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6권 – 제12부 : 불길한 예언 7화 (6권 끝)
7
굉장한 속도로 돌아가는 마차 바퀴는 땅을 파고들 것만 같다. 아니, 땅 위로 날아오를 것 같다. 쿠르르르. 난 마차 바퀴에서 눈을 떼어 앞쪽을 바라보았다. 감당할 수 없이 넓은 하늘, 그리고 그 하늘은 겨울밤, 벽난로 속의 장작개비에서 비쳐나오는 붉은 빛으로 이글거리며 타오르고 있었다.
다시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운차이는 온몸이 붉게 물든 채 짐더미에 기대어 나무 토막을 깎고 있었고 그 뒤로는 마차의 그림자가 한없이 길게 뻗어 있었다. 동녘 하늘은 이미 암청색으로 어두웠지만 평야는 붉게 빛나고 있어 하늘보다 땅이 더 밝아보였다. 그리고 그 밝은 땅으로 길게 뻗은 그림자는 기괴하게 보였다. 샌슨 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할까요? 해 지기 전에 메드라인 고개에 들어서기는 어렵겠습니다.”
“당연한 말을 하는군.”
내 힐난 섞인 말에 샌슨은 씩 웃었다. 물론 해 지기 전에 들어서기는 어렵겠지. 지금 벌써 해가 지고 있으니까. 서쪽을 향해 달려가는 우리들 앞으로 하루 종일 쉴새 없이 달아나던 태양은, 마침내 기나긴 하루의 여정을 마치고 갈색 산맥으로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다. 붉은 석양을 피하기 위해 칼은 눈썹 위쪽으로 손을 들어올렸다. 하지만 별로 효과적일 것 같지는 않다. 태양은 정면에서 불타오르고 있었으니까. 칼은 한참 그렇게 바라보더니 샌슨에게 말했다.
“저기……………, 햇빛을 받아 번쩍이는 저것은 닐 드루카 봉우리 아닌가?”
“예. 하지만 평지에선 멀리 있는 것도 가까워보이는 법입니다. 저렇게 보이지만 그래도 한두 시간은 달려가야 할 겁니다.”
“흐음. 해는 곧 질 텐데. 그럼 야영을 준비해야 되는 건가?”
“하지만 속도를 조금 더 높이면 해가 지고 나서 세 시간 내에 메드라인 고개에 들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달빛도 괜찮을 테니까 여덟 시나 아홉 시쯤에는 어쩌면 메 드라인 고개의 레인저들이 머무는 바라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잠자리 준비할 시간 같은 것은 필요없어질 테니 무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만.” 칼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하세. 메드라인 고개의 레인저 대원들에게 신세를 지기로 하지. 그리고 잠시 눈을 붙였다가 내일 새벽녘에 출발하면 되겠군.”
“예, 알겠습니다. 자, 미안하지만 다시 수고들 해줘!”
샌슨은 천천히 걸으며 쉬고 있던 말들에게 사과하고는 곧장 말들을 독려하기 시작했다. 말들은 앞으로 죽죽 달려나가기 시작했고 마차는 급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했 다. 우리들이 탄 마차는 그렇게 마지막으로 핏빛으로 불타오르고 있는 태양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으음. 어쨌든 오늘 밤에는 침대 신세를 질 수 있겠군? 다행이 야. 운차이의 낮은 외침 소리가 들린 것은 그렇게 급격하게 출발한 직후였다.
“오른쪽 전방, 잘 봐!”
뭐지? 난 운차이가 말하는 대로 오른쪽 전방을 바라보았다. 전방을 보기 위해선 칼처럼 이마에 손을 올려야 했다. 오른쪽 전방은 약간의 구릉이 져 있는 언덕 지형이 었는데 지금 저 멀리 언덕 꼭대기에 검은 점들이 하나둘 나타나고 있었다. 석양을 등지고 있는 그 그림자들은 시커멓고 거대하게 보였다. 모두 셋이었다.
“뭐지? 피난민일까?”
운차이는 고개를 가로저었고 그때 내 눈에도 그림자들에서 번쩍이는 빛이 보였다. 저 그림자들은 뭔가 반짝이는 것을 들고 있었다. 게다가 덩치가 이만저만 좋은 것 이 아니었다. 말에 올라타 있는 모양이다.
“반사광이야.”
“검이군!”
그때였다. 그림자들은 언덕을 따라 달려내려오기 시작했다. 아래로 내려옴에 따라 그들은 언덕의 그림자 속에 들어가버려 보이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얼마 있지 않 아 그들은 언덕 아래쪽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모두 말에 타고 있었으며 손에는 번쩍이는 검을 들고 있었다. 불길한 추측이 들기 시작하는걸? 운차이는 그 놀라운 시력으로 내 추측을 뒷받침했다.
“넥슨이군.”
“빌어먹을! 에, 그러니까, 그러므로!”
샌슨이 좀더 심한 욕설을 하기 위해서 생각에 잠겼을 때 칼이 침착하게 말했다.
“마차를 세우게. 퍼시발 군.”
샌슨은 끝내 목에 걸린 욕설을 말로 만들어내지는 못하고 대신 급하게 고삐를 당기며 마부석 옆에 있던 제동기를 확 끌어당겼다. 끼기기긱! 제동기에 걸린 바퀴들에 서는 끔찍한 소리가 들려왔고 말들은 거친 투레질을 하며 발걸음을 멈추었다. 힝힝힝힝힝! 한참 달리다가 갑자기 바퀴가 멈춰버린 마차는 땅을 긁어대며 굉장한 흙먼 지와 돌멩이를 튀겼다. 갑자기 마차 차체 전체가 옆으로 쓰러질 듯 크게 기우뚱거렸고 그와 동시에 마차 안에서는 여러 명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테페리여! 실제로 뵙는 것은 처음이군요. 전 제레인트 침버라고………….”
하지만 마차는 간신히 전복되지 않고 옆으로 크게 틀면서 급정거했다. 끼야아가각! 귓속을 파고드는 격렬한 소음이 갑작스레 그치고 나자 어느새 마차는 멈춰 서 있 었다.
마차 뒤로는 네 개의 바퀴가 땅을 헤집고 할퀸 호선들이 그로테스크하게 그려졌다. 이제 마차는 옆으로 선 채 달려오는 세 명을 마주하게 되었다. 길시언과 샌슨은 아래로 뛰어내렸고 칼은 날랜 동작으로 지붕 위로 기어올라왔다. 나와 운차이는 아래로 뛰어내리며 칼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톱메이지, 밖으로 나오시오.”
마차 문이 벌컥 열리며 아프나이델이 뛰쳐나왔다. 아프나이델은 달려오는 세 명을 보더니 눈을 찌푸리며 거리와 방향을 재었다. 하필이면 우리 정면에서 달려오고
있는지라 그들은 붉은 석양을 등지고 있었다. 아프나이델은 역광에 눈을 찌푸리면서 캐스팅을 시작하려 했다. 그러나 지붕 위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칼은 아 프나이델을 제지했다.
“아니, 아직 공격하지 마시오, 저들이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정면으로 공격해 올 이유가 없소. 대화를 요구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운차이가 사납게 말했다.
“검을 빼들고 있습니다!”
달려오는 세 명의 등 뒤로는 시뻘건 태양이 이글거리며 타오르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 쪽으로 엄청난 그림자를 드리우고는 그 그림자를 밟으며 달려오고 있었다. 그 리고 그들이 들고 있는 검은 등 뒤의 태양빛을 받아 몸서리쳐지도록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칼은 신중하게 말했다.
“아니, 공격 의도가 확실해질 때까지는 잠시 기다립시다. 저들이 자살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왜 상대도 되지 않는 전력으로 공격해 온다는 말입니까?”
석양 탓인지, 흥분 탓인지, 어쨌든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던 샌슨은 기가 막힌 표정으로 말했다.
“상대도 되지 않는? 글쎄요, 칼. 저로 하여금 칼이 벌써 치매에 걸리지 않았는가 하는 의심을 품게 하지는 마십시오. 저들은 모두 후치와 같은 괴력을 낸다는 사실을 주지시켜 드릴까요?”
일행이 모두 샌슨을 돌아보며 눈이 휘둥그레진 것은 퍽 슬픈 일이었다. 칼은 히죽히죽 웃기까지 하면서 말했다.
“안심하게. 아직은 그런 병에 걸리지 않았으니. 하지만 제아무리 괴력이라고 해도 저렇게 달려오다간 공격당하게 될 거야. 저들에게 마법사가 없는 이상……”
칼의 말이 갑자기 사그라들었다. 칼은 뭔가 잊어먹은 것이 있다는 식의 얼굴이 되어 멍하니 달려오는 넥슨 일행을 바라보았다. 마차 위 지붕에서 회청색 하늘을 등진 채 황혼의 붉은 빛을 정면으로 받고 있는 칼의 모습이 왠지 고독하게 보인다고 생각하는 순간, 마차 문이 벌컥 열리면서 제레인트가 구르듯 뛰어나왔다. 제레인트는 그대로 앞으로 뒹굴 듯하다가 운차이의 부축을 받으며 간신히 균형을 잡았다. 그는 운차이의 팔을 붙잡으며 외쳤다.
“사악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말도 안 돼! 지금은 낮인데 어떻게 시오네가!”
내가 고함을 지른 순간 칼도 퍼뜩 정신을 차리며 활과 화살을 들어올렸다. 하지만 시오네는 낮에 돌아다닐 수 없어! 그러나 아프나이델은 이를 악물면서 외쳤다. “바로 그 낮이 우릴 떠나는걸.”
순간 태양이 진다. 잔광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동녘에서 번져나온 어둠이 머리 위까지 다가온 것이 느껴졌다.
밤이 다가온 것이다.
“시오네와 합류하기 위해 먼저 달려온 것이군.”
모두 짐작할 수 있는 일을 차분하게 말하는 운차이가 이상하게 보였다. 그러나 운차이는 곧장 앞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고 그와 동시에 길시언과 샌슨도 달려나갔 다. 아프나이델은 얼굴을 잔뜩 찌푸려 잇몸을 다 드러낸 채 캐스팅을 시작했다. 그러나 칼의 단호한 목소리가 울려펴졌다.
“멈추시오!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려요!”
“칼!”
아프나이델의 고함소리는 비명에 가까웠다.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시 캐스팅을 시작하려 했으나 달려오는 자들은 이제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졌 다.
선두에 선 자는 넥슨 휴리첼. 태양을 등진 그의 얼굴은 시커멓다. 검은 옆으로 곧게 들고 한 손으로 고삐를 거머쥔 채 맹렬하게 달려오고 있다. 그러나 그 뒤의 하슬 러와 자크는 검을 뽑아들지 않은 상태였다.
칼은 활을 들어올렸지만 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침착하게 말했을 뿐이다.
“모두들 마차를 등지시오.”
“예?”
“마차를 등지시오. 그럼 돌격을 멈출 수밖에 없겠지.”
“달려나가서 저지해야 됩니다! 마차가 공격당하면 발이 묶입니다!”
칼의 붉은 얼굴이 좌우로 흔들렸다. 칼은 지붕에서 마부석으로 내려오더니 그대로 마차 아래로 내려섰다. 나는 정신없이 달려오는 세 그림자와 침착하게 움직이는 칼을 번갈아 바라보면서 상당히 기괴한 기분에 젖어들었다. 칼은 우리들 옆으로 걸어가더니 그대로 앞으로 나섰다. 달려오고 있는 모습들은 무섭도록 커지고 있었지 만 칼은 운차이를 흘긋 보면서 침착하게 말했다.
“멈추라고 말해 주십시오.”
운차이는 롱소드를 가슴 앞에 단단히 세우더니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주위의 다른 사람들은 재빨리 귀를 틀어막았다.
“멈춰라아아!”
메아리는 없었다. 사방이 평평한 평야였으니까. 그래서 운차이의 커다란 함성은 그 끝이 급속하게 사그라들었다. 그러나 달려오던 놈들은 분명히 들었을 것이다. 길 시언은 중얼거렸다.
“경고는 했어. 이제 알아서 멈춰야 돼.”
놀랍게도 넥슨 일행의 속도가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최고속력으로 달려오고 있던지라 멈추기가 쉽지 않았는지 넥슨은 급하게 고삐를 잡아당겼다. 넥슨이 타고 있 던 말은 거세게 발길질을 하면서 멈춰 섰고 그 뒤의 두 명도 마찬가지로 멈춰 섰다. 그러나 넥슨과 칼의 거리는 10큐빗도 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넥슨은 잠시 말을 달래기 위해 시간을 끌었다. 말은 왔다갔다 하면서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넥슨은 침착하게 고삐를 당기면서 말의 갈기를 쓸어 주고 있었다. 그는 낮고 빠르게 되뇌었다.
“침착해, 침착해. 잘했어. 정말 잘 달렸다. 그러니 이젠 침착해.”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서녘을 등지고 있는 넥슨의 얼굴은 이목구비가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 그러나 그 얼굴이 따스해 보이는 것이다. 그 순간 넥슨은 두 명의 동료도, 그의 앞에 서 있는 여러 명의 적대자들에게도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은 채 오로지 자신이 탄 말에만 올곧은 관심을 보내고 있었다.
샌슨도 그런 느낌이 든 모양이다. 그는 넥슨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고, 그러다가 다시 넥슨의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칼은 똑바로 선 채 넥슨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오래간만이오. 넥슨.”
넥슨의 말은 이제 진정했고 넥슨은 한 손에 감아쥔 고삐를 옆으로 늘어뜨리고는 칼을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얼굴은 캄캄했고 그래서 그의 표정은 알 수 없었다. 난 그의 다른 손에 들린 검에 신경을 집중했지만 칼은 검은 쳐다보지도 않는 모양이다. 칼은 계속해서 한 일주일 만에 만난 동네 청년에게 거는 말투로 말했다. “잘 지냈소?”
넥슨의 대답은 좀 지체되었다. 그는 쉰 목소리로 느릿하게 대답했다.
“그다지………….., 완전히 조각난 사내는 어떻게 지내야 잘 지내는 것인지 모르겠소. 어쨌든 내 생각엔 조각난 것 치곤 괜찮은 것 같소.”
뭔가 세상이 날 배신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만 그런 것인가 싶어서 주위를 돌아보니 샌슨이나 길시언의 얼굴도 집이 불탔다는 소식과 불탄 잔해를 뒤적거리 다가 뒷마당에서 금광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동시에 들은 사람 같은 얼굴이었다.
“그래요. 여전히 생각은 변치 않았습니까? 난 당신이 생각할 시간이 충분했다고 믿는데.”
넥슨은 이번에도 피곤한 듯하지만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생각은……, 나에겐 고문이오. 하나의 생각에서 자연스럽게 다른 생각으로 넘어가는…………, 그 단순한 즐거움이 나에겐 더 이상 남지 않았소. ・하나의 생각이 떠오 를 때마다 뒤이어 나타나는 거대한 공허가 나를 미치게 만들 뿐이오.”
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칼은 달군 나이프로 버터를 자르듯 똑바로 질문했다.
“세상과 함께 파멸할 거요?”
넥슨의 대답은 다시 지체되었다. 넥슨이 말하는 동안 하슬러는 꼼짝도 하지 않았고 자크는 네리아를 흘끔흘끔 바라보았다. 그런데 시오네는 어디 있는 것일까? 넥슨은 말했다.
“한 가지 점에선 당신이 맞았소. 대미궁에서 당신은 나의 증오를 무의미하다고 말했지요. 그 증오심은 이제 나와 관련 없는 과거의 다른 넥슨의 것이라고. 그렇소. 내 속에 있는 증오는 타인의 것이오. 그리고 타인의 증오심을 자신의 가슴속에 계속 담아두는 일은………, 너무 힘들더군요.”
칼은 빙긋 웃었다. 넥슨은 그 미소를 보며 좀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그걸 이해하고 있었겠지요. 그래서 내가 달려오는데도 공격을 하지 않은 것이고.”
웃고 싶은 건지, 울고 싶은 건지. 도대체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 여전히 편하게 말을 하고 있는 칼이 신기하게 보였다. 아니, 칼과 넥슨 모두가 왠지 자이 펀보다 더 남쪽에서 올라온 사람처럼 보였다. 그게 아니라면 아직도 개척되지 않은 저 서쪽에서 온 사람들이라든가.
…자신은 없었소. 자아의 기반이 하나밖에 남지 않은 자라면, 그것을 처리하는 방법은 두 가지겠지요. 오로지 그것에 매달리든가, 아니면 그것마저 버리든가.” 넥슨은 말하지 않았고 칼은 천천히 자신의 말을 설명해 나갔다.
“생각을 했소. 당신의 입장이 되어보려 했지요. 난 바이서스의 칼이고, 헬턴트의 칼이고, 우리 형님을 존경하는 동생 칼이며, 여기 있는 후치 군의 늙은 친구인 칼이 지요. 그중 하나밖에 남지 않게 되었을 때, 내가 과연 어떻게 행동할지를 생각해 보았소.”
넥슨은 피로한 음성으로 말했다.
“어쩔 것 같았소?”
“솔직히 말해 상상할 수 없었소. 내가 어떻게 행동할지를. 난 당신과 같은 존재가 되지 못했소. 아니, 세상에서 오직 당신만이 이런 경험이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 실 제로 영원의 숲에서 분리된 채로 살아나온 자는 당신뿐이니까.”
“그래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난 이거 하나는 깨달을 수 있었소. 난 과거에서 왔고, 미래를 향해 가고 있지만, 그것은 둘 다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넥슨의 검은 이제 옆으로 늘어뜨려져 있었고 그 주인의 관심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저 구부린 손가락에 걸려 있는 어떤 물건이었지 적을 겨냥한 무기 가 아니었다.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특별히 없어진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오. 영원의 숲은 사기요.”
“사기라고?”
“그렇소. 사기요. 마법사들이 항상 벌여놓고 수습하지 못하는 마법들처럼? 하하하.”
아프나이델의 얼굴이 볼썽사납게 바뀌는 것을 보면서 칼은 밝게 웃었다. 그는 다시 잔잔하게 말했다.
“그런 점에선 기적을, 현실을 마구 파편으로 만들고 이해 불가능한 것으로 퇴행시키는 기적을 일으키는 성직자들도 별로 할말은 없을 거요.”
“아니, 칼……?”
제레인트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칼은 그 목소리를 무시했다.
“물론 우리는 우리보다 높은 의지, 높은 힘을 가진 무엇이 되려 할 수도 있소. 대마법사가 될 수도 있겠지요. 혹은 신이 되려 할 수도 있겠지요. 마나와 기적은 그것 을 가능하게 하고 그 길을 닦는 아름다운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이오. 하지만 신이 되고 싶지 않은 자도 있는 거요.”
넥슨은 마상에서 은은한 눈빛으로 칼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보다 낮은 무엇이 된 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신의 의지를 나에게서 구하지 마시오. 모든 것과 함께 자멸할 거요? 그것은 조각난 넥슨으로서는 임무 완수가 되겠지. 물론 그것은 완수이자 동시에 자멸이니 화
려한 실패인 셈이기도 하고. 그것마저 버릴 거요? 그럼 당신은 세상에서도 드문 신생아가 되는 것일 테고.”
“신생아?”
“다시 걸음마를 배우고, 말을 배우고, 세상의 아름다움에 눈을 떠서는, 배우고 익힌 말로써 그것을 찬미할 수 있겠지. 혹은 혐오할 수도 있겠고.”
넥슨은 갑자기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그의 갑작스러운 동작에 놀라 나와 샌슨은 검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넥슨은 그런 우리를 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달려오면서 생각했소.”
넥슨은 어두워지는 저녁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이, 당신들 중 누구라도 과거의 나에 대해 말한다면, 그렇다면 난 과거의 나로서 당신네들을 공격하고 모조리 죽여버리겠다고. 반대로 당신들 손에 죽어도 좋 고.”
자크의 표정이 기이하게 바뀌었다. 저 어두운 얼굴에서도 그 표정의 변화는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넥슨은 여전히 잠꼬대같이 희미한 어투로 말했다.
“난 당신들이 내가 알지 못하는 나와 연결되어 있는 자라는 것이 견딜 수 없었소. 또한 과거의 불쌍한 사생아인 현재의 나를 과거의 나에 빗대어 미워하는 자들이라 는 것도 견딜 수 없었소. 난 세상에서 단절된 존재였고, 그럼에도 세상은 여전히 날 인지하고 날 노려보고 있었소.”
넥슨은 갑자기 히죽 웃었다.
“하지만 당신은 지금껏 과거의 나의 행적, 과거의 어떤 원한 같은 것에 대해서는 전혀 이야기하지 않았소. 내가 모르는 그 이야기들을 당신 역시 거론하지 않았소. 당신은 말과 행동 모두를 일치시켜서 현재의 나만을 바라보았소.”
넥슨은 갑자기 고개를 내려 칼을 쏘아보았다.
“내가 당신들을 공격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어떻게 깨달았소?”
뭐라구? 어, 그거 나도 궁금해. 난 칼을 바라보았다. 칼은 시선을 돌려 하슬러와 자크를 한번씩 바라보고는 말했다.
“대부분은 당신의 입장이 되어보려고 했던 결과였고, 좀더 직접적인 증거는 당신이 저 둘과 계속 함께하는 것을 보고서였소. 그리고 칸 아디움에서 네드발 군이 살 해되지 않은 것에서 확실히 깨달았소.”
뭐? 사, 살해? 칼! 무슨 끔찍한 이야기를? 그때 칼의 이야기를 듣던 넥슨의 어깨가 꿈틀거렸다. 하늘은 삽시간에 짙은 보랏빛으로 바뀌어가고 있었고 넥슨의 모습 전 체는……………, 마치 퇴락한 건물의 잔해처럼 무겁고 음침하게 보였다. 칼은 또렷하게 말했다.
“우리가 과거의 당신에 속한다는 이유로 우릴 공격한다면, 저 둘이야말로 우리들보다 훨씬 더 과거의 당신에 밀접한 자들이오. 그러나 당신은 저 둘을 계속 친구로 대했던 것 같소. 그리고 칸 아디움의 그날 새벽, 당신은 아마도 당신 종복의 도움으로 구출되었을 거요. 그때 당신 옆에는 무력한 모습의 네드발 군이 누워 있었을 거 요. 그러나 네드발 군은 우리들이 찾아갈 때까지 살아 있었소. 그것은 당신이 네드발 군을 가만 놔두고 떠났다는 이야기지.”
으아, 맙소사! 죽을 뻔했구나. 난 눈을 들어 새삼스러운 눈으로 넥슨을 올려다보았다. 넥슨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저 녀석도 알겠지만, 그땐 나 역시 혼수상태에 가까웠소. 그 생각을 떠올리지 못한 것이지.”
마치 지독한 개구쟁이가 욕설이나 꾸중 대신 생애 최초로 칭찬을 받게 되어 당혹스러워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는 분명 화난 듯했지만, 그래서 그만큼 친근 했다.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이야. 넥슨의 목소리가 친근하게 느껴지다니.
칼은 인자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이제 당신은 새로운 넥슨으로 살아갈 거요?”
순간 넥슨의 손에 갑자기 힘이 들어갔다. 그의 검 끝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보자 목 뒤의 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 넥슨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당신네들은 공격하지 않을 거요. 난 당신네들을 모르기 때문에 당신들에 대한 증오를 지켜나가는 것은 너무도 힘겨워. 하지만 바이서스는, 그리고 할슈타일은 내게 핏값을 지불해야 하오. 그것은 현재의 나도 똑똑히 기억하는 것이며,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잇는 하나뿐이자 가장 중요한 연결 고리지.”
칼이 놀란 얼굴로 뭐라고 말하려 할 때 길시언의 발이 크게 앞으로 나갔다. 놀랍게도 길시언은 넥슨이 타고 있는 말에서 3큐빗도 안 되는 거리까지 다가섰다. 만일 넥슨이 치고 들어온다면 막아내기도 급급한 위치였다. 그는 넥슨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말했다.
“바이서스가 너에게 무슨 핏값을 지불해야 된다는 거지?”
불안하게도 넥슨의 손이 계속 부르르 떨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손에 땀이 배는걸? 난 미끄러워지는 바스타드를 단단히 감아쥐었다. 넥슨은 길시언을 내려다보며 말 했다.
“바이서스는 내 육친의 피를 받아냈고, 따라서 난 바이서스의 피를 받아낼 것이다. 손에 마법검 하나 들어 옛이야기의 모험가 흉내를 내고 주색 잡기에 빠져들기 위 해 궁성을 나선 왕자는 안심해도 좋아. 그런 자의 피는 필요 없으니까.”
“뭐라고?”
길시언의 입에서 숨 막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관자놀이가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보며 난 피냄새를 맡는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길시언은 애써 차분하게 말했다. “네 육친의 피라고? 그게 무슨 뜻인지 설명해라. 마땅하게 설명할 기회를 준 다음 이 모욕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하지.”
길시언의 목소리는 딱딱 끊어지고 있었다. 반면 넥슨은 길시언의 분노를 느끼면서 점점 잔혹한 얼굴이 되어갔다. 놀랍게도 그는 옛날 유니콘 인의 하늘 위로 나타났 던 때의 얼굴이 되었다.
“너희들은 내 아버지를 죽였어………….”
길시언은 진저리를 치며 말했다.
“멍청한 자식! 기억을 못하는군. 로넨 휴리첼 백작은 죽지 않았어! 그를 사지로 몰아넣었다는 뜻이라면, 그것은 그 스스로가 자원한 일이라고 알고 있다. 그것이 어 떻게 바이서스의 죄가 되는 것이냐!”
넥슨의 얼굴은 이제 사람의 얼굴이라기보다는 돌 조각의 얼굴처럼 보였다. 그의 얼굴에는 사람의 얼굴이라면 당연히 나타날 복잡한 표정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 는 오로지 하나의 단순한 표정만을 짓고 있었다. 그것은 적의였다.
“로넨? 내 의붓아버지 말이군. 에포닌의 의붓아버지 할슈타일처럼……………”
앞의 말에 정신이 멍해졌다. 그러나 곧 그 뒤의 말이 내 귀를 파고들었고 나의 시선은 넥슨에게서 하슬러로 급격하게 움직였다. 이미 어두컴컴해지는 하늘 아래 하슬 러의 표정을 알아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슬러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 서 있었다. 그가 꼼짝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나의 시선은 다시 넥슨에 게로 돌아갔다.
길시언은 어이가 없는 투로 말했다.
“무슨 말이냐! 네가 어떻게…………. 네가 양자라고? 아냐! 그렇지 않아. 넌 양자가 아니야!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넥슨의 얼굴에선 이제 미소가 스며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적의를 누그러뜨리기는커녕 한결 더 뜨겁게 불타오르게 만들었다.
“양자? 물론 아니지. 난 그의 아내의 아들이니까.”
그의 아내의 아들이라고? 그게 그 말이잖아? 아니, 잠깐. 그렇다면 그의 아들은 아니라는 말인가………? 정수리의 머리카락이 쭈뼛 곤두서는 것 같았다. 머릿속에 너 무 많은 생각이 밀려들면서 자칫 검을 놓칠 뻔했다.
‘휴리첼 가문의 불명예는, 그 카뮤가 수치스럽게 죽었고 그 때문에 크라드메서가 발광하게 되어 미드 그레이드를 쑥밭으로 만들었다는 데 있지. ・밀통을 하다가 여자의 남편에게 칼 맞아 죽었거든.’
‘우리 아버님은 돌아가셨어! 돌아가셨다구! 형제의 손에 죽음을 당했…………!’
칼은 두 손을 동시에 들어올리려다가 다시 떨어뜨리며 말했다.
“당신은 카뮤 휴리첼의 아들이오?”
넥슨은 길시언을 쏘아보면서 칼의 말에 대답했다.
“그렇소. 나는 카뮤 휴리첼과 아멘가드 휴리첼의 아들이오.”
길시언은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표정을 지으며 뒤로 물러났다. 칼은 길시언을 쳐다보며 묻는 듯한 시선을 보내었고 길시언은 머리를 내두르며 말했다.
“아멘가드 휴리첼은…………, 로넨 휴리첼 백작의 부인입니다.”
넥슨은 어두워지는 하늘을 배경으로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하하하. 그렇지. 난 형의 아내를 사랑한 동생의 핏줄이오. 그리고 형에게 죽은 동생의 핏줄이며, 아버지의 원수를 아버지라 부르며 자라난 자요. 그리고…………, 아버지 의 원수를 아버지로서 사랑하는 자요.”
귓속이 윙윙거리는 느낌이 든다. 입안이 바싹 마른 느낌이 드는데도 신기하게도 침을 삼킬 수 있었다. 겨울 저녁의 바람은 차가웠지만 볼은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뜨 거웠다. 그래서 지독하게 아팠다.
칼이 가장 먼저 정신을 차려 말했다.
“아버지, 로넨 휴리첼을 사랑한다고?”
넥슨의 눈에서 뿜어나오던 빛이 조금 사그라드는 것 같았다.
“난 그분께는 원한이 없소.”
“왜지요?”
“그분은 죽은 아우 대신 날 끔찍하게 위해 주셨으니까. 우리 아버지가 되살아났다 하더라도 자신을 죽인 형의 처사에 대해 뭐라 하지는 않을 거라고 믿소.”
넥슨은 아주 담담하게 말했다. 너무 비현실적으로 담담했다. 칼은 진저리를 치고 나서 말했다.
“당신의 가족사의 불행……………, 뭐라 할말은 없소. 그것에 대해 특별히 평가하고 싶지도 않고.”
“평가? 이 지독하게 추잡스런 이야기에 걸맞은 평가는 바이서스어에는 없을 거요. 자이펀어에는 있을까?”
운차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차분하게 넥슨을 쳐다보았을 뿐이다. 칼은 헛기침을 심하게 하고는 목소리를 가다듬어 말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바이서스의 죄란 말이오? 당신의 불행에 대해선 뭐라 할말이 없지만, 왜 그 대가로 바이서스가 핏값을 지불해야 된다는 거요?”
넥슨은 묵묵히 칼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포기한 듯한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은…… 모르겠소!”
“모른다고?”
“하지만 확실한 이유가 있소. 분명해요. 난 그 이유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하진 못하지만, 그건 많은 부분들이 공백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 이유들로 부터 도출된 결론은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단 말이오.”
“결론…………이라면?”
갑자기 넥슨은 길시언을 쏘아보면서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바이서스는 전대륙의 모든 피조물에 대해 죄를 지었소! 현자 핸드레이크를 우롱하고 일곱 별을 파괴했소! 만약 루트에리노의 마법의 가을이 끝나지 않았던들, 여덟 번째 별, 드래곤의 별마저 파괴되었을 것이오!”
칼은 흠칫하다가 재빨리 냉정을 되찾으면서 튀어나가려던 길시언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길시언은 칼의 손을 사납게 뿌리쳤지만 칼은 다시 한번 그의 어깨를 붙잡았 다. 길시언은 칼에게 붙잡힌 채 넥슨을 노려보았지만 더 이상 다른 행동으로 접어들진 않았다. 칼은 크게 심호흡을 하면서 말했다.
“그 이야기, 그 여덟 별의 이야기는 전에도 네드발 군의 입을 통해 듣긴 들었소. 하지만 난 그런 이야기는 들어보지도 못했고 어떤 문헌에서도 그런 기록은 읽지 못 했소. 여덟 별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이오?”
넥슨은 칼과 길시언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그의 시선은 타고 있던 말의 갈기로 떨어졌다. 그는 저녁 바람에 휘날리는 말갈기를 내려보면서 말했다.
“그것은 별이자 이슬이오. 강력한 힘이자 헐벗은 노예이며 봄날 아지랑이 속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것이오.”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오?”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것이지만 결국엔 아무것도 될 수가 없는 것이오.”
“시간 앞에 모든 것이 그렇지 않소?”
“아냐, 틀려요…………. 시간 앞에 모든 것은 무엇이어야 되지. 유피넬과 헬카네스조차도 행동하고 이바지함으로써 있는 것이지.”
지금 내가 겨울 평원에 서 있는 거야, 신전 고당에 서 있는 거야? 넥슨은 갑자기 빠른 말투로 설명했다.
“물으니 대답해 보시오. 엘프 라자는 왜 없는 거요?”
“뭐요?”
“어째서 드워프 라자는 없는 거요?”
우리는 기막힌 표정으로 넥슨을 바라보았다. 마차에서 내려선 엑셀핸드는 벨트에 손가락을 걸치더니 외쳤다.
“이놈아! 우리 드워프는 얼마든지 말하고 생각할 수 있다. 인간도 모두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겪어본 바로는 대개들 그러하더군. 의사 소통에 골치 아픈 일은 없 더라구. 그런데 왜 라자가 필요하다는 말이냐?”
“그렇소? 그럼 하플링 라자는? 페어리 라자는 어떻소?”
샌슨이 더 못 참겠다는 듯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외쳤다.
“이 자식아! 나 원 참, 하하하! 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어?”
그러나 넥슨은 정말 궁금하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오크 라자는 어떻소?”
다른 사람들이 동시에 떠들어대려고 할 때 제레인트가 앞으로 나섰다. 제레인트는 두 팔을 벌려 다른 사람들의 말을 막더니 손을 허리에 얹고 나서 넥슨을 올려다보 며 말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요?”
“왜 드래곤 라자뿐이지?”
“뭐요?”
“왜 드래곤 라자뿐이지? 엘프 라자도 없고 드워프 라자도 없어. 오크 라자도 없지. 왜 드래곤 라자뿐이지?”
“그거야………, 드래곤은 자신들보다 저급한 다른 생물들과 의사 소통하길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잖습니까?”
“그럼 인간과 드워프, 인간과 엘프는 모두 평등한가 보군?”
제레인트는 주춤하더니 왼손으로 오른손을 받치고는 오른손을 턱으로 가져갔다. 제레인트는 오른손으로 턱을 좌우로 흔들면서 말했다.
“글쎄. 당신의 말을 듣고 있자니 평등하다는 말이 혼란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하는군요.”
“좋은 현상이오. 루트에리노와 여덟 별의 위대한 업적이 있으니 모든 것은 마땅히 혼란스러워야 하오.”
저 친구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누가 나에게 설명 좀 해주지 않을 건가? 그때 넥슨은 고개를 휙 돌리더니 우리 뒤편을 바라보았다.
“추격자들이 있군.”
놀란 우리들은 제각기 마차를 돌아 달려가서는 뒤를 바라보았다. 동쪽 지평선에서는 지금 보름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 밝은 반원을 배경으로 작고 검은 점들이 꼬 물거리고 있었다. 그들의 뒤로 피어오르는 먼지 구름들이 달의 창백한 얼굴에 얼룩을 만들고 있었다.
“그 녀석들이잇!”
샌슨의 신음소리에 이어 넥슨의 말이 이어졌다.
“누구요? 아니….., 멍청한 질문이군. 할슈타일이지?”
누가 고개를 끄덕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누군가 넥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모양이다. 넥슨은 갑자기 마차 옆으로 달려나갔다. 칼이 당황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보시오, 넥슨!”
넥슨은 말을 옆으로 돌렸다. 이제 넥슨은 우리들과 보름달 사이에 선 채로 검은 실루엣으로 서 있었다. 보이지 않는 그의 입이 움직였다.
“크라드메서의 웨이크닝은 얼마 남지 않았을 테고, 그렇다면 후작이 직접 오겠군. 후작은 나에게 지불하지 않은 계산서를 가지고 있소.”
넥슨의 얼굴은 하나도 알아볼 수 없었다. 희미한 푸른 기가 도는 밤하늘은 너무 어둡고 보름달의 빛은 너무 강렬하다. 넥슨은 여전히 그림자로 선 채 말했다.
“따라오겠나, 하슬러, 자크?”
우리는 말 한마디 꺼낼 엄두를 내지 못한 채 여전히 뒤에 서 있던 하슬러와 자크를 돌아보았다. 그들의 모습은 이제 분간하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그러나 하슬러의 말이 움직이면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하슬러는 넥슨의 뒤를 따라 천천히 걸어갔다. 그때 네리아가 커다랗게 고함을 질렀다.
“안 돼요! 당신은 가면 안 돼, 하슬러!”
하슬러는 멈칫했다. 달빛이 그의 어깨에 부서지며 외로운 사내를 더욱 고독한 모습으로 만들었다. 네리아는 젖은 목소리로 외쳤다.
“안 돼, 당신은, 당신은 안 돼요! 우리가 에포닌을 데리고 있어요!”
하슬러의 그림자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한마디의 말도, 한 동작의 흐트러짐도 없이 하슬러는 달빛 내리는 땅을 밟고 굳어 있었다. 그때 마차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며 나타난 것은 에포닌이었다. 달빛을 정면으로 받고 있는 에포닌의 얼굴엔 혼란스러운 표정이 떠오르고 있었다.
“설마…………? 설마?”
에포닌은 단지 두 마디만을 반복해서 말했다. 그것은 주위에 있던 모든 사나이를 전율하게 만들었지만 한 사나이를 행동하게 만들었다.
하슬러는 다시 몸을 돌려 넥슨에게로 걸어갔다.
남겨진 에포닌은 젖은 눈망울을 달빛에 반짝거리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아냐. 저 사람은…………, 아니에요. 우리 아빠가 아니에요…………. 이상한 말을 하지 말아요…………. 이상한 생각이 들게 하지 말아요.”
하슬러의 등이 흔들린 것일까, 내 눈이 흔들린 것일까? 보름달은 미친 듯이 부풀어올랐고 까마득하던 검은 점들은 여전히 꼬물거리면서 점점 커지고 있었다. 넥슨의 그림자에서 그 머리 부분이 좌우로 흔들렸다.
“돌아가라, 하슬러.”
하슬러의 음영은 넥슨의 음영을 바라보았다. 넥슨의 보이지 않는 입에서는 침착하고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의 봉사엔 고맙게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너의 소망을 들어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난 길드를 잃었고, 힘을 잃었고, 나 자신을 잃었다.”
잠시 평야를 스치는 바람만이 절대의 힘을 꿈틀거렸다. 그러나 하슬러가 입을 연 순간 바람소리도, 풀잎의 휘파람소리도 다 사라져버렸다.
“나는 잃지 않으셨습니다.”
“아빠!”
에포닌의 찢어지는 비명소리. 그러나 하슬러는 여전히 고개 돌리지 않았다. 그는 넥슨만을 바라보며 말했다.
“가시죠. 주인님.”
넥슨은 벌컥 화를 내려는 듯이 팔을 들어올렸다. 그러나 그의 팔은 반도 올라오지 못했다. 넥슨은 힘없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자크를 바라보았다. “자크?”
우리 뒤편에 서 있었던 자크는 달빛에 우울한 얼굴을 떠올리며 말했다.
“썅, 마스터. 이제 위대하신 넥슨 대왕과 약간 덜 위대하신 자크는, 날샌 거죠?”
“그래. 날샜다.”
자크는 건조한 음성으로 말했다.
“니미, 우리 아버지가 항상 말하길 하드 베팅은 신세 파탄의 지름길이라 했죠. 그리고 또 말하길 거물들의 일에 함부로 끼어들지 말라고도 했어요. 퉤! 하지만 우리 아버지는 자기 말도 못 지켰어요. 뭐, 항상 그랬긴 하지만. 그리고 난 아버지를 본받는 착한 아들이란 말이야. 이랴!”
자크는 말을 달려나가게 하더니 하슬러의 옆, 넥슨의 반대편에 섰다. 넥슨, 하슬러, 그리고 자크 세 남자는 이제 달빛을 배경으로 나란히 서 있었다. 자크의 약간 높 은 음성이 들려왔다.
“갑시다, 엉터리 반란자 양반. 우리 아버지도, 우리 할아버지도 죽게 만들었으니, 당신 관뚜껑은 내가 덮어줘야 하지 않겠어. 그러려면 죽을 때까지 따라다녀야 할 테고. 제길, 내 신세가 왜 이리 따분하게 되었담. 언젠가는 트라이던트의 네리아를 꼼짝달싹 못하게 만든 다음 진하게 키스해 버릴 희망으로 살아가던 바이서스 임펠 의 잘 나가던 자크였는데.”
넥슨의 그림자가 조금 흔들렸다. 웃음을 터뜨리려는 것이다. 하지만 웃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네리아는 마차 벽에 힘없이 등을 기댄 채 멍한 얼굴 로 자크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크의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갑시다, 마스터. 하지만 노인은 필요없다고 보는데. 특히 애 딸린 홀아비는. 우리 상큼한 미혼끼리 같이 가도록 하십시다.”
“좋은 생각이다.”
자크의 손이 하슬러의 어깨를 잡아누르는 순간 넥슨의 손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퍽! 둘 사이에 끼여 있던 하슬러는 그대로 넥슨의 롱소드 폼멜에 목 뒤를 찍히고는 안장에 풀썩 쓰러졌다. 자크는 작게 환호를 질렀다.
“야호! 하슬러 아저씨도 잡을 수 있군, 그래? 역시 눈빛만으로 통하는 마스터와 길드원에겐 누구도 못 당해. 하하하!”
자크는 그렇게 환영받기를 갈망하지만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할 중얼거림만 남겨놓고는 가볍게 앞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넥슨은 잠시 안장에 쓰러진 하슬러를 내려다보더니 우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보름달은 이제 땅을 박차고 올랐으며 넥슨의 얼굴은 여전히 깜깜했다.
“하슬러를 데리고 가시오. 그리고 나 예언 하나 하지. 이 모든 일이 끝날 무렵이면, 당신들은 나보다도 훨씬 이 모든 일들에 대해 잘 알게 될 거요. 그러니 지금은 아 무 소리 하지 마시오.”
넥슨은 그대로 몸을 돌린 다음 우리에게 등을 보인 채로 몇 마디를 더했다.
“하지만……………, 진실을 알게 됨으로써 당신들이 꼭 행복해지지는 않을 거요.”
우리는 모두 미동도 하지 않았다. 넥슨은 불길한 예언을 남기고는 먼저 달려간 자크의 뒤를 따라 달려가기 시작했다. 막 하룻밤의 여정을 시작한 달은 사위를 은광으 로 물들이기 시작했고, 그 아래 두 남자의 그림자는 월광에 녹아가듯 흔들리며 아득하게 멀어져갔다.
<7권에서 계속>