 리테들 씨 의 얼굴엔 미소가 떠올랐다. 뭐, 상관없겠지. 샌슨이 오늘 저녁 이 여관을 통째로 빌려 무료 개방해 버렸으니까. 그래서 리테들 씨도 저렇게 웃는 것일 게다.
별로 할 일이 없었던 난 그 남자를 망연히 바라보았다. 그런데 남자는 내 시선을 깨달은 모양이다. 그는 날 보더니 갑자기 리테들 씨에게 손가락을 하나 세워보였다. “잠시만 기다리쇼.”
그러더니 남자는 리테들 씨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더니 곧장 우리 테이블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우리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남자는 등에 진 나무 궤 짝을 텅 소리 나도록 내려놓았다. 그러더니 두 팔을 극적으로 벌리면서 말했다.
“생각해 보시오!”
“예에? 생각이오?”
샌슨은 얼떨떨한 어조로 대답했고 그러자마자 남자는 재빨리 말했다.
“미래를 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지독한 운명인가! 그러나 나 타로메슈 암파린은 만인에게 봉사함으로써 두 어깨에 짊어진 이 숙명의 무게를 조금이라도 가볍게 하는 방법을 알아내었소. (네리아를 슬쩍 보고 나서) 아름다운 레이디는 올봄엔 낭군님을 만나게 될지 고민하겠지. 그리고 (샌슨에게 눈을 찡긋거리며) 용맹한 전사께선 언제 나 이름을 드날리게 될지 궁금하게 여기겠지. 그러나 미래를 가린 장막은 아침 안개와도 같아 두껍디두꺼우면서 모든 것이 희미한 법. 그러나 걱정 마시오! 여러분들 은 오늘 저녁 인생에서 보기 드문 행운을 만난 셈이니, 여러분들 그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겠지만 여기 타로메슈 암파린이 여러분들을 찾아왔소이다!”
리테들 씨는 머리를 벅벅 긁기 시작했지만 샌슨은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점을 보세요?”
“예끼! 미래를 보는 고상한 이 몸의 사명을 한낱 거리의 점복술사와 연관짓지 마시오. 나 타로메슈 암파린으로 말할 것 같으면 유피넬과 헬카네스의 따님이신 시간 의 원수. 여러분들의 미래에 끼쳐질 인생의 횡포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대가가 단돈 20퍼셀이라면 믿으시겠소?”
이번엔 내가 낄낄 웃으며 말했다.
“그럼 맞춰보세요. 우리가 암파린 씨에게서 점을 볼까요, 보지 않을까요?”
“20퍼셀만 내거라. 그럼 맞춰보지.”
제법이네? 난 웃으면서 주머니를 뒤져 10퍼셀짜리 동전 두 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암파린 씨는 의자를 끌어와 앉더니 테이블에 올려놓은 동전을 잡아 퉁겨올렸다. 그런데 동전이 다시 내려올 때 암파린 씨의 손이 빠르게 움직인 것 같더니 갑자기 그는 두 손을 쫙 펼쳐보였다. 동전이 어디로 갔지? 샌슨은 와! 하는 표 정으로 암파린 씨를 바라보았고 암파린 씨는 눈을 찡긋거렸다.
“이제 맞춰보세요.”
“뭘 말이냐?”
“예? 우리가 당신에게 점을 볼지, 보지 않을지를 말이죠.”
“물론 점을 보지. 이미 내게 돈을 내고 묻고 있지 않느냐? 하하하!”
난 이마를 딱 쳤다. 맙소사. 암파린 씨는 싱글거리더니 말했다.
“자, 그렇다고 해서 코 묻은 돈을 그냥 착복하는 비열한 짓은 하지 않아. 잠시만 기다리거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