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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이 레니를 보았다고?”
칼은 근심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그는 곰곰이 생각에 잠겨 말했다.
“그렇지만 후작은 지금 당장 무슨 행동을 취할 수는 없을 거야. 여기는 왕자님이 있으니까. 따라서 우리가 할 일은 최대한 빨리 장을 본 다음 떠나는 것이 되겠군. 서 두르세!”
곧 칼잡이들은 꼬리에 불 붙은 고양이마냥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오늘은 아마 이 시장 상인들로서는 굉장한 행운의 날일 거라고 생각되는데, 우리는 급히 서두르느 라 물건 가격을 가지고 흥정하기는커녕 거스름돈도 제대로 받지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 샌슨은 밀가루를 사면서 보석을 꺼내어 식료품상을 기겁하게 만들기도 했다. 에구. 저런 식으로 탕진하다간 대미궁에서 가져온 보물이라고 해도 감당을 못하겠군. 다행히도 우리들 중엔 내일 세상의 종말이 다가와도 오늘 시장에서 물건 값을 깎아놓고 볼 사람이 있긴 하지만.
“농담하지 말아요! 파운드당 50퍼셀이라구? 이런 냄새 나는 고기에 30퍼셀 이상 주면 무덤 속에 있는 우리 할아버지가 벌떡 일어날 거야. 30퍼셀로 해줘요. 예? 거 기 있는 거 한꺼번에 다 살 테니까 좀 깎아줘요오!”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부리나케 물건들을 나르고, 아무렇게나 돈을 던져주었지만, 네리아가 따라 뛰어다니면서 우리들의 헤픈 돈 계산을 관리했기 때문에 우리는 간 신히 파산하지 않은 채 시장 보는 일을 마칠 수 있었다. 마차 위에는 짐이 가득가득 실렸고 샌슨과 길시언, 운차이는 커다란 밀가루 부대나 야채 더미 등을 급하게 지 고 나르느라 몹시 지쳐서는 거친 숨을 헉헉 몰아쉬었다. 하지만 우리들은 잠시도 쉴 사이 없이 마차를 출발시켰다. 이랴!
난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마차 안에는 칼이 에포닌에게 이것저것 묻고 있었고 에포닌은 상기된 얼굴로 대답했다.
“예. 그래요. 디트리히가 실종되고 나서, 전 견디기 어려웠어요. 전 매일 저녁 디트리히와 만나서, 자기 전에 한두 시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그래서 그 집안에 서도 울지 않고…. 참고 견딜 수 있었어요. 하지만 디트리히는 돌아오지 않았고, 그래서 전 그 집안의 싸늘한 사람들을 더 견딜 수 없었어요. 달라진 것은 없었지만, 하지만 전 디트리히가 없는 그 저택에서는 도저히…….”
“그랬습니까? 음………….. 의좋은 남매셨군요.”
아아. 그런 것이었군. 낯 모르는 후작가에 입양되어 간 남매는 서로에게 말고는 위안받을 사람이 없었던 모양이군. 레니는 동그란 눈으로 에포닌의 옷을 바라보다가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더니 입술을 오므렸다. 음. 이상한 느낌이 드는데, 여긴 할슈타일 후작의 친딸과 의붓딸이 같이 있는데 그 옷차림으로 보면 에포닌이 친딸이고 레니가 의붓딸인 것처럼 보이는군. 헷. 에포닌은 후작 저택 안에서 입고 있었던 옷이 아닌가 싶은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물에 젖었다가 아무렇게나 말린 것처럼 보이는데?
에포닌은 슬픈 얼굴이었지만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디트리히는 그래도 캇셀프라임의 라자였어요. 사랑해 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후작님은 디트리히에겐 관심이 있었어요. 하지만 전 디트리히를 따라간 귀찮은 혹 이었을 거예요. 보기 싫던 참에 이렇게 나와줬으니 후작님은 무척 기뻐할 거예요.”
칼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말했다.
“아니, 그럴까요? 조금 전에는 하인들이 찾아와 아가씨를 데리고 가려 하지 않았습니까?”
“체면 때문이지요!”
“예?”
“체면 때문일 거예요! 저도 알아요. 뮤닌 선생님이 말해 줬어요. 뮤닌 선생님은, 그러니까 아이들의 가정 교사였어요. 뮤닌 선생님이 다 말해 줬어요! 날 쫓아내면, 할슈타일 후작가에서 쓸모없는 수양딸을 가혹하게도 쫓아냈다는 말이 나올 테니까, 그러니까 밉살스러워도 쫓아내지 않은 거예요!”
뮤닌 선생이라는 작자는 어린애들에게 아무 이야기나 직설적으로 하는 성격인가 보군. 칼은 에포닌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 예. 음.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후작가에는 돌아가지 않을 겁니까, 할슈타일 양?”
“전 할슈타일이 아니에요!”
에포닌의 고함소리는 마치 뾰족한 것이 몸을 찌르는 것 같았다. 칼은 당황해서 사과했다.
“아, 그렇습니까. 미안합니다.”
에포닌은 자신의 말에 확신을 더하려는 듯이 고개를 강하게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요! 전 할슈타일이 아니에요! 그 집의 것이라면 아무것도 필요없어요. 이름도, 음식도, 옷가지도, 아무것도 필요없어요!”
아프나이델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저 작은 소녀가 흥분해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것을 보고 있었다. 칼은 멋쩍은 어조로 말했다.
“예…………. 그럼 에포닌 양. 앞으로 어쩔 생각입니까? 후작가를 나올 거라면…………, 어떻게 생각할진 모릅니다만, 세상은 생각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에포닌 양 나 이의 소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에포닌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갑자기 불안한 눈으로 마차 안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모두들 나름대로 따스한 표정을 지어주었지만 에포닌은 겁먹은 얼굴로 움 츠러들었을 뿐이다. 방금까지 그렇게 흥분하던 기색은 다 어디로 사라진거야?
에포닌은 두 손을 치맛자락 속에 파묻으며 말했다.
“전…… 무섭지 않아요. 어제 오후에 전 정원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어요. 그때 후작님이 제 옆을 지나쳤어요. 전 인사하려고 했지만, 후작님은 찌푸린 눈으로 바라보 고는 말도 하지 않고 지나쳤어요. 그때였어요. 도저히 더 참을 수가 없었어요. 전 그래서, 그대로 방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는 후작가를 도망쳐 나왔어요. 어젯밤은 마
시장에 숨어들어 가 말들이 먹다 남긴 건초더미 속에서 잤어요. 비가 와서.. 건초 더미는 축축하고 무거웠어요. 그 속에서 온갖 생각을 다했지만, 견딜 수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전 견딜 수 있다고, 몇 번이나 그렇게 속으로 말했어요. 예. 전 견딜 수 있어요.”
아. 그래서 옷 꼴이 저 모양이군. 칼은 동정을 담은 눈빛으로 말했다.
“고생하셨겠군요. 하지만…….”
에포닌은 더 듣기 싫다는 듯이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는 말했다.
“여러분들은 어디로 가세요?”
“예? 아, 우리는 갈색 산맥으로 갑니다만.”
“고향으로 돌아가시지 않을 거예요? 거기….. 헬, 헬?”
“헬턴트 말입니까? 물론 돌아갈 겁니다. 갈색 산맥의 일이 끝나는 대로.”
“그럼 저 좀 데려다주세요. 전 디트리히를 찾겠어요.”
칼은 어두운 얼굴로 에포닌을 바라보았지만 에포닌은 당당하게 말했다.
“전 돈을 가지고 있어요. 디트리히를 찾으며 여행을 다닐 정도는 돼요.”
그렇게 말하면서 에포닌은 품 속에서 둘둘 말린 손수건을 끄집어내었다. 손수건을 풀어헤치자 그 안에는 보석과 장신구 몇 가지, 그리고 금화들이 나타났다. 흐음. 후작가에서 가지고 나온 것인가? 그 집안의 것은 필요없다고 말하더니, 필요에 따라 굽힐 수도 있는 편리한 주장이었군.
대미궁에 들어갔던 내가 보기엔 어떤 값어치 있는 보물이라기보다는 조그만 허영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저런 허영도 아무데서나 펼쳐보였다간 당장 어 느 계곡의 잊혀진 시체가 될지도 모르겠지. 아니, 이 계집애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후작가를 나온 거야? 우리를 만나서 천만 다행이군. 못된 놈들이라도 만났다간 큰일 날 뻔했잖아. 칼은 어두운 낯빛으로 그 보석들을 내려다보다가 손을 저으며 말했다.
“도로 넣어두세요. 보물이 몸을 지켜주지는 않습니다. 도대체 여행을 어떻게 생각하는 겁니까?”
“예? 아, 위험하다고요? 음. 무사를 고용할 생각이었어요.”
아아……………. 옛날 이야기를 꽤나 좋아하는 모양이군. 떠돌이 고용 무사와 은밀한 여행중인 리틀 레이디. 하하하. 젠장. 칼은 저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웃지 않았다. 그는 다만 눅눅한 목소리로 말했을 뿐이다.
“무사? 글쎄요. 나쁜 생각도 아닙니다만 좋은 생각도 아닙니다. 아가씨에게 행운이 있다면 좋은 사람을 만날지도 모르지만 사람을 잘못 골랐다간 어느 고갯길에서 강도로 돌변할지도 모르지요. 아가씨처럼 집도 절도 없이 돌아다니는 것이 확실한 소녀는 나쁜 사람들이 가만 둘 리가 없지요.”
에포닌은 풀 죽은 얼굴이 되었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말했다.
“이거저거 따지면서 행동할 순 없어요. 운에 맡기고 행동할 때도 있는 거예요.”
에포닌은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는 그녀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처세술, 아마도 틀림없이 그녀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책에서 읽은 것이 분명한 처세술을 말했다. 칼은 이마를 벅벅 긁더니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씨의 다른 친척은 없습니까? 몸을 의탁할 만한 곳이 없을까요?”
“예? 그런 건…….”
칼은 침착하게 말했다.
“만일 그런 것이 없다면 어쩔 수 없습니다. 아가씨를 후작가에 도로 데려다드리지요.”
“예? 싫어요!”
“어쩔 수가 없는 일입니다. 후작가에서는 멸시를 받으셨다고요? 아가씨를 동정하겠습니다. 하지만 이대로 아가씨를 세상에 내보내면 목숨이 위험합니다. 아가씨는 자신을 지킬 수 있습니까? 난 뻔히 알면서 잘못을 저지를 수는 없어요.”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에포닌은 최소한 할슈타일 저택에서는 호의호식할 수 있겠지. 음. 이건 레니가 드래곤 라자로서 호의호식할 수 있는 경우와는 좀 다르군. 레니는 델하파에 아빠가 있고 가정이 있지만 에포닌의 경우에는….
“싫어요! 그 집엔 돌아가지 않겠어요. 싫다구요! 절 아, 아빠한테 데려다주세요. 예? 제발!”
“예?”
에포닌도 레니의 경우와 같군. 아빠라구? 에포닌은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고 칼은 의아한 얼굴로 말했다.
“아버님이…………, 할슈타일 후작님 말고요?”
“진짜 아빠요! 진짜 아빠에게 좀 데려다주세요. 칼 아저씨는 친절한 분이시죠? 이거 다 드릴게요. 제발 절 아빠한테 데려다주세요.”
에포닌은 손수건째로 칼에게 내밀려고 했지만 칼은 손을 저어 그것을 사양했다.
“그건 넣어두라고 했잖습니까. 그런데 친부께서 생존해 계십니까?”
“예.”
“어디에 계신데요?”
“그건…….”
“에포닌 양?”
“저도 몰라요.”
“예?”
에포닌은 더듬더듬 말을 시작했다.
“엄마가 죽고 나서…………… 아빠는 매일매일 술을 마셨어요. 너무너무 슬퍼하셨지요. 그러다가, 그러다가 디트리히와 함께 절 할슈타일 가문에… 넘겼어요. 디트리히 를 내놓는 조건으로 저도 함께 데려가게 했어요. 아, 절 싫어해서 그러신 것은 아니에요. 절대로 그렇지 않아요. 아빠는 디트리히와 저 모두가 후작가에서 잘 지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러신 거예요. 후작은 돈을 내놓겠다고 했지만 아빠는 돈을 사양하고는 절 디트리히와 함께 보내셨어요.”
칼은 인자한 얼굴로 말했다.
“그렇습니까? 그런데 어디 계신지 모르다니요?”
“우리가 떠나올 때………아빠도 집을 팔고 다른 곳으로 떠나셨거든요.”
아이고, 맙소사. 그럼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도 확실하지 않은 문제잖아? 칼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친부님의 함자가 어떻게 됩니까?”
“그란 하슬러. 하슬러 씨예요. 궁성 경비 대원이셨던 하슬러 씨요.”
에포닌은 마차 안의 일행들이 모두 눈알이 튀어나올 듯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것에 크게 놀란 모양이었다. 칼은 잠시 주먹으로 입을 틀어막고 있다가 낮고 다급 한 목소리로 말했다.
“넥슨 휴리첼의 마부인 하슬러 말입니까?”
에포닌은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예? 어, 넥슨 씨와 늘 붙어다니는 그 과묵한 마부 말씀이세요? 그분 이름도 하슬러인가요?”
제레인트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칼도 고개를 끄덕이며 안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동명이인이었군요. 예. 그 마부의 이름도 하슬러입니다. 희한한 우연이군요.”
허, 그것 참 정말 희한하네. 칼은 이제 한결 진정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친부께서 어디 계신지 전혀 알지 못한다는 말입니까? 그래가지고서야 내가 어떻게 아가씨를 데려다줄 수 있겠습니까?”
에포닌은 그만 울어버릴 듯한 얼굴이 되었다. 칼은 난처한 듯이 고개를 가로젓더니 다시 질문했다.
“그럼 아버님의 친구나, 뭐 소식을 알 만한 사람도 없습니까?”
“어………, 모르겠어요. 전, 전 그런 것은 잘 모르겠어요. 아빠는 친구를 사귀지 않았어요.”
“답답한 노릇이군요.”
정말 답답하다. 의붓아버지는 싫다. 친아버지는 어디 있는지 모른다. 그럼 어쩌라는 거야? 난 잠시 마음속으로 세상에 저 어린 소녀를 모시고 대륙을 방랑하며 잃어 버린 아버지와 동생을 찾는 여행을 함께해 줄 인정 많은 고용 무사가 남아 있을지를 의심해 보기 시작했다. 그때 아프나이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제 생각이지만 물어볼 만한 사람이 있을 것 같습니다.”
“예? 에포닌 양의 친부에 대해서 말입니까?”
“예. 이곳에서 별로 떨어지지도 않은 곳에 있습니다.”
“절 만나러 오셨다고요? 아, 전하!”
“오래간만이오, 아프나이델 공. 일어나시오.”
궁성 경비대장 조나단 아프나이델은 몸을 일으키면서 반가운 얼굴이 되었다. 우리 모두를 주욱 둘러보던 조나단 아프나이델의 시선이 아프나이델에게서 잠시 멈추 었다. 아프나이델은 고개를 조금 끄덕였고 조나단은 따스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조나단은 아프나이델에게 특별히 뭐라고 말하지는 않고 대신 팔을 펼치며 말했다. “이렇게 많은 손님들이 찾아올 줄은 몰랐군요. 어서들 앉으시지요. 이런 자리가 모자라는군요. 하하.”
우리는 언젠가 한번 들렀던 경비 대장실에 주욱 몰려 앉았다. 방은 넓고 소파도 커다랗지만 우리 인원이 오죽 많아야지. 열한 명이나 되는 대인원이 자리를 잡고 앉 는 데에만 해도 시간이 꽤나 걸렸다. 넓은 경비 대장실이 비좁게 느껴지던 시간이 잠시 흐르고, 모두가 자리에 앉고 나자 길시언은 웃으며 말했다.
“아프나이델 공. 공의 안부도 묻고 시사에 대한 이야기도 좀 해야 행실 바른 왕자라는 말도 안 되는 헛소문…………, 젠장. 에, 그런 평을 듣겠지만, 시간이 없으니 그냥 건너뛰겠습니다.”
조나단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하하. 제 생각입니다만 왕자님께서 행실 바른 왕자라는 평을 받기 위해 특별히 애쓰실 필요는 없을 겁니다.”
“그렇습니까?”
“세상엔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이 있으니까요.”
조나단은 웃지도 않고 점잖게 말했으며 엑셀핸드는 폭소를 터뜨렸다. 다른 모든 사람들의 웃음이 간신히 잦아들고 나서 길시언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오늘 찾아온 것은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입니다. 칼?”
“아, 예. 저, 아프나이델 공. 혹 경비 대장의 일을 맡으신 지 오래되셨습니까?”
“제법 되었지요, 헬턴트 공. 그러니까 저 녀석을 거두어들일 때니까요.”
저 녀석이라는 것은 아프나이델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아프나이델은 잔잔한 미소를 지었고 조나단 역시 미소지으며 말했다.
“저놈을 데리고 살려니 안정된 직장이 필요했지요. 그래서 궁성 경비 대장으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마법사들은 매여 있는 것을 싫어해서 이 직업은 구하기가 쉬 웠지요. 그때는 잠시만 하겠다는 생각이었는데 어느새 저 녀석이………… 톱메이지라는 호칭을 받을 정도로 커버렸군요. 가슴 뿌듯하군요.”
“스승님!”
아프나이델은 비명처럼 말했고 난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조나단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왜? 좋은 호칭이라고 생각하는데. 하하하! 아, 참. 대대로 임펠리아의 경비 대장은 마법사가 맡는다는 것은 잘 아시겠지요?”
“아, 예. 핸드레이크가 임펠리아를 수호한다는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서지요.”
“잘 아시는군요, 헬턴트 공. 그런데 그것은 왜?”
“그럼 혹시 경비 대원들 중에 그란 하슬러라는 대원이 있었는지 기억하십니까?”
칼이 질문을 꺼내자 에포닌은 바짝 긴장한 얼굴이 되었다. 조나단은 턱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란 하슬러? 하슬러라…………. 아, 그 핫소드 그란 말이군요. 예. 기억납니다.”
“에! 그게 아버지의 별명이셨어요! 핫소드 그란!”
조나단은 에포닌의 고함소리에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렇지요. 그런데 이 아가씨는?”
칼은 잠시 고민하는 얼굴이 되더니 빠르게 말했다.
“할슈타일 가문의 영애 되십니다…………. 친부는 바로 그란 하슬러 씨고요.”
조나단은 순간 이채로운 눈빛을 지었지만 별말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 그런가요.”
“그런데 핫소드라니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조나단은 손을 모아 입 앞에 세워보였다가 웃으며 말했다.
“퍽 오래된 일입니다만 아직 기억이 생생하군요. 그 친구의 검은 엄청나게 빨랐습니다. 궁성 경비 대원들끼리는 매일 대무를 하지요. 하지만 핫소드 그란의 경우엔 대무를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그란의 검을 받아낼 수 있는 대원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연습은커녕 상대가 크게 다치는 일이 발생하기 때문에 안전상의 이유 로 대무에서 제외되곤 했지요. 아, 고참 대원을 찾아가 물어보면 아직 그 친구의 전설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을 겁니다.”
칼은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럼 그 사람이 왜 경비 대원을 그만둔 것인지는 혹시 기억하십니까?”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기억하는 것이라곤, 아내가 죽고 나서 실의에 빠져 지내던 모습뿐입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만두었다고 기억합니다만.”
긴장한 얼굴로 듣고 있던 에포닌은 고개를 푹 숙였다. 칼은 초조한 표정으로 말했다.
“혹시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이 없겠습니까? 그를 잘 아는 친구라든지, 그런 사람이 없을까요? 이 에포닌 양은 자신의 친부를 급히 찾고 있습니다만.”
“그렇습니까? 허, 이런. 그 친구는 사람을 별로 사귀지 않았어요. 과묵한 성격이었고 사교적이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너무 오래된 일이라 그 사람을 기억하는 경비 대원들은 별로 없을 텐데요.”
“그렇습니까………….”
칼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에포닌을 바라보았다. 에포닌은 풀죽은 얼굴을 하고선 고개를 더욱 깊이 숙였고 일행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모두 입을 다물었다. 그때였다. 길시언이 그 고요 속에서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말했다.
“에포닌 양. 일단 옷을 좀 갈아입어야겠군요.”
“예? 옷이요?”
“그렇습니다. 옷이 젖어서 좋지 않군요. 그리고 활동하기에도 좋지 않을 테고. 날 따라오세요. 내 누이에게 찾아가서 옷을 좀 갈아입도록 하지요. 아, 레니 양? 레니 양도 같이 가겠습니까? 네리아 양도 좋다면………….”
네리아는 사양했다. 에포닌은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전하. 그럼……………”
“저도………….. 가도 되나요?”
“물론이지요. 어서 따라오세요.”
레니도 발그레한 얼굴로 일어났다. 그런데 갑자기 왜 저러는 거야? 지금 옷이 뭐 그리 중요한 것이라고. 칼은 의아한 얼굴로 길시언을 바라보았지만 길시언은 재빨 리 말했다.
“여러분들은 여기서 잠시 기다리시지요. 두 아가씨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기대하시며 기다리는 것도 좋습니다. 하하하!”
왠지 길시언답지가 않네? 그러나 길시언은 에포닌과 레니를 데리고서 재빨리 나가버렸다. 문이 닫히고 나자 엑셀핸드가 투덜거렸다.
“뭐, 어디 찢어진 것도 아니고 약간 지저분하다는 것뿐인데. 옷은 무슨 옷. 모두들 바쁜 일정인데 말이야!”
그러자 조나단은 빙긋 웃었다. 그는 엑셀핸드를 향해 목례하는 시늉을 하면서 말했다.
“드워프의 노커여. 왕자님의 행동을 나무라지 말아주십시오. 사실은 제가 왕자님께 부탁했습니다.”
“예?”
칼이 놀란 목소리로 물어보았을 때 아프나이델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메시지 스펠이었군요? 스승님.”
“그렇다. 제법이구나. 아, 제가 왕자님에게 메시지를 보냈지요. 그래서 왕자님이 에포닌 양을 데리고 나간 겁니다. 혹 에포닌 양이 의심할까 봐 레니 양도 같이 데리 고 나간 것이고요.”
“무슨…………, 에포닌 양이 들으면 안 될 이야기라도?”
“그렇습니다, 헬턴트 공. 비밀스럽게 말씀드릴 것이 있지요. 핫소드 그란은 몇 년 전, 절 찾아온 적이 있었지요.”
칼은 놀란 얼굴이었지만 별 이야기를 하지 않은 채 조나단의 이야기를 기다렸다. 조나단은 손가락을 깍지 끼더니 잠시 침묵했다. 그는 그렇게 깍지 낀 두 손을 턱밑 에 받치더니 눈을 감고는 깊은 생각에 잠긴 얼굴이 되었다.
그러다가 그는 다시 눈을 뜨며 엉뚱한 말머리를 꺼냈다.
“에포닌 양의 아우 되는 디트리히는 드래곤 라자의 자질을 가지고 있었지요. 할슈타일 가문이 아닌 다른 혈통에서 드래곤 라자가 태어나는 것은 드문 예입니다만 완 전히 없는 것은 아닙니다.”
뭐야, 이건? 대단한 뉴스인데?
“그리고 할슈타일 후작은 드래곤 라자의 자질을 가진 아이들을 모으고 있습니다. 지골레이드의 라자였던 돌맨도 그런 경우입니다. 양자로 입양된 거지요.”
잘 아는 이야기를 들으려니 좀이 쑤시는군. 난 조나단의 느릿한 말투를 꾹 참으면서 기다렸다. 하지만 조나단의 말투는 점점 느려졌다.
“그런데 디트리히의 경우에는 양자로 입양할 수가 없는 조건이었습니다. 친부가 엄연히 살아 있었고, 또한 임펠리아 경비 대원이었으니까 지체도 그런 대로 있는 집 안이지요. 전사로서는 최상급 전사라고 할까요?”
“그렇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조금 전 그란의 아내가 죽었다는 말은 들으셨지요? 그란의 아내, 그러니까 에포닌과 디트리히의 어머니였던 그 여인은 마가릿이라고 했지요.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아름답고 품위 있는, 자상한 여인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아. 그런가 보지. 난 심드렁한 기분을 느끼며 고개를 조금 돌렸다. 그런데 그때 내 눈에 들어온 칼의 모습이 가관이었다. 그는 눈꼬리를 바르르 떨고 있고 있었고, 게 다가 주먹은 꽉 움켜쥐어 하얗게 변해 있었다. 저 모습은 마치, 마치…………. 내가 그의 모습을 표현할 적당한 말을 찾고 있을 때 그는 그 모습에 무섭도록 어울리는 극도 로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설마……, 자연사가 아닙니까?”
“어느 화창한 날, 장을 보기 위해 나섰다가 대로에서 괴한들에 의해 난자되었습니다. 즉사했지요. 범인은 잡히지 않았습니다.”
“제기랄!”
칼은 험한 목소리로 말했다. 샌슨은 머리 끝까지 화가 난 칼을 보면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조나단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내가 죽고 나서 그란은 매일같이 술을 마시고는 경비 대원의 일에도 제대로 종사하지 않았습니다. 항상 취해 있거나, 취하지 않았을 땐 술을 마시고 있었지요. 그 런 상태로 다른 경비 대원을 구타해서 커다란 사건을 만든 적도 있습니다. 당시 전 아무런 사정을 몰랐습니다. 그저 아내가 죽어 자포자기한 상태인 줄로만 알았기 때 문에 그가 사고를 일으켜도 크게 벌하지 않았지요. 그란이 경비 대원을 그만두겠다고 말했을 때도, 그가 그런 식으로 낙심해서 인생을 마구 굴리는 것이 보기 언짢아 서 사정을 꼬치꼬치 캐묻지도 않고 허락해 주었지요. 그 다음 그란은 에포닌과 디트리히를 할슈타일 후작에게 넘기고는 수도를 떠났습니다. 그러다가 몇 년 전에 절 찾아온 것이지요.”
칼은 질린 얼굴이었다. 왜 저러시는 거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칼은 그런 질문을 받을 자세가 아니었다. 칼은 계속해서 추궁하는 표정으로 조나단을 바라보며 말했 다.
“뭐라고…………… 말했습니까?”
조나단은 잠시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핫소드 그란은 다른 사람에겐 들키지 않게 은밀히 찾아와서는 제게 부탁을 했습니다. 옛 상사에게 부탁하는 것이었습니다만, 제가 마법사이기 때문에 부탁한 셈이 기도 하지요.”
“무슨 부탁이었습니까? 마법입니까?”
“그렇습니다. 핫소드 그란은 자신의 얼굴을 바꿔달라고 부탁하더군요.”
“얼굴을?”
“예. 간절히 부탁했습니다만 저로선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얼굴을 바꿔달라고 말하니, 혹시 어디선가 커다란 사고라도 일으킨 것이 아닌가 의심도 되었지 요. 그래서 이유를 말해서 날 납득하게 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란은 몹시 갈등하는 모양이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입을 열더군요. 디트리히와 에포닌을 보고 싶 어서라고 말하더군요.”
칼은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아들딸이 보고 싶다고? 제레인트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조나단을 바라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아니, 보고 싶으면 찾아가서 보면 되잖습니까? 어이가 없네요? 뭐, 자기 아들딸을 남에게 맡겼으니 그 애들에게 미안하기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얼굴 까지 바꾼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만?”
칼은 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침버 씨……, 아마 그란 하슬러 씨로서는 목숨이 걸린 일이었을 겁니다.”
“예? 목숨이오?”
제레인트는 입을 쩍 벌렸고 조나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짐작하신 대로입니다. 그란은 협박을 당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디트리히를 내놓으라는 협박 말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공포를 주기 위해 그 아내를 죽인 것입니다. 지독한 일이지요.”
머릿속에 벼락이 친 거야.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야 머릿속이 이럴 수가 있나.
믿을 수 없어. 그런 말은, 그런 말은 믿을 수 없어! 말도 안 돼. 네리아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입을 틀어막은 채 턱을 덜덜 떨고 있었다. 심지어 아프나이델의 눈에서 조차 지독한 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칼 이외의 다른 일행들은 이제야 서늘한 공포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냐.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시라구!
조나단의 나지막한 목소리는 무시무시하게까지 느껴졌다.
“예. 그렇습니다. 할슈타일 후작은 디트리히를 가지기 위해서 그란을 협박했겠지요. 물론 그란은 버티려 했을 겁니다만, 아내의 죽음 앞에선 그도 굴복할 수밖에 없 었겠지요. 그가 가슴 속으로 흘린 눈물은 피눈물이었겠지요. 그리고 아들딸의 모습을 먼빛으로나마 보기 위해선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는 얼굴을 바꾸기로 결심한 것이지요.”
“그런 인간 같지 않은…………….”
제레인트는 크게 헐떡거리며 말했지만 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엑셀핸드 역시 기가 막혀 말도 나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허리띠의 버클을 부서져라 움켜쥐고 있었 다. 샌슨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로 말했다.
“정말입니까? 정말 그런 추악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까!”
“그렇소, 퍼시발 공.”
“아니, 전 믿을 수 없습니다! 세상에 믿을 말이 따로 있지요! 그건 말도 안 됩니다! 꼬마를 아들로 삼기 위해 그 부모를 죽인다고요?”
조나단은 침울한 얼굴로 퉁명스럽게 말했다.
“나도 그랬소. 도저히 못 믿겠다고 말했지요. 그러자 그란은 쓰게 웃더군요. 그토록 무서운 웃음은 생전 처음 보았소.”
“그럼! 그럼 대장님께서는 왜 잠자코 계셨습니까! 왜 할슈타일 후작을 고발하지 않았습니까! 그란이 증언을 했다면, 그렇다면 확실한 것 아닙니까! 설마, 설마 목숨 이 아까워서 그랬습니까?”
조나단은 더 못 참겠다는 어조로 외쳤다.
“이거 보시오, 퍼시발 공! 그렇게 서툴게 행동했을 거 같소? 천만에! 협박은 모두 익명이었고 무엇 하나 증거 될 만한 것은 남지 않았소! 그란이 자신의 아내가 죽은 상황에서 그 생각을 못해 본 줄 아시오? 그란은 법이나 정의의 이름으로 할슈타일 후작을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직접 그를 죽일 생각도 했다고 했소. 하지 만 그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지! 게다가 아들딸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소!”
“이런, 개 같은!”
쾅! 샌슨은 테이블을 부서져라 내리쳤다. 손에 이상한 느낌이 와서 내려보니 난 소파의 가장자리를 부숴놓은 상태였다.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올려 보니 꽉 쥔 주먹 속에는 소파에서 뜯겨진 가죽이 한 움큼 잡혀 있었다. 손가락을 펴는 단순한 동작이 극히 어렵게 느껴진다. 투둑, 후두둑. 꽉 쥐어져 있던 가죽은 구겨진 모양 그대로 아래로 툭 떨어졌다. 가죽이 뜯길 때 함께 뜯겨나온 솜과 헝겊 등이 나풀거리며 떨어졌다. 아래에 떨어져 널브러진 소파의 파편을 바라보면서 점점 눈앞이 어지러워 지는 것을 느낀다.
조나단은 소파에 등을 기대고선 얼굴의 땀을 닦아내었다. 그는 우리 모두를 주욱 둘러보고는 자조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웃기는 일이오……. 그래. 할말은 없소. 내가 과연 그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그란을 도왔던 것인지 자신할 수는 없소. 어쩌면 나 역시 할슈타일 후작을 무서워한 것 인지도 모르지. 하지만, 하지만 정말 어떤 방법도 떠오르지 않았소.”
칼은 잔뜩 쉰 목소리로 말했다.
“말씀 믿겠습니다.”
“고맙소. 후우, 죄와 벌이 같이 다니지 않는다고 흔히 말하지만, 이런 경우는 정말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소. 죄 지은 자는 벌 받지 않고 그 피해자는 아내를 잃은 데다가 아들딸도 뺏기고, 그것도 모자라 자신의 목숨도 위협받고 있었소. 그가 섣불리 입을 열면, 그렇다고 하더라도 할슈타일 후작을 단죄할 증거는 없었지만, 그에 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오. 그란은 그래서 수도를 떠났던 것이었소. 하지만 아들딸의 모습이 도저히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던 거요.”
“그래서 얼굴을 바꿔달라고 말한 것이었군요. 먼발치로나마 마음껏 자녀의 모습을 보기 위해.”
칼의 목소리는 지독하게 쉬어 있어서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조차 힘들 정도였다. 아니, 내가 너무 흥분해서 그의 말을 거의 알아듣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조나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는 울었습니다…………….”
“예?”
조나단은 먼 과거의 어느 시간 속에 자신을 보내며 느릿한 어조로 말했다. 아프나이델은 그런 스승의 얼굴을 보면서 깊은 슬픔을 되씹는 표정이 되었다.
“그를 부여잡고…. 어른이 되고 나서, 인간사를 벗어나 마나에 내 애정을 바치고 나서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는 오히려 날 위로하더군요. 허허허. 그가 가 장 괴로울 때는 그를 이해하지도 못한, 그리고 그의 슬픔을 알게 되고도 아무런 일을 해주지 못한 이 눈먼 상사를, 그가 위로했단 말입니다.”
“마음이………… 아프셨겠군요.”
조나단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가 마침내 조용히 현실로 돌아왔다. 난 그가 마나에 애정을 바친 이후로 두 번째 눈물을 흘리지 않을까 걱정되었지만 조나단 은 그러지 않았다. 대신 그는 사무적이고 딱딱한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전 그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습니다. 쉬운 일은 아니었지요. 임시로 모습을 바꾸는 것은 환상을 이용해서 간단히 할 수 있는 마법입니다만 얼굴을 영원히 바꾸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별별 실험을 다 해보고 온갖 수단을 동원한 끝에 겨우 얼굴을 바꿔놓을 수 있었습니다.”
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나단은 계속 생기없는 어조로 말했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바꿀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핫소드 그란은 그렇지 않아도 적은 말수가 더욱 적어지게 되었지요. 목소리 때문에 원래 정체가 드러나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맙소사! 일행은 모두 한 방 맞은 표정이 되었다. 칼은 아랫입술을 깨물면서 말했다.
“그렇다면 넥슨 휴리첼의…………?”
조나단은 놀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알고 계셨군요?”
“하슬러라는 이름은 알고 있었지요. 그 사람과는 여러 번 마주쳤으니까요.”
“그렇습니까? 아, 여러분들은 넥슨 휴리첼의 반역을 알아내신 분들이니 당연한 일이군요. 예. 그렇습니다. 넥슨 휴리첼의 심복인 하슬러가 바로 핫소드 그란, 그란
하슬러입니다.”
창 밖에선 꽃나무들이 계절을 완전히 무시하면서 아름답게 망울져 피어나고 있었다. 초겨울의 쌀쌀한 날씨 속에서도 데미 공주님의 손길은 저 아름다움을 피워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방 안에는 아름다움이란 없다.
“이건 지금껏 저와 그란 둘만의 비밀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에포닌 양과 함께 온 것을 보고 전 몹시 놀랐습니다. 하지만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모르겠군요.” “잘된………… 일이라구요?”
“부탁하겠소, 헬턴트 공. 에포닌 양이 친부를 찾는다면 그녀를 할슈타일 후작의 손에서 빼내 주시오. 할슈타일 후작도 그녀에게는 별 관심이 없을 거요. 드래곤 라자 는 디트리히였으니까.”
“그녀는………… 이미 할슈타일 저택을 나왔습니다. 그래서 우리와 만나게 된 것이지요.”
“그렇습니까? 그럼 더욱 잘되었군요. 그녀를 어디 한적한 수도원 같은 곳에 데려다주시겠습니까? 그랜드스톰 같은 신전이라도 좋겠군요.”
“수도원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전 지금 당장은 그란과 연락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 멍청한 작자는 하필이면 넥슨 휴리첼 같은 이리를 주인으로 섬겼기 때문에, 지금 그가 모습을 드러 내면 곧장 교수대로 끌려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에포닌이 할슈타일 저택을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란은 어떻게든 절 찾아올 것입니다. 그럼 제가 그에게 전해 주겠습니다.”
“전해 준다고요?”
“예. 에포닌이 어디에 있는지 전해 주겠습니다. 그러면 그란은 에포닌을 데리고 어딘가로 떠나 평화롭게 살 수 있겠지요. 그의 불행은 하나같이 그의 책임 밖의 일이 었고, 이젠 그는 너무 오래 미뤄두었던 행복을 되찾아야 합니다.”
칼은 침울한 눈으로 조나단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에서 갑자기 엉뚱한 말이 나왔다.
“그는 반역자의 수하 아닙니까?”
“예?”
“그는 반역자의 수하라고 했습니다. 넥슨 휴리첼의 다시 없는 심복이니까요. 그런데 아프나이델 공은 궁성 경비 대장이십니다. 그가 찾아오면 체포하셔야 되는 것 “아닙니까?”
조나단은 충격을 받은 얼굴로 칼을 마주보았다. 그러다가 그는 격하게 고개를 젓더니 말했다.
“그자에겐 죄가 없소! 죄가 있다면 그 넥슨 휴리첼에게 있을 뿐이지! 그란은 양심에 따라 주인을 섬겼을 뿐이오. 난 그렇게 믿소!”
칼의 안색이 조금 밝아졌다.
“그를 신뢰하시는 모양이군요.”
“신뢰하오!”
조나단은 짧고 강하게 말했다. 잠시 후 그는 더 부드럽고 침착한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그자의 고통을 알고, 그 슬픔을 아오. 아니, 안다고 생각하오. 그란을 위해 무엇이라도 해주고 싶다는 것이 내 솔직한 심정이오. 사실 디트리히가 실종되고 나서 난 몇 번이나 할슈타일 후작을 찾아가려고 마음먹었소. 에포닌을 돌려받기 위해서 말이오. 하지만 나에겐 마땅한 구실이 없었소. 그래서 주저주저하다가 이렇게까지 늦 어버린 거요.”
“알겠습니다. 이제 저도 그란 하슬러를 신뢰할 수 있을 듯합니다.”
칼은 그렇게 말하더니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나단뿐만 아니라 다른 일행들도 모두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칼은 말했다.
“에포닌 양은 저희들이 보호하겠습니다. 안전하고 좋은 장소를 찾게 되면, 에포닌 양이 안심하고 있을 만한 장소를 찾게 되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저희들의 여정이 바빠서 이만 일어나봐야겠군요.”
“예? 아, 알겠소. 그리고 정말 감사합니다.”
“천만에요. 그럼.”
칼은 손을 내밀었고 자리에서 일어난 조나단은 그 손을 보더니 역시 손을 내밀어 악수했다. 칼은 그의 손을 흔들면서 말했다.
“할슈타일 후작에 대해 알면 알수록 더 뜨거운 적의를 느끼게 되는군요.”
조나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유피넬의 저울대는 길지만 헬카네스의 추는 무겁소. 할슈타일이 얹은 무게는 너무도 무겁고, 난 그의 최후에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웃어줄 거요. 지금은 그때를 생 각하며 참고 있을 수밖에 없군요.”
조나단이 갑자기 표시한 맹렬한 적의는 사람들의 입을 다물어지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